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중간하게 150만호가 뭡니까”
수도권 집중과 신도시 건설 (1) [실록 부동산정책 40년 ⑨] 안정적 주택공급
2006년 추석전부터 심상치 않던 전셋값이 급속히 집값 상승으로 번져가던 10월 23일 오전, 추병직 건설교통부장관은 사전 예고 없이 과천 건교부 기자실을 방문했다. 출입기자들에게 시장 분위기도 전해 듣고, 언론의 협조도 당부할 생각이었던 추 장관은 공급확대 등 정부대책이 충분하다는 점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수도권에 분당급 신도시를 추가 건설한다”고 말했다.
북새통으로 변한 검단
추 장관의 한마디에 평온했던 기자실은 순식간에 벌집을 쑤셔놓은 듯 북새통으로 변해버렸다. 추 장관의 ‘깜짝 발언’이 앞 다퉈 속보로 전해지면서 유력 후보지로 떠오른 인천 검단의 미분양 아파트가 순식간에 동나는 등 파문이 확산됐다.
4일 뒤인 27일 건교부는 인천 검단을 신도시 예정지로 공식 발표하는 등 진화에 나섰지만 추 장관은 시장불안을 야기했다는 여론에 밀려 결국 다음달 15일 자진사퇴했다.
그러나 추 장관의 발언은 결과적으로 그동안 지지부진했던 주택공급에 물꼬를 트는 계기가 됐다. 후임 이용섭 장관은 취임 직후 “2007년 상반기 안에 분당급 신도시 건설계획을 내놓겠다”고 밝힌 것이다.
역대 정부는 집값 상승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부각되거나 혹은 정치적 필요가 대두될 때마다 대규모 주택공급계획을 발표해왔다.
1972년 250만호 건설계획을 시작으로 1980년 500만호 건설계획, 1989년 수도권 5개 신도시를 포함한 200만호 건설계획 등이 대표적이다.
1990년 이후 지지부진했던 신도시 건설계획은 2000년 들어 판교신도시를 시작으로 다시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다. 신도시 건설 등을 통한 주택의 대량공급은 집값 안정을 위한 가장 유력한 정책수단으로 인정되고 있지만 최근에는 갈수록 심화되는 택지부족과 환경문제 등 현실적 걸림돌이 적지 않은데다 수도권 집중완화 등 또 다른 정책목표 등으로 인해 과거처럼 쉽지 않은 실정이다.
250만호 건설계획과 주택건설촉진법
박정희 대통령은 1972년 10월 유신개혁 직후 열린 비상국무회의에서 향후 10년 동안 주택 250만호를 짓겠다는 계획을 발표한다. 유신개혁에 대한 국민적 지지를 얻는 수단으로 대규모 주택공급을 들고 나왔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앞서 1971년 서울에서 쫓겨난 도시빈민들의 집단거주지였던 경기 광주대단지(지금의 성남)에서 대규모 소요사태가 발생하는 등 주거문제가 체제안정을 위협하는 수준으로 치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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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경기 광주대단지(현 성남)에서는 서울에서 쫓겨난 빈민들의 집단 소요가 일어났다. 사진은 KBS영상자료 화면. |
1970년 인구·주택센서스에 따르면 도시지역 주택부족률은 46.3%에 달했고, 도시지역 가구의 51.6%가 셋집에 살고 있었다. 특히 서울에서는 25%의 주택이 무허가 불량주택이었다.
250만호 건설계획은 1960년대 12.6%에 불과했던 공공주택 공급비율을 44%까지 끌어올리는 야심 찬 계획이었다. 하지만 중화학공업 육성을 최우선 국가과제로 삼았던 당시 정부로서는 주택건설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하는데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재원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는 주택건설절차를 간소화해 민간자본을 통한 주택건설을 촉진하는 한편 이렇게 지어진 주택을 효과적으로 배분하기 위해 1972년 12월 ‘주택건설촉진법’을 제정한다. 이 법은 민간 건설사들이 지은 주택도 정부의 자금지원을 받은 것이면 입주자선정 등 분양방법에서부터 주택관리까지 정부가 직접 통제할 수 있도록 한 것이었다.
또 민간 건설사들에게 각종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주택건설을 유도함으로써 주택건설은 민간자금에 의존하고, 정부는 주택배분에 주력하는 공급체제가 만들어진다.
1980년 9월 발표된 5공화국의 500만호 건설계획도 취약한 권력기반에 대한 국민적 지지를 얻기 위한 정치적 동기에서 출발했다는 점에서 박정희 정부의 250만호 건설계획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500만호 건설계획과 택지개발촉진법
500만호 건설이라는 제안을 낸 사람은 1980년 당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약칭 국보위) 경제과학 분과위원회 간사였던 오관치 씨였다. 오 씨는 육사 21기 출신으로, 미국 밴더빌트대학에서 경제학 박사를 받고 돌아와 육사 교수를 거쳐 1980년 국방관리연구소 연구단장으로 있다가 국보위에 합류했다. 당시 변변한 경제전문가가 없던 신군부는 자신들의 개혁의지를 펼치기 위해 군 출신 경제학박사인 오 씨를 앞세웠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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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택 500만호 건설계획을 보도한 1980년 9월 23일자 조선일보 |
오 씨는 특히 주택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새 정부가 국민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는 하루빨리 대량의 주택을 지어야 하고, 이를 위해 대량의 택지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5공 당시 청와대 경제비서관을 지낸 홍철 씨의 증언이다.
