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입찰
엉터리 통계, 짝퉁 실거래가
토건종식3
2010. 5. 1. 20:41
[실록 부동산정책40년 ⑤] “부동산 투기 누가 부추기나 2007-03-14 09:55:42

우리나라 부동산 가격은 1960년대 본격적인 경제개발과 함께 크게 움직이기 시작해 지난 40년간 수도권 집중화에 따른 수급 불균형과 공급시차, 경제성장에 따른 소득향상과 과잉 유동성, 건설경기 부양 유혹, 부동산 투기심리에 무력했던 제도, 정책 미비 등의 요인들에 의해 변동을 겪었다. 과거 집값이 급등할 때는 항상 시중에 돈이 너무 많이 풀리고 주택공급이 부족했으며 투기로 얻은 불로소득을 환수하는 시스템이 갖춰지지 않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지역간 불균형 개발의 결과인 수도권 집중, 핵가족화와 고령화로 인한 도시 가구수 증가 등으로 주택 수요는 공급을 앞질렀지만 주택부족 문제를 구조적으로 해결하려는 노력은 미흡했다. 민간자본에 크게 기댄 주택시장 구조는 주택을 투기대상으로 보는 심리를 키웠다.
지난 40년간 투기억제와 경기활성화라는 두 가지 목표 사이에서 일관성 없는 정책이 추진되면서 주기적 집값 상승과 ‘부동산 불패’라는 잘못된 믿음을 심어줬고, 적절한 대체투자 시장의 미성숙은 자본의 부동산 쏠림 현상을 가속화했다.
그 동안 부동산은 엄청난 시세차익을 내고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세금을 빼돌릴 수 있는 세금탈루와 불투명한 거래의 대명사였다. 공시가격과 실제가격이 따로 놀아 무엇이 진짜 가격인지 알 수 없고, 가격 부풀리기와 이중 계약서가 횡행했다. 편법과 허점투성이 거래 환경은 많은 국민들을 부동산 투기라는 유혹 속으로 끌어들였다.
정부는 지금도 과거 ‘투기시대 패러다임’과 씨름하고 있다. 이는 투기로 병든 우리 부동산 시장을 근본부터 치유하고 정상화하는 힘겨운 과정이다.
국정브리핑이 주택도시연구원·국토연구원·금융연구원과 공동으로 기획한 <실록 부동산정책 40년>은 ‘총론’에 이어 ‘제1부, 왜 올랐나’라는 주제로 부동산 가격을 오르게 하는 4가지 근본적 요인을 4회에 걸쳐 점검한다. <편집자>
총론-'부동산 신호등'세우기 40년 걸렸다
<1부> 왜 올랐나
1-경기부양과 부동산의 딜레마:"이렇게까지 많이 풀었습니까"
2-유동성과 부동산:'큰 칼'이냐, '작은 칼'이냐
3-공급시차와 시행착오:주택공급에서 생긴 일
4-부동산 심리와 정책불신
‘부동산은 심리다.’ 왜곡된 정보로 ‘집값이 계속 오른다’고 부추기면 시장이 동요하게 된다. 이 같은 불안은 결국 가수요와 투기심리를 낳는다.
2006년 하반기의 ‘조바심 수요’에 의한 집값 급등 현상은 부동산 시장의 심리적 요인을 잘 보여준다.
2006년 쌍춘년 고분양가 ‘조바심 파동’
그 해 늦여름, 쌍춘년을 맞아 크게 늘어난 신혼부부 수요와 이사철이 겹치면서 전세물량 부족 현상으로 전셋값이 오르기 시작했다. 여기에 정부가 8월 판교 2차 분양에서 중대형 아파트 분양가를 평당 1800만원대로 책정한데 이어 9월 서울시는 은평뉴타운 분양가를 주변 시세의 2배에 가까운 최고 1500만원대로 정하면서 고분양가는 주변 아파트 가격 상승으로 이어졌다.
공공분양 아파트 값이 크게 오르자 파주 운정 신도시에서는 한 건설업체가 분양가를 인근 아파트 매매가의 2배에 이르는 평당 1460만원으로 책정했다. 여론이 악화되자 이 업체는 분양가를 평당 평균 1297만원으로 내렸으나, 오히려 고분양가 폭리 주장이 근거 있음을 반증한 셈이었다.
당시 건설교통부는 이례적으로 “내년에 파주지역에서 나오는 중대형은 원가연동제와 채권입찰제가 적용돼 저렴하게 나오니 해당 아파트 청약을 자제하라”고 당부했지만 문제의 아파트 청약은 4대 1이 넘는 경쟁률로 전 평형이 1순위 마감됐다. 부동산 정책에 대한 불신과 가격 상승 기대감이 그대로 드러난 사례였다.

2006년 9월 고분양가 논란 속에 문을 연 파주 운정 신도시의 한 아파트 모델하우스를 찾은 청약인파
고분양가로 인한 집값 상승의 여파로 그동안 관망하던 실수요자들이 불안감 속에 추격매수에 나서자 오름세는 수도권 전역과 중소형 평형으로까지 확산됐다. 언론은 자고 나면 수천만~수억원씩 호가가 뛰는 아파트 값을 스포츠경기 중계하듯 보도했다.
공공기관마저 노골적 ‘땅장사’
이처럼 주택에 대한 ‘조바심 수요’를 유발한 고분양가는 주택이 들어서는 땅의 가격, 즉 택지비가 비싼 것이 큰 요인이다. 민간 택지뿐만 아니라 정부나 지방자치단체가 공급한 공공택지로 지은 아파트에서조차 고분양가 논란이 매번 되풀이되면서 주택시장이 철저히 시장 메커니즘으로만 움직인다는 인식은 투기심리를 부추긴다. 토지공사·주택공사와 지자체의 공영개발기관조차도 시장원리에 입각해 택지매각 비용을 받겠다며 노골적으로 땅장사를 하는 경우도 없지 않았고, 이는 곧 저돌적인 투기심리의 배경이 됐다.
2005년 초 서울시는 뚝섬에 초고층 주상복합단지를 조성하겠다며 1,3,4 구역 상업용지를 시세보다 훨씬 높은 가격인 1조원이 넘는 돈을 받고 팔았다. 당시 최고가 경쟁입찰 방식을 도입한 서울시는 당초 참여업체들의 경쟁이 과열됐다며 돌연 매각을 취소했다가 4개월 뒤인 2005년 6월 감정가를 40%나 올린 채 다시 공매에 나서면서 논란을 빚었다.
특히 당시 4구역의 땅을 평당 7732만원이라는 사상 최고가에 낙찰받은 한 업체는 최근 두 차례나 연장한 잔금납부기한을 넘기면서 사업 자체의 위기를 맞고 있을 정도다. 땅값이 7000만원대면 아파트 평당 분양가가 4000만원을 넘어야 한다는 계산이 나와 일각에서는 “뚝섬 땅을 비싸게 팔아 서울시 빚을 줄인 유능한 서울시장인지는 몰라도 국가 전체로는 아파트 값 폭등을 부채질한 책임을 면할 수 없다”는 비판도 나오고 있다.

이밖에도 토지 보상비용의 급격한 증가와 도로, 전력 등 수조원 규모의 간선시설 비용이 고스란히 분양가에 전가되는 현상, 저밀도 친환경 개발을 표방해 용적률을 낮추는 방향의 개발도 아파트 가격상승의 주요 원인이 됐다.
이에 따라 과거에는 아파트 분양가에서 20~30%에 불과하던 택지비 비중이 지금은 대부분 절반을 웃돌고 있다. 논란을 빚은 은평뉴타운의 택지비 비중은 분양가의 57.2%였으며 역시 고분양가 논란을 일으킨 판교신도시 44평형은 평당 분양가(1857만원) 대비 토지비용이 70.2%(대지비 41.6%, 채권손실액 28.6%)에 달했다. 이는 공공재의 성격이 강한 주택조차 철저히 시장 메커니즘에 따라 움직인다는 인식을 심어 투기심리를 부추기고 실수요자들을 압박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이처럼 과도한 택지비 부담이 아파트 분양가를 밀어 올리는 구조적 문제가 계속 제기되자 정부는 2006년 7월부터 택지 공급가격 기준을 기존의 감정가에서 토지조성원가의 90~110%로 바꿨다.
투기에 취약한 부동산 시장
부동산은 단기적으로 가격 왜곡이 일어나기 쉬워 투기에 취약한 상품의 특성을 갖고 있다. 특히 아파트는 다른 재화에 비해 살 사람이 상품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사전에 알기 어렵다. 우리나라 아파트 시장처럼 선분양제가 일반화 돼 있고 특정 지역에 수요가 몰리는 경우에는 수요자와 공급자 간의 정보 비대칭성이 더욱 심해져 수요자들은 구조적으로 고분양가 등 공급자 우위의 시장상황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여기에 부동산 정보업체들이 인터넷에 제공하는 매물과 시세 정보는 높은 가격을 원하는 매도자 호가 위주의 시황을 부추겨 부동산 가격을 왜곡한다. 이러한 상황은 시장의 혼란과 불안감을 증폭시키고 불안한 가격 매커니즘 속에서 마음만 먹으면 시세 조작도 가능한 상황을 초래했다. 결국 여기서 피해의식이 깔린 투기 심리도 생겨났다.
부동산 가격은 호가라도 일단 높은 가격이 형성되면 값이 잘 내려가지 않기 때문에 왜곡된 정보들은 투기를 장기화한다. 우리나라처럼 수도권 집중화가 심하고 개발 가능한 택지 비율은 매우 낮아 부동산 가치의 희소성이 상대적으로 높은 상황에서는 이러한 현상이 두드러진다. 2007년 1·11 대책을 기점으로 아파트 가격이 뚜렷하게 하향 안정세를 보이고 있으나 하락폭이 상승기 때만큼 크지 않은 것은 이러한 부동산 시장의 특성에 기인한다.
또 부동산은 수요가 증가해도 공급까지는 상당한 시차가 존재할 수밖에 없고 여기서 발생하는 가격의 비탄력성 탓에 단기적으로 가격왜곡 현상이 일어나기 쉽다. 소득이 증가하고 생활수준이 높아지면서 주택 크기나 질에 있어 기존의 주택보급률만으로는 측정하기 힘든 새로운 수요가 생긴다. 그러나 이러한 신규 수요를 공급이 즉각 뒷받침 할 수 없다는 점도 아파트 가격 상승의 한 요인이 됐다.
부동산은 이처럼 시장실패가 쉬운 공공재적 성격을 가진 상품이다. 결국 시장 실패로 인한 공급부족이나 가격왜곡 등 문제가 불거지면 정부의 정책적 개입이 불가피하다.

‘이래도’ 못 믿고, ‘저래도’ 못 믿어
2000년 하반기부터 서울 강남의 아파트를 중심으로 시작된 부동산 가격 상승 추세는 과거 부동산 가격 상승이 2~3년에 그쳤던 예와는 달리 장기간 지속되는 특징을 보였다. 여기에는 IMF 위환 위기 이후 지속된 저금리와 시중 유동자금 증가, 국지적 주택공급 부족, 재건축 기대심리, 금융권의 환경변화, 과도하게 풀린 부동산 규제 등 여러 가지 요인과 함께 수십년 간 경험한 ‘부동산불패’ 라는 투기심리도 한 몫을 했다.
고철 주택산업연구원장은 2006년 아파트 값 상승에 대해 “정부 정책을 믿지 못하고 불안심리가 커진데 따른 심리적 요인이 크다. 공급을 확대한다고 하면 재건축이 완화될 것으로 기대해 집값이 뛰고, 규제를 늘린다고 하면 공급이 줄 것으로 보고 오르는 형국으로 한마디로 진퇴양난”(2006년11월3일 서울경제신문 인터뷰)이라며 부동산 정책의 어려움을 설명했다.
한 당국자도 당시 집값 폭등에 대해 “5·31 지방선거 패배, 야당 의원들이 부동산 문제에 대해 다른 시그널을 준 것, 북핵 사태 이후 금리정책을 진짜로 못 쓸 것이라는 시장의 확신 등 정부가 (심리적으로) 잡힐 수 있는 약점은 모두 잡힌 상태였다”고 토로했다.
이와 함께 대선으로 정책 기조가 변화할 수 있다는 기대감도 집값 상승을 부추겼다. 특히 일부 언론은 대선에 편승한 경기부양책이나 각 후보들이 인기몰이용으로 쏟아놓을 개발공약, 정권이 바뀔 경우의 부동산 규제 완화나 정책후퇴 등의 가능성을 제시하며 시장의 불안감과 국민들의 투기심리에 불을 지폈다.
수십 년 간 부동산 불패 학습효과

1975년 '투기부인'들의 서울 영동 잠실 여의도 일대의 아파트 투기열풍을 소개한 신문기사. 중앙일보 75년 3월25일자.
부동산불패의 믿음은 어제오늘 형성된 것이 아니다. 개발 초기 단계인 1960년대 말 말죽거리 신화 때만 해도 부동산 투기로 얻는 시세차익은 20-30배에 달했다. 1970년대에는 시세 차익이 5-6배, 1980년대에는 2-4배로 줄었으나 2003년 이후에도 상승기에는 여전히 2배 정도의 수익을 기대할 수 있었다.
30년전인 1977년4월 국세청 조사에서도 당시 분양경쟁률이 수십 대 일에 달했던 여의도 아파트 당첨자들 중 3분의 1이 무자격자 즉 투기꾼들이었음이 드러난 바 있다.
당시 매일경제신문(1974년5월10일자)은 1969~70년 사이 경부고속도로 개통을 전후해 신갈인터체인지에서 용인에 이르는 지역의 땅값이 4년 만에 15배나 뛰었다고 보도했다. 같은 신문(1977년10월17일자)은 당시 지하철 2호선 착공 발표 후 일주일이 지나자 연초 평당 3만~7만원이었던 이 지역 땅값이 13만원을 호가하고 이후에도 계속 오르고 있어 땅주인들의 해약 요구로 거래질서에 혼란을 빚는다고 전했다. 개발 소식에 부동산 가격이 치솟고 투기세력이 개입해 매물을 돌리며 가격 상승을 주도하는 오늘날과 그리 다르지 않은 모습이 30년 넘게 되풀이 됐음을 알 수 있다.
재벌과 권력층 주도 부동산 투기
부동산이 전국민의 재테크 대상이 된 오늘날과는 달리 부동산 투기가 재벌과 개발 정보를 미리 입수한 일부 권력층 주변 자산가들의 전유물이었던 시절도 있었다.

서울신문 1983년6월10일자.
서울신문(1983년6월10일자)은 국립공원 지리산지구 관광집단시설지역 고시 예정지에 발표 1년 전부터 투기세력이 몰려 2년 전 평당 1000~2000원 하던 땅이 2만~5만원으로 2년 동안 20배 이상 급등했다고 보도했다. 해당 지역의 개인땅 85%를 서울, 전주 등 외지인이 매입해 개발정보가 누설됐음을 방증했다.
최근에 와서야 관심의 초점이 되고 있는 화성, 판교 지역도 1980년대부터 수도권 신도시 개발후보지로 지목돼 오면서 이미 1990년대에 ‘거물 외지인’들의 투자가 집중됐다. 특히 정치인 등 고위층은 1980년대 초반부터 본격적으로 이 지역 토지를 매입했다.
1993년 문민정부에서 시작된 공직자 재산공개 결과는 힘 있고 출세한 사람치고 부동산 부자 아닌 사람이 없다는 ‘소문’이 사실임을 입증했다. 많은 행정부, 사법부 내 장·차관급 인사들과 국회의원, 군 장성들이 투기성 불법, 탈법 부동산 거래와 보유가 밝혀져 옷을 벗었다.
이후 2000년 제정된 인사청문회법에 따라 총리 등 고위공직자들이 국회에서 청문회를 거칠 때마다 빠짐없이 등장하는 항목이 부동산 투기 관련 의혹이었다. 국민들이 부동산 투기와 그 대응책에 냉소적이고 무감각해진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
전국민 부동산 재테크 시대
그러나 외환 위기 이후에는 은행들이 주수익원이던 기업 대출 감소에 따라 주택담보 대출 비중을 크게 늘리면서 많은 사람들이 대출을 통한 투자에 나설 수 있었다. 저금리와 손쉬운 주택담보대출로 자금원이 갖춰지자 수십 년 동안 투기꾼들의 승리를 지켜보면서 기회만 닿는다면 투기행렬에 기꺼이 동참하겠다는 의식을 내면화한 사람들은 집값 오름세라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일부 아파트 주민들은 부녀회 등을 통해 집값 담합에 나서 시장질서를 어지럽혔다. 건설교통부 집값담합신고센터에 적발된 서울 지역 한 아파트는 실거래가보다 최고 2억원이나 높은 호가로 담합한 사례도 있었다. 그러나 공정거래위원회가 담합행위에 공정거래법을 적용한 처벌이 불가능하다고 밝힌 데다 실제 대응조치도 일정기간 실거래가를 공개하고 부동산정보제공업체에 시세정보 제공을 중단시키는데 그치고 있다. 심지어 일부 단지는 건교부, 재경부가 강력한 처벌 규정을 신설하겠다고 발표하자 규제 이전에 집값을 서둘러 올려놓겠다는 식의 대담함을 보이기도 했다
“부동산 투기해도 벌금 약간 내면 그만”
“조 모(33·여)씨는 아파트 10채, 상가 32채, 오피스텔 24채를 갖고 있으면서 불법으로 조합원 자격을 얻어 5채의 신규분양 아파트를 공급받아 구속됐으나, 재판에서 벌금 2500만원만을 선고받았다. 조 씨는 앞서 배임죄로 이미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은 상태였다. 임야 1만8000평을 8억2800만원에 사들여 405명에게 사기 분양해 317억원을 가로챈 혐의로 구속된 배 모(37·남)씨 등 8명의 기획부동산 업자들은 초범이거나 동종 전과가 없다는 이유로 집행유예 또는 벌금 200만원의 판결을 받았다.”
정부의 ‘부동산투기사범 합동수사본부’가 2005년7월~12월까지 대대적으로 부동산투기범죄에 대한 특별단속을 벌인 후 구속된 252명에 대한 법원 판결 결과의 일부이다. 부동산 시장을 왜곡시키고 막대한 불법 이득을 취한 투기 사범들에게 내려진 이 같은 솜방망이 처벌은 국민들에게 ‘부동산 투기를 해도 벌금 얼마내면 그만’이라는 식의 그릇된 법 감정을 조장해 왔다.
또 부동산 투기 행위는 법망을 피해 날이 갈수록 수법이 다양하고 교묘해지고 있는데 반해 부동산중개업법 등 관련 법규는 범죄유형을 단순하게 규정하고 있어 현실을 반영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형량도 가벼운 편이다.
이에 따라 정부는 주기적으로 부동산 투기가 활개 칠 때마다 관련 법규 정비, 공급 확대, 세제와 금융 정책 등으로 부동산 가격 안정을 유도하는 한편 국세청 세무조사와 투기자 명단 발표 등 투기 가담자들을 직접 겨냥한 응급 대책들을 끊임없이 내놨으나 투기 현상이 거의 만성화 되다시피 하면서 투기세력과 국민들 모두 별다른 경각심을 가지지 못하게 됐다.
불투명한 부동산 거래 관행과 불합리한 세제도 국민들의 투기불감증에 일조했다. 실거래가를 숨기고 이중으로 다운계약서를 작성해 취·등록세, 양도소득세를 탈세하는 행위가 당연한 관행처럼 굳어졌다. 양도소득세도 실거래가에 비해 비현실적으로 낮은 기준시가를 기준으로 부과돼 투기로 인한 불로소득을 환수하는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고 그나마 경기등락에 따라 세율과 과표가 오르내리고, 감세 혜택이 잇따르면서 정책불신을 키워왔다. 과거 기존 주택의 재산세 역시 가격이 아니라 면적 등 불합리한 과표기준과 체계로 인해 오히려 투기수익을 보장해주는 역할을 해왔다.
결국 국민들은 수십 년 간 미비한 정책과 부실한 법적용의 틈을 뚫은 부동산 투기의 높은 수익성을 지켜보면서 ‘부동산 투기는 비용 대비 효율이 높은 투자’라는 경험칙을 얻게 됐다.
“부동산은 재산증식 도구”라는 의식
그 결과 국민들도 주택이나 토지를 주거 수단이나 생산요소로만 여기지 않고 재산증식의 대상으로 인식하게 됐다. 국토연구원이 1979년, 1985년, 2000년, 2006년 네 차례에 걸쳐 실시한 ‘토지에 대한 국민의식조사’ 결과는 이 같은 변화를 여실히 보여준다.
여유자금이 있으면 무엇을 하겠느냐는 질문에 1979년에는 토지나 건물에 투자하겠다는 응답이 28.6%였으나 2006년 조사에서는 57.4%로 크게 증가했다. 특히 부동산 중에서도 서울과 수도권, 특히 강남권에서는 주택 선호도가 높고 수도권 이외 지역에서는 토지 선호도가 높아 지역별 부동산 값 상승 추이가 그대로 반영됐다.
또 주목할 만한 변화는 1979년에는 여유자금을 개인사업에 쓰겠다는 답변이 39.9%에 이르렀으나 점차 줄어들다 2006년에는 7.6%에 머물렀다는 점이다. 2006년 조사를 주도한 국토연구원 채미옥 박사는 이에 대해 “건전한 근로의식이 감소하고 부동산 투기를 내면화, 합리화하는 현상”이라고 분석했다.
“주택가격 과도하게 높지만 그래도 오른다?”
부동산투기에 대한 부정적 의견도 과거에 비해 감소했다. 재산증식을 위해 부동산을 사고파는 것이 사회적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응답이 2000년 69.5%, 2006년에는 67.5%로 1979년 51.1%에 비해 16%포인트 정도 증가했다.
국토연구원은 “토지공공성에 대한 사회적 합의 수준이 낮고 토지시장 참여자들은 자본이득을 챙기려는 형태로 움직이고 있다. 토지시장과 사법부 판례, 국민의식 모두가 부동산의 사익옹호를 지향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2007년 2월 삼성경제연구소의 '주택가격에 대한 가계의식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전체 조사대상 가구의 91.4%가 현재 주택가격이 과도하게 높거나(66.6%) 약간 높다(24.8%)고 답했다. 그러나 올해 주택가격 전망에 대해서는 하락할 것이라는 응답이 30.5%(조금 하락 28.2%, 크게 하락 2.3%)인 반면 현 수준을 유지하거나(34.1%), 상승할 것(조금 상승 30.4%, 크게 상승 5.0%)이라는 응답은 69.5%에 달해 부동산 정책에 대한 불신과 집값 상승 기대가 만연해 있음을 보여줬다.
언론 “투기도 투자다” 궤변

이는 언론의 논조 변화에서도 드러난다. 과거에는 언론들이 대부분 부동산 투기를 ‘망국병’으로 치부하면서 ‘다음 세대에도 죄를 짓는 행위’로 규정했다.
1992년5월6일자 동아일보 사설을 보자. ‘땅투기 억제는 절대 선이다’라는 단정적인 제목으로 1990년 이뤄진 재벌의 비업무용 부동산 강제매각 조치(5·8조치) 2주년을 맞아 당시의 강제 매각조치가 불가피했으며 결과적으로 부동산시세를 ‘가라앉게 한’ 효과가 있었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신문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공권력에 의한 사유재산의 강제매각 조치가 불합리한 줄은 알지만 보편적인 자로 재기에는 한국의 국토는 너무 좁고 인구는 많으며 또 한국의 재벌 형성, 나아가 자본축적과정이 다른 선진국이나 경쟁국과는 다르다’고까지 설명하며 5·8조치를 옹호했다.
그러나 13년 뒤인 2005년4월29일자 동아일보 사설은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하지 않고 기존의 부가가치를 나눈다는 점에서 부동산 투기 소득이나 주식투자 이익이나 크게 다를 바 없다. 시장경제에서 투자와 투기를 명확하게 구분하는 것이 가능하지도 않다’고 주장했다. 이 사설은 또 ‘창조적 소득은 인정하되 투기적 소득은 일절 인정하지 않겠다’는 대통령의 발언을 비판하면서 ‘집을 팔아 남긴 이득을 모두 세금으로 환수하는 정책을 동원하는 것은 시장을 이념이나 정치적 포퓰리즘의 실험장으로 삼는 행위’라고 비난했다.

“부동산 광고와 언론의 논조 연관성 있다”
사실 우리나라 언론은 논조나 정치적 지향과는 별도로 부동산문제에 관해서는 크게 자유롭지 못하다. 신문들은 IMF 외환위기 이후 대형 광고주가 줄어들고 케이블 방송과 인터넷 뉴스포털, 무가지 등 신규매체와의 경쟁이 치열해진 환경 속에서 수입의 대부분을 광고에 의존하고 있다. 이에 따라 신문들은 기업광고를 안정적으로 유치하기 위해 서울 강남 거주자들을 비롯한 ‘구매력 있는 독자층’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
그중에서도 부동산 투기붐에 따라 부동산 광고가 핵심적인 수입원이 되면서 신문들은 종합부동산세 등 정부의 투기억제 대책에 호의적이기 힘든 구조를 가지고 있다.
부동산 광고가 신문들의 놓칠 수 없는 수익 영역이라는 점은 투기세력의 실체를 분석한 책 ‘대한민국은 부동산공화국이다?’에서도 드러난다. 이 책은 2001~2004년까지 신문광고에서 건설 광고가 매출 기여도 1위를 차지했다고 밝혔다. 이 책에 등장하는 한 유력 신문사 광고국 직원은 “후분양제가 도입되면 건설업체가 자체 자금으로 70% 이상을 시공한 뒤에야 광고를 할 수 있기 때문에 광고물량이 대폭 줄어들 수밖에 없어 신문사에서는 최대한 도입을 막고 싶은 제도”라고 말해 일부 신문들이 ‘시장원리’를 내세우며 후분양제를 적극 반대하는 속사정을 드러냈다.
서화숙 한국일보 편집위원도 2006년4월 열린 ‘정부의 부동산정책과 언론보도’라는 기자포럼에서 2006년3월 한 달치 4개 신문의 본면에 실린 광고를 분석한 결과 “정부 부동산 정책에 대한 비판적 논조와 부동산 광고 건수가 연관성을 보였다”고 지적했다. 서 편집위원에 따르면 정부의 부동산 대책에 가장 비판적인 A신문의 부동산 관련 전면 광고는 105개였으며 논조상 비판적인 순서대로 B, C, D 신문의 전면 부동산 광고는 각각 76개, 25개, 21개였다.
“서민 끌어들여 최대 피해자로 묘사”
특히 보수 언론과 일부 경제지들은 정부의 투기수요 억제책이 나오면 ‘대책이 앞으로도 언제든 변할 수 있다는 관측이 강했다(조선일보 2005년9월1일)’ ‘충격효과가 사라지면 다시 오를 수 있다(조선일보 2005년9월2일)’ 등의 ‘희망사항’과 ‘주장’을 전문가 분석이라는 명목으로 쏟아냈다. 이들은 정부대책이 약효를 발휘해 집값이 떨어질 기미가 보이면 버블 붕괴나 서민 피해를 우려하는 논조로 입장을 선회했다. 서화숙 편집위원은 “언론이 정책을 비판하기 위해 모호한 개념인 ‘서민’을 끌어들여 최대 피해자로 묘사한다”면서 “세금부담이 너무 크고, 시장에 맡겨 공급을 늘리라는 일부 언론의 주장은 1가구 다주택자와 건설업체의 입장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라고 꼬집었다.
LG경제연구원의 김성식 연구위원도 “투기세력의 자기실현적 자가발전을 견고하게 뒷받침하는 것이 일부 언론과 전문가로 위장한 투기이론가들”이라며 “일부 언론은 투기세력의 논리를 전달하는 확성기 노릇을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2005년6월24일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 주최 토론회 ‘언론이 제대로 보도하면 부동산투기 막을 수 있다’)
물론 이들 기득권 옹호 언론들은 부동산이 시장에서 거래되는 상품이기도 하지만 경제 전반에 미치는 영향력이 매우 큰 공공재적인 특성을 갖는다는 또 다른 속성을 철저하게 외면하고 있다. 따라서 100만 가구가 넘는 단칸방살이 문제나 불량주택 등 주거복지와 관련한 의제는 언론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부동산 정책, 시기 놓치면 무용지물”
2007년 들어 부동산가격 급등 현상은 진정되고 집값 내림세가 서울 강남권 재건축단지에서 강북과 수도권 전체로 확산되고 있다. 그러나 민간택지 아파트의 분양원가 공개와 분양가 상한제 실시를 주내용으로 한 1·11대책의 후속절차인 주택법과 택지개발촉진법, 임대주택법 등의 개정안 입법 처리를 놓고 새로운 시장불안 요인이 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심리에 민감한 부동산은 시장에 조금만 잘못된 신호를 줘도 엄청난 후폭풍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우리사회는 반복적으로 경험했다. 2007년2월10일자 서울신문이 사설에서 ‘아무리 좋은 정책이라도 시기를 놓친다면 무용지물이나 다름없다’고 지적하고 나선 것도 이 때문이다
[어떤 정책 폈고 왜 못잡았나 ①]“아니, 실거래가를 그대로 적으라고요?”
[실록 부동산정책40년 ⑥] 시장 투명화와 실거래가 신고
“명의(이름)도 가짜, 가격도 가짜.”
그동안 부동산은 엄청난 시세차익을 내고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세금을 빼돌릴 수 있는 불투명한 거래의 대명사였다. 부동산시장에는 가명, 차명, 명의신탁, 이중계약서 같은 단어가 늘 따라다녔다. 신고가격과 실제가격이 따로 놀아 무엇이 진짜 가격인지 알 수 없고, 가격 부풀리기와 이중계약서가 관행처럼 돼왔다. 세간에는 ‘부동산 세금을 제대로 내면 바보’라는 말이 상식이 돼버릴 정도였고, 제도적 허점을 악용해 마음만 먹으면 투기로 얻은 불로소득을 숨길 수 있었다.
하지만 이 같은 ‘검은 거래’는 ‘부동산실명제’와 ‘실거래가 신고-등기부 기재’라는 부동산시장 질서를 바로 잡는 제도를 통해 하나 둘 자취를 감춰가고 있다. 부동산 시장의 거래를 투명하게 하고 부동산 투기소득의 숨은 거처를 원천적으로 없애려는 노력은 ‘관행’이라는 이름 아래 차일피일 미뤄오던 오랜 숙제를 뜯어고치게 만들었다.
아파트의 실거래 가격이 단지별 평수와 층별로 공개(아파트 실거래가 공개시스템:http://rt.moct.go.kr)되고, 부동산 소유· 거래· 납세에 대한 개인· 세대별 통계가 정확히 집계(행정자치부 부동산정보센터:http://rimc.mogaha.go.kr)돼 국민들이 이를 언제든지 확인할 수 있게 됐다. 이를 통해 시장동향에 대한 정확한 정보 제공은 물론 소유현황과 편중 정도, 수급 및 거래실태 파악이 가능하다. 투명한 시장구조는 이미 우리 실생활에서 피부에 와 닿고 있으며 거래 투명화를 통해 투기 이익을 환수할 수 있는 안전장치가 마련되고 세제 형평성도 높아졌다.


