경쟁입찰

참여정부 다른정권에 떠넘기려

토건종식3 2010. 5. 1. 19:21
[실록 부동산정책 40년 (19)] ‘바뀐 것’과 ‘바꿀 수 없는 것' 2007-03-29 09:02:00

 

 

지난 40년 동안 우리사회는 부동산시장 안정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왔지만 경기흐름에 따라 오락가락했던 정책관행, 개발·투기이익을 제대로 환수하지 못하는 미흡한 제도, 재정·공공부문의 역할 미비 등으로 인해 오히려 ‘부동산 불패’라는 잘못된 믿음을 키워왔다.

참여정부는 뿌리 깊은 불패신화를 꺾고, 시장의 기초질서를 바로 잡기 위해 그동안 투기꾼들의 저항과 이해관계에 밀려 좌초됐던 정책들을 일관되게 추진해왔다. 앞으로 부동산정책사를 쓸 때 적어도 조세형평성과 부동산시장 투명화에 관한 한 참여정부 이전과 이후는 확연히 구분될 것이다.

그러나 택지확보에서 주택분양까지 걸리는 공급시차와 과잉 유동성에 선제적으로 대응하지 못함으로써 시장불안을 초래한 점은 아쉬운 부분이다. 이는 앞으로 부동산정책을 세울 때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점이다.

참여정부는 그동안 재정 부족을 이유로 방치됐던 서민주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재정과 공공부문의 역할을 강화하는 획기적 전기를 마련했다. 소위 ‘정책의 발상 전환’인 셈이다. 주거복지 차원에서 재정·공공부문의 역할 강화는 민간 투기자금의 흐름에 따라 오락가락했던 과거 정책관행을 불식하고, 일관된 정책 수행을 위한 확고한 토대가 될 것이다.

왜 올랐나 - 과잉 유동성과 주택공급 부족

1970년대 후반, 1980년 후반, 2001년∼최근까지 등 과거 3차례 부동산가격 급등기에는 모두 시중에 돈이 너무 많이 풀리고, 주택공급이 부족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부동산가격이 급등할 때는 항상 주택공급 부족과 시중 유동성 과잉이 원인이었다. 사진은 1990년대 초 주택 200만호 계획에 따라 건설중인 산본신도시 모습.

1970년대 후반 1차 급등기에는 급속한 경제성장으로 농촌을 떠난 사람들이 도시로 몰려들면서 도시 주택난이 갈수록 악화됐고, 마침 1970년대 말 중동특수로 벌어들인 오일달러가 시중에 풀리면서 부동산가격이 폭등했다.
한동안 잠잠했던 부동산가격은 1980년대 말 2차 급등기를 맞는다. 이 때 역시 1980년대 초반 경기침체로 주택공급이 충분치 않아 집이 부족한데다 1986~88년까지 3저호황에 따른 대규모 국제수지 흑자로 시중에 돈이 넘쳐났던 것이 원인이었다.

2001년 말∼최근까지 지속되는 3차 급등기는 과거 1, 2차 급등기가 전국적 현상으로 지속기간이 2~3년에 불과했던 것에 비해 서울과 수도권을 중심으로 한 국지적 현상인데다 가격상승 국면이 오래 지속된다는 점이 특징이다. 그만큼 부동산시장에 내성이 생겼다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는 부분이다.

3차 급등기의 원인은 IMF외환 위기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IMF외환위기로 경기가 급속히 위축되자 당시 정부는 경기를 살리기 위해 전방위로 부동산경기 활성화시책을 추진한다. 이 때 분양가규제 폐지, 분양권 전매 허용, 소형의무비율 완화, 취득·등록세 및 양도세 완화, 대출이자에 대한 소득세 감면 등 대대적인 규제완화가 이뤄졌다.

당시 경기를 살려야 한다는 절박함은 충분히 납득할 수 있지만 투기를 막기 위한 필수규제마저 마구잡이로 풀어버린 결과 유례없는 장기 상승이라는 결과를 초래하고 만 것이다.

여기에 IMF 외환위기 이후 충분히 택지를 확보하지 못한 것이 시차를 두고 집값 상승으로 이어졌다. 또 2000년 이후 계속된 저금리 기조로 엄청나게 풀린 시중 유동자금이 부동산시장으로 몰려들었다.

어떤 의미에서 참여정부는 부동산가격이 급등할 수밖에 없는 ‘나쁜 조건’을 모두 물려받은 셈이다. 따라서 참여정부는 이전 정부에서 마구잡이로 풀린 필수규제를 제자리로 돌려놓고, 택지확보 부족분을 다시 정상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노력했다.

왜 ‘불패 신화’인가 - 투기이익환수 미비와 냉·온탕정책

1967년 ‘부동산투기억제세’(양도차익의 50% 과세) 도입을 시작으로 지난 40년 동안 발표된 부동산정책만 모두 60차례에 달하지만 부동산불패 신화는 아직도 모진 생명력을 이어가고 있다.

숱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불패신화가 꺾이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먼저 전체 자산의 80% 가까이 부동산에 쏠려 있는 우리나라 가계자산 구조는 국민들로 하여금 부동산가격 안정보다 상승을 선호하도록 만들었다.

통계청의 가계자산조사에 따르면 2006년 6월 현재 우리나라 가구당 평균 총자산은 2억8112만원이며, 이중 부동산자산의 비중이 76.8%(2억1604만원)에 달했다.
이 같은 부동산자산의 비중은 미국(2005년 기준, 삼성금융연구소 조사) 39%, 일본(2004년) 42%에 비해 매우 높은 수준이다.

이처럼 거의 전 재산을 부동산에 묻어둠으로써 겉으로는 부동산투기를 비난하면서도 속으로는 가격상승을 바라는 독특한 이중심리는 결과적으로 불패 신화를 지탱하는 강력한 사회심리적 기반으로 작용했다.

