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발오적

'신도시기획실' 발족 후 순항, 200만호 초과 달성(박승)

토건종식3 2011. 3. 27. 11:25

부동산 중심사회 벗어나야

평생 일해도 내 집 장만 어려운 대한민국
후손들에게 비용부담만 떠넘기는 부동산 재테크

 


1986년 초 서울시가 재산세를 올리려 했다가 당시 여당인 민정당과 시민의 반대에 부딪혀 백지화 한 일이 있었다. 이것을 보고 나는 같은 해 5월27일 조선일보에 '재산세는 올려야 한다' 는 칼럼을 써서 찬반논쟁을 불러온 일이 있다. 그 뒤 오늘에 이르기까지 신문이나 방송 등 기회 있는 대로 삶의 질을 높이려면 땅과 집은 되도록 싸고 균점되어야 하며 국민저축은 부동산보다도 금융자산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일관되게 주장해 왔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부동산에 대한 보유과세를 무겁게 하여 우리사회가 부동산 중심사회에서 벗어나도록 해야 한다. 


선진국들이 금융저축 중심사회라면 우리나라는 부동산 중심사회이다. 부동산 중심사회란 부동산이 주된 축재수단이고 가치보장 수단이 되는 사회를 말한다. 실제로 지난 반세기를 돌이켜 보면 부를 축적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소득을 금융기관에 저축해서가 아니라 부동산에 투자해서 그 값이 오른 데서 돈을 모은 사람들이었다. 그 동안 대표적인 부동산 중심국에 일본과 한국 두 나라가 있었다. 그런데 1990년대 부동산 거품붕괴의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는 일본은 이제 여기서 벗어나고 있다.

그러면 부동산 중심국이 되면 어떻게 되는가. 사람들은 불필요하게 넓은 땅과 큰 집을 차지하려 하기 때문에 땅과 집이 부족하게 되고 땅값과 집값이 오르게 된다. 부동산 가격상승으로 인한 소득은 창출된 생산소득이 아니고 장차 집을 마련하는 후세들의 부담으로 이루어지는 비생산적 소득인 만큼 소득증가에 불구하고 삶의 질이 악화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그리고 부동산이 편익수단이 아니라 축재수단으로 이용되면 정당한 노동소득보다도 불로소득을 추구하려는 사회적 비리풍토가 조성된다.

부동산중심국이 되면 국민들의 개인저축은 금융기관으로 가지 않고 부동산으로 들어가 산업자금화의 길이 차단되고 부동산 가격상승으로 나타나게 된다. 우리들의 저축이 삶의 질을 높이는데 활용되기는커녕 오히려 우리 후손들의 삶을 불행하게 만드는데 쓰여 진다는 것은 개탄스러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부동산과 금융재산에 대한 개인저축의 구성 비율을 보면 선진국의 경우는 3:7인데 우리는 반대로 7:3인 것이다. 그 뿐 아니라 부동산은 부유층에 의해 독과점되기 때문에 빈부격차의 가장 큰 원인이 되고 있다. 1998년을 기준으로 한 조세연구원의 조사를 보면 상위 10%계층의 점유율이 소득은 25%인데 부동산은 40%에 이르고 있어 빈부격차는 소득격차보다도 자산격차에 기인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우리나라는 왜 부동산 중심국이 되었으며 부동산 중심국에서 벗어나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근본문제는 부동산에 대한 보유세 부담이 낮다는 데 있다. 대체로 2000년을 기준으로 한 각국의 부동산에 대한 보유세(재산세) 부담률을 보면 미국은 1.5% 영국은 1.0-1.2% 일본은 1.4%인데 비해 우리나라는 0.2%이다. 이처럼 선진국에서는 재산세가 무겁기 때문에 꼭 필요한 용도가 아니면 넓은 땅과 집을 소유하지 않는다. 우리나라에서는 부동산을 가지고 있어도 보유비용이 매우 낮기 때문에 불필요한 부동산 소유가 보편화 되어 있다. 우리나라처럼 땅은 좁고 인구는 많은 나라에서는 부동산을 꼭 필요한 사람이 고르게 점유해야 하는데 이것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나라의 집값과 땅값은 천정부지로 올라왔다. 우리나라 집값은 소득에 대비해 볼 때 미국이나 유럽의 두 배 이상이고 세계적으로도 가장 비싼 나라가 되었다. 집값이 오르면 당장 집 주인은 좋아하겠지만 이것은 평생 일을 해도 집 한 채 마련이 어렵게 되는 우리 후손들에게 불행을 전가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고육지책으로 노무현 정부 때 종합부동산세 제도가 나왔다. 이 제도는 전국의 부동산을 합산하여 주택의 경우 6억 원 이상의 고액주택에 대해 부부합산으로 누진과세하여 부동산에 대한 보유세 부담률을 0.2%에서 0.6%로 올리겠다는 것이었다. 종부세 부담자는 전 가구의 2.1%이며 대상자의 64%는 다주택 소유자였다. 이렇게 하여 보유세 부담률이 0.6%가 되어도 선진국 수준에는 크게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서 이 제도를 사실상 무력화시킨데 대해 나는 종부세를 내야 하는 해당자였지만 일관되게 종부세 유지를 주장한 바 있다. 

