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입찰

관료들의 농간에 놀아난 청와대와 경험없는 참모들

토건종식3 2010. 5. 1. 19:29

[실록 부동산정책 40년(16)] 뜨거운 감자, 재건축-개발이익 환수 2007-03-19 08:39:15

2006년 1월 초, 전경련 산하 한국경제연구원은 정점을 향해 치닫던 정부의 재건축 규제 흐름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보고서를 냈다.

“재건축은 재개발과 더불어 이미 개발이 완료된 기성 시가지에서 주택공급을 확대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지만 우리 사회는 재건축 그 자체를 규제하고 있다. 재건축을 억제하면 결국 강남과 같은 지역의 주택가격은 더욱 상승한다. 강남과 같은 기성 시가지에서 주택가격 안정을 위해서는 재건축이 억제되기보다 오히려 활성화되어야 한다.”(재건축 규제의 허와 실, 최막중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

주택가격을 관리하는 차원에서 재건축을 억제하면 주택 공급이 확대될 수 있는 길을 봉쇄해버려 오히려 강남과 같은 기성 시가지의 집값은 더욱 상승한다는 논리다.

주거복지연대가 이보다 조금 앞서 내놓은 <참여정부의 주택정책 평가와 과제>(2005.11.4)는 이 같은 공급론적 시각과 완벽히 일치하지는 않지만 재건축 억제에 비판적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신규 택지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서울에서 재건축 규제는 공급 부족 현상을 가져올 수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재건축 딜레마, 한여름의 뜨거운 논쟁

과연 정부는 재건축의 공급적 측면이나 시장원리를 무시하고 규제 일변도 정책을 선택한 것일까. 시간을 조금 거슬러 올라가보자.

강남 재건축은 공급이 조금 늘어나는 효과보다 시세차익 기대로 인한 투기적 수요가 더 크다. 사진은 서울 잠실 아파트 재건축 공사현장.


8·31 정책을 한창 준비 중이던 2005년 7월 어느 날. 각 부처 장관들의 격론을 듣고 있던 이해찬 총리가 이날 회의를 이렇게 매듭짓는다. “현 시점에서 섣불리 재건축 이야기를 꺼내면 다시 시장이 불안해질 수 있습니다. 재건축을 통한 공급확대 방안은 안정기조가 확고히 자리 잡은 뒤 다시 논의키로 합시다.”

한 달 전 “다시 원점에서 근본대책을 마련하라”는 노무현 대통령의 지시로 시작된 부동산대책회의는 재경부, 건교부, 행자부 등 관계부처들이 그때까지 불거진 모든 문제를 하나씩 풀어가는 식으로 진행됐다. 일주일에 한 번씩 열리는 회의는 언제나 격론으로 치달았지만 재건축을 주제로 한 이날 회의는 특히 뜨거웠다. 업계의 주장처럼 재건축이 강남 지역의 주택공급과 직결된 문제라는 걸 잘 알기에 더욱 결론을 내기 어려웠다.

건교부 측의 기본 입장은 ‘철저한 개발이익 환수를 전제로 한 용적률 확대’였다. 당시 건교부 측 실무자였던 박선호 주택정책과장의 회고다.
“임대주택 의무건립 등을 통해 재건축 개발이익만 철저히 환수할 수 있다면 일정 수준 용적률을 높여 재건축을 허용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런 경우 임대주택도 확보할 수 있고, 강남지역 주택공급도 숨통이 트일 테니 일석이조라는 판단에서였다. 7월 당시의 고위당정협의 때도 그런 방안을 내놓았다.”

“개발이익만 환수한다면…”

이는 2005년 6월 당시 김수현 국민경제비서관이 재건축을 특정한 것은 아니었지만 청와대브리핑을 통해 공개적으로 밝힌 주택정책 기조와 맥락을 같이한다. “개발이익을 합리적으로 환수하고, 공공이 직접 나서서 주택을 공급한다면 설령 고층아파트를 짓더라도 국민적 동의가 가능하다. 개발이익을 환수하면서 주택공급도 늘리는 패키지 밖에 없는 것이다.”

문제는 ‘재건축의 딜레마’라고 부를만한 당시 상황에 어떻게 대처하느냐였다.
시장이 정부 정책을 재건축 완화 신호로 받아들이면 또다시 투기세력이 달려들어 재건축 집값이 상승하고, 반대로 규제 신호로 받아들이면 공급 부족을 예상해 미래 수익을 노린 돈이 몰려 재건축 아파트 값이 오를 태세였다. 이 문제는 달궈질 만큼 달궈진 터라 어떻게 건드려도 터질 것 같은 상황이었다. 이런 딜레마 속에서 당시의 선택이 어떻게 이뤄졌는지 박선호 주택정책 과장이 잘 말해준다.

“강남 재건축 허용은 집값 안정에 도움 안 돼”

2005년 7월13일 총리공관에서 열린 제2차 부동산정책 당정협의회에서 이해찬 당시 국무총리가 관계 장관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강남의 주택시장이라는 것이 재건축을 통해 공급을 늘리는 것만 가지고 과연 집값을 잡을 수 있을 것이냐는 부분을 가지고 굉장히 고민을 많이 했다. 그런데 강남에 대한 주택수요는 이제 지역적인 부분에 국한된 시장이라기보다는 서울과 수도권, 더 나아가서 지방의 돈 있는 사람들까지도 모두 투자를 하려는 그런 특성을 가진 시장이기 때문에 재건축 규제를 풀어 공급을 조금 늘려서 집값을 잡는 긍정적인 측면보다 오히려 재건축으로 인한 시세차익 기대가 훨씬 커지기 때문에 투기적인 수요가 대거 유입되는 부정적인 측면이 더 크다고 보게 됐다.”

‘강남 주택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공급 확대가 능사가 아니다’라는 인식을 가지게 된 것이다. 김수현 비서관의 회고가 당시의 ‘정서’를 잘 보여준다. “김병준 정책실장이 건교부가 원했던 강남 대체를 반박했다. ‘강남은 공룡이다. 그 공룡에다가 소 몇 마리 먹으라고 던져준들 공룡이 배가 차지 않는다, 우리가 국가균형을 이야기하면서 수도권 균형은 왜 생각 안하느냐, 급하다고 이걸 먹으면 안 된다’며 재건축 규제 완화 문제도 같은 맥락에서 대처했다.”

이런 판단을 내리기까지 실증적인 분석도 이뤄졌다. 예를 들어 특정 기간 중 강남에 집을 산 사람들 중 강남에 원래 살던 사람이 산 집이 얼마를 차지하고, 서울의 다른 지역에서 강남으로 들어온 사람이 얼마며, 또 다주택자가 산 부분이 얼마고, 또 지방에서 산 사람이 얼마인지를 다각도로 분석했다.

그 결과 공급확대를 통해서 해당지역 시장의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고, 적정한 수준의 수요관리정책이 단기적인 측면에서는 먼저 강구되어야 될 부분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재건축 논의 아예 없던 일로

강남 재건축 규제 완화하지 않는다는 한덕수 당시 경제부총리의 발언을 전한 2005년 7월 27일자 신문기사.

2005년 7월말 한덕수 경제부총리는 “현재 서울 강남 재건축 규제 완화는 전혀 논의하고 있지 않으며 8월 말 부동산 종합대책에도 들어가지 않을 것”이라고 발표했다. 재건축에 관한 한 논의 여부조차 밝히기 곤란할 만큼 민감했던 것이다.

당시 고위당정협의에서조차 재건축 방안에 관한 한 서류를 회수하고 “논의 자체를 없었던 일”로 했다. 8·31 정책 실무 기획단 팀장이었던 김석동 현 재경부차관는 당시 재건축에 관해 논의됐던 방안은 8·31 정책 발표 때 제외시켰고 이듬해 발표한 3·30 대책의 재건축 개발이익 환수장치는 사실 8·31때 준비됐던 것이라고 회고했다.

오래돼 낡을수록 비싼 아파트

사실 재건축 딜레마의 뿌리는 역사적이다. 준공된 지 20년이 지나야 재건축이 가능하도록 한 준공연수 제도는 재건축 허용 초기부터 주요 통제수단으로 이용됐지만 이 제도가 오히려 투기를 부추겨왔다. 노후화에 비례하여 떨어져야할 아파트 가격이 준공된 지 20년에 가까울수록 치솟고, 용적률이 낮은 아파트일수록 가격이 올라가는 것이다.

재건축 사업과 관련한 법적인 규정은 1984년 ‘집합건물의 소유 및 관리에 관한 법률’의 제정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하지만 법 집행을 위한 구체적인 시행령이 만들어지지 못해 1987년 주택건설촉진법에 재건축의 법적 근거를 도입하기 전까지 재건축 사업은 원활하지 못했다.

주민-건설업체-정부의 3박자 이해관계

재건축에 대한 요구는 1960년대와 70년대 초반에 지어진 아파트 가운데 일부가 노후화로 질적인 문제를 겪으면서 높아졌다. 사진은 1962년 지어진 마포 아파트.


재건축에 대한 요구는 1960년대와 70년대 초반에 지어진 아파트 가운데 일부가 노후화로 질적인 문제를 겪으면서 높아졌다. 특히 마포 아파트, 잠실 1단지, 동부이촌동의 공무원 아파트 등이 거론됐다.

1960년대에 지어진 대부분의 아파트는 용적률(전체건축연면적/대지면적*100)이 100% 미만으로, 1987년 당시 건축법에서 허용하는 용적률 250%에 높이 25층까지 건설할 경우 2~3배 이상의 면적 증가를 가져올 수 있었다. 결국 면적증가를 통해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는 이들의 욕구가 재건축 제도를 활성화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건설업체의 입장도 이와 맞아떨어졌다. 신규택지조달 문제와 택지구입비용 문제가 일정 부분 해결되는 재건축 사업의 장점 때문에 주택업체의 경쟁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정부의 입장에서도 공동주택의 부실 문제를 방치할 경우 대규모 단지가 슬럼으로 변할 것이라는 우려가 있었고, 노후 주택을 재건축할 경우 기존 주택보다 많은 수의 주택공급이 가능하다는 점을 중요하게 고려했다.

정부의 자금 및 행정 지원 없이도 손쉽게 주택공급을 진행할 수 있는 정책수단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1988년 12월 마포아파트 재건축조합이 최초로 사업인가를 받은 이후 재건축사업은 급격히 증가했다. 이후 1990년대 중반까지 재건축 적용대상을 확대해주거나 재건축 사업촉진책을 펴는 등 비교적 일관된 장려책이 줄을 잇는다.

당초 재건축 대상주택은 엄격하게 규정돼 있었다. 구조적으로 안전사고의 우려가 있거나, 준공 후 20년이 경과하고 유지관리비가 많이 소요되거나, 주변 환경에 비해 현저하게 효용이 낮게 이용되고 있는 주택에 대해서만 재건축을 허용했다. 이 허용요건은 1993년 3월 주택건설촉진법이 개정되면서 20년이 경과하지 않아도 재건축이 가능하도록 완화된다.

용적률과 소형주택의무 완화

개발이익이 조합과 주택업자에게만 돌아가는 재건축 사업의 특성에 결정적으로 불을 댕긴 건 수익성을 크게 높여준 두 가지 정책이었다.
첫 번째는 건축법. 1988년 주택건설 200만호 계획이 추진되면서 건축법이 급격한 변화를 겪는다. 1988년 주거지역의 용적률 상한이 400%로 완화된 것을 비롯하여 용도지역지구제가 대폭 완화됐다.

그리고 1992년 이후부터는 초고층 아파트의 건설이 가능하도록 동과 동 사이의 거리 규제를 크게 완화했다. 건축법의 두 조항이 만나는 1992년부터 용적률 300%가 넘는 고밀도 개발과 초고층 아파트 건설이 가능해진 것이다.

두 번째는 소형주택 건설 의무비율을 완화해 중대형아파트를 짓기 쉽도록 한 조치다. 1994년 12월까지만 해도 재건축 아파트는 75% 이상을 전용면적 25.7평 이하로 지어야하고, 40% 이상은 18평 이하로 건설해야했다. 따라서 기존 주택의 면적이 큰 아파트를 재건축할 때는 수익성이 떨어졌다.

그렇지만 1995년 1월부터는 소형주택 건설의무비율과 관계없이 기존 주택 수만큼 중대형아파트를 건설하거나 모든 조합원이 기존 평수의 1.5배 큰 주택을 가질 수 있도록 건설하는 두개의 방안 중 하나를 재건축조합이 실정에 따라 선택할 수 있도록 했다.

'아파트 공화국'…재건축 물량 급증

'아파트단지 개발의 역사는 끊임없이 건축되고 재건축된 한 도시의 역사이다'-발레리 줄레조 <아파트공화국>58쪽

이런 조치들에 힘입어 1995년 주택 재건축사업물량은 전년의 2.7배로 늘어난다. 1995년 서울시가 재건축사업 승인을 해준 물량은 총 1만1357가구로 1994년의 4215가구에 비해 169.4%나 증가했다. 이는 1990년부터 1994년까지 5년간의 재건축사업 승인물량 1만2895가구에 육박하는 양이었다.

프랑스 지리학자 발레리 줄레조는 저서 <아파트 공화국>에서 “서울에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아파트 단지들은 강력한 권위주의 정부가 재벌과 손을 잡고 급격한 성장을 추구하면서 만들어낸 한국형 발전모델의 압축적 표상”이라고 했다. 특히 “서울의 가옥 갱신 주기는 서구 도시보다 훨씬 짧다”며 “도시가옥을 소모품으로 취급하는 한국인 대다수의 무심함”을 언급하는 대목은 재건축의 사례와 잘 맞아떨어진다.