여기에 단기간 경제성장을 이루기 위한 지역간 불균형 개발, 특히 수도권 집중현상이 일부 지역의 만성적인 주택부족을 야기한데다 지나치게 낮은 보유세 등 불로소득을 제대로 환수하지 못하는 미흡한 제도와 정책이 우리사회에 ‘부동산불패’라는 잘못된 믿음을 심어주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국민소득이 낮은 시절에 담세능력이나 정치적 고려로 보유세를 높게 부과하지 못했던 것이 결과적으로 다주택 소유를 부추겼고, 부동산가격 상승기에는 더욱 투기수요를 자극하는 요인이 됐던 것이다.

또 역대 정부의 일관성 없는 부동산정책은 부동산불패 신화의 불길을 키우는 연료 구실을 했다.
과열기 때는 규제를 강화하고, 침체기 때는 규제를 푸는 방식으로 경기진작효과가 큰 부동산시장을 만지작거리는 방식으로 수십 년을 반복하다보니 투기꾼들은 아무리 강한 규제가 와도 조금만 기다리면 경기부양이라는 명분으로 다시 규제가 풀린다는 사실을 오랜 경험을 통해 체득하면서 정부정책에 대한 신뢰가 땅에 떨어졌던 것이다.

특히 부동산시장이 경기조절수단으로 자주 활용된 것은 우리나라 주택공급체제가 구조적으로 민간 투기자금에 의존했기 때문이다.
역대 정부는 급속한 산업화가 최우선 과제였기 때문에 주택부문의 공공투자 부족을 민간기업으로 하여금 집을 많이 짓게 하는 방식으로 메우기 위해 인위적으로 투기를 일으킬 필요가 생겼고, 이 과정에서 투기광풍이 불면 다시 규제를 강화하는 식으로 주기적으로 정책을 뒤집었다.


주거문제를 순전히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그동안의 정책관행은 개인들로 하여금 필사적으로 내 집 갖기에 집착하도록 하는 ‘소유 중심의 주거문화’를 만드는데 일조했다.

적은 돈으로 편하게 살 수 있는 공공 임대주택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에 대다수 국민들은 주택소유 외에는 달리 대안이 없었다. 결국 주거복지에 대한 정책적 무관심은 대다수 국민들의 가슴 속에 ‘그래도 믿을 것은 부동산 밖에 없다’는 불패신화가 뿌리내리는 계기가 됐던 것이다.

성과는-조세 형평성과 시장 투명성

지난 40년간의 잘못된 정책관행에 대한 반성과 성찰을 바탕으로 항구적인 시장안정을 위한 기초질서 확립에 주력했던 참여정부는 조세형평성·시장투명성 제고와 주거복지 분야에서 뚜렷한 성과를 거뒀다.

2003년 2월 출범한 참여정부는 △조세 형평성과 시장 투명성 제고 △안정적 주택공급 △수요억제·전환 △주거복지 향상 등 4대 정책 목표를 설정, 그동안 10여 차례의 부동산정책을 발표했다.

4대 정책목표는 2002년 말 대선공약으로 제시된 ‘가수요 차단과 불로소득 과세 강화를 통한 부동산투기 억제’, ‘공공임대 확충 등을 통한 서민주거 안정’ 등 2가지 기본 방향을 구체화한 것이다.


참여정부는 종부세 강화 등을 통해 ‘많은 재산을 가진 사람이 많은 세금을 낸다’는 조세형평성의 원칙을 확립했고, 이를 통해 투기수요 차단을 위한 토대를 마련했다.
또 실거래가 신고 의무화, 양도세 실가과세 등 부동산시장 투명화의 기반을 다졌다.

1967년 우리나라 최초의 부동산정책인 ‘투기억제세’ 이후 각종 사회적 저항에 부딪혀 번번이 도입이 좌절됐던 정책들이 40년의 세월을 돌아 참여정부 들어 겨우 실현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앞으로 부동산정책사를 쓸 때 적어도 부동산시장 투명화와 조세형평성에 관한 한 참여정부 이전과 이후는 확연히 구분될 것이다.

역대 정부에서 ‘돈 문제’ 때문에 항상 우선순위에 밀렸던 공공 임대주택 확충계획을 착실히 추진했던 점도 평가할 만한 대목이다.

그동안의 임대주택정책은 주택공급정책의 종속적인 수단으로 활용됨으로써 언제나 건설계획은 의욕적으로 제시됐지만 재정여건이 악화되면 가장 먼저 사업이 축소되거나 조정되곤 했다. 또 분양위주의 자가(自家)촉진 정책이 우선됨으로써 임대주택 재고 확충이 충분하지 못했다.
이에 따라 2004년 말 기준으로 우리나라의 10년 이상 장기 공공 임대주택은 전체 주택의 2.7%에 불과한 실정이었다.

참여정부는 2003년 5월 ‘주거복지 로드맵’을 세우고, 2006년 말까지 4년간 국민임대주택 총 39만여 호를 건설했다. 이는 당초 계획(5년간 50만호)에 비춰봤을 때 4년 성적으로 91.3%의 실적을 올린 것이다.

물량위주 공급관행을 탈피하기 위해 다세대·다가구 매입임대, 전세임대 등 도심 내 임대주택도 크게 늘렸다. 2006년 말까지 확보량은 1만8000호 가량.
또 10년 후인 2017년까지 공공 임대주택 비중을 선진국 수준인 전체 가구의 20%까지 확보한다는 중장기계획을 마련했다.
이를 위해 연기금, 우체국, 보험사, 투신 등이 참여하는 임대주택펀드를 구성, 2006∼2019년까지 연평균 7조원, 총 91조원의 자금을 조달할 계획이다.

미흡했던 점-공급시차 관리와 대출규제

참여정부는 조세형평성·시장투명성 제고와 주거복지 분야에서 뚜렷한 성과를 올렸지만 과잉 유동성으로 인한 가격불안과 공급시차로 인한 일시적 수급불균형을 선제적으로 관리하는 데는 약간의 시행착오를 겪었다.

