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입찰

아마추어정권,무능정권 관료들의 놀잇감

토건종식3 2010. 5. 1. 19:37

[실록 부동산정책 40년 ⑬] 분양가규제 논란의 역사 2007-03-14 10:14:20 

제2부 어떤 정책 폈고, 왜 못잡았나
1.<투명성과 형평성 제고 정책>
2.<안정적 주택공급 정책>
3.<가수요억제와 실수요 전환>
① 분양가규제 논란의 역사
② 실수요자에게 혜택을-주택청약제도 변천
③ 토지투기 억제와 토지공개념의 변형
④ 뜨거운 감자 재건축
⑤ 교육과 부동산


분양가 규제 도입의 필요성을 주장한 1977년 10월 11일자 중앙일보 사설
“금년 들어 가장 폭등한 것이 아파트값이라 할 수 있다. 3월에 평당 40만원 선이던 아파트 분양가가 9월 들어 60만원을 돌파했다. 다른 공산품의 경우는 10% 이하로 가격을 인상하려 해도 정부의 심한 규제를 받는데 아파트의 경우는 분양가가 50% 가까이 올라도 별 신경을 안 쓰는 것 같다. 아파트값 안정은 경제적 측면에서 뿐 아니라 사회적 정치적 측면에서도 큰 비중을 갖는 만큼 정부는 여기에 좀더 신경을 쓰고 진지한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1977년 10월 11일 중앙일보 사설)

30년 전 일간지에 실렸던 신문 사설이지만 2007년에도 의미 있는 내용이다. 정부가 아파트 분양가의 일방적인 상승을 규제하는 민간아파트 분양가 상한제는 1977년 처음 실시됐다. 이 제도는 국회에 계류 중인 주택법 개정안이 통과되면 2007년 9월 다시 도입된다.

빈약한 재정으로 주택공급을 민간에 의존해야만 했던 정부는 주택건설을 촉진해야 할 때마다 분양가를 자율화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아파트가 전 국민의 주거형태로 각광받기 시작한 1970년대 중반 이후 분양가 자율화는 예외 없이 분양가 급등으로 이어졌다.

가격이 비싸지면 수요가 줄어들어야 하지만, 미리 분양하는 아파트에는 이 같은 시장원리가 작동하지 않는다. 만성적으로 공급이 부족한 상태에서 소비자는 고분양가 주택이라도 구입할 수밖에 없는 구조인 셈이다. 시중에 여유자금이 남아돌고 투기심리가 팽배한 상황이라면 이는 더욱 가속화된다. 1970년대 말이 그랬고, 2000년대 초도 그랬다. 이런 이유로 30년 동안 민간아파트 분양가가 자율화돼 있던 기간은 10년 정도에 불과했다.(1981년 6월~1982년 12월, 1999년 1월~2007년 9월)

분양가를 획일적으로 규제해도 부작용이 발생했다. 1980년대 중반 이후 획일적인 분양가 규제로 공급이 위축된 역사적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당시 정부는 물가안정이라는 정치적 목적을 위해 1983년에 정한 분양가를 1989년까지 유지했다. 같은 기간 물가상승률이 25.6%에 달했는데도 주택가격을 강하게 억누른 결과로 1980년대 말 부동산 대란이라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

1970년대 중반 이후 분양가 자율화는 예외없이 분양가 급등으로 이어졌다. 사진은 한 주상복합 모델하우스에 몰린 청약인파

건설사의 폭리를 막아라 - 규제의 시작

분양가 우여곡절의 역사는 1977년 시작됐다. 1977년은 중동특수로 수출이 100억 달러를 달성하고 경상수지가 1965년 이래 12년 만에 흑자를 기록한 해였다. 시중에 넘치는 부동자금은 부동산에 몰렸다. 평당 10만원을 호가하는 프리미엄을 노린 투기꾼이 몰려 124대 1이라는 치열한 경쟁률을 보였고, 어떤 투기꾼은 엄청난 거액인 2억원을 내어 서민용 아파트 100가구분을 분양 신청해 사회적인 지탄을 받기도 했다.

민간아파트 분양가는 아파트 투기붐을 편승해 급등함으로써 실수요자의 공분을 자아냈다. 아파트 분양가가 급등세를 보이기 전인 1977년 4월 이미 민간아파트의 분양가는 공공 부문의 아파트보다 비쌌다. 민간아파트 분양가는 지방자치단체가 짓는 아파트보다 80~100%, 주택공사 아파트보다 40%, 한국감정원의 평가보다 100~150%나 높았다. 같은 해 9월 민간아파트 분양가는 5개월 전보다 무려 30~60% 상승한 것으로 드러났다. 자연히 아파트 분양가를 규제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졌다.

분양가 규제 도입을 알리는 1977년 10월 30일자 조선일보
당시 건설부 주택정책과는 분양가를 안정시킬 대책을 마련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당시 주택정책 계장이었던 김종만 씨의 증언이다.

“주택정책과 직원 5명은 김재익 경제기획원 기획국장과 함께 다양한 정책을 고려했습니다. 업체마다 다른 분양가를 내놓지 못하도록 외장재 없이 기본 구조만 만들어 분양하는 ‘코어제’도 고려했습니다만 반응이 좋지 않아 접었습니다.

당시 공공자금으로 짓는 아파트의 분양가는 1963년부터 최고가격으로 묶어 규제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를 민간아파트로 확대하기로 했습니다. 상한제의 기준은 월급쟁이가 5~7년 정도 벌어 마련할 수 있는 금액으로 했죠. 또한 아파트의 분양가를 통제하면 비싼 토지에 대한 민간 건설업자의 수요를 억제, 토지가격도 내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시는 시대가 시대인지라 건설업체는 정부의 방침에 저항하지 못했습니다.”

1980년초 불황, 주택사업부서 해체

1970년대 말~1980년대 초는 불황기였다. 원유 파동과 수출 감소 등으로 인한 경기침체의 그늘이 짙게 드리운 시절이었다. 여기에 1978년 8·8 부동산종합대책이 겹쳐 주택경기는 침체일로를 겪었고 미분양 아파트도 속출했다. 1981년에는 2~3년 전에 건설된 아파트 등 2000여 가구가 미분양 상태로 남아있을 정도였다. 1980년 미분양에 고민하던 한 건설업체는 아파트를 할부로 판매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건설업체들은 앞 다투어 주택사업 전담부서를 해체했다. 1981년엔 건설업체 54개 업체 중 19곳이 주택사업 전담부서를 없앴다. 부동산소개업소도 큰 타격을 받았다. 1980년 5월~8월까지 4개월 동안 서울시 부동산소개업소의 매매실적은 평균 2~3건 밖에 되지 않았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문을 닫은 업소가 속출했고 일부는 ‘부업’을 찾아나섰다. 금전대출을 알선하거나 가게 안에서 담배, 필름, 우표를 팔았다. 주택시장 경기 침체는 건축자재 시장 등 경제 전반에 영향을 미쳤다.

한신공영 쇼크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정부는 1981년 6월 주택경기 활성화 대책에 이어 민간아파트의 분양가를 자율화했다. 곧 아파트 분양가가 급상승했다. 이 때 이른바 ‘한신공영 충격’이 나타났다. 분양가 자율화 조치 이후 처음으로 아파트 분양을 실시한 한신공영은 분양가를 대폭 인상, 사회적인 논란을 야기했다.

당시 한신공영은 68평형 등의 아파트 분양가를 평당 138만원(전용면적 기준 179만원)으로 정했다. 이는 분양가 상한선에서 22%를 올린 수준이었다. 한신공영에 자극받은 다른 건설업체들도 분양가를 인상하면서 ‘분양가 인상 도미노’ 현상이 일어났다. 기존 아파트는 기존 아파트대로 가격이 오르기 시작했다.

‘행정권고’라는 가격통제

1981년 6월 시행된 분양가 자율화는 분양가 급등으로 이어져 사회적 논란이 뜨거웠다. 1981년 8월 13일자 조선일보
당시 언론은 분양가를 올리는 건설업체에 자제를 촉구했다. 분양가 자율화를 찬성했던 언론도 예외는 아니었다. “자율화가 된 이상 어느 특정 아파트가 얼마나 크고 얼마나 비싼들 시비를 걸 소지는 없어졌다. 그러나 70년대 후반 아파트 투기붐이라는 쓰라린 경험을 갖고 있는 우리는 이 1억원짜리 아파트에서 ‘솥뚜껑’을 보는 놀라움을 갖는다. 1억원짜리가 동반할지도 모르는 집값의 앙등과 이로 인한 파급효과 때문이다.”(조선일보 1981년 8월 13일)

사회적 비난이 비등하자 건설업체들은 모임을 갖고 자율적인 규제를 약속했다. 주택경기 활성화라는 목표를 갖고 있던 정부는 분양가 자율화 정책을 고수했다. 그러나 서울시는 건설사의 폭리와 물가에 대한 영향을 고려, 전용면적 25.7평 이상의 아파트에 대해서도 ‘행정권고’ 형식으로 실질적인 가격통제를 계속했다.

1982년은 주택경기가 냉온탕을 오간 해였다. 정부는 상반기까지 지속적으로 각종 주택수요 진작 조치를 취했다. 양도세 등 각종 세금을 낮추고 주택부금 금리를 인하했다. 5월에 이르자 주택경기가 점차 되살아났다.

퇴직금 2배 이상인 프리미엄

실질적인 분양가 통제가 이뤄지는 상황에서 시중에 돈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하자 시세차익을 노린 투기꾼이 모습을 드러냈다. 대표적인 예가 1982년 11월 초 문제가 된 ‘개포 프리미엄’ 사건. 복부인과 부동산업자의 결탁으로 이 지역의 아파트 값 8800만원에 프리미엄 4500만원이 붙었던 이 사건은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했다.

불과 4년 전 아파트 프리미엄이 400만원 정도였고 한 달 전 프리미엄이 1600만~1700만원가량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엄청난 급등세였다. 당시 일류회사 고참 부장이 15년 근무하고 받는 퇴직금이 2000만원 수준이었으니 서민의 허탈감은 대단했다.

1982년 11월 8일 오전 경제기획원 녹실에선 김준성 당시 경제부총리 주재로 부동산 투기에 대한 긴급대책회의가 열렸다. 전날인 일요일 저녁 관계 장관들에게 연락, 서둘러 소집된 회의였다. 회의는 1시간 반을 넘기며 상당한 진통을 겪었다. 일부 참석자들은 ‘부동산 경기가 또 꺼지면 3년은 간다’며 투기 억제보다 경기부양을 주장했다. ‘건설경기의 회복을 위해 어느 정도의 투기현상은 불가피하다’는 이야기가 나돌 정도로 당시로서는 경기부양이 우선과제였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 회의 이후 강력한 분양가 진정대책이 나왔다.

투기를 없애기 위해선 투기꾼이 노리는 분양가와 실거래가 사이의 차이를 줄이는 것이 중요했다. 분양가를 현실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설득력을 얻고 있었다. 그러나 정부는 물가안정을 최우선 목표로 삼고 있었다. 물가를 선도하는 역할을 하는 아파트 분양가를 자율화할 경우, 가격 급등으로 인한 물가 불안정이 우려됐다.


아파트 분양에 채권입찰제 도입

김종호 당시 건설부 장관은 1983년 1월 정부가 올해 물가안정을 최우선경제시책으로 삼고 각 업체가 물건값을 내리고 있는 마당에 아파트가격만 올릴 수 없다고 지적, 민간아파트에 대해서도 경영개선을 통해 인상요인을 최대한 흡수해 분양가를 억제하라고 지시했다. 이때부터 전용면적 25.7평 초과 민간아파트의 평당 분양가는 1982년 수준인 134만원으로 정해졌다.

분양가 통제를 이어가는 대신 보완책이 필요했다. 정부는 정인용 경제기획원 차관을 위원장으로 하는 부동산대책실무위원회를 구성, 대책수립에 나섰다. 여기서 결정된 것이 ‘분양가 실세화’ 방침. 이 기본 방향 속에서 여러 가지 대안을 놓고 고심하던 정부는 1983년 청약제도 강화와 함께 채권입찰제를 도입한다.