“당시 오 씨의 아이디어는 대도시 주변에 산적한 자연농지, 절대농지 등의 땅을 대량으로 확보해 그 위에다 집을 짓자는 것이었다. 또 정부가 녹지를 수용한 뒤 택지로 개발해 얻는 개발이익으로 자금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당시 김재익 경과위 위원장(이후 경제수석)은 ‘택지마련이 시급하다’는 차원에서 오 씨의 아이디어에 공감했다.”
"500만호" - 실제는 176만호
1980년 9월22일 건설부는 새로 취임한 전두환 대통령에 업무보고 형식으로 국보위시절 큰 틀이 짜진 ‘주택 500만호 건설계획’을 발표한다.
이 계획은 1981~91년까지 11년에 걸쳐 총 14조원을 들여 공공주택 200만호, 민간주택 300만호를 짓겠다는 계획이었다.
당시 전국 주택수가 530만호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애당초 이 계획이 얼마나 무리였는지 알 수 있다. 실제 1982~86년까지 5공 기간 지어진 주택이 176만호에 그쳤다는 사실도 당시 계획이 정권 초기 민심 회유용이었음을 말해준다.
오 씨의 계획이 아이디어 수준에 머물렀던 결정적 이유는 건설부의 줄기찬 반대 때문이었다.
이에 대해 홍철 씨는 “민간인의 땅을 강제수용하면 당장 혁명이 일어날 거라며 건설부가 집요하게 반대했다”며 “처음에 호의적이던 김재익 수석도 점차 회의적으로 돌아서면서 결국 오 씨의 아이디어는 깜짝쇼로 끝나고 말았다”고 회고했다.
개포동 목동 상계동…무소불위 택촉법
그러나 주택을 늘리려면 무엇보다 대량의 택지확보가 필요하고, 이를 위해 특별조치가 필요하다는 오 씨의 아이디어는 1980년 12월 ‘택지개발촉진법’(택촉법) 제정으로 절반의 성취를 이룬다.
이 법은 특정 지역의 땅이 건설부장관에 의해 택지개발예정지구로 지정되면 이 땅에 적용되는 ‘도시계획법’ 등 19개 법률의 효력을 일시에 정지시킨 뒤 일괄 매수해 택지로 개발할 수 있도록 허용한 법이다. 재산권에 대한 심각한 침해소지가 있는 이 법률이 당시 별다른 저항없이 제정될 수 있었던 것은 5공의 공포정치가 뒷받침됐기 때문이다.
택촉법이 제정되면서 1970년대까지 택지조성방법으로 활용되던 토지구획정리사업은 거의 사라지고, 대신 공영개발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택촉법에 의한 공영개발로 1980년대 서울에서 개포(73만평), 고덕(95만평), 목동(130만평), 상계(112만평), 중계동(48만평) 등에 대단위 아파트단지가 세워질 수 있었다. 6공화국 들어 세워진 분당, 일산, 평촌, 산본, 중동 등 수도권 5개 신도시도 택촉법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사업이었다.
그러나 서울시립대 교수를 지낸 손정목 전 서울시 도시계획국장은 택촉법의 부작용도 적지 않았음을 지적한다.
“솔직히 택촉법의 제정·공포로 광복 이후 50여 년을 이어온 도시 주택부족이란 고질은 치유될 수 있었다. 적어도 주택의 절대량 부족은 거의 해결됐다고 판단된다. 그러나 이 법률은 너무 엄청난 위력을 지녀 이 나라 도처의 아름다웠던 경관과 환경을 파괴하고, 대도시 안팎에서 애써 보존되어온 광활한 녹지대를 일시에 송두리째 잠식해버리는 부작용을 낳았다.”
“주택을 짓는 집 대통령으로 남고 싶다”
1989년 2월 24일 ‘대통령 취임 1주년 기념 보통사람들의 밤’ 행사에서 노태우 대통령은 서민들을 위한 영구임대주택 25만 가구를 포함해 주택 200만호를 짓겠다고 약속한다. 1987년 ‘보통사람들의 위대한 시대’를 열겠다며 당선된 노 대통령은 평소 “박정희는 1970년대 도로를 뚫은 길 대통령이라면 나는 주택을 짓는 집 대통령으로 남고 싶다”는 말을 자주 할 정도로 주택문제에 애착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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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대통령선거에서 당시 민정당 후보였던 노태우는 주택 200만호 건설 공약을 발표한다. 사진은 1987년 12월 성남공설운동장에서 유세하는 노태우 후보 모습 |
원래 200만호 건설계획은 87년 대선 당시 민정당 노태우 후보의 선거공약이었다. 이 아이디어를 낸 사람은 당시 여당이었던 민정당에 전문위원으로 파견된 김보근 전 건설부 주택국장이었다.
이동성 전 건설부 주택정책과장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고한다.
“전문위원으로 파견된 김보근 씨는 원래 150만호를 주장했다. 그런데 당무위원회에서 ‘100만호나 200만호처럼 딱 떨어져야지 어중간하게 150만호가 뭐냐’면서 200만호로 바꿔버렸다. 김 전문위원은 당시 능력으로는 5년간 200만호를 짓는 게 불가능하다며 극구 반대했지만 노태우 후보가 ‘선거공약이라는 게 다 그런 거’라며 밀어붙이는 바람에 결국 200만호로 낙착됐다.”
집권 3년만에 집값 56% 올라
대통령으로 당선된 뒤 노태우 대통령은 500여 건에 달하는 공약에 일일이 고유번호를 매겨가며 진행상황을 체크할 정도로 공약실천에 매달렸다. 특히 200만호 건설은 노 대통령이 최고의 치적으로 여길 정도로 애착을 보였던 분야였다. 1991년 2월 취임한 최각규 경제부총리가 “200만호 건설사업 때문에 정부가 무리를 했던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가 노 대통령이 진노해 혼쭐이 난 일이 있을 정도였다.