2005년 8·31정책의 경우 향후 5년간 공공택지 1500만평 확보라는 총량적 계획은 있었지만 세부적으로 택지공급에서 분양까지 걸리는 공급시차에 대한 대비가 부족했고, 규제에 따른 민간 공급 위축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했다.

참여정부 들어 수도권 주택공급이 감소한데는 IMF 외환위기 이후 경기부진의 여파로 1998~2002년까지 확보한 수도권 공공택지가 크게 줄어든 영향이 크다. 이 시절 공공택지 확보량은 연평균 360만평으로, 문민정부(1993~1997년)시절 실적의 81%에 불과하다.

택지확보에서 분양까지의 공급시차를 감안하면 이 시절 택지확보 부족분은 이후 시차를 두고 주택공급 부족을 초래하는 요인이 된다. 이후 2004년부터 공공택지 확보량은 연평균 600만평 이상으로 늘어났지만 역시 주택분양·입주까지 걸리는 시차로 인해 즉각적인 수급안정 효과는 나타나지 않았다.

여기에 2000년 준농림지 폐지 이후 민간택지 부족, 2003년 도심지 다세대·다가구주택의 일조권, 주차장 설치기준 강화로 인한 공급위축 등이 수급불안을 불러왔다.

이에 따라 2006년 11·15대책에서는 민간 주택공급을 늘리기 위해 수도권 재정비촉진지구 및 뉴타운에서 2012년까지 36만호를 공급하고, 계획관리지역 내 2종 지구단위계획구역의 용적율을 종전 150%에서 180%로 늘리는 등 다양한 대책을 내놓았다.
이러한 도심재정비, 규제완화 등을 통한 공급확대 효과는 다음 정부 들어 본격적으로 나타날 전망이다.

2007년 1·31대책은 채무상환능력에 따라 은행대출을 엄격히 규제하기 시작했다. 2000년 이후 저금리 기조로 인해 시중에 풀린 유동자금은 부동산시장 불안의 주요원인이었다.

투기수요 억제에 주력했지만 정작 문제가 된 은행대출 규제가 적시에 이뤄지지 못한 점도 아쉬운 부분이다.
2000년 말 54조2000억원에 불과했던 은행권 주택담보대출은 2006년 상반기 말 200조8000억원으로, 6년여 만에 4배가량 불어났다.

과거 집값 급등기에는 시중에 너무 많은 돈이 풀렸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2000년 이후 전 세계적인 저금리 기조 속에 우리나라도 저금리로 인한 시중 부동자금이 크게 늘었다. 이는 당시 경기침체에 대한 우려 때문에 통화금융정책에 급격한 변화를 주는데 어려움이 있었던 데다 IMF 외환위기 이후 기업대출수요 감소 등으로 은행들이 상대적으로 위험부담이 적은 가계 주택담보대출에 치중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주택 매수수요가 늘었고, 이 과정에서 다주택자들에 대한 대출규제가 충분치 못했다.

2007년 1·11대책에 이르러서야 다주택자에 대한 주택담보대출 규제 강화가 유효한 정책수단으로 등장한다. 곧이어 1·31대책에서는 투기지역과 투기과열지구의 총부채상환비율(DTI) 규제를 40%로 강화하는 등 그동안 집값 불안의 주요원인이었던 ‘돈 구멍’을 조절하는 정책이 본격화됐다.

가장 중요한 교훈-정책 일관성

지난 40년의 세월 동안 여러 우여곡절을 겪으며 가까스로 빛을 본 주요 정책들이 앞으로 본격적으로 효과를 내려면 무엇보다 일관된 정책 추진이 중요하다.

특히 단기 경기부양책으로 부동산부문을 활용하는 과거 정책관행과 단호히 결별해야 할 것이다.
부동산정책을 경기조절수단으로 활용할 경우 자금이 단기부동화돼 생산적 부문으로의 유입이 억제되며, 이로 인한 투기과열은 노동윤리의 상실, 소득구조의 양극화를 초래한다. 건설부동산업의 경쟁력 강화를 위한 구조조정이 지연돼 국민경제의 기반이 약화되는 부작용도 뒤따른다.
따라서 보유세 강화, 양도소득세 등 불로소득을 환수하는 정책기조는 경기흐름에 관계없이 일관되게 유지돼야 한다.

또 실거래가 신고제, 과표현실화 등은 부동산시장 안정의 전제조건인 시장 투명화의 토대이자 경제정의를 위한 기본요건인 만큼 더 치밀하게 다듬고 유지해야 한다.

전체 가구의 절반가량을 차지하는 무주택 서민들이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전·월세값 폭등에 휘둘리지 않도록 이들을 위한 장기 임대주택 건설 등 주거복지 정책도 그 기조가 바뀔 수 없다.

부동산가격 불안의 주요 원인인 돈줄(과잉 유동성)을 관리하기 위해 담보가치 위주의 대출보다 소득 위주의 대출 기준이 정착되도록 노력하고, 장기적으로 시중 유동자금이 산업계로 흘러들어가도록 각종 유인책을 마련하는 전략도 숙제다.

한편 민간공급 위축을 보완하기 위해 공공부문의 역할을 강화하는 최근의 정책 방향에 대해 일부 시장론자들의 우려가 적지 않다. 심지어 정부는 부동산시장에서 아예 손을 떼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미래-주거복지정책을 향하여

그러나 국민들에게 최소한의 주거수준을 보장하고, 주거비 부담이 가중되지 않도록 하는 것은 현대 복지국가의 최소한의 의무일 뿐 아니라 주택은 공급시차(공급의 비탄력성) 등으로 인해 시장실패가 쉬운 만큼 이를 보정하기 위해 일정하게 정부가 개입하는 것은 불가피하다.