부동산 실거래가 공개 시스템(사진 위)과 부동산정보 알리미 사이트(아래)
부동산 실명제의 탄생
1995년 1월6일. 문민정부 3년차에 접어들면서 새해 벽두 김영삼 대통령의 내외신 연두기자회견에 세간의 관심이 쏠렸다. “부동산실명제 실시를 이미 지시했으며 곧 단행될 수 있을 것입니다.” 1993년 8월 전격적인 금융실명제에 화들짝 놀랐던 시장은 또 한번 요동쳤다.

부동산실명제 실시를 1면 톱으로 보도한 1995년 1월7일자 신문
이미 김영삼 대통령은 1994년 11월 홍재형 부총리에게 부동산실명제 실시를 준비하도록 지시했고 경제기획원 이근경 국장이 비밀리에 상당한 준비를 해오고 있었다. 대통령 연두기자회견을 계기로 부동산실명제 논의는 재무부와 통합된 재정경제원으로 옮겨졌다. ‘금융실명제실시단’이 ‘금융부동산실명제실시단’으로 간판을 바꿔달고 법원 법무부 등 관계부처와 전문가들로 구성된 태스크포스팀이 ‘부동산 실소유자 명의 등기제’의 법안 준비에 들어갔다.
그해 1월27일 입법예고된 ‘부동산실권리자명의등기에 관한 법률’은 실소유자 명의 등기와 명의신탁 무효에 관한 2개의 핵심조문을 포함해 본문 15개조 부칙 5개조의 간단한 법이었다. 모든 명의신탁 약정과 이에 따른 부동산 물권변동은 무효이며, 제3자에게 대항할 수 없도록 했다. 실명등기 의무를 위반한 경우에는 부동산가액의 30%에 해당하는 과징금을 부과토록 했다. 1995년 3월 부동산실명제법이 국회를 통과하자 당시 한국일보는 “부동산실명제는 금융실명제와 더불어 ‘경제혁명’의 양축이다. 투기 뇌물 탈세 등 ‘검은 거래’가 돈이나 부동산을 통해 이뤄지고 있어 금융실명제와 부동산실명제가 시행될 경우 이 같은 ‘검은 거래’가 구조적으로 차단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평가했다.
부동산 실명제 왜?
부동산실명제의 골자는 ‘등기 따로, 실제 주인 따로’의 부동산차명거래인 명의신탁을 금지시키는 것이었다. 1912년 일제시대 때 도입된 명의신탁은 그동안 가장 대표적인 부동산 투기 수법으로 지목돼 왔으며 재산은닉 및 분산 수단, 기업의 부동산 취득수단 등으로 악용돼 부동산거래 질서를 문란하게 하고 부동산 등기제도를 부실화했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정부가 처음으로 부동산실명제 실시를 검토한 것은 1989년 조순 부총리 때다. 당시 경제기획원 기획국장인 한이헌 전 청와대 경제수석은 부동산투기를 근본적으로 막기 위해 토지공개념의 일환으로 부동산실명제 시행을 검토했다.
그러나 법조계와 재계는 명의신탁 금지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자유계약 원칙에 정면으로 배치된다며 위헌론을 제기했다. 결국 정부는 부동산실명제 논의를 유야무야하고 말았다. 궁여지책으로 부동산등기특별조치법을 제정(1990년), 조세포탈과 부동산투기 등을 목적으로 한 명의신탁을 금지시켰을 뿐이다.
그러나 이 법률에는 정상적인 사유가 있을 때는 예외로 한다는 단서를 두고 있어 약간의 법률무장만 한 투기꾼이라면 얼마든지 명의신탁에 의한 부동산투기를 할 수 있었다.
1993년 8월 이미 금융거래 실명제가 도입됐고, 1996년 1월부터 금융자산소득 종합과세제도까지 실시될 경우 비실명금융자금이 가명 및 차명으로 부동산시장으로 흘러들어갈 우려가 있었다. 이 때문에 부동산 부문에서도 실명제를 도입해 금융거래 실명제를 보완할 필요도 제기됐다.
부동산실명제에 의해 모든 부동산등기는 실권리자 이름으로 등기하게 됐으며 명의 신탁은 금지됐다. 종전의 명의신탁은 1년의 유예기간을 줬다. 부동산등기 실명제는 당시 부동산거래 시장의 투명성을 확보하는 기반이 됐다는 평가를 받았다. 물론 지금은 대부분 부동산 거래자에게는 이 제도가 있는지 없는지 모를 정도로 당연한 것이 됐지만, 투기 및 불법증여 탈세나 세금회피 등의 목적으로 명의 신탁을 악용한 과거의 관행을 단절할 수 있는 단초가 됐다.
부동산 실명제 빠르게 정착
부동산실명제 실시 후 2년여 지난 1997년 5월 재정경제원이 발간한 ‘부동산실명제 백서’에 따르면 2년 동안 부동산을 실소유주 명의로 전환한 건수는 6만5976건으로, 총면적은 1억3072만평에 달했다. 건당 평균면적이 1981평에 이르는 셈이다. 또 부동산실명제를 위반한 사람들에게 부과된 과징금도 31건에 10억원을 넘었다.
특히 법인의 부동산 실명전환 건수는 1684건으로, 개인명의로 돼있던 부동산을 법인 앞으로 돌린 건수는 1461건에 달했다. 그동안 기업이 부동산매입에 임직원을 동원했다는 사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셈이다. 당시 한 대기업이 실명제를 위반하고 다른 사람 명의로 대규모 땅을 숨겨뒀다가 적발돼 여론의 도마에 오르기도 했다.
신문들은 부동산실명제 추진 초기 “부동산 시장은 아주 냉각되거나 가격이 폭락할 것으로 전망된다. 명의 신탁된 부동산의 실제 소유자들은 경과조치기간에 자진 신고하여 실명으로 전환하든지 아니면 남의 명의로 된 부동산을 매각하여 현금으로 챙기지 않으면 안 될 처지다. 매물홍수가 예상된다”고 전망했다.(한국일보 1995년 1월7일자)
과연 그랬을까. 1995년 하반기 부동산실명제등 투기억제정책이 힘을 발휘하면서 부동산시장은 안정세를 보였다. 땅값 상승률은 0.6%에 그쳤고 집값은 전년보다 0.2% 떨어졌다.
하지만 1996년 들어 상황이 달라졌다. 연초 터진 우성건설의 부도 등 건설업체들이 겪고 있는 심각한 자금난을 덜어주기 위한 정부의 금융지원책과 함께 각종 규제 완화책이 쏟아지면서 그 해 주택가격은 다시 1.5% 상승 반전한 것이다. 정부는 1년간의 유예기간이 끝나고 명의신탁 매물이 본격적으로 나와 부동산 가격 상승을 막을 것으로 내다봤지만 예상은 빗나갔다.
결국 부동산실명제는 매물확대를 통한 가격안정이라는 직접적 효과보다는 부동산 거래 시장을 한 단계 투명하게 했다는 성과로 만족해야 했다.
실거래 가격 신고-등기부 기재 제도의 등장
“아니 세상에 실거래가격을 그대로 적으라고요?”
2006년 6월 말 서울 강남의 한 부동산중개소에서는 입씨름이 한창이었다. 아파트 매도자는 세금을 한 푼이라도 덜 내려고 구청에 신고할 계약서에 실제 거래가격에서 2000만원을 뺀 가격을 쓰자고 한다. “다운계약서 좀 씁시다. 실거래가를 곧이곧대로 신고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심지어 “다운계약서를 써주면 500만원 정도 더 깎아주겠다”고까지 제의한다. 하지만 아파트를 새로 산 사람은 나중에 자신이 그만큼 싸게 산 것으로 돼 매도할 때 그 만큼 ‘세금 덤터기’를 쓸 수도 있다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든다. 계약서뿐만 아니라 아파트 등기부등본에까지 실거래가액이 기재된다는 부동산중개업자의 말에 결국 계약서는 실제 거래가격대로 적혔고 중개업자가 이를 인터넷을 통해 시·군·구에 신고하고 거래신고필증을 받아 등기소에 제출하는 것으로 계약은 성사됐다.

'실거래가 신고'가 이제 부동산 시장의 '상식'으로 통한다고 평가한 매일경제 기사
부동산실명제가 ‘이름’ 부분의 시장 투명화 조치였다면 2006년 1월1일부터 시행된 부동산 실거래 가격 신고제와 6월1일부터 실시된 부동산 거래 가격 등기부 기재는 ‘가격’부분에서 부동산 시장을 투명하게 만든 또 다른 ‘사건’이었다.
“정부가 지난해부터 전국 모든 부동산에 대해 실거래가를 신고하도록 법을 바꾼 일은 간단해 보이면서도 엄청난 사건이다. 유사 이래 우리나라에서 부동산에 관한 한 단일가격이 한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신고할 때 따로, 세금 낼 때 따로, 대출받을 때 따로 하는 식으로 그때그때마다 다른 가격을 쓰던 관행이 반만년 역사를 이어왔다.”(매일경제 2007년 2월2일)
‘이젠 실거래價가 상식’이라는 제목으로 올해 한 경제신문에 실린 부동산 재테크 관련 기사 내용이다. “서울 강남에서 아파트 실거래가 신고는 이제 상식입니다”라고 시작하는 이 기사는 “실거래가 신고제 하나만이라도 제대로 정착되면 우리나라 부동산의 패러다임을 혁신하기에 충분하다는 지적이 지나친 주장만은 아닐 성싶다”고 끝맺고 있다.
RTMS라는 '괴물 프로그램'
주택법에 이어 중개업법과 지적법 세법 등이 줄줄이 바뀌면서 실거래가를 신고하지 않는 것은 불법행위가 됐다. 건설교통부는 부동산거래관리 시스템(RTMS)라는 '괴물' 같은 프로그램을 만들어 실거래가를 검증하고 신고 위반 사례를 적발해내고 있다. 한국감정원이 공시가격과 거래 가격, 경·공매 가격, 국민은행 시세표 등을 종합 조사해 산출한 기준가격을 RTMS에 올리면 실거래가 신고 위반이 의심되는 거래는 자동적으로 ‘부적정’ 이름을 달고 튀어 올라온다.
다운계약서를 썼던 사람들 가운데는 일선 시군구와 국세청의 단속에 적발돼 덜 낸 취득세의 무려 24배나 되는 과태료를 물기도 했다. 중개업자는 영업정지 처분을 받았다. 정부의 통합전산망은 부동산실명제와 실거래가 신고제 이후 개인은 물론 친·인척의 거래까지 손바닥 들여다보듯 파악할 수 있을 정도로 발전하고 있다.

“부동산 실거래가 신고, 단골 숙원 사업”
사실 부동산 실거래가격을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은 우리 부동산 시장 시스템의 근본적 ‘허점’인 동시에 세제를 담당하는 재정경제부와 국세청, 행정자치부 건설교통부 등의 오랜 ‘숙제’였다. “투기 소득에 대해 세금을 제대로 매기고 싶어도 실제 거래가를 포착할 수 있어야 말이죠.” 역대 정부에서 부동산 정책이 만들어질 때마다 이런 푸념이 따라다녔다.

빈부격차 해소를 위해 부동산 거래를 '투명하게'하는 시스템 마련이 시급하다고 지적한 신문 특집기사.
1996년 국정감사자료에 따르면 당시 재정경제원은 “실가기준으로 양도세 과세를 전환하기 위해 거래가격 등록제 도입방안 등을 검토하겠다”고 했지만 복잡한 이해관계와 각종 제도적 장벽 때문에 유야무야 됐다. 1998년 김대중 대통령의 인수위 보고서도 등기부 등본에 실거래가의 기재를 의무화하는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김용민 전 재경부 세제실장(현 조달청장)은 “실거래가 등기제도와 이를 토대로 한 공평과세는 1993년 이후 매년 재경부 세제실의 숙원사업이었다”고 회고했다. 학계에서도 공시지가의 적정성과 시가 근접도를 높이기 위해 실거래가 등기제와 실거래가 신고제 도입과 이를 기초로 한 공시지가 조사·산정 체계의 개선을 주장해 왔다.('공시지가제도의 선진화 방향에 관한 연구'-국토연구원 채미옥, 1999)
‘거래 투명·공평과세' 두 마리 토끼 잡기
“부동산 정책의 답이 없는 것이 아니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어떤 정책이 필요한지에 대해서 답이 다 있다. 그런 데도 이러한 정책이 채택되지 못한 것은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이해관계와 잘못된 관행 때문이다. 부동산 정책의 방향은 첫째, 모든 거래가 투명하게 이루어져야 하고….”(2005년 6월20일 청와대 수석보좌관 회의)
‘다시 원점에서부터 근본대책을 마련하라’는 노무현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2개월여 동안 진행된 부동산 정책회의에서 실거래가 신고는 부동산시장 투명화를 위한 핵심정책으로 논의되기 시작했다.
처음 논의 과정에서는 법원의 반대가 벽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재산소유 관계를 나타내는 공식적인 집문서 땅문서인 등기부에 가격이 등재된다는 것은 국가기관인 법원이 그 가격을 보증해주는 셈이어서 법리적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이었다. 가격의 등기부 기재는 민법의 3대 원칙중 하나인 사적 자치의 원칙(계약자유의 원칙: 개인은 계약 등 법률관계를 자유의사에 기초하여 형성할 수 있다는 원칙)에 위배되는 문제점이 있는데다 무엇보다 집행상의 어려움도 컸다.
“실거래 가격을 등기부에 기재하는 것이 어렵다면 신고라도 하게 합시다.” 이미 2003년 10.29 대책에서 실거래가 신고제를 추진했던 건교부는 실거래가 신고 시스템을 구축해 놓았다. 이제 이 시스템을 등기부 기재로 연결시키는 일만 남았다.
"법원을 설득하라"
법원을 설득하는 것은 재경부가 맡았다. 처음에 난감해하던 대법원도 부동산 투기 근절이라는 사회적 요구와 메가톤급 무게가 실린 8.31 정책의 핵심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당시 김용민 재경부 세제실장은 “부동산 문제가 워낙 심각해져서 그랬던지 완강했던 법원의 입장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의외로 호의적이었다”고 회고했다.
결국 실거래가 신고나 등기부 기재 둘 중 하나만 돼도 성공이라던 투명화 과제는 이렇게 실거래가 신고와 실거래가 등기부 기재 둘 다 달성됐다. 법원의 유권해석을 받아 8·31대책에 실거래가 등기부 기재제도를 집어넣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데 실거래가로 등기하면 지방세인 취득세와 등록세가 지나치게 높아진다는 문제가 생겼다. 서민들의 피해가 우려된다는 행자부의 지적도 타당했다. 취·등록세 과표를 조정했다.
언론이 주목하지 않았던 핵심정책

투기꾼들에게 실거래가 신고와 등기부 기재는 그동안 쌓아온 불로소득과 세금탈루의 피라미드를 더 이상 지속할 수 없게 한 ‘가짜와 은닉의 종말’ 이다.
때로는 거래 위축이라는 핑계로, 때로는 전산시스템 미비로 수십 년 동안 미뤄져 오던 우리 부동산시장의 또 하나의 ‘구조적 맹점’이 마침내 해소되고 부동산 실거래가 파악체계가 정착됐다. 물론 일부 의도적으로 허위신고를 시도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국민 감정상 등기부는 내 재산의 모든 것을 나타내는 ‘집문서’다. 그렇게 만만한 문서가 아니다.
실거래가 신고와 등기부 기재는 8·31정책을 형성하는 핵심 축 가운데 하나였지만 당시 언론은 ‘투기억제’ 부문에만 초점을 맞췄을 뿐 이 두 가지 투명성 제고 조치에는 별로 주목하지 않았다.
언론의 외면과는 달리 두 제도의 효과는 상당했다. 수십 년 동안 ‘거짓 신고 가격’에 둘러싸여 무엇이 진실인지 알 수 없었던 부동산 거래 내용이 투명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일반 국민들도 실거래가격이 기재된 부동산등기부를 자유롭게 열람할 수 있게 되고, 매달 아파트 단지별 실거래 가격을 취합한 데이터베이스(DB)와 가격 조회 시스템이 갖춰지면서 아파트 부녀회를 중심으로 한 호가 높이기는 구조적으로 어렵게 됐다.
2006년 1차 공개 때 500호 이상 아파트 단지 중 10건 이상 거래된 단지를 대상으로 한 것도 같은 해 하반기 2차 공개에서는 전체 아파트단지로 확대됐고 아파트별 면적과 가격형성에 영향이 큰 층별 정보도 추가됐다. 37만 1000건의 아파트 실거래 자료가 적정성 검증을 거쳐 투명하게 공개됐다.
이를 통해 재산세와 종부세 등 보유세의 세부담 형평성이 높아지는 효과도 생겼다. 그동안 공시가격은 시세(적정 시가의 80%)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있었다. 공시가격 조사시점이 매년 1월 1일 기준이어서 1월 이후부터 이뤄지는 아파트값 등락을 반영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가짜와 은닉에 마침표"
그러나 앞으로 실거래가 자료가 축적되면 공시가격이 실거래가를 기초로 산정되기 때문에 공시가격은 시가의 적정수준으로 정해진다. 공시가격이 시세를 적정수준에서 반영할 경우 이를 기준으로 과세하는 종부세와 재산세의 세부담 형평성이 높아진다. 변양균 청와대 정책실장은 “실거래가 신고제는 금융실명제에 버금갈 정도로 부동산 시장에서는 획기적 조치다. 정부는 투기가 더 이상 발붙일 수 없게 제도를 정비했다고 자부한다”고 말했다.
김수현 사회정책비서관은 “투명하게 거래, 보유, 과세현황을 파악하고, 이들 통계를 국민들과 공유하게 되면 부동산에 대한 국민적 인식이 변할 것으로 믿는다. ‘신고가격 따로, 실제가격 따로’ 식의 후진적 관성도 바뀔 것이다. 이는 앞으로 체계적이고 투명한 정책형성 과정에 기여할 것”이라고 했다.
실제 거래가격이 등기부에 기재됨에 따라 부동산 관련 세금의 실거래가 과세제도의 기반도 구축됐다. 2007년부터 부동산 양도세를 실거래가 기준으로 부과할 수 있게 된 것도 2006년부터 시행된 등기부 기재제도 덕분이다. 투기꾼들에게 실거래가 신고와 등기부 기재는 그동안 쌓아온 불로소득과 세금탈루의 피라미드를 더 이상 지속할 수 없게 한 ‘가짜와 은닉의 종말’ 이다.
■ 부동산 가격체계의 정비
과거 부동산에 매기는 세금을 보면 국세인 양도소득세, 상속세, 증여세 등은 국세청에서 담당 공무원에 의해 결정되는 ‘기준시가’에 따라 부과되고, 지방세인 취득세 등록세 재산세 등은 시장 군수 구청장이 매년 결정 고시하는 ‘과세시가표준액’에 의해 부과됐다.
이 때문에 같은 지역의 같은 지번을 가진 토지의 가격이 담당 부처에 따라 크게 차이가 나고 과세시가표준액에 따라 부과되는 세금 역시 실질거래가격의 10~15%에 불과했다. 이 같은 불합리한 가격체계와 토지평가자격제도를 일원화해 1989년 4월 '지가공시 및 토지등의 평가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어 공시지가제도가 도입되었고, 1990년 1월1일부터 공시지가가 공시됐다.
1990년 8월10일에는 ‘검인계약서제도’를 도입했다. 검인계약서가 도입되기 전에는 부동산을 등기할 때 ‘매도증서’에 나오는 가격대로 기재되고 이를 악용해 중간생략 등기가 가능해 중간거래자들이 양도소득세와 취, 등록세 탈세가 보편화했다. 이 때문에 검인계약서는 1978년 8.8조치 때 이미 도입을 약속했지만 시행이 10년 넘게 미뤄지다 1990년 8월에야 시행된 것이다.
하지만 검인계약서 역시 ‘종이호랑이’였다. 검인 담당 공무원이 계약서상 매매 대금의 실질심사권이 없음을 알고 당사자간 담합에 의해 실거래 가격보다 턱없이 낮은 가격으로 검인 받을 계약서를 이중으로 작성해 검인을 받았다. 1999년에 발표된 동의대 행정학과의 한 논문은 “부동산 거래로 인한 탈세를 막아 부동산 투기를 억제하고 실질적인 거래금액을 노출시켜 정당한 과세를 하기 위해 도입한 검인계약서제도는 취득세와 등록세의 과세표준액으로 활용되고 있으나 그 본질적인 의도는 적어지고 오히려 합법적인 탈세가 가능한 제도로 변질됐다”고 지적했다.
1989년 4월1일 '지가공시 및 토지등의 평가에 관한 법률'이 제정돼 토지로 인한 모든 과세에 공시지가가 과세표준으로 적용되었고 1990년 7월1일부터 양도소득세와 상속세 및 증여세에도 공시지가가 과세표준으로 적용됐다. 전국의 땅 가운데 대표성이 있는 땅인 표준지에 대해 건교부가 공시지가를 책정하면(표준지공시지가) 각 지방자치단체가 이를 기준으로 개별 땅에 대한 공시지가(개별공시지가)를 산정한다. 이처럼 지가는 공시지가로 통일됐으나 건물 가격은 건물분 과세시가표준액으로 산정돼 실제 시장가격과 크게 차이가 났다. 이 때문에 2005년부터 공시주택가격제도(토지 가격+건물 가격)를 도입해 건물가격의 시가 근접도를 높였다.
이같이 얽히고설킨 부동산 가격체계가 8.31정책 이후 종부세와 재산세 등과 같은 보유세는 공시가격으로, 양도세와 취 등록세는 실거래가로 통일 된 것이다. 보유세 과표가 그동안 면적 기준에서 가격기준으로 바뀌면서 2006년1월부터 아파트 등 공동주택은 물론 단독주택까지 공시가격제도가 전체 부동산으로 확대됐다. 그동안 국세청이 발표해오던 아파트 기준시가도 건교부가 공시가격으로 발표하기 시작한 것이다.
용어풀이
◆ 주택 공시가격=아파트,연립주택,다세대 등 공동주택 공시가격과 단독주택 공시가격으로 나뉜다. 공시가격은 재산세,종합부동산세 등의 부과 기준이 된다. 과거 공동주택 공시가격은 국세청이 기준시가란 이름으로 발표하고 단독주택 공시가격은 건설교통부가 발표했지만, 2006년부터 건교부가 모든 주택의 공시가격을 일괄 발표한다. 공동주택 가격은 가격변동이 심해 모든 주택을 조사해 산정한다. 반면 단독주택 가격은 건교부가 표준주택을 선택해 비준표를 작성해 주면 시·군·구에서 이를 토대로 개별 주택의 토지와 건물을 평가해 공시한다.
◆ 과세 표준=세금을 부과할 때 기준이 되는 가격,수량 등을 말한다. 소득세는 소득액 등이 과세표준이 되지만 재산세 등을 부과할 땐 공시가격을 기준으로 하지 않고 공시가격의 일정률을 반영한 금액을 과세표준으로 한다. 2006년 재산세의 과세표준은 주택 공시가격의 50%, 종합부동산세는 70%이며 매년 단계적으로 현실화될 예정이다.
◆ 공시지가=땅값은 건교부가 공시지가란 이름으로 발표한다. 전국의 땅 가운데 대표성이 있는 땅인 표준지에 대해 건교부가 공시지가를 책정(표준지 공시지가)하면 각 지방자치단체가 이를 기준으로 개별 땅에 대한 공시지가(개별공시지가)를 산정한다. 표준지 공시지가는 매년 1월1일, 개별지 공시지가는 5월 31일 공시되며 토지 관련 세금, 토지수용보상가 산정 등의 기준으로 활용된다.
| 특별기획팀 | 등록일 : 2007.02.21
[어떤 정책 폈고 왜 못잡았나 ②] 타워팰리스가 양도세 면제받은 까닭
부동산투기 억제세에서 실거래가 과세까지 [실록 부동산정책 40년 ⑦] 오락가락 양도세의 역사
2001년 초 건설업계에서 시작된 양도세 폐지론이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그해 2월1일 여당인 민주당의 남궁석 정책위의장이 한국주택협회가 주축이 된 건설업계와의 간담회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 이방주 현대산업개발 사장은 “양도소득세는 부동산 투기 억제책의 일환으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2000년 말 현재 주택보급률이 94.8%에 이르는 등 주택이 이미 투기대상으로서의 의미를 상실했으므로 양도세는 즉각 폐지돼야한다”고 주장했다. 정종득 벽산건설 사장도 “주택 수요 억제를 위한 양도세 부과는 시대착오적 발상”이라고 말했다.
이로부터 석 달 뒤인 5월5일 ‘부동산 양도소득세 제도가 지난 75년 입법화된 후 26년 만에 전면 개편된다’는 <한국경제신문>의 보도가 나오더니, 5월10일 재정경제부가 “현행 부동산 세제는 투기억제를 목적으로 운용되고 있으나 주택보급률이 94%에 달하는 현 시점에서 부동산 투기 바람이 다시 불 가능성이 희박한 만큼 선진국처럼 보유세 위주로 전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밝히기에 이른다.
다음 날, 한나라당 주요 당직자회의에서 김만제 정책위의장은 “현행 양도세법은 잦은 개정과 수많은 예외사항 등으로 완전히 누더기가 됐다”며 “주택보유율이 80%를 넘어선 현 시점에선 부동산 투기의 위험도 줄어들었고 주택거래의 활성화를 위해 양도세는 폐지돼야한다”고 말했다.
양도세 비과세의 공방전
그러나 2년 뒤인 2003년5월 예상치 못한 ‘반격’이 일어났다. 김진표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이 “1가구1주택에 대해 양도세 비과세 혜택을 주는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다. 외국처럼 1주택이든 2주택이든 모든 주택에 대해 세금을 매기는 것이 조세원칙에 맞다 ”고 밝혔다. 1가구1주택 비과세는 정부 수립 후 금지옥엽처럼 지켜온 금기의 영역이었다. 그런데 경제 정책의 수장이 양도세 폐지론은 커녕 ‘예외 없는 과세’라는 칼을 치켜든 것이다.
언론과 한나라당 대표는 물론이고 여당 정책위 의장까지 일제히 반발하고 나섰다. 이 사태는 7월21일 민·관 위원으로 구성된 세제발전심의위원회에서 “아직은 서민들의 내 집 마련 성격이 강한 만큼 (1가구1주택에 대한) 양도세 부과는 시기상조”라고 의견을 모으면서 사실상 백지화했다.
불씨는 꺼지지 않았다. 같은 해 10월 김진표 부총리는 “1가구1주택 양도세 비과세 폐지는 실거래가 과세제도가 정비되는 시점에 논의될 수 있을 것”이라고 또 다시 언급했고, 11월에는 최종찬 건설교통부 장관이 “장기적으로 1가구1주택도 양도세를 부과하는 방안을 강구하겠다”고 공개적으로 밝혔다.
또 2년 뒤인 2005년3월 이헌재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은 노무현 대통령에게 ‘2005년 업무계획’을 보고하면서 “1가구1주택 양도세 비과세제도를 언제 폐지할지 구체적인 일정은 상반기 중에 마련하겠다”고 말했다.
양도소득세의 탄생과 그 숙명