채권입찰제란 국민주택채권을 많이 사는 사람에게 원하는 아파트를 분양하는 제도다. 채권을 매입한 아파트 당첨자는 당장 싼 값에 채권을 팔아도 되고 20년이 지난 뒤 연이자 2%와 함께 되찾을 수 있었다. 전용면적 25.7평 초과 민간아파트에 대해 도입된 이 제도는 건설사의 폭리를 막는 한편 단기차익을 노리는 투기꾼도 막는다는 목표를 갖고 있었다.

1883년 4월 김종진 건설부 장관은 국회 건설위원회에 출석, 다음과 같이 말했다. “투기과열현상은 채권입찰제의 시행으로 완전 제거될 것으로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제도를 실시할 경우 장기적으로 투기요인을 제거함으로써 주택가격의 안정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전망하고 있습니다.”

평당 분양가 134만원의 교훈

원가가 상승하면 분양가도 올려야 했지만 물가안정을 절대명제로 삼고 있었던 정부는 분양가를 올리지 않았다. 1983년 분양가 134만원은 1980년대 후반에도 그대로였다. 부작용이 나타났다. 민간 건설업체는 채산성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수요가 많은 수도권에 아파트 건설을 기피했다. 당시 필요한 주택건설물량은 최소한 연간 35만호였지만 1984~1987년까지 매년 지어진 집은 22만호에 불과했다.

장기간에 걸친 획일적인 분양가 통제는 1980년대 말에 이르러 주택공급 위축으로 이어졌다. 1989년 1월 14일자 중앙일보
건설업체들은 분양가 상한제의 영향을 받지 않는 오피스텔, 조합주택 등에 주력하거나 땅값이 싼 지방으로 진출했다. 그 결과 1988년 5월 이후 7개월이 넘도록 서울 지역에는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민간아파트 분양이 없었다. 땅이 없었던 게 아니었다. 당시 71개 건설업체는 수도권에 46만4000평에 이르는 택지를 보유하고 있었다.

시중에는 돈이 넘쳤다. 1988년은 건국 이래 최초로 3년 연속 무역수지 흑자를 달성했고 연 10% 이상 가파른 경제성장을 거듭하고 있을 때였다. 국제부흥개발은행(IBRD) 등은 1인당 국민소득이 3000달러를 넘으면 주택수요가 늘어난다고 했는데 1988년은 막 3000달러를 넘긴 해였다.

당시 청와대 경제비서관이었던 홍철 씨의 말이다. “무역수지 흑자 등으로 시중에 유동성 자금이 부동산으로 몰렸습니다. 88 서울올림픽이 끝나고 나자 부동산이 들먹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분양가 현실화’라는 폭탄선언

1988년 12월 건설부장관에 취임한 박승 건설부 장관의 ‘폭탄선언’은 타오르는 부동산 경기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12월 12일 국장회의를 주재한 자리에서 박 장관은 “민간의 공급을 촉진하기 위해 분양가 자율화로 건설업자에게 집을 지을 유인을 제공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당시 아파트의 평당 비용은 평당 분양가를 넘어선 상태였습니다. 적정이윤을 보장해야 공급이 늘어납니다. 그래서 분양가를 현실화하자고 했습니다.” 박 장관의 회고다.

이 발언은 부처 간 협의를 거치지 않은 박 장관만의 생각이었다. 당시 건설부 주택정책과장이었던 이동성 씨는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주택문제로 외부 회의에서 돌아오니 기자들이 몰려왔습니다. 장관이 분양가 현실화 발언을 했는데 내용을 알려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도 사전에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던 터라 놀랐습니다.”

‘하늘은 두 쪽 나지 않았다’

당시 박 장관은 “하늘이 두 쪽 나도 추진하겠다”고 장담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박 장관은 간부회의 뒤 조순 경제기획원 장관을 찾아가 분양가 자율화에 대한 동의를 얻었지만 청와대의 반대에 부딪쳤다. 반대의 중심에는 문희갑 청와대 경제수석이 있었다. 원칙에는 동의하지만 주택금융제도나 토지 공급 등을 완비하지 않은 상황에서는 시기상조라는 이유였다.

박 장관은 1989년 4월 노태우 대통령을 찾아가 직접 분양가를 현실화해야 한다고 건의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박 장관은 비서실장을 통해 사직서를 제출했고 사표는 7월 받아들여졌다. 박 장관의 퇴진을 두고 세간에는 문책성 인사로 알려졌다.

“공산주의 세상이 더 낫다” ?

정부는 박 장관의 발언 직후 분양가 자율화 방안을 공식 부인했으나 발언의 파장은 컸다. 신규아파트 가격상승에 대한 기대감으로 기존 아파트 값까지 급등했다. 1989년 4월 서울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일부 평형은 평당 1000만원대를 넘어섰다. 자고 일어나면 ‘1000만원이 올랐다’는 말이 나돌았다.

문희갑 당시 청와대 경제수석은 주택문제가 체제를 위협할 정도였다고 회고한 바 있다. “수요는 공급을 상회했습니다. 소득이 늘자 주택수요는 더욱 늘었고 투기까지 겹쳐 값이 올랐습니다. 당시로서는 체제 붕괴 위협으로 인식될 정도였습니다. 이 때문에 주택 200만호 건설을 추진하기로 하고 신도시를 물색한 것이지요.”('실록 6공 경제'-중앙일보사)

당시 한 신문에 등장한 택시기사의 말은 여론을 잘 보여준다. “가만히 앉아서 부동산 투기로 하루에 수백만원씩, 아니 수억원씩 벌어서 챙겨먹는 주부들과 부동산 투기자들이 망해서 죽어가는 꼴을 보고 난 뒤에야 내가 발 뻗고 죽을 겁니다. 차라리 이렇게 사느니 공산주의 세상이 더 나은 게 아니겠습니까.”(국민일보 1989년 5월 11일자)

건설업계의 위협, 평당 197만원

아파트 분양가 현실화를 요구하는 민간 건설업체의 목소리를 전하는 1989년 10월 12일자 조선일보
주택공급을 늘려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 처해 있었던 정부는 분당과 일산 등 신도시 건설을 추진했다. 민간 건설업체는 정부의 이런 점을 이용, 지속적으로 분양가 인상을 요구했다. 분당신도시 시범단지 분양을 코앞에 둔 1989년 10월 12일 민간 건설업체는 ‘아파트 분양가 현실화가 이뤄지지 않는다면 민간 건설업체의 적극적인 분당개발계획 참여가 사실상 이뤄지기 힘들 것’이라며 정부를 은근히 위협할 정도였다.

정부도 업계의 요구를 마냥 묵살할 상황이 아니었다. 정부는 분양가를 어느 정도 현실화시키면서 지나친 가격 상승은 막는 원가연동제를 도입했다. 처음으로 원가연동제를 적용받아 공급된 서울 쌍문동 한양아파트는 평당 197만원으로 분양됐다.

원가 계산 불가능한 ‘원가연동제’

원가연동제란 아파트 분양가를 택지비와 건축비 등 원가에 연동시켜 정부가 통제하는 제도를 말한다. 분양가 상한을 정부가 직접 규제하는 것보다는 완화된 제도이기는 하지만 가격을 통제한다는 점에서는 여전히 규제 중심 정책이었다. 1990년대는 표준건축비 인상을 둘러싸고 거의 매년 정부와 업계 간 갈등이 반복했다. 표준건축비의 비현실성 등이 이유였다.

당시 주택국장이었던 이동성 씨의 말이다. “김대영 건설부 차관이 취임했을 때, 표준건축비를 인상해달라는 요구가 빗발치자 김 차관이 가격 현실화를 검토해보라고 했습니다. 건설업체쪽 사람들이 찾아왔길래, ‘분양 원가를 계산해서 가지고 오라’고 하자 만세를 부르며 돌아가더군요. 하지만 약속시간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결국 새벽 2시가 되어 빈손으로 나타났습니다. 하도급 등으로 분양원가를 계산하기가 불가능하다는 이유였습니다.”

건설업체를 살려라 - 분양가 완전 자율화

상황은 1990년대 중반 도산하는 건설업체가 등장하면서 조금씩 바뀐다. 삼익과 우성 등 1980년대를 풍미했던 건설업체들이 하나둘 쓰러지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는 하도급 업체를 포함, 2만여개 업체에 200여 만명의 근로자가 생계를 꾸려가는 주택건설업계의 위기를 외면할 수 없었다. 정부는 단계적으로 아파트 분양가를 자율화하기 시작했다.

단계적으로 자율화로 대체되던 원가연동제는 IMF 외환위기 당시 일자리 공급을 위해 추진된 주택경기 부양 정책 중 하나로 완전 자율화된다. 당시 건설부 주택정책과장이었던 이춘희(현 건교부 차관)씨의 말이다. “IMF 외환위기 당시 공식실업자만 200만 명에 육박했습니다. 그중 건설 부분 실업자가 100만명에 달했습니다. 주택경기를 살려 일자리를 만들어주는 것이 급선무였습니다.”

1998년 주택경기를 살리기 위해 취해진 수도권 분양가 자율화는 또다시 분양가 급등으로 이어졌다. ‘고분양가 → 주변 집값 상승 → 이를 바탕으로 한 고분양가’의 연쇄반응이 나타났다. 수도권 아파트 분양가 자율화가 시작된 이후 서울 지역 아파트 평균 분양가는 1998년 512만원에서 2006년 1546만원으로 급상승했다. 8년 만에 세 배 이상 늘어난 셈이다. 아파트 평당 분양가 최고액은 1999년 6월 1072만원을 거쳐 2006년 3250만원에 달했다. 2007년 1월 현재 분양가 최고액은 평당 3395만원으로 2006년 기록을 갱신했다. 분양가 규제의 목소리가 다시 힘을 얻기 시작했다.


다시 원점으로 - 분양가 규제

분양가 규제의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한 것은 2002년. 언론은 연일 분양가 상승 문제를 다뤘다. 2002년 4월 서울시는 아파트 분양가를 과다 책정할 경우, 이를 국세청에 통보하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정부는 “아파트 분양가는 자율적인 것으로 규제할 사항이 아니다”라는 입장을 보였다. 아파트 분양가는 점점 올라갔다.

정부의 이러한 기조는 참여정부 초반에도 이어졌다. 2003년 10월 29일 ‘주택시장 안정을 위한 종합대책(10·29대책)’을 내놓은 김진표 당시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은 TV에 출연, “분양가 규제는 정부 내에서도 논란이 있었지만 주택공급 위축으로 이어질 수 있고 과거 경험으로 봤을 때 여러 부작용이 있어 이번 종합대책에 포함시키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남의 치마 속”

2004년 2월 서울시 도시개발공사(현 SH공사)가 분양원가 구성내역을 밝히자 분양가 논란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분양원가를 공개하라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당시 발표에 따르면 2003년 11월 분양한 서울 상암단지 40평형의 수익률은 39.2%(3백10억원)였다.

2004년 2월 9일 오전 세종로 정부종합청사 앞에서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회원들이 기자회견을 갖고 아파트 분양원가 공개를 촉구하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열린우리당이 분양원가 공개를 총선공약으로 내세우면서 논란은 이어졌다. 당시 건교부 내에선 “남의 치마 속은 왜 보려고 하느냐”는 이야기가 돌 정도로 분양원가 공개에 회의적이었다.

분양가 공개, 국민들이 바랍니다

그러나 열린우리당은 건설교통부와 논의 끝에 ‘공공택지 내 아파트 분양가 상한제(원가연동제) 및 주요항목 부분공개’라는 결과물을 내놓는다. 2005년 3월 공공택지 내 소형아파트에 분양가 상한제가 도입됐고, 이듬해 2월에는 공공택지 내 중대형 아파트로 확대됐다.