종합부동산세제가 큰 집 또는 다주택을 소유한 부유층에게 일시에 과중한 부담을 주는 것은 사실이다. 보유과세의 강화를 위해서는 모든 부동산에 대해 재산세를 올리는 것이 정도라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국민들의 조세저항이 두려워 일부 부유층에게만 높은 세금을 부과하기로 한 이 제도는 하나의 편법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제도는 보유과세를 높여 부동산 중심국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한 대안으로서의 큰 의미가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종부세 제도를 바꾸려 한다면 보유세 부담률을 다시 원점으로 후퇴시킬 것이 아니라 대신 재산세를 올린다든지 하는 대안을 내 놓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다소의 부작용이 있더라도 보유세 부담률을 선진국 수준으로 계속 올려가야 할 것이다. 우리가 부동산 중심사회에 머물러 있는 한 어떤 경제성장에도 불구하고 삶의 질 선진화는 기대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의 백년대계를 위해 부동산 중심사회에서 벗어나기 위한 개혁을 흔들림 없이 밀고 가야 할 것이다.


신도시 개발계획의 발표와 추진과정
정치권 반대 불구 대통령 추진 발표에 집값 안정돼
'신도시기획실' 발족 후 순항, 200만호 건설 초과 달성
20년 전 벌판, 아파트 숲 변한 모습 보며 감회 젖기도


일산과 분당에 대한 개발계획이 마무리되어 이를 강영훈 총리에게 보고한 다음 89년 4월 20일 청와대에서 노태우 대통령에게 종합적으로 보고하여 재가를 받았다. 그리고 4월27일 청와대에서 대통령이 경제장관들과 이한동 내무장관 고건 서울시장이 참여한 관계장관 회의를 주재하고 신도시 계획의 전모를 발표하였다.

이때의 발표내용에 의하면 분당에는 540만 평에 10만5,000가구의 집을, 일산에는 460만평에 7만5,000가구의 집을 짓고 교통난 해소를 위해서 분당-잠실 간 그리고 일산-구파발 간 전철을 건설한다는 것이었다. 토지의 평당 분양가격은 분당 73만원 일산 67만 원이었다. 평촌과 산본 그리고 중동에 대한 개발계획은 이를 전후하여 별도로 발표되었다.

이 발표에 즈음하여 노태우 대통령은 5대 신도시 건설이 여의도의 20배인 1,450만 평 대지에 당시 서울 아파트 42만호의 80%에 해당하는 33만호를 지어 130만 명에게 새집을 주게 되는 사업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러고도 아파트 투기가 계속된다면 긴급명령권이라도 발동하겠다고 했으니 그 때 상황이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신문들은 거의 전 지면을 이 기사로 덮다시피 했다. 여론 조사 결과 국민들은 약 70%가 지지했으며 폭등세였던 집값은 관망세로 돌아섰다.