당시 주택 200만호는 서울시내 전체 주택수와 맞먹을 정도였기 때문에 1988~92년까지 5년간 200만호를 짓는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었다.
그렇다면 왜 노 대통령은 이처럼 엄청난 일에 매달렸을까.
5공화국 기간 강력한 안정화정책으로 인플레이션률이 한 자리수로 떨어지면서 1980~87년까지 연평균 10.5%로 안정적이던 지가상승률은 6공 출범 첫해인 88년 27.5%가 오르더니 89년 32.0%, 90년 20.6%로 치솟았다. 집값 역시 1988년 13.2%, 89년 14.6%, 90년 21% 등 집권 3년 만에 56% 가량 오르면서 주택문제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됐다.
또 1989년 7월을 기준으로 1년 반 동안 전국의 전셋값도 28.3% 치솟아 지하실, 달동네, 도시외곽으로 밀려나는 세입자들의 행렬이 이어졌고, 특히 89년 12월 주택임대차 보호법을 개정, 전세기간을 1년에서 2년으로 늘리자 집주인들이 2년 치 보증금을 한꺼번에 올리는 바람에 거리에 나앉은 가장들이 자살하는 등 커다란 사회혼란이 빚어졌다.
"집 때문에 혁명 일어난다"
정치민주화의 바람을 타고 경제분야에서 ‘복지와 형평’을 내세운 6공으로서는 서민들의 주거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정권유지가 힘들 지경이었다.
이동성 전 건설부 주택정책과장의 증언이다.
“당시 민심이 극도로 흉흉했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당시 성남에는 강남 부유층 아파트로 파출부 나가는 아줌마들이 많았는데, 이 사람들 사이에서 ‘세상이 바뀌면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몇 호는 파출부 누구 몫이다’는 식의 괴담이 돌았고, 이런 소문이 정보라인을 통해 청와대까지 보고됐다. 당시 문희갑 경제수석은 ‘주택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혁명이 일어난다’며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밤마다 남산 외인주택에 모여
이처럼 주택문제가 체제안정을 위협할 정도로 악화된 것은 절대적인 주택부족과 과잉유동성 때문이었다.
1978년 30만호에 달했던 주택공급은 경제위기를 겪었던 1980년 15만호로 급감한 뒤 83~87년까지 연간 25만호에 머무른 결과 87년 주택보급률은 전국 69.2%, 서울 50.6%에 불과했다.
여기에 1986~88년까지 3저호황(저달러, 저금리, 저유가)으로 밀려든 달러가 시중에 풀리면서 증시와 부동산시장을 뜨겁게 달궜다.
이런 상황에서 1989년 서울 압구정동 현대아파트가 평당 1000만원을 돌파하는 등 집값이 폭등하자 서둘러 주택 200만호 건설에 박차를 가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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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당, 일산 등 신도시 건설계획을 보도한 1989년 4월 28일자 조선일보 |
대통령 취임 1주년 행사가 있은 지 한 달 뒤인 1989년 3월 청와대를 중심으로 건설부, 주택공사, 토지개발공사 등의 직원 23명으로 구성된 ‘주택건설기획단’이 구성돼 매일 밤마다 남산 외인주택 사무실에 비밀리에 모여 안양 평촌, 군포 산본, 성남 남단녹지(분당), 고양 일산, 송파, 의정부 주내 등 6개 지역을 대상으로 수도권 신도시 건설을 검토하기 시작한다.
일사천리로 진행된 5개 신도시 건설
200만호 건설사업의 하이라이트인 분당, 일산 등 5개 신도시 건설계획이 발표된 것은 1989년 4월 27일.
이날 오전 청와대에서 열린 주택관계장관회의를 주재하면서 노태우 대통령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파트나 집값의 폭등은 선량한 시민의 내 집 마련 꿈을 앗아가는 가증할 일이다. 30평되는 아파트가 1억원을 넘고 대형아파트의 평당 가격이 1000만원이 넘는 것은 방치할 수 없는 일이다. 서민들의 미래와 꿈과 설계를 빼앗아가고 좌절감을 안겨주는 이런 부동산투기만은 어떤 일이 있어도 막겠다는 것이 나의 의지다. 분당·일산 외에 이미 지정된 안양, 군포, 부천의 택지를 합하면 1450만평이 되는데, 이는 과천시의 25배, 여의도의 20배에 달하는 택지다. 오늘 계획을 포함해 새로 세워질 주택이 33만호인데 이는 서울아파트 42만호의 80%에 해당하며 2~3년 안에 130만명이 새로 입주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현재와 같은 아파트·부동산가격이 진정되겠는가.”
분당은 문희갑, 일산은 박승
대통령의 질문에 6공 초대 경제수석에서 건설부장관으로 옮겨온 박승 당시 장관은 “2, 3년 안에 30만호의 집이 나오게 되면 기대심리나 가수요가 끊어져 투기는 꺾어질 것이고, 아파트가격도 진정될 것으로 믿는다”고 답한다.
수도권 5개 신도시 건설사업의 주역은 당시 문희갑 경제수석과 박승 건설부장관이었다. 특히 분당은 문 수석, 일산은 박 장관의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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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공화국 주택 200만호 건설의 주역인 문희갑 경제수석(왼쪽)과 박승 건설부장관 |
박 장관의 증언이다.