당시 주택국장이었던 권도엽 전 건교부 정책홍보관리실장의 증언이다. “당시 분양원가를 공개하라는 목소리가 높았습니다. 주장의 중심은 높은 분양가를 낮추라는 것이었죠. 하지만 원가공개를 한다고 해서 반드시 분양가가 떨어진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그래서 분양가상한제를 도입하기로 했습니다. 대신 분양가를 충분한 수준으로 책정하고 물가에 연동시켰습니다. 과거 분양가상한제가 도입됐을 때 분양가를 올려주지 않아 건설사가 아파트 건설을 기피했던 점을 고려했던 것입니다. 당시 분양원가 공개 문제는 경제적인 문제에서 정치적인 문제로 변한 상태라는 의견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주요 항목에 대해 원가공개를 하게 됐습니다.”

계속된 논란에 당정 모두 부담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판교 신도시 분양과 은평 뉴타운 분양 논란이 이어지면서 고분양가 시비는 다시 불붙었다. 민간아파트에 대한 분양가공개 요구 목소리가 높아졌다. 노무현 대통령은 2006년 9월 28일 방송에 출연, “제가 (예전에는) ‘신중하자’며 원가공개에 대해 반대의견을 표명했는데 지금은 국민들이 제 생각과 달리 모두 공개하는 것이 좋겠다고 바라니까 그 방향으로 가야 되지 않겠느냐”고 밝혔다.

2007년 1월 11일 오전 국회에서 정부와 열린우리당은 김근태 의장과 강봉균 정책위의장, 한명숙 총리, 권오규 경제부총리, 이용섭 건교부 장관 등이 참석한 가운데 당정협의를 열고 민간아파트 분양 원가를 수도권, 지방의 투기과열지구에 한해 공개하기로 했다. 2006년 12월 22일 민간아파트에 대한 분양가 상한제를 도입하기로 결정한 상황에서 나온 합의였다.

정부측에서는 전반적인 주택가격 안정에 분양가 상한제가 적합하다는 판단 아래, 분양원가 공개는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선분양제인 현재 상황에서 원가를 정확하게 계산하기 어렵고 분쟁 등 부작용이 우려된다는 까닭에서였다. 반면 열린우리당은 지속적으로 분양원가 공개를 요구해왔다. 원가 공개를 하지 않는다면 도입하기로 한 분양가 상한제의 실효성이 퇴색한다는 주장이었다.

당정은 모두 부담을 갖고 있었다. 2006년부터 계속된 논란으로 부동산 시장에 혼란을 초래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조정 끝에 전체 민간아파트 대신 수도권 및 투기 과열지구에 한해 분양원가 일부를 공개한다는 접점을 찾았다. 권 부총리는 이날 “분양원가를 공개해야 한다는 요구와 분양원가 공개가 공급을 위축시켜 공급을 위축시켜 시장불안을 가중한다는 우려를 종합적으로 고려해 합리적인 수준에서 민간택지 내 분양원가 공개 방안을 마련했다”고 설명했다.

2007년 3월 2일 국회 건교위에서 조일현 위원장이 민간택지 분양가 내역 공개와 분양가 상한제 도입을 골자로 하는 주택법 개정안을 통과시키고 있다.

이 같은 내용을 골자로 하는 주택법 개정안은 국회에 제출됐으나 2007년 3월 2일 국회 건교위에서 수정됐다. 논란이 된 부분은 분양원가 공개의 범위. 원안은 ‘수도권 및 투기과열지구’에 적용하도록 규정했으나, 수정안은 ‘수도권 등 대통령이 정하는 지역’에 한해 공개하기로 했다. 또한 분양원가공개라는 이름 대신 ‘분양가내역 공시제’를 사용하기로 했다. 수정안은 2007년 3월 현재 국회 본회의를 앞두고 법제사법위원회에 계류 중이다.

분양가 규제 역사의 교훈 “아파트는 다른 상품이다”

분양가의 역사는 획일적 규제와 자율화가 가져온 부작용을 여실히 보여준다. 가격 안정을 위해 분양가를 획일적으로 규제하면 공급이 줄어드는 한편 시세차익을 노린 투기꾼이 몰려들어 가격이 올라갔다. 반면 공급을 늘리기 위해 분양가를 자율화하면 분양가 급상승, 그리고 전반적인 집값 상승을 가져왔다.

1981년 분양가 자율화가 문제됐을 때 동아일보는 8월13일자 사설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자율화 뒤 분양가가 급등하는) 시점에서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은 문제된 아파트 분양가의 적정 수준 여부에 대한 면밀한 분석이다. 아파트는 시장의 수급에 따라 적정 가격이 결정되는 다른 상품과는 다르다. 분양가가 지나치게 높게 책정되는 것을 경계하면서 한편으론 자율화가 노린 장점을 최대한 살려나가도록 유도해가기 바란다.”
주택 공급에 민간의 손을 빌려야 하는 구조적 상황 속에서 정부는 ‘값싼 주택 공급 촉진’이라는 난제에 여전히 고민하고 있다.

 
 ⑭ 실수요자에게 혜택을-주택청약제도의 변천 2007-03-15 09:04:33

‘운 좋으면 주택뽑기 당첨’ 30년
실수요자에게 혜택을-주택청약제도의 변천

 

2005년 7월 막 부임한 강팔문 건설교통부 주택국장(현 익산지방국토관리청장)은 주택국 회의에서 30년간 이어졌던 주택청약제도의 근간을 뒤흔드는 제안을 내놓았다. “주택청약제도에서 운에 기초한 추첨방식은 문제가 있다. 개선해야 한다. 방법은 잘 모르겠지만 전문기관에 용역을 맡겨보자.”
강 국장의 이야기다. “우리 안에서도 문제의식이 많았습니다. 가입한 지 2년만 지나면 모두 같은 자격을 얻어 누가 더 필요하냐를 따지지 않고 추첨하는 것이 맞느냐는 논의가 많았습니다. 특히 저는 추첨 방식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건교부의 이런 고민은 한 달 뒤 발표된 ‘8.31 정책’에 한줄 포함됐다. ‘무주택 기간, 자산, 소득, 가구현황 등을 감안해 청약우선순위를 조정한다’는 간략한 내용이었다. 이어 건교부의 용역의뢰를 받은 주택산업연구원이 ‘청약가점제’를 대안으로 내놓으면서 내용은 구체화됐다. 1980년대 한 때 건설부 내에서 논의된 적이 있지만 개인 소득 파악이 어렵다는 이유로 도입이 미뤄졌던 청약가점제는 이렇게 다시 수면 위로 부상했다.

“운에 기초한 추첨방식 개선해야”

청약가점제란 청약자격을 점수로 환산, 청약가점이 높은 사람에게 주택을 우선 공급하는 것을 말한다. 가점 항목에는 세대주 연령, 부양가족수, 무주택기간, 청약통장 가입기간 등이 가점 항목이다. 그러나 청약가점제 대안은 환영받지 못했다. 기존 청약통장 가입자 등의 반발을 예상한 열린우리당에서 반대했고, 언론의 비판이 이어지자 청와대에서도 부담을 느꼈다.

분위기는 2006년에 들어서면서 반전됐다. 고분양가를 억제하기 위해 분양가상한제 및 분양원가 도입이 검토되면서 ‘무주택 실수요자들에게 주택을 우선 공급해야 한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됐기 때문이다.

민간택지 아파트까지 분양가상한제를 도입하면 분양가가 낮아지고, 실거래가와 분양가의 차익을 노리는 투기꾼이 몰릴 가능성이 높아진다. 기존 추첨제대로 ‘청약전쟁’이 벌어진다면 당첨기회가 낮아져 실수요자에게 값싼 아파트는 ‘그림의 떡’이 될 수 있다. 실수요자에게 값싼 아파트를 공급하자는 분양가상한제의 취지가 무색해지는 셈이다.

이에 2007년 1월 11일 정부와 열린우리당은 30년간 이어졌던 기존 청약제 대신 청약가점제를 2007년 9월 도입하기로 합의했다. ‘추첨식’ 주택청약제도가 도입된지 30년 만에 대 변화를 맞이한 것이다.

기존 청약제도의 추첨제는 누구나 분양시장에 뛰어들 수 있다는 한계를 갖고 있었다. 2004년 3월 23일 서울 용산 시티파크 주상복합아파트에 청약접수가 시작되자 접수객들이 길게 장사진을 이루고 있다.


추첨제, 건설자금 조달 기여·가수요 유발 부작용

아파트 청약제도는 투기가 횡행했던 1977년, 공공 부문 아파트 분양방법에 구체적인 규정을 마련하면서 시작됐다. 청약관련 저축으로 민간자본을 주택건설 자금으로 끌어들여야 했던 정부는 다수가 청약제도에 가입하도록 유도하기 위해 ‘추첨제’라는 방식을 도입했다.

청약관련 통장의 가입자가 많아야 건설재원이 늘고 분양시장도 활발해져 주택건설이 촉진되기 때문이다. 주택공급을 민간에 상당 부분 의존하는 상황에서 청약제도를 통해 공급 물량을 실수요자에게 분배한다는 목적도 실현하고자 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기존 청약제도는 주택이 절실히 필요한 이들에게 적시에 '새 집'을 공급하지 못했다. 추첨제라는 방식의 한계 때문에 신청자들은 운이 좋아야 주택을 분양받을 수 있었고, 누구나 분양시장에 뛰어들면서 사실상 가수요자들을 끌어들였다. 지난 30년 동안 정부가 투기적 가수요를 없애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지만 근본적 성공을 거두지 못한 또하나의 이유이기도 하다.

선착순 분양 아파트

1977년까지만 해도 아파트 분양은 공공자금으로 짓는 아파트에 한해 ‘공모’한다는 두루뭉술한 내용으로 돼 있었다. 당시 아파트 분양에는 선착순이나 번호표 추첨 등의 방법이 주로 이용됐는데 문제가 많았다. 수많은 사람이 몰려가 북새통을 이루거나 번호를 조작하는 사건까지 발생했다.

아파트 수요가 급증한 1970년대 중반 이후 이른바 ‘투기부인'이 등장하면서 강남과 여의도 지역에 본격적인 아파트 투기가 발생했다. 아파트 경기는 1977년 초부터 되살아나기 시작해 3월쯤에 이르자 극심한 과열 양상으로 치달았다. 투기꾼은 공공, 민영아파트를 가리지 않고 몰려들었는데 이들의 투기행태는 연일 신문 사회면을 장식했다.

1명의 투기꾼이 100가구 신청도

1977년 3월 15일 서울 여의도 목화아파트 분양에 몰린 투기꾼을 다룬 1977년 3월 16일자 조선일보.

대표적인 것이 1977년 3월 15일 서울 여의도 목화아파트 분양. 이날 모델하우스 옆 공개추첨 현장에는 신청자 4000여 명이 몰려 희비가 엇갈렸다. 이들 중에는 ‘10가구를 신청했는데 하나도 안됐다’고 아쉬워하는 사람, ‘하나를 신청한 사람은 볼 것도 없다’며 발걸음을 돌리는 사람도 있었다.

한 투기꾼은 현금 2억원을 동원해 100가구를 신청해 주변 사람을 놀라게 했다. 당시 제조업 근로자 86.8%가 5만원 이하의 월급을 받았고 쇠고기 한 근의 가격이 1700원 가량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엄청난 거액이었다.

주택공사 등이 건설하는 공공부문 아파트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4월 초 신청을 접수한 서울 화곡동 주공아파트는 평형에 따라 96대 1에서 178대 1의 경쟁률을 보였다. 경쟁률이 높아지자 주공은 투기꾼의 가수요를 막기 위해 신청자마다 주민등록증을 확인, 2중 신청하지 못하도록 했다.

그러나 투기꾼이 집 없는 사람을 동원해 10여 개 이상 신청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처럼 한 사람이 여러 가구를 신청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문제였다. 그럴수록 실수요자가 분양받을 확률은 떨어지기 때문이다.