초고층 아파트 바벨탑

봇물 터진 재건축 사업의 와중에 부작용이 없을 수 없다. 1988년 이후 10여 년 동안 재건축은 보통 집을 짓듯이 사업계획을 세워 구청장의 승인을 받으면 할 수 있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지자체의 권한 안에 있던 재건축은 무수히 많은 논란을 낳아왔다. 1996년 11월 서울시가 잠실 등 5개 저밀도 아파트지구를 재건축할 때 용적률을 285%로 높여 최고 25층의 중대형 아파트 지역으로 재건축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발표하자 여론이 악화된다.

봇물터진 재건축 사업의 부작용을 지적한 1996년 11월 16일자 중앙일보.

11월16일자 서울신문은 ‘아파트 초고층화 문제 많다’는 사설을 통해 “그간의 고밀도 재건축 불가원칙 위배와 교통난 및 자연경관 훼손 등 여러 가지 문제를 안고 있다”며 “이 용적률은 초고층 아파트가 들어선 분당신도시 아파트 용적률이나 고층아파트 군이 있는 서울 강남의 압구정동과 대치동보다 80% 포인트 이상 높은 것으로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고 비판했다.

더불어 이들 지역에 대한 투기 조짐까지 일자 서울시는 구청 직원들을 현장에 집중투입, 투기혐의자를 찾아내 국세청에 세무조사를 의뢰하겠다고 밝히는 한편 재건축기간과 물량 등의 계획을 보완해 3일 만에 수정안을 내놓는다.

같은 달, 강남구는 15년밖에 안된 10~12층짜리 고층아파트를 25층 안팎의 초고층으로 재건축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이를 두고 언론은 강남구가 건물 안전에 지장이 없다며 재건축조합 인가를 보류했다가 1년 만에 번복한 경위에 의혹을 제기했다.

강남구의 불씨 지피기

강남 중층아파트 초고층 재건축 논란은 계속 이어졌다. 2005년 4월28일자 서울신문 기사가 그 단면을 잘 보여준다.

“강남 압구정동 일대 한강변 아파트에 초고층 재건축을 허용하겠다는 소문은 지난해 말부터 솔솔 피어나기 시작했다. 불씨는 강남구가 지폈다. 올 2월에는 그럴듯한 그림까지 제시하면서 초고층 아파트 건립 분위기를 띄웠다. 강남구는 압구정동 일대 현대·한양·미성 아파트 11개 단지 1만여 가구가 오는 7월쯤부터 30~60층의 탑상형 초고층 아파트로 재건축된다고 밝혔다. (중략) 시장은 요동쳤다. 압구정동 구현대 1차 65평형 시세는 연초 12억 5000만원했던 것이 초고층 재건축 허용 발표 이후 껑충껑충 올라 4개월 동안 1억 2000만원이나 폭등했다.”

강남 압구정동 일대 한강변 아파트 초고층 재건축 조감도


“가구당 3억4000만원의 개발이익”

그사이 재건축 시장에 불었던 ‘묻지마 투자열풍’이 집값 상승의 주범이란 인식이 확산됐다. 2003년 11월 KBS ‘한국사회를 말한다’는 2002년 9월 잠실 주공 2·3단지 총 7730채의 등기부등본을 떼어 분석한 결과, 실제 거주자는 13.9%에 불과하다고 밝혔다. 특히 비거주 소유자 중 59%가 강남권 거주자인 것으로 나타났다. 강남에 살면서 재건축 아파트를 또 소유하고 있는 셈이다.

2005년 5월에는 경실련이 강남지역 5개 재건축 아파트 단지에서 생길 총 개발이익이 6조5000여억원에 이른다는 주장을 제기했다. 경실련은 “단지 당 1조원 이상의 개발이익이 발생해 한 가구당 3억400만원, 평당 2200만원의 개발이익이 생기며, 이 개발이익은 아파트 소유자와 시공사 등 사업주체에게 고스란히 돌아갔다”고 말했다.

비리의 복마전 속으로 성큼성큼

재건축을 둘러싼 각종 비리 사건이 주기적으로 터져 나오면서 재건축은 일종의 복마전처럼 인식되기도 했다. 2003년 7월 검찰은 아파트 재건축을 추진하면서 20억원대의 금품을 상납 받은 재건축조합 간부와, 인허가 청탁과 함께 뒷돈을 받은 시청 간부, 조합 비리를 폭로하겠다며 10억원대를 뜯어낸 은행원 등 10명을 무더기로 적발했다고 발표했다. 2004년 10월에는 야당의 전 당 대표 보좌역이 재건축 사업승인을 받도록 해주겠다며 4억원을 받아 챙긴 혐의로 구속 기소되는 사건도 터졌다.

재건축이 초기에 주택공급이라는 순기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복마전처럼 돼버린데는 건설사의 수익 챙기기에 따른 조합으로의 비용 전가, 이에 따른 주택가격의 상승효과도 무시할 수 없다. 재건축 시공사들이 조합과의 본계약 이후 갖가지 명목으로 수십억~수백억원의 추가정산금을 요구하고, 조합이 이를 거부하면 공사 자체를 중단하겠다고 나오기 때문에 추가부담을 피해갈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건설업체의 흙탕물 싸움

서울 반포 주공2단지 재건축 시공사 선정된 다음날인 2001년 7월 15일 아파트 입구에 건설사들이 내세운 플래카드가 어지럽게 널려있다.

2000년1월21일 동아일보는 “재건축이 진행 중인 서울 16개 아파트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10곳에서 시공사가 가구당 2000만원 이상의 추가정산금을 챙겨간 것으로 나타났다. 5000만원 이상을 받은 곳도 4곳이나 됐으며 무려 9000만원을 요구한 경우도 있었다”고 보도했다. 더불어 “행정당국은 ‘사인(私人) 간의 계약’이라며 수수방관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대형 건설사들이 재건축 사업의 이권을 놓고 ‘흙탕물 싸움’을 펼치기도 했다. 2000년 7월 공정거래위원회가 개포 주공1단지 재건축 사업 수주를 위해 경쟁을 벌이면서 상대 업체에 불리한 거짓광고를 한 현대건설, 현대산업개발, 삼성물산에 대해 광고 금지와 법 위반사실 신문공표 명령을 내렸다.

같은 해 9월에는 서울 강동 시영 1차 아파트 재건축 수주경쟁을 놓고 현대건설과 대림산업이 법정 싸움을 벌였다. 시공사 선정투표가 잘못됐다며 투표결과에 승복하지 않아 소송이 벌어진 것이다.

강남 재건축 ‘상식이 통하지 않는 곳’

10여 년간 지속된 재건축 완화의 흐름이 규제 강화라는 긴 파동을 타기 시작한 것은 외환위기 이후 부동산값이 들썩이기 시작하면서부터다. 2001년 상반기 서울의 아파트 가격이 7.74% 오르면서 부동산 시장이 심상치 않은 조짐을 보였는데, 같은 시기 재건축 아파트의 상승률은 그보다 3배 가량인 21%에 이르렀다.

그러자 7월말 건교부는 ‘소형주택 건설 의무제’를 부활하겠다고 발표한다. 이어 8월말에는 서울시가 고밀도 지구의 재건축 용적률을 250% 이하로 제한하는 내용의 조치를 확정한다. 주춤했던 재건축 시장은 반년이 채 못 가 다시 급등세를 보였다.

2001년 말 반포주공 3단지의 시공사가 선정되자 16평형 아파트 시세가 불과 한 달 만에 1억3000만원이나 뛰었다. 기본계획도 나오지 않고, 안전진단도 통과하지 않은 상태였다. 강남 재건축 시장은 ‘상식과 분석이 통하지 않는 곳’이라 불리기 시작했다.

재건축이 집값 폭등의 발화점으로

해를 넘겨서도 재건축 아파트의 집값 상승 주도는 여전했다. 2002년 상반기 재건축 아파트의 가격 상승률은 서울지역 일반 아파트에 비해 1.5배가량 높았다. 한 부동산정보제공업체가 재건축 조합 추진위가 결성된 서울 137개 단지 시세를 조사한 바에 따르면, 2001년 말 평당 1347만원에서 이듬해 8월초 1695만원으로 평균 25.8% 상승했다. 재건축 아파트를 제외한 다른 아파트들의 평균 상승률 17.9%보다 44% 높은 것이다.

2002년 8월 정부는 잇따라 재건축 사업을 규제하는 방안을 내놨다. 건교부는 “실제 사업기간이나 개발이익에 관계없이 일단 시공사만 선정하면 집값이 올랐던 게 현실”이라며 재건축을 추진하는 주민들이 사업계획승인을 받은 뒤에만 시공사를 선정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발표했다.

참여정부 들어서도 재건축 사업을 규제하는 조치는 줄곧 이어졌다. 2003년 5·23 대책을 통해 재건축 아파트에 대해 후분양제를 실시하기로 했고, 같은 해 9·5 대책에서는 수도권 등 투기과열지구에서 재건축 조합원의 분양권 전매를 금지시키고 전체 건설예정 세대수의 50% 이상을 전용면적 25.7평 이하 중·소형 평형으로 짓도록 소형주택 의무비율을 확대하였다.

재건축에 도시계획 심의 규제 적용

이때까지, 즉 국민의 정부 말기부터 참여정부 초반까지 이어진 재건축 규제 강화는 지자체를 제치고 정부가 직접 나서서 재건축 절차를 까다롭게 하는 등의 방식으로 사업 추진을 압박하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재건축 사업 자체는 주춤했지만 집값 상승의 기세는 멈추지 않았고, 2003년 들어 재건축에 관한 정책이 근본적이면서 실질적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2002년 12월 법제화된 ‘도시 및 주거환경 정비법(도정법)’이 출발선을 끊었다. 도정법 이전까지 재건축 사업은 구역지정 절차 등 도시계획적 심의 없이 안전진단에 의해 이뤄졌다. 도시계획적 규제가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은 고밀개발로 주변에 미치는 악영향을 합리적으로 해소할 틀이 없었다는 뜻이다. 재건축사업의 수혜와는 상관없는 주변 지역이 기반시설 부족이나 경관악화 등의 불이익을 당했던 것이다. 도정법을 통해 재건축 사업도 정비기본계획·정비구역지정 등 도시계획적 규제를 받도록 바뀌었다.

마지막 카드 ‘초과이익 환수’

도정법은 이런 거시적 변화와 더불어 미시적으로는 개발이익을 간접적으로 환수하는 장치를 마련했다. 재건축으로 늘어나는 용적률의 25%를 임대아파트로 짓도록 하는 규정이 신설된 것이다.

이는 재개발로 인해 주거공간을 잃게 되는 세입자에 대한 주거안정대책으로 임대주택 건설을 의무화해왔던 방식을 재건축에도 적용한 것이다. 그동안 조합과 주택업자에게만 돌아가던 재건축의 개발이익 일부를 간접적으로 환수해 이를 공공적 성격을 띠는 임대주택 공급으로 돌리겠다는 것이다.

더불어 소형평형 의무비율에 소형평형 면적 기준을 더했다. 25.7평 이하 소형 평형의 연면적을 전체 면적의 50%가 넘도록 한 것이다. 이는 일부 재건축 조합이 18평 이하 소형 아파트 의무건설 비율을 형식적으로 충족시키기 위해 8평이나 12평 등 초소형으로 짓고, 대신 남는 용적률로 중대형 평형을 건설해 수익률을 높이는 편법을 쓰자 이를 막기 위한 조처였다.
한편에선 임대주택 의무건립에 따라 늘어난 용적률의 25%만큼 임대주택을 짓더라도 이를 정부가 원가에 매입하기 때문에 실제 개발이익환수 효과는 크지 않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위헌론 제기하며 격렬히 반대

선 개발이익 환수, 후 재건축을 통한 주택 공급이란 정책 기조는 2006년 3·30 대책의 핵심적 후속 입법으로 그해 5월 국회를 통과한 ‘재건축 초과이익 환수에 관한 법률’로 절정에 달했다. 글자 그대로 재건축으로 발생하는 초과이익의 일정 부분을 직접 환수하겠다는 것이다.

부담금은 준공시점의 주택가격에서 개시시점(추진위 승인일)의 주택가격과 정상집값 상승분 및 개발비용을 공제하여 산정되는 초과이익을 기초로 부과된다. 조합원당 평균 초과이익이 3000만원을 넘을 경우 초과이익 규모에 따라 0~50%의 누진률을 적용한다. 건교부는 징수된 부담금의 사용처에 대해서는 “주거환경 정비, 임대주택 건설, 저소득층 주거지원 등 주거복지 증진을 위해 전액 쓰인다”고 밝혔다.

처음 3·30 대책이 발표되자 반응은 크게 두 가지였다. “재건축 규제와 관련한 사실상의 마지막 카드”로 재건축이 몹시 어려워질 것이라는 예상과 개발부담금 제도가 언급될 때마다 단골처럼 등장한 위헌 가능성을 지적하며 법제화에 회의를 품는 것이었다. 후자의 경우, 미실현 이익에 대한 과세여서 위헌 소지가 있다는 것이다. 일부 재건축 조합은 헌법 소원을 내겠다며 반발하고 나섰다.

2004년 8월3일 재건축아파트 조합원들이 용적률 300% 인상과 임대주택 건설 의무화 폐지를 요구하고 있다.


이미 6개월 전부터 위헌론에 대비

건교부는 즉각 진화에 나서 “예상되는 위헌성 논란을 불식시키기 위해 법무법인, 변호사 등 6개의 전문기관 또는 전문가들이 이익환수자체의 합헌성은 물론, 부담금의 산정방법 등까지 자문해 골격을 마련했다”고 설명했다.