“당시 상황을 점검해봤더니 서울시내에 집지을 땅이 없었다. 그때만 해도 그린벨트는 절대 손댈 수 없다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땅은 없고, 그린벨트는 손댈 수 없으니 대안은 그린벨트 밖에 신도시를 짓고, 지하철로 교통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신도시 후보지로 평촌, 산본, 중동, 분당 4곳이 나왔다”
그러나 분당은 1974년 5월 헬기를 타고 이 일대를 날던 박정희 대통령이 “앞으로 긴요하게 쓸 땅이니 개발하지 말라”고 지시한 이후 15년 동안 그린벨트에 준하는 남단녹지로 묶여 있던 곳이라서 ‘개발불가’라는 반대에 부딪혔다. 이를 돌파한 사람이 문 수석이다. 경제관료 출신인 문 수석은 노 대통령과 경북고 선·후배관계라는 점을 십분 활용, 노 대통령으로부터 재가를 받아냈다.
반면 일산은 박 장관이 처음 거론한 곳이다. “강북에도 신도시를 건설하기로 하고 토개공에 입지 물색을 지시했다. 그 결과 일산과 동두천 부근 2곳을 잡아왔다. 그런데 동북쪽 입지는 교통문제 해결이 어려웠다. 대신 일산은 한강변이어서 도로를 내기도 좋고 최적의 조건이었다.” 오랫동안 서울 은평구 갈현동에 살아온 덕분에 이 지역에 밝았던 박 장관은 일산을 대통령에게 추천했다. 박 장관은 “노 대통령 역시 이 지역 9사단장 출신이었기 때문에 흔쾌히 재가했다”고 회고했다.
1년내내 줄줄이 집들이
200만호 건설계획은 수도권에 90만호, 지방도시에 나머지 110만호를 짓는 계획이었다. 여기에는 서민들을 위한 영구임대주택 25만호(실제 건설물량은 19만호)가 포함돼 있다.
수도권 90만호 중 서울시 안에 40만호를 지어야 했다. 이를 위해 서울시는 89년 2월 도시개발공사(현재 SH공사)를 설립한다. 5개 신도시의 몫은 30만호였다. 분당(9만7500호)과 일산(6만9000호)의 규모가 가장 컸고, 중동·평촌·산본은 각각 2만5000호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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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시 건설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1989년 4월 27일 계획을 발표한 지 7개월 만인 같은해 11월 분당 시범단지(4030가구)가 분양됐다. 이어 2년 만인 91년 9월 분당의 첫 입주가 시작됐고, 92년부터 평촌(3월), 산본(4월), 일산(8월), 중동(12월) 등이 줄줄이 집들이를 했다.
서종대 건교부 주거복지본부장은 “93년 가을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 주택관련 공무원들과 함께 분당신도시를 시찰한 적이 있는데, 이렇게 큰 규모의 도시를 그렇게 짧은 기간에 그 많은 재원을 동원해 건설했다는 사실을 듣고는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하더라”고 말했다.
특히 정부는 1989년 9월 건설사들이 발행한 사채를 사면 아파트를 분양받을 수 있도록 하는 주택상환사채 제도를 도입하는 등 다양한 지원책을 통해 건설사들의 참여를 독려했다.
'물량 때려붓기'에 집값 하락세
이에 따라 1980년대 중반까지 25만호 수준에 머물렀던 건설실적이 89년 46만호로 급증한데 이어 90년 75만호에까지 달하는 등 사상 초유의 건설붐이 전국을 휩쓸면서 주택 200만호 건설계획은 당초 계획보다 1년 이상 앞당겨진 91년 8월말 조기 달성된다.
당시 공식기록은 214만호. 4년여 만에 우리나라 총주택(1987년 기준 645만호)의 33%가 지어진 것이다.
무지막지한 ‘물량 때려붓기’로 하늘 높을 줄 모르고 치솟된 집값은 1991년을 기점으로 첫 하락세를 기록한다. (전국 -2.1%, 서울 -0.5%) 이러한 하락세는 서울을 기준으로 △92년 -5.0% △93년 -2.9% △94년 -0.1% △95년 -0.2% 등 97년 IMF외환위기 직전까지 계속된다. 같은 기간 전국 주택보급률은 91년 74.2%에서 97년 92%로 꾸준히 개선된다.
"6공의 운명은 토지공개념"
이 기간 부동산시장이 안정된데는 공급확대가 주효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89년 12월 국회를 통과한 토지공개념 3법(택지소유상한제, 개발이익환수제, 토지초과이득세) 등 강력한 투기억제책의 영향도 크다.
당시 토지공개념 3법을 주도한 인물은 문희갑 경제수석이었다. 그는 여야 정치권, 보수단체로부터 ‘빨갱이’라는 비난이 쏟아질 때마다 “6공의 운명을 걸고 토지공개념제도 도입을 실현하겠다”며 밀어붙였다.
특히 문 수석을 이은 김종인 경제수석은 1990년 5·8조치를 통해 재벌들의 비업무용 토지 강제매각을 주도하는 등 투기 근절을 위해 재벌과의 일전을 불사하기도 했다.
결국 1990년대 유례없는 부동산시장 안정은 강력한 투기수요억제와 공급확대정책이 요모조모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끊이질 않는 부실공사, 신도시는 ‘모래성’
5개 신도시 건설이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신도시 건설과정에서 자재·임금파동이 벌어졌고, 과열된 건설경기를 진정시키기 위해 잇따라 후속 대책을 내놓아야 했다. 또 신도시 건설이 마무리된 뒤에도 부실공사 시비가 끊이질 않았다. 자족능력을 상실한 베드타운화(化)와 이에 따른 교통 등 기반시설 부족문제, 수도권 인구집중화와 균형발전 등의 문제는 두고두고 해결해야 할 골칫거리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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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초반 신도시 건설은 속전속결로 이뤄졌지만 이후 부실공사 등 숱한 부작용을 남겼다. 사진은 1992년 공사가 한창 진행중인 분당신도시 모습 |
신도시 계획이 발표된 지 한 달 만인 1989년 5월 열린 국회 대정부질문은 앞으로 신도시가 겪어야 할 고난의 예고편이었다.