비록 국민의정부 말기와 참여정부 초기라는 편차가 있지만, 많은 세제 중에 유독 양도세를 놓고 불과 2년 만에 입장이 왜 이렇게 달랐던 것일까.
양도세는 부동산 양도로 실현된 자본이득을 과세대상으로 하는 비정기적, 자발적 조세이지만 부동산경기를 조절하는 정책조세적 성격을 강하게 띠어왔다. 활황기에는 세율인상, 과표인상, 비과세감면축소를, 불황기에는 그 반대 방향으로 경기를 조절하는 수단으로 활용된 것이다.
태생부터가 그랬다. 부동산의 양도차익에 대한 세제가 처음 마련된 것은 1967년 11월 제정·공포된 ‘부동산투기억제에 관한 특별조치세법’이다. 1962년부터 시작된 경제개발 5개년계획으로 도시로의 인구집중 경향이 나타났고, 덩달아 토지 가격이 많이 올랐다.
이에 ‘부동산투기억제세’라는 이름을 달고 태어난 게 양도세의 출발이었다. 투기억제세는 개인과 법인의 토지양도차익에 대하여 50%의 단일비례세율을 적용했다. 다만 1세대1주택에 부수된 토지로 건물 면적의 10배 내에 이르는 토지는 면세대상으로 했다.
‘부동산투기억제세’가 지금과 같은 양도세의 모양새를 비로소 갖춘 것은 1974년. 종합소득세 제도를 도입하면서 종합소득세와 분리과세하는 양도소득세법을 새로 만들었다. 양도소득세법이 투기억제세를 흡수한 것이다. 특기할만한 건, 과세대상으로 삼지 않았던 건물양도차익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확대된 반면 물가상승률만큼 취득가액에 더해 공제해 주도록 했다는 점이다.
투기억제든, 건설경기부양이든 양도세가 보다 실질적인 효과를 내려면 어떤 방향이어야 하는지 구체화하려는 시도는 최초의 부동산종합대책이라 할 1978년 8·8조치에서 이뤄졌다.
중동특수에 따른 오일달러가 유입되면서 그 여유자금이 부동산에 몰리면서 이때 처음 아파트가 고급주택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1976년 12월 1가구1주택 가운데 고급주택을 과세대상으로 전환하는 데 이어 1978년 봄 서울을 비롯한 전국 대도시마다 부동산값이 오르는 현상을 보이자 정부는 8·8조치에 앞서 ‘부동산투기지역 고시제도’를 발표했다.
고시된 투기지역의 토지나 건물에 대한 양도세를 내무부가 고시하는 ‘과세시가표준액’을 기준으로 하지 않고 국세청이 별도로 고시하는 ‘기준시가’를 기준으로 삼겠다는 것이다. 과표를 높여 세금 부담을 늘리겠다는 뜻이다.
양도세의 획기적 전환점이 될 뻔했던 8·8조치
주목해야할 건 8·8조치의 원안에 담겼던 획기적 구상이다. 거래당사자와 거래금액이 기재된 부동산거래용 인감증명제도를 실시하기로 하는 동시에 양도세를 회피하기 위해 극성을 부리던 미등기전매를 막는 수단으로 인감증명의 유효기간을 1주일로 대폭 줄이는 안이 들어있었다. 실거래가를 과표로 삼을 수 있는 토대를 만드는 동시에 등기 전에 수차례 사고팔면서도 세금 없이 매매차익을 올리는 투기 관행을 막아보겠다는 것이다.
당시 이 안을 마련했던 강만수 전 재정경제부 차관은 저서 <현장에서 본 한국경제 30년>에서 이렇게 증언한다. “다른 나라에 유례가 없는 양도소득에 대한 물가상승률 공제는 가격상승에 따른 소득을 공제하여 투기소득 과세의 실효성이 반감됐다. 특히 양도가격을 거래가격이 아니라 정부가 정한 시가표준액을 기초로 과세할 때는 과세를 포기하는 것과 같았다.”
빠져나갈 구멍이 숭숭 뚫린 면세 허점을 막는 동시에 실제 거래되는 가격을 근거로 한 과세가 없이는 양도세가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없다는 말이다. 하지만 당초 안은 변질되고 만다. 강 전 차관은 부처간 의견조율의 어려움을 기록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건설부가 소극적이었고 내무부의 반대가 강했다. 투기꾼들과의 전쟁보다 내부 반대자들과의 전쟁이 더 힘들었다. 밤낮 없는 수고가 허탈할 뿐이었다.”
강 전 차관은 “(2005년 8·31 조치로 전격 도입된) 실거래가 등기부 기재 제도는 그때 거래 내역을 기재하는 인감증명제도만 실행했어도 불필요했을 것”이라고 아쉬워했다.
양도세 강화 외에는 ‘원안 변질’
결국 인감증명제도는 ‘부동산 거래용’으로만 표시하고 유효기간을 1개월로 하는 것으로 수정됐고, 그밖에 토지거래 허가제는 신고제로, 변호사 등에 의한 토지 매매계약 체결제도는 공인중개사제도로 변질됐다. 그나마 원안이 지켜진 건 양도세 강화뿐이었다. 물가상승률 공제를 폐지하고, 1가구1주택의 면세요건을 6개월 이상 실제 거주로 요건을 강화하는 것으로 발표됐다.
부동산 경기가 활황이면 조이고, 불황이면 풀어주는 양도세의 운명이 극명하게 대비되는 건 8·8조치를 전후로 한 1970년대 말~1980년대 초반 그리고 IMF 외환위기 이후의 두 시기다. 8·8조치 이후 2년간 부동산 경기가 가라앉으면서 일반경기까지 불황의 여파가 미치자 완화가 시작된다.

양도소득세 세율 인하를 1면 톱 기사로 보도한 1980년 9월17일자 조선일보
1980년 9월 경제활성화 대책을 발표하면서 양도소득세를 최대 20% 인하하고, 물가상승률까지 양도가격에서 공제하는 양도소득특별공제제도를 부활시켰다. 미등기전매의 양도세율도 80%에서 75%로 낮췄다. 석 달 뒤인 12월에는 탄력세율을 적용해 이미 낮춘 양도세를 절반까지 추가로 감면해주는 조처를 취했다. 이 탄력세율은 애초 1981년 9월까지 적용하기로 했으나 잇따른 경기부양책으로 1984년 3월까지 연장됐다.
다시 부동산 경기가 달아오르자 ‘뒤집기’
그러나 1982년 하반기부터 부동산경기가 뜨겁게 달아오르자 또다시 뒤집기가 시작된다. 1983년 2월 ‘2·16 부동산투기억제대책’으로 부동산투기지역고시제를 다시 시작했고, 4월에는 ‘4·18 토지 및 주택문제종합대책’을 발표해 양도소득탄력세율의 적용시한을 1984년3월에서 1983년 6월로 앞당기고, 1세대1주택의 비과세 요건을 거주기간 6개월에서 1년으로 늘렸다.
8·8조치 때도 자리 잡지 못한 실거래가 과세는 사실 1975년부터의 원칙이었다. 예외적으로 실거래가액이 불분명할 경우에 보충적으로 기준시가로 양도소득을 산출하도록 했다. 그러나 양도소득 과세 중 실거래가에 의한 과세는 소수에 지나지 않았고 대부분 기준시가에 의한 과세였다. 국세청의 ‘고백’을 들어보자.
“과거 75년부터 82년까지 실거래가로 양도세를 과세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한정된 조사인력으로 모든 거래에 대해 실거래가로 신고했는지 여부를 조사하기가 불가능한데다, 조사받지 않은 경우와 조사받은 경우의 과세 불공평 문제가 발생했다. 아울러 납세자가 실가를 입증할 자료를 분실한 경우도 발생하는 등 조사자와의 마찰도 없지 않았다.
제도적인 뒷받침 없이 불충분한 국세청 조사인력만으로는 양도소득세를 실가로 과세하기가 매우 어려웠던 것이다. 이에 따라 83년부터 부동산을 취득한 후 1년 이내에 양도하는 단기양도, 미등기 전매 등의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시세를 정확하게 반영하지 못하는 단점이 있기는 하나 기준시가 과세제도로 변경하게 됐다.”<세금에 대한 오해 그리고 진실>(국세청 펴냄)
하지만 기준시가제도는 내무부의 지방세 과세시가와 국세청의 특정지역 기준시가 등으로 지가체계가 일원화하지 못한데다가 내무부의 과세시가표준액이 실거래가액보다 지나치게 낮게 책정돼 실효를 갖기 어려웠다. 게다가 파는 사람은 양도세를 줄이기 위해, 사는 사람은 등록세와 취득세를 낮추기 위해 공공연히 행해지던 이중계약서 관행을 막을 방법은 더더욱 없었다.
물론 개선 노력은 있었다. 1989년 4월 지가의 현실화 및 지가체계의 일원화를 위한 ‘공시지가’ 제도가 도입됐다. 그동안의 기준시가를 대신한다고는 해도 토지는 개별공시지가로, 건물은 내무부 지방과세시가 표준액 건물분으로, 아파트·연립주택 중 국세청장이 지정한 지역은 국세청 기준시가로 각각 결정됐다. 그러나 여전히 이원화된 과세표준의 산출방식은 과세 형평에 어긋나며 실질과세 원칙과도 동떨어졌다.
양도세의 완성, 실거래가 과세로 가는 머나먼 여정
실거래가 과세는 오랜 정책 과제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국토연구원 채미옥 박사가 1996년과 1998년에 실거래가 등기제를 통해 공시지가를 산정해야한다는 보고서를 잇따라 내면서 논의는 보다 깊어졌다. 1996년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재정경제원은 “양도소득세를 실지거래가액 기준으로 전환하기 위한 거래가격등록제의 도입방안 등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조건이 붙는다. “실가기준으로 양도세 과세를 전환하기 위해서는 장기간 거래가격기재 의무화(부동산등기법 개정사항)가 진행된 후에나 가능하다.”
등기부등본에 실거래가의 기재를 의무화하는 방안은 김대중 대통령 인수위 시절에 잠시 등장한다. 1998년1월 인수위는 부동산 양도소득세의 경우 명목세율은 높으나 실효세율이 낮은 점을 감안해 최고세율은 낮추되 과세표준을 실거래가로 전환하겠다는 의지를 보이기도 했다. 이를 위해 등기부등본에 실거래가의 기재를 의무화하는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밝혔으나 이 논의는 곧 자취를 감췄다.
대신 IMF 외환위기가 몰아치면서 경기부양을 위한 부동산 정책이 우선 과제로 떠올랐고, 양도세는 또 다시 단골메뉴가 됐다. 외환위기 직전인 1997년4월 정부는 기준시가를 대폭 상향 조정했다. “서울 목동과 일부 지역, 수도권 신도시 등을 중심으로 부동산값이 상승세를 보인 것으로 파악됐다”는 것이다.
외환위기 앞에서 정책도 ‘촛불신세’
그러나 외환위기 이후 모든 것이 달라졌다. 1998년5월 양도세 감면 대상을 전용면적 25.7평 이하 신축주택으로 대폭 확대하고, 두 달 뒤 전용면적 50평을 넘지 않는 모든 신축주택으로 확대했다. 또 9월에는 30~50%이던 양도소득세율을 10% 낮추는 세제개편안을 확정했다. 연말에는 1가구1주택자의 양도세 비과세 요건을 3년 이상 보유에서 1년 이상 보유로 완화키로 했다.
반전은 2002년 벽두부터 시작됐다. 강남을 중심으로 집값이 급등하자 정부는 국세청을 내세워 허위 계약서를 작성해 양도세를 제대로 내지 않은 투기혐의자를 대상으로 세무조사를 벌이는 한편 기준시가를 수시 조정키로 하는 등의 대책을 내놓기 시작했다.
그런데 양도세에 대한 완급 조절이 주택 가격에 영향을 미치기나 한 것일까. 학계의 오랜 논의에도 불구하고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고 일부에선 부정적 연구 결과를 내놓고 있다. <부동산 양도세에 관한 연구>(윤덕병, 박기태 지음. 2004)는 주택매매가격지수와 아파트매매가격지수 등의 통계수치를 이용한 연구 결과, 외환위기 이후 주택경기활성화를 위해 작동한 양도세 완화정책은 실효성이 없었던 것으로 결론내고 있다.
또 수도권 일부 지역 및 고가주택에 대한 양도세 강화조치가 해당 지역과 고가주택의 주택가격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확인하기 위해 2000년1월부터 2002년12월까지의 자료를 사용한 <양도소득세가 주택가격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연구>(최종훈 지음. 2003)는 양도세 강화가 주택 가격을 안정시키는 효과는 미약하다고 판단했다.
수요관리 정책의 일환으로 양도세를 활용하려면 근본적인 수술이 필요했다. 2005년 8·31 정책으로 전격 도입된 부동산 실거래가 신고와 등기부 기재 제도는 그 오랜 숙제의 결과였다.
“실거래가 과세만이라도 꼭 실시”
노무현 대통령의 인수위 시절부터 부동산 정책에 관여해 8·31 정책안 마련까지 줄곧 참여해온 김수현 청와대 사회정책비서관의 증언이다. “대통령직 인수위 때 개혁과제 중 하나로 부동산 세제의 정상화가 있었다. 신고가격과 실제 가격이 다 틀리는 전근대적 수준이었으니까. 그렇지만 그때는 실거래가에 의한 양도세 과세까지는 생각도 못했다. 지인이던 윤주현 박사(전 국토연구원 토지주택연구실 선임연구위원)가 청와대에 들어가면 한 가지만 꼭 하라고 했던 게 실거래가 과세였지만 말이다.”
8·31정책으로 2006년에는 우선 1세대2주택자, 비사업용 나대지, 부재지주 소유의 농지 등에 대해서, 2007년부터는 모든 부동산으로 확대해 실제 벌어들인 양도차익을 기준으로 양도소득세를 과세하게 됐다. 국세청이 2006년 9월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밝힌 ‘평형별, 보유연수별 2006년 상반기 실제 양도세 부담사례’를 보면, 1주택자와 2주택자간 양도세 부담이 같은 아파트라도 10배 안팎의 차이를 보였다. 예컨대, 서울 압구정동 미성 32평형의 양도세는 1400만원이지만, 2주택자라면 약 8배인 1억800만원이 됐다.
양도세 인하 압력이 거세졌고, 급기야 실거래가 기준 양도세 부과 문제가 헌법재판소까지 갔다. 강남지역 땅을 팔았다가 실거래가로 과세된 양도소득세를 납부해야했던 조 모씨 등 9명이 위헌 여부를 묻는 헌법소원을 냈고, 2006년 12월1일 헌법재판소는 재판관 전원일치로 합헌결정을 내렸다. 마침내, 양도소득세의 실거래가 과세라는 오랜 숙제에 마침표를 찍은 것이다.

1가구1주택 비과세 폐지론과 고가주택
그런데 2003년 당시 김진표 부총리는 왜 비판의 집중포화를 감수하면서까지 1가구1주택 비과세 폐지론을 들고 나왔을까. 사실 학계에선 오래전부터 1가구1주택 비과세 제도의 폐지를 주장해왔다 (<조세론>(이필유, 유경문 지음, 2003), <부동산 처분과세제도에 관한 연구>(박한범 지음, 1994) 등). 서민 주거생활의 안정을 도모한다는 취지로 비과세하고 있으나 이를 악용해 양도차익을 노린 부동산 투기의 수법으로 활용될 뿐더러 소득 있는 곳에 과세한다는 조세 형평의 원리에도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신 미국이나 일본처럼 일정액의 양도차익을 소득공제해줌으로써 실질적으로 양도소득세를 면세해주는 방안을 제시해왔다. 김진표 부총리도 당시에 대안으로 외국의 소득공제 제도를 언급했다. 그렇지만 참여정부가 1가구1주택 비과세 폐지를 구체안까지 준비하지는 않았었다.
김수현 청와대 비서관은 “1가구 1주택에 대한 양도세 논란은 실제 세금을 걷는 세수가 목표가 아니라 투명화의 문제였다. 따라서 실익도 없이 80%가 넘는 국민들을 불안하게 하기보다 다른 방법으로 대처하고 이 부분은 건드리지 말자고 정리했다”고 밝혔다.
‘고가 주택’이라는 다른 문
‘다른 방법’의 문은 이미 열려있었다. 국민의정부 말기인 2002년 가을, 10·11조치로 도입된 ‘고가주택’ 개념이다. 실거래가액 6억원이 넘는 주택을 고가주택으로 분류해 1가구1주택이더라도 양도세 감면 혜택을 주지 않기로 한 것이다. 그동안 면적기준(전용 45평 이상)과 금액기준(거래가액 6억원 이상) 등 2가지 요건을 모두 충족해야만 ‘고급주택’으로 분류해 양도세를 매겨온 방식에서 진일보한 것이었다.
반발은 거셌다. 한국경제연구원은 “국민의 재산권 행사를 제한하는 위헌 소지마저 있다”고 주장했고, 당시 대통령 후보이던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와 정몽준 의원이 한목소리로 반대하고 나섰다. <동아일보>는 10월19일치 사설에서 ‘KDI(한국개발연구원)도 비판하는 부동산정책’이라는 제목으로 정부안을 비판했다.

참여정부 양도세 정책의 핵심은 실거래가 과세와 1가구2주택 등 다주택자에 대한 중과세다.‘불패신화’가 만연한 우리 부동산 시장에서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바로 ‘정책 일관성’이다.
언론 반발 뚫고 국회를 설득
당시 재경부에서 실무를 담당했던 김용민 전 세제실장(현 조달청장)의 증언이다. “1997년에 재산세 과장을 6개월 했는데 1가구1주택에 관한 비과세는 문제가 있다는 게 세제실의 오랜 과제였다. 자본이득에 대해 과세하지 않는다는 건 1억원이든, 2억원이든 과세 형평성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2002년 재산소비세심의관으로 있을 때, 고급주택에 대해서는 1가구1주택이더라도 비과세 대상에서 제외시켰는데 가만 보니까 전용면적 45평 이상이면서 그리고 6억원 초과되는 주택이라는 두 가지 동시충족 조건에서 다 빠져나가고 있었다. 타워팰리스의 십억대 주택도 세금 한 푼 안내고 다 빠져나갔다. 이건 안 되겠다 싶어 면적기준을 없애려고 고급주택을 고가주택으로 바꾸겠다고 보고하니까 위에서 깜짝 놀라더라.”
그래서 대통령령으로 바꾸려던 출발은 양도소득세법을 고치는 쪽으로 선회했고, 재경위 의원을 일일이 설득한 끝에 개정에 성공했다.
참여정부는 2006년 1월부터 부동산 거래시에 물건 소재지 관할 지방자치단체에 실제거래가액을 신고하도록 하고, 6월1일부터는 신고된 실거래가액을 부동산 등기부에 기재하고 있다. 2007년 현재, 1세대1주택자가 3년 이상 보유한 후 집을 팔 때 실거래가액이 6억원을 넘어서면 양도소득세를 내야한다. 6억원을 초과하는 고가의 주택은 전체의 2~3% 정도이며 6억원 초과분에 해당하는 양도차익만을 과세하고 있다.
저항과 유혹의 해묵은 반복
부동산 정책을 조율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정부 부처간의 논란은 오랜 역사를 지닌다. 1978년 8·8조치 때도 그랬지만, 1989년 초 당시 경제기획원, 건설부, 재무부, 내무부 국장들이 모여 토지공개념 3법을 만들 때도 마찬가지였다.
“경제기획원은 과세의 수준을 높이려는 반면, 실제 토지소유자나 기업들을 접하는 내무부와 상공부 등의 부처는 세제의 급격한 강화에 소극적이었다. 우선 과표에 있어서 기획원은 당시 실거래가격의 15%에 불과하던 과표를 대폭 인상하려고 했다. 나웅배 부총리가 내무부를 설득하여, 1988년부터 1993년까지 5년간 토지는 60%, 건물은 50%까지 과표를 높이는데 합의하였으나 기획원이 이 일정을 단축하려하자 조세저항을 이유로 내무부가 반발하여 결국 원점으로 되돌아갔다. 대신 공시지가 제도를 도입했다.”(<주택정책 반세기>, 임서환 지음)
정부 내에서도 1가구3주택 양도세 중과를 놓고 많은 고민과 논의가 있었다. 2004년 11월12일 재경부에서는 “1가구3주택 중과세를 내년에 시행하는 것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투기가 가라앉고 주택 거래가 끊기는 상황에서 (연기를) 검토하고 있다”는 의견이 나왔다. 2005년1월1일부터 시행하기로 한 1가구 3주택 이상 다주택 보유자에 대한 양도소득세 중과세 방침을 연기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시장에서는 ‘10·29 대책’이 흔들리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아파트 분양권 전매를 지방에서 부분적으로 허용하기로 한데 이은 완화 움직임이었기 때문이다. 10·29 대책에서 정부는 9~36%로 돼 있는 양도세 기본세율을 3채 이상의 경우 60%로 대폭 올리고, 투기지역은 탄력세율 15%포인트를 가산해 세율을 75%까지 끌어올리기로 했었다.
급기야 이정우 청와대 정책기획위원장이 “1가구3주택에 대한 양도세 중과를 예정대로 강행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언론은 정부 내 논의과정을 ‘정면 충돌’이라는 자극적인 표현으로 보도했다. 당시 외국 순방 중이던 노무현 대통령이 이에 관한 보고를 받았고, ‘정부 내 갈등이 있는 것으로 비춰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양도세 중과는 예정대로 시행하는 쪽으로 일단락됐다.
■ 타워팰리스 양도세 면세의 앞뒤
외환위기 당시 양도세의 고삐를 하나씩 하나씩 풀어준 결과, 웃지 못 할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2003년 하반기 들어 아파트 가격이 급상승하면서 ‘최고가 아파트’로 꼽히게 된 타워팰리스가 '전용면적 50평' 이하의 경우 세금 한 푼 내지 않고 수 억원대의 매매 차익을 고스란히 챙길 수 있게 됐다.

외환위기 당시 정부는 가라앉은 건설경기를 활성화할 대책으로 특정 기간(1998년 5월22일~1999년 12월31일, 2000년 11월1일~2003년 6월30일)에 신축주택을 취득한 경우, 잔금지급일로부터 5년 안에 매각하면 기존 주택을 1채 보유하고 있어도 1가구 1주택 비과세 혜택을 주어 양도세를 면제해주는 정책을 폈다(양도세는 보유기간에 따라 일정금액을 공제한 양도차익의 9~36%를 세금으로 내야하는데, 1년 미만 보유의 경우 양도세율은 36%에 달한다).
이 조치로 도곡동 타워팰리스 1차(1499가구) 분양과 2차 미분양 960가구의 소진 시기가 때마침 이에 해당돼 수 백가구가 혜택을 입게 된 것이다. 타워팰리스 1차는 1999년 6월 평당 1100만~1200만원에 분양했으나 문제가 불거져 나온 2003년 10월 당시 시세는 2000만~2200만원선이었다. 평당 1000만원 가까운 시세 차익을 보이고 있었다. 2003년 11월 한국일보는 “57평형의 경우 바로 팔면 시세차익만 4억원이 넘는데 1억원 가량의 양도세를 내지 않아도 되고, 68평형의 경우도 1억5000만원가량의 양도세를 면제받게 됐다”고 보도했다. 부동산 가격 급등의 ‘혜택’을 가장 많이 받게 된 이들이 양도세 면제라는 횡재까지 덤으로 얻게 된 것이다.
이 특례제도는 2007년 말 끝난다. 현재 1가구1주택 양도세 비과세 요건을 갖추기 위해서는 기존 주택을 3년 이상 보유해야 하고 서울 등에서는 기존 주택에 2년 이상 거주하는 조건도 만족시켜야한다.
| 특별기획팀 | 등록일 : 2007.02.22
[실록 부동산정책40년 ⑤] “부동산 투기 누가 부추기나 2007-03-14 09:55:42

우리나라 부동산 가격은 1960년대 본격적인 경제개발과 함께 크게 움직이기 시작해 지난 40년간 수도권 집중화에 따른 수급 불균형과 공급시차, 경제성장에 따른 소득향상과 과잉 유동성, 건설경기 부양 유혹, 부동산 투기심리에 무력했던 제도, 정책 미비 등의 요인들에 의해 변동을 겪었다. 과거 집값이 급등할 때는 항상 시중에 돈이 너무 많이 풀리고 주택공급이 부족했으며 투기로 얻은 불로소득을 환수하는 시스템이 갖춰지지 않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지역간 불균형 개발의 결과인 수도권 집중, 핵가족화와 고령화로 인한 도시 가구수 증가 등으로 주택 수요는 공급을 앞질렀지만 주택부족 문제를 구조적으로 해결하려는 노력은 미흡했다. 민간자본에 크게 기댄 주택시장 구조는 주택을 투기대상으로 보는 심리를 키웠다.
지난 40년간 투기억제와 경기활성화라는 두 가지 목표 사이에서 일관성 없는 정책이 추진되면서 주기적 집값 상승과 ‘부동산 불패’라는 잘못된 믿음을 심어줬고, 적절한 대체투자 시장의 미성숙은 자본의 부동산 쏠림 현상을 가속화했다.
그 동안 부동산은 엄청난 시세차익을 내고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세금을 빼돌릴 수 있는 세금탈루와 불투명한 거래의 대명사였다. 공시가격과 실제가격이 따로 놀아 무엇이 진짜 가격인지 알 수 없고, 가격 부풀리기와 이중 계약서가 횡행했다. 편법과 허점투성이 거래 환경은 많은 국민들을 부동산 투기라는 유혹 속으로 끌어들였다.
정부는 지금도 과거 ‘투기시대 패러다임’과 씨름하고 있다. 이는 투기로 병든 우리 부동산 시장을 근본부터 치유하고 정상화하는 힘겨운 과정이다.
국정브리핑이 주택도시연구원·국토연구원·금융연구원과 공동으로 기획한 <실록 부동산정책 40년>은 ‘총론’에 이어 ‘제1부, 왜 올랐나’라는 주제로 부동산 가격을 오르게 하는 4가지 근본적 요인을 4회에 걸쳐 점검한다. <편집자>
총론-'부동산 신호등'세우기 40년 걸렸다
<1부> 왜 올랐나
1-경기부양과 부동산의 딜레마:"이렇게까지 많이 풀었습니까"
2-유동성과 부동산:'큰 칼'이냐, '작은 칼'이냐
3-공급시차와 시행착오:주택공급에서 생긴 일
4-부동산 심리와 정책불신
‘부동산은 심리다.’ 왜곡된 정보로 ‘집값이 계속 오른다’고 부추기면 시장이 동요하게 된다. 이 같은 불안은 결국 가수요와 투기심리를 낳는다.
2006년 하반기의 ‘조바심 수요’에 의한 집값 급등 현상은 부동산 시장의 심리적 요인을 잘 보여준다.
2006년 쌍춘년 고분양가 ‘조바심 파동’
그 해 늦여름, 쌍춘년을 맞아 크게 늘어난 신혼부부 수요와 이사철이 겹치면서 전세물량 부족 현상으로 전셋값이 오르기 시작했다. 여기에 정부가 8월 판교 2차 분양에서 중대형 아파트 분양가를 평당 1800만원대로 책정한데 이어 9월 서울시는 은평뉴타운 분양가를 주변 시세의 2배에 가까운 최고 1500만원대로 정하면서 고분양가는 주변 아파트 가격 상승으로 이어졌다.
공공분양 아파트 값이 크게 오르자 파주 운정 신도시에서는 한 건설업체가 분양가를 인근 아파트 매매가의 2배에 이르는 평당 1460만원으로 책정했다. 여론이 악화되자 이 업체는 분양가를 평당 평균 1297만원으로 내렸으나, 오히려 고분양가 폭리 주장이 근거 있음을 반증한 셈이었다.
당시 건설교통부는 이례적으로 “내년에 파주지역에서 나오는 중대형은 원가연동제와 채권입찰제가 적용돼 저렴하게 나오니 해당 아파트 청약을 자제하라”고 당부했지만 문제의 아파트 청약은 4대 1이 넘는 경쟁률로 전 평형이 1순위 마감됐다. 부동산 정책에 대한 불신과 가격 상승 기대감이 그대로 드러난 사례였다.