그러나 해당지역 주민들의 반대가 거세게 일면서 이 문제가 정치권에 태풍을 몰고 왔다. 국회에서는 여야 없이 정부 시책을 질타하고 나섰다. 여당인 민정당은 계획의 전면보완을, 야당인 평민당 민주당 공화당은 전면백지화를 요구하면서 나에 대한 불신임안 제출과 내각 총사퇴를 주장했다. 주요 쟁점은 일부 재벌 땅에 대한 특혜여부, 정보의 사전 누출 여부, 절대농지의 감소 문제, 수도권으로의 인구집중 문제, 일산 개발의 국가 안보적 문제 등이었다.

나는 연일 국회 상임위 또는 본회의에 나가 의원들의 문제제기에 대해 해명하기에 바빴다. 의원들이 제기하는 문제에는 재벌 특혜나 정보 유출과 같은 터무니없는 것도 있었다. 결국 89년 5월 29일 국회 본회의는 '신도시 건설계획 재검토 결의안'을 여야 만장일치로 통과시켜 계획의 전면보완을 정부에 요구하였다.

이날 국회 본회의장에서 나의 답변에는 의원들의 야유와 성토가 이어졌다. 나는 답변에서 5대 신도시가 지어지면 집값은 떨어지기 시작하고 집을 팔고 싶어도 팔리지 않는 때가 올 것이라고 말했는데 이때 장내에 폭소가 터졌다. 믿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신도시 건설이 확정되면서 폭등하던 아파트 값은 안정되기 시작했으며 다음 해부터 하락세로 돌아섰다.

이러한 국회 결의에 따라 우리는 계획을 보완하여 추진하기로 했다. 이 보완은 주로 보상 이주 생계대책을 더 강화하는 것이었다. 보상에 있어서는 주민이 3할 이상 참여하는 보상심의위원회를 구성하여 보상을 더 후하게 해주기로 했다. 세입자에게는 임대아파트 입주권을 주고 취업알선 센터를 운용하여 취업도 알선하기로 했다.

이렇게 모든 것을 마무리 짓고 6월 15일 건설계획의 집행기구로서 신도시기획실을 건설부 내에 발족시켰다. 기획실은 차관보급(1급)을 실장으로 하여 국장급 2명 과장급 7명 등 모두 40명으로 구성했다.

당시 건설부는 정부부처가운데 인사적체가 가장 심해 사무관에서 10년 이상 승진하지 못한 사람이 수두룩했는데 40명의 새 일자리가 생기면서 인사적체가 크게 풀려 매일 야근해온 직원들에게 하나의 선물이 되었다. 건설부 출신으로 최초 건설부 장관이 된 추병직 장관도 그 때 사무관에서 서기관으로 승진했다.

기획실이 발족될 무렵 보상문제 등 난제들이 대충 해결되고 주민들과 정치권의 반대도 가라앉았다. 이때부터 건설부는 토지개발공사 및 주택공사와 일체가 되어 본격적인 건설계획의 집행에 들어갔으며 시멘트와 철근건설자재의 수급대책도 따로 마련했다.

신도시 건설을 계기로 임기 5년 동안 200만 호의 집을 짓겠다던 노태우 대통령의 공약은 91년 말까지 3년 동안에 214만호를 지어 초과 달성하게 되었다. 주택보급률을 보면 1980년 71%에서 88년 69%로 오히려 뒷걸음질하던 것을 2002년에는 100%로 이끌어 올렸는데 이것은 신도시 건설 때문이었다.