미실현 이득에 대한 과세 또는 부담금 부과는 계측에 있어 고도의 객관성이 요구되나, 실현된 이득에 대해서만 부과할지, 미실현이득에 대해서도 부과를 할지는 입법정책적인 문제로 그 자체로 헌법상 조세원리에 위배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3·30 대책이 사실은 반년 이른 8·31 때 이미 내용적으로 마련했던 것이라는 김석동 차관의 앞선 증언이나 위헌 여부에 대한 치밀한 사전 점검은 정부 안에서도 재건축이 얼마나 ‘뜨거운 감자’였는지를 반증한다.

돌아가는 길, 기반시설 부담금

이재영 건교부 전 토지국장에 따르면, 개발이익 환수 장치가 본격적으로 준비되기 시작한 것은 2005년 5월 무렵이다. “정문수 보좌관이 재건축 아파트에 대한 개발 부담금 방안을 검토해달라고 하면서 시작됐다. 처음에는 법리상 맞지 않을 가능성이 높고 개발 이익이 발생하는 시점을 어떻게 잡느냐의 문제 등을 내세워 부정적인 의견을 냈지만 워낙 완강했다. 그래서 싱가포르의 디벨로퍼 차지(developer charge)제도를 원용해보자며 안을 만들기 시작했다.”

싱가포르는 지역별로 지수를 달리 매겨 개발 부담금을 물렸는데, 이를 근거로 계산해보니 강남 32평 아파트를 재건축할 경우 1억~1억5000만원 정도의 부담금이 산출됐다. 강남의 재건축 개발이익은 확실히 환수되지만 전국적으로 계산해보니 파장이 너무 커보였다. “다시 조정해 보고서를 작성했다가 흉내만 낸다고 질책 당해 또 다시 안을 만드는 과정을 5월에 3차례 정도했다. 결국 정문수 보좌관도 당장 재건축 부담금을 시행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인식했다.”

‘재건축 초과이익 환수에 관한 법률’ 시행을 알리는 2006년 8월 3일자 중앙일보.

그 대안으로 나온 것이 기반시설 부담금이었다. 당초 2003년 ‘국토의 계획 및 이용에 관한 법률’에 의거한 ‘기반시설연동제도’의 일환으로 시설부담금이 도입됐지만 전면적으로 시행된 적은 없었다. 이는 도시별로 수용인구 등을 감안해 도시에 필요한 도로와 공원 등 기반시설의 총량을 정한 뒤 건축 행위로 인해 유발되는 기반시설의 설치비용을 개발행위자에게 부담시키는 제도다.

건교부는 여기에 재건축 아파트의 경우도 해당될 수 있도록 보완작업을 했고 2006년 1월에 제정된 ‘기반시설부담금에 관한 법률’에 의하여 ‘기반시설부담금’이 도입됐다. 하지만 2006년 초부터 강남의 일부 재건축 아파트 가격이 이상 급등하는 현상을 보이자 이런 간접적인 개발이익 환수장치로는 한계가 있다고 보고 보다 강화된 개발이익환수제를 만들겠다는 3·30 대책이 나오기에 이른 것이다.

개발이익의 사유화와 주택공급 사이의 딜레마

2006년 8월 건교부가 마련한 ‘재건축 초과이익 환수에 관한 시행방안 연구’보고서를 보면 재건축의 딜레마가 한눈에 보인다. 2000년 이후 서울시에 공급된 신규주택의 40%가 주택재건축에 의한 것이었다. 2000~2002년 강남구에 공급된 주택의 총수는 1만119호이며 이 가운데 아파트는 2558호였다. 그중 재건축 아파트가 2026호로 아파트만 따지면 79%에 이르렀고, 같은 기준으로 송파구는 88%에 달했다.

“재건축은 앞으로도 유력한 대도시 내 주택공급수단으로 기능할 것”이라는 보고서의 전제는 그래서 타당하다. 앞으로 재건축이 가능한 아파트가 대부분 중밀도 아파트이기 때문에 재건축 때 용적률을 대폭 상향조정하지 않는 한 주택 순증효과는 크지 않다.

보고서는 또 동시에 “재건축주택의 가격이 폭등함에 따라 초과 이익의 독점적 사유화는 더욱 심화되고 있다”며 “초과이익에 대한 과세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재건축사업에 대한 부정적 인식의 해소를 통한 재건축사업의 활성화를 위해서나 조세정의를 위해서도 재건축 초과이익의 독점적 사유화는 반드시 근절해야 될 사항”이라고 말하고 있다.

개발이익을 공익으로 환원하는 길

그 예로 사업이 진행 중인 잠실저밀도 지구 재건축의 초과이익을 산정해놓고 있다. “13평 기준으로 최근 3년간 2억4000만원에서 7억으로 상승함에 따라 동 아파트의 소유자는 개인적으로 별다른 노력 없이 3년간 4억6000만원의 재산이 증식되었다. 잠실저밀도 세대수가 21,250세대임을 감안하면 총 초과이익은 약 10조원에 달한다. 서울시의 2006년 예산이 약 15조원임을 감안하면, 이들 재건축아파트 소유자들이 향유하는 초과이익이 얼마나 큰지를 잘 알 수 있다.”

과다한 개발이익이 공익으로 환원될 장치가 완비되고 나서야 재건축을 주택공급의 요긴한 수단으로 쓸 수 있다는 시각이 갈수록 확산되고 있다. 주택업계와 일부 언론의 일방적인 공급확대론에 경계를 보여온 김용창 서울대 교수는 용적률 증가분을 기존 소유자의 이익에서 배제하고 분양값 상한제를 적용한다면 “재건축을 주택 신규공급의 원천으로 유용하게 활용한다는 관점을 가져야한다”고 지적했다.


 | 특별기획팀 | 등록일 : 2007.03.16

 

대통령도 깨지 못했던 ‘8학군’
‘교육특구 강남’과 학군 조정의 역사 [실록 부동산정책 40년 (17)] 교육과 부동산

 
국정브리핑이 주택도시연구원·국토연구원·금융연구원과 공동으로 기획한 <실록 부동산정책 40년>은 ‘제1부, 왜 올랐나’에 이어 '제2부, 어떤 정책을 폈고, 왜 못잡았나' 를 통해 정부의 부동산 정책이 어떤 우여곡절 끝에 탄생 했으며 역사적 의미와 쟁점은 무엇인지 점검한다. 2부의 세번째 주제로 <가수요억제와 실수요 전환>을 5회에 걸쳐 연재한다. <편집자>
제2부 어떤 정책 폈고, 왜 못잡았나
1.<투명성과 형평성 제고 정책>
2.<안정적 주택공급 정책>
3.<가수요억제와 실수요 전환 정책>
① 분양가규제 논란의 역사
② 실수요자에게 혜택을-주택청약제도 변천
③ 토지투기 억제와 토지공개념의 변형
④ 뜨거운 감자 재건축
⑤ 교육과 부동산
⑥ 균형발전

‘강북에서 용났다. XX학원 출신 서울대 합격생 총 141명’
최근 서울의 버스에 붙여진 학원 광고는 강남·북 간의 교육 문제를 잘 보여준다. 강북 지역의 고등학교에 다녀서는 공부를 잘해도 좋은 대학에 가기 어려운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반대로 유명한 사설학원이 몰려있고 교육환경이 좋은 강남의 학교에 다니면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사회적으로 성공할 확률도 높다는 것이 거의 공식처럼 굳어지고 있다. 강남의 학교에 다니려면 고가 아파트가 즐비한 강남에서 살아야 하고, 결국 부모의 경제적 능력이 자녀의 명문대학 진학으로 연결되는 셈이다. 소위 ‘개천에서 용나는’ 우리 사회 ‘기회균등’의 신화가 급속도로 무너지고 있다.

대한민국 부모의 자녀 교육열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부모세대는 교육이 출세의 확실한 사닥다리임을 절감했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대한민국의 부모들이 좋은 교육시설이 몰려있는 강남으로 진입하려는 노력은 나무랄 일이 아니다.

문제는 어떤 이유에서든 '강남의 집중화'는 여러가지 사회경제적 악순환을 낳고 있다는 점이다. 교육특구 강남의 수요가 이 지역 아파트값을 끌어올리고, 또 주변 지역과 수도권의 집값을 차례로 밀어올리는 동심원 현상을 일으킨다. 주택수요를 좌우하는 ‘입지여건’ 측면에서 부동산 가격변동의 핵심 요인 중 하나가 교육인 셈이다.

반면 강남에 진입할 수 없는 대다수 보통 부모들은 상대적 박탈감을 가진다. 부동산 정책을 놓고 논란이 벌어질 때마다 균등한 교육기회 제공 문제와 8학군 조정 목소리가 나오는 것도 이때문이다.

‘8학군병’이라는 신조어가 생겨나고 강남이 교육특구로 자리잡은 1980년대 이후, 이 두가지 상반된 시각의 이해충돌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강남 이전 명문고를 다시 강북으로 옮길 계획은?”

2003년 9월 23일 서울시교육청 국정감사 현장. 부동산 가격 급등의 원인으로 강남의 교육환경이 지목받을 때였다. 당시 민주당 이재정 의원은 유인종 서울시교육감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 “혹시 강남에 이전했던 명문고들을 다시 강북으로 옮겨올 계획은 가지고 계시지 않나요? 과거에 강북에 있던 학교들 가운데 일부 강남으로 이전했던 학교들을 다시 강북으로 환원시킬 수 있는 방안은 한번 연구해볼만 하지 않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유인종 교육감은 이렇게 답했다. “그것은 실질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연구의 가치는 있습니다만 실질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강남 8학군 신화는 명문고 이전으로부터 시작됐다. 서울 경기고의 강남 이전을 알리는 1972년 2월 29일자 조선일보.
이날 이 의원이 말한 ‘강남으로 이전했던 학교들’이란 1974년 평준화되기 이전까지 전국적인 명문고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던 경기고·서울고·휘문고 등이다. 이 학교들은 1970년대 서울시 인구분산책의 하나로 강남으로 이전돼 강남 8학군 신화 탄생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학군이 중요하게 된 것은 1980년부터. 당시 서울시교육위원회는 고등학교 배정기준을 출신중학교 중심에서 거주지 중심으로 바꾸고 공동학군제를 폐지했다. 공동학군제란 정부가 1974년 평준화를 도입할 때 ‘도심지역 거주학생만 도심지에 몰린 명문고에 지원하면 불공평하다’는 외곽 지역의 불만을 고려, 서울의 모든 중 3학생에게 문호를 개방한 제도를 말한다. 당시 서울시교위가 학군제를 변경한 것은 통학의 불편을 없애기 위해서였다.

8학군의 탄생…현대판 ‘맹모삼천지교’

학군배정 기준이 거주지 중심으로 바뀌자 강남지역에 8학군이 탄생하고 8학군 지역에 몰린 명문고를 쫓아 사람들이 이동하는 ‘8학군병’이 태동했다. 평준화 이후에도 학교간의 우열차가 나타나는 상황이었다.

여기에 같은 해 과외금지조치가 취해지면서 학교 교육은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해졌다. 교육열에 불타는 한국의 ‘맹모’에게 명문고가 몰려있는 8학군이 커다란 유혹으로 작용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현상이었다. 1981년 10월 중앙일보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한다.

“고교평준화 후 명문고에 자녀를 보내기 위해 주민등록을 허위로 옮기는 현상이 늘고 있다. 서울 강남의 대치동·삼성동·서초동·청담동 등 명문고들이 몰려 있는 지역은 허위세입자가 많아 실제로 거주하고 있는 학생들이 학교배정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먼 곳의 학교로 배정되는 사례가 적지 않다. 허위전입이 부쩍 늘자 서울 대치동 한 아파트 주민들은 며칠 전 반상회에서 ‘친척·친지들의 허위전입 부탁을 받지 말자’는 색다른 건의를 하고 관할 동사무소에 허위 전입자를 철저히 가려내줄 것을 요청했다.”

부동산 투기꾼 8학군에 눈독

근거리 배정 원칙의 평준화가 자리잡으면서 명문고 주변으로 위장전입하는 이들이 늘어났다. 1981년 10월 30일자 중앙일보.
이후 위장전입자 단속은 연례행사처럼 계속된다. 1982년 9월 명문고 배정을 목적으로 한 위장전입 관련자는 모두 처벌한다는 발표가 나자 8학군 명문고 주변 동사무소에 전출 신청자의 긴 행렬이 늘어서기도 했다. 이처럼 교육열을 가진 중산층 학부모가 몰리면서 경기고·서울고 등 기존 명문고에 이어 신흥 명문고가 하나둘 등장했다. 곧 8학군은 대입에서 단연 두각을 보이기 시작했다.

투기꾼이 명문고가 몰린 8학군을 놓칠 리 없었다. 게다가 8학군 지역은 계획개발 덕택에 쾌적한 주거환경이 조성돼 있었다. 이 지역에 눈독을 들인 투기꾼은 1982년 중반 이후 부동산 경기가 살아나기 시작하자 본색을 드러낸다. 당시 정부는 1978년 이후 침체된 주택경기를 되살리기 위해 힘겹게 노력하고 있었다. 8학군에 되살아난 주택경기가 더해지자 ‘상승작용’이 발생했다. 서울 개포동 등 강남지역에 투기판이 벌어진 것은 예견된 일이었다.