부동산시장 안정을 위해서는 단기 경기부양책으로 부동산부문을 활용하는 과거 정책관행과 단호히 결별해야 한다.

또 부동산 소유편중에 따른 자산양극화, 부동산투기에 의한 불로소득 등이 그대로 방치되면 사회통합에도 지장을 주기 때문에 시장에 모든 것을 맡겨야 한다는 주장은 무책임하다.

다만 정부는 공공부문 비대화에 따른 비효율과 이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민간 구축효과의 부작용을 적절히 관리하는 대책을 지속적으로 마련해야 할 것이다.

지난 1월부터 국민과 언론의 큰 관심 속에 연재를 시작한 <실록 부동산정책 40년>은 지난 40년간의 부동산정책의 역사를 되짚어보면서 부동산불패의 신화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꼼꼼히 확인하고, ‘지금, 여기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위해 과거 정책으로부터 교훈과 정책적 시사점을 얻고자 했다.

불패신화와 싸워왔던 지난 40년의 역사는 숱한 유혹과 좌절의 과정이었으며, 정책의 일관성이 흔들릴 때마다 어김없이 부동산투기가 들불처럼 일어났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어떤 일이 있어도 투기는 용납하지 않는다’는 국민적 합의를 바탕으로 개개인 모두가 정책의 감시자이자 수호자로 발 벗고 나서야 하는 이유이다.

 | 특별기획팀 | 등록일 : 2007.03.28

 

 

역대 정부에서 못한 것 했다” VS “시장위축 우려”
전문가 17명에게 물어 본 참여정부 부동산 정책 평가

 

우리나라 부동산 전문가들은 참여정부의 4가지 부동산정책 목표 중 △조세형평성·시장투명성 제고 △주거복지 향상 분야에 높은 점수를 주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시장기능을 중시하는 전문가일수록 규제로 인한 시장위축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많았다.

특히 다음 정부가 견지해야 할 부동산정책의 원칙으로 △정책 일관성 △전·월세 서민주거대책 △유동성 관리 △공공과 민간의 역할 재정립 등을 꼽았다.

이 같은 평가는 <실록 부동산정책 40년> 특별기획팀이 지난 2월 중순~3월 중순까지 학계, 언론계 등 전문가 17명을 대상으로 심층 설문조사한 결과이다.

설문조사는 △과거 부동산정책 △참여정부 부동산정책 △시사점과 앞으로 과제 등 3개 분야로 나눠 마련된 5가지 질문에 대해 전문가들이 직접 답변을 작성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 전문가 의견수렴 설문지는 기사 맨 아래 첨부된 파일을 열면 볼 수 있습니다)

“시장 선진화, 서민주거 안정에서 큰 성과”

참여정부 부동산정책을 평가해달라는 질문에 대해 전문가들은 △조세형평성·시장투명성 제고 △주거복지 분야에서 큰 진전을 이뤘다고 평가했다.

변창흠 교수는 “참여정부 부동산정책 중 역사적으로 가장 높은 평가를 받아야 하는 정책은 실거래가 신고제, 과표현실화율 제고, 다주택보유에 대한 중과제도 등 시장투명성과 조세형평성 제고정책”이라고 말했다.

김용창 교수는 “시장투명성과 조세형평성 측면에서 부동산실거래가 시스템의 도입과 부동산정보망의 구축, 보유세 강화와 거래관련 조세의 인하 등 지난 정부에서 하지 못했던 기반을 구축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급격한 정책 변화에 따른 부작용을 지적하는 유보적인 입장도 있었다.
“정책효과를 단기간에 극대화하려는 조급증으로 인한 ‘과속’의 문제는 목표설정의 정당성에도 불구하고 불필요한 조세저항을 유발해 갈등을 불러올 수 있다는 점에서 신중한 정책판단이 요구된다”(강황식 차장)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참여정부 부동산정책의 성과로 조세형평성·시장투명성 제고와 주거복지 향상을 꼽았지만 위축된 시장기능을 살려야 한다는 주장도 적지 않았다. 사진은 2005년 한 시민단체 주최로 열린 부동산정책 토론회 장면.

‘돈 문제’ 때문에 항상 우선순위가 밀렸던 공공 임대주택 건설 등 서민주거 안정 분야에서도 확고한 정책의지를 드러냈다는 평가다.
임서환 선임연구위원은 “주택정책에서 참여정부가 한 가장 큰 기여중 하나는 주거빈곤층을 위한 실질적 주거대책에 대해 고민하고 대책을 강구하기 시작한 것”이라며 “차기 정부에서도 이를 더 발전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시장기능 위축 우려”

그러나 4대 목표 중 투기수요 억제정책은 주택공급 위축, 거래위축 등의 부작용을 가져올 수 있다는 점에서 부정적인 의견이 적지 않았다.

이정전 교수는 “참여정부는 부동산투기억제에 지나치게 집착해 너무 많은 제도들을 즉흥적으로 남발했다”며 “예컨대 양도소득세 중과는 부동산가격을 떨어뜨리기보다는 전가를 통해 부동산가격을 높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조주현 부동산대학원장은 “공급보다는 수요억제 중심의 정책으로 인해 필요한 주택이 공급되지 못했다”며 “공급에 대한 양적 접근과 공공부문 역할의 지나친 강화로 인한 주택수급의 질적 부조화, 이로 인한 주택가격의 지속적 상승이 벌어졌다”고 말했다.

집값 상승의 주요 원인인 돈줄을 죄는 정책의 타이밍이 늦었다는 지적도 있었다.

강황식 차장은 “금리정책의 경우 다른 경제부문에 미칠 영향 때문에 정책 운용에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는 점을 인정하지만 부동자금을 생산적 부문으로 유도하는 방안을 마련하지 못하고, 총부채상환비율(DTI) 규제 등 소득과 연계한 주택담보대출 관리 등 금융대책을 적기에 시행하지 못한 점이 아쉽다”고 지적했다.