신도시 공사가 진행되면서 89년 11월 29일 최초의 분당 모델하우스 개관이 있었는데 여기에 40만 인파가 밀려 교통이 마비되었다. 그리고 그 후 일산의 아파트 분양에도 경쟁률이 치열해 안보기피현상 때문에 일산 신도시는 실패할 것이라는 일부의 우려가 기우였음이 실증되었다. 다만 수급계획을 마련했음에도 불구하고 집중된 건설수요 때문에 건설 원자재 파동을 유발했던 것은 교훈으로 삼아야 할 일이었다.

나는 5대 신도시를 찾을 때마다 사람의 힘이 이렇게 큰 것인가 그리고 20년이라는 세월이 이렇게 무서운 것인가를 되새겨 보게 된다. 20년 전 황량한 벌판이었던 이 곳, 항의와 갈등의 현장이었던 이곳이 이제 고층 아파트의 숲이 되어 수많은 사람들이 활기찬 삶을 꾸려가는 보금자리가 되고 있음을 볼 때마다 나는 깊은 감회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상전벽해라는 것이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 아니겠는가. 신도시 건설로 어쩔 수 없이 고향을 떠나신 분들이 그 뒤 어디서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행운을 빈다.



신도시 그만 짓고 주거문화 바꿔야
물량공세 아닌 주거 '질' 높여야… 재개발이 해답

지금 김포 판교 동탄 용인 양주 탄현 고양 등 서울 주변에는 수많은 신도시가 뻗어가고 있다. 사람들은 계속 서울로 밀려오고 서울에서는 집을 더 지어야 한다고 해마다 신도시를 짓고 있다. 이대로 간다면 50년, 100년 뒤 어떤 모습이 될지 생각하면 두려운 생각이 든다.

나는 청와대 경제수석과 건설부장관의 자리에서 일산 분당 등 5대 신도시건설을 기획하고 추진했던 사람이다. 그러나 신도시는 이제 그만 지어야 한다.

우선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그때는 주택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던 시대였다. 서울의 가구 수와 주택수의 비율인 주택보급률이 그 때는 56%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100%를 넘어섰다. 어느 나라나 세입자가 있게 마련이므로 이를 감안하면 이제 주택문제는 양의 문제가 아니라 질의 문제이다. 

이 단계에서 서울의 주택문제를 해결하려면 좋은 집을 짓는 일과 나쁜 집을 헐어내는 일 등 두 가지 일을 같이 해야 한다. 지금 서울에는 우리나라가 선진국이 되어서는 살 수 없는 열악한 집들이 매우 많은데 이 집들은 어느 때든 헐어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신도시 건설은 이 두 가지 중 어느 것도 제대로 해낼 수 없다.

분당과 일산은 서로 다른 점이 있었다. 일산은 대부분의 주민들이 대대로 살아온 토착농민들이며 그만큼 더 순박한 면이 있었다. 그리고 똑 같이 신도시 건설의 백지화를 요구했지만 일산의 경우는 고향을 떠나야 한다는 아픔이 더 컸던 반면 분당 주민들은 외부에서 이주해온 사람들이 많아 보상가격에 관심이 더 많았다.

분당의 땅값은 개발계획이 알려지기 전 평당 3만-4만원이었다. 이것이 개발된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급등하기 시작하여 개발에서 제외된 인접지는 15만원, 경우에 따라서는 25만원까지 가는 곳도 있었다. 주민들은 개발에서 제외된 토지 소유자에 비해 손해를 보고 있으니 인접지역의 땅값만큼 보상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당시 정부는 평당 7만-8만 원선에서 보상하면 적절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주민들은 이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었다. 정부는 평당 12만-20만원씩 보상했다.

그리하여 분당은 89년 5월 초부터 격렬한 반대시위에 휩쓸렸다. 빈민운동을 하는 시민단체도 끼어들어 주민들의 반대운동은 조직화되었다. 마을 곳곳에는 신도시 결사반대, 생존권 보장, 시가보상 등을 담은 플래카드 또는 붉은 페인트 글씨가 매우 을씨년스러운 모습이었다. 수백 명의 시위대는 경부고속도로를 점거하고 교통을 차단하는 일도 여러 번 있었는데 이때마다 경찰력이 동원되어 이들과 충돌하기도 했다.