2006년 9월 고분양가 논란 속에 문을 연 파주 운정 신도시의 한 아파트 모델하우스를 찾은 청약인파
고분양가로 인한 집값 상승의 여파로 그동안 관망하던 실수요자들이 불안감 속에 추격매수에 나서자 오름세는 수도권 전역과 중소형 평형으로까지 확산됐다. 언론은 자고 나면 수천만~수억원씩 호가가 뛰는 아파트 값을 스포츠경기 중계하듯 보도했다.
공공기관마저 노골적 ‘땅장사’
이처럼 주택에 대한 ‘조바심 수요’를 유발한 고분양가는 주택이 들어서는 땅의 가격, 즉 택지비가 비싼 것이 큰 요인이다. 민간 택지뿐만 아니라 정부나 지방자치단체가 공급한 공공택지로 지은 아파트에서조차 고분양가 논란이 매번 되풀이되면서 주택시장이 철저히 시장 메커니즘으로만 움직인다는 인식은 투기심리를 부추긴다. 토지공사·주택공사와 지자체의 공영개발기관조차도 시장원리에 입각해 택지매각 비용을 받겠다며 노골적으로 땅장사를 하는 경우도 없지 않았고, 이는 곧 저돌적인 투기심리의 배경이 됐다.
2005년 초 서울시는 뚝섬에 초고층 주상복합단지를 조성하겠다며 1,3,4 구역 상업용지를 시세보다 훨씬 높은 가격인 1조원이 넘는 돈을 받고 팔았다. 당시 최고가 경쟁입찰 방식을 도입한 서울시는 당초 참여업체들의 경쟁이 과열됐다며 돌연 매각을 취소했다가 4개월 뒤인 2005년 6월 감정가를 40%나 올린 채 다시 공매에 나서면서 논란을 빚었다.
특히 당시 4구역의 땅을 평당 7732만원이라는 사상 최고가에 낙찰받은 한 업체는 최근 두 차례나 연장한 잔금납부기한을 넘기면서 사업 자체의 위기를 맞고 있을 정도다. 땅값이 7000만원대면 아파트 평당 분양가가 4000만원을 넘어야 한다는 계산이 나와 일각에서는 “뚝섬 땅을 비싸게 팔아 서울시 빚을 줄인 유능한 서울시장인지는 몰라도 국가 전체로는 아파트 값 폭등을 부채질한 책임을 면할 수 없다”는 비판도 나오고 있다.

이밖에도 토지 보상비용의 급격한 증가와 도로, 전력 등 수조원 규모의 간선시설 비용이 고스란히 분양가에 전가되는 현상, 저밀도 친환경 개발을 표방해 용적률을 낮추는 방향의 개발도 아파트 가격상승의 주요 원인이 됐다.
이에 따라 과거에는 아파트 분양가에서 20~30%에 불과하던 택지비 비중이 지금은 대부분 절반을 웃돌고 있다. 논란을 빚은 은평뉴타운의 택지비 비중은 분양가의 57.2%였으며 역시 고분양가 논란을 일으킨 판교신도시 44평형은 평당 분양가(1857만원) 대비 토지비용이 70.2%(대지비 41.6%, 채권손실액 28.6%)에 달했다. 이는 공공재의 성격이 강한 주택조차 철저히 시장 메커니즘에 따라 움직인다는 인식을 심어 투기심리를 부추기고 실수요자들을 압박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이처럼 과도한 택지비 부담이 아파트 분양가를 밀어 올리는 구조적 문제가 계속 제기되자 정부는 2006년 7월부터 택지 공급가격 기준을 기존의 감정가에서 토지조성원가의 90~110%로 바꿨다.
투기에 취약한 부동산 시장
부동산은 단기적으로 가격 왜곡이 일어나기 쉬워 투기에 취약한 상품의 특성을 갖고 있다. 특히 아파트는 다른 재화에 비해 살 사람이 상품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사전에 알기 어렵다. 우리나라 아파트 시장처럼 선분양제가 일반화 돼 있고 특정 지역에 수요가 몰리는 경우에는 수요자와 공급자 간의 정보 비대칭성이 더욱 심해져 수요자들은 구조적으로 고분양가 등 공급자 우위의 시장상황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여기에 부동산 정보업체들이 인터넷에 제공하는 매물과 시세 정보는 높은 가격을 원하는 매도자 호가 위주의 시황을 부추겨 부동산 가격을 왜곡한다. 이러한 상황은 시장의 혼란과 불안감을 증폭시키고 불안한 가격 매커니즘 속에서 마음만 먹으면 시세 조작도 가능한 상황을 초래했다. 결국 여기서 피해의식이 깔린 투기 심리도 생겨났다.
부동산 가격은 호가라도 일단 높은 가격이 형성되면 값이 잘 내려가지 않기 때문에 왜곡된 정보들은 투기를 장기화한다. 우리나라처럼 수도권 집중화가 심하고 개발 가능한 택지 비율은 매우 낮아 부동산 가치의 희소성이 상대적으로 높은 상황에서는 이러한 현상이 두드러진다. 2007년 1·11 대책을 기점으로 아파트 가격이 뚜렷하게 하향 안정세를 보이고 있으나 하락폭이 상승기 때만큼 크지 않은 것은 이러한 부동산 시장의 특성에 기인한다.
또 부동산은 수요가 증가해도 공급까지는 상당한 시차가 존재할 수밖에 없고 여기서 발생하는 가격의 비탄력성 탓에 단기적으로 가격왜곡 현상이 일어나기 쉽다. 소득이 증가하고 생활수준이 높아지면서 주택 크기나 질에 있어 기존의 주택보급률만으로는 측정하기 힘든 새로운 수요가 생긴다. 그러나 이러한 신규 수요를 공급이 즉각 뒷받침 할 수 없다는 점도 아파트 가격 상승의 한 요인이 됐다.
부동산은 이처럼 시장실패가 쉬운 공공재적 성격을 가진 상품이다. 결국 시장 실패로 인한 공급부족이나 가격왜곡 등 문제가 불거지면 정부의 정책적 개입이 불가피하다.

‘이래도’ 못 믿고, ‘저래도’ 못 믿어
2000년 하반기부터 서울 강남의 아파트를 중심으로 시작된 부동산 가격 상승 추세는 과거 부동산 가격 상승이 2~3년에 그쳤던 예와는 달리 장기간 지속되는 특징을 보였다. 여기에는 IMF 위환 위기 이후 지속된 저금리와 시중 유동자금 증가, 국지적 주택공급 부족, 재건축 기대심리, 금융권의 환경변화, 과도하게 풀린 부동산 규제 등 여러 가지 요인과 함께 수십년 간 경험한 ‘부동산불패’ 라는 투기심리도 한 몫을 했다.
고철 주택산업연구원장은 2006년 아파트 값 상승에 대해 “정부 정책을 믿지 못하고 불안심리가 커진데 따른 심리적 요인이 크다. 공급을 확대한다고 하면 재건축이 완화될 것으로 기대해 집값이 뛰고, 규제를 늘린다고 하면 공급이 줄 것으로 보고 오르는 형국으로 한마디로 진퇴양난”(2006년11월3일 서울경제신문 인터뷰)이라며 부동산 정책의 어려움을 설명했다.
한 당국자도 당시 집값 폭등에 대해 “5·31 지방선거 패배, 야당 의원들이 부동산 문제에 대해 다른 시그널을 준 것, 북핵 사태 이후 금리정책을 진짜로 못 쓸 것이라는 시장의 확신 등 정부가 (심리적으로) 잡힐 수 있는 약점은 모두 잡힌 상태였다”고 토로했다.
이와 함께 대선으로 정책 기조가 변화할 수 있다는 기대감도 집값 상승을 부추겼다. 특히 일부 언론은 대선에 편승한 경기부양책이나 각 후보들이 인기몰이용으로 쏟아놓을 개발공약, 정권이 바뀔 경우의 부동산 규제 완화나 정책후퇴 등의 가능성을 제시하며 시장의 불안감과 국민들의 투기심리에 불을 지폈다.
수십 년 간 부동산 불패 학습효과

1975년 '투기부인'들의 서울 영동 잠실 여의도 일대의 아파트 투기열풍을 소개한 신문기사. 중앙일보 75년 3월25일자.
부동산불패의 믿음은 어제오늘 형성된 것이 아니다. 개발 초기 단계인 1960년대 말 말죽거리 신화 때만 해도 부동산 투기로 얻는 시세차익은 20-30배에 달했다. 1970년대에는 시세 차익이 5-6배, 1980년대에는 2-4배로 줄었으나 2003년 이후에도 상승기에는 여전히 2배 정도의 수익을 기대할 수 있었다.
30년전인 1977년4월 국세청 조사에서도 당시 분양경쟁률이 수십 대 일에 달했던 여의도 아파트 당첨자들 중 3분의 1이 무자격자 즉 투기꾼들이었음이 드러난 바 있다.
당시 매일경제신문(1974년5월10일자)은 1969~70년 사이 경부고속도로 개통을 전후해 신갈인터체인지에서 용인에 이르는 지역의 땅값이 4년 만에 15배나 뛰었다고 보도했다. 같은 신문(1977년10월17일자)은 당시 지하철 2호선 착공 발표 후 일주일이 지나자 연초 평당 3만~7만원이었던 이 지역 땅값이 13만원을 호가하고 이후에도 계속 오르고 있어 땅주인들의 해약 요구로 거래질서에 혼란을 빚는다고 전했다. 개발 소식에 부동산 가격이 치솟고 투기세력이 개입해 매물을 돌리며 가격 상승을 주도하는 오늘날과 그리 다르지 않은 모습이 30년 넘게 되풀이 됐음을 알 수 있다.
재벌과 권력층 주도 부동산 투기
부동산이 전국민의 재테크 대상이 된 오늘날과는 달리 부동산 투기가 재벌과 개발 정보를 미리 입수한 일부 권력층 주변 자산가들의 전유물이었던 시절도 있었다.

서울신문 1983년6월10일자.
서울신문(1983년6월10일자)은 국립공원 지리산지구 관광집단시설지역 고시 예정지에 발표 1년 전부터 투기세력이 몰려 2년 전 평당 1000~2000원 하던 땅이 2만~5만원으로 2년 동안 20배 이상 급등했다고 보도했다. 해당 지역의 개인땅 85%를 서울, 전주 등 외지인이 매입해 개발정보가 누설됐음을 방증했다.
최근에 와서야 관심의 초점이 되고 있는 화성, 판교 지역도 1980년대부터 수도권 신도시 개발후보지로 지목돼 오면서 이미 1990년대에 ‘거물 외지인’들의 투자가 집중됐다. 특히 정치인 등 고위층은 1980년대 초반부터 본격적으로 이 지역 토지를 매입했다.
1993년 문민정부에서 시작된 공직자 재산공개 결과는 힘 있고 출세한 사람치고 부동산 부자 아닌 사람이 없다는 ‘소문’이 사실임을 입증했다. 많은 행정부, 사법부 내 장·차관급 인사들과 국회의원, 군 장성들이 투기성 불법, 탈법 부동산 거래와 보유가 밝혀져 옷을 벗었다.
이후 2000년 제정된 인사청문회법에 따라 총리 등 고위공직자들이 국회에서 청문회를 거칠 때마다 빠짐없이 등장하는 항목이 부동산 투기 관련 의혹이었다. 국민들이 부동산 투기와 그 대응책에 냉소적이고 무감각해진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
전국민 부동산 재테크 시대
그러나 외환 위기 이후에는 은행들이 주수익원이던 기업 대출 감소에 따라 주택담보 대출 비중을 크게 늘리면서 많은 사람들이 대출을 통한 투자에 나설 수 있었다. 저금리와 손쉬운 주택담보대출로 자금원이 갖춰지자 수십 년 동안 투기꾼들의 승리를 지켜보면서 기회만 닿는다면 투기행렬에 기꺼이 동참하겠다는 의식을 내면화한 사람들은 집값 오름세라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일부 아파트 주민들은 부녀회 등을 통해 집값 담합에 나서 시장질서를 어지럽혔다. 건설교통부 집값담합신고센터에 적발된 서울 지역 한 아파트는 실거래가보다 최고 2억원이나 높은 호가로 담합한 사례도 있었다. 그러나 공정거래위원회가 담합행위에 공정거래법을 적용한 처벌이 불가능하다고 밝힌 데다 실제 대응조치도 일정기간 실거래가를 공개하고 부동산정보제공업체에 시세정보 제공을 중단시키는데 그치고 있다. 심지어 일부 단지는 건교부, 재경부가 강력한 처벌 규정을 신설하겠다고 발표하자 규제 이전에 집값을 서둘러 올려놓겠다는 식의 대담함을 보이기도 했다
“부동산 투기해도 벌금 약간 내면 그만”
“조 모(33·여)씨는 아파트 10채, 상가 32채, 오피스텔 24채를 갖고 있으면서 불법으로 조합원 자격을 얻어 5채의 신규분양 아파트를 공급받아 구속됐으나, 재판에서 벌금 2500만원만을 선고받았다. 조 씨는 앞서 배임죄로 이미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은 상태였다. 임야 1만8000평을 8억2800만원에 사들여 405명에게 사기 분양해 317억원을 가로챈 혐의로 구속된 배 모(37·남)씨 등 8명의 기획부동산 업자들은 초범이거나 동종 전과가 없다는 이유로 집행유예 또는 벌금 200만원의 판결을 받았다.”
정부의 ‘부동산투기사범 합동수사본부’가 2005년7월~12월까지 대대적으로 부동산투기범죄에 대한 특별단속을 벌인 후 구속된 252명에 대한 법원 판결 결과의 일부이다. 부동산 시장을 왜곡시키고 막대한 불법 이득을 취한 투기 사범들에게 내려진 이 같은 솜방망이 처벌은 국민들에게 ‘부동산 투기를 해도 벌금 얼마내면 그만’이라는 식의 그릇된 법 감정을 조장해 왔다.
또 부동산 투기 행위는 법망을 피해 날이 갈수록 수법이 다양하고 교묘해지고 있는데 반해 부동산중개업법 등 관련 법규는 범죄유형을 단순하게 규정하고 있어 현실을 반영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형량도 가벼운 편이다.
이에 따라 정부는 주기적으로 부동산 투기가 활개 칠 때마다 관련 법규 정비, 공급 확대, 세제와 금융 정책 등으로 부동산 가격 안정을 유도하는 한편 국세청 세무조사와 투기자 명단 발표 등 투기 가담자들을 직접 겨냥한 응급 대책들을 끊임없이 내놨으나 투기 현상이 거의 만성화 되다시피 하면서 투기세력과 국민들 모두 별다른 경각심을 가지지 못하게 됐다.
불투명한 부동산 거래 관행과 불합리한 세제도 국민들의 투기불감증에 일조했다. 실거래가를 숨기고 이중으로 다운계약서를 작성해 취·등록세, 양도소득세를 탈세하는 행위가 당연한 관행처럼 굳어졌다. 양도소득세도 실거래가에 비해 비현실적으로 낮은 기준시가를 기준으로 부과돼 투기로 인한 불로소득을 환수하는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고 그나마 경기등락에 따라 세율과 과표가 오르내리고, 감세 혜택이 잇따르면서 정책불신을 키워왔다. 과거 기존 주택의 재산세 역시 가격이 아니라 면적 등 불합리한 과표기준과 체계로 인해 오히려 투기수익을 보장해주는 역할을 해왔다.
결국 국민들은 수십 년 간 미비한 정책과 부실한 법적용의 틈을 뚫은 부동산 투기의 높은 수익성을 지켜보면서 ‘부동산 투기는 비용 대비 효율이 높은 투자’라는 경험칙을 얻게 됐다.
“부동산은 재산증식 도구”라는 의식
그 결과 국민들도 주택이나 토지를 주거 수단이나 생산요소로만 여기지 않고 재산증식의 대상으로 인식하게 됐다. 국토연구원이 1979년, 1985년, 2000년, 2006년 네 차례에 걸쳐 실시한 ‘토지에 대한 국민의식조사’ 결과는 이 같은 변화를 여실히 보여준다.
여유자금이 있으면 무엇을 하겠느냐는 질문에 1979년에는 토지나 건물에 투자하겠다는 응답이 28.6%였으나 2006년 조사에서는 57.4%로 크게 증가했다. 특히 부동산 중에서도 서울과 수도권, 특히 강남권에서는 주택 선호도가 높고 수도권 이외 지역에서는 토지 선호도가 높아 지역별 부동산 값 상승 추이가 그대로 반영됐다.
또 주목할 만한 변화는 1979년에는 여유자금을 개인사업에 쓰겠다는 답변이 39.9%에 이르렀으나 점차 줄어들다 2006년에는 7.6%에 머물렀다는 점이다. 2006년 조사를 주도한 국토연구원 채미옥 박사는 이에 대해 “건전한 근로의식이 감소하고 부동산 투기를 내면화, 합리화하는 현상”이라고 분석했다.
“주택가격 과도하게 높지만 그래도 오른다?”
부동산투기에 대한 부정적 의견도 과거에 비해 감소했다. 재산증식을 위해 부동산을 사고파는 것이 사회적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응답이 2000년 69.5%, 2006년에는 67.5%로 1979년 51.1%에 비해 16%포인트 정도 증가했다.
국토연구원은 “토지공공성에 대한 사회적 합의 수준이 낮고 토지시장 참여자들은 자본이득을 챙기려는 형태로 움직이고 있다. 토지시장과 사법부 판례, 국민의식 모두가 부동산의 사익옹호를 지향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2007년 2월 삼성경제연구소의 '주택가격에 대한 가계의식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전체 조사대상 가구의 91.4%가 현재 주택가격이 과도하게 높거나(66.6%) 약간 높다(24.8%)고 답했다. 그러나 올해 주택가격 전망에 대해서는 하락할 것이라는 응답이 30.5%(조금 하락 28.2%, 크게 하락 2.3%)인 반면 현 수준을 유지하거나(34.1%), 상승할 것(조금 상승 30.4%, 크게 상승 5.0%)이라는 응답은 69.5%에 달해 부동산 정책에 대한 불신과 집값 상승 기대가 만연해 있음을 보여줬다.
언론 “투기도 투자다” 궤변

이는 언론의 논조 변화에서도 드러난다. 과거에는 언론들이 대부분 부동산 투기를 ‘망국병’으로 치부하면서 ‘다음 세대에도 죄를 짓는 행위’로 규정했다.
1992년5월6일자 동아일보 사설을 보자. ‘땅투기 억제는 절대 선이다’라는 단정적인 제목으로 1990년 이뤄진 재벌의 비업무용 부동산 강제매각 조치(5·8조치) 2주년을 맞아 당시의 강제 매각조치가 불가피했으며 결과적으로 부동산시세를 ‘가라앉게 한’ 효과가 있었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신문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공권력에 의한 사유재산의 강제매각 조치가 불합리한 줄은 알지만 보편적인 자로 재기에는 한국의 국토는 너무 좁고 인구는 많으며 또 한국의 재벌 형성, 나아가 자본축적과정이 다른 선진국이나 경쟁국과는 다르다’고까지 설명하며 5·8조치를 옹호했다.
그러나 13년 뒤인 2005년4월29일자 동아일보 사설은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하지 않고 기존의 부가가치를 나눈다는 점에서 부동산 투기 소득이나 주식투자 이익이나 크게 다를 바 없다. 시장경제에서 투자와 투기를 명확하게 구분하는 것이 가능하지도 않다’고 주장했다. 이 사설은 또 ‘창조적 소득은 인정하되 투기적 소득은 일절 인정하지 않겠다’는 대통령의 발언을 비판하면서 ‘집을 팔아 남긴 이득을 모두 세금으로 환수하는 정책을 동원하는 것은 시장을 이념이나 정치적 포퓰리즘의 실험장으로 삼는 행위’라고 비난했다.