“정책 일관성 유지돼야”

전문가들은 “다음 정부가 견지해야 할 부동산정책의 원칙과 향후 보완해야 할 점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정책 일관성’을 꼽는 경우가 많았다.

다음 정부가 들어서도 일관되게 유지해야 할 정책으로는 ‘보유세 강화, 양도소득세 등 불로소득 환수제도’(김용창 교수)나 ‘실거래가 신고제, 과표현실화, 개발이익 환수 등의 정책’(임서환 선임연구위원)을 꼽았다.
이밖에 ‘서민 주거안정’과 ‘시중 유동성 관리’에 좀 더 주력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그러나 민간공급 위축을 보완하기 위해 공공부문의 역할을 강화하려는 최근의 정책 방향에 대해서는 시장의 자리를 정부가 대체하지 않도록 “양자간 적절한 역할 재정립이 필요하다”(차학봉 팀장)는 의견이 나왔다. 이러한 의견은 대체로 시장의 기능을 보다 활성화시켜야 한다는 입장으로 모아진다.

또 “정확한 수요분석 없는 무리한 공급확대 정책은 향후 특정지역에서의 주택 초과공급을 유발할 수 있는 만큼 버블이 갑자기 푹 꺼지지 않도록 세심한 대책이 필요하다”(박덕배 선임연구위원)는 의견도 있었다.

                                                                                                  | 특별기획팀 | 등록일 : 2007.03.28

 

 

[실록 부동산정책40년(20)] 전·월세 보호대책의 어제와 오늘 2007-04-10 10:12:51

 

88 서울올림픽 직후부터 1990년 초까지 이어진 부동산 투기열풍과 전월세 값 폭등은 서민생활을 벼랑으로 내몰았다.

1980년대 후반 전셋값 폭등은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됐다. 이를 다룬 중앙일보 1989년 3월 22일자 1면 기획기사
치솟는 전월세 임대료와 생활고를 견디다 못해 목숨을 끊는 자살 사건이 연일 신문 사회면을 장식했고, 이들이 남긴 유서는 수많은 서민의 절망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전세대란에 세입자 자살 도미노


"폭등하는 부동산 가격에 내 집 마련의 꿈은 고사하고 매년 오른 집세도 충당할 수 없는 서민의 비애를 자식들에게는 느끼게 하고 싶지 않다.”
1990년 4월10일 서울 천호동 반지하 4평짜리 단칸방에서 보증금 50만원·월세9만원의 셋방살림을 하던 40대 가장과 부인, 7, 8살 자녀 등 일가족 4명이 치솟는 전세값 때문에 방을 얻지 못해 동반 자살한 참극은 ‘집 없는 설움’을 넘어 생존의 사선으로까지 내몰린 서민의 삶을 상징했다.

그해 전세값 파동은 두 달 남짓한 기간 17명의 세입자들이 잇달아 목숨을 끊는 ‘자살 도미노’로 이어졌고,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서는 이들을 기리는 ‘희생세입자합동추도식’까지 열렸다.

일선 경찰서와 신문사 사회부 기자들은 자고 일어나면 혹시 전세값 때문에 목숨을 끊은 사람이 있을까 촉각을 곤두세워야 했다. 시민단체들은 ‘전월세값 안올리기 운동’까지 벌였다.

국세청이 직접 전세값 단속에 나섰고, 일선 구청과 동사무소에는 전세금 부당인상 신고센터가 설치됐다. 그해 건설부가 국회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1986년 말~1990년 2월말까지 3년2개월 동안 전국 도시지역의 주택 매매가격은 평균 47.3% 오른데 비해 전세값은 이보다 34.9%포인트 높은 82.2%나 올랐다.

대책은 붉은 벽돌의 다가구 주택


하지만 당시는 경제침체가 우려되던 시기였다. 정부는 전세파동보다는 물가대책에 관심을 기울였으며, 실물경제전문가라고 불리던 이승윤 경제팀은 첫 작품으로 ‘4ㆍ4경제활성화대책’을 내놓았을 뿐이다.

4.4 대책이 성장력 배양에만 치우쳐 부동산투기와 물가불안을 방치하고 있다는 여론의 호된 비판을 받자 정부는 특단의 대책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특히 부동산문제가 더 시급하다는 최고위층의 지적에 따라 물가대책은 미루고 대신 부동산 대책 발표를 앞당기기로 했다.

며칠 후 모든 아이디어를 짜내 서둘러 발표된 이른바 ‘4.13 부동산 투기 억제대책’에는 ‘전세가격 안정’을 위한 5가지 방안이 담겼다.
임대용 다가구주택 건설을 촉진하기 위해 당시 동당 연건축면적 100평 이하 3층 이하인 건축규제를 20평 이하 4층 이하로 완화했다. 또 △다가구주택 건축 때 건물분 재산세 대폭완화 △다가구주택 취득 때 100평초과 호화주택에 적용되는 취득세 7.5배 중과배제 △국민주택기금의 다가구주택 동당 지원규모 확대 △보험회사 총운용자산의 일정비율을 다가구주택 건설자금으로 지원 등 전월세용 다가구 주택 건설 촉진을 위한 대폭적인 규제 완화와 지원책이 나왔다.

1980년대 후반 전월세시장 안정을 위해 다세대·다가구주택 규제가 대폭 완화됐다. 사진은 다세대주택이 빼꼭히 들어선 서초구 방배동 주택가 모습.


서민의 보금자리 달동네 사라지며


지금 서울 어디나 즐비한 빨간 벽돌의 3~4층짜리 다가구주택은 이렇게 해서 도시의 골목풍경을 바꿔놓았다. 다가구주택이 전월세 시장 안정에 일정하게 ‘효자’노릇을 했지만, 몇 년 후 무분별한 건축으로 도심 슬럼화를 초래할지는 당시 아무도 몰랐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주택 및 전세가격의 상승률이 공식 조사된 것은 1986년 1월이다. 이후 주택은행(현 국민은행)이 매달 가격동향을 발표하고 있다.