이들은 국회에서 그리고 여당인 민정당사 앞에서 농성을 했으며 야당 당사에 들어가 점거농성을 하기도 했다. 그래서 정치권도 온통 신도시 문제로 벌집 쑤셔 놓은 듯했다. 이 무렵 일산에서 두 건의 자살사건이 발생했다. 

5월 20일 57세의 가장이 집 철거에 비관자살 했다는 것이고 5월 26일에도 유사한 사건이 있었다. 신병비관이나 가정불화 등이 원인이라는 내부보고가 있었지만 언론매체들은 신도시 때문이라고 보도하였다. 이런 일이 겹치면서 신도시 건설에 대한 분당의 반대운동과 정치권의 불만은 매우 심각한 국면으로 치닫고 있었다.

나는 이때 전임 건설부 장관들을 초치하여 이 국면을 어떻게 타개해야 할지 자문을 구했다. 조성근 정낙은 전예용 장예준 이낙선 신형식 고재일 최종완 김주남 최동섭 씨 등이 오셨다. 소신대로 추진하되 직접 나가 주민들을 설득해보라는 주문이었다. 그래서 나와 건설부 간부들이 나가 여러 차례 사실을 설명하였으나 반대 데모는 계속되었다.

한편 89년 들어서서 집값은 자고 나면 뛰어 오르고 신도시 건설지역 주변의 땅값은 연일 폭등세였다. 그래서 노태우 대통령은 4월 27일 이러한 투기가 가라앉지 않으면 긴급명령권을 발동하겠다고까지 했다. 이 무렵 신도시 지역은 일확천금을 노리는 투기장이 되었는데 이런 현상은 특히 분당이 심했다.

돈을 가진 사람들은 분당으로 모여 들었다. 복덕방들은 수없이 불어나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는데 이들은 전주들을 끌어들여 두 번 세 번 되팔기도 했다. 등기이전도 하지 않고 전매하는 일이 많았으며 심한 경우에는 오늘 사서 다음날 서류만 넘기고 되파는 일도 있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이것이 한 몫을 잡는 좋은 기회였다. 보상을 노리고 전ㆍ월세로 전입하는 사람, 주민등록만 이전해 놓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개발이 공고된 날짜 이후의 전입자는 보상에서 제외한다는 공고를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실제로 이것 때문에 보상에서 제외되는 사람들의 격렬한 항의가 이어지고 결국에는 이들에게도 얼마간 보상이 갔다.

전ㆍ월세 입주자 문제와 함께 어려웠던 일은 주거 가건물이 늘어나는 것이었다. 비닐하우스는 법상 주거로 인정되지 않으나 거적을 씌우고 그 안에 생활도구를 갖추게 되면 주거로 인정되어 집으로서의 보상대상이 된다는 것을 나는 처음 알았다. 

그래서 처음에는 비닐하우스를 짓고 얼마 후 거적을 씌우게 되는데 이것을 단속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심한 경우에는 거적을 씌운 비닐하우스에 종교 예배기구들을 마련해 놓고 교회 부지를 내놓으라는 사람도 있었다.

이러한 위장전입과 불법 가건축에 대해 건설부 내무부 지자체가 합동으로 단속에 나섰다. 위장전입을 막기 위해 수백 명이 호구조사에 매달렸다. 89년 4월 27일 청와대 회의에서 당시 이한동 내무장관은 분당의 무허가 건축단속을 위해 경찰과 공무원 500 명을 동원하고 있다고 대통령에게 보고했으며 이상희 토개공 사장은 직원 530명이 매일 단속에 나서고 있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막상 단속에 나서면 심한 경우에는 땅에 드러눕고 오물을 뿌리는 등 극한적으로 저항하여 단속의 실효성에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결국 보상가격은 점점 올라가 처음 생각했던 평당 7만-8만원에서 12만원 이상으로 상향되고 이에 따라 분당의 분양가격도 그만큼 오르게 된 것이다.