“부동산 광고와 언론의 논조 연관성 있다”
사실 우리나라 언론은 논조나 정치적 지향과는 별도로 부동산문제에 관해서는 크게 자유롭지 못하다. 신문들은 IMF 외환위기 이후 대형 광고주가 줄어들고 케이블 방송과 인터넷 뉴스포털, 무가지 등 신규매체와의 경쟁이 치열해진 환경 속에서 수입의 대부분을 광고에 의존하고 있다. 이에 따라 신문들은 기업광고를 안정적으로 유치하기 위해 서울 강남 거주자들을 비롯한 ‘구매력 있는 독자층’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
그중에서도 부동산 투기붐에 따라 부동산 광고가 핵심적인 수입원이 되면서 신문들은 종합부동산세 등 정부의 투기억제 대책에 호의적이기 힘든 구조를 가지고 있다.
부동산 광고가 신문들의 놓칠 수 없는 수익 영역이라는 점은 투기세력의 실체를 분석한 책 ‘대한민국은 부동산공화국이다?’에서도 드러난다. 이 책은 2001~2004년까지 신문광고에서 건설 광고가 매출 기여도 1위를 차지했다고 밝혔다. 이 책에 등장하는 한 유력 신문사 광고국 직원은 “후분양제가 도입되면 건설업체가 자체 자금으로 70% 이상을 시공한 뒤에야 광고를 할 수 있기 때문에 광고물량이 대폭 줄어들 수밖에 없어 신문사에서는 최대한 도입을 막고 싶은 제도”라고 말해 일부 신문들이 ‘시장원리’를 내세우며 후분양제를 적극 반대하는 속사정을 드러냈다.
서화숙 한국일보 편집위원도 2006년4월 열린 ‘정부의 부동산정책과 언론보도’라는 기자포럼에서 2006년3월 한 달치 4개 신문의 본면에 실린 광고를 분석한 결과 “정부 부동산 정책에 대한 비판적 논조와 부동산 광고 건수가 연관성을 보였다”고 지적했다. 서 편집위원에 따르면 정부의 부동산 대책에 가장 비판적인 A신문의 부동산 관련 전면 광고는 105개였으며 논조상 비판적인 순서대로 B, C, D 신문의 전면 부동산 광고는 각각 76개, 25개, 21개였다.
“서민 끌어들여 최대 피해자로 묘사”
특히 보수 언론과 일부 경제지들은 정부의 투기수요 억제책이 나오면 ‘대책이 앞으로도 언제든 변할 수 있다는 관측이 강했다(조선일보 2005년9월1일)’ ‘충격효과가 사라지면 다시 오를 수 있다(조선일보 2005년9월2일)’ 등의 ‘희망사항’과 ‘주장’을 전문가 분석이라는 명목으로 쏟아냈다. 이들은 정부대책이 약효를 발휘해 집값이 떨어질 기미가 보이면 버블 붕괴나 서민 피해를 우려하는 논조로 입장을 선회했다. 서화숙 편집위원은 “언론이 정책을 비판하기 위해 모호한 개념인 ‘서민’을 끌어들여 최대 피해자로 묘사한다”면서 “세금부담이 너무 크고, 시장에 맡겨 공급을 늘리라는 일부 언론의 주장은 1가구 다주택자와 건설업체의 입장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라고 꼬집었다.
LG경제연구원의 김성식 연구위원도 “투기세력의 자기실현적 자가발전을 견고하게 뒷받침하는 것이 일부 언론과 전문가로 위장한 투기이론가들”이라며 “일부 언론은 투기세력의 논리를 전달하는 확성기 노릇을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2005년6월24일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 주최 토론회 ‘언론이 제대로 보도하면 부동산투기 막을 수 있다’)
물론 이들 기득권 옹호 언론들은 부동산이 시장에서 거래되는 상품이기도 하지만 경제 전반에 미치는 영향력이 매우 큰 공공재적인 특성을 갖는다는 또 다른 속성을 철저하게 외면하고 있다. 따라서 100만 가구가 넘는 단칸방살이 문제나 불량주택 등 주거복지와 관련한 의제는 언론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부동산 정책, 시기 놓치면 무용지물”
2007년 들어 부동산가격 급등 현상은 진정되고 집값 내림세가 서울 강남권 재건축단지에서 강북과 수도권 전체로 확산되고 있다. 그러나 민간택지 아파트의 분양원가 공개와 분양가 상한제 실시를 주내용으로 한 1·11대책의 후속절차인 주택법과 택지개발촉진법, 임대주택법 등의 개정안 입법 처리를 놓고 새로운 시장불안 요인이 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심리에 민감한 부동산은 시장에 조금만 잘못된 신호를 줘도 엄청난 후폭풍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우리사회는 반복적으로 경험했다. 2007년2월10일자 서울신문이 사설에서 ‘아무리 좋은 정책이라도 시기를 놓친다면 무용지물이나 다름없다’고 지적하고 나선 것도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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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간 불균형 개발의 결과인 수도권 집중, 핵가족화와 고령화로 인한 도시 가구수 증가 등으로 주택 수요는 공급을 앞질렀지만 주택부족 문제를 구조적으로 해결하려는 노력은 미흡했다. 민간자본에 크게 기댄 주택시장 구조는 주택을 투기대상으로 보는 심리를 키웠다.
지난 40년간 투기억제와 경기활성화라는 두 가지 목표 사이에서 일관성 없는 정책이 추진되면서 주기적 집값 상승과 ‘부동산 불패’라는 잘못된 믿음을 심어줬고, 적절한 대체투자 시장의 미성숙은 자본의 부동산 쏠림 현상을 가속화했다.
그 동안 부동산은 엄청난 시세차익을 내고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세금을 빼돌릴 수 있는 세금탈루와 불투명한 거래의 대명사였다. 공시가격과 실제가격이 따로 놀아 무엇이 진짜 가격인지 알 수 없고, 가격 부풀리기와 이중 계약서가 횡행했다. 편법과 허점투성이 거래 환경은 많은 국민들을 부동산 투기라는 유혹 속으로 끌어들였다.
정부는 지금도 과거 ‘투기시대 패러다임’과 씨름하고 있다. 이는 투기로 병든 우리 부동산 시장을 근본부터 치유하고 정상화하는 힘겨운 과정이다.
국정브리핑이 주택도시연구원·국토연구원·금융연구원과 공동으로 기획한 <실록 부동산정책 40년>은 ‘총론’에 이어 ‘제1부, 왜 올랐나’라는 주제로 부동산 가격을 오르게 하는 4가지 근본적 요인을 4회에 걸쳐 점검한다. <편집자>
총론-'부동산 신호등'세우기 40년 걸렸다
<1부> 왜 올랐나
1-경기부양과 부동산의 딜레마:"이렇게까지 많이 풀었습니까"
2-유동성과 부동산:'큰 칼'이냐, '작은 칼'이냐
3-공급시차와 시행착오:주택공급에서 생긴 일
4-부동산 심리와 정책불신
‘부동산은 심리다.’ 왜곡된 정보로 ‘집값이 계속 오른다’고 부추기면 시장이 동요하게 된다. 이 같은 불안은 결국 가수요와 투기심리를 낳는다.
2006년 하반기의 ‘조바심 수요’에 의한 집값 급등 현상은 부동산 시장의 심리적 요인을 잘 보여준다.
2006년 쌍춘년 고분양가 ‘조바심 파동’
그 해 늦여름, 쌍춘년을 맞아 크게 늘어난 신혼부부 수요와 이사철이 겹치면서 전세물량 부족 현상으로 전셋값이 오르기 시작했다. 여기에 정부가 8월 판교 2차 분양에서 중대형 아파트 분양가를 평당 1800만원대로 책정한데 이어 9월 서울시는 은평뉴타운 분양가를 주변 시세의 2배에 가까운 최고 1500만원대로 정하면서 고분양가는 주변 아파트 가격 상승으로 이어졌다.
공공분양 아파트 값이 크게 오르자 파주 운정 신도시에서는 한 건설업체가 분양가를 인근 아파트 매매가의 2배에 이르는 평당 1460만원으로 책정했다. 여론이 악화되자 이 업체는 분양가를 평당 평균 1297만원으로 내렸으나, 오히려 고분양가 폭리 주장이 근거 있음을 반증한 셈이었다.
당시 건설교통부는 이례적으로 “내년에 파주지역에서 나오는 중대형은 원가연동제와 채권입찰제가 적용돼 저렴하게 나오니 해당 아파트 청약을 자제하라”고 당부했지만 문제의 아파트 청약은 4대 1이 넘는 경쟁률로 전 평형이 1순위 마감됐다. 부동산 정책에 대한 불신과 가격 상승 기대감이 그대로 드러난 사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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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9월 고분양가 논란 속에 문을 연 파주 운정 신도시의 한 아파트 모델하우스를 찾은 청약인파 |
고분양가로 인한 집값 상승의 여파로 그동안 관망하던 실수요자들이 불안감 속에 추격매수에 나서자 오름세는 수도권 전역과 중소형 평형으로까지 확산됐다. 언론은 자고 나면 수천만~수억원씩 호가가 뛰는 아파트 값을 스포츠경기 중계하듯 보도했다.
공공기관마저 노골적 ‘땅장사’
이처럼 주택에 대한 ‘조바심 수요’를 유발한 고분양가는 주택이 들어서는 땅의 가격, 즉 택지비가 비싼 것이 큰 요인이다. 민간 택지뿐만 아니라 정부나 지방자치단체가 공급한 공공택지로 지은 아파트에서조차 고분양가 논란이 매번 되풀이되면서 주택시장이 철저히 시장 메커니즘으로만 움직인다는 인식은 투기심리를 부추긴다. 토지공사·주택공사와 지자체의 공영개발기관조차도 시장원리에 입각해 택지매각 비용을 받겠다며 노골적으로 땅장사를 하는 경우도 없지 않았고, 이는 곧 저돌적인 투기심리의 배경이 됐다.
2005년 초 서울시는 뚝섬에 초고층 주상복합단지를 조성하겠다며 1,3,4 구역 상업용지를 시세보다 훨씬 높은 가격인 1조원이 넘는 돈을 받고 팔았다. 당시 최고가 경쟁입찰 방식을 도입한 서울시는 당초 참여업체들의 경쟁이 과열됐다며 돌연 매각을 취소했다가 4개월 뒤인 2005년 6월 감정가를 40%나 올린 채 다시 공매에 나서면서 논란을 빚었다.
특히 당시 4구역의 땅을 평당 7732만원이라는 사상 최고가에 낙찰받은 한 업체는 최근 두 차례나 연장한 잔금납부기한을 넘기면서 사업 자체의 위기를 맞고 있을 정도다. 땅값이 7000만원대면 아파트 평당 분양가가 4000만원을 넘어야 한다는 계산이 나와 일각에서는 “뚝섬 땅을 비싸게 팔아 서울시 빚을 줄인 유능한 서울시장인지는 몰라도 국가 전체로는 아파트 값 폭등을 부채질한 책임을 면할 수 없다”는 비판도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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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밖에도 토지 보상비용의 급격한 증가와 도로, 전력 등 수조원 규모의 간선시설 비용이 고스란히 분양가에 전가되는 현상, 저밀도 친환경 개발을 표방해 용적률을 낮추는 방향의 개발도 아파트 가격상승의 주요 원인이 됐다.
이에 따라 과거에는 아파트 분양가에서 20~30%에 불과하던 택지비 비중이 지금은 대부분 절반을 웃돌고 있다. 논란을 빚은 은평뉴타운의 택지비 비중은 분양가의 57.2%였으며 역시 고분양가 논란을 일으킨 판교신도시 44평형은 평당 분양가(1857만원) 대비 토지비용이 70.2%(대지비 41.6%, 채권손실액 28.6%)에 달했다. 이는 공공재의 성격이 강한 주택조차 철저히 시장 메커니즘에 따라 움직인다는 인식을 심어 투기심리를 부추기고 실수요자들을 압박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이처럼 과도한 택지비 부담이 아파트 분양가를 밀어 올리는 구조적 문제가 계속 제기되자 정부는 2006년 7월부터 택지 공급가격 기준을 기존의 감정가에서 토지조성원가의 90~110%로 바꿨다.
투기에 취약한 부동산 시장
부동산은 단기적으로 가격 왜곡이 일어나기 쉬워 투기에 취약한 상품의 특성을 갖고 있다. 특히 아파트는 다른 재화에 비해 살 사람이 상품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사전에 알기 어렵다. 우리나라 아파트 시장처럼 선분양제가 일반화 돼 있고 특정 지역에 수요가 몰리는 경우에는 수요자와 공급자 간의 정보 비대칭성이 더욱 심해져 수요자들은 구조적으로 고분양가 등 공급자 우위의 시장상황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여기에 부동산 정보업체들이 인터넷에 제공하는 매물과 시세 정보는 높은 가격을 원하는 매도자 호가 위주의 시황을 부추겨 부동산 가격을 왜곡한다. 이러한 상황은 시장의 혼란과 불안감을 증폭시키고 불안한 가격 매커니즘 속에서 마음만 먹으면 시세 조작도 가능한 상황을 초래했다. 결국 여기서 피해의식이 깔린 투기 심리도 생겨났다.
부동산 가격은 호가라도 일단 높은 가격이 형성되면 값이 잘 내려가지 않기 때문에 왜곡된 정보들은 투기를 장기화한다. 우리나라처럼 수도권 집중화가 심하고 개발 가능한 택지 비율은 매우 낮아 부동산 가치의 희소성이 상대적으로 높은 상황에서는 이러한 현상이 두드러진다. 2007년 1·11 대책을 기점으로 아파트 가격이 뚜렷하게 하향 안정세를 보이고 있으나 하락폭이 상승기 때만큼 크지 않은 것은 이러한 부동산 시장의 특성에 기인한다.
또 부동산은 수요가 증가해도 공급까지는 상당한 시차가 존재할 수밖에 없고 여기서 발생하는 가격의 비탄력성 탓에 단기적으로 가격왜곡 현상이 일어나기 쉽다. 소득이 증가하고 생활수준이 높아지면서 주택 크기나 질에 있어 기존의 주택보급률만으로는 측정하기 힘든 새로운 수요가 생긴다. 그러나 이러한 신규 수요를 공급이 즉각 뒷받침 할 수 없다는 점도 아파트 가격 상승의 한 요인이 됐다.
부동산은 이처럼 시장실패가 쉬운 공공재적 성격을 가진 상품이다. 결국 시장 실패로 인한 공급부족이나 가격왜곡 등 문제가 불거지면 정부의 정책적 개입이 불가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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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래도’ 못 믿고, ‘저래도’ 못 믿어
2000년 하반기부터 서울 강남의 아파트를 중심으로 시작된 부동산 가격 상승 추세는 과거 부동산 가격 상승이 2~3년에 그쳤던 예와는 달리 장기간 지속되는 특징을 보였다. 여기에는 IMF 위환 위기 이후 지속된 저금리와 시중 유동자금 증가, 국지적 주택공급 부족, 재건축 기대심리, 금융권의 환경변화, 과도하게 풀린 부동산 규제 등 여러 가지 요인과 함께 수십년 간 경험한 ‘부동산불패’ 라는 투기심리도 한 몫을 했다.
고철 주택산업연구원장은 2006년 아파트 값 상승에 대해 “정부 정책을 믿지 못하고 불안심리가 커진데 따른 심리적 요인이 크다. 공급을 확대한다고 하면 재건축이 완화될 것으로 기대해 집값이 뛰고, 규제를 늘린다고 하면 공급이 줄 것으로 보고 오르는 형국으로 한마디로 진퇴양난”(2006년11월3일 서울경제신문 인터뷰)이라며 부동산 정책의 어려움을 설명했다.
한 당국자도 당시 집값 폭등에 대해 “5·31 지방선거 패배, 야당 의원들이 부동산 문제에 대해 다른 시그널을 준 것, 북핵 사태 이후 금리정책을 진짜로 못 쓸 것이라는 시장의 확신 등 정부가 (심리적으로) 잡힐 수 있는 약점은 모두 잡힌 상태였다”고 토로했다.
이와 함께 대선으로 정책 기조가 변화할 수 있다는 기대감도 집값 상승을 부추겼다. 특히 일부 언론은 대선에 편승한 경기부양책이나 각 후보들이 인기몰이용으로 쏟아놓을 개발공약, 정권이 바뀔 경우의 부동산 규제 완화나 정책후퇴 등의 가능성을 제시하며 시장의 불안감과 국민들의 투기심리에 불을 지폈다.
수십 년 간 부동산 불패 학습효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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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투기부인'들의 서울 영동 잠실 여의도 일대의 아파트 투기열풍을 소개한 신문기사. 중앙일보 75년 3월25일자. |
30년전인 1977년4월 국세청 조사에서도 당시 분양경쟁률이 수십 대 일에 달했던 여의도 아파트 당첨자들 중 3분의 1이 무자격자 즉 투기꾼들이었음이 드러난 바 있다.
당시 매일경제신문(1974년5월10일자)은 1969~70년 사이 경부고속도로 개통을 전후해 신갈인터체인지에서 용인에 이르는 지역의 땅값이 4년 만에 15배나 뛰었다고 보도했다. 같은 신문(1977년10월17일자)은 당시 지하철 2호선 착공 발표 후 일주일이 지나자 연초 평당 3만~7만원이었던 이 지역 땅값이 13만원을 호가하고 이후에도 계속 오르고 있어 땅주인들의 해약 요구로 거래질서에 혼란을 빚는다고 전했다. 개발 소식에 부동산 가격이 치솟고 투기세력이 개입해 매물을 돌리며 가격 상승을 주도하는 오늘날과 그리 다르지 않은 모습이 30년 넘게 되풀이 됐음을 알 수 있다.
재벌과 권력층 주도 부동산 투기
부동산이 전국민의 재테크 대상이 된 오늘날과는 달리 부동산 투기가 재벌과 개발 정보를 미리 입수한 일부 권력층 주변 자산가들의 전유물이었던 시절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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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신문 1983년6월10일자. |
최근에 와서야 관심의 초점이 되고 있는 화성, 판교 지역도 1980년대부터 수도권 신도시 개발후보지로 지목돼 오면서 이미 1990년대에 ‘거물 외지인’들의 투자가 집중됐다. 특히 정치인 등 고위층은 1980년대 초반부터 본격적으로 이 지역 토지를 매입했다.
1993년 문민정부에서 시작된 공직자 재산공개 결과는 힘 있고 출세한 사람치고 부동산 부자 아닌 사람이 없다는 ‘소문’이 사실임을 입증했다. 많은 행정부, 사법부 내 장·차관급 인사들과 국회의원, 군 장성들이 투기성 불법, 탈법 부동산 거래와 보유가 밝혀져 옷을 벗었다.
이후 2000년 제정된 인사청문회법에 따라 총리 등 고위공직자들이 국회에서 청문회를 거칠 때마다 빠짐없이 등장하는 항목이 부동산 투기 관련 의혹이었다. 국민들이 부동산 투기와 그 대응책에 냉소적이고 무감각해진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
전국민 부동산 재테크 시대
그러나 외환 위기 이후에는 은행들이 주수익원이던 기업 대출 감소에 따라 주택담보 대출 비중을 크게 늘리면서 많은 사람들이 대출을 통한 투자에 나설 수 있었다. 저금리와 손쉬운 주택담보대출로 자금원이 갖춰지자 수십 년 동안 투기꾼들의 승리를 지켜보면서 기회만 닿는다면 투기행렬에 기꺼이 동참하겠다는 의식을 내면화한 사람들은 집값 오름세라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일부 아파트 주민들은 부녀회 등을 통해 집값 담합에 나서 시장질서를 어지럽혔다. 건설교통부 집값담합신고센터에 적발된 서울 지역 한 아파트는 실거래가보다 최고 2억원이나 높은 호가로 담합한 사례도 있었다. 그러나 공정거래위원회가 담합행위에 공정거래법을 적용한 처벌이 불가능하다고 밝힌 데다 실제 대응조치도 일정기간 실거래가를 공개하고 부동산정보제공업체에 시세정보 제공을 중단시키는데 그치고 있다. 심지어 일부 단지는 건교부, 재경부가 강력한 처벌 규정을 신설하겠다고 발표하자 규제 이전에 집값을 서둘러 올려놓겠다는 식의 대담함을 보이기도 했다
“부동산 투기해도 벌금 약간 내면 그만”
“조 모(33·여)씨는 아파트 10채, 상가 32채, 오피스텔 24채를 갖고 있으면서 불법으로 조합원 자격을 얻어 5채의 신규분양 아파트를 공급받아 구속됐으나, 재판에서 벌금 2500만원만을 선고받았다. 조 씨는 앞서 배임죄로 이미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은 상태였다. 임야 1만8000평을 8억2800만원에 사들여 405명에게 사기 분양해 317억원을 가로챈 혐의로 구속된 배 모(37·남)씨 등 8명의 기획부동산 업자들은 초범이거나 동종 전과가 없다는 이유로 집행유예 또는 벌금 200만원의 판결을 받았다.”
정부의 ‘부동산투기사범 합동수사본부’가 2005년7월~12월까지 대대적으로 부동산투기범죄에 대한 특별단속을 벌인 후 구속된 252명에 대한 법원 판결 결과의 일부이다. 부동산 시장을 왜곡시키고 막대한 불법 이득을 취한 투기 사범들에게 내려진 이 같은 솜방망이 처벌은 국민들에게 ‘부동산 투기를 해도 벌금 얼마내면 그만’이라는 식의 그릇된 법 감정을 조장해 왔다.
또 부동산 투기 행위는 법망을 피해 날이 갈수록 수법이 다양하고 교묘해지고 있는데 반해 부동산중개업법 등 관련 법규는 범죄유형을 단순하게 규정하고 있어 현실을 반영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형량도 가벼운 편이다.
이에 따라 정부는 주기적으로 부동산 투기가 활개 칠 때마다 관련 법규 정비, 공급 확대, 세제와 금융 정책 등으로 부동산 가격 안정을 유도하는 한편 국세청 세무조사와 투기자 명단 발표 등 투기 가담자들을 직접 겨냥한 응급 대책들을 끊임없이 내놨으나 투기 현상이 거의 만성화 되다시피 하면서 투기세력과 국민들 모두 별다른 경각심을 가지지 못하게 됐다.
불투명한 부동산 거래 관행과 불합리한 세제도 국민들의 투기불감증에 일조했다. 실거래가를 숨기고 이중으로 다운계약서를 작성해 취·등록세, 양도소득세를 탈세하는 행위가 당연한 관행처럼 굳어졌다. 양도소득세도 실거래가에 비해 비현실적으로 낮은 기준시가를 기준으로 부과돼 투기로 인한 불로소득을 환수하는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고 그나마 경기등락에 따라 세율과 과표가 오르내리고, 감세 혜택이 잇따르면서 정책불신을 키워왔다. 과거 기존 주택의 재산세 역시 가격이 아니라 면적 등 불합리한 과표기준과 체계로 인해 오히려 투기수익을 보장해주는 역할을 해왔다.
결국 국민들은 수십 년 간 미비한 정책과 부실한 법적용의 틈을 뚫은 부동산 투기의 높은 수익성을 지켜보면서 ‘부동산 투기는 비용 대비 효율이 높은 투자’라는 경험칙을 얻게 됐다.
“부동산은 재산증식 도구”라는 의식
그 결과 국민들도 주택이나 토지를 주거 수단이나 생산요소로만 여기지 않고 재산증식의 대상으로 인식하게 됐다. 국토연구원이 1979년, 1985년, 2000년, 2006년 네 차례에 걸쳐 실시한 ‘토지에 대한 국민의식조사’ 결과는 이 같은 변화를 여실히 보여준다.
여유자금이 있으면 무엇을 하겠느냐는 질문에 1979년에는 토지나 건물에 투자하겠다는 응답이 28.6%였으나 2006년 조사에서는 57.4%로 크게 증가했다. 특히 부동산 중에서도 서울과 수도권, 특히 강남권에서는 주택 선호도가 높고 수도권 이외 지역에서는 토지 선호도가 높아 지역별 부동산 값 상승 추이가 그대로 반영됐다.
또 주목할 만한 변화는 1979년에는 여유자금을 개인사업에 쓰겠다는 답변이 39.9%에 이르렀으나 점차 줄어들다 2006년에는 7.6%에 머물렀다는 점이다. 2006년 조사를 주도한 국토연구원 채미옥 박사는 이에 대해 “건전한 근로의식이 감소하고 부동산 투기를 내면화, 합리화하는 현상”이라고 분석했다.
“주택가격 과도하게 높지만 그래도 오른다?”
부동산투기에 대한 부정적 의견도 과거에 비해 감소했다. 재산증식을 위해 부동산을 사고파는 것이 사회적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응답이 2000년 69.5%, 2006년에는 67.5%로 1979년 51.1%에 비해 16%포인트 정도 증가했다.
국토연구원은 “토지공공성에 대한 사회적 합의 수준이 낮고 토지시장 참여자들은 자본이득을 챙기려는 형태로 움직이고 있다. 토지시장과 사법부 판례, 국민의식 모두가 부동산의 사익옹호를 지향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2007년 2월 삼성경제연구소의 '주택가격에 대한 가계의식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전체 조사대상 가구의 91.4%가 현재 주택가격이 과도하게 높거나(66.6%) 약간 높다(24.8%)고 답했다. 그러나 올해 주택가격 전망에 대해서는 하락할 것이라는 응답이 30.5%(조금 하락 28.2%, 크게 하락 2.3%)인 반면 현 수준을 유지하거나(34.1%), 상승할 것(조금 상승 30.4%, 크게 상승 5.0%)이라는 응답은 69.5%에 달해 부동산 정책에 대한 불신과 집값 상승 기대가 만연해 있음을 보여줬다.
언론 “투기도 투자다” 궤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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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언론의 논조 변화에서도 드러난다. 과거에는 언론들이 대부분 부동산 투기를 ‘망국병’으로 치부하면서 ‘다음 세대에도 죄를 짓는 행위’로 규정했다.
1992년5월6일자 동아일보 사설을 보자. ‘땅투기 억제는 절대 선이다’라는 단정적인 제목으로 1990년 이뤄진 재벌의 비업무용 부동산 강제매각 조치(5·8조치) 2주년을 맞아 당시의 강제 매각조치가 불가피했으며 결과적으로 부동산시세를 ‘가라앉게 한’ 효과가 있었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신문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공권력에 의한 사유재산의 강제매각 조치가 불합리한 줄은 알지만 보편적인 자로 재기에는 한국의 국토는 너무 좁고 인구는 많으며 또 한국의 재벌 형성, 나아가 자본축적과정이 다른 선진국이나 경쟁국과는 다르다’고까지 설명하며 5·8조치를 옹호했다.
그러나 13년 뒤인 2005년4월29일자 동아일보 사설은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하지 않고 기존의 부가가치를 나눈다는 점에서 부동산 투기 소득이나 주식투자 이익이나 크게 다를 바 없다. 시장경제에서 투자와 투기를 명확하게 구분하는 것이 가능하지도 않다’고 주장했다. 이 사설은 또 ‘창조적 소득은 인정하되 투기적 소득은 일절 인정하지 않겠다’는 대통령의 발언을 비판하면서 ‘집을 팔아 남긴 이득을 모두 세금으로 환수하는 정책을 동원하는 것은 시장을 이념이나 정치적 포퓰리즘의 실험장으로 삼는 행위’라고 비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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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산 광고와 언론의 논조 연관성 있다”
사실 우리나라 언론은 논조나 정치적 지향과는 별도로 부동산문제에 관해서는 크게 자유롭지 못하다. 신문들은 IMF 외환위기 이후 대형 광고주가 줄어들고 케이블 방송과 인터넷 뉴스포털, 무가지 등 신규매체와의 경쟁이 치열해진 환경 속에서 수입의 대부분을 광고에 의존하고 있다. 이에 따라 신문들은 기업광고를 안정적으로 유치하기 위해 서울 강남 거주자들을 비롯한 ‘구매력 있는 독자층’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
그중에서도 부동산 투기붐에 따라 부동산 광고가 핵심적인 수입원이 되면서 신문들은 종합부동산세 등 정부의 투기억제 대책에 호의적이기 힘든 구조를 가지고 있다.
부동산 광고가 신문들의 놓칠 수 없는 수익 영역이라는 점은 투기세력의 실체를 분석한 책 ‘대한민국은 부동산공화국이다?’에서도 드러난다. 이 책은 2001~2004년까지 신문광고에서 건설 광고가 매출 기여도 1위를 차지했다고 밝혔다. 이 책에 등장하는 한 유력 신문사 광고국 직원은 “후분양제가 도입되면 건설업체가 자체 자금으로 70% 이상을 시공한 뒤에야 광고를 할 수 있기 때문에 광고물량이 대폭 줄어들 수밖에 없어 신문사에서는 최대한 도입을 막고 싶은 제도”라고 말해 일부 신문들이 ‘시장원리’를 내세우며 후분양제를 적극 반대하는 속사정을 드러냈다.
서화숙 한국일보 편집위원도 2006년4월 열린 ‘정부의 부동산정책과 언론보도’라는 기자포럼에서 2006년3월 한 달치 4개 신문의 본면에 실린 광고를 분석한 결과 “정부 부동산 정책에 대한 비판적 논조와 부동산 광고 건수가 연관성을 보였다”고 지적했다. 서 편집위원에 따르면 정부의 부동산 대책에 가장 비판적인 A신문의 부동산 관련 전면 광고는 105개였으며 논조상 비판적인 순서대로 B, C, D 신문의 전면 부동산 광고는 각각 76개, 25개, 21개였다.