당시 공화당 김용환 의원은 조순 경제부총리, 박승 건설부장관 등에게 신도시 건설의 문제점을 따진다.
“부총리! 본인은 일산, 분당지구 신도시건설계획을 근본적으로 중단, 백지화할 것을 다시 요구합니다. 이 계획은 지방화시대의 요청에도 역행할뿐더러 인근의 야산 구릉지를 놓아두고 700만평이나 되는 농경지를 훼손해 농민의 생존권을 약탈하면서 수도권 중산층의 주택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것입니다. 사회정의에도 반(反)하는 처사입니다. 이 계획은 수도권의 주택문제 해결은커녕 100만명에 달하는 새로운 인구를 인근에 끌어들여서 마침내 수도권의 공룡화를 결과하게 될 것입니다.....아파트를 짓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 입지가 잘못됐다는 것입니다. 국가백년대계가 걸린 이 중대한 일을 내각에서는 충분한 검토도 없이 비서실의 도상계획을 그대로 받아 들였다고 하는데 이래도 되는 겁니까.” (1989년 5월 11일 국회속기록)
1년에 과천 2개반씩 만들기
이어 박승 건설부장관의 답변이다.
“일산, 분당을 구체적으로 검토하기 시작한 것은 작년(1988년) 여름입니다. 제 손으로 했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그렇게까지 우리 주택문제에 대해서 심각성을 사실상 느끼지 못해서 그때 유보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때를 넘긴다고, 그래서 그러면 우리나라의 주택문제가 해결이 되겠느냐, 해결이 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근본적인 처방이 필요하겠다, 그래서 다소 충격이 가더라도 국민들에게 수도권의 주택문제는 이제는 되었다고 하는 안심을 줄 수 있는 과단성 있는 정책을 내놓아야 되겠다........이번에 저희가 발표한 것은 1500만평입니다. 이 1500만평이면 과천 넓이의 25배입니다. 앞으로 10년 동안이면은 1년에 과천 2개 반씩은 털어놓을 수 있는 물량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1년에 과천 2개 반씩의 물량이 나올 때 서울의 아파트투기는 맥을 추지 못할 것이다 하는 것이 저희 생각입니다.” (1989년 5월 11일 국회속기록)
그러나 신도시계획은 당시 여소야대 정국을 주도하던 민주·평민·공화당 등 3개 야당으로부터 재검토 촉구결의까지 당하는 수난을 겪는다. 분당·일산 등 농민들의 생존권을 박탈하고, 추진과정에서 졸속·위법성 등이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연탄재처럼 부스러지는 콘크리트
실제 1989년 5월 당시 경기 고양군 일산읍에 살던 강병채(당시 55세)씨가 신도시개발로 집과 땅이 수용되는 것을 비관, 농약을 먹고 자살하는 등 같은 해 9월까지 일산지역 농민 5명이 잇따라 자살하는 등 반발이 극심했다. 당시 분당에 비해 일산지역의 반발이 거셌던 것은 분당의 경우 오랫동안 남단녹지로 묶여 있어 외지인 소유의 땅이 많았던 반면 일산은 누대에 걸쳐 농사를 짓는 토박이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우여곡절을 겪으며 공사는 강행됐고, 분당신도시 첫 입주를 얼마 남겨 놓지 않은 1991년 여름, 전국을 경악케 한 불량레미콘 파동이 터진다. 이후 신도시 입주가 마무리되는 96년까지 부실공사 파문은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1991년 5월 평촌신도시 아파트 건설현장에서 광주고속 건설사업부 고석현 소장은 1주일 전 쳐놓은 콘크리트가 해머로 칠 때마다 연탄재처럼 맥없이 부스러지는 것을 발견한다. 비슷한 시기 동아건설이 짓던 평촌신도시 아파트도 바닥강도가 기준에 못미치는 부실공사임이 밝혀진다.
문제의 원인은 불량레미콘 때문이었으며, 특히 이들 업체에 불량레미콘을 공급했던 진성레미콘이 KS(한국공업규격) 표시를 획득한 회사라는 점이 더욱 충격을 줬다.
부랴부랴 사태파악에 나선 건설부는 광주고속, 동아건설 외에도 우성, 선경, 동성 등 여러 업체들이 불량레미콘을 받은 사실을 확인하고, 이들 업체들은 이미 지어놓은 아파트를 헐고 다시 짓는 등 소동을 벌인다.
불량레미콘 파동은 바닷모래, 불량 철근 등으로 일파만파 확산된다. 당시 언론보도(경향신문, 1991년 6월 27일)를 보자.
“‘꿈의 신도시’, ‘쾌적한 전원도시’를 캐치프레이즈로 내세우고 건설 중인 평촌·산본등 신도시아파트는 불량 건자재사용이 드러나면서 ‘모래성’이라는 오명을 쓰고 심판대 위에 세워졌다.