이렇게 신도시 문제가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얽혀감에 따라 정부에서는 홍보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모든 중앙일간지에 신도시 개발에 대한 홍보 광고를 냈다. 이것은 청와대와 공보부가 주도한 것으로 건설부는 전혀 알지 못한 일이었다. 

그런데 억울했던 것은 광고를 배정받지 못한 모 경제지가 연일 건설부와 나에 대해 악의적인 보복성 보도를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언론의 횡포를 보고도 당하고 있을 수밖에 없는 그 때의 현실이 안타깝기만 했다.


나쁜 집을 헐어내는 일을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서울에 좋은 집을 공급하는 역할도 불리한 지리적 조건 때문에 제대로 할 수 없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해낼 수 있는 것이 바로 은평 뉴타운건설과 같은 주거지역 재개발사업이다.

서울의 주택부족문제는 자녀교육과 일자리 때문에 지방으로부터 서울로 밀려오는 수도권 집중현상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자녀들을 서울에서 교육시켜야만 좋은 대학에 보낼 수 있고 서울로 올라와야만 일자리를 얻을 수 있게 되어 있다. 이 때문에 지방에 사는 사람과 지방에 일터가 있는 사람들도 모두 서울에 집을 마련하고 서울로 모여드는 것이다. 

내가 어떤 지방도시를 가본 일이 있는데 그곳에 있는 어느 국가기관의 사무관이상 직원 22명중 현지에 집을 가진 사람은 두 사람뿐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집과 가족을 서울에 두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주로 자녀교육 문제 때문이었다. 

따라서 서울의 주택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하려면 이러한 비정상적인 주택수요의 근원을 다스려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그대로 두고 여기서 생기는 주택부족문제를 신도시를 계속 지어 해결하려는 것은 구멍 난 독에 물 붓기가 될 것이다. 그래서 10여 년 전 5대 신도시를 지어 엄청난 아파트 물량을 쏟아 냈지만 그 약발이 미쳐 10년도 못 갔던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앞으로도 매년 서울 주변에 신도시를 계속 지어야 한다면 장차 이 나라의 모습은 어찌 될 것인가.

또 한 가지 유의 할 점은 10년 내에 인구가 감소하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통계청의 추계에 의하면 2018년부터 인구가 줄기 시작하고 65세 이상 인구비율이 14.3%에 이르러 고령화 사회에 진입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주택수요는 줄고 주택수요 구조도 고령인구 중심으로 바뀌게 될 것이다. 그럴 경우 지금 계속 짓고 있는 신도시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부동산 파동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이런 점에서 향후 주택정책은 국토균형발전 정책과 교육개혁정책을 일관성 있게 추진하여 수도권 집중을 차단하는데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그리고 서울에 대규모의 도시 재개발 사업을 추진하여 좋은 집을 공급하고 나쁜 집을 헐어내는 일을 해야 한다. 재개발사업의 주택품질요건을 강화하여 양질의 주택을 짓도록 하고 이러한 재개발사업이 쉽게 추진될 수 있도록 주민동의율 인하, 절차간소화, 지자체의 지원강화 등의 조치를 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노력과 함께 우리의 주거문화도 바꿔야 한다. 그 동안 한국인은 주택을 주거수단으로 보기보다는 이재수단으로 생각해 왔다. 그래서 집값이 너무 올라 우리 후손들은 정상적인 소득으로는 도저히 집을 살 수 없게 되었다. 이것을 시정하지 않으면 앞으로 경제가 성장하더라도 삶의 질은 열악한 고소득 저생활국이 될 가능성이 높다. 