투기대책으로 8학군 조정 등장

부동산 투기 대책의 일환으로 서울 8학군 조정 문제가 대두했다. 1983년 9월 8일자 중앙일보.
1982년 10월 27일 국회 건설위원회. 민주한국당 최수환 의원이 당시 횡행하던 투기의 원인을 캐묻고 있었다. “개포동이나 압구정동에 수요자가 몰리는 것은 바로 학군이 좋기 때문입니다. 학군이 좋다는 것은 건설부와 관계없는 문제이기 때문에 건설부는 엉뚱한 곳에서 문제점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이관영 당시 건설부 차관도 학군 문제를 수요 집중 원인 중 하나로 인정했다. “투기발생 원인을 살펴봤습니다. 첫째 학군 등 주변 환경으로 인해 주택수요가 급증하고 있는 것이 원인의 하나라고 분석했습니다.”

곧 8학군 조정 문제가 등장한다. 1983년 9월 당시 구본석 서울시교육감은 명문고가 밀집돼 있는 8학군 등의 학군이 아파트 투기붐과 전입학 적체현상을 빚는 등 문제점이 있다고 지적, 1985년부터는 이를 대폭 조정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지하철 3, 4호선이 개통되면 통학거리와 학군에 따른 아파트 투기 우려 등을 고려, 1985년부터 고교의 경우 2개 학군 정도를 추가해 8학군 학교의 분산을 꾀한다는 내용이었다.

강남 전입 신참 527명 강제로 강북 배정

서울시교위는 산하에 ‘서울시내 인문계 고등학교 학군조정위원회’를 발족해 조정 작업에 착수했다. 그러나 2년이 지난 1985년 10월 이 방침은 보류된다. ▲신설 지하철의 통학 기여도가 4.6%로 예상보다 낮게 나타났고 ▲문교부 산하 교육개혁심의회에서 선지원 후선발 등 고입제도 자체를 바꿀 움직임이라는 이유에서였다.

문교부는 1984년부터 학력저하 등을 이유로 고교평준화 정책을 재검토하고 있었다. 그러나 서울 지역에 선지원 후시험제를 도입하자는 문교부의 논의는 결국 무산됐다. 이에 연계해 학군조정을 하기로 했던 서울시교위도 ‘뜨거운 감자’였던 학군문제를 건드리지 않았다.

1986년 서울시교위는 8학군 등 특정학군에 학부모들이 몰리는 현상을 막기 위해 일종의 대안을 내놓는다. 바로 전입학생의 거주기간 원칙 적용이었다. 이 제도가 실시되면서 1986년 8학군 졸업생 중 거주기간이 1년 이내였던 527명이 강북의 다른 학군 학교로 배정됐다.

그러나 근본적인 해결책은 될 수 없었다. 강남 교육수요는 해마다 늘어났고 1990년대에 이르자 강제로 타학군에 배정된 학생의 수는 3000여 명을 훌쩍 넘어섰다. 40개월이 넘는 거주기간이 적용됐으나 강남 수요는 줄어들지 않았다.

'8학군병'·'강남특구' 신조어…8학군발 부동산 가격 폭등

1987년 중반에 이르면서 ‘강남 가면 명문대 간다’는 ‘8학군병’이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8학군병’ 기획시리즈를 보도한 1987년 3월 3일자 중앙일보.
1987년에는 ‘8학군병’, ‘서울교육시 강남특별구’라는 신조어가 등장했다. 평준화 실시 이후 ‘학교차’가 해소된 반면 ‘지역차’가 생긴 셈이다. 비평준화 시절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면 실력이 없었기 때문이었지만 평준화 이후에는 ‘돈이 없어서 강남에 못 갔기 때문’이라는 말이 나돌았다.

8학군은 많은 이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1987년 고등학교 배정통지서를 나눠주던 날, 서울 강남의 중학교 담임교사는 학생들을 달래야 했다. “흔히 강남의 고교라야 대학에 진학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타학군에 진학하면 크게 낙담하는데 그 생각들이 잘못됐다는 것을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타학군 배정통지서를 받아든 한 학생은 이내 울음을 터트렸다. 당시 학생들이 8학군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짐작케 하는 장면이다.

8학군에 대한 수요는 점점 늘어 불씨만 댕기면 언제든지 주택가격 폭발로 이어질 기세였다. 8학군인 서울 강남의 삼성동, 역삼동, 청담동, 서초동 등 명문고 배정 안정지대에서는 전세값이 집값과 비슷해졌다. 4년 전부터 매물이 없어 거래가 끊긴 상태라 전세값만 상승했기 때문이다.

전세 입주자의 40%가 “학군 때문에”

당시 주택공급은 사상 최저 수준을 기록하고 있었다. 반면 3저 호황으로 소득이 늘어나 주택수요는 계속 늘어났다. 곧 집값이 폭등하기 시작했다. 서울 강남, 그중에서도 8학군의 대형아파트를 중심으로 급등세를 보였다. 1989년 2월 서울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51평형은 2억9000만원으로 보름 사이에 3000만원이 올랐다. 하룻밤 사이에 넉 달 치 월급만큼 집값이 오른 셈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당시 평균임금은 한달 43만여 원이었다.

집값이 오르자 내 집 마련을 포기한 전세 수요자가 늘었다. 8학군 지역도 사정은 마찬가지. 명문고를 찾아온 전세수요자로 전세값은 천정부지로 뛰었다. 1989년 3월 서울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48평형은 1988년 12월 8000만원이었던 전세값이 1억원에도 물건을 구하기 힘든 상태가 됐고, 대치동 쌍용아파트 31평형은 같은 기간 1500만원이 오른 5500만~6000만원에 전세계약이 이뤄졌다. 이 시기 주택사업협회가 서울 강남의 압구정동 6개 아파트단지 955가구를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조사대상자의 39.9%가 학군 때문에 강남에 살고 있다고 답했다.

경제기획원이 나서 다시 학군조정 논의 시작

집값을 안정시키기 위해 선지원 후시험제를 검토하겠다는 정부의 방침을 다룬 1989년 2월 4일자 경향신문.
정부는 1989년 2월 이형구 경제기획원 차관 주재로 부동산실무대책위원회를 열어 부동산 가격을 안정시키는 방안 중의 하나로 학군조정을 검토하기로 했다. 당시 정부는 “서울 강남 지역의 8학군이 인기가 높아 이곳 아파트가 투기대상이 되고 있다”며 “8학군 학교의 일부 학생을 지역에 관계없이 선지원 후시험 방식으로 뽑거나 서울 강북 지역 학교를 명문 학교로 중점 육성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정원식 문교부장관도 같은 해 4월 경제·사회균형발전확대회의에서 “학군문제는 투기뿐 아니라 교육 차원에서도 시정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며 “특히 서울 강남의 8학군은 심각한 사회문제를 낳고 있기 때문에 조정이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이어 정 장관은 평준화 정책은 유지하면서 학군의 광역화와 수험생의 학교선택권을 제한적으로 인정하는 내용의 개편안을 마련해 다음해부터 시행하겠다는 내용을 밝혔다.

서울시교위가 마련한 안은 ▲서울 전역 단일학군제 ▲4~5개의 광역학군제 ▲혼합학군제(1지망은 학군 관계없이 지원하고 2지망부터 소속 학군 학교에 지원하는 방식)였다. 그러나 8월 서울시교위는 ‘서울시 고교의 학군조정방안은 문교부가 내신제의 등급간 격차를 높이는 방향으로 대학입시제도를 개선해 시행하겠다는 계획과 맞춰 제시될 것’이라는 이유를 들어 다시 학군조정방안을 보류한다.

대통령도 깨지 못한 8학군

막강한 대통령의 힘도 8학군을 깰 수는 없었다. 1990년 2월 노태우 대통령은 “서울의 8학군은 이상과열로 아파트 가격을 자극하고 사회적 위화감을 초래했다”며 새로운 방안이 내년부터 실시될 수 있게 하라고 지시했다.

문교부는 곧 행동에 나섰고 서울시교위는 고교학군제를 재조정하기 위해 다시 ▲단일학군제 ▲5개 광역학군제 ▲혼합학군제를 들고 나왔다. 이번에는 서울 시내 314개 중학교 3학년생 14만명을 대상으로 모의배정을 실시했다.

결과는 학군 조정에 부정적이었다. 학생들은 인기 학교를 선호했고 통학거리는 2배 이상 늘어났다. 8학군의 한 학교는 단일학군으로 했을 때 1지망자가 정원의 14배를 넘었다. 결국 조정 시도는 무산됐다.

통학거리가 늘어나고, 30%에 달하는 학생이 원치 않은 학군에 배정돼 어떤 안을 선택하더라도 심한 반발과 부작용이 예상된다는 이유에서였다. 문교부는 8학군 폐지 대신 비8학군 지역, 특히 강북지역에 제2과학고를 설립하는 등 지원을 통해 서울 시내 모든 학군을 8학군 수준이 되도록 하겠다는 원론적인 계획을 밝힌다.

잠잠해진 ‘8학군병’

1991년에 접어들면서 ‘8학군병’은 조금씩 잦아들기 시작했다. 8학군 거주배정자 수를 살펴보면 이런 현상이 잘 드러난다. 1980년 이후 1990년까지 매년 1200~3000명 가량 늘어나던 8학군 고교배정 대상자 수는 1991년 상승세가 둔화하더니 이듬해에는 처음으로 감소해 124명이 줄었고 1993년에는 267명이 줄었다. 1998년 8학군 지역 중학교 졸업생이 고교 정원에 크게 미달해 인근지역에서 역배정되는 현상을 빚을 것이라는 분석도 나왔다.

내신 반영 비중 강화라는 대입정책 변화의 영향이 컸다. 1994학년도 대학입시(대학수학능력시험 1세대로 1991년 고등학교 1학년)에서 내신의 비중이 높아졌다. 경쟁이 치열한 8학군 학교에서 나쁜 내신 성적을 받느니 상대적으로 덜 치열한 다른 학군 학교에서 좋은 내신 성적을 받는 것이 유리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늘어났다.

정부의 공급 확대와 투기수요 억제 정책이 힘을 발휘하는 상황에서 8학군병이 가라앉자 8학군 지역 집값도 안정되기 시작했다. 1994년 다른 지역의 아파트값이 8학군 지역보다 비싼 ‘기현상’이 발생했다. 당시 서울 대방 대림아파트, 마포 삼성단지 등의 아파트값은 압구정동 현대 아파트 등 8학군 아파트값을 앞질렀다.

1995년 3월 한 건설사가 실시한 조사는 이런 현상을 뒷받침한다. 당시 조사에서 서울 사람은 집을 살 때 교통환경을 최우선적으로 고려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1980년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던 학군은 겨우 3%를 차지한데 반해 교통환경은 45%를 차지해 대비를 보였다.

강남 명예회복의 일등공신 ‘대치동 아줌마’

서울 강남구 대치동 학원가는 강남의 명성을 되살렸다. 사진은 2003년 6월 서울 강남구 대치동 대로 옆 건물에 입주한 학원들.
IMF 외환위기 이후에는 사교육이 강남 인기를 주도했다. 서울 강남구 대치동 일대 학원가는 2000년 4월 헌법재판소의 과외 금지 위헌 결정 이후 급속도로 성장했다. 명실상부 ‘사교육 1번지’가 된다. 2001년 말 수능시험이 어렵게 출제되면서 사교육의 중요성이 절실해지자 너나할 것 없이 학부모와 학생이 대치동 부근으로 몰려들었다.

여기에는 분당과 일산 등 경기도 신도시 지역에서 고교평준화가 시행된 것도 큰 영향을 미쳤다. 분당· 일산의 명문고 진학을 노리던 신도시 학생과 학부모들이 대거 강남으로 진입했다. 사교육 뿐 아니라 이 지역에 나타난 명문 초등·중학교도 ‘교육1번지’의 가치를 높였다. 2001년 말 이후 강남구 대치동은 언론의 단골메뉴로 등장, 더욱 인기를 끌게 된다.

대치동 은마아파트가 부동산 시장의 스타로 등장한 것도 이때였다. 은마아파트는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주변 아파트에 밀려 시장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상대적으로 적은 평수만으로 구성된 오래된 아파트라는 점, 주차시설 등 편의시설이 부족하다는 점 때문이었다. 은마아파트 34평형은 2001년 11월 3억8000만원이었는데 이는 근처 우성아파트 31평형과 같은 가격이었다.

그런데 수능시험 여파가 몰아닥친 2001년 12월 가격은 4억2500만원으로 한 달 사이에 4500만원이 훌쩍 뛰어올랐다. 2007년 1월 현재 13억4000만원을 기록하고 있다. 1979년 12월 입주 당시 2139만원이었던 것에 비하면 가공할만한 가격상승이다. 이는 재건축 기대효과도 있겠지만 전국 최강의 사교육과 공교육 여건이라는 프리미엄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는 평가가 많다.

사교육 1번지, 집값 폭등 1번지

한국개발연구원(KDI)은 2003년 6~7월 학원이 강남 부동산 시세에 미치는 영향을 조사한 적이 있다. 조사결과에 따르면 서울 시내 부동산 중개인 433명의 38.2%가 유명학원이 집값에 20~40% 정도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답했다. 23.8%는 60% 이상, 22.8%는 40~60%라고 대답했다. 사교육 시장이 집값 형성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런 현상은 비단 강남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서울 목동이나 중계동처럼 사교육 시장이 발달한 지역의 집값은 다른 지역에 비해 강세를 보이고 있다. 집값이 비싼 목동과 강남구 뿐 아니라 서울 중계동도 학원이 밀집한 ‘은행사거리’ 학원 근처 아파트는 30평형의 경우 5억원을 넘어서지만 지역을 벗어나면 가격이 2000만~5000만원 이상 떨어진다고 한다.