불과 열흘 전만 하더라도 88년 이후 3년간 상승세를 유지하던 수도권 집값을 떨어뜨린 주역으로 ‘개선장군’ 대우를 받던 신도시 아파트가 이제는 모든 경제병의 주범으로 극한적인 비난을 받고 있다. (중략) 문제는 레미콘의 품질불량만이 아니라는데 심각성이 있다. 골재수요가 급증, 모래와 자갈을 강이나 산에서 채취한 것으로는 턱없이 모자라자 소금기를 제대로 씻지 않은 바닷모래를 그대로 사용하는가 하면 질이 떨어지는 중국산 시멘트, 수입과정에서 부식된 철근 등으로 시공, 반영구적이어야 할 건축물이 10년 정도 지나면 균열되거나 안전도에 문제를 드러낼 위험성이 있는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공사장 임금 인상 제조업으로 파급
이러한 부실공사는 임기 내에 주택 200만호를 건설하기 위해 무리하게 공사를 밀어붙일 때부터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 한꺼번에 막대한 물량을 때려짓다보니 건설자재 품귀현상이 벌어지면서, 품질검사는 뒷전으로 밀어둔 채 마구잡이로 아무 자재나 끌어쓴 것이 화근이었다. 불량레미콘 파동이 벌어진 1991년 6월에는 대형건설사들도 공시가격보다 20~30% 비싼 트럭 1대당 33만~36만원은 줘야 레미콘을 공급받을 수 있었고, 중소건설사는 아무리 가격을 올려 불러도 레미콘 확보가 불가능한 판이었다.
여기에 숙련공들이 모자라 뜨내기 인부들이 공사판을 채우면서 부실공사를 불러왔다. 91년 당시 예상 건설소요인력은 130만명으로 추산됐지만 실제 건설현장에 투입된 인원은 118만명에 불과했다. 특히 신도시 건설현장에는 최소 10만명이 필요했지만 실제 동원인력은 70~80%에 불과했다. 이에 따라 일당 5만원 이하로는 사람들을 구할 수 없게 됐고, 이러한 임금인상은 다른 일반작업장으로 파급돼 제조업 전체의 임금비용을 올려놓는 구실을 했다. 이른바 3D업종에 대한 기피현상도 200만호 건설사업 이후 두드러진 현상이다.
“신도시의 ‘신’자(字)도 못 꺼낸다”
1995년 터진 삼풍백화점 붕괴사건은 신도시 주민들을 다시 불안에 떨게 했다. 불안감이 연일 확산되자 신도시 건설계획 주역으로 당시 대구 민선시장이었던 문희갑씨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중앙일보, 1995년 7월 24일)에서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인다.
“(질문) 최근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를 계기로 분당, 일산 등 신도시지역 주민들이 매우 불안해하고 있으며, 신도시 건설에 대한 비판론도 다시 고개를 들고 있습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대답) (어조가 다소 강해지면서) 신도시 및 주택 200만호 건설은 당시 시점에서는 불가피한 것이었습니다. 세입자가 자살하고 하루아침에 집값이 2000만~3000만원씩 뛰는데 집을 더 짓지 않을 수 있나요. 가장 좋은 정책이었지만 호경기에 들떠 집행이 정교하게 이뤄지지 않았을 뿐입니다. 당시 우리나라가 아파트를 지을 수 있는 최대능력은 연간 30만~35만호였습니다. 그러나 흑자경제시절 주택수요가 늘어 분양이 잘 되자 마구 지은게 탈이었습니다.
(질문) 요즘 신도시에서는 집값도 떨어지고 있으며, 이사 가려는 사람도 많다고 하는데 괜찮겠습니까.
(대답) 신도시 아파트는 절대 사고 안 납니다. 바닷모래를 사용했다고 하는데 그때 바닷모래를 사용한 곳이 어디 신도시뿐입니까. 모래가 모자라 바닷모래를 안 쓸 수 없었고, 다른 건물에도 다 사용했습니다. 문제는 얼마나 잘 씻어 사용했느냐 인데 이는 전적으로 기업의 윤리문제입니다.....신도시는 관심도 많고 진단도 철저히 하고 있으니 절대 문제가 없을 겁니다.”
밤이 무서운 베드타운
신도시 입주가 거의 마무리된 96년에는 ‘베드타운화(化)’가 쟁점으로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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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타운화된 신도시에 대한 입주민들의 불만을 지상중계한 1996년 2월 15일자 중앙일보 |
특히 1996년 2월 일산신도시 입주자대표자협의회는 ‘신도시 건설 당시 정부가 약속했던 자족기능 시설 유치가 지지부진해 정신적 피해를 입었다’며 시행사인 토지공사를 상대로 1500억원의 손해배상청구소송을 결의한데 이어 분당 등 다른 신도시에서도 입주민들이 비슷한 움직임을 보인다.
당시 입주민 대표들은 한 언론이 마련한 좌담회(중앙일보, 1996년 2월 15일)에서 불만을 쏟아낸다.
“(분당) 김회장=가장 큰 문제는 교통난입니다. 교통난 완화를 위해 약속한 분당~왕십리 지하철건설은 공약(空約)으로 끝났고, 분당~선릉 지하철도 98년께나 완공될 예정입니다. 또 병원과 도서관 등 문화체육시설이 절대 부족하고, 병원도 현재 1곳만 문을 연 상태지요.
(산본) 권회장=산본은 기존 도시에 건설한 탓에 편의시설 등은 다른 신도시에 비해 좀 나은 편입니다. 그러나 교통난은 말할 수 없을 지경이예요. 산본 진입로가 좁아 출·퇴근때마다 교통체증으로 보통 짜증나는게 아니거든요.
(중동) 조회장=중동은 교통과 교육문제로 골치를 썩이고 있어요. 특히 초등학교는 과밀학급이 대부분이어서 정상적인 교육이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주민들은 학교부지가 아파트부지로 팔린 것이 틀림없다며 분노하고 있어요.
(평촌) 김회장=평촌에는 9개 파출소가 들어설 예정인데, 현재 3개 뿐입니다. 요즘은 한 밤중에 지하주차장에 내려가기가 겁날 정도예요. 강도가 엘리베이터까지 따라온 적도 있습니다. 정부가 팔짱만 끼고 대책을 세우지 않아 주민들이 자율방범대를 만들어 운영하고 있어요.”