1987년 전년대비 전세가격 상승률은 19.4%로, 지금까지 이 기록은 깨지지 않았다. 1988년 상승률 역시 13.2%에 달해 2년간 상승률이 32.6%였다. 특히 주택부족이 극심한 서울의 전세값 상승은 더욱 심각했다. 갑자기 500만원 또는 1000만원 가량 오른 전셋값을 감당하지 못해 지하셋방, 달동네, 도시외곽으로 밀려나는 세입자들의 불만이 하늘을 찔렀다.

특히 당시는 이미 합동 재개발이 활성화되면서 달동네 지역이 점차 중산층 주거지역으로 변모해 가고 있던 중이라 저렴한 전셋집 찾기가 쉽지 않았다. 1989년 4월 27일 영구(7~12평)임대주택 25만호, 소형(10~15평)장기임대주택 등을 포함한 주택 200만호 공급계획이 발표됐지만 무주택 서민들의 고통은 줄지 않았다.

전세기간 2년 이상으로 법 개정


당시 언론은 “만약 모든 국회의원과 정부의 고위관리들이 셋방살이를 하고 있다면 다락같이 오르는 전세와 사글세를 요즘처럼 속수무책으로 보고만 있었을까. (중략) 민생문제를 중시하는 국회라면 주택임대차보호법 개정문제를 심각하게 고려했어야 했고, 아파트 분양가 현실화를 전격 발표할 정도로 주택가격 문제에 신경을 써온 정부라면 당연히 집세의 안정대책도 늦기 전에 내놓았어야 했다”고 정부를 질타했다.

정부는 1989년 5월 주택임대차기간을 1년에서 2년으로 늘리는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 그해 12월30일 통과됐다.

하지만 주택임대차보호법이 개정된 직후인 1990년 초부터 집주인들이 2년치 임대료를 한꺼번에 올리는 바람에 전세값이 오히려 폭등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당시 이 법은 갖가지 ‘원망’과 ‘탄식’의 표적이 되다시피 했다.

신도시 대기용 전세수요까지 겹쳐


물론 임대차보호법 개정이 임대료 폭등의 근본 원인은 아니었다. 1990년 당시는 자기집에 거주하는 가구의 비율이 49.9%에 불과한다데 분당 등 신도시 입주를 바라는 일시적 대기수요까지 가세해 임대수요가 컸던 시기였다. 따라서 임대기간 연장 외에도 시장 상황상 임대료 급등이 예상되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또 1986~88년까지 3년 연속 연 10%를 웃돈 경제성장률, 3저호황으로 인해 넘치는 시중자금 등으로 부동산 가격이 급등하고 있었다. 집값이 급등하면서 집값이 전세값에 반영된데다 일부 중개업자들의 농간까지 겹쳐 전세값이 급등했다는 분석도 있다. 이러한 분석은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 YMCA 시민중계실 등 시민단체에서 나왔다.

어쨌든 ‘짝수년 이사대란’과 ‘다가구 주택’은 1989~90년까지 이어졌던 전월세 파동의 산물인 셈이다.


조선 말기 한성에서 전세 유례


전세제도는 우리나라에만 있는 독특한 서민 주거형태다. 주택가격의 일부를 보증금으로 맡기고 남의 집을 빌려 거주하는 전세 형태는 전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제도로, 조선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1876년 병자수호조약(강화도조약)에 따른 3개 항구 개항과 일본인 거류지 조성, 농촌인구의 이동 등으로 서울의 인구가 늘어나면서 전세제도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인구증가로 한성의 주택수요가 급증하면서 주택 임차관계가 형성됐다. 이때 집 한 채를 통째로 빌리는 독채 전세뿐 아니라 집의 일부를 빌리는 전세도 많이 나타났다.

당시 가옥 소유주는 주택 임대차계약을 맺으면서 임차인으로부터 일정한 금액을 기탁받고, 상당기간 그 가옥을 임차인이 거주하도록 빌려준 뒤 가옥을 돌려받는 시점에 기탁받은 금액을 되돌려 줬다.
조선말기 전세의 기탁금액은 기와집과 초가집에 따라 달랐으며, 보통 가옥가격의 반액에서 비싼 곳은 7·8할이었다. 기간은 통상 1년으로 기간을 정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세계 어디에도 없는 독특한 제도"


1900년대 조선을 방문한 한 일본학자는 “전세는 조선에서 행해지는 가옥임대차의 방법으로, 주로 경성 내에서 행해지는 관습”이라고 소개했다.

일제시대 전세는 일본 민법의 적용대상이 되면서 “매매는 임대차를 깨뜨릴 수 있다”는 규정이 적용되는 등 전세권자의 권리가 크게 약화됐다. 해방 이후 민법이 만들어지면서 등기를 한 전세권은 물권으로 인정하되, 등기하지 않은 전세에 대해서는 채권으로 보는 법체계가 정립됐다. 하지만 주택이 부족한 상황에서 집주인이 꺼리는 전세등기는 법률상의 권리로만 남게 됐다.

전세는 전국 방방곡곡으로 급격하게 확산돼 대표적인 주택임대차 유형으로 자리 잡았다. 전세보증금이 불확실한 임차인의 신원을 보증하는 기능을 한데다 매월 약간의 임대료를 받는 것보다 쉬웠기 때문이다.

"집주인의 눈치를 살피며"


지금 50대 중반 이상인 사람들은 신혼생활의 단꿈이 가시기도 전에 이사 다니기 바빴던 씁쓸한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 지금부터 26년 전인 1981년 이전에는 6개월마다 한 번씩 전세보증금을 올려줘야 했다. 여기에 세입자를 더욱 힘들게 한 것은 가등기 등의 절차를 밟지 있을 때 집주인이 집을 팔아버리면 전세보증금조차 돌려받지 못하고 쫓겨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는 점이다.