최근에는 교육환경이 좋은 지역에서 좋은 학교로 진학한다는 결과가 나오면서 수요는 더욱 몰리고 있다. 2006학년 서울 지역 6개 외고와 경기 용인시 한국외대부속외고 입학생의 출신지를 비교해본 결과 노원구와 강남구, 양천구 순으로 드러났다. 모두 학원 밀집지역으로 유명한 지역들이다.

지방도 마찬가지다. 대구 수성구나 대전 서구 둔산동 등 대표적인 지방 8학군으로 불리는 이 지역에는 명문 학교 뿐 아니라 사교육 환경까지 발달해 있어 학부모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부동산 해법에서 교육은 빼라”

2002년부터 정부는 강남 지역을 중심으로 급등한 아파트값 상승을 막기 위해 여러 대책을 내놓는다. 그런데 부동산 정책에 교육문제를 포함할지를 놓고 부처간에 이견이 존재했다. 경제부처는 강남 집값 상승의 중요한 원인으로 학원 등 교육문제를 들었으나 교육부는 집값 문제 때문에 교육 시스템을 바꿀 수는 없다는 인식을 보였다. 게다가 학원 등 사교육에 손을 댈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2000년 헌법재판소의 과외 금지 위헌 결정 이후 학원 통제가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2003년 10월 24일 오후 정부 종합청사 9층 회의실에서 열린 국무위원 간담회에 참석한 김진표 교육부총리와 윤덕홍 교육부총리가 부동산 대책과 관련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교육문제를 직접적으로 손댈 수 없었던 경제부처는 우회로를 택했다. 판교신도시에 강남의 사교육 수요를 분산할 수 있을 정도로 훌륭한 학원단지를 유치한다는 계획이었다. 2003년 9월 건교부가 밝힌 이 계획은 교육부의 강한 반대에 부딪혀 결국 무산된다. 이후 부동산 대책을 준비할 때마다 교육문제가 거론됐지만 대책에 포함되지는 못했다.

강팔문 전 건교부 주거복지본부장(현 익산지방국토관리청장)의 말이다. “강남 문제를 해결하면 전체적인 핵심문제는 해결할 수 있다고 봤습니다. 강남 집값 상승의 주요 원인 중의 하나인 공급 부족은 사실 수요 때문에 생기는 겁니다. 수요를 차단하려고 할 때 가장 큰 원인이 교육에 있으니까 그런 점에서 교육 문제를 계속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면 교육부나 언론 등에서 강하게 비판합니다. 집값을 잡기 위해 아이들의 교육문제를 건드리느냐는 주장이었습니다. 언제나 대책 마련 초기에는 교육 문제가 한 부분을 차지했지만, 발표할 때에는 결국 빠지고 말았습니다.”

EBS 수능방송과 고1 자퇴생

부동산 문제 때문에 백년대계를 망칠 수 없다는 입장을 보였던 교육부는 정공법을 내놓는다. 우선 2002년 3월 18일 ‘공교육 내실화 대책’을 발표했다. 학교의 입시교육 경쟁력을 강화해 과외 등 사교육을 받지 않아도 되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강남 수요가 줄어들지 않자 교육부는 2004년 2월 17일 ‘사교육비 경감대책’을 마련했다. EBS와 연계해 수능시험 문제를 출제하고 대입에 내신 비중을 더 높이겠다는 내용이었다.

이는 곧 2008학년도 대입제도 개선으로 이어졌다. 교육부는 2004년 6월 대입에 내신 반영 비중을 50% 이상 강화한다는 내용을 내놓았다. 내신 강화는 1990년대 초 강남 지역의 인기가 수그러들었던 중요한 요인 중의 하나였다. 그래서인지 매년 1~2월이면 강남 등 학군 선호 지역을 중심으로 집값이 크게 움직이던 현상이 2007년에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부작용이 발생했다. 내신성적을 올리기 위해 휴학하는 고교 1년생이 등장했다. ‘새 학기가 다가오면서 휴학하거나 자퇴 뒤 재입학하는 방법에 대해 문의하는 학부모의 전화가 자주 걸려온다’는 서울시교육청 관계자의 이야기는 이런 현상을 대변하고 있다. 또한 내신을 믿을 수 없다며 대학들이 논술시험을 강화하기로 해 한바탕 ‘본고사’ 부활논란이 벌어지기도 했다.

장기적 대안과 단기적 대안

2006년 12월 7일 오후 서울 방배동 서울시교육연수원에서 열린 서울 지역 후기일반계고교 학교선택권 확대를 위한 제2차 공청회장에 조속한 학군조정을 촉구하는 피켓이 내걸려 있다.

강남 8학군 조정 문제는 2003년 “강남 집값을 안정시키기 위해 교육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입장을 보였던 김진표 당시 경제부총리가 2005년 교육부총리로 취임한 뒤 또다시 거론됐다. 그해 8월 23일 국회 예결산위원회에서 김진표 당시 교육부총리는 학군 조정에 긍정적 입장을 보였다.

“현재도 학생들의 선택권을 제한된 범위에서나마 좀 넓혀주기 위한 방법으로 평준화 지역에서 모든 학생들에게 선복수지원을 할수 있게 해주고 나서 추첨배정을 하는 시스템으로 운영하고 있는데 이 부분을 우선 확대시행하면서, 학군을 조정하는 방법도 하나의 대안으로 서울시교육감·교육위원회와 함께 협의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강남·북간 차이 문제를 해결하는데 가장 좋은 방법은 강북의 교육환경 개선이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강북에 강남과 같은 교육환경을 갖추도록 한다는 것은 교육부의 오랜 방침이었다. 그러나 이는 확실한 정책적 의지와 시간이 걸리는 문제다. 1990년 문교부가 서울 시내 모든 학군을 8학군 수준이 되도록 하겠다는 방침을 밝힌 지 15년이나 지났지만 현실적인 격차는 여전한 상태였다. 그러는 동안 강남 지역의 집값은 지속적으로 상승했다. 김 부총리는 이런 상황 속에서 학군 조정이 ‘단기적으로’ 좋은 대안이 될 수 있다는 입장이었다.

서울시교육청은 용역작업을 거쳐 2007년 2월 27일 학군조정안을 최종 확정했다. 2010년부터 적용될 새로운 학군제에 따르면 서울의 중3 학생은 강남을 포함한 서울 전역의 고교에 지원할 수 있게 된다. 각 고교는 1단계에서 서울 전 지역 학생으로부터 지원을 받아 정원의 20~30%를 추첨을 통해 배정한다. 2단계에서는 거주지 학군 학생의 지원을 받아 정원의 30~40%를 추첨 배정한다. 나머지는 3단계에서 희망과 관계없이 거주지 및 인접학교에 배정된다.

이같은 ‘학교선택권 확대안’은 공정택 서울시교육감이 “서울 교육사(史)에 한 획을 긋는 역사적인 날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큰 의미를 갖고 있다. 1983년 이래 논의만 무성했던 8학군 조정문제가 24년만에 이뤄졌고, 8학군 등장 30년만에 ‘강남구에 거주해야 8학군에 간다’는 원칙이 깨졌기 때문이다.

학군조정은 강남 8학군 지역 고교에 가정 형편상 갈 수 없었던 교육수요를 해결하고 집값에서의 ‘교육 프리미엄’을 낮춰 부동산 시장을 안정시키는데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는 있다. 그러나 통학거리가 길어져서 생기는 부작용과 사교육 시장의 변수는 앞으로도 풀어야 할 숙제다.

회의 거듭해도 ‘뾰족한 수가 없다’

다른 대안은 없을까. 2005년 8월 김진표 당시 교육부총리는 국회에서 “장기적으로는 강북 지역의 교육환경 개선이 동반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번 학군 조정으로 8학군에 대한 갈증은 해소할 수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전 지역의 교육환경이 8학군 수준으로 좋아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8학군에 대한 수요는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시설 부분은 교육 당국의 노력으로 해결할 수 있지만 사교육 환경이나 학부모의 열의 등은 정부의 노력만으로 조성하기 힘들다.

흔히 교육문제는 부동산문제보다 풀기 어려운 숙제라고 한다. 김수현 청와대 사회정책비서관의 말은 정부가 처한 어려움을 잘 보여준다. “교육 문제는 부동산 문제보다 상위의 고질병입니다. 이는 현재의 부와 그 부를 자녀에게 물려주길 원하는 한국적 특성, 그리고 그것이 발달시키는 사교육 체계에 원인이 있습니다. 근본적으로는 교육을 통해 뭔가를 재생산하려는 욕구를 눌러야 합니다. 하지만 이는 교육부나 몇 개 교육청이 가진 제도로는 해결하기 어렵습니다. 8·31정책을 준비하는 관계부처 회의에 참여한 교육부도 ‘뾰족한 수가 없다’는 입장을 보였습니다.”

이처럼 풀기 힘든 교육문제는 부동산 문제와 연결돼 상승작용을 일으키고 있다. 과거 학교차는 지역차로 변질됐고, 지역차는 계층화로 고착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강남 지역에 모여든 부유층은 좋은 교육환경을 독점하고 있고, 이를 바탕으로 ‘그들만의 리그’를 만들어 부를 세습한다는 ‘질시’를 받고 있다.

강남역사=중산층 역사, 부촌 이미지로 강남수요 이끌어

중산층 중심으로 시작된 서울 강남의 역사는 아파트 단지의 영향이 크다. 사진은 서울 강남의 아파트 단지.
역사는 반복된다고 했나. 강남의 형성 과정을 본다면 장기적인 해법을 찾을 수도 있다. 강남의 역사는 중산층 중심으로 시작됐다. 이는 서울 강남과 서초 지역의 대졸 이상 학력 소유자의 비율을 보면 잘 드러난다. 1980년 서울 강남과 서초 지역의 대졸 이상 학력 소유자의 비율은 25.3%로 서울 전 지역 평균(8.6%)의 4배에 달했다. 불과 5년 전만 하더라도 6.2%로 오히려 서울 전체 평균(6.7%)보다 낮았던 점을 감안하면 놀라운 증가세다.

이는 이 시기 조성된 아파트 단지의 영향이 크다고 할 수 있다. 1980년 강남 지역 내에서 방 4개 이상을 가진 아파트 점유율을 보면 60%에 달했다. ‘잘사는 사람’이 많이 사는 부촌의 이미지가 형성돼 중산층의 눈길을 끌 수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1970년대 정부의 강북 억제 정책으로 여러 서비스산업이 강남으로 유입되면서 생활의 편리함까지 갖춰진 상태였다. 이 지역에 몰린 중산층이 가진 구매력은 새로운 상업시설을 들여오는데 큰 영향을 미쳤고 이는 또다른 강남 수요를 이끌어냈다.

장기적 해법을 찾아라

1970년대 이후 학력을 바탕으로 새롭게 등장한 신중산층에게 자녀교육은 물론 주거 등 생활의 편리함까지 고루 갖춘 강남 지역은 커다란 흡입력을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이들이 한정된 공간에 모여들면서 보다 좋은 교육여건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이는 서울 목동 지역에서도 나타나는 현상이다. 과거 대학 입시 성적이 좋지 않았던 학교나 신생 학교가 명문고로 부상한 데에는 중산층의 힘이 작용했다.

해법은 중산층을 끌어들일 수 있을 만큼 살기 좋은 주거환경을 만드는데 있다고 할 수 있다. 정부가 살기 좋은 강남대체 신도시 개발을 이야기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물론 쉬운 일이 아니다.

당장 강북 지역을 강남 수준으로 재개발하면 될 것 같지만, 이는 비용도 비용이거니와 서울 집중 현상을 폭발시킬 수 있다. 이는 전체적인 부동산 가격 상승과 교통 문제 악화 등 갖가지 부작용을 가져오기 때문에 결코 쉬운 문제만은 아니다.

정부는 당장 학군 조정으로 실마리를 찾았다. 그러나 이는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라는 점에서 정부의 고민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 영국도 ‘학군’ 정상화 노력

영국에서도 학군이 부동산 가격을 끌어올리는 현상이 발생, 이를 해결하기 위해 대책마련에 나섰다. 2007년 1월 영국의 앨런 존슨 교육부장관은 공립학교 학생 선발 때 추첨제를 실시하고 각종 ‘보이지 않는 장벽’을 없애, 모든 학생에게 ‘공정한 기회’를 제공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이는 부모의 능력에 따라 자녀의 학교가 결정되는 기존 방식을 바꾸겠다는 취지다.

영국의 명문 공립학교는 ‘보이지 않는 장벽’을 세워놓고 있다. 우리는 강남 지역에 살면 강남의 고교에입학할 수 있다. 그러나 영국에선 그럴 수 없다. 학군 내에 살고 있다고 하더라도 각종 장애물을 통과하지 못하면 입학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근거리 배정으로 명문학교 주변 집값 상승을 경험한 영국도 학군조정에 나섰다. 이를 보도한 2007년 1월 10일자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지.

영국의 소수 명문학교가 학생을 선발할 때 성적이 우수한 소수의 학생을 제외하고는 ▲가족을 면담, 경제적으로 학교에 도움을 줄 수 있는지 ▲수학여행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지 등을 제시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2006년 발간된 보고서에 따르면 374곳의 학교 중 약 25% 가량이 적어도 한 가지 이상의 잠재적으로 선택적인 기준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문제가 제기되자 영국 교육부는 2006년 9월 이런 관행을 철폐하기로 방침을 결정했다.

그러나 장벽을 제거한다고 하더라도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시험을 통해 학생을 선발하는 사립학교와 달리 영국의 공립학교는 학교와 가까운 곳에 사는 이들을 우선적으로 선발하는 근거리 배정제를 적용하고 있다. 그래서 명문 공립학교 근처 주택은 교육열이 높은 중산층 이상의 계층이 거의 독점하다시피 하고 있다. 경쟁이 치열하기 때문에 집값도 비싸다.