돌이켜보면 신도시는 1989년 건설계획 발표에서부터 1996년 입주가 끝난 뒤까지 바람 잘 날이 없었다. 그래서 문민정부 이후에는 신도시는 아예 입에 올리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익명을 요구한 건교부 관계자는 “김영삼 정부 시절에는 상대적으로 집값이 안정된 탓도 있었지만 워낙 뒤탈이 많고 후유증이 심각했기 때문에 신도시의 ‘신’자도 꺼내지 못하는 분위기였다”며 “모 건설부장관은 신도시개발을 언급했다가 교체되는 일까지 있었다”고 말했다.
금기시되던 신도시 논의가 재개된 것은 2000년 이후부터다. 1990년대 말 준농림지를 중심으로 한 무분별한 난개발이 사회문제로 대두되자 신도시를 통한 계획개발의 필요성이 제기됐기 때문이다.
| 특별기획팀 | 등록일 : 2007.03.02
“송파신도시는 이해찬 총리 작품”
수도권 집중과 신도시 건설 (2) [실록 부동산정책 40년 ⑩] 안정적 주택공급
수도권 집중과 신도시 건설 (2) [실록 부동산정책 40년 ⑩] 안정적 주택공급

우리나라 부동산 가격은 1960년대 본격적인 경제개발과 함께 크게 움직이기 시작해 지난 40년간 수도권 집중화에 따른 수급 불균형과 공급시차, 경제성장에 따른 소득향상과 과잉 유동성, 건설경기 부양 유혹, 부동산 투기심리에 무력했던 제도, 정책 미비 등의 요인들에 의해 변동을 겪었다. 과거 집값이 급등할 때는 항상 시중에 돈이 너무 많이 풀리고 주택공급이 부족했으며 투기로 얻은 불로소득을 환수하는 시스템이 갖춰지지 않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지역간 불균형 개발의 결과인 수도권 집중, 핵가족화와 고령화로 인한 도시 가구수 증가 등으로 주택 수요는 공급을 앞질렀지만 주택부족 문제를 구조적으로 해결하려는 노력은 미흡했다. 민간자본에 크게 기댄 주택시장 구조는 주택을 투기대상으로 보는 심리를 키웠다.
지난 40년간 투기억제와 경기활성화라는 두 가지 목표 사이에서 일관성 없는 정책이 추진되면서 주기적 집값 상승과 ‘부동산 불패’라는 잘못된 믿음을 심어줬고, 적절한 대체투자 시장의 미성숙은 자본의 부동산 쏠림 현상을 가속화했다. 불투명한 시장 구조와 세제상의 허점도 많았다. 공시가격과 실제 가격이 크게 달라 진짜 가격을 알기 힘들고, 가격 부풀리기와 이중 계약서로 세금탈루가 관행처럼 이뤄졌다. 편법과 허점투성의 거래 환경은 많은 국민들을 부동산 투기라는 유혹 속으로 끌어들였다.
정부는 지금도 과거 ‘투기시대 패러다임’과 씨름하고 있다. 이는 투기로 병든 우리 부동산 시장을 근본부터 치유하고 정상화하는 힘겨운 과정이다.
국정브리핑이 주택도시연구원·국토연구원·금융연구원과 공동으로 기획한 <실록 부동산정책 40년>은 ‘제1부, 왜 올랐나’에 이어 '제2부, 어떤 정책을 폈고, 왜 못잡았나' 를 통해 정부의 부동산 정책이 어떤 우여곡절 끝에 탄생 했으며 역사적 의미와 쟁점은 무엇인지 점검한다. 2부의 두번째 주제로 <안정적 주택공급 정책>을 4회에 걸쳐 연재한다. <편집자>
제2부 어떤 정책 폈고, 왜 못잡았나
<안정적 주택 공급>
① 수도권 집중과 신도시 건설-1
② 수도권 집중과 신도시 건설-2
③ 부동산과 택지조성의 방정식
④ 서민 내집 마련을 위한 금융지원
2000년 10월 10일 경기 안양시 국토연구원 강당.
이날 ‘수도권 도시성장관리와 신도시개발’이라는 주제로 열린 정책토론회에서 국토연구원은 판교(250만평), 화성군 중부지역(400만평), 충남 천안·아산지역(890만평) 등 3곳에 우선적으로 신도시를 건설할 것을 제안한다.
11년만에 재개된 신도시 건설

1990년대 초 이후 지지부진했던 신도시 건설 논의를 공식 제기한 국토연구원의 정책토론회를 보도한 2000년 10월 11자 조선일보(1, 13면) 지면
분당·일산 이후 사실상 중단됐던 신도시 건설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른 순간이었다.
당시 건교부는 신도시 건설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을 의식, 전문 연구기관의 정책건의라는 우회적인 방식으로 신도시 건설을 끄집어낸 것이었다.
국토연구원은 이밖에 파주·고양지역(600만평), 의정부지역(300만평), 김포 남부지역(300만평), 화성 남서부지역(1000만평) 등 모두 7곳을 신도시 후보지로 지목, 한꺼번에 개발할 경우 1990년대 초반 1기 신도시의 부작용이 우려되는 만큼 우선 3곳을 먼저 개발할 것을 제안했다.
이에 대해 건교부는 “아직 신도시 건설과 관련된 결정을 내린 적은 없지만 최근 신도시 건설 필요성이 활발히 제기되는 만큼 곧 당정협의를 거쳐 건설계획을 발표할 것”이라고 화답한다.