“남의 집 문간방에서 집주인의 눈치를 살피며, 우는 아기의 입을 틀어막아야 하는 어미의 눈에는 한 맺힌 이슬이 핀다. 예나 지금이나 도시 서민의 첫째의 소원은 제 땅에 제 집 짓고 사는 것이다.” (1977년 10월 30일 조선일보 사설)
당시 조선일보는 ‘집’이라는 특별 사설까지 실어 “집값을 서민들 소득에 맞춰 주어야 제 집 지니는 것이 한(恨)인 서민들의 꿈을 구현시켜줄 수 있는 것이다”라고 쓰고 있다.

서울 시민의 반이 남의 집살이


이러한 일이 벌어진 것은 1962년부터 시작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산업화와 도시화가 진행됨에 따라 농촌에서 도시로 인구가 급격하게 유입하면서 높은 인구증가와 핵가족화 등으로 가구수가 증가해 주택부족현상이 심각했기 때문이다.

1981년 5월 처음으로 임대차보호법이 시행됐지만 실제 세입자를 보호하는데는 미흡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중앙일보 1981년 11월 11일자.
특히 많은 인구가 몰려든 서울은 주택부족이 더욱 심각해 변두리 구릉지, 제방, 하천변, 공원용지 등에 무허가 주택이 들어섰다. 1980년 서울에서 자기 집에 사는 가구는 44.5%로, 서울인구의 반 이상이 남의 집에 살고 있었다.

이 당시 우리 민법은 임대차 존속기간에 대해 20년을 넘지 못하도록 최장기간만 제한을 뒀고, 최단기간을 제한하는 규정은 없었다. 그래서 주택임차의 존속기간을 6개월로 정하는 것이 통례였다.

3자에 대한 대항력도 약해 계약기간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저당 등으로 주택소유권이 넘어가면 세입자들이 하루아침에 거리로 쫓겨나는 등 세입자 보호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됐다.

임대차보호법 '전세기간 최소 1년'


이러한 세입자의 일방적인 피해를 막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주택임대차보호법이었다. 1981년 3월 5일 제정된 이 법은 전문 8조의 매우 짧은 법으로, 임차인이 주민등록을 옮겨놓는 경우 임차권은 제 3자로부터 대항력을 가지며, 임대차기간은 최소 1년으로 한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원래 임대차보호법은 1979년 유정회에서 임대가옥입주자보호법안으로 제정이 검토됐지만 실제 입법은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에서 이뤄졌다. 1981년 2월 19일 법안이 제안되자마자 다음날 의결됐고, 다음달 5일 법안이 공포, 시행됐을 정도로 초스피드였다.

임대료 인상 5% 이내에


그런데 법안이 제정된 다음부터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전세기간이 길어져 부동산경기가 반짝할 때 주택을 임의처분 할 수 없기 때문에 셋집으로 내놓기를 꺼리고, 6개월마다 약 20%씩 올려 받던 전세금을 1년치씩 2번 앞당겨 올려 받겠다는 속셈 등이 작용해 전세값이 계속 치솟고 있다. 더군다나 부동산 경기의 계속적인 침체로 아파트 등에 잠겨 있는 자금을 빼려는 사람들이 집을 팔고 전세를 들려는 경향을 부채질하고 있어 집 없는 서민들은 전세를 옮겨 다니기가 더욱 힘들게 되었다.(1981년 3월 중앙일보)”는 것이다.

국보위가 만든 주택임대차보호법은 입법취지와는 달리 임대료 인상을 초래했다는 비판이 제기되면서 1983년 개정된다. 임대료 인상 상한선을 연간 5% 이하로 제한하고, 소액보증금에 대해 우선변제권이 실시된 것이다. 당시 소액보증금은 특별시, 직할시에서 300만원, 기타지역은 200만원이었다. 임대료 인상 상한선 5% 제한의 경우 세입자의 우선계약권이 없기 때문에 종이호랑이에 불과한 상태로 지금까지 남아있다.

전세보증금 보호


소액보증금 우선변제조치는 집주인의 갑작스러운 부도나 의도적인 사기행위가 있어도 보증금 중 일부는 우선적인 보호대상으로 다른 채권에 앞서 돌려받을 수 있게 했다는 점에서 세입자보호조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보호되는 소액보증금이 현실과 너무 동떨어지게 낮아 형식적인 보호에 불과하다는 비판이 끊이질 않았다.

그러나 금융기관이 주택담보대출을 심사할 때 방마다 세입자가 거주할 것으로 가정하고, 소액우선 보증금에 방수를 곱한 금액만큼 대출 가능액에서 제외한 것은 전세 보증금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였다.

IMF 외환위기로 역전세대란


오르기만 하던 우리나라 주택임대시장에 가장 큰 변화가 찾아온 것은 IMF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초.

IMF외환위기 직후 처음으로 전셋값이 하락하면서 집주인이 보증금을 마련하지 못하는 초유의 '역 전세대란'이 일어났다. 조선일보 1998년 4월 21일자
실직이나 감봉 등으로 더 싼 곳으로 옮기려는 세입자들이 전세값을 되돌려 받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고, 전세값이 떨어지면서 집주인도 전세보증금을 마련하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초유의 '역(逆) 전세대란'이 발생한 것이다.

당시 전세가가 매매가를 웃도는 역전현상이 나타나 소형 아파트 중에는 ‘깡통 아파트’까지 등장(1998년 5월15일, 문화일보 11면)했고, 세입자가 전세보다는 월세를 선호하면서 전세의 종말을 예측하는 언론보도도 나왔다.

하지만 주택가격 및 임대료 하락세는 1998년 중점 추진된 주택경기 부양대책에 힘입어 6월 중순부터 둔화되기 시작, 8월부터는 '역 전세대란'이라는 표현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1998년 하반기부터는 전월세가 상승하기 시작, 1999년에는 폭등세를 보였다.