영국의 일간지 ‘가디언’의 2006년 3월 보도에 따르면 영국의 ‘8학군’인 런던과 남동부 지역의 톱클래스 초등학교 인근 집의 프리미엄은 집값 평균의 25%에 해당하는 6만1000파운드(우리돈 1억405만원)를 호가할 정도라고 한다. 학교에서 100m 멀어질 때마다 프리미엄은 8% 가량씩 떨어진다고 한다. 주로 중산층의 자녀가 지원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프리미엄은 큰 편이다.

중산층 가정 출신의 학생들은 명문학교에, 가난한 집 출신은 성적이 좋지 못한 학교에 몰리는 경향이 나타났다. 영국 일간지 ‘데일리 텔레그래프’ 보도에 따르면 전체 공립학교에서 무료급식을 받는 학생은 전체의 17%이지만 명문 공립학교에서 이런 학생은 전체의 3%에 지나지 않는다.

영국 교육부는 ‘장벽’을 제거하는 한편 신청자가 학교 정원을 넘는 경우 추첨을 실시해 학생을 선발하도록 했다. 이렇게 되면 굳이 명문 공립학교와 가까운 곳에 살지 않아도 명문학교에 진학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이 제도는 2월부터 실시돼 2008학년도 신입생을 모집할 때부터 적용된다. 각 학교들은 이 기준에 따라 학생 선발에 관한 세부지침을 만들어 시행해야 한다.

이런 정책은 물론 반발을 사고 있다. 근처에 사는 학생을 멀리 떨어진 학교로 보내야하고 멀리 살고 있는 학생을 버스에 태워 수송해야 하는 등 각종 부작용이 나타난다는 비판이다.
‘더 타임스’는 2007년 1월 11일자 기사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부모들이 평등이라는 명제 하에 자녀들에게 유리한 위치를 제공하려는 노력을 포기하고 좋지 않은 학교에 보내려고 할까? 물론 아니다. 그들은 아마 멀리 떨어진 시골지방으로 이사해 그곳에 있는 학교를 대신 ‘식민지화’ 할 것이다.” 도심 지역보다 넓은 시골 지역은 통학 문제 때문에 거주지 중심 배정원칙이 계속 적용될 예정인데, 학부모들이 이 틈을 파고들 것이라는 분석이다.

기사는 이어진다. “부모들이 사악하기 때문에 이러는 것이 아니다. 누구나 자녀에게 최고를 제공하고 싶기 때문이다. 부모들은 자녀의 학교를 선택하고 학교는 학생을 선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하면 나쁜 학교는 발전하지 못하고 결국 문을 닫을 것이다. 그것은 결국 모든 이에게 이익이 될 것이다.”

그러나 존슨 교육부장관은 ‘기회의 평등’을 강조하고 있다. 존슨 장관은 ‘데일리 텔레그래프’와의 인터뷰에서 “교육부가 마련한 기준은 부모의 경제적 능력 등 개인 배경에 관계없이 모든 학생이 그들이 원하는 학교에 진학할 수 있는 공정한 기회를 갖는 시스템을 만든다”고 말했다. 교통문제 등 다른 부작용이 발생하더라도 모든 학생이 부모의 능력에 공정한 기회를 갖도록 정책을 펴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말이다.

 | 특별기획팀 | 등록일 : 2007.03.19

 

서울은 차라리 방치하는 게…”
[실록 부동산정책 40년 (18)] 부동산 문제와 균형발전

 
“위성도시 10여 개를 더 만들고 그나마 위태 위태 남아있는 그린벨트 등 녹지를 모두 풀어 수도권 전역을 콘크리트로 뒤덮지 않고서야 (수도권에) 충분한 토지와 주택을 공급할 방법이 어디 있나. ‘토지’가 아니라 ‘허공’을 충분히 공급해 앞으로 서울 사람들은 모두 최소 60층짜리 건물에서 살아야 하고 도로도 복층, 복복층화 한다면 고개를 끄덕거릴 수 있을 것이다. 근본적인 수요 요인을 관리하지 않고 공급만 늘린다는 방책이 한계에 다다랐다는 것은 서울의 교통정책이 잘 보여주고 있다.”

‘신행정수도건설 특별법’에 대한 헌법소원이 제기된 지 10여 일 후인 2004년 7월27일자 머니투데이 김준형 기자는 칼럼을 통해 행정수도 이전에 대해 반대해 온 서울의 ‘집적의 경쟁력’이라는 시장논리가 얼마나 반시장적인지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연속 시리즈 형태의 이 칼럼은 이렇게 끝맺고 있다.

“시장실패로 인한 과다한 비용의 확산을 막고, 서울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서울 시민을 포함한) 국민들에게 좀 더 균질의 삶을 제공하기 위해, 서울 집값이 ‘거품’탓이 아니라 쾌적한 환경 덕에 진짜 오르게 하기 위해서라도 수도이전은 ‘적정한 규모’로 추진되는 게 바람직하다. 수도이전은 먼 장래를 바라보는 대한민국의 웰스 매니지먼트, 재테크이기 때문이다.” (김준형, ‘수도, 절대 못 옮겨가는 10가지 이유?’)

교통혼잡 비용이 서울시 예산 맞먹어

실제로 2002년 수도권 교통혼잡 비용은 서울시 한해 예산에 맞먹는 12조4000억원에 달했고 여전히 상승하고 있다. 또 폐기물 처리 등 수도권 환경개선 비용은 연간 4조원이 들고 있다. 서울의 경우 대기오염도나 공원면적 등 삶의 질 면에서도 선진국 대도시에 비해 극히 열악한 상황에 있다. 집적의 이익을 넘어 과밀의 폐해가 심각해지면서 오히려 수도권 경쟁력 약화 요인이 되고 있는 것이다.



2006년 한 해 동안 서울과 경기 지역 주택 가격은 각각 18.9%와 24.8% 올랐으나 부산(-0.6%)과 대전(-0.7%)은 오히려 집값이 떨어졌다. 이는 근본적으로 부동산문제의 해법이 수도권 과밀을 어떻게 완화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이는 과거 부동산값 상승기의 자료와 비교하면 더 명확해 진다. (전국 주택가격 관련 자료는 1987년부터 나왔기 때문에 이전에는 지가로 비교한다)

수도권 과밀이 부동산 문제의 원인

이른바 8·8조치라는 부동산 투기억제 종합대책이 나온 1978년의 경우 전국의 땅값은 전년에 비해 평균 49%가 올랐으나 서울은 무려 135% 상승했다. 몇 년 동안의 침체기를 거쳐 다시 부동산 투기바람이 불어 ‘토지 및 주택문제 종합대책’이 나온 1983년 역시 전국 평균 땅값은 전년 대비 18%가 올랐으나 서울은 57%나 뛰었다.

1980년대 후반에는 서민들의 이혼, 자살사태가 속출할 정도로 투기 열풍이 휩쓸며 집값이 치솟았다. 당시 투기붐이 정점에 달했던 1990년에도 전년대비 집값 상승률은 전국 평균이 21%였으나 서울은 24%였다. 가장 최근의 투기붐이 일기 시작한 2002년에도 서울의 집값 상승률은 전국 평균의 16.4%를 훨씬 웃도는 22%였다.

이와 함께 인구가 집중된 서울과 수도권의 주택보급률은 계속해서 전국 평균을 밑돌았다. 2005년 전국 주택보급률은 105.9%인데 반해 수도권은 96.8%, 서울은 89.7%에 머물렀다.이에 따라 대도시들만 놓고 비교하더라도 주택의 평당 분양가는 2003년 6월 기준으로 △서울 978만원 △부산 527만원 △대구 485만원 △광주 367만원 △대전 485만원으로 기록됐다.

수도권 집값 폭등과 지방경기 침체는 ‘동전의 양면’

국가의 각종 자원과 경제활동이 수십 년 동안 수도권에 편재된 결과 서울과 수도권은 교통난, 환경오염 등 각종 도시 문제가 양산되는 가운데 주기적인 부동산가격 폭등이라는 몸살을 앓아왔고 지방은 인구유출과 경제 침체가 심각한 상태로 방치되면서 정체와 무기력에 빠져 들었다.

따라서 부동산 문제의 측면에서 균형발전정책은 장기적으로 전국을 골고루 특성에 맞게 발전시켜 대부분의 국가기능과 시설의 집중에 따라 서울과 수도권에 몰려 있는 부동산 수요를 적절히 분산될 수 있도록 유도하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긴 안목으로 국가경쟁력 강화와 국민의 삶의 질 향상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수십 년 동안 주기적으로 되풀이 돼 온 부동산 투기붐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도 인구의 수도권 집중을 억제할 수 있는 균형발전 정책이 시행돼야 한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부동산 문제의 근원은 결국 수도권 집중에서 나온 것이고 보면 “균형발전이 부동산 안정의 근본적인 해결방안”(변양균 청와대 정책실장. 2006년12월8일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인 것은 분명하다.

‘나는 빼고 다른 사람들이나 보내라’는 것

행정수도 이전 계획은 이 같은 수도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의 회고다.

“1975년 사법연수원에 다니던 시절이었습니다. 어느 날 서울시 도시계획국장을 지냈던 손정목 씨가 도시학이라는 생소한 이름의 강의를 한 일이 있습니다. (중략)그 중 아직까지 잊혀지지 않고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떠오르는 인상적인 이야기 하나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서울은 만원이다. 서울 집중은 막아야 한다. 서울의 인구 집중을 유발하는 중요기관은 지방으로 보내야 한다’고 말하지만, 막상 당신이 가겠느냐고 물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말하는 사람 대부분이 힘 꽤나 쓰는 사람들이고 그 사람들의 생각은 ‘나는 빼고 다른 사람들이나 보내라’는 것이다” 대강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당시 그 말의 취지가 서울 분산을 찬성하는 것이었는지 반대하는 것이었는지는 잘 알 수 없었지만, 어쩐지 나는 그 말이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았습니다.”(2005년3월22일 국민여러분께 드리는 글)

노 대통령은 “지금 평가해 보니, 나는 강력한 분권주의자, 분산주의자이기는 하나 행정수도 이전계획은 분권전략이기보다는 수도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전략적 성격이 강했다”고 했다.

“행정수도 이전은 수도권 문제 해결 위해”

행정수도 이전의 정치적 논란은 차치하고라도 우리나라 부동산 문제의 근본적 해결을 위해서는 균형발전의 대의를 심각히 고민해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정부 관료와 외국 전문가, 시민·사회단체는 물론 현 정부의 균형발전정책을 비판하는 언론들조차 반론을 제기하지 못한다.

“(부동산값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단순히 세제 개편 등으로는 안 된다. 범국가적인 사회대개혁이 따라야 한다. (중략) 서울로의 인구 유입을 막지 못하면 아무리 서울에 집을 많이 지어도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밖에 안 된다. 범국가적인 균형발전을 위한 대개혁이 이뤄지지 않으면 안 되고 이 문제는 여야 정치권도 따로 없다”(박승 한국은행 총재. 2006년3월22일 기자 간담회)

“진정 수도권의 부동산 가격 안정을 위한다면 이 사태를 부동산 문제로만 접근해서는 해결할 수 없다. 부동산 가격급등과 투기문제 해결을 위해서라도 소신과 일관성 있는 지역균형발전을 펴야한다”(수도권과밀반대준비연대 성명 2006년11월15일)

“기본적으로 인구가 수도권으로 지나치게 집중된 것이 문제다. 한국의 인구 수도권 집중은 일본보다도 심각한데 이는 지방과 수도권의 격차 문제로도 이어진다. 이 때문에 수도권 부동산 가격이 급등하고, 지방으로까지 가격상승이 확산되는 부동산 거품의 패턴이 야기되는 것이다” (사카키바라 에이스케. 일본 와세다대 교수. 전 대장성 국제금융담당 차관. 서울신문 2007년1월1일)

“국민의 절반이 수도권에 몰려 사는 현실에서 국토를 고루 이용하지 않으면 부동산 문제의 근본적 해결이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동아일보 2007년1월30일)

모든 게 다 모이는 서울…누적된 악순환 이어져

서울을 중심으로 한 수도권 과밀 집중은 해방 후 정치적 격변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시작됐다. 서울은 오랜 기간 동안 왕도로서 권력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국민들의 수도지향적 가치관이 뿌리 깊었다.

여기에 1960년대부터 추진된 경제개발 최우선 정책으로 집적의 이점이 있는 서울과 수도권에 각종 경제활동이 집중되면서 사람들은 일자리가 풍부하고 다양한 수도권으로 몰려들었다. 구성원 사이의 경쟁이 치열한 한국과 같은 사회에서 취업과 소득수준을 결정짓는 중요한 기구인 고등교육기관도 서울에 집중돼 있어 인구유입의 큰 요인이 됐다.

국토개발연구원(현 국토연구원)이 펴낸 ‘국토50년’은 “수도권 과밀 집중은 한국사회의 변동을 공간적으로 투영해 놓은 결과이자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분석하면서 “‘사람을 낳으면 서울로 보내라’는 전통적인 가치관에다 모든 일자리와 정보, 자원과 인력이 서울로 집중되면서 교육, 의료, 문화 등 일상생활의 모든 측면에서도 지방에 비해 월등한 서비스가 제공됐고 집중의 누적적 악순환이 이어졌다”고 지적했다.