고층 아파트 숲이 된 서울의 주택구조에도 문제가 있다. 아파트가 낡아 노후화하면 아파트 숲은 흉물이 될 것인데 그렇게 되면 서울의 주거환경은 악화할 수밖에 없다. 나는 세계 어디서도 서울과 같이 고층 아파트 숲으로 된 도시를 본 일이 없다. 정원을 가진 단독주택은 도시 미관이나 환경에도 좋고 또 주말에 집을 가꾸는 취미와 휴식을 제공한다. 

반면 아파트는 도시환경과 미관을 해치고 아파트 거주자들은 주말이면 모두 집을 나와 교통체증을 유발하여 휴식을 가지기 어렵게 한다. 그래서 선진국일수록 정원이 있는 단독주택을 선호하며 고층 아파트는 저소득층이 사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이런 점에서 아파트와 단독주택이 균형을 이루는 도시환경을 조성할 필요가 있다.

다른 나라의 집이 내화외빈이라면 우리나라 집들은 외화내빈이다. 외국에는 200년 300년 된 집이 많은데 우리나라에서는 30년도 안되어 헐어야 하지 않는가. 겉으로는 허술하지만 내부구조가 실용적이고 오래 가는 외국의 집과 겉으로는 화려하지만 30년도 못 가는 한국의 집을 비교하면 우리는 느끼는 바 있어야 할 것이다. 서울의 주택문제는 근본을 다스리도록 발상을 바꾸고 주거문화를 바꾸는 데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


투기 문제 풀려다가 집값 상승 책임 뒤집어써
아파트 분양가 현실화 파동의 전말
시장-분양가 차액, 당첨자 갖는 구조로 투기 과열
해결 위해 분양가 현실화 추진… 청와대 반대 부딪혀
대통령께 직언해도 안 돼 "물러날 때 됐구나" 생각


1988년 12월 5일 건설부 장관으로 부임하여 업무현황을 파악하고 나서 주택건설에 큰 문제가 있음을 알았다. 81년부터 아파트의 평당 분양가격이 위치와 품질에 관계없이 25.7평 이하 규모는 127만원, 그 이상 규모는 134만원으로 규제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81년 이후 8년 동안 땅값은 120%, 자재값은 80%, 인건비는 100% 올라 당시 서울의 아파트 건축비는 평당 170만원 이상으로 계산되고 있었다. 이 당시 서울의 아파트 시장가격은 평당 300만원에서 800만원이었다.

이러한 규제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는 자명하다. 우선 건설업자는 주택건축을 기피할 것이다. 설사 집을 짓더라도 손실을 막기 위해 날림 집을 짓고 부실시공을 하게 될 것이다. 비싼 시장가격과 저가 분양가격의 차액은 결국 분양 받는 수요자가 차지하게 될 것인데 이것은 최악의 사회적 분배방식이다. 주택공급을 늘리는 효과는 없고 가수요를 충동하여 투기만 유발하기 때문이다.

주택건설에서 오는 부당한 초과이익이 있다면 이것은 세금 등으로 사회에 환원하는 것이 최선이다. 그러나 정당한 초과이익이 있다면 이것은 공급자에게 주는 것이 옳다. 이것은 좋은 집을 저원가로 지은 데 대한 보상일 뿐 아니라 더 많은 집을 짓도록 하는 유인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그동안 아파트 건설에서 오는 이러한 초과이윤을 아파트 당첨자에게 주었던 것이다. 아파트를 분양 받기만 하면 거액의 불로소득을 얻었다. 이에 대한 대책으로 아파트를 분양 받는 사람에게 채권을 매입토록 하는 채권입찰제를 실시하기도 했지만 큰 흐름은 막을 수 없었다

이처럼 아파트의 건설은 막고 가수요는 부풀리는 최악의 주택정책을 하다 보니 주택시장이 투기장이 되어 버린 것이다. 89년 봄 아파트 분양시장의 투기현상은 전국적으로 번져갔는데 일례로 지방인 성남의 500가구 분양에 불로소득을 찾아 1만 명 이상이 몰려들기도 했다.