전세 보증금 못 받으면 세입자가 등기


전세가격 하락 때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하는 임차인을 위해 만들어진 제도가 1999년 1월 도입된 임차권등기명령제도다.
이 제도는 임차기간이 끝난 세입자가 가옥주의 동의없이 임대주택이 있는 소재지 관할 지방법원, 지방법원지원 또는 시군법원에 임차권등기명령을 신청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임차인이 임대인으로부터 보증금을 받지 못하면 이사를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어려움을 덜어주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하면 다른 곳에서 집을 얻기 어려운 세입자에겐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전세가격이 폭락했던 1998년 5월부터 전세금을 내주지 못하는 집주인을 대상으로 전세금반환자금대출제도가 운영되고 있지만 금리가 높아 실제 이용은 거의 없었다.

전세를 월세로 바꿔라


2000년대 들어 경제회복과 저금리로 주택가격이 재차 상승하기 시작했다. 2001년 주택가격은 14.3%올라 IMF외환위기 때의 하락률(12.4%)을 상회했다. 전세가격은 이미 1999년부터 두 자리 수 상승세를 나타내고 있었다.
이처럼 전세가격이 급등한 것은 IMF직후인 1998~99년 주택건설호수가 급감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주택공급 부족은 2001년부터 전세가격 상승으로 나타났다. 아무리 가격이 높아도 전세로 들어오겠다는 문의가 빗발치자 당시 저금리로 돈 굴릴 데가 없던 일부 집주인들은 전세를 월세로 바꾸기 시작했다.

2001년 2월 내집마련정보사 등에 따르면 서울 강남, 서초, 송파, 용산, 강동구 등을 중심으로 전세의 월세전환물량이 60% 이상인 것으로 조사됐다. 특히 분당구 구미, 서현동은 월세비중이 80~90%에 달하기도 했다.

뒤늦은 월세 제한조치


당시 월세로의 전환이자율은 평균 13.1%~13.8% 수준이었고, 수도권은 이보다 높은 평균 15.6%~17% 이었다. 초기에는 소형 위주로 월세 전환이 이뤄졌지만 점차 대형주택 중에서도 월세 물량이 나오기 시작했다.

건교부는 월세세입자 대책 마련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월세에 대해 소득세를 부과하거나 세입자가 월세를 내는 경우 월세를 소득에서 공제하는 제도 등이 논의됐다. 그러나 세금을 메기면 임대용 주택의 감소가 우려되는데다 형평성 문제가 있어 전세보증금의 전부 또는 일부를 월차임으로 전환하는 경우 상한선을 정하는 방안이 모색됐다.
2002년 6월 주택임대차보호법을 개정하면서 정한 상한선은 연 14%였다. 이미 전세의 월세전환 이자율은 저금리 기조가 확대되면서 연 12% 수준으로 하락한 상태였다.

전세 350만 가구, 월세 300만 가구


저금리로 인한 전세의 월세전환은 전세거주가구를 줄였다. 2005년 11월 센서스에 따르면 전세거주가구는 2000년에 비해 48만 가구가 줄어든 356만가구로 나타났다. 아직 301만 월세가구에 비해서 많지만 저금리추세가 이어지면 역전될 수 있다.

집 주인에게는 목돈 마련의 기회가 되고, 세입자에겐 비교적 저렴하게 거주할 수 있는(때론 세입자에게 고통이 됐지만) 전세제도는 저금리 기조와 주택금융의 발전 등으로 인해 점차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주택금융이 발전한 선진국의 시각으로 볼 때 주택가격의 50% 정도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집을 소유하지 못하는 것은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하지만 은행융자를 끼고 집을 사는 것보다 세 살기를 원하는 수요가 많고, 매월 월세를 내는 것을 큰 부담으로 느끼는 한국적 정서 등으로 인해 여전히 월세보다는 전세가 선호되고 있다.

'법률로는 안 된다, 임대주택 늘려라'


2002년 초 전세의 월세전환과 전세금 상승은 더 이상 법률만으로 세입자를 보호하는데 한계가 있음을 보여줬다.
2002년 5월 당시 정부는 2003~2012년까지 임대기간을 30년으로 하는 국민임대주택 100만호를 지어 임대주택이 전체 주택의 10%에 이르도록 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장기 공공임대주택은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전월세값 폭등으로부터 서민생활을 보호하는 안전판 구실을 할 것이다.

이어 참여정부는 2003~2006년까지 4년간 47만5000호(사업승인 기준)의 국민임대주택을 건설했다. 2006년 말까지 입주 물량은 11만1000호에 불과해 당장 주택시장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하다.
하지만 입주를 마친 공공임대주택 재고가 늘어나면 전월세 가격 폭등에 안전판 구실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선진국에서는 공공임대주택의 임대료가 시장 임대료 인상을 결정하는 가이드라인 역할을 하고 있다.

임대주택을 위한 펀드 조성


2006년 말 다시 전월세값 상승이 사회문제로 대두되면서 정치권을 중심으로 전월세 신고제, 전월세금 인상률 5% 제한, 계약기간 3년 연장, 재계약 갱신 거절 사유 제한 등의 대책이 논의됐다. 하지만 과거 경험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임대주택의 임대차기간을 늘리거나 가격을 규제하는 것은 임대료 폭등을 야기한다.

따라서 2007년 1·11 대책에는 이러한 내용이 제외됐다. 수급불균형이 심화된 주택시장에서 행정개입을 통한 가격 통제가 불가능하다는 점을 고려했기 때문이다.

가장 근본적인 전월세 세입자 대책은 임대주택 재고를 충분히 확보하는 것이다. 2007년 1·31대책에서 비축용 장기임대주택 건설재원으로 임대주택펀드를 조성키로 한 것은 공공임대주택 재고를 늘려 간접적으로 민간 임대료 인상을 억제하기 위한 방편이기도 하다.


 

 | 특별기획팀 | 등록일 : 2007.04.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