“도시계획 잘하면 더 몰려올 것…서울은 방치해야”

1963년12월부터 1966년3월까지 서울시장을 지낸 윤치영 씨는 “서울에는 도시계획을 전혀 하지 않아도 매년 20~30만 명씩 인구가 모여든다. 만약 도시계획을 잘 한다면 훨씬 더 많은 사람이 몰려올 것이므로 인구집중을 유발하지 않기 위해서도 도시계획은 안하는 것이 좋다”며 공언했다고 전해진다.(손정목, 서울도시계획이야기4)
이호철의 장편소설 ‘서울은 만원이다’가 동아일보에 연재되기 시작한 것도 1966년2월8일부터였다.


서울시 인구가 350만명인 1966년을 전후해 나온 얘기들이니 지금으로서는 엄살처럼 들리지만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100만명 이하로 떨어진 서울의 인구가 1954년 124만명, 1959년 210만명, 1963년 325만명 등으로 급팽창하던 시절임을 감안해야 한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연 평균 인구증가율이 10%를 넘는다면, 누구를 시장에 앉혀도 이 인구증가를 수용할 수 있는 기반시설을 건설해낼 수 없었을 것”이라면서 “당시의 서울에는 하수구가 제대로 없어서 비가 오지 않아도 진창이 되는 곳이 수두룩했다”고 기록했다.(대한민국史 2권 6부 역사를 통한 세상읽기 ‘서울, 40년 전부터 만원이었다-서울변천사에 대한 서울토박이의 넋두리’)

서울에 인구가 모일만큼 모인 후에는 서울 주변이 폭발적으로 팽창하기 시작했다. 서울의 외곽도시들은 1970년대부터 발달하기 시작해 성남·안양·부천 등이 시로 승격했고 1980년대에만 서울 주변의 13개 읍이 시가 되었다.

그 결과 우리나라는 전체 인구의 48%가 국토면적 11.8%인 수도권에 모여 있으며 의료기관의 50.4%, 금융기관 예금의 68%, 공공기관의 84%, 100개 대기업 본사의 91%가 수도권에 입지하는 세계 최고의 수도권 집중도를 보이게 됐다.

더욱이 수도권 인구조차도 수도권 전체에 고루 퍼져 사는 게 아니라 수도권의 17%에 불과한 ‘과밀억제 권역’에 81.9%가 밀집해 행정구역상으로는 서울, 인천, 구리, 고양, 수원 등 16개시에 1900만명이 넘는 인구가 몰려 살고 있는 기형적인 양상이다.

행정수도 이전은 마지막 정책적 수단

수도권 과밀 해소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하려는 ‘행정수도이전’ 계획의 역사는 수도권 집중의 역사와 궤를 같이 한다. 김광수경제연구소의 김광수 소장은 “서울과 수도권에 소재하는 중앙행정서비스 기능의 지방이전은 서울을 포함한 수도권 전체의 과도한 집중과 과밀의 심각성을 해소하기 위해 시도되는 사실상 마지막 정책수단”이라며 “수도의 개념은 과거 왕정시대와 같은 중앙집중적인 지리적 개념보다는 지방분산적인 기능적 개념으로 바뀌고 있다”고 설명했다.

균형발전 정책의 상징적 출발점이자 전환점이 되는 ‘행정수도 이전’ 계획은 1971년 대통령 선거 때 당시 신민당 김대중 후보가 대전으로 행정수도를 옮기겠다고 공약하면서 처음 등장했다. 서울에 무허가 판자촌이 우후죽순처럼 번지는 등 이미 1960년대부터 추진해 온 수도권 인구 억제정책들이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하던 때였다.

1977년 박 대통령 ‘임시행정수도’ 계획 밝혀

박정희 대통령의 '임시행정수도'계획 발표를 1면 보도한 1977년2월10일자 경향신문

이어 박정희 대통령은 1977년2월10일 서울시 연두순시에서 통일 때까지 정부기능을 수도권 남부지역으로 이전한다는 ‘임시행정수도’ 계획을 밝혔다. 앞서 1976년2월 신형신 제1무임소 장관은 박대통령의 지시를 받고 장관실에 ‘수도권 인구정책조정실’이라는 기구를 신설하고 서울인구집중억제책을 연구했다. 1977년 전반기에 거의 마무리된 이 연구의 주된 내용은 서울 인구수 억제라는 목표를 위해 행정수도를 만들고, 수도권을 이전촉진·제한정비·시설유치의 3개 지역으로 구분해 수도권 전체 인구를 재배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박 대통령이 행정기능을 옮길 제2수도를 건설하겠다는 구상을 한 때는 인도차이나 반도 공산화 도미노 현상이 일어난 직후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박 대통령은 이미 1975년8월2일 경상남도 진해 하계휴양지에서 청와대 출입기자들과 오찬을 함께 하면서 “수도권 인구분산정책의 획기적인 방안은 수도를 옮기는 것밖에 없다. (중략)서울서 자동차로 2시간 정도 걸리는 곳에 인구 100만명 규모의 새 행정도시를 건설하는 것이 좋겠다”고 속내를 털어놨다.(중앙일보 1977년2월11일자)

1976년5월20일에는 서울대 공대 도시계획 전공의 주종원 교수와 최상철 환경대학원 교수가 김종필 당시 유정회 국회의원의 지시로 ‘행정수도 건설 기초작업’을 시작한다. 이 작업 결과는 '새 수도(New Capital)'의 약자인 ‘NC'라는 제목의 책으로 정리됐다. 이 책은 8월 수십 장의 후보지 항공사진, ‘임시행정수도 입지선정기준’이라는 대통령의 친필메모와 함께 김재규 건설부 장관과 김의원 건설부 국토계획국장에게 전달됐다.

외국의 수도 이전 사례 조사, 현지답사부터 ‘정감록’ 풀이까지 하던 건설부는 그해 말까지 세 번에 걸쳐 중간보고를 하면서 별도의 전담팀 구성을 추진하자고 제안했다. 이에 따라 1977년3월 오원철 당시 제2 경제수석이 단장으로 있던 중화학기획단에 ‘실무기획단’이 꾸려져 구체적인 입지선정과 건설계획에 착수했고 그 해 7월에는 임시행정수도 건설을 위한 임시조치법이 제정됐다.

행정수도 제1후보지는 충남 공주시 장기면 일대
'임시행정수도 선정기준'에 관한 박정희 전 대통령 메모

박 대통령은 백지상태에서 이상도시를 세운다는 뜻으로 기획단에 ‘백지계획 수립’을 지시했고 중화학공업단은 1977년 말에 ‘행정수도 이전을 위한 백지계획안’을 마련했다. 극비로 진행된 백지계획이 상정한 행정수도 제1후보지는 충남 공주시 장기면 일대였다. 이 지역은 휴전선에서 70km 이상, 해안선에서 40km 이상 떨어져 있어 북한군의 지상포화와 함포 공격을 피할 수 있어 안보 측면의 조건을 충족시켰으며 국토의 중심점과 근접한 지형적 이점을 갖추고 있었다.

대상지가 선정된 후에는 행정부, 정부연구기관, 학계전문가 등이 광범위하게 참여한 가운데 도시설계작업이 이뤄졌다. 1978년6월부터는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내에 신설된 지역개발연구소팀이 6개월간 밤낮없이 작업을 해 부문별 세부계획을 담은 방대한 극비 보고서를 완성했다. 1979년5월 ‘행정수도건설을 위한 종합보고서’가 박 대통령에게 제출됐다.

총면적 8600ha, 2000년에 인구 100만명을 수용하게 될 행정수도 건설은 1982년부터 1996년까지 3단계로 나눠 추진된다는 구상이었다. 건설비용은 1978년 불변가격 기준으로 공공부분 3조4409억원 등 모두 5조5421억원으로 잡았다. 당시 국민총생산의 0.6%, 정부재정규모의 3.2% 수준이었다.

그러나 당시는 2차 석유파동으로 전세계 경기가 얼어붙어 있었고 한국 역시 1979년4월 ‘경제안정화 종합대책’을 발표해 재정긴축정책을 천명한 상태라 백지계획을 당장 실행에 옮기기에는 무리가 따랐다. 그러던 중 10·26사건과 12·12쿠데타가 연달아 터지면서 백지계획은 말그대로 ‘백지’가 되고 말았다. 당시 백지계획은 안보와 반대여론, 부동산 투기를 우려해 극소수 전문가들에 의해 극비리에 진행됐다는 한계로 폭넓은 국민적 공감대를 얻지는 못했다.

과천 청사, 당초 목적 달성 못하고 서울 광역화

1977년 박 대통령은 해발 629m 높이의 관악산이 적의 장거리포탄을 막을 수 있다는 이유에서 경기도 과천면 문원리에 정부 제2청사를 짓고 그 일대에 신도시를 건설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1979년 4월에 과천 제2청사 기공식이 열렸고 1982년 6월부터는 정부부처의 입주가 시작됐다.

그러나 과천 정부 제2청사도 인구나 행정기능 분산이라는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한 채 오히려 서울의 광역화를 야기했다. 과천은 최근의 집값 상승이 시작된 2003년1월부터 올 1월까지 아파트값이 110%나 올라 수도권에서도 집값이 가장 많이 오른 대표적인 지역으로 꼽히게 됐다.

1980년대 들어서는 중앙행정기관을 대전으로 옮기는 방안이 추진됐다. 대전시 둔산지구로 행정부 기능을 옮긴다는 계획은 앞서 박정희 대통령이 행정수도백지계획 실행이 여의치 않자 구상한 내용이었으나 중단돼 있다가 1985년 전두환대통령이 ‘중앙행정기관 및 외청배치계획안’을 재가하면서 본격화됐다. 그러나 초반 5년가량은 부처간 갈등 등으로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이렇다 할 진전을 보지 못했다.

88올림픽을 전후해 수도권 비대화가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자 1987년 “대전을 행정중심 기능도시로 육성한다”고 방침이 나왔으며 노태우 대통령은 1989년 2월 10일 대전을 방문한 자리에서 "제2수도로 집중 육성해 나가겠다"고 공식 발표해 청사이전작업을 구체화했다. 노대통령은 이를 위해 그 다음날 곧바로 "수도권대책 실무기획단"을 발족했다.

노태우 대통령 1989년 대전 방문 “제2수도로 육성”

하지만 두 달 후 노 대통령은 총리실에서 전담하기에는 부처간 이기주의를 극복하기 힘들다고 판단, 명칭을 ‘지역균형발전기획단’으로 변경하면서 대통령비서실 소속으로 격상시키고 기획단장에 문희갑 경제수석비서관, 부단장에 이석채 경제비서관을 임명했다. 그 이듬해인 1990년 9월 노대통령이 마침내 11개 청단위기관의 대전이전에 관한 계획안을 최종 재가하면서 대전 이전안은 현실화된다. (한국경제신문 1998년7월23일자)

대전청사 건물은 김영삼 대통령 집권기인 1993년 9월에 착공, 1997년에 완공돼 1998년까지 관세청, 조달청, 특허청 등 11개 중앙행정기관이 이전을 마쳤다. 1985년부터 계획안이 나오기 시작해 13년 만에 결과가 나온 것이다. 그러나 해당 공무원들 중 가족과 함께 대전으로 이사한 비율은 30% 안팎에 그치는 등 수도권 인구 및 중앙권력 분산 효과는 기대에 못 미쳤다.

국민의정부는 1998년부터 중앙행정부서 권한을 지방으로 넘기는 방안을 추진했으나 이양 대상 사무 625개 중 138개만 지방으로 넘기는 데 그쳤다. 2000년에는 지역균형발전기획단을 발족해 국가 중추기능을 수도권 박으로 옮기는 방안이 논의했다.

신행정수도 건설계획 25년 만에 부활

이후 노무현 대통령이 대선 후보 시절인 지난 2002년 9월 말 '충청권에 행정수도를 건설해 청와대와 중앙부처부터 옮겨 가겠다'고 공약하면서 신행정수도 건설계획은 25여 년 만에 다시 빛을 보게 됐다.

신행정수도건설추진자문위원장을 지낸 김안제 서울대 명예교수는 논란 많았던 신행정수도이전 계획에 대해 “1960년대 이후 100개 정도의 수도권 규제와 지방발전정책이 나왔는데 모두 실패했고 효과가 없었다”면서 “할 수 없이 초강력 약을 쓰는 것”이라고 밝혔다.

정부는 2003년 4월14일 신행정수도건설추진기획단 및 지원단을 발족하면서 신행정수도 건설작업을 본격화했다. 그 해 7월에는 신행정수도특별법안을 내놓은 뒤 공청회 등의 절차를 거쳐 같은 해 10월21일 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신행정수도특별법은 여야 간의 밀고 당기는 격론 끝에 2003년 말 찬성 167,반대 13의 압도적인 표차로 국회를 통과했다.


신행정수도특별법은 2004년 4월10일 공식 공포절차를 거쳐 시행에 들어갔으며 이 법률에 근거해 5월21일 신행정수도건설추진위원회가 발족했다. 추진위는 6월 15일 연기·공주와 진천·음성 등 4곳의 후보지를 발표했고 이후 후보지 비교 평가작업을 거쳐 8월 11일 연기·공주를 예정지로 공식 확정했다.

100차례 넘는 토론회, 공청회 통해 결론

세종시 예정지

이춘희 건설교통부 차관은 당시 입지선정 과정에 대해 “2003년5월부터 충청권 전역을 놓고 도면검토를 해 이듬해 6월 최종후보지 4곳을 추려낸 후 최종평가는 전국 16개 시도에서 각 5개 분야 평가위원회를 구성해 합숙토론을 하도록 해서 결정했다”고 밝혔다.

도시 건설 마스터플랜도 이 차관이 이른바 ‘개방형계획수립체계’라고 명명한 방식대로 15개 분야로 나눠서 역시 100차례가 넘는 각종 토론회, 공청회, 워크샵을 통해 결과를 도출해 냈다. 이 차관은 토지보상 역시 보상착수 8개월 전부터 주민들과 19차례에 걸쳐 금액을 제외한 이주대책, 생활대책 등을 논의한 ‘참여형 보상’으로 원만하게 해결했다고 밝혔다.