공공주택 청약 1순위제 도입

연일 언론에서 아파트 투기와 관련, 관련 제도를 정비해 실수요자에게 아파트를 공급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청와대의 기침소리에 전국이 놀라던 시절이었다. 급기야 건설부는 1977년 4월 공공아파트의 분양방법을 내놓는다.

가족이 있는 무주택 세대주에게 ‘국민주택청약부금’ 가입자격을 주고 한달에 한번씩 6회 이상 넣어 50만원 이상이 된 사람을 아파트 청약 1순위로 정한다는 게 주된 내용이었다. 부금에 가입할 때 가옥대장과 주민등록등본을 확인, 무주택자만 가입하도록 했다.

청약부금 가입자에 공공주택 분양 우선순위를 주는 청약제도 실시를 알리는 1977년 4월 22일자 경향신문.

그러나 민영아파트는 여전히 투기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신동식 당시 건설부장관은 1977년 6월 29일 국회 건설위원회에 출석해 민영아파트 투기 대책을 묻는 신민당 양해준 의원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일종의 궁여지책이랄까 기본적인 문제의 해결을 하려고 하고 있습니다만 아직 결론이 안나옵니다. 아직도 검토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의 방법으로 주민등록등본을 제시하게 했습니다. 세무조사의 근거로 남긴다면 전매 등의 투기는 상당히 억제될 수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분양 직후 팔아넘기는 아파트

10월 초 국회 본회의에 출석한 신 장관은 청약제도를 민영아파트에도 확대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공공자금을 쓰는 민영아파트 혹은 주택공사의 아파트에 대해서는 주민등록등본과 가옥대장 등을 확인하고 이를 KIST에 의뢰, 컴퓨터로 처리해 중복추첨을 방지하는 방법을 강구하고 있습니다.
단 이것은 공공자금을 쓰고 있는 민영주택업자나 주공에 한하고 있기 때문에 (이외의) 민영아파트 문제는 주택건설촉진법을 개정한다면 강력히 규제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이듬해 2월 청약제도는 민영아파트로 확대된다. 1세대 1구좌를 원칙으로 국민주택청약부금 및 청약예금에 가입해 일정기간 일정액을 납입하면 1순위를 준다는 취지였다. 한번 당첨된 사람은 3년간 다시 당첨될 수 없도록 주택은행 컴퓨터센터를 통해 서울 지역의 아파트 추첨을 실시한다는 내용도 포함됐다.

하지만 민영아파트 부분에는 전매 금지 조항도 없었고 무주택자에 한한다는 조항도 없었다. 청약자를 줄 세워 가수요자를 배제하는 등 투기를 막을 수 있다는 점은 긍정적이었지만 오히려 돈 있는 이들에게 먼저 분양기회가 돌아간다는 비판을 받았다.

당시 건설부 주택정책계장이었던 김종만 씨의 회상이다. “세상이 시끄러웠습니다. 장관 이하 주택국장, 과장, 사무관까지 이 문제에 매달렸습니다. 청약제도는 투기를 없애기 위해 만든 ‘줄 세우기’였습니다.
그런데 공공 부문을 규제하자 민영아파트가 난리였습니다. 그래서 민영 부문으로 확대했습니다. 하지만 너무 규제하면 민간 건설사의 공급량이 줄어들 우려가 있어 전매 금지 등의 강력한 규제는 포함하지 않았습니다. 그 시절 아파트 투기는 강남과 여의도 등 서울 일부 지역의 이야기였습니다. 우리나라 국민이 그렇게까지 투기에 발 벗고 나설 줄은 몰랐습니다.”

부동산 경기 나쁘자 전매금지 완화

청약제도는 투기를 근본적으로 막을 수 없었다. 아파트 투기는 1978년 8월 8일 강력한 부동산 진정대책으로 잦아들었다가 1982년 금리인하 등 정부의 경기부양책으로 조금씩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김종호 당시 건설부 장관은 1982년 11월 11일 국회 건설위원회에 출석, 아파트 투기와 관련해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제가 1월 4일 장관으로 취임한 뒤에 가장 큰 문제가 미분양 아파트였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1만4000호에 달하는 미분양 아파트를 빨리 분양시키느냐 하는 문제에 솔직히 많은 역점을 두었습니다. 공공부문 아파트 전매금지 기간을 1년에서 6개월로 줄이고 금리를 인하하고 양도세 등 세금을 낮췄습니다.”

1982년 6월과 8월 사이에 있었던 주공의 과천 2·3차 분양과 개포 3차 분양부터 시작된 투기과열은 10월 경남아파트 분양부터 극성을 부리기 시작했다. 11월 우성아파트 분양은 그 중의 백미였다.

김 장관의 국회보고. “지난 9월부터 이상 징후가 보여 경제장관회의를 열었으나, 모처럼 부양된 주택경기 특히 아파트경기를 죽일 수는 없다는 여론이 있어 좀더 관망하게 됐습니다. ‘좀더 과감한 조치를 했으면 이렇게 안됐을 텐데 왜 우물쭈물하고 미지근하게 엄포만 해서 이렇게 됐느냐’는 비난을 받습니다만 모든 국내경기의 최선봉인 주택경기가 한번 불이 꺼지면 3년 내에 불을 켜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어려움을 참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공공아파트도 절반이 전매

공공 자금으로 민간건설사, 주공 등이 지은 공공부문 아파트는 법으로 전매가 일정 기간 제한된 상황이었다. 그런데 조사를 해보니 과천, 개포 지구 주공아파트 5880세대 중 절반가량에 다른 사람이 들어가 있었다고 한다.

김 장관의 보고는 이어진다. “이것을 몰랐느냐 주공에 추궁하니 ‘어떻게 하면 분양을 많이 시킬까’에 정신을 쏟았고 여러 가지 권한에 제약이 있다고 했습니다. 예를 들어 홍길동이 분양을 받아 입주하는 날 전매자와 함께 와서 주공 직원에게 주민등록증을 보여주고 등록까지 시켜놓습니다. 그런 뒤 전매자에게 웃돈을 받고 열쇠를 넘깁니다.
하루 200~300호가 입주하는 상황에서 제한된 인원으로 모조리 확인할 수도 없고 수사권도 없어 이를 일일이 색출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0순위 청약통장의 등장

불법전매는 주로 청약통장 거래로 이루어졌다. 이로 인해 종종 황당한 사건도 발생했다. 서울에 살던 이모(당시 64세)씨는 1981년 친구 소개로 알게 된 김모(당시 31세)씨에게 20만원을 받고 청약저축통장 가입명의를 빌려줬다. 김 씨는 매달 10만원씩 28회 납부했다가 통장을 다른 이에게 넘겼다. 수차례 전매를 거친 끝에 최종 소지자가 1983년 7월 서울 강동구 고덕동 주공아파트에 당첨됐다.
그런데 중도금과 잔금이 들어오지 않았다. 주공은 통장명의자인 이 씨를 찾아 중도금 등을 독촉했다. 이 씨는 배짱 좋게도 자신이 잔금을 치르고 아파트에 입주했다. 그 뒤 통장의 최종소지자가 나타나 ‘집을 내놓으라’고 요구하자 이씨는 “명의를 빌렸던 김 씨가 자신을 속였다”며 허위 고소를 했다. 결국 이 씨는 무고혐의로 구속됐다.

전매 제한 조항이 없었던 민영아파트에 대한 투기는 더욱 극심했다. 투기세력은 ‘0순위’ 통장으로 몰려들었다. 0순위란 1978년 정부가 민영아파트 청약예금 가입자 중 6회 이상 떨어진 장기낙첨자에게 우선당첨권을 주었던 것을 말한다. 민영아파트 청약제는 일정 금액 예치 뒤 3개월이 지나면 누구나 같은 청약기회를 줬다.

이 때문에 극심한 경쟁률을 보였고 ‘억세게 재수 없는 예금가입자’가 등장했다. 반면 공공부문 아파트 청약자는 분기별로 구분돼 우선권을 인정받고 있었다. 0순위 제도는 행정상의 미비를 보완하고 투기를 진정시킨다는 목적으로 도입됐지만 1982년 오히려 투기세력에 악용됐다.

우성아파트 0순위 프리미엄 4500만원

서울 강남지역 개포동에서 발생한 투기를 심층 보도한 1982년 11월 6일자 중앙일보.

통장 거래는 전매 과정이 간단하고 세무조사 등 사후처리에도 별 문제가 없었다. 이런 장점 때문에 투기꾼은 통장거래를 선호했다. 우성아파트 분양일인 1982년 11월 4일을 앞두고 0순위 통장에 프리미엄이 천정부지로 붙기 시작했다. 불과 보름 사이에 통장 가격은 4~5배로 뛰었고 당첨된 통장은 최고 4500만원을 호가했다.

이듬해 청약제도는 대폭 강화된다. 공공부문 아파트의 경우 입주관리가 시작됐다. 입주할 때 당첨자와 계약자, 최초입주자가 동일한지 확인하고 입주 뒤에는 전매금지 기간 동안 일년에 4번 입주자 실태를 조사해 위반자는 퇴거하도록 했다. 재당첨 금지 기간도 5년으로 늘어났다.

민영아파트에 대해선 투기를 진정시키기 위해 실거래가와 분양가의 차이가 심한 지역의 경우 채권입찰제를 도입했다. 채권금액이 높을수록 분양아파트에 프리미엄이 적게 붙게 되고 결국 차액을 노린 전매 행위가 줄어들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0순위 제도는 폐지했다.

“기자분들이 0순위 피해자”

0순위 제도는 폐지했지만 기존 가입자의 기득권 문제가 남았다. 1983년 2월 28일 국회 건설위원회에서 무소속 조형부 의원은 “이발사에 목을 내밀고 운전사에 생명을 맡기듯 정부 정책을 믿는 단 한 사람의 선의의 피해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해라”고 요구했다.

민한당의 김형래 의원도 대책을 촉구했다. “국회를 출입하는 기자분이 민한당의 경우 약 30여 명입니다. 그 중에서 약 다섯명 가량이 선의의 0순위자입니다. 쟁쟁한 매스컴의 정치부기자들이 지금까지 0순위를 활용 못했을 때 일반 소시민들의 심정이야 오죽하겠습니까. 주택정책을 보도하는 기자들부터가 피해자올시다.”

정부는 1983년 9월까지 경과조치를 뒀다. 거래가 여전히 발생하자, 거래를 막기 위해 국세청은 0순위 통장 소지자에 대해 조사를 실시했다. 그러자 자신의 통장을 갖고 있는 마지막 매입자를 찾으려는 사람이 늘어났다. 10번 이상 전매된 경우도 있어 판매자와 마지막 소지자 간에 연락이 닿기가 쉽지 않았다. ‘통장을 돌려달라’는 부탁을 거절하는 이들도 있어 판매자는 자신이 받았던 프리미엄에 웃돈을 얹어 되사기도 했다.

당첨 발표 20분 만에 “자 매물 나왔습니다”

부동산 투기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중앙일보 1984년 4월 26일자는 서울 가락동 현대아파트 모델하우스 앞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발표를 보러온 300여 명의 인파를 비집고 10여 명의 투기꾼들이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자 매물 나왔습니다. 매물. 48평, 59평 매물 나왔어요.” 당첨자 발표가 나온 지 불과 20분 만이었다.
이들은 청약에서 떨어진 이들의 전화번호를 현장에서 확보, 전화를 돌리기도 했다. “500~700만원의 프리미엄만 부담하면 됩니다. 손님이 불편하지 않도록 세금관계나 명의이전도 깨끗하게 해드립니다”라고 호언장담했다.’

정부는 갖가지 노력을 펼쳤다. 건설부는 1984년 청약제도를 강화, 재당첨 금지기간을 늘렸고 청약통장 전매를 금지했다. 무주택자 위장을 막기 위해 무주택 기간이 1년 이상인 사람에게만 청약저축 가입자격을 부여했다. 또한 전용면적 18평 이하 공공부문 아파트를 분양할 때 3년 이상 무주택자에게 우선순위를 주었다.