“서민 끌어들여 최대 피해자로 묘사”
특히 보수 언론과 일부 경제지들은 정부의 투기수요 억제책이 나오면 ‘대책이 앞으로도 언제든 변할 수 있다는 관측이 강했다(조선일보 2005년9월1일)’ ‘충격효과가 사라지면 다시 오를 수 있다(조선일보 2005년9월2일)’ 등의 ‘희망사항’과 ‘주장’을 전문가 분석이라는 명목으로 쏟아냈다. 이들은 정부대책이 약효를 발휘해 집값이 떨어질 기미가 보이면 버블 붕괴나 서민 피해를 우려하는 논조로 입장을 선회했다. 서화숙 편집위원은 “언론이 정책을 비판하기 위해 모호한 개념인 ‘서민’을 끌어들여 최대 피해자로 묘사한다”면서 “세금부담이 너무 크고, 시장에 맡겨 공급을 늘리라는 일부 언론의 주장은 1가구 다주택자와 건설업체의 입장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라고 꼬집었다.
LG경제연구원의 김성식 연구위원도 “투기세력의 자기실현적 자가발전을 견고하게 뒷받침하는 것이 일부 언론과 전문가로 위장한 투기이론가들”이라며 “일부 언론은 투기세력의 논리를 전달하는 확성기 노릇을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2005년6월24일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 주최 토론회 ‘언론이 제대로 보도하면 부동산투기 막을 수 있다’)
물론 이들 기득권 옹호 언론들은 부동산이 시장에서 거래되는 상품이기도 하지만 경제 전반에 미치는 영향력이 매우 큰 공공재적인 특성을 갖는다는 또 다른 속성을 철저하게 외면하고 있다. 따라서 100만 가구가 넘는 단칸방살이 문제나 불량주택 등 주거복지와 관련한 의제는 언론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부동산 정책, 시기 놓치면 무용지물”
2007년 들어 부동산가격 급등 현상은 진정되고 집값 내림세가 서울 강남권 재건축단지에서 강북과 수도권 전체로 확산되고 있다. 그러나 민간택지 아파트의 분양원가 공개와 분양가 상한제 실시를 주내용으로 한 1·11대책의 후속절차인 주택법과 택지개발촉진법, 임대주택법 등의 개정안 입법 처리를 놓고 새로운 시장불안 요인이 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심리에 민감한 부동산은 시장에 조금만 잘못된 신호를 줘도 엄청난 후폭풍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우리사회는 반복적으로 경험했다. 2007년2월10일자 서울신문이 사설에서 ‘아무리 좋은 정책이라도 시기를 놓친다면 무용지물이나 다름없다’고 지적하고 나선 것도 이 때문이다
[어떤 정책 폈고 왜 못잡았나 ①]“아니, 실거래가를 그대로 적으라고요?”
[실록 부동산정책40년 ⑥] 시장 투명화와 실거래가 신고
“명의(이름)도 가짜, 가격도 가짜.”
그동안 부동산은 엄청난 시세차익을 내고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세금을 빼돌릴 수 있는 불투명한 거래의 대명사였다. 부동산시장에는 가명, 차명, 명의신탁, 이중계약서 같은 단어가 늘 따라다녔다. 신고가격과 실제가격이 따로 놀아 무엇이 진짜 가격인지 알 수 없고, 가격 부풀리기와 이중계약서가 관행처럼 돼왔다. 세간에는 ‘부동산 세금을 제대로 내면 바보’라는 말이 상식이 돼버릴 정도였고, 제도적 허점을 악용해 마음만 먹으면 투기로 얻은 불로소득을 숨길 수 있었다.
하지만 이 같은 ‘검은 거래’는 ‘부동산실명제’와 ‘실거래가 신고-등기부 기재’라는 부동산시장 질서를 바로 잡는 제도를 통해 하나 둘 자취를 감춰가고 있다. 부동산 시장의 거래를 투명하게 하고 부동산 투기소득의 숨은 거처를 원천적으로 없애려는 노력은 ‘관행’이라는 이름 아래 차일피일 미뤄오던 오랜 숙제를 뜯어고치게 만들었다.
아파트의 실거래 가격이 단지별 평수와 층별로 공개(아파트 실거래가 공개시스템:http://rt.moct.go.kr)되고, 부동산 소유· 거래· 납세에 대한 개인· 세대별 통계가 정확히 집계(행정자치부 부동산정보센터:http://rimc.mogaha.go.kr)돼 국민들이 이를 언제든지 확인할 수 있게 됐다. 이를 통해 시장동향에 대한 정확한 정보 제공은 물론 소유현황과 편중 정도, 수급 및 거래실태 파악이 가능하다. 투명한 시장구조는 이미 우리 실생활에서 피부에 와 닿고 있으며 거래 투명화를 통해 투기 이익을 환수할 수 있는 안전장치가 마련되고 세제 형평성도 높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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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산 실거래가 공개 시스템(사진 위)과 부동산정보 알리미 사이트(아래) |
부동산 실명제의 탄생
1995년 1월6일. 문민정부 3년차에 접어들면서 새해 벽두 김영삼 대통령의 내외신 연두기자회견에 세간의 관심이 쏠렸다. “부동산실명제 실시를 이미 지시했으며 곧 단행될 수 있을 것입니다.” 1993년 8월 전격적인 금융실명제에 화들짝 놀랐던 시장은 또 한번 요동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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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산실명제 실시를 1면 톱으로 보도한 1995년 1월7일자 신문 |
이미 김영삼 대통령은 1994년 11월 홍재형 부총리에게 부동산실명제 실시를 준비하도록 지시했고 경제기획원 이근경 국장이 비밀리에 상당한 준비를 해오고 있었다. 대통령 연두기자회견을 계기로 부동산실명제 논의는 재무부와 통합된 재정경제원으로 옮겨졌다. ‘금융실명제실시단’이 ‘금융부동산실명제실시단’으로 간판을 바꿔달고 법원 법무부 등 관계부처와 전문가들로 구성된 태스크포스팀이 ‘부동산 실소유자 명의 등기제’의 법안 준비에 들어갔다.
그해 1월27일 입법예고된 ‘부동산실권리자명의등기에 관한 법률’은 실소유자 명의 등기와 명의신탁 무효에 관한 2개의 핵심조문을 포함해 본문 15개조 부칙 5개조의 간단한 법이었다. 모든 명의신탁 약정과 이에 따른 부동산 물권변동은 무효이며, 제3자에게 대항할 수 없도록 했다. 실명등기 의무를 위반한 경우에는 부동산가액의 30%에 해당하는 과징금을 부과토록 했다. 1995년 3월 부동산실명제법이 국회를 통과하자 당시 한국일보는 “부동산실명제는 금융실명제와 더불어 ‘경제혁명’의 양축이다. 투기 뇌물 탈세 등 ‘검은 거래’가 돈이나 부동산을 통해 이뤄지고 있어 금융실명제와 부동산실명제가 시행될 경우 이 같은 ‘검은 거래’가 구조적으로 차단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평가했다.
부동산 실명제 왜?
부동산실명제의 골자는 ‘등기 따로, 실제 주인 따로’의 부동산차명거래인 명의신탁을 금지시키는 것이었다. 1912년 일제시대 때 도입된 명의신탁은 그동안 가장 대표적인 부동산 투기 수법으로 지목돼 왔으며 재산은닉 및 분산 수단, 기업의 부동산 취득수단 등으로 악용돼 부동산거래 질서를 문란하게 하고 부동산 등기제도를 부실화했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정부가 처음으로 부동산실명제 실시를 검토한 것은 1989년 조순 부총리 때다. 당시 경제기획원 기획국장인 한이헌 전 청와대 경제수석은 부동산투기를 근본적으로 막기 위해 토지공개념의 일환으로 부동산실명제 시행을 검토했다.
그러나 법조계와 재계는 명의신탁 금지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자유계약 원칙에 정면으로 배치된다며 위헌론을 제기했다. 결국 정부는 부동산실명제 논의를 유야무야하고 말았다. 궁여지책으로 부동산등기특별조치법을 제정(1990년), 조세포탈과 부동산투기 등을 목적으로 한 명의신탁을 금지시켰을 뿐이다.
그러나 이 법률에는 정상적인 사유가 있을 때는 예외로 한다는 단서를 두고 있어 약간의 법률무장만 한 투기꾼이라면 얼마든지 명의신탁에 의한 부동산투기를 할 수 있었다.
1993년 8월 이미 금융거래 실명제가 도입됐고, 1996년 1월부터 금융자산소득 종합과세제도까지 실시될 경우 비실명금융자금이 가명 및 차명으로 부동산시장으로 흘러들어갈 우려가 있었다. 이 때문에 부동산 부문에서도 실명제를 도입해 금융거래 실명제를 보완할 필요도 제기됐다.
부동산실명제에 의해 모든 부동산등기는 실권리자 이름으로 등기하게 됐으며 명의 신탁은 금지됐다. 종전의 명의신탁은 1년의 유예기간을 줬다. 부동산등기 실명제는 당시 부동산거래 시장의 투명성을 확보하는 기반이 됐다는 평가를 받았다. 물론 지금은 대부분 부동산 거래자에게는 이 제도가 있는지 없는지 모를 정도로 당연한 것이 됐지만, 투기 및 불법증여 탈세나 세금회피 등의 목적으로 명의 신탁을 악용한 과거의 관행을 단절할 수 있는 단초가 됐다.
부동산 실명제 빠르게 정착
부동산실명제 실시 후 2년여 지난 1997년 5월 재정경제원이 발간한 ‘부동산실명제 백서’에 따르면 2년 동안 부동산을 실소유주 명의로 전환한 건수는 6만5976건으로, 총면적은 1억3072만평에 달했다. 건당 평균면적이 1981평에 이르는 셈이다. 또 부동산실명제를 위반한 사람들에게 부과된 과징금도 31건에 10억원을 넘었다.
특히 법인의 부동산 실명전환 건수는 1684건으로, 개인명의로 돼있던 부동산을 법인 앞으로 돌린 건수는 1461건에 달했다. 그동안 기업이 부동산매입에 임직원을 동원했다는 사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셈이다. 당시 한 대기업이 실명제를 위반하고 다른 사람 명의로 대규모 땅을 숨겨뒀다가 적발돼 여론의 도마에 오르기도 했다.
신문들은 부동산실명제 추진 초기 “부동산 시장은 아주 냉각되거나 가격이 폭락할 것으로 전망된다. 명의 신탁된 부동산의 실제 소유자들은 경과조치기간에 자진 신고하여 실명으로 전환하든지 아니면 남의 명의로 된 부동산을 매각하여 현금으로 챙기지 않으면 안 될 처지다. 매물홍수가 예상된다”고 전망했다.(한국일보 1995년 1월7일자)
과연 그랬을까. 1995년 하반기 부동산실명제등 투기억제정책이 힘을 발휘하면서 부동산시장은 안정세를 보였다. 땅값 상승률은 0.6%에 그쳤고 집값은 전년보다 0.2% 떨어졌다.
하지만 1996년 들어 상황이 달라졌다. 연초 터진 우성건설의 부도 등 건설업체들이 겪고 있는 심각한 자금난을 덜어주기 위한 정부의 금융지원책과 함께 각종 규제 완화책이 쏟아지면서 그 해 주택가격은 다시 1.5% 상승 반전한 것이다. 정부는 1년간의 유예기간이 끝나고 명의신탁 매물이 본격적으로 나와 부동산 가격 상승을 막을 것으로 내다봤지만 예상은 빗나갔다.
결국 부동산실명제는 매물확대를 통한 가격안정이라는 직접적 효과보다는 부동산 거래 시장을 한 단계 투명하게 했다는 성과로 만족해야 했다.
실거래 가격 신고-등기부 기재 제도의 등장
“아니 세상에 실거래가격을 그대로 적으라고요?”
2006년 6월 말 서울 강남의 한 부동산중개소에서는 입씨름이 한창이었다. 아파트 매도자는 세금을 한 푼이라도 덜 내려고 구청에 신고할 계약서에 실제 거래가격에서 2000만원을 뺀 가격을 쓰자고 한다. “다운계약서 좀 씁시다. 실거래가를 곧이곧대로 신고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심지어 “다운계약서를 써주면 500만원 정도 더 깎아주겠다”고까지 제의한다. 하지만 아파트를 새로 산 사람은 나중에 자신이 그만큼 싸게 산 것으로 돼 매도할 때 그 만큼 ‘세금 덤터기’를 쓸 수도 있다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든다. 계약서뿐만 아니라 아파트 등기부등본에까지 실거래가액이 기재된다는 부동산중개업자의 말에 결국 계약서는 실제 거래가격대로 적혔고 중개업자가 이를 인터넷을 통해 시·군·구에 신고하고 거래신고필증을 받아 등기소에 제출하는 것으로 계약은 성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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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거래가 신고'가 이제 부동산 시장의 '상식'으로 통한다고 평가한 매일경제 기사 |
부동산실명제가 ‘이름’ 부분의 시장 투명화 조치였다면 2006년 1월1일부터 시행된 부동산 실거래 가격 신고제와 6월1일부터 실시된 부동산 거래 가격 등기부 기재는 ‘가격’부분에서 부동산 시장을 투명하게 만든 또 다른 ‘사건’이었다.
“정부가 지난해부터 전국 모든 부동산에 대해 실거래가를 신고하도록 법을 바꾼 일은 간단해 보이면서도 엄청난 사건이다. 유사 이래 우리나라에서 부동산에 관한 한 단일가격이 한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신고할 때 따로, 세금 낼 때 따로, 대출받을 때 따로 하는 식으로 그때그때마다 다른 가격을 쓰던 관행이 반만년 역사를 이어왔다.”(매일경제 2007년 2월2일)
‘이젠 실거래價가 상식’이라는 제목으로 올해 한 경제신문에 실린 부동산 재테크 관련 기사 내용이다. “서울 강남에서 아파트 실거래가 신고는 이제 상식입니다”라고 시작하는 이 기사는 “실거래가 신고제 하나만이라도 제대로 정착되면 우리나라 부동산의 패러다임을 혁신하기에 충분하다는 지적이 지나친 주장만은 아닐 성싶다”고 끝맺고 있다.
RTMS라는 '괴물 프로그램'
주택법에 이어 중개업법과 지적법 세법 등이 줄줄이 바뀌면서 실거래가를 신고하지 않는 것은 불법행위가 됐다. 건설교통부는 부동산거래관리 시스템(RTMS)라는 '괴물' 같은 프로그램을 만들어 실거래가를 검증하고 신고 위반 사례를 적발해내고 있다. 한국감정원이 공시가격과 거래 가격, 경·공매 가격, 국민은행 시세표 등을 종합 조사해 산출한 기준가격을 RTMS에 올리면 실거래가 신고 위반이 의심되는 거래는 자동적으로 ‘부적정’ 이름을 달고 튀어 올라온다.
다운계약서를 썼던 사람들 가운데는 일선 시군구와 국세청의 단속에 적발돼 덜 낸 취득세의 무려 24배나 되는 과태료를 물기도 했다. 중개업자는 영업정지 처분을 받았다. 정부의 통합전산망은 부동산실명제와 실거래가 신고제 이후 개인은 물론 친·인척의 거래까지 손바닥 들여다보듯 파악할 수 있을 정도로 발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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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산 실거래가 신고, 단골 숙원 사업”
사실 부동산 실거래가격을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은 우리 부동산 시장 시스템의 근본적 ‘허점’인 동시에 세제를 담당하는 재정경제부와 국세청, 행정자치부 건설교통부 등의 오랜 ‘숙제’였다. “투기 소득에 대해 세금을 제대로 매기고 싶어도 실제 거래가를 포착할 수 있어야 말이죠.” 역대 정부에서 부동산 정책이 만들어질 때마다 이런 푸념이 따라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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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부격차 해소를 위해 부동산 거래를 '투명하게'하는 시스템 마련이 시급하다고 지적한 신문 특집기사. |
1996년 국정감사자료에 따르면 당시 재정경제원은 “실가기준으로 양도세 과세를 전환하기 위해 거래가격 등록제 도입방안 등을 검토하겠다”고 했지만 복잡한 이해관계와 각종 제도적 장벽 때문에 유야무야 됐다. 1998년 김대중 대통령의 인수위 보고서도 등기부 등본에 실거래가의 기재를 의무화하는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김용민 전 재경부 세제실장(현 조달청장)은 “실거래가 등기제도와 이를 토대로 한 공평과세는 1993년 이후 매년 재경부 세제실의 숙원사업이었다”고 회고했다. 학계에서도 공시지가의 적정성과 시가 근접도를 높이기 위해 실거래가 등기제와 실거래가 신고제 도입과 이를 기초로 한 공시지가 조사·산정 체계의 개선을 주장해 왔다.('공시지가제도의 선진화 방향에 관한 연구'-국토연구원 채미옥, 1999)
‘거래 투명·공평과세' 두 마리 토끼 잡기
“부동산 정책의 답이 없는 것이 아니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어떤 정책이 필요한지에 대해서 답이 다 있다. 그런 데도 이러한 정책이 채택되지 못한 것은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이해관계와 잘못된 관행 때문이다. 부동산 정책의 방향은 첫째, 모든 거래가 투명하게 이루어져야 하고….”(2005년 6월20일 청와대 수석보좌관 회의)
‘다시 원점에서부터 근본대책을 마련하라’는 노무현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2개월여 동안 진행된 부동산 정책회의에서 실거래가 신고는 부동산시장 투명화를 위한 핵심정책으로 논의되기 시작했다.
처음 논의 과정에서는 법원의 반대가 벽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재산소유 관계를 나타내는 공식적인 집문서 땅문서인 등기부에 가격이 등재된다는 것은 국가기관인 법원이 그 가격을 보증해주는 셈이어서 법리적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이었다. 가격의 등기부 기재는 민법의 3대 원칙중 하나인 사적 자치의 원칙(계약자유의 원칙: 개인은 계약 등 법률관계를 자유의사에 기초하여 형성할 수 있다는 원칙)에 위배되는 문제점이 있는데다 무엇보다 집행상의 어려움도 컸다.
“실거래 가격을 등기부에 기재하는 것이 어렵다면 신고라도 하게 합시다.” 이미 2003년 10.29 대책에서 실거래가 신고제를 추진했던 건교부는 실거래가 신고 시스템을 구축해 놓았다. 이제 이 시스템을 등기부 기재로 연결시키는 일만 남았다.
"법원을 설득하라"
법원을 설득하는 것은 재경부가 맡았다. 처음에 난감해하던 대법원도 부동산 투기 근절이라는 사회적 요구와 메가톤급 무게가 실린 8.31 정책의 핵심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당시 김용민 재경부 세제실장은 “부동산 문제가 워낙 심각해져서 그랬던지 완강했던 법원의 입장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의외로 호의적이었다”고 회고했다.
결국 실거래가 신고나 등기부 기재 둘 중 하나만 돼도 성공이라던 투명화 과제는 이렇게 실거래가 신고와 실거래가 등기부 기재 둘 다 달성됐다. 법원의 유권해석을 받아 8·31대책에 실거래가 등기부 기재제도를 집어넣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데 실거래가로 등기하면 지방세인 취득세와 등록세가 지나치게 높아진다는 문제가 생겼다. 서민들의 피해가 우려된다는 행자부의 지적도 타당했다. 취·등록세 과표를 조정했다.
언론이 주목하지 않았던 핵심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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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기꾼들에게 실거래가 신고와 등기부 기재는 그동안 쌓아온 불로소득과 세금탈루의 피라미드를 더 이상 지속할 수 없게 한 ‘가짜와 은닉의 종말’ 이다. |
때로는 거래 위축이라는 핑계로, 때로는 전산시스템 미비로 수십 년 동안 미뤄져 오던 우리 부동산시장의 또 하나의 ‘구조적 맹점’이 마침내 해소되고 부동산 실거래가 파악체계가 정착됐다. 물론 일부 의도적으로 허위신고를 시도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국민 감정상 등기부는 내 재산의 모든 것을 나타내는 ‘집문서’다. 그렇게 만만한 문서가 아니다.
실거래가 신고와 등기부 기재는 8·31정책을 형성하는 핵심 축 가운데 하나였지만 당시 언론은 ‘투기억제’ 부문에만 초점을 맞췄을 뿐 이 두 가지 투명성 제고 조치에는 별로 주목하지 않았다.
언론의 외면과는 달리 두 제도의 효과는 상당했다. 수십 년 동안 ‘거짓 신고 가격’에 둘러싸여 무엇이 진실인지 알 수 없었던 부동산 거래 내용이 투명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일반 국민들도 실거래가격이 기재된 부동산등기부를 자유롭게 열람할 수 있게 되고, 매달 아파트 단지별 실거래 가격을 취합한 데이터베이스(DB)와 가격 조회 시스템이 갖춰지면서 아파트 부녀회를 중심으로 한 호가 높이기는 구조적으로 어렵게 됐다.
2006년 1차 공개 때 500호 이상 아파트 단지 중 10건 이상 거래된 단지를 대상으로 한 것도 같은 해 하반기 2차 공개에서는 전체 아파트단지로 확대됐고 아파트별 면적과 가격형성에 영향이 큰 층별 정보도 추가됐다. 37만 1000건의 아파트 실거래 자료가 적정성 검증을 거쳐 투명하게 공개됐다.
이를 통해 재산세와 종부세 등 보유세의 세부담 형평성이 높아지는 효과도 생겼다. 그동안 공시가격은 시세(적정 시가의 80%)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있었다. 공시가격 조사시점이 매년 1월 1일 기준이어서 1월 이후부터 이뤄지는 아파트값 등락을 반영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가짜와 은닉에 마침표"
그러나 앞으로 실거래가 자료가 축적되면 공시가격이 실거래가를 기초로 산정되기 때문에 공시가격은 시가의 적정수준으로 정해진다. 공시가격이 시세를 적정수준에서 반영할 경우 이를 기준으로 과세하는 종부세와 재산세의 세부담 형평성이 높아진다. 변양균 청와대 정책실장은 “실거래가 신고제는 금융실명제에 버금갈 정도로 부동산 시장에서는 획기적 조치다. 정부는 투기가 더 이상 발붙일 수 없게 제도를 정비했다고 자부한다”고 말했다.
김수현 사회정책비서관은 “투명하게 거래, 보유, 과세현황을 파악하고, 이들 통계를 국민들과 공유하게 되면 부동산에 대한 국민적 인식이 변할 것으로 믿는다. ‘신고가격 따로, 실제가격 따로’ 식의 후진적 관성도 바뀔 것이다. 이는 앞으로 체계적이고 투명한 정책형성 과정에 기여할 것”이라고 했다.
실제 거래가격이 등기부에 기재됨에 따라 부동산 관련 세금의 실거래가 과세제도의 기반도 구축됐다. 2007년부터 부동산 양도세를 실거래가 기준으로 부과할 수 있게 된 것도 2006년부터 시행된 등기부 기재제도 덕분이다. 투기꾼들에게 실거래가 신고와 등기부 기재는 그동안 쌓아온 불로소득과 세금탈루의 피라미드를 더 이상 지속할 수 없게 한 ‘가짜와 은닉의 종말’ 이다.
■ 부동산 가격체계의 정비
과거 부동산에 매기는 세금을 보면 국세인 양도소득세, 상속세, 증여세 등은 국세청에서 담당 공무원에 의해 결정되는 ‘기준시가’에 따라 부과되고, 지방세인 취득세 등록세 재산세 등은 시장 군수 구청장이 매년 결정 고시하는 ‘과세시가표준액’에 의해 부과됐다.
이 때문에 같은 지역의 같은 지번을 가진 토지의 가격이 담당 부처에 따라 크게 차이가 나고 과세시가표준액에 따라 부과되는 세금 역시 실질거래가격의 10~15%에 불과했다. 이 같은 불합리한 가격체계와 토지평가자격제도를 일원화해 1989년 4월 '지가공시 및 토지등의 평가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어 공시지가제도가 도입되었고, 1990년 1월1일부터 공시지가가 공시됐다.
1990년 8월10일에는 ‘검인계약서제도’를 도입했다. 검인계약서가 도입되기 전에는 부동산을 등기할 때 ‘매도증서’에 나오는 가격대로 기재되고 이를 악용해 중간생략 등기가 가능해 중간거래자들이 양도소득세와 취, 등록세 탈세가 보편화했다. 이 때문에 검인계약서는 1978년 8.8조치 때 이미 도입을 약속했지만 시행이 10년 넘게 미뤄지다 1990년 8월에야 시행된 것이다.
하지만 검인계약서 역시 ‘종이호랑이’였다. 검인 담당 공무원이 계약서상 매매 대금의 실질심사권이 없음을 알고 당사자간 담합에 의해 실거래 가격보다 턱없이 낮은 가격으로 검인 받을 계약서를 이중으로 작성해 검인을 받았다. 1999년에 발표된 동의대 행정학과의 한 논문은 “부동산 거래로 인한 탈세를 막아 부동산 투기를 억제하고 실질적인 거래금액을 노출시켜 정당한 과세를 하기 위해 도입한 검인계약서제도는 취득세와 등록세의 과세표준액으로 활용되고 있으나 그 본질적인 의도는 적어지고 오히려 합법적인 탈세가 가능한 제도로 변질됐다”고 지적했다.
1989년 4월1일 '지가공시 및 토지등의 평가에 관한 법률'이 제정돼 토지로 인한 모든 과세에 공시지가가 과세표준으로 적용되었고 1990년 7월1일부터 양도소득세와 상속세 및 증여세에도 공시지가가 과세표준으로 적용됐다. 전국의 땅 가운데 대표성이 있는 땅인 표준지에 대해 건교부가 공시지가를 책정하면(표준지공시지가) 각 지방자치단체가 이를 기준으로 개별 땅에 대한 공시지가(개별공시지가)를 산정한다. 이처럼 지가는 공시지가로 통일됐으나 건물 가격은 건물분 과세시가표준액으로 산정돼 실제 시장가격과 크게 차이가 났다. 이 때문에 2005년부터 공시주택가격제도(토지 가격+건물 가격)를 도입해 건물가격의 시가 근접도를 높였다.
이같이 얽히고설킨 부동산 가격체계가 8.31정책 이후 종부세와 재산세 등과 같은 보유세는 공시가격으로, 양도세와 취 등록세는 실거래가로 통일 된 것이다. 보유세 과표가 그동안 면적 기준에서 가격기준으로 바뀌면서 2006년1월부터 아파트 등 공동주택은 물론 단독주택까지 공시가격제도가 전체 부동산으로 확대됐다. 그동안 국세청이 발표해오던 아파트 기준시가도 건교부가 공시가격으로 발표하기 시작한 것이다.
용어풀이
◆ 주택 공시가격=아파트,연립주택,다세대 등 공동주택 공시가격과 단독주택 공시가격으로 나뉜다. 공시가격은 재산세,종합부동산세 등의 부과 기준이 된다. 과거 공동주택 공시가격은 국세청이 기준시가란 이름으로 발표하고 단독주택 공시가격은 건설교통부가 발표했지만, 2006년부터 건교부가 모든 주택의 공시가격을 일괄 발표한다. 공동주택 가격은 가격변동이 심해 모든 주택을 조사해 산정한다. 반면 단독주택 가격은 건교부가 표준주택을 선택해 비준표를 작성해 주면 시·군·구에서 이를 토대로 개별 주택의 토지와 건물을 평가해 공시한다.
◆ 과세 표준=세금을 부과할 때 기준이 되는 가격,수량 등을 말한다. 소득세는 소득액 등이 과세표준이 되지만 재산세 등을 부과할 땐 공시가격을 기준으로 하지 않고 공시가격의 일정률을 반영한 금액을 과세표준으로 한다. 2006년 재산세의 과세표준은 주택 공시가격의 50%, 종합부동산세는 70%이며 매년 단계적으로 현실화될 예정이다.
◆ 공시지가=땅값은 건교부가 공시지가란 이름으로 발표한다. 전국의 땅 가운데 대표성이 있는 땅인 표준지에 대해 건교부가 공시지가를 책정(표준지 공시지가)하면 각 지방자치단체가 이를 기준으로 개별 땅에 대한 공시지가(개별공시지가)를 산정한다. 표준지 공시지가는 매년 1월1일, 개별지 공시지가는 5월 31일 공시되며 토지 관련 세금, 토지수용보상가 산정 등의 기준으로 활용된다.
| 특별기획팀 | 등록일 : 2007.02.21
[어떤 정책 폈고 왜 못잡았나 ②] 타워팰리스가 양도세 면제받은 까닭
부동산투기 억제세에서 실거래가 과세까지 [실록 부동산정책 40년 ⑦] 오락가락 양도세의 역사
2001년 초 건설업계에서 시작된 양도세 폐지론이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그해 2월1일 여당인 민주당의 남궁석 정책위의장이 한국주택협회가 주축이 된 건설업계와의 간담회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 이방주 현대산업개발 사장은 “양도소득세는 부동산 투기 억제책의 일환으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2000년 말 현재 주택보급률이 94.8%에 이르는 등 주택이 이미 투기대상으로서의 의미를 상실했으므로 양도세는 즉각 폐지돼야한다”고 주장했다. 정종득 벽산건설 사장도 “주택 수요 억제를 위한 양도세 부과는 시대착오적 발상”이라고 말했다.
