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 건설사들은 정부나 공기업이 발주한 공사를 따내면 실제 공사비보다 훨씬 많은 공사비를 보장받지만, 하도급을 줄 때에는 가장 낮은 비용을 지출한다. 대형 건설사들이 직접 시공도 하지 않고 공사 물량을 수주하고 하도급을 주는 과정에서 얻는 차익은 전체 공사비의 3분의 1 가량 된다.
대형 건설사들이 손쉽게 큰 돈을 벌 수 있는 이유는 우선 입찰 단계에서부터 제대로 된 가격경쟁이 이뤄지지 않는다는 데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정부가 공사비 산정의 기준으로 삼는 ‘건설공사 표준품셈’ 자체가 워낙 부풀려져 있기 때문에 이런 막대한 차익을 남길 수 있다.
건설교통부는 현행 표준품셈 제도를 단계적으로 폐지해 나가겠다고 밝혔지만 아직까지 극히 일부 사업에서만 제한적으로 폐지하고 있다. 경실련 등 시민단체에서는 하루 속히 표준품셈 제도를 폐지하고 시장 가격을 그대로 적용하는 실적공사비 적산제도를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표준품셈제도, 연간 수십 조원 예산 낭비 초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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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 울산지역 건설플랜트 노조원 3명이 울산시 남구 부곡동 SK의 중질유분해공장 프로판분리탑위에서 구호를 외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
다단계 하도급 문제와 더불어 건설업계 종사자들이 지적하는 또 하나의 구조적인 문제는
공사비 산정의 기준이 되는 현행 ‘건설공사 표준품셈’(이하 표준품셈) 제도의 비합리성이다. 표준품셈이란 정부나 공기업에서 시행하는 건설공사에서 적절한 가격이 얼마인지를 산정하는 기준이 되는 지표를 일컫는다.
공공부문 공사의 경우 표준품셈과 물가조사자료 등을 근거로 예정가격을 책정하고, 입찰에 참여하는 대형 건설업체들은 여기에 맞춰 가격 경쟁을 벌이고 설계비용을 산출한다. 문제는 표준품셈과 물가조사자료가 상당 부분 부풀려져 대형 건설업체들의 이익만을 보장하는 제도로 악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현행 표준품셈은 30년 전 만들어질 당시와 크게 변화가 없어 그 동안 이뤄진 기술 개발이나 장비 개선 효과가 제대로 반영되고 있지 않다. 새로운 건설기술의 개발과 효율성 향상 등으로 공사 단가를 낮출 수 있는 부문이 많았음에도 건설사의 이해 관계에 따라 그 실적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번에 문제가 된 덤프트럭 운송비용만 해도 차량 성능이나 도로 여건 등이 30년 전보다 훨씬 향상되었는데 표준품셈에는 이러한 개선효과가 제대로 반영되지 못하고 있다. 특히 덤프트럭 운송비는 다양한 변수 조작이 가능하기 때문에 공사비용을 부풀리는 대표적인 분야로 지적받고 있다.
운반 거리, 운반속도, 도로 폭, 도로포장 상태, 교통체증 상황, 덤프트럭 용량 등 하나하나가 운송단가 책정에 큰 영향을 끼치는 변수가 많기 때문에 총공사비의 10% 가량을 차지하고 있는 운반단가를 부풀리기가 그만큼 용이하다는 것이다.
15톤 덤프트럭이 대피로 없는 2차선 비포장도로를 시속 30킬로미터로 운행한다는 기준으로 운송단가를 책정해놓고 실제로 25톤 덤프트럭이 4차선 포장도로를 시속 60킬로미터로 운행하기만 해도 공사비를 상당부분 부풀리는 게 가능한 것이다.
정부로부터 부풀려진 표준품셈과 물가조사자료를 근거로 한 공사비를 받는 대형 건설업체가 정작 하도급 업체에는 실제 시장가격을 기준으로 공사를 주기 때문에 엄청난 중간 차익을 챙겨가는 부당한 구조인 것이다.
공사비 정하는 표준품셈, 건설협회가 관리 고양이에게 생선 맡긴 꼴?
공사비 산정의 기준이 되는 표준품셈이나 물가조사자료가 책임 있는 정부기관이 아니라 이해당사자인 건설협회 등에 의해서 허술하게 관리되는 것도 문제다. 건설업계가 받을 돈의 기준을 건설업계가 관리하게 만들어 놓은 제도 때문에 공사비 부풀리기가 더욱 심화된다는 지적이다.
이런 문제가 지속적으로 제기되자 정부는 2004년부터 건교부 산하 한국건설기술연구원이 표준품셈 관리업무를 맡도록 했지만 적은 용역비와 짧은 조사기간을 들여 형식으로만 표준품샘을 개선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현재 업계에서는 정부나 공기업에서 발주하는 국책사업의 경우 공사비 산정의 기준이 되는 표준품셈이 적어도 20~30%는 거품이라고 파악하고 있다. 정부가 제시하는 예정 가격의 85% 선에서 공사 입찰이 이뤄지고, 50~60% 선에서 하도급이 이뤄지는 구조로 볼 때 공공공사 비용의 20~30% 정도는 직접 시공도 하지 않는 대형 건설업체와 중간전문건설업체 들의 주머니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일부 대형 건설업체의 이익을 위해 막대한 국민의 혈세가 낭비되고 있는 것이다.
정부나 공기업이 이미 발주한 4년치 공사물량이 약 150조원 가량임을 감안해 볼 때 적어도 30조원 이상의 예산이 낭비되고 있다는 계산이 가능하다.
정부도 이런 지적에 대해 일부 문제를 인정하고 작년 3월 현행 표준품셈 제도를 단계적으로 폐지해 나가겠다고 재차 밝혔지만, 지금까지 극히 일부 사업에서만 매우 형식적으로 적용되고 있다는 게 문제이다.
표준품셈 중에서도 덤프운반비 부풀리기가 가장 심각 경실련, 표준품셈 없애고 실적공사비제도 도입해야
경실련 등 시민단체는 건설공사 표준품셈 제도를 선진국과 같이 시장 가격을 그대로 적용하는 실적공사비 적산제도로 전면 개편하지 않고는 심각한 예산 낭비를 막을 수 없다고 강조하고 있다.
현행 표준품셈 제도로는 대형 건설업체가 부풀려진 표준품셈자료와 물가조사자료를 근거로 막대한 차익을 얻는 것을 방치할 수밖에 없을 뿐만 아니라, 다단계 하도급을 통해 전혀 시공을 하지 않고도 실제 일하는 사람 보다 더 많은 이익을 얻는 구조를 바꿀 수 없기 때문이다.
S대 건축학과 모 교수는 “덤프연대 파업에서 제기된 문제는 건설산업 전체의 부조리에 비하면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며 “표준품셈 제도와 하도급 문제는 별개의 사안이 아니라 구조적으로 연결된 함께 풀어가야 할 문제”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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