민영아파트 부분도 건설부는 많은 돈을 예치한 사람이 작은 평수까지 청약할 수 없도록 해 적은 돈을 예치한 서민의 기회를 보장했다. 다른 정부 부처도 투기와의 싸움에 동참했다. 국세청은 거의 매년 아파트당첨권 전매자에 대한 추적조사를 강화, 전매자에 강도 높은 세금을 매겼다. 법무부는 전국의 공증인에게 불법 전매에 이용되던 공증을 하지 말도록 지시했다.

주택청약 가입자 192만명

1990년 7월 6일 국회 건설위에서 민자당 황대봉 의원은 정부의 주택정책을 비난했다. “지난 1988년 말 주택청약저축·예금에 가입한 인원이 83만명이던 것이 1990년 2월말 192만명으로 늘어 아파트 분양 당첨의 날만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중 청약저축 가입자만 해도 117만여 명이며 가입한 지 8년이 넘는 사람이 2600여 명이고 10년 이상 된 사람도 46명이 있습니다.”

이에 대해 권영각 당시 건설부장관은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전국의 청약저축가입자수는 올해 6월말 현재 125만명으로 추산하고 있습니다. 1992년까지 이들에게 전부 공급하는 것은 재원과 택지, 기술 등의 한계로 사실상 어려운 실정입니다.
그러나 정부는 청약저축 1순위자가 소형 민영주택 분양을 받을 수 있도록 제도를 개선했습니다. 아울러 200만호 주택건설이 끝나면 청약저축가입자에게 보다 많은 주택을 공급할 수 있도록 계획에 충분히 반영하겠습니다.”

장기 낙첨자 집회 갖고 “집을 내놔라”

장기간 청약저축을 납입하고도 아파트를 분양받지 못한 가입자의 불만을 소개한 1991년 4월 21일자 중앙일보.

1년 뒤 청약저축 가입자의 불만은 폭발했다. 1991년 4월 20일 명동성당 앞. 주택청약 가입자 중 7년 이상 장기낙첨자들이 모인 집회가 열렸다. 이날 이들이 내건 주장은 오로지 하나, “집을 내놔라”는 것이었다. 1984년 명칭이 바뀌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청약저축의 이름은 선매청약저축이었던 점에서 알 수 있듯이 정부가 가입자에게 전용면적 25.7평 이하 아파트를 우선적으로 공급해주기로 약속해놓고 지금까지 지키지 않고 있다는 주장이었다.

12월에는 실력행사로 이어졌다. 12월 3일 서울 도시개발공사가 짓는 분양아파트 청약접수 현장에 모인 장기낙첨자들은 ‘정부의 잘못된 주택정책으로 우리들만 피해를 입고 있다’며 항의하는 소동을 벌였다가 출동한 경찰에 의해 강제 해산됐다.

주택보급률이 최저였던 시절 집권한 6공화국 정부는 국민의 불만을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정부는 신도시를 통해 공급물량을 확대하는 한편 집권 초기부터 실수요자에게 주택을 공급하고자 청약제도를 대폭 개편했다.

1989년부터 시작된 청약제도 강화는 1992년까지 이어졌다. 1989년 건설부는 아파트 당첨 경험이 있는 사람을 모두 1순위에서 제외하는 한편 민영아파트의 당첨권 전매를 금지했다. 이듬해에는 민영아파트 1순위에서 1가구 2주택 이상 세대주를 제외하고 민영아파트 공급물량의 일부를 무주택 서민에게 우선 배정했다. 남편과 아내 등 세대주와 세대원의 주민등록이 달라 한쪽이 무주택자로 위장하는 경우를 막기 위해 무주택 범위를 세대원 전체로 확대했다.

1991년에는 민영아파트 1순위에서 1가구 1주택자 중 대형주택 소유자까지 제외하는 강수를 두고, 이를 뒷받침할 주택전산망도 가동했다. 민영아파트를 무주택 서민에게 우선 배정하는 범위도 대폭 확대했다. 이듬해에는 민영아파트 전매를 제한했다.

“서울대 법대 교수 5번 만난 뒤 민영 전매제한 조치”

당시 건설부 주택국에서 주택공급규칙을 담당했던 김홍배 씨의 말이다. “당시 공공부문 주택은 제한기간에 전매하면 2년 이하 징역 등의 처벌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민영아파트는 10배에 달하는 차익을 남기고 전매를 해도 이를 막는 규정이 없어서 불공정하다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당시 서울대 법대 교수를 5번 가량 만나 법리상의 문제점을 해결한 뒤 민영주택에도 일정 기간 전매를 제한하는 조치를 취했습니다.”

과열청약을 막기 위해 20배수제도 실시했다. 20배수제란 민영아파트 분양세대 20배에 해당하는 장기예치자에게 청약기회를 주는 제도를 말한다. 이 제도에는 20배 이외의 가입자는 청약조차 할 수 없다는 단점이 있었다.

서울시는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1995년 동시분양제를 도입했다. 개별 분양되던 공급물량이 모이면 분양세대가 많아지고 청약기회를 얻는 이들도 늘어나기 때문이다. 100세대를 분양하면 2000명에게 돌아가던 청약기회가 1000세대를 분양하면 2만명에게 부여되는 식이다. 곧 청약과열이 식으면서 미달사태가 발생하자 배수제의 범위는 계속 늘어나 1997년에는 250배수까지 적용됐다가 1999년 폐지됐다.

서울 지역 아파트 동시분양 접수가 시작된 2002년 1월 8일 주택은행 불광동 지점 아파트 동시분양 신청창구가 청약자들로 만원을 이룬 가운데, 대기자 표시 전광판이 205를 나타내고 있다.


외환위기로 청약제도 크게 완화

IMF 외환위기는 청약제도의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건교부는 1998년 기존 당첨자와 대형주택 소유자를 민영 1순위에서 제외했던 규정을 폐지했고 재당첨 금지 기간도 완화했다. 이듬해에는 민영 부분에서 2주택 이상 소유자를 1순위에 포함시키는 한편, 집 없는 서민 가입자에게 민영아파트 일부를 우선 분양하던 제도도 폐지했다.

청약통장이나 분양권, 주택 전매제한도 폐지했다. 2000년 건교부는 민영아파트 청약자격을 20세 이상으로 확대, 20년 넘게 이어졌던 1세대 1구좌 원칙까지 폐기했다. 불경기로 위축된 주택수요를 진작한다는 명분이었다.

'떳다방'의 전성기, 청약통장이 '복권'

부작용은 곧 나타났다. 2002년 2월 6일 국회 건설위원회에서 한나라당 권기술 의원은 정부의 주택정책을 질타하고 있었다. “분양권 전매허용, 청약가입제한 철폐, 세금감면 등 경기부양을 명분으로 정부가 주택에 대한 가수요를 부추겼습니다. 게다가 저금리까지 더해져 주택이 투기의 대상으로 전락했습니다. 떳다방이 분양시장을 좌지우지하면서 서민들이 막대한 프리미엄을 떠안고 있습니다.
떳다방의 폐해는 1999년부터 제기됐지만 (정부는) 분양시장 활성화를 위한 필요악이라며 뒷짐을 지고 있다가 뒤늦게 투기세력을 잡겠다며 뒷북을 치고 있습니다. 서민들의 희생을 발판으로 경기를 부양하는 것이 자칭 국민의 정부의 주택정책이 되고 말았습니다.
제도적 보완 없이 과열된 주택시장을 안정시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1월 현재 77만명 선인 수도권 청약 1순위자가 3월에는 137만명, 4월에는 184만여 명으로 급증할 전망입니다. 천문학적인 청약전쟁이 예고돼 있습니다.
서울의 경우 6월까지 1순위자 80여 만명이 추가로 늘어날 전망입니다. 청약통장이 말 그대로 청약복권으로 전락했습니다. 당첨만 되면 가만히 앉아서 수천만원씩 프리미엄이 떨어지는 청약복권이 된 것입니다.”

정부도 문제를 인식하고 있었다. 임인택 당시 건교부 장관의 답변이다. “10년 가도 청약 안 되는 사람도 있고 굉장히 불평들이 많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는 것이 주택경기도 죽이지 않고 할 수 있느냐에 대해 회의를 수도 없이 하고 있습니다. 곧 복합적인 것을 종합해서 대안을 마련해볼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후 관련대책이 쏟아졌다. 대부분 IMF 외환위기 때 폐지했던 내용을 되살린 것이었다. 공공부문 아파트는 무주택자에게 우선 공급되고 있었던 까닭에 대책은 대부분 민영아파트를 중심으로 이뤄졌다. 2002년 4월 주택공급규칙 개정을 통해 건교부는 투기과열지구 지정제를 도입하고 또한 투기과열지구 안에서는 민간건설업자가 공급하는 아파트 중 일부를 장기 무주택 세대주에 우선 공급하도록 했다.

9월에는 투기과열지구 안에서 모든 아파트의 분양권 전매를 주택공급계약일로부터 1년까지 금지했다. 10월에는 민영아파트 청약 1순위 자격을 다시 제한했는데, 투기과열지구에 한해 과거 5년 이내 당첨자, 세대주가 아닌 사람, 1가구 2주택 이상 세대주를 청약 1순위에서 제외했다. 2003년 6월에는 전매 제한을 소유권 이전 등기를 완료하는 때까지로 확대했다.

2005년 5월 판교신도시 등 인기지역 당첨확률이 높은 주택청약통장을 불법매매·알선한 혐의로 부동산 중개업자와 투기꾼, 청약통장 가입자 등이 무더기로 경찰에 적발됐다. 사진은 불법거래된 청약통장.


“처음부터 강한 앰플 주사를 쓰면 안 된다”

당시 건교부 주택정책과장이었던 강팔문 씨의 말이다. “부동산 침체기에서 회복기로 접어든 시기였습니다. 당시 청약 과열 현상이 나타나고 있었는데 그럴 경우 투기꾼이 몰려들고 집값이 상승하고 분양가도 상승합니다. 주택이 필요한 사람에게 주택이 공급되지 않는 겁니다.
투기과열지구를 도입하고 이 지역 내 민간건설업자가 공급하는 무주택 서민에게 우선 공급했습니다. 전매제한 조치와 청약 1순위 제한 조치는 정부 정책의 신뢰 문제도 있고 해서 망설이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과열이 줄어들지 않아 미리 세워둔 시나리오대로 조치했습니다.
투기적 수요를 막으면서 정상적인 주택시장은 확보하기 위해 시장 상황을 봐가며 단계적으로 조치를 취했습니다. ‘강한 앰플 주사를 써서 전체 주택산업을 마비시키면 안 된다’는 공감대가 정부 안에 형성돼 있었습니다.”

이어 무주택 세대주를 우선으로 청약제도가 바뀌었다. 2004년 1월에는 투기과열지구 내 민간건설업자가 공급하는 아파트 가운데 장기 무주택 세대주에게 우선적으로 공급하는 양을 대폭 늘렸다. 분양가상한제가 재도입된 2005년 3월에는 분양가상한제가 적용되는 공공택지 내 민영아파트도 장기 무주택 세대주에게 우선 공급하도록 했다.

투기꾼이 몰려드는 것을 막기 위해 전매제한도 강화했다. 분양가상한제가 적용되는 공공택지 아파트에 대해 최대 5년 동안 적용됐던 전매 금지가 2005년 12월에는 최대 10년으로 늘어났다.

2005년 8월 31일 한덕수 당시 경제부총리가 경기도 과천 재경부 브리핑룸에서 ‘부동산대책 관계부처 합동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이날 청약가점제 도입이 세상에 알려졌다.


2007년 9월 청약가점제 도입…청약제도 일대 혁신

그리고 2007년 9월 청약제도는 대변화를 맞이한다. 모든 아파트의 청약에 기존의 추첨식 대신 청약가점제를 적용하도록 개편된다. 이전 추첨제에서는 유주택자라도 청약에 당첨될 가능성이 있었지만 청약가점제 하에서는 당첨을 기대하기 힘들다. 이런 점에서 무주택자에게 공급물량의 일부를 우선 공급했던 기존 제도보다 강력한 조치다.