이로부터 석 달 뒤인 5월5일 ‘부동산 양도소득세 제도가 지난 75년 입법화된 후 26년 만에 전면 개편된다’는 <한국경제신문>의 보도가 나오더니, 5월10일 재정경제부가 “현행 부동산 세제는 투기억제를 목적으로 운용되고 있으나 주택보급률이 94%에 달하는 현 시점에서 부동산 투기 바람이 다시 불 가능성이 희박한 만큼 선진국처럼 보유세 위주로 전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밝히기에 이른다.
다음 날, 한나라당 주요 당직자회의에서 김만제 정책위의장은 “현행 양도세법은 잦은 개정과 수많은 예외사항 등으로 완전히 누더기가 됐다”며 “주택보유율이 80%를 넘어선 현 시점에선 부동산 투기의 위험도 줄어들었고 주택거래의 활성화를 위해 양도세는 폐지돼야한다”고 말했다.
양도세 비과세의 공방전
그러나 2년 뒤인 2003년5월 예상치 못한 ‘반격’이 일어났다. 김진표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이 “1가구1주택에 대해 양도세 비과세 혜택을 주는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다. 외국처럼 1주택이든 2주택이든 모든 주택에 대해 세금을 매기는 것이 조세원칙에 맞다 ”고 밝혔다. 1가구1주택 비과세는 정부 수립 후 금지옥엽처럼 지켜온 금기의 영역이었다. 그런데 경제 정책의 수장이 양도세 폐지론은 커녕 ‘예외 없는 과세’라는 칼을 치켜든 것이다.
언론과 한나라당 대표는 물론이고 여당 정책위 의장까지 일제히 반발하고 나섰다. 이 사태는 7월21일 민·관 위원으로 구성된 세제발전심의위원회에서 “아직은 서민들의 내 집 마련 성격이 강한 만큼 (1가구1주택에 대한) 양도세 부과는 시기상조”라고 의견을 모으면서 사실상 백지화했다.
불씨는 꺼지지 않았다. 같은 해 10월 김진표 부총리는 “1가구1주택 양도세 비과세 폐지는 실거래가 과세제도가 정비되는 시점에 논의될 수 있을 것”이라고 또 다시 언급했고, 11월에는 최종찬 건설교통부 장관이 “장기적으로 1가구1주택도 양도세를 부과하는 방안을 강구하겠다”고 공개적으로 밝혔다.
또 2년 뒤인 2005년3월 이헌재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은 노무현 대통령에게 ‘2005년 업무계획’을 보고하면서 “1가구1주택 양도세 비과세제도를 언제 폐지할지 구체적인 일정은 상반기 중에 마련하겠다”고 말했다.
양도소득세의 탄생과 그 숙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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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도세는 부동산 양도로 실현된 자본이득을 과세대상으로 하는 비정기적, 자발적 조세이지만 부동산경기를 조절하는 정책조세적 성격을 강하게 띠어왔다. 활황기에는 세율인상, 과표인상, 비과세감면축소를, 불황기에는 그 반대 방향으로 경기를 조절하는 수단으로 활용된 것이다.
태생부터가 그랬다. 부동산의 양도차익에 대한 세제가 처음 마련된 것은 1967년 11월 제정·공포된 ‘부동산투기억제에 관한 특별조치세법’이다. 1962년부터 시작된 경제개발 5개년계획으로 도시로의 인구집중 경향이 나타났고, 덩달아 토지 가격이 많이 올랐다.
이에 ‘부동산투기억제세’라는 이름을 달고 태어난 게 양도세의 출발이었다. 투기억제세는 개인과 법인의 토지양도차익에 대하여 50%의 단일비례세율을 적용했다. 다만 1세대1주택에 부수된 토지로 건물 면적의 10배 내에 이르는 토지는 면세대상으로 했다.
‘부동산투기억제세’가 지금과 같은 양도세의 모양새를 비로소 갖춘 것은 1974년. 종합소득세 제도를 도입하면서 종합소득세와 분리과세하는 양도소득세법을 새로 만들었다. 양도소득세법이 투기억제세를 흡수한 것이다. 특기할만한 건, 과세대상으로 삼지 않았던 건물양도차익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확대된 반면 물가상승률만큼 취득가액에 더해 공제해 주도록 했다는 점이다.
투기억제든, 건설경기부양이든 양도세가 보다 실질적인 효과를 내려면 어떤 방향이어야 하는지 구체화하려는 시도는 최초의 부동산종합대책이라 할 1978년 8·8조치에서 이뤄졌다.
중동특수에 따른 오일달러가 유입되면서 그 여유자금이 부동산에 몰리면서 이때 처음 아파트가 고급주택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1976년 12월 1가구1주택 가운데 고급주택을 과세대상으로 전환하는 데 이어 1978년 봄 서울을 비롯한 전국 대도시마다 부동산값이 오르는 현상을 보이자 정부는 8·8조치에 앞서 ‘부동산투기지역 고시제도’를 발표했다.
고시된 투기지역의 토지나 건물에 대한 양도세를 내무부가 고시하는 ‘과세시가표준액’을 기준으로 하지 않고 국세청이 별도로 고시하는 ‘기준시가’를 기준으로 삼겠다는 것이다. 과표를 높여 세금 부담을 늘리겠다는 뜻이다.
양도세의 획기적 전환점이 될 뻔했던 8·8조치
주목해야할 건 8·8조치의 원안에 담겼던 획기적 구상이다. 거래당사자와 거래금액이 기재된 부동산거래용 인감증명제도를 실시하기로 하는 동시에 양도세를 회피하기 위해 극성을 부리던 미등기전매를 막는 수단으로 인감증명의 유효기간을 1주일로 대폭 줄이는 안이 들어있었다. 실거래가를 과표로 삼을 수 있는 토대를 만드는 동시에 등기 전에 수차례 사고팔면서도 세금 없이 매매차익을 올리는 투기 관행을 막아보겠다는 것이다.
당시 이 안을 마련했던 강만수 전 재정경제부 차관은 저서 <현장에서 본 한국경제 30년>에서 이렇게 증언한다. “다른 나라에 유례가 없는 양도소득에 대한 물가상승률 공제는 가격상승에 따른 소득을 공제하여 투기소득 과세의 실효성이 반감됐다. 특히 양도가격을 거래가격이 아니라 정부가 정한 시가표준액을 기초로 과세할 때는 과세를 포기하는 것과 같았다.”
빠져나갈 구멍이 숭숭 뚫린 면세 허점을 막는 동시에 실제 거래되는 가격을 근거로 한 과세가 없이는 양도세가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없다는 말이다. 하지만 당초 안은 변질되고 만다. 강 전 차관은 부처간 의견조율의 어려움을 기록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건설부가 소극적이었고 내무부의 반대가 강했다. 투기꾼들과의 전쟁보다 내부 반대자들과의 전쟁이 더 힘들었다. 밤낮 없는 수고가 허탈할 뿐이었다.”
강 전 차관은 “(2005년 8·31 조치로 전격 도입된) 실거래가 등기부 기재 제도는 그때 거래 내역을 기재하는 인감증명제도만 실행했어도 불필요했을 것”이라고 아쉬워했다.
양도세 강화 외에는 ‘원안 변질’
결국 인감증명제도는 ‘부동산 거래용’으로만 표시하고 유효기간을 1개월로 하는 것으로 수정됐고, 그밖에 토지거래 허가제는 신고제로, 변호사 등에 의한 토지 매매계약 체결제도는 공인중개사제도로 변질됐다. 그나마 원안이 지켜진 건 양도세 강화뿐이었다. 물가상승률 공제를 폐지하고, 1가구1주택의 면세요건을 6개월 이상 실제 거주로 요건을 강화하는 것으로 발표됐다.
부동산 경기가 활황이면 조이고, 불황이면 풀어주는 양도세의 운명이 극명하게 대비되는 건 8·8조치를 전후로 한 1970년대 말~1980년대 초반 그리고 IMF 외환위기 이후의 두 시기다. 8·8조치 이후 2년간 부동산 경기가 가라앉으면서 일반경기까지 불황의 여파가 미치자 완화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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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도소득세 세율 인하를 1면 톱 기사로 보도한 1980년 9월17일자 조선일보 |
다시 부동산 경기가 달아오르자 ‘뒤집기’
그러나 1982년 하반기부터 부동산경기가 뜨겁게 달아오르자 또다시 뒤집기가 시작된다. 1983년 2월 ‘2·16 부동산투기억제대책’으로 부동산투기지역고시제를 다시 시작했고, 4월에는 ‘4·18 토지 및 주택문제종합대책’을 발표해 양도소득탄력세율의 적용시한을 1984년3월에서 1983년 6월로 앞당기고, 1세대1주택의 비과세 요건을 거주기간 6개월에서 1년으로 늘렸다.
8·8조치 때도 자리 잡지 못한 실거래가 과세는 사실 1975년부터의 원칙이었다. 예외적으로 실거래가액이 불분명할 경우에 보충적으로 기준시가로 양도소득을 산출하도록 했다. 그러나 양도소득 과세 중 실거래가에 의한 과세는 소수에 지나지 않았고 대부분 기준시가에 의한 과세였다. 국세청의 ‘고백’을 들어보자.
“과거 75년부터 82년까지 실거래가로 양도세를 과세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한정된 조사인력으로 모든 거래에 대해 실거래가로 신고했는지 여부를 조사하기가 불가능한데다, 조사받지 않은 경우와 조사받은 경우의 과세 불공평 문제가 발생했다. 아울러 납세자가 실가를 입증할 자료를 분실한 경우도 발생하는 등 조사자와의 마찰도 없지 않았다.
제도적인 뒷받침 없이 불충분한 국세청 조사인력만으로는 양도소득세를 실가로 과세하기가 매우 어려웠던 것이다. 이에 따라 83년부터 부동산을 취득한 후 1년 이내에 양도하는 단기양도, 미등기 전매 등의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시세를 정확하게 반영하지 못하는 단점이 있기는 하나 기준시가 과세제도로 변경하게 됐다.”<세금에 대한 오해 그리고 진실>(국세청 펴냄)
하지만 기준시가제도는 내무부의 지방세 과세시가와 국세청의 특정지역 기준시가 등으로 지가체계가 일원화하지 못한데다가 내무부의 과세시가표준액이 실거래가액보다 지나치게 낮게 책정돼 실효를 갖기 어려웠다. 게다가 파는 사람은 양도세를 줄이기 위해, 사는 사람은 등록세와 취득세를 낮추기 위해 공공연히 행해지던 이중계약서 관행을 막을 방법은 더더욱 없었다.
물론 개선 노력은 있었다. 1989년 4월 지가의 현실화 및 지가체계의 일원화를 위한 ‘공시지가’ 제도가 도입됐다. 그동안의 기준시가를 대신한다고는 해도 토지는 개별공시지가로, 건물은 내무부 지방과세시가 표준액 건물분으로, 아파트·연립주택 중 국세청장이 지정한 지역은 국세청 기준시가로 각각 결정됐다. 그러나 여전히 이원화된 과세표준의 산출방식은 과세 형평에 어긋나며 실질과세 원칙과도 동떨어졌다.
양도세의 완성, 실거래가 과세로 가는 머나먼 여정
실거래가 과세는 오랜 정책 과제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국토연구원 채미옥 박사가 1996년과 1998년에 실거래가 등기제를 통해 공시지가를 산정해야한다는 보고서를 잇따라 내면서 논의는 보다 깊어졌다. 1996년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재정경제원은 “양도소득세를 실지거래가액 기준으로 전환하기 위한 거래가격등록제의 도입방안 등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조건이 붙는다. “실가기준으로 양도세 과세를 전환하기 위해서는 장기간 거래가격기재 의무화(부동산등기법 개정사항)가 진행된 후에나 가능하다.”
등기부등본에 실거래가의 기재를 의무화하는 방안은 김대중 대통령 인수위 시절에 잠시 등장한다. 1998년1월 인수위는 부동산 양도소득세의 경우 명목세율은 높으나 실효세율이 낮은 점을 감안해 최고세율은 낮추되 과세표준을 실거래가로 전환하겠다는 의지를 보이기도 했다. 이를 위해 등기부등본에 실거래가의 기재를 의무화하는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밝혔으나 이 논의는 곧 자취를 감췄다.
대신 IMF 외환위기가 몰아치면서 경기부양을 위한 부동산 정책이 우선 과제로 떠올랐고, 양도세는 또 다시 단골메뉴가 됐다. 외환위기 직전인 1997년4월 정부는 기준시가를 대폭 상향 조정했다. “서울 목동과 일부 지역, 수도권 신도시 등을 중심으로 부동산값이 상승세를 보인 것으로 파악됐다”는 것이다.
외환위기 앞에서 정책도 ‘촛불신세’
그러나 외환위기 이후 모든 것이 달라졌다. 1998년5월 양도세 감면 대상을 전용면적 25.7평 이하 신축주택으로 대폭 확대하고, 두 달 뒤 전용면적 50평을 넘지 않는 모든 신축주택으로 확대했다. 또 9월에는 30~50%이던 양도소득세율을 10% 낮추는 세제개편안을 확정했다. 연말에는 1가구1주택자의 양도세 비과세 요건을 3년 이상 보유에서 1년 이상 보유로 완화키로 했다.
반전은 2002년 벽두부터 시작됐다. 강남을 중심으로 집값이 급등하자 정부는 국세청을 내세워 허위 계약서를 작성해 양도세를 제대로 내지 않은 투기혐의자를 대상으로 세무조사를 벌이는 한편 기준시가를 수시 조정키로 하는 등의 대책을 내놓기 시작했다.
그런데 양도세에 대한 완급 조절이 주택 가격에 영향을 미치기나 한 것일까. 학계의 오랜 논의에도 불구하고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고 일부에선 부정적 연구 결과를 내놓고 있다. <부동산 양도세에 관한 연구>(윤덕병, 박기태 지음. 2004)는 주택매매가격지수와 아파트매매가격지수 등의 통계수치를 이용한 연구 결과, 외환위기 이후 주택경기활성화를 위해 작동한 양도세 완화정책은 실효성이 없었던 것으로 결론내고 있다.
또 수도권 일부 지역 및 고가주택에 대한 양도세 강화조치가 해당 지역과 고가주택의 주택가격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확인하기 위해 2000년1월부터 2002년12월까지의 자료를 사용한 <양도소득세가 주택가격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연구>(최종훈 지음. 2003)는 양도세 강화가 주택 가격을 안정시키는 효과는 미약하다고 판단했다.
수요관리 정책의 일환으로 양도세를 활용하려면 근본적인 수술이 필요했다. 2005년 8·31 정책으로 전격 도입된 부동산 실거래가 신고와 등기부 기재 제도는 그 오랜 숙제의 결과였다.
“실거래가 과세만이라도 꼭 실시”
노무현 대통령의 인수위 시절부터 부동산 정책에 관여해 8·31 정책안 마련까지 줄곧 참여해온 김수현 청와대 사회정책비서관의 증언이다. “대통령직 인수위 때 개혁과제 중 하나로 부동산 세제의 정상화가 있었다. 신고가격과 실제 가격이 다 틀리는 전근대적 수준이었으니까. 그렇지만 그때는 실거래가에 의한 양도세 과세까지는 생각도 못했다. 지인이던 윤주현 박사(전 국토연구원 토지주택연구실 선임연구위원)가 청와대에 들어가면 한 가지만 꼭 하라고 했던 게 실거래가 과세였지만 말이다.”
8·31정책으로 2006년에는 우선 1세대2주택자, 비사업용 나대지, 부재지주 소유의 농지 등에 대해서, 2007년부터는 모든 부동산으로 확대해 실제 벌어들인 양도차익을 기준으로 양도소득세를 과세하게 됐다. 국세청이 2006년 9월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밝힌 ‘평형별, 보유연수별 2006년 상반기 실제 양도세 부담사례’를 보면, 1주택자와 2주택자간 양도세 부담이 같은 아파트라도 10배 안팎의 차이를 보였다. 예컨대, 서울 압구정동 미성 32평형의 양도세는 1400만원이지만, 2주택자라면 약 8배인 1억800만원이 됐다.
양도세 인하 압력이 거세졌고, 급기야 실거래가 기준 양도세 부과 문제가 헌법재판소까지 갔다. 강남지역 땅을 팔았다가 실거래가로 과세된 양도소득세를 납부해야했던 조 모씨 등 9명이 위헌 여부를 묻는 헌법소원을 냈고, 2006년 12월1일 헌법재판소는 재판관 전원일치로 합헌결정을 내렸다. 마침내, 양도소득세의 실거래가 과세라는 오랜 숙제에 마침표를 찍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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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가구1주택 비과세 폐지론과 고가주택
그런데 2003년 당시 김진표 부총리는 왜 비판의 집중포화를 감수하면서까지 1가구1주택 비과세 폐지론을 들고 나왔을까. 사실 학계에선 오래전부터 1가구1주택 비과세 제도의 폐지를 주장해왔다 (<조세론>(이필유, 유경문 지음, 2003), <부동산 처분과세제도에 관한 연구>(박한범 지음, 1994) 등). 서민 주거생활의 안정을 도모한다는 취지로 비과세하고 있으나 이를 악용해 양도차익을 노린 부동산 투기의 수법으로 활용될 뿐더러 소득 있는 곳에 과세한다는 조세 형평의 원리에도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신 미국이나 일본처럼 일정액의 양도차익을 소득공제해줌으로써 실질적으로 양도소득세를 면세해주는 방안을 제시해왔다. 김진표 부총리도 당시에 대안으로 외국의 소득공제 제도를 언급했다. 그렇지만 참여정부가 1가구1주택 비과세 폐지를 구체안까지 준비하지는 않았었다.
김수현 청와대 비서관은 “1가구 1주택에 대한 양도세 논란은 실제 세금을 걷는 세수가 목표가 아니라 투명화의 문제였다. 따라서 실익도 없이 80%가 넘는 국민들을 불안하게 하기보다 다른 방법으로 대처하고 이 부분은 건드리지 말자고 정리했다”고 밝혔다.
‘고가 주택’이라는 다른 문
‘다른 방법’의 문은 이미 열려있었다. 국민의정부 말기인 2002년 가을, 10·11조치로 도입된 ‘고가주택’ 개념이다. 실거래가액 6억원이 넘는 주택을 고가주택으로 분류해 1가구1주택이더라도 양도세 감면 혜택을 주지 않기로 한 것이다. 그동안 면적기준(전용 45평 이상)과 금액기준(거래가액 6억원 이상) 등 2가지 요건을 모두 충족해야만 ‘고급주택’으로 분류해 양도세를 매겨온 방식에서 진일보한 것이었다.
반발은 거셌다. 한국경제연구원은 “국민의 재산권 행사를 제한하는 위헌 소지마저 있다”고 주장했고, 당시 대통령 후보이던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와 정몽준 의원이 한목소리로 반대하고 나섰다. <동아일보>는 10월19일치 사설에서 ‘KDI(한국개발연구원)도 비판하는 부동산정책’이라는 제목으로 정부안을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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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정부 양도세 정책의 핵심은 실거래가 과세와 1가구2주택 등 다주택자에 대한 중과세다.‘불패신화’가 만연한 우리 부동산 시장에서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바로 ‘정책 일관성’이다. |
언론 반발 뚫고 국회를 설득
당시 재경부에서 실무를 담당했던 김용민 전 세제실장(현 조달청장)의 증언이다. “1997년에 재산세 과장을 6개월 했는데 1가구1주택에 관한 비과세는 문제가 있다는 게 세제실의 오랜 과제였다. 자본이득에 대해 과세하지 않는다는 건 1억원이든, 2억원이든 과세 형평성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2002년 재산소비세심의관으로 있을 때, 고급주택에 대해서는 1가구1주택이더라도 비과세 대상에서 제외시켰는데 가만 보니까 전용면적 45평 이상이면서 그리고 6억원 초과되는 주택이라는 두 가지 동시충족 조건에서 다 빠져나가고 있었다. 타워팰리스의 십억대 주택도 세금 한 푼 안내고 다 빠져나갔다. 이건 안 되겠다 싶어 면적기준을 없애려고 고급주택을 고가주택으로 바꾸겠다고 보고하니까 위에서 깜짝 놀라더라.”
그래서 대통령령으로 바꾸려던 출발은 양도소득세법을 고치는 쪽으로 선회했고, 재경위 의원을 일일이 설득한 끝에 개정에 성공했다.
참여정부는 2006년 1월부터 부동산 거래시에 물건 소재지 관할 지방자치단체에 실제거래가액을 신고하도록 하고, 6월1일부터는 신고된 실거래가액을 부동산 등기부에 기재하고 있다. 2007년 현재, 1세대1주택자가 3년 이상 보유한 후 집을 팔 때 실거래가액이 6억원을 넘어서면 양도소득세를 내야한다. 6억원을 초과하는 고가의 주택은 전체의 2~3% 정도이며 6억원 초과분에 해당하는 양도차익만을 과세하고 있다.
저항과 유혹의 해묵은 반복
부동산 정책을 조율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정부 부처간의 논란은 오랜 역사를 지닌다. 1978년 8·8조치 때도 그랬지만, 1989년 초 당시 경제기획원, 건설부, 재무부, 내무부 국장들이 모여 토지공개념 3법을 만들 때도 마찬가지였다.
“경제기획원은 과세의 수준을 높이려는 반면, 실제 토지소유자나 기업들을 접하는 내무부와 상공부 등의 부처는 세제의 급격한 강화에 소극적이었다. 우선 과표에 있어서 기획원은 당시 실거래가격의 15%에 불과하던 과표를 대폭 인상하려고 했다. 나웅배 부총리가 내무부를 설득하여, 1988년부터 1993년까지 5년간 토지는 60%, 건물은 50%까지 과표를 높이는데 합의하였으나 기획원이 이 일정을 단축하려하자 조세저항을 이유로 내무부가 반발하여 결국 원점으로 되돌아갔다. 대신 공시지가 제도를 도입했다.”(<주택정책 반세기>, 임서환 지음)
정부 내에서도 1가구3주택 양도세 중과를 놓고 많은 고민과 논의가 있었다. 2004년 11월12일 재경부에서는 “1가구3주택 중과세를 내년에 시행하는 것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투기가 가라앉고 주택 거래가 끊기는 상황에서 (연기를) 검토하고 있다”는 의견이 나왔다. 2005년1월1일부터 시행하기로 한 1가구 3주택 이상 다주택 보유자에 대한 양도소득세 중과세 방침을 연기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시장에서는 ‘10·29 대책’이 흔들리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아파트 분양권 전매를 지방에서 부분적으로 허용하기로 한데 이은 완화 움직임이었기 때문이다. 10·29 대책에서 정부는 9~36%로 돼 있는 양도세 기본세율을 3채 이상의 경우 60%로 대폭 올리고, 투기지역은 탄력세율 15%포인트를 가산해 세율을 75%까지 끌어올리기로 했었다.
급기야 이정우 청와대 정책기획위원장이 “1가구3주택에 대한 양도세 중과를 예정대로 강행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언론은 정부 내 논의과정을 ‘정면 충돌’이라는 자극적인 표현으로 보도했다. 당시 외국 순방 중이던 노무현 대통령이 이에 관한 보고를 받았고, ‘정부 내 갈등이 있는 것으로 비춰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양도세 중과는 예정대로 시행하는 쪽으로 일단락됐다.
■ 타워팰리스 양도세 면세의 앞뒤
외환위기 당시 양도세의 고삐를 하나씩 하나씩 풀어준 결과, 웃지 못 할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2003년 하반기 들어 아파트 가격이 급상승하면서 ‘최고가 아파트’로 꼽히게 된 타워팰리스가 '전용면적 50평' 이하의 경우 세금 한 푼 내지 않고 수 억원대의 매매 차익을 고스란히 챙길 수 있게 됐다.
외환위기 당시 정부는 가라앉은 건설경기를 활성화할 대책으로 특정 기간(1998년 5월22일~1999년 12월31일, 2000년 11월1일~2003년 6월30일)에 신축주택을 취득한 경우, 잔금지급일로부터 5년 안에 매각하면 기존 주택을 1채 보유하고 있어도 1가구 1주택 비과세 혜택을 주어 양도세를 면제해주는 정책을 폈다(양도세는 보유기간에 따라 일정금액을 공제한 양도차익의 9~36%를 세금으로 내야하는데, 1년 미만 보유의 경우 양도세율은 36%에 달한다).
이 조치로 도곡동 타워팰리스 1차(1499가구) 분양과 2차 미분양 960가구의 소진 시기가 때마침 이에 해당돼 수 백가구가 혜택을 입게 된 것이다. 타워팰리스 1차는 1999년 6월 평당 1100만~1200만원에 분양했으나 문제가 불거져 나온 2003년 10월 당시 시세는 2000만~2200만원선이었다. 평당 1000만원 가까운 시세 차익을 보이고 있었다. 2003년 11월 한국일보는 “57평형의 경우 바로 팔면 시세차익만 4억원이 넘는데 1억원 가량의 양도세를 내지 않아도 되고, 68평형의 경우도 1억5000만원가량의 양도세를 면제받게 됐다”고 보도했다. 부동산 가격 급등의 ‘혜택’을 가장 많이 받게 된 이들이 양도세 면제라는 횡재까지 덤으로 얻게 된 것이다.
이 특례제도는 2007년 말 끝난다. 현재 1가구1주택 양도세 비과세 요건을 갖추기 위해서는 기존 주택을 3년 이상 보유해야 하고 서울 등에서는 기존 주택에 2년 이상 거주하는 조건도 만족시켜야한다.
외환위기 당시 양도세의 고삐를 하나씩 하나씩 풀어준 결과, 웃지 못 할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2003년 하반기 들어 아파트 가격이 급상승하면서 ‘최고가 아파트’로 꼽히게 된 타워팰리스가 '전용면적 50평' 이하의 경우 세금 한 푼 내지 않고 수 억원대의 매매 차익을 고스란히 챙길 수 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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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조치로 도곡동 타워팰리스 1차(1499가구) 분양과 2차 미분양 960가구의 소진 시기가 때마침 이에 해당돼 수 백가구가 혜택을 입게 된 것이다. 타워팰리스 1차는 1999년 6월 평당 1100만~1200만원에 분양했으나 문제가 불거져 나온 2003년 10월 당시 시세는 2000만~2200만원선이었다. 평당 1000만원 가까운 시세 차익을 보이고 있었다. 2003년 11월 한국일보는 “57평형의 경우 바로 팔면 시세차익만 4억원이 넘는데 1억원 가량의 양도세를 내지 않아도 되고, 68평형의 경우도 1억5000만원가량의 양도세를 면제받게 됐다”고 보도했다. 부동산 가격 급등의 ‘혜택’을 가장 많이 받게 된 이들이 양도세 면제라는 횡재까지 덤으로 얻게 된 것이다.
이 특례제도는 2007년 말 끝난다. 현재 1가구1주택 양도세 비과세 요건을 갖추기 위해서는 기존 주택을 3년 이상 보유해야 하고 서울 등에서는 기존 주택에 2년 이상 거주하는 조건도 만족시켜야한다.
| 특별기획팀 | 등록일 : 2007.02.22
실록 부동산정책 40년
“선거 앞두고 어떻게 세금 올리나…”
[실록 부동산정책 40년 ⑧] 부끄러운 과거와 험난했던 여정
보유세 제자리 찾기와 종합부동산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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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간 불균형 개발의 결과인 수도권 집중, 핵가족화와 고령화로 인한 도시 가구수 증가 등으로 주택 수요는 공급을 앞질렀지만 주택부족 문제를 구조적으로 해결하려는 노력은 미흡했다. 민간자본에 크게 기댄 주택시장 구조는 주택을 투기대상으로 보는 심리를 키웠다.
지난 40년간 투기억제와 경기활성화라는 두 가지 목표 사이에서 일관성 없는 정책이 추진되면서 주기적 집값 상승과 ‘부동산 불패’라는 잘못된 믿음을 심어줬고, 적절한 대체투자 시장의 미성숙은 자본의 부동산 쏠림 현상을 가속화했다. 불투명한 시장 구조와 세제상의 허점도 많았다. 공시가격과 실제 가격이 크게 달라 진짜 가격을 알기 힘들고, 가격 부풀리기와 이중 계약서로 세금탈루가 관행처럼 이뤄졌다. 편법과 허점투성의 거래 환경은 많은 국민들을 부동산 투기라는 유혹 속으로 끌어들였다.
정부는 지금도 과거 ‘투기시대 패러다임’과 씨름하고 있다. 이는 투기로 병든 우리 부동산 시장을 근본부터 치유하고 정상화하는 힘겨운 과정이다.