이 과정에서 야당과 서울시 등은 줄기차게 신행정수도 건설 반대 목소리를 내왔으며 천도와 국민투표 논란 등으로 신행정수도 건설작업은 숱한 우여곡절을 겪었다. 이석연 변호사가 2004년7월12일 '수도이전 위헌 헌법소원 대리인단'을 구성해 신행정수도특별법에 대한 헌법소원을 제기했고 3개월 후인 10월21일 특별법은 위헌 결정을 받았다.

이후 정부와 국회는 후속대책 마련에 착수, 2005년3월2일 국회에서 ‘신행정수도 후속대책을 위한 연기·공주 지역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을 위한 특별법’이 통과됐다. ‘세종시’로 명명된 행정중심복합도시는 2006년 말 토지보상이 완료됐으며 올해 하반기부터 부지조성 공사에 들어가 일정이 차질 없이 진행될 경우 2012년부터는 중앙행정기관이 단계적으로 이전하고 주민들의 입주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40년 간 계속된 수도권 인구분산 정책

수도이전 계획 외에도 정부는 일찍이 1964년 대도시인구집중방지책을 국무회의 의결사항으로 발표한 이래 지난 40년 동안 수도권에 인구 집중을 유발하는 공장과 대학 신설 규제, 대규모 개발사업 제한, 과밀부담금 부과, 조세 중과 등 숱한 인구집중 억제책을 펴 왔다.

그러나 수도권 정책은 여러 외적 요인들로 인해 규제 강화와 완화가 반복되면서 서울 인구는 매년 30만명이 넘게 늘었으며 전국 인구 대비 수도권 인구 비율은 1960년에 20.8%(519만명)에서 2005년에는 48.3%(2213만명)로 폭증했다.


1960년대 후반에는 이농인구 최소화, 대도시 인구집중방지를 겨냥해 동진강지역, 전남지역, 김해지역 등에 대규모 간척사업이 실시됐으며 공업단지 조성, 중소도시 개발지원책, 지방대학 육성정책도 시행됐다.

서울시내에는 도시계획상 공업지역이 없어졌으며 공장건설은 금지됐다. 주민세 신설, 대학 신설금지 및 정원증가 억제, 구미·창원·여천 등 동남권 대규모 공업단지개발 등이 모두 서울 인구집중방지책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당시는 국가경제를 일으키는 것이 국정 최우선 과제였기 때문에 서울이 지닌 집적경제의 혜택을 가능한 한 살려야 할 상황이었다. 따라서 이 시기의 수도권 정책은 주택부족, 불량주거지 척결 등 서울의 당면문제 해소에 중점을 둘 수밖에 없었다.

1970년대에는 안보 차원의 인구억제 조치

1970년대로 들어오면서는 서울의 팽창을 그대로 방치할 수 없다는 사회, 경제적 요구와 함께 안보 차원의 서울인구 집중억제책이 다시 거론되면서 더욱 강경한 조치들이 추진됐다. 1960년대만 해도 연평균 인구증가율이 당시 서울의 4분1 수준인 2%에 불과했던 경기도 인구 증가율이 1970년대에는 서울과 유사한 수준인 4%대로 오르면서 서울의 광역화 현상도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1971년 개발제한구역 지정, 1973년 기업본사 및 정부투자기관 지방이전, 무허가 판자촌 철거와 공원화 시책 등이 발표됐으며 1974년에는 서울 강북인구의 강남분산 및 강북 소재 중·고교의 강남이전이 실시됐다.

1975년 3월 서울시 연두순시 때까지만 해도 서울인구 집중방지라는 박정희 대통령의 강한 의지는 ‘강북인구 억제책’에 머물렀다.
손정목 전 서울시립대 교수는 저서 ‘서울도시계획이야기’에서 “애초 박 대통령의 서울인구 분산책은 한강 이북에 많은 인구가 모여 살면 북한의 남침시 한강을 건너 피난하기 어렵다는 안보상의 이유에서 비롯된 생각이었으나 당시 인도차이나 반도의 공산화 도미노 현상과 북한의 장거리미사일 보유로 1975년4월쯤부터는 ‘강북만이 아니라 서울 및 수도권 인구 전체가 억제돼야 한다’는 쪽으로 전환됐다”고 전했다.

1970년대 후반에 들어오면서 수도권 인구집중 억제책은 강도를 더해 1976년에는 서울 인구집중 억제정책을 제1무임소장관이 맡아 장기계획을 수립하라는 지시가 내려졌고 1977년에는 수도권 인구재배치계획이 발표되고 임시행정수도 건설 계획이 나오기에 이르렀다.

“88올림픽 개최로 수도권 인구집중 유발”

그러나 정치적 격변으로 4공화국이 끝나면서 임시행정수도 건설을 필두로 한 수도권 인구 재배치 계획들은 무산됐다. 최상철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는 “이 시기에 88올림픽 서울 개최 결정으로 인한 서울시 개발, 과천 제2종합청사 건설, 인천 남동공업단지 개발 등 오히려 수도권 인구집중을 유발하는 정책들이 전개됐다”고 지적했다.(수도권정책과 지역균형발전정책, 지방자치 1989년8월호)

그러나 행정수도건설계획이 백지화된 가운데 정부가 모범을 보이기 위한 조처로 1982년5월 수도권 내 공공청사 및 대규모건축물규제계획이 발표됐고 1984년7월에는 수도권정비기본계획을 시행을 위한 근거법인 수도권정비계획법이 제정됐다.

1988년 6공화국이 출범하면서 당시 대대적으로 몰아쳤던 투기열풍에 대한 대응과 지역간 격차로 인한 갈등해소를 위해 수도권인구집중억제와 정비문제가 다시 강조됐다. 1989년에는 청와대에 지역균형발전기획단이 발족돼 수도권 정책과 균형발전 문제를 주요과제로 다루게 됐다.

1990년을 전후해서는 청와대와 건설부를 중심으로 그간의 수도권 정책에 대한 전반적인 평가와 대안적인 방안을 모색하는 작업이 이뤄졌다. 기존 수도권 정책이 지나치게 물리적 규제에 의존하고 있어 오히려 규제를 피하기 위한 탈법, 편법, 불법을 유도하는 부작용을 일으켰다는 문제가 제기됐다. 수도권 내부에서도 지역격차가 심화돼 주민들의 불만이 쌓이면서 경기도 분도 요구까지 나왔다.

경기도의 분도 요구

1990년대 들어서는 수도권 5개 신도시 건설, 영종도 신공항 및 경부고속전철 건설, 수도권 광역교통망 확충, 아산만 신산업지대 조성 등 일련의 대규모 개발사업으로 수도권 공간구조가 크게 재편됐으며 서울을 중심으로 한 첨단정보, 국제교역 등 고급 중추기능에 대한 수요가 정책적 딜레마로 부상했다.

이 시기 수도권정책은 물리적 직접규제에서 간접규제로 전환됐으며 수도권 문제를 국토전체의 균형발전과 함께 조망하려는 통합적인 시각이 대두됐다. 이에 따라 1994년에는 수도권 공장총량제 및 과밀부담금제가 도입됐고 개발촉진지구가 지정됐으며 준농림지 개발이 허용됐다.

또 지역균형발전법을 제정해 개발촉진지구 사업, 지역균형발전기금 설치 등 지방육성사업이 추진됐다. 그러나 1995년 전면적 지방자치제 실시와 1997년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수도권 관리의 의미가 퇴색됐고 시장경제논리로 무장한 조직적 수도권 규제완화 요구가 커져갔다.

2000년대는 난개발이 이뤄지던 1990년대 말의 수도권 개발을 반성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적극적으로 수도권을 개발하려는 논리가 등장한 시기로 볼 수 있다. 이 시기에는 국토정책과 관련한 주요 법률이 개정, 제정돼 국토의 체계적 정비가 가능해진 한편, 수도권을 국제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기 시작하면서 동북아경제중심국가 전략, 외국인 투자지역 및 경제자유구역 등이 지정됐다.

2001년에는 서해안고속도로와 논산-천안간 고속도로가 개통되는 등 정부는 지방개발에 역점을 뒀으나 외환위기 극복 과정에서 외국인투자에 대한 수도권 입지규제를 완화하는 등 부득이한 규제완화도 있었다.

균형발전, 핵심적 국가발전 전략으로
참여정부 균형발전 계획도

현 정부는 지역간 불균형을 이대로 방치하면 궁극적으로 국가 전체의 경쟁력과 성장 잠재력을 붕괴시키게 될 것이라고 진단하고 균형발전을 핵심적 국가발전 전략으로 삼았다. 1980년 초 부산에서 변호사로 사회운동에 참여할 당시부터 대도시문제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던 노무현 대통령은 “당시 공해문제에 관심을 가지면서 대도시문제가 보이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노 대통령은 “대도시 집중은 단순히 공해와 비용의 문제만이 아니라 정신병, 마약, 청소년 범죄문제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삶을 뿌리째 황폐화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피력했다. (노무현 대통령 ‘행정수도 건설을 결심하게 된 사연, 2005년3월22일)

이에 따라 참여정부는 출범과 동시에 국가균형발전위원회를 창설해 ‘선 지방 육성, 후 수도권 규제완화’의 기조로 균형발전특별법 제정, 균형발전5개년계획 수립, 국가균형발전기금 설치, 신행정복합도시 건설, 공공기관 지방이전 등 의욕적인 지방발전전략을 시도했다. 그러나 수도권을 그대로 놓아 두는 것은 아니었다. 지방육성시책 중에서도 일부 불합리한 규제완화, 공공기관 이전부지 등에 정비발전지구 도입 등을 통해 수도권 경쟁력 강화도 함께 하고 있다.

프랑스 18.7%, 영국 26%, 일본 27,2%…한국은 48.3%

재계와 수도권의 입장을 반영하는 쪽에서는 선진국들이 다 수도권 규제 정책을 없애는 마당에 우리나라는 여전히 각종 수도권 규제가 유지되면서 국가경쟁력에 발목을 잡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선진국들 중 수도권 집중이 사회문제화 되고 있다는 나라들의 수도권 인구비중은 프랑스가 18.7%, 영국이 26%, 일본이 27.2%(2003년 기준) 수준으로 그 비율이 48.3%(2005년 기준)에 이르는 우리나라와는 큰 차이를 보인다.


1950년대부터 각종 수도권 규제, 지방분산·육성책을 추진한 프랑스는 수도권 인구비중이 1960년에 18.2%로 우리나라(20.8%)와 비슷한 수준이었으나 이후에는 1982년 18.5%, 2005년 18.7%로 안정돼 우리나라와 큰 대비를 이룬다. 프랑스는 1985년 파리권 규제를 완화한 후 사무실 신설이 크게 증가하자 1989년에 다시 규제를 강화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역시 1950년대부터 균형발전 정책을 추진해 온 일본도 1970~2000년 동안 전국 인구가 21.3% 증가한 데 비해 수도권 시가지 인구는 5.9%에 그쳤으나 1956년 제정된 ‘수도권정비법’이 계속 유지되고 있다. 최근 이 나라들이 일부 대도시권 규제를 완화 내지 폐지하는 추세는 이처럼 우리나라와는 달리 대도시권 인구가 안정상태에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배준구 경성대 교수는 “한국처럼 여전히 수도권 인구집중이 극심하고 지방의 모든 여건이 취약한 상태에서 일각의 주장처럼 수도권 규제정책을 대폭 완화하거나 폐지할 경우 수도권 블랙홀 현상, 지방산업 공동화가 가속화할 결과가 나올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한겨레신문 2007년2월13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도 2005년 연례 한국경제보고서에서 한국이 잠재성장률을 현재 수준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지역균형발전이 필요하다고 권고했다.

비수도권 토지보상금, 수도권 부동산 거래금액의 0.36%

최근 수도권 부동산값이 급등한 원인에 대해 행정중심복합도시·혁신도시·기업도시 건설 등으로 지방에 풀린 보상비가 수도권으로 밀려들어오면서 집값 폭등을 부채질했다는 주장이 공공연히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혁신도시·기업도시는 보상이 아직 시작도 되지 않았으므로 이는 근거가 희박한 ‘주장’에 불과하다.

건설교통부가 행정중심복합도시를 포함해 토지공사, 주택공사 시행의 131개 사업지구에서 2006년 상반기에 토지보상금을 받은 사람들의 1년간 부동산거래내역을 조사한 결과 전체 보상금 수령액 6조6508억원 중 2조5170억원, 즉 37.8%%가 다시 부동산에 투자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이 중 비수도권에서 풀린 보상금은 3조2058억원으로 이 보상금 중 수도권 부동산에 유입된 액수는 2840억원으로 276조원으로 추정되는 2006년 수도권 전체 부동산 거래규모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0.1%에 불과했다.

건교부는 연간 총 보상금 규모로 환산해 분석해도 비수도권 지역 보상금이 수도권에 흘러든 비율은 수도권 부동산 거래금액의 0.36% 수준에 불과하다고 밝혔다.

더욱이 행정·혁신·기업도시는 중장기적으로는 수도권 집값안정에도 기여할 수 있다. 해당 예정도시나 주변 지역 부동산 값 상승에 대해서는 김수현 청와대 사회정책비서관은 “전국을 투기장화한거냐, 아니면 소외, 낙후되었던 지역들이 개발가치가 조금 높아진 정상적인 과정으로 봐야 하는 거냐. 독자들의 판단에 맡기겠다.”

 | 특별기획팀 | 등록일 : 2007.03.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