이 문제를 풀지 않고는 주택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12월 초 장관 부임인사차 조순 부총리를 찾아가 이 문제를 제기하고 분양가 현실화의 필요성을 말씀 드렸다. 학자 출신인 조 부총리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다.

나는 건설부에 돌아와 분양가 현실화의 방안을 검토하도록 지시하고 연초 대통령 업무보고에도 연내에 분양가를 현실화하겠다는 것을 포함시켰다. 당시 건설부는 건설원가에 적정이윤을 더하여 분양가를 정하는 원가연동제를 과도적으로 구상하고 있었는데 대충 평당 180만 원선을 생각하고 있었다.

이것이 일부 신문에 새나가 당장 분양가를 올리는 것으로 보도되면서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되었다. 그러자 분양가 인상이 급등하고 있는 집값을 더 올리고 인플레를 자극한다는 우려에서 문희갑 청와대 수석과 경제기획원 물가국장이 집값과 물가가 안정될 때까지 분양가를 손대서는 안 된다고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이 때문에 건설부는 분양가 현실화 조치를 실행할 수 없었다.

나는 이러한 의견에 동의 할 수 없었다. 우선 분양가를 올리면 아파트 시장가격이 오르는가. 그렇지 않다. 아파트의 시장가격이 올린 분양가격보다도 월등히 높기 때문에 시장가격이 오르는 것이 아니라 분양 받는 사람의 불로소득이 줄어드는 것이다. 다소 심리적인 아파트 값 인상요인이 있을 수 있지만 이것은 일시적인 것이다. 설사 일시 아파트값이 오른다 하더라도 이렇게 꼭 필요한 개혁을 이 때문에 미루어서야 되겠는가.

그래서 나는 그 뒤에도 꾸준히 분양가 현실화 조치를 위해 노력했다. 드디어 4월 7일 조순 부총리와 나는 분양가를 현실화하자는 데 합의하고 이것을 4월 13일 관계 장관회의를 소집하여 매듭짓기로 하였다. 그런데 이것이 청와대 문희갑 수석의 반대에 부딪쳐 다시 무산되고 말았다. 대통령을 지근에서 모시는 청와대 수석들이 그 힘으로 다시금 정책결정을 주도하는 시대로 회귀한 것이다.

그러면서 집값은 폭등을 계속하였는데 이를 두고 일부 언론에서는 내가 분양가를 올리려 했기 때문이라고 보도하여 집값 상승의 책임을 온통 내가 뒤집어쓰기도 했다. 그 뒤 나는 4월 20일 대통령께 5대 신도시 건설계획을 보고 하면서, 그리고 4월 26일 영구 임대주택 기공식에 대통령을 모시고 가는 차 안에서 분양가 현실화의 결단이 필요하다는 말씀을 재차 드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나는 공직생활을 그만두어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신도시 계획도 확정되어 이제 집행하는 일만 남았고 그 과정에서 나의 심신도 지쳐있는 데다가 분양가 문제도 매듭짓지 못하고 부동산 투기도 잡지 못한 데 대해 내가 책임을 져야 하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5월 중순경 나는 홍성철 청와대 비서실장을 만나 대통령께 이러한 나의 뜻을 전달해 주도록 요청했다. 내가 건설부 장관직에서 물러난 것은 그로부터 두 달 뒤였다.

내가 물러난 뒤인 89년 11월 4일 정부는 당초 내가 추진했던 원가연동제에 의한 분양가 현실화를 단행했다. 만시지탄이었다.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도 막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오늘 해야 할 일을 어려움이 있다고 내일로 미루지 말라는 말도 있다. 분양가는 일시적 고통이 따르더라도 좀 더 일찍 현실화하는 것이 옳았다. 시장을 정상화하는 치료를 늦추면 늦출수록 그 비용이 커진다는 사실을 우리는 교훈 삼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