국정브리핑이 주택도시연구원·국토연구원·금융연구원과 공동으로 기획한 <실록 부동산정책 40년>은 ‘제1부, 왜 올랐나’에 이어 '제2부, 어떤 정책을 폈고, 왜 못잡았나' 를 통해 정부의 부동산 정책이 어떤 우여곡절 끝에 탄생 했으며 역사적 의미와 쟁점은 무엇인지 점검한다. 2부의 첫번째 주제로 <형평성과 투명성 제고 정책>을 3회에 걸쳐 연재한다. <편집자>
제2부 어떤 정책 폈고, 왜 못잡았나
<투명성과 형평성 제고 정책>
① 시장 투명화와 실거래가 신고
② 오락가락 양도세의 교훈
③ 보유세 제자리 찾기와 종합부동산세
1986년 5월17일 정석모 내무부 장관이 사퇴서를 제출했다. 이른바 ‘재산세 파동’의 여파였다. 이보다 앞선 5월13일 언론이 ‘봄철 재산세 기습 인상’, ‘최고 122%, 시민들 항의’ 등의 제목으로 재산세 과다부과를 지적하고 나섰다. 내무부가 그해 1월 초 전국 건물 평균 과표를 3.4% 인상하면서 건물 크기에 따라 적용하는 가감산율을 조정했다. 과표를 약간 올리고, 세율을 조금 올렸을 뿐이지만 곱하기의 상승작용에 따라 재산세 인상폭이 매우 컸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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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산 보유세를 구성하는 재산세 과표를 높이려는 시도는 역대 정부에서 '조세저항' 우려로 번번히 무산됐다. 1986년 5월 재산세 파동을 보도한 신문 |
30년 동안 지방세를 다뤄 ‘살아있는 지방세 사전’으로 불리는 김대영 행정자치부 전 지방세제관(현 지방혁신인력개발원 기획지원부장)은 “‘세금 잘못 건드리면 코피 터진다’는 세무 직원들 사이의 속설이 증명된 사건이었다”며 “‘장바구니세’ 또는 ‘주부세’로 불리는 보유세는 그만큼 민감하다”고 회고했다.
“세금 잘못 건드리면 코피 터진다”
보유세를 구성하는 재산세와 토지세의 과표를 높인다는 건 그만큼 녹록치 않다. 그렇게 5공화국이 끝나고 6공화국 중간 무렵인 1990년 11월24일 조선일보는 '종합토지세 과표 현실화 지지부진'이란 사설을 실었다. “당초 계획으로는 94년까지 시가의 60%까지 단계적으로 현실화하겠다던 정부가 이제 와서 3~4년 연기하거나 아예 목표자체를 없앨 것을 검토 중이라는 보도는, 아직도 토지문제와 투기억제에 대한 정부의 인식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음을 반영할 수도 있다.”
내무부는 토지과표를 매년 23~25%씩 올려 1994년도에는 공시지가의 60% 수준까지 높인다는 ‘과표현실화 5개년 계획’을 1989년에 발표한 바 있다. 조선일보의 ‘우려’는 정확했다. 1991년 9월30일 내무부는 국회에 낸 국정감사 자료를 통해 “94년도까지 과표현실화율을 공시지가대비 60%로 높이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과표현실화 계획을 재검토하는 단계에 있다”고 밝혔다.
이어 문민정부. 1993년 4월 김영삼 대통령은 “부동산을 가지고 있는 것이 고통이 되도록 하겠다”며 공시지가(시가의 70~80%)의 21% 수준이던 종합토지세의 과표를 단계적으로 올려 96년부터는 아예 공시지가로 전환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으나 흐지부지 됐다. 임기 말인 1997년 과표 현실화율은 30.5%에 그쳤다. 그 사이 부동산 관련세에서 보유세가 차지하는 비중은 1998년 33%, 99년 27.3%, 2000년 29.2%, 2001년 26.2%, 2002년 21.5%로 줄어만 갔다.
종부세와 ‘서울의 잠 못 이루는 밤’
그리고 2006년 11월. “종부세 폭탄 D-7일·· ‘일단은 버텨보자’ 매물 증가 조짐은 없어”(2006년 11월24일 연합뉴스). 첩첩산중을 넘어온 보유세의 마지막 등반이 시작되는 12월1일을 ‘D데이’로 보고 언론의 관심이 집중됐다.
주택의 경우, 공시가격 9억원에서 6억원으로 기준이 한층 강화된 종합부동산세의 신고·납부가 이날부터 12월 15일까지 이뤄질 예정이었다. 2005년 말 종합부동산세 관련법이 국회를 통과하기까지 정부 안팎의 상황이 일종의 ‘전쟁’이었다면, 납세자와 국세청이 직접 맞부닥치는 이때는 20년 전 재산세 파동의 ‘코피’ 수준을 훌쩍 뛰어넘는 ‘전투’였다.
전군표 국세청장은 “소총수로 나선 것이나 다름없는 우리로선 잠이 안 왔다.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이 아니라 ‘서울의 잠 못 이루는 밤’이었다”고 돌이켰다. 그는 만약 신고율이 70%~80% 대에 그친다면 정책이 수포로 돌아가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여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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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11월 종부세 신고납부를 앞두고 국세청 직원들은 종부세 전문가가 돼 '서울의 잠 못 이루는 밤'을 보내야 했다. |
‘종부세 시험’까지 치르다
종부세의 최전선에 나선 국세청으로선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선 내부 조정을 통해 650명의 전담 인력을 확보했다. 하지만 1만7000명 직원 모두가 종부세 전문가가 돼야했다. 자체 교육을 시킨 뒤 8월 중순에는 내부 인트라넷 망으로 같은 시간에 일제히 시험을 치렀다. 기준 점수 미만으로 나올 경우 재교육과 재시험을 거치고 그래도 통과하지 못하면 인사상 불이익까지 경고했다.
전군표 국세청장이 직원들에게 신신당부했다. “정부 수립 이후에 최초로 보유세가 정상화되는 의미있는 법을 집행하는 것이니 긍지와 자신감을 가져라. 그리고 납세자들에게 절대로 돈 내라고 전화하지 말아라. 대신 안내문 받았느냐, 신고하시는데 불편한 건 없느냐고 물어봐라.” 강남 거리에 우체통이 대부분 사라진 것을 뒤늦게 깨달은 국세청이 팩스로 신고 받고, 해외에 있는 사람은 외교부 재외국민과나 한인회에 연락해 주소를 알아내고, 병원에 입원한 납세자를 찾아가 신고서의 사인을 받아왔다.
그렇게 치러나가던 전투의 막바지 12월 15일 납세 신고율 잠정집계치는 95%를 넘어섰다. 이를 보고받은 전 국세청장은 “일체 노코멘트하라”고 함구령을 내렸다. 최종 집계 수치는 98.2%. 폭탄이라던 종부세가 별다른 폭발 없이 성공적인 발걸음을 내디뎠다.
보유세의 기원, 그리고 뒤틀림
종부세를 둘러싼 이런 우여곡절은 ‘보유세 강화, 거래세 완화’라는 원초적이고 오래된 숙제에서 비롯했다. 종부세의 역사는 양도소득세 등 다른 세제에 비해 상대적으로 짧다. 그 전신은 종합토지세(종토세)라 할 수 있고, 좀더 거슬러 올라가면 토지과다보유세에 이른다.
1986년 지방세법 개정으로 태어난 토지과다보유세는 공한지와 비업무용 토지를 합산해 초과누진세율을 적용했다. 종전의 재산세보다 세 부담을 더하게 설계된 것이다. 토지보유세제는 1961년 지방세제 전면 개편으로 재산세로 도입된 뒤 이렇다할 변화가 없었다. 다만, 유신 시절인 1974년 1·14 긴급조치로 공한지 개념을 도입해 재산세 중과세율을 적용한 바 있다.
토지과다보유세는 예컨대 공한지 기준인 200평이 넘지 않더라도 나대지 100평짜리를 10곳에 나눠 가지고 있으면 이를 합산해 과세하겠다는 것이었다. 1988년과 1989년에 걸쳐 한시적으로 운용됐는데 주택을 많이 소유하고 있어도 과세되지 않는다거나 과세대상의 비중이 전 국토의 1%에도 못 미칠 정도로 과세대상지역이 한정돼 있는 등의 약점으로 징수금액은 매우 미미했다. 1988년 147억원, 1989년 244억원에 불과했다.
1989년6월 제정된 종합토지세법에 근거해 1990년부터 시행된 종합토지세는 토지과다보유세를 통합하여 개인 또는 법인별로 보유하고 있는 모든 토지의 가액을 소유자별로 합산하여 과세하게 된다. 하지만 종합토지세는 시행도 해보기 전에 손질부터 당한다.
“지주들의 세금저항”
1990년 1월10일 노태우 대통령이 연두기자회견을 통해 세제개편, 토지공개념 시행 등 정부가 내건 경제개혁조치를 그대로 수행하겠다고 선언하던 바로 그 날 경실련은 “종합토지세제의 도입을 시행도 안한 상태에서 대폭 완화키로 한 것은 일부 땅재벌의 압력에 굴복했기 때문”이라며 “서울시민의 72% 이상이 땅 한 평도 없는데 중산층의 조세저항 운운하면서 종합토지세제 시행을 미루는 정부의 결정에 대해 강력히 반대한다”고 성명을 냈다. 대통령의 선언과 달리 이미 세율 인하가 논의되고 있었고, 2월21일 정부와 민자당은 종토세율을 인하하는 개정안을 마련했다.
당시 상황은 2월24일자 조선일보 기자수첩 ‘곡절 종토세’에 잘 나타나있다. “개정안의 요지는 상업용 건물 부속토지에 대한 종합토지세 최고세율을 5%에서 2%로 대폭 낮추고, 최고세율 적용대상도 현행 300억원 이상에서 500억원 초과토지로 축소한다는 것이다. 주거용 토지의 최저세율 과표를 높여 세금 부담을 덜어준다는 내용도 포함돼 있다. 간단히 말해 경제정의실현이란 구호아래 종합토지세제를 도입하긴 했으나 지주들의 세금부담이 한꺼번에 너무 늘어나 저항이 크므로 세 부담 증가에 따른 충격을 절반쯤은 줄여보겠다는 얘기인 것이다.”
이 개정안은 3월14일 야당인 평민당 의원들이 퇴장한 가운데 민자당 의원들만으로 표결에 붙여 정부 원안대로 통과됐다.
“희안한 종합토지세”
종토세는 낮은 과표현실화율도 문제지만 공평성과 효율성 면에서 애초부터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종합합산, 별도합산, 분리과세로 나눠 과세대상이 복잡할 뿐만 아니라 종합합산과 별도합산을 구분하는 논리적 근거가 미약하고, 대상토지의 구분에 있어서 기술적 어려움이 컸다. 가족간에도 명의를 빌리면 한 개인이 소유한 토지를 분산시킬 수 있는 틈이 있었다.
게다가 세액계산과 징수가 대단히 복잡했다. 먼저, 각 지방자치단체가 보고한 토지 및 소유상황에 대한 정보를 취합하여 소유자별로 전국에 흩어져 있는 토지소유상황을 파악한다. 중앙정부는 이 자료를 모아 소유자별 종합토지세액을 산출하고, 토지의 소재지별로 각 지방자치단체가 징수할 세액을 계산한다. 지방자치단체는 이 결과에 따라 비로소 세금을 징수하는 것이다.
김용민 전 재경부 세제실장도 이 점을 답답해했다. “종합토지세가 희한한 구조로 돼 있다. 우선 지방세라는 것부터 그렇다. A라는 사람이 섬도 가지고 있고, 광주에도 서울에도 땅이 있다면 그걸 다 합산해서 누진세율로 과세하는 건데 그건 중앙정부밖에 할 수 없는 일이다.
지방정부가 과세 표준을 매길 수 없으니 땅을 얼마나 소유하고 있는지 행자부로 알려주면 행자부가 과세를 하는건 데 어떤 경우는 5년이 지나도 세금이 매겨지지 않는다. 1년 지나 또 다른 토지를 가지고 있는 게 나오면 또 합산해서 나눠주고 그러다보면 과세 자체가 안 된다. 국세로 태어나야할 세목이 지방세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종합토지세 납세자의 91.4%가 10만원 미만을 납부하는 현실(2002년 기준)은 토지투기 방지라는 목적달성에도, 지방재정 충실에도 기여하지 못하고 있었다.
비싼 아파트의 세금이 더 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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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부세를 둘러싼 이런 우여곡절은 ‘보유세 강화, 거래세 완화’라는 원초적이고 오래된 숙제에서 비롯했다. |
반면 시세가 3억원인 강북 아파트는 새 아파트라는 이유로 20여 만원의 세금을 내는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다. 부동산에 대한 가치의 평가는 시장을 통한 거래에서 일어나는데 이를 분리하여 평가해 과세한다는 것부터가 모순이다.
한국조세연구원이 1994년 “아파트 재산세는 시가와는 정반대로 지역별 격차가 극심하다”며 “이런 불합리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재산세 부과방식을 토지·건물 통합과세제도로 바꿔야한다”고 일찌감치 주장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그러나 이 통합과세는 10여 년을 더 기다려야했다.
지방세의 30~40%가 보유세가 아니라 취득세, 등록세 등의 거래세인 건 이런 세율 체계의 산물이다. 문제는 거래세가 안정적인 지방세원 확보로 적절하지 않다는 점이다. 부동산 경기가 좋으면 덩달아 거래세도 늘지만 경기가 안 좋으면 세금도 크게 준다.
보유세를 둘러싼 갈등의 오랜 역사
국민의 정부도 ‘보유세 확대, 거래세 완화’를 국정과제로 삼았다. 2000년3월 이헌재 당시 재정경제부 장관은 김대중 대통령에게 업무보고를 하면서 “국세와 지방세가 일관성 있고 조화롭게 운용될 수 있도록 상설 조세정책협의회를 운영하겠다”고 밝혔다. 국세 정책을 맡고 있는 재정경제부와 지방세 소관 부처인 행정자치부간에 조세정책 협의를 위한 기구를 만들어 거래세를 낮추고 보유세를 높이도록 합리적으로 조정하겠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5월에는 “정부가 6월 중 내놓을 부동산관련 세제 개편안은 지난 20~30년간 시행돼온 부동산 관련 세제 전반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이라는 점에서 경제 주체들의 부동산 매매·보유 행태에 ‘혁명적인 변화’가 불가피할 전망”이라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5월10일자 문화일보). 그렇지만 2002년 9·4 대책에서 보유세 강화방안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춘희 당시 건설교통부 주택도시국 국장의 증언이 그 배경을 설명해준다.
“선거 앞두고 어떻게 세금 올리나”
“팔레스 호텔에서 관계 장관회의를 비밀로 열어서 9.4대책을 만드는데 끝까지 동의 안 되는 부분이 행자부에서 재산세 중과하는 것이었다. 선거 앞두고 있는데 재산세 중과해서 어떻게 하려고 그러느냐고 강하게 반대를 했다. 그 때 11개 부처 장차관이 참석했는데 8대 3 정도로 일단 재산세를 중과하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이를 실행하는 방법은 과표현실화였다. 그런데 결국 실행을 안 해버리고 말았다. 행자부는 집값 오르는데 대한 책임을 지지 않지만, 세금 중과에 대해서는 자기들이 직접 책임을 져야하는 부처 입장이 있었던 거다. 세금이라는 게 갑자기 올릴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입장이었다. 시기적으로도 정권 말기고 그래서 실행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예상했던 알맹이가 빠져버린 9·4 대책은 언론의 질타를 받았다. “그동안 많은 전문가들이 재산세에 대한 개혁이야말로 부동산 정책과제의 핵심이라고 주장해왔다. 우리의 재산세 과세체계는 주택 면적을 중심으로 이뤄져 있어, 실제 거래가치를 반영하지 못한다는 지적이 많았다. (중략) 선진국 세수 체계와는 완전히 거꾸로다. 정부가 대통령 선거 때문에 할 일을 안 하고 있다는 비판은 그래서 설득력을 얻고 있는 게 아닐까.” 조선일보 9월6일자 기사의 한 대목이다.
차등 없는 ‘지역차등지수’
2002년 9·4 대책 나흘 뒤, 건교부가 발표한 재산세 및 토지세 사례는 보유세 확대를 반대하는 논리를 겨냥한 것으로 해석됐다. 시세가 3억4000만원인 강남 대치동의 26평형 H아파트의 재산세와 토지세는 7만5000여 원인데 이는 2천cc급 승용차의 자동차세 40만원의 5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고, 시세가 3억원인 경남 창원시의 57평형 E 아파트의 세금은 51만3330원으로 비슷한 시세의 대치동 H아파트에 비해 7배나 되는 세금을 내는 불합리한 상황이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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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부세, 마침내 정책화에 성공하긴 했으나…
참여정부의 보유세 강화 논의는 인수위 시절 시작되지만 2년 반 뒤인 8·31 대책에서 종합부동산세로 안착하기까지 지난한 과정을 거치게 된다. 2003년2월 빈부격차·차별시정 기획단은 보유과세 정상화를 국정과제로 선정한다. 당시 빈부격차·차별시정 기획단 시절부터 8·31 대책까지 종부세의 처음과 끝 모두 관여했던 김수현 비서관의 증언이다.
“인수위 시절에 논의한 보유세 강화는 원론적 수준을 넘지 못했다. 같은 해 7월 대통령 주재 비공개회의에서 종부세 도입이 처음 보고되었다. 사실 처음에는 종부세까지 생각하지 못했다. 지방세인 보유세를 강화하려고 했더니 강남구 등 일부 지역은 돈이 넘쳐나서 세금을 올릴 필요를 못 느꼈다. 이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고민하던 중 두 사람이 등장하는데 김대영 행자부 지방세제관과 김기태 재경부 세제실 과장이다. 두 양반이 만나면서 종부세 개념이 만들어졌다. 보유세를 올려도 지방세로 다 나가니 지방세의 윗부분을 국세로 돌리자는 거였다.”
‘세금폭탄’이라는 언론공세
종부세 안은 2003년 9월1일 관계 장관 회의 후 발표됐다. 3년 뒤인 2006년도에 도입하는 계획이었다. 물론 반대도 있었다. 세제 원리에 맞지 않는다고 반대하며 공동세를 대안으로 제시하는 목소리도 있었으나 그 톤이 높지는 않았다.
10월29일 종합토지세 과표를 50%로 현실화하는 시기와 5만~10만명의 부동산 과다보유자에 대한 부동산종합세 도입 시기를 2005년으로 1년 앞당기는 ‘10·29 대책’이 발표되면서 정부 안팎의 저항이 본격화했다.
최병렬 한나라당 대표는 “국민에 대한 공갈이자 엄포로 용할 수 없다”고 반대 입장을 밝혔다. 12월4일자 조선일보는 사설을 통해 “주택에 대한 정부의 무차별 ‘세금폭격’이 도를 넘어선 듯한 느낌이다”라며 세금폭탄론을 펼치기 시작했다. 다른 한편에선 서울시가 정부의 재산세 인상안을 거부하며 수정안을 제시하자 정부는 자치단체장의 과표 결정권 환수도 불사하겠다고 맞서면서 곳곳에서 충돌이 생겨났다.
“지연시키면 정책 자체가 사라진다”
종부세에 대한 균열은 정부 안에서도 일어났다. 특히 재경부는 신중한 입장을 피력했다. 2004년 5월 들어서는 재경부 세제실에서 건설경기 침체와 10·29대책으로 집값 상승세가 진정되었다는 점을 들어 도입 연기를 제기하기에 이른다. 이런 상황이라 종합부동산세 시안을 보고하는 8월11일 부동산정책회의는 세율 시뮬레이션 결과도 불완전한 채로 이뤄졌다.
노무현 대통령이 급박하게 돌아가던 상황을 1차 정리했다.
“지금 연기하면 괜한 상상력을 자극하여 많은 문제를 야기할 수 있으므로 오늘 방침을 결정해서 일단 추진한 후 보완해 나가는 방안이 타당하다. 지연시키면 정책 자체가 사라질 우려가 있다.”
이에 따라 8월29일 관계 장관 회의에서 종부세 방침이 재확인되는데 이를 전후로 중요한 반전 두 가지가 일어난다. 당시 과세 방법은 토지와 건물을 구분해 과세하는 방안이었다. 이 방안에 대해 강하게 반대하고 나선 사람은 조윤제 청와대 경제보좌관이었다. 조 보좌관은 건물과 주택을 통합해 과세해야 논란을 빚은 재산세 형평성 문제도 넘을 수 있다고 밀어붙였다. 그렇게 토지·건물에 대한 통합과세 방침이 정해진다.
지방에 돌려주는 국세
그리고 지방세와 국세 사이 논란을 ‘교통정리’ 하는 문제. 당시 재경부 세제실은 재산세처럼 종부세를 지방세로 하자는 안을 지지했다. 지자체가 다 쓰는 세금인데, 이를 국세로 가져오면 지방의 재정자립도도 낮아질 수 있다는 논리였다. 노 대통령과 이해찬 총리, 이헌재 부총리 등이 참석한 회의가 지방세로 결론을 낼 즈음, 막판 반전이 일어났다.
반전의 주인공은 김대영 지방세제관. “허성관 행자부 장관이 마지막으로 세제국장 얘기를 들어보자고 해서 최종 발언을 하게 됐다. 세 가지를 말했다.
첫째, 지방세는 법률적으로 안 된다. 전국의 모든 재산을 다 합쳐 세금을 매기는 건데, 서초구청장이 강원도나 부산 땅까지 합쳐서 세금을 매길 수는 없다. 그건 과세권 밖의 물건이다. 종합토지세가 있지 않냐고 하지만 그건 지방자치제 하기 전에 들어온 거다.
둘째, 너무 불편하다. 집 여러 채일수록 높은 세금 매기는 누진세인데 누군가 실수로 10채를 11채로 잘못 계산했을 경우, 국세라면 그 자리에서 고치면 되지만 지방세는 10곳을 고쳐야 하고, 그 처리가 보통 어려운 게 아니다.
세 번째, 종부세는 조세저항이 심할 수 있다. 그걸 시장, 군수, 구청장에게 맡겨 놓으면 감당할 수 없다. 목적 자체가 국가 정책이니 국세로 해서 정부가 감당해야 옳다. 대통령이 듣더니 국세로 가는 게 맞겠다고 하더라. 대신 국세로 걷는 종부세는 다 지방자치단체에 내놓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이렇게 해서 9월15일 종부세의 기본안이 공식 확정됐다. 1차 지방세는 시·군·구가 관할 구역 내 부동산에 대해 낮은 세율로, 2차 국세는 사람별로 전국 합산하여 누진세율로 종부세 과세하는 내용이었다.
정부·여당 안에서도 진통, 그리고 그 결과
이를 두고 언론은 “약간의 완화 조짐을 보였던 부동산 정책이 다시 강성기류로 U턴하고 있다”(9월17일자 한국일보)고 봤다. 하지만 내부의 논란은 가라앉지 않았다. 10월부터는 세부 시행 방안을 놓고 진통을 겪었다. 10월 중순 재경부는 지방세와 국세로 이원화하기로 한 과세주체 문제를 놓고 지방공동세 시행방안을 제기했다. 수차례 걸친 회의에서 재경부는 이 입장을 고수했지만 10월27일 관계장관회의에서 수습된다.
이 와중에 내부논란이 노출되기도 했다. 국회 재정위 이혜훈 의원(한나라당)이 10월21일 재경부 국정감사에서 종부세 도입에 따른 문제점을 지적하며 국세청과 행정자치부가 시스템 미비, 부실과세와 조세 저항 등 각종 부작용 등을 이유로 종부세의 직접적인 부과·징수에 반대하는 내용을 담은 대외비 공문을 전격 공개했다.
과세 주체에 이어 그 다음은 세 부담 수준과 부과대상자 범위를 놓고 설전이 오갔다. 열린우리당과 재경부는 좀더 완화하는 쪽으로 몰고 갔다. 11월 초 3차례 걸쳐 열린 당정협의에서 일부 의원이 회의장을 박차고 나가는 등의 진통을 겪은 끝에 완화된 안이 채택된다. 종부세 적용 대상을 주택 6억원 이상(10만명)에서 9억원 이상(3만5000명)으로, 세부담 인상 상한선은 당초 100%에서 50%로 낮춰졌다.
‘명분만 남은 세금’
보유세 개편안이 발표되자 비판이 잇따랐다. “종부세가 애초 정부 안에서 많이 후퇴한데다 한나라당과의 협의 과정에서 또 후퇴할 가능성이 높아, 자칫 명분만 남은 세금으로 전락할 우려도 있다.”(11월5일자 한겨레) 세대별 합산이 아니라 사람별 합산도 문제 삼았다. 예컨대 국세청 기준시가 10억짜리 집이더라도 부부 공동명의로 2억원, 8억원으로 나눠 놓으면 세금을 물지 않아도 된다는 식이었다.
2004년 12월30일 국회를 통과했으나 완화된 종부세의 위력은 크지 않았다. 2005년 3월부터 재건축 아파트 값이 뛰기 시작했고, 정부는 2005년 2월17일, 5월4일 잇따라 또 다른 부동산가격 안정대책을 내놔야 했다. 그 사이 종부세의 1단계 주자들도 많이 바뀌었다. 이헌재 부총리가 3월 초순 물러났고, 조윤제 보좌관이 주영 대사로 나가고 그 자리에 정문수 보좌관이 왔다.
종부세 2차전… “이것 못하면 다 뛰어내리자”
2005년 6월 들어 판교발 부동산값 상승이 연일 계속되자 정부의 위기의식은 최고조에 달했다. 노 대통령은 판교의 택지분양 일정부터 중단시켰다. 20일부터 시작될 예정이던 25.7평 초과 택지공급 절차가 잠정 유보됐다. 김수현 비서관은 “아찔했다”는 말로 당시 정황을 기억했다.
“판교 분양 문제가 걸리면서 5·4 대책은 완전히 무색해졌다. 판교 일정을 대통령이 중지하자고 했다. 아찔했다. 아무도 설마 ‘중지까지’하고 생각했다. 정세균 원내 대표를 만나 중지해야할 만큼 심각하니 양해를 해달라고 당쪽을 설득하고 모든 과정을 중단하고 근본 대책을 마련한 후 움직이기로 했다. 6월17일 오후에 대통령이 지침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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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7월13일 총리공관에서 열린 제2차 부동산정책 당정협의회에서 이해찬 당시 국무총리가 관계 장관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종부세의 결정판이라 할 8·31 대책의 출발점이 6월17일이었다. 이날 오후 노 대통령 주재로 청와대에서 이해찬 총리, 한덕수 경제부총리, 추병직 건교부 장관, 오영교 행자부장관과 원혜영 열린우리당 정책위의장 등 당·정·청 고위관계자들이 참석한 부동산정책대책회의가 열렸다. 그날 저녁 시내 모 호텔에 각 부처 1급 이상까지 배석한 가운데 회의가 열렸다. 김병준 정책실장의 한마디가 비장했다. “이거 못하면 우리 다 나라에 죄짓는 거다. 책임지자. 이거 못하면 우리 다 뛰어내리자….”
종부세가 사람별 과세에서 세대별 통합과세로 극적인 방향 전환을 하고, 과세 대상 9억원(국세청 시가기준)이 6억원으로 강화되며, 실거래가 등기부 기재 등 그동안 논의조차 되기 어려웠거나 후퇴 일로에 있던 사안이 제자리를 찾게 된 건 이런 위기의식이 작용한 바 크다. 그때 연일 이어지던 대책회의 정황을 기억하는 이들이 많다.
“회의, 전쟁에 나가는 기분”
이재영 당시 건교부 토지국장의 말이다. “건교부나 행자부가 안을 만들어가면 정문수 보좌관에게 혼 많이 났다. 한 번은 종부세 부과의 시뮬레이션 결과를 가져오라고 했는데 기대에 충족할 자료가 안 나왔다. 행자부의 협조 없이 더 이상은 안 된다고 했더니 불같이 화를 냈다. 부동산 시장에 대한 시각이 너무 안이하다, 공무원이 좀더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낼 생각은 않고 기존 제도만 근거로 안 된다고만 한다는 이야기를 여러 번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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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부동산세 도입 이전 각 국별 부동산 보유세 실효세율 비교 (자료:재정경제부) |
두 달 간의 ‘전쟁’ 끝에 8·31 대책이 만들어졌다. 재산세와 종부세로 구성되는 보유세에서 가장 큰 변화는 종부세 과세 대상이 전체 세대의 1.6%인 ‘기준시가 6억원 초과’ 주택으로 확대되고, 가구별로 합산되는 것이었다.
당시 각각 50%인 재산세와 종부세 과표 적용률도 재산세는 2008년부터 매년 5%포인트씩 올라 2017년에야 100%가 되지만, 종부세는 2006년 70%로 크게 늘어나고, 이어 매년 10% 포인트씩 올라 2009년에 100%에 이르도록 설계됐다. 세부담 상한선도 재산세는 전년 대비 1.5배를 유지하지만, 종부세는 3배로 확대됐다. 선진국처럼 보유세 실효세율 1% 선에 맞추겠다는 것이었다.
“납세자 여러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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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보유세 실효세율이 1.6%, 일본이 1%인데 우리나라는 이제 겨우 0.4~0.6%가 되었습니다. 주택을 여러 채 갖고 있어도 추가적인 부담이 없고 대표적인 불로소득인 부동산 양도소득의 환수시스템이 미약하던 시대를 지나서 내년의 보유세 부담은 좀더 현실화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