이와 함께 전매차익을 노린 투기꾼을 막기 위해 공공택지에 건설되는 아파트는 최대 10년, 민간택지 아파트는 최대 7년 동안 전매를 금지했다. 투기꾼을 배제하고 실수요자에게 주택을 우선 공급하겠다는 지난 30년 동안의 '씨름'이 마침내 달성된 셈이다.

‘불임시술자 우선’에서 ‘다자녀 가구 먼저’로

■인구정책과 청약혜택 변화
‘아들 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로 대표되는 산아제한이 국가적인 목표였던 1976년 11월 경제기획원은 제4차 5개년경제개발계획 기간 동안 연평균 인구증가율을 1.6%로 억제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정부는 자녀를 2명만 가진 이에게 주택공사 등이 짓는 아파트의 우선추첨권을 주기로 했다. 이 결정이 공공부문 아파트청약의 영구불임시술자 우대 근거가 된다.

1977년 청약제도가 처음으로 도입됐을 때 공공부문이 짓는 아파트 청약 우선순위는 경제기획원의 의도가 그대로 반영돼 만들어졌다. ‘국민주택청약부금’에 가입, 한 달에 한 번 6회 이상 납입해 50만원 이상이 된 사람을 1순위로 하되, 경쟁이 있을 때에는 해외근로자이면서 영구불임시술자, 영구불임시술자, 해외취업근로자의 순서대로 분양대상자를 정하도록 했다.

주공의 반포아파트 주택전시관에 몰려든 불임인파를 다룬 1977년 9월 15일자 조선일보.
경제기획원의 조치는 적중했다. 1976년 말까지 8만여 명에 불과했던 영구불임시술자가 1977년 8월말 14만여 명으로 늘어났다. 우대 방침이 처음으로 적용된 주공 반포아파트 분양공고가 난 뒤 증가세가 더욱 두드러져 하루 평균 700~800명씩 늘어났다. 1977년 9월 14일 반포아파트 주택전시관에는 다양한 사연을 가진 사람들로 가득 찼다.

김모(당시 35세)씨는 아침 일찍 신청장소에 나왔다가 불임시술자가 예상외로 많자 집으로 돌아가 부인에게 불임시술을 받도록 한 뒤 증명을 받아와 청약을 신청했다. 박모(44·여)씨의 사연은 눈길을 끌었다. 5년 전 수술을 받았다는 그는 병원이 사라지고 없어 적십자 병원에서 ‘무난자증명서’를 받아왔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무난자’가 선천적인 것인지 불임시술에 의한 것인지 구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주공 직원은 박씨에게 아들이 있는 것을 주민등록표로 확인한 다음에야 접수를 받았다. 단 조건이 붙었다. 다른 국공립병원에서 ‘불임시술에 의한 무난자 확인증’을 받아와야 한다는 것.

불임시술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후순위를 받은 박모 할아버지(71)는 “45세 이상의 사람들은 효과가 없다고 보건소에서 무료로 시술을 해주지 않는데 순위에서 차별하는 것은 모순”이라며 “늙은 사람은 아파트에 살아보기도 힘들게 됐다”고 하소연했다.

1997년에서야 영구불임 시술자 우대 폐지

어떤 신청자는 “아들 딸 둘만 낳아 가족계획을 철저히 했다”며 “같은 불임시술자라도 아이들이 4~5명이 있는 신청자와 자신에게는 질적인 차이가 있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이날 주택전시관에는 문의전화도 잇달았는데, ‘과부도 수술을 해야 하느냐’, ‘폐경기인데 무슨 불임시술이 필요하냐’ 등의 내용이었다. 이처럼 영구불임시술자의 아파트 청약 우선권이 ‘실증’되자 청약통장에 20~50만원 가량의 프리미엄이 붙을 때에도 영구불임시술자 명의의 청약통장에는 20만원의 프리미엄이 더 붙었다.

이런 일도 있었다. 당시 남성의 불임시술은 예비군 훈련장에서 많이 이뤄졌다. 원모씨는 1988년 7월 경기도 강화군의 한 예비군 훈련장에서 대한가족계획협회의 권유로 정관수술을 받았다. 그런데 이듬해 9월 세 번째 아이를 출산했고 아파트 우선권을 못 받게 됐다. 원씨는 이에 대한가족계획협회를 상대로 1500만원의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했다. 판결이 난 것은 1990년 12월. 당시 서울지법 남부지원 민사합의2부는 ‘수술이 잘못됐다는 증거가 없고 시술 3개월 뒤 정기검사를 받아야 한다고 담당의사가 고지했는데도 이를 태만히 한 점이 인정된다’며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불임시술자에 대한 우대조치는 1990년대 중반까지 이어졌다. 1996년 6월 4일 김양배 당시 보건복지부 장관은 김영삼 대통령 주재 국무회의에서 “35년간 시행되어 온 출산조절을 통한 인구억제정책을 폐기하겠다”며 “연내 관계부처와 협의, 불임시술 가정에 대한 공공주택 우선 입주권 등의 혜택을 없애겠다”고 보고했다. 그리고 1997년 7월 18일 ‘주택공급규칙’이 개정되면서 영구불임시술자 우대조치는 삭제됐다.

그로부터 9년 뒤인 2006년 정부의 인구정책은 다시 주택청약제도와 연결됐는데 이전과는 정반대였다. 건교부는 2006년 8월 주택공급규칙을 개정, ‘민법상 미성년자인 3명 이상의 자녀를 둔 무주택 세대주에게 건설량의 3% 범위 안에서 1회에 한해 특별 공급할 수 있다’고 정했다.

그 첫 적용은 2006년 8월 판교 신도시 분양. “21세 군인, 19세 대학생, 17세 고등학생을 둔 세 자녀 가구인데 아무 혜택을 받지 못하는 것은 불합리하다”는 등 불만의 목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2007년 9월 도입될 청약가점제에선 자녀수가 많은 것이 상당한 플러스 요인으로 작용할 예정이다.



 | 특별기획팀 | 등록일 : 2007.03.14

“아무리 자본주의 체제라지만…”
토지공개념에서 부동산공개념으로
[실록 부동산정책 40년 ⑮] 투기억제와 토지공개념의 변형 
 


“같은 서울 하늘 아래 봉천동·사당동 등 산꼭대기 달동네에는 움막같은 집 하나에 서너가구가 비참하게 살아가는 반면, 삼청동·성북동·방배동 등에서는 수십억원짜리 집에 초호화판으로 떵떵거리며 사는 사람도 있지 않습니까. 아무리 사유재산권이 보장되는 자본주의 경제체제라 하더라도 이 격차는 줄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문희갑 전 경제수석이 ‘실록 6공 경제’(중앙일보사)에서 밝힌 말이다. 그는 1988년 경제기획원 차관 시절부터 토지공개념 도입 작업에 참가한 후 이듬해 청와대에 들어가 경제수석 자리에 앉으면서 여당의 반대를 뿌리치고 입법화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사유재산권도 법에 의해 제한 가능
1989년 10월 11일 노태우 대통령이 토지공개념 관련 3개 법안의 국회 제출 문서에 서명하고 있다. 오른쪽은 조순 당시 부총리.

토지공개념의 저변에 흐르는 이 같은 생각은 사회주의적 발상이라는 비판을 받았지만, 헌법 제23조 “사유재산권의 행사는 공공복리에 적합해야 하고 법률이 정한 바에 따라 제한이 가능하다”는 것과 당시 공개념 도입에 적극적이던 여론의 지원에 힘입어 자본주의 테두리 안에서 제도를 마련했다. 하지만 일부 위헌 판정 등으로 토지공개념 3법은 10년이 채 못가 유명무실해졌다.

그러던 2003년 10월 노무현 대통령이 국회 시정 연설에서 부동산값 안정대책으로 토지공개념 도입까지 검토하겠다고 하면서 또 다시 불이 지펴진다.
“지금 정부는 종합적인 부동산 대책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도 부족할 때에는 강력한 토지공개념제도의 도입도 검토하겠습니다. 토지는 국민생활과 기업경영의 필수적인 요소인 데 반해서 확대재생산이 불가능합니다. 일반상품과는 달리 취급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개헌을 통한 ‘부동산공개념’도입 주장도

이후 토지공개념이란 말은 ‘부동산공개념’으로 새롭게 변신한다. 그 해 11월5일 첫 회의를 시작한 민·관 합동의 부동산공개념 검토위원회가 주택거래허가제, 재건축 개발이익 환수제 등의 도입을 위해 법 조문의 위헌성 여부와 시장에 미칠 파급 효과 등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법제화는 여의치 않았고 개헌을 통한 공개념 도입 주장이 나오기에 이른다. 2006년1월 열린우리당 의장 경선에 출마한 김근태 의원이 향후의 경제 모델로 제3의 길을 언급하면서 “개헌을 통한 부동산공개념 도입 필요성”을 주장했다.

1년 뒤인 2007년2월에는 15년간 건설업체를 경영했던 한나라당 김양수 의원이 부동산 공개념 개헌을 주장하고 나섰다. 김 의원은 과거 노태우 정부의 토지공개념에 기초한 법은 반시장적이었다고 평가한 뒤 “토지불로소득은 사회 공동체가 공유하는 대신 개인의 노력소득은 사유화하는 게 경제적으로 효율적이고 진정 시장친화적 부동산 공개념”이라고 주장했다.

2003년 11월 5일 오전 과천 정부종합청사 건설교통부에서 첫 회의를 시작한 부동산공개념 검토위원회에서 김정호 위원장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국민 81%가 불로소득 환수 공감

우리 국민의 의식조사에 따르면 67.5%는 “재산증식을 위해 땅, 주택, 건물 등을 사고파는 것이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반면, 불로소득에 대해서는 81.4%가 경중의 차이는 있지만 환수하는 것에 공감하고 있다.

부동산을 재산증식의 수단으로 인정하는 동시에 일정한 선을 넘어서는 초과이득은 사회가 되돌려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투자는 인정하되 투기는 용납하기 어렵다는 태도다. 이는 국토연구원이 2006년 9월 중순, 전국의 30세 이상 70세 이하의 국민 18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토지에 대한 국민의식조사’에서 나온 결과다.

정부의 부동산투기억제·지가안정 종합대책발표를 1면에 다룬 1978년 8월 9일자 조선일보.
정책차원에서 토지투기에 대해 본격 대응한 시기는 197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국토이용관리법(1972), 8·8조치(1978)등의 투기억제대책 등이 이 때 이루어졌는데 당시에는 경제성장을 뒷받침해 줬던 개발용지공급과 이에 따른 불로소득 환수에 초점을 맞췄다. 투기억제정책의 형성기인 셈이다.

1980년대는 토지정책의 정비기로 불린다. 투기억제를 위해 토지거래허가제실시, 토지공개념제도 도입, 신도시개발 등 보다 적극적인 정책을 마련했다.

그리고 1990년부터는 토지시장 투명화를 위한 정책 단계로 들어선다. 초중반에는 시장의 투명성 확보를 위해 부동산실명제 도입과 토지종합전산망 구축이 추진됐고, 후반부터 2002년까지는 시장개방과 규제완화 그리고 이로 인해 발생한 문제를 해결하며 개발과 보전의 조화를 중시하는 계획적 국토이용시대로 접어들었다.

유례없는 호황, 대선 선심 남발…땅값 천정부지

부동산 공개념의 기원이라 할 토지공개념이 도입되게 된 배경과 취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5공화국과 6공화국 초기의 사회·경제적 상황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5공화국은 '총외채 350억 불, 세계 5위의 채무국이지만 잠재 경제성장률은 7~8%대'라는 성적표를 가지고 출발했다.

1986년에 3저 호황으로 무역수지가 흑자로 전환되고, 86년 아시안 게임과 88년 올림픽 등 잇단 국제대회 개최 등으로 생겨난 시중 유동성이 전년대비 연평균 20%내외로 크게 증가하며 부동산과 주식시장으로의 자금유입을 촉진시켰다. 증권시장은 사상 유례 없는 활황을 맞았고, 토지가격도 급등하기 시작했다. 지가상승률은 1980년 11.7%를 시작으로 5공화국 동안 연평균 10.7%의 상승세를 보였다.

강력한 물가안정대책을 폈던 5공화국 시절, 당시 연평균 소비자 물가상승률이 3.5%로 안정세를 보였던 것과 비교하면 토지가격 상승은 대단히 높은 편이었다.

1987년 10월 정국은 대통령 선거체제로 돌입하면서 5공화국의 정책은 대선승리에 맞춰졌다. 정부와 여당은 대선 승리를 위해 떨어지는 주가를 잡기 위한 부양책과 국민주 보급계획을 발표하기도 했다.

득표전이 치열해지면서 후보자들의 선심공약이 남발됐다. 동서고속전철, 강원권 국제공항 건설, 농어촌 부채탕감···. 공약남발의 꽃은 지방을 돌면서 발표하는 지역개발 공약이었다.

후보자들의 입에서 나온 공약은 바로 땅값 상승으로 이어졌다. 임야, 무인도, 그린벨트 등 가리지 않고 전국적으로 토지투기가 발생했다. 일례로 서해안종합개발계획은 당시 평당 8000원하던 녹지를 1만5000원까지 단숨에 끌어 올리는 부작용을 낳았다.

선거가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민정당의 노태우 후보는 당시 상황을 활용한 경제개혁 공약을 발표한다. 1990년에 토지공개념, 1991년에는 금융실명제를 실시하겠다는 것이다.
(토지공개념이란 용어는 1978년 8.8 조치 때 건설부장관이던 신형식 장관이 국회에서 “토지의 사유개념은 시정돼야 한다. 건설부는 토지의 공개념에 입각한 각종 토지정책을 입안중에 있다”고 밝히면서 처음으로 사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6공 출범시 ‘폭발 5분전’ 땅값

6공화국이 출범하던 1988년에는 2년 전부터 이어진 국제수지 흑자가 145억 달러로 절정에 달했다. 하지만 경제와는 달리 사회·정치적 상황은 그리 녹록치 않았다. 거대한 민주화 요구 그리고 노사분규의 일차적 매듭인 임금문제에 대해서 6공화국 정부는 점차 물러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해 있었다.

사회안정 측면에서 부동산 문제에 대한 중요성이 또 다시 부각되기 시작한 것도 이즈음이다. 사실 부동산투기문제는 6공화국 정부 출범이전에 이미 ‘폭발 5분전’이었다. 이 와중에 1988년 3월 제13대 국회의원 선거가 치러졌고, 9월에는 올림픽이 열렸다. 막대한 자금이 시중에 또다시 풀렸다.

이 영향으로 1988년 전국과 6대도시의 지가는 27%, 서울은 28%나 상승하게 되고, 주택가격 역시 13%나 급등했다. 아파트 평당가 1000만원 돌파, 전·월세 파동으로 세입자들의 자살이 속출하던 사회적 불안을 극복하고 선거공약을 실천하기 위해 건설부와 경제기획원이 중심이 돼 토지공개념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에 착수한다.

건설부는 1988년 4월 13일 국토개발연구원(현 국토연구원)과 함께 토지소유상한제·개발이익환수제·등기의무제·과표현실화 등 토지공개념의 골격을 이루는 내용을 중심으로‘토지공개념확대와 투기억제대책을 위한 정책 세미나’를 열고, ‘토지정책의 운용과 과제’라는 보고서를 만들어 4월 말 이현재 총리에게 보고했다.

같은 해 8월 경제기획원도 과표현실화와 종합토지세 법안을 입안하고 이를 토대로 건설부, 재무부, 내무부 등과 함께 토지공개념의 원리를 정책적으로 구체화하기 시작한다. 토지공개념에 대한 이론적 토대를 지원하는 일은 연구기관, 대학교수 등 전문가로 구성된‘토지공개념 연구위원회’의 몫이었다.
반대를 한방에 잠재운 ‘5%가 사유지의 65% 소유’

1989년 경제기획원이 실시한 '토지공개념에 대한 국민여론조사'에서는 국민들의 84.7%가 토지공개념의 도입에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를 보도한 1989년 10월 21일자 중앙일보
걸림돌은 여당인 민정당 안에서 토지공개념 추진 세력을 사회주의자로 비난하며 반대하는 목소리였다. 반전은 여론을 통해 이뤄졌다.

1989년 5월에 마무리된 토지공개념 위원회의 최종연구 결과를 국토개발연구원이 발표하면서 당시 토지공개념 도입을 지지하던 여론이 다시 한 번 들끓게 되었다. “상위 2.8%의 가구가 전체 사유지의 51.5%를, 상위 5%의 계층이 65.2%의 땅을 소유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1988년 당시 땅을 한 뼘이라도 가지고 있던 토지소유자는 모두 1080만명이었다. 이 중 상위 5%인 54만명이 전체 사유지의 65.2%를 소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위원회는 이보다 앞서 “74~87년 동안 투자액 모두를 시설투자에 사용한 기업은 3.3배 성장한 반면 전액을 땅에 묻어 놓은 기업은 무려 10배나 성장했다”는 연구를 내놓기도 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민정당에서는 당과 상의 없이 여론을 자극하는 자료를 내보냈다고 항의하기도 했지만, 국민적 공분과 획기적인 부동산 대책을 원하는 비등한 여론 앞에서 결국 1989년 9월 7일 민정당 박준규 대표가 ‘정부의 토지공개념 입법안을 받아들이겠다’고 발표하기에 이른다.

국회 통과까지 1년여 부처-여당 줄다리기

하지만 법안이 국회를 통과하기까지 1년여 동안 관련부처나 여당과의 사이에는 팽팽한 줄다리기가 계속됐다. 부처간 이견은 경제기획원·재무부·건설부 등 경제부처와 내무부 사이에서 과표현실화와 종합토지세율을 둘러싸고 극에 달했다.

토지공개념 3법의 국회 입법과정을 보도한 1989년12월13일자 조선일보
경제기획원 측에서는 과표현실화율을 당시 15%에서 대폭 끌어올리려 했고, 내무부에서는 조세저항을 불러와 국가안보상 곤란하다는 이유로 반대했다. 종합토지세에 대해서는 토지를 많이 소유한 사람에게 세금을 누진적으로 물리자는 데는 별 이견이 없었으나 세율에 대해서는 경제부처와 내무부·상공부 간에 의견충돌이 발생했다. 도심지의 빌딩과 같은 영업용건물에 대한 과세율과 과세방법이 문제였다.

우여곡절을 겪으며 진행되던 토지공개념 도입작업은 1989년 6월 16일에 종합토지세를 신설하고 12월 30일 토지공개념 관련 3법인‘택지소유상한에관한법률’에 의한 택지소유상한제, ‘토지초과이득세법’에 의한 토지초과이득세제, ‘개발이익환수에관한법률’에 의한 개발부담금제가 국회에서 입법화되면서 마무리된다.

그리고 이러한 공개념제도 시행에 필요한 지가정보를 제공하기 위해 1989년 4월 ‘지가공시 및 토지 등의 평가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고 공시지가제도가 도입됐다. 택지소유상한제, 개발이익환수제 및 토지초과이득세제를 시행함으로써 당시 전국을 뒤덮고 있던 주택 및 토지투기 바람을 잠재우기 위한 단초가 마련된 것이다.

토지초과이득세는 재무부의 작품

택지소유상한제와 개발부담금제는 각각 토지공개념 연구위원회 분과들의 연구결과를 제도화한 것이지만, 토지초과이득세는 재무부가 독자적으로 구상한 제도다. 당초 건설부는 개발이익환수법을 통해 개발지역에 대해서는 개발부담금을, 그 주변지역에 대해서는 개발이익환수금을 각각 부과하려 했으나 경제기획원과 재무부는 개발이익환수금의 과징금적 성격과 가상이익에 세금을 매기는 것은 비현실적이라는 이유로 이의를 달았다.

대신 재무부는 종합토지세 강화를 주장했지만 내무부의 벽에 막힌 상태였고 별다른 대안이 없자 개발이익환수제를 재무부가 맡는 것으로 정리된다. 결국 재무부로 넘어오면서 이것이 토지초과이득세로 바뀐 것이다.

토지공개념제도 적용…‘재벌은 예외?’

토지공개념 3법이 국회를 통과했지만 시행까지 또 다시 적지 않은 애로가 있었다. 1990년 벽두부터 건설부에서는 토지공개념 실시에 따른 지가조사와 관리업무를 담당할 지가조사국이 신설되는 등 직제개편이 한창이었지만, 정부와 정치권에 대한 국민여론과 언론반응은 차가웠다.

토지공개념 3법 시행령 입법예고(1.15)를 앞두고 정부는 재벌기업의 골프장 허가 건으로 그리고 정치권은 3당 통합을 앞두고 잇단 토지공개념 약화발언으로 구설수에 올랐기 때문이다.

1990년 1월 초 언론들은 삼성·럭키금성·코오롱·동아 등 4대 재벌기업에 대한 신규 골프장 허가를 문제 삼으며 6공 정권존립의 이념적 기반의 하나로 강력 추진해온 토지공개념 확대도입 시책이 이 조치 하나로 제도시행에 대한 국민적 의구심을 불러일으켰다고 일제히 비난했다.

“재벌들의 땅투기가 골프장이란 미명으로 합법화되고 토지공개념은 힘없는 중산층만을 대상으로 한다는 비난이 일고 있다. 은행감독원이 89년 12월 초 은행 빚 많은 47개 계열기업군의 골프장 스키장 진출을 금지하는 여신관리제도를 규정했으나 시행일자를 늦춰가며 몇몇 기업에 사실상 예외조치 준 것이다. 30대 재벌이 88년말 4억2700만㎡, 금액으로 10조 500억원의 땅을 소유하고 있다.” (동아일보. 1990.1.6)

3저호황 끝나자 성장기조로 선회

정치권에서는 1989년 3저 호황이 끝나고 경제성장률 하락, 수출증가율 둔화, 그리고 인플레이션 진행 등 경기하강의 조짐이 나타나자 집권 초 형평과 분배를 중시하던 정책기조가 성장과 효율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선회하게 된다.

더욱이 1990년 1월 ‘3당 통합’을 계기로 성장주의 경제정책으로 회귀하고 있었다. 정치권의 변화로 금융실명제 및 토지공개념의 도입 등 ‘경제민주화’를 위한 개혁 작업들이 무산될 수 있다는 우려가 광범위하게 확산됐다.

박태준 당시 민정당 대표가 3당 통합과 관련한 기자간담회 중 “토지공개념 관련법안 등에 대한 시기선택이 잘 됐다고 보지 않는다. (중략)아무리 좋은 경제정책이라도 급진적으로 실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동아, 1.25)”고 하는 등 토지공개념 연기 내지 완화 가능성을 연일 시사하고 있었다.

시민단체와 교수의 '토지공개념' 시국선언

정부와 정치권의 이 같은 행태에 대해 경실련이 토지공개념 등의 개혁조치들이 극소수 기득권층의 저항과 이들에 의해 과장된 일부 부작용을 빌미로 늦춰지거나 완화되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의 성명을 연이어 발표한다.

대학가에서도 교수와 학생들이 시국선언과 시위를 통해 토지공개념 등 개혁조치 이행을 촉구하는 상황이 계속됐다. 경제전문가들도 경제개혁조치를 후퇴시킬 경우 정국 불안요인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는 우려를 잇달아 내놓았다.

위기상황의 불을 끄기 위해 정부 측에서 먼저 입장을 밝히고 나왔다. 노태우 대통령은 1990년 1월 30일 건설부 업무보고 자리에서 권영각 장관에게 “금년에는 토지공개념 관련 법률을 차질없이 시행토록 하고 필요하다면 새로운 정책을 개발해서 부동산투기가 더 이상 이 땅에 발붙이지 못하도록 하라”고 토지공개념의 연내시행을 지시한다.
주택에 대한 갈증은 계속될 것이지만, 과거처럼 한 가구가 3~4채의 주택을 소유하는 것은 사회통합 차원에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조순 부총리 “경제민주화 제도개혁 예정대로”

조순 부총리도 한 강연에서 “토지공개념 확대 도입 등 경제민주화를 위한 제도개혁을 예정대로 추진하겠다(90년대 한국경제의 전망과 대응방안,1990.1.30, 서울 롯데호텔)”는 의지를 밝힌데 이어 1990년 첫 경제관련 당정회의(조순부총리, 민자당 경제대책 6인)에서 토지공개념을 예정대로 추진할 계획임을 밝히고 당 측도 토지공개념 계획 불변 방침에 동의한다.

당시 이승윤 민자당 경제대책위원은 “이 자리에서 당 측은 종토세의 경우처럼 부작용이나 역기능이 생길 소지를 없애도록 보완에 힘써야한다고 지적했다. 보완책 마련이 연기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한국일보, 1990.2.13)”는 말로 입장을 명확히 한다. 이렇게 하여 그해 2월 28일 국무회의에서 토지공개념 3법 시행령이 채택·시행된다.

택지초과상한제도 위헌결정

하지만 1990년 3월 2일부터 본격 시행된 토지공개념 3법은 당초의 기대와는 달리 종이호랑이라는 평을 듣게 된다. 우선 ‘택지소유상한제’의 경우, 6대 도시외의 지역에는 적용되지 않았다. 또 6대 도시 내 200평 이상 택지 보유자 신고대상은 6만2000명이지만, 실제 부담금이 부과된 택지는 1992년 1만5590건, 1995년 1만838건 등 총 2만6000여 건에 불과해 제도가 확대되지 않는 한 별반 실효성이 없다는 문제가 제기됐다. 부담금 부과실적도 1993년 3257억여 원을 정점으로 점차 감소해 1997년까지 총 1조 3710억여 원이 징수됐다.

택지소유상한에관한법률은 제정이후 4차례 법률을 개정하며 유지되다 외환위기로 인하여 촉발된 부동산 매물 증가와 부동산 가격 급락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수요를 촉진하고 공급을 억제하는 차원에서 1998년 9월10일(시행령은 1998.9.25) 폐지됐다.

다음 해인 1999년 4월 29일에는 5년여의 심리 끝에 헌법재판소로부터 면적·개인·적용시점 등에 대한 일률적 소유상한 적용 등이 헌법상의 재산권을 과도하게 침해하는 위헌적 규정이며 신뢰보호의 원칙 및 평등 원칙에 위반된다는 취지로 위헌판정을 받았다.

사적소유권을 강하게 인정하는 헌법재판소의 이 판결은 다른 토지에 대한 규제입법에도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전문가들은 토지소유권의 공공성과 사회성이 전환점을 맞게 됐다고 평가하고 있다.

오락가락 개발부담금제

‘개발부담금제’는 택지개발, 공단조성, 골프장건설 등 30개 개발사업에 대해 개발이익의 25~50%를 부담금으로 과한 제도다. 1990년 5월 건설부가 확정한 개발부담금 부과대상은 9442만7000평, 건수로는 1021건이다. 이 중 건설중인 골프장이 87건, 3694만1000평으로 전체 대상의 39%를 차지했다. 하지만 1990년도에 실제로는 부과된 개발부담금은 188건, 226억 9400만원에 그쳤다.

개발부담금은 이듬해인 1991년부터 본격적으로 부과됐다. 1991년 562건 1083억여 원, 92년 688건 1748억여 원 등 부과건수가 점차 확대되어 1998년 7월말까지 8478건 1조 2458억여 원을 징수했다.

그러나 1997년 IMF 외환·금융위기 이후 경제의 어려움으로 자금난이 심화되고 개발사업이 위축됨에 따라 1998년 9월 법률개정으로 통해 1999년 12월 31일까지 한시적으로 개발부담금을 부과유예하고, 부과율도 50%에서 25%로 인하한다.

이후 2001년 12월 31일 ‘부담금관리기본법’에 따라 일시 운용을 정지했다가 2005년 12월 7일‘개발이익환수에 관한 법률’ 개정을 통해 ‘부담금관리기본법’ 부칙 제3조를 삭제함으로써 2006년 1월부터 다시 부과하고 있다.

토초세의 운명

1994년 7월 28일 헌법재판소의 토지초과이득세 헌법 불합치 결정은 다음날 신문 1면을 장식했다.
‘토지초과이득세’는 유휴토지 등의 소유자에 대해 3년 단위로 토지초과이득의 30%(1000만원 이하), 또는 50%(1000만원 초과)의 세금을 물리고자 한 제도다. 그러나 이 제도는 이중 과세로 재산권 침해가 과도하다는 이유로 94년 7월 헌법불합치결정을 받았다.

이 결정에서 헌법재판소는 ① 미실현이득에 대한 과세를 비롯하여 ② 기준시가의 산정방법 위임, ③ 지가의 계측수단, ④ 지가가 하락한 경우 보충적 규정의 부재, ⑤ 50%의 단일비례세, ⑥ 소유제한범위 내 택지와 관계없는 과세, ⑦ 유휴토지에 임대토지의 포함, ⑧ 일부만 양도소득세에서 공제하는 것 등의 사항을 판시했다.

이후 ‘토지초과이득세제’는 외환·금융위기 이후의 부동산 경기침체, 미실현이득에 대한 과세, 동일물건에 대한 이중과세 등의 문제점과 헌법재판소의 헌법불합치결정 등으로 인해 1998년 12월 28일 폐지됐다

부동산공개념 시대로…불로소득 원천 차단, 공익과 사익의 조화 추구
토지공개념 도입 이후 1990년 20.6%나 상승했던 지가는 1991년 12.8% 그리고 1992년부터 1994년까지는 마이너스 상승률을 기록(1992년 ­1.27%, 1993년 ­7.38%, 1994년 ­0.57%)하며, 2001년까지 매우 안정적인 추세를 유지했다.

이러한 성과는 토지에 대한 투기를 막고 가격 상승을 방지하기 위한 강력한 수요관리제도가 있었기에 가능했지만, 1986년 이후의 호황이 3년만에 끝나고 미국의 통상압력과 걸프전이 발발한 1990년과 1991년 들어 경상수지가 각각 22억 달러와 87억 달러의 적자를 보이며 경기가 침체된 데도 원인이 있다.

따라서 당시의 지가안정은 여러 요인이 작용한 것이지만 그래도 땅값이 떨어지고 가수요가 줄어드는데 토지공개념이 적지 않게 기여를 했다는 것을 전문가들은 부인하지 않는다.

부작용도 있었다. 토초세를 피하기 위해 유휴지를 가진 지주들이 마구잡이로 건물을 지어대는 바람에 주택200만호 건설과 시기가 맞물리면서 자재난, 인력난을 초래하기도 했다. 우리가 어릴 적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놀이터였던 공터나 동네 테니스장이 사라지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또한 토지공개념이 비록 투기억제정책의 종합이라 할 수 있으나 시장기능에 기초하여 수립된 정책이라기보다는 인위적이고 직접적인 강제성을 띤 제도였다는 점에서 문제점을 지적받고 있다.

토지소유를 이용 위주로 인식바꿔야

토지공개념 도입의 필요성을 알리기 위해 1989년11월30일 제작된 '투기와 토지공개념'이라는 제목의 <대한뉴스> 영상의 한 장면.
가용토지 전국토의 4%, 높은 인구밀도, 그리고 1인당 집을 지을 수 있는 면적이 일본 27평, 대만 17평인데 비해 우리는 14평에 불과할 정도로 우리나라의 토지이용 문제는 심각한 실정이다.

이러한 가운데서도 경제발전, 도시화, 공업화로 지역간·계층간 불균형이 심화되고, 또 땅에서 생겨난 불로소득과 한탕주의는 대다수 국민에게 허탈감과 좌절감 그리고 분노를 심어주고 있던 상황에서 토지공개념이 탄생했다.

토지공개념 3법 중‘택지소유상한에관한법률’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위헌결정에서 보듯이 우리나라는 토지의 사소유권을 강하게 인정하고 있다.
건설부 토지국장으로 토지공개념제도 도입의 산파역을 맡았던 이규황씨는 1990년대 중반 “토지공개념의 효과를 단순히 땅값안정에서 찾아서는 곤란하다. 이것이 토지소유에 대한 인식을 이용위주로 바꾸는데 기여했는가 그리고 토지소유구조의 재편을 이뤄낼 수 있는가를 기준으로 평가해야 한다”(실록 6공 경제)고 말했다.

토지의 소유집중도가 토지공개념 도입의 중요한 논리를 제공했듯이 현재 주택의 소유집중도 역시 주택공개념 도입의 중요한 논리를 형성했다. 부동산공개념을 통해 소유 및 개발로 발생하는 불로소득의 환수, 이용 기회의 형평추구, 공익과 사익의 조화를 찾는 노력을 계속해야 한다는 것이다.

강남 5만여 세대가 주택 20만호 소유
2005년 7월 22일 서울 세종로 정부청사 앞에서 토지정의시민연대회원들이 시장친화적 토지공개념을 촉구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참여정부 출범당시 주택시장의 상황은 1989년 토지공개념이 검토되던 시기의 부동산 시장 상황과 비슷하였다. 셋집도 없어 방 한 칸을 임대한 세대가 100만을 상회하는데, 전체가구의 33.2%인 276만 세대가 814만호의 주택을 가지고 있는 것(2003년 행자부 통계)으로 나타났다.

지역별로는 서울의 경우 44만 세대가 141만호의 주택을 소유함으로써 평균 3.24호를 소유하고 있고, 강남에서만 5만 5세대가 20만호의 집을 소유, 평균적으로 3.67호의 주택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참여정부는 다주택 소유자로 하여금 주택을 팔게 하거나 다주택을 소유하는 데 따른 합리적인 부담을 매기는 것이 주택의 수급불균형을 해소하고 투기적 가수요를 억제하는 첫걸음이라고 보고 있다. 즉, 주택시장에서의 소유편중을 바로 잡고 주택이 지나치게 상품화해 투기의 대상이 되는 것을 막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철학은 ‘10.29 대책’에서 다주택자에 대한 양도소득세 중과 방침으로 연결됐다.

토지공개념은 주택부문까지 확대

또 주택 매매를 통한 불로소득을 막기 위해 주택거래신고제, 실거래가 등기부 기재제도, 실거래가에 근거한 양도소득세 부과제가 도입돼 시행됐다. 재건축 개발이익환수, 실거래가 과세, 보유세 강화도 값비싼 주택을 소유한 가구는 대가를 내고 주택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좋은 점(amenity)을 향유토록 한다는 점에서 불로소득 환수와 맥을 같이 한다.

국토연구원 이수욱 연구위원은 “참여정부는 노태우 정부에서 도입했던 필수재로서의 토지에 대한 공개념을 주택부문까지 확산해 소유편중을 시정하고, 개발과 거래· 보유에 따른 불로소득을 환수하는 방식으로 다주택자가 보유하고 있는 주택이 자연스럽게 시장에 나오도록 함으로써 주택가격을 안정시키고자 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2005년 인구총조사 결과, 전 가구의 16%인 255만 가구가 최저주거기준에도 못 미치는 열악한 주거시설에 거주하고 있다. 주택 자가보유율도 55.6%로 그다지 높지 않다. 주택에 대한 국민적 갈증은 계속될 것이지만, 과거처럼 한 가구가 3~4채의 주택을 소유하는 것은 사회통합 차원에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주택도 토지처럼 과다한 소유에는 정당한 부담이 따라야 한다. 거주를 목적으로 하는 주택에서 과도한 수익을 창출하려는 시도는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사회통합을 추구하는 국가의 역할이라는 것이다.

 | 특별기획팀 | 등록일 : 2007.03.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