난개발 대안은 ‘판교’
1990년대는 집값이 비교적 안정된데다 수도권 5개 신도시 건설의 부작용이 워낙 컸기 때문에 공개적으로 신도시 이야기를 꺼내기 힘든 분위기였다.
이런 분위기를 반영, 1999년 7월 당시 이건춘 건교부장관은 언론사 경제·사회부장과 가진 간담회에서 “용인 수지 일대의 준농림지에 대규모 아파트단지가 무분별하게 들어서 있는데다 판교까지 개발되면 분당에서 서울로 이어지는 지역의 교통난이 더욱 심화될 것으로 우려된다”며 “더 이상의 수도권 집중을 막기 위해 판교 일대에 대한 택지개발은 절대로 승인하지 않겠다”고 쐐기를 박는다.
그러나 꾸준한 주택공급의 필요성과 소규모 택지의 난개발 부작용 때문에 계획적인 신도시 건설의 필요성도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었다.
특히 판교 개발설이 흘러나온 것은 분당신도시 건설이 막바지였던 1994년부터다.
당시 토지공사가 건교부에 이 일대를 택지개발예정지구로 지정할 것을 요청했지만 자체 개발을 주장하는 성남시의 요구에 밀려 일단 무산됐다. 1998년 4월 건교부가 성남시의 개발계획을 받아들여 판교 일대를 개발예정용지(개발이 필요하다고 판단될 때 언제든지 사업에 착수할 수 있도록 허용한 땅)로 지정하면서 판교개발이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이후 1999년 7월 이건춘 장관의 ‘개발 불가’ 발언으로 잠시 주춤했던 판교개발은 2000년 1월 판교개발에 적극적이던 토지공사의 김윤기 사장이 신임 건교부장관으로 옮겨오면서 본격화된다. 김 장관은 취임 직후 기자간담회에서 “판교신도시 개발을 전향적으로 검토하되 교통, 환경, 수도권인구 집중문제 등을 감안해 개발방안을 최종 결정할 방침”이라고 밝힌다.
판교 땅값 들썩이기 시작
김 장관의 발언 이후 판교 일대의 땅값이 평당 200만원에서 250만원으로 들썩이자 3일 뒤인 22일 건교부는 “김 장관의 개인 소신일 뿐 판교개발은 검토한 적이 없다”며 한 발 물러선다.
그러나 같은 해 10월 건교부는 국토연구원의 정책건의라는 우회적인 방식으로 판교개발에 다시 불을 붙인데 이어 한달 뒤인 11월에는 당시 강길부 건교부 차관이 한국주택학회 주최 토론회에서 “난개발을 막기 위해서는 신도시 개발 이외에는 대안이 없다”며 굳히기에 들어간다.
이처럼 어렵게 개발 쪽으로 물꼬가 트이자 이번에는 경기도가 반대하고 나선다. 베드타운화와 수도권 남부 교통난이 이유였다. 여기에 환경단체까지 가세해 주민들도 찬반양론으로 갈리자 정부와 민주당은 2000년 12월 당정협의에서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 그해 말 만료예정인 판교의 건축제한 조치를 2001년 말까지 1년간 연장하는 것으로 어중간하게 봉합한다. 대신 경기 화성신도시는 본격 개발키로 확정한다.
경기도 “벤처단지 늘려라”
정부와 여당이 판교를 ‘저밀도 전원도시’로 개발한다는 원칙에 합의한 것은 2001년 5월.

2000년 이후 판교신도시 건설 논의는 숱한 논란과 갈등을 낳았다. 사진은 2001년 6월 말 당시 이해찬 민주당 정책위의장이 재경, 건교관계부처 장관, 경기지역 의원들과 당정회의를 마친 뒤 판교신도시 건설계획을 발표하는 모습
그러나 당정안은 곧 반대에 부딪힌다. 서울시는 서울 통근권 내에 신도시를 세우면 교통난이 가중된다는 이유로, 경기도는 자족도시가 되려면 벤처단지의 규모를 더 확대해야 한다는 이유로 반대에 나선 것이다.
특히 판교의 벤처단지를 10만평으로 정하려는 건교부 안에 대해 임창렬 경기지사는 “벤처단지를 최소 60만평으로 늘려 지식산업단지로 개발해야 한다”며 반대한다.
2001년 7월 4일 YTN-TV에 출연한 임창렬 경기지사와 조우현 건교부차관은 치열한 격론을 벌인다.
“조 차관=판교를 인구 6만명의 저밀도 전원형 신도시로 조성할 예정이다
임 지사=그렇게 되면 인구 6만명이 서울로 출퇴근하게 돼 교통난을 심화시킬 것이다.
조 차관=벤처단지를 60만평으로 하면 교통수요가 6배 늘어난다. 도로, 철도 건설에 재정을 투입해야 하는데 예산이 없다.
임 지사=인구밀도를 높여 놓고 일자리를 창출하지 않으면 베드타운화 된다. 경기도 땅을 개발하는데 경기도 의견을 무시하고 건교부가 일방적으로 하면 안 된다”
벤처단지 규모를 둘러싼 논란은 결국 같은 해 9월 29일 당정회의에서 벤처단지 규모를 건교부 안보다 10만평 늘린 20만평으로 하는 것으로 최종 마무리된다.
판교는 같은 해 12월 택지개발예정기구로 지정되면서 주택 1만9700가구를 2005년 12월까지 분양한다는 계획이 세워진다.
흔들리는 판교
그러나 2002년 들어 강남 재건축단지에서 시작된 집값 불안이 확산되자 판교신도시는 다시 흔들리기 시작한다.
2003년 9월 당정협의에서는 강남 집값 안정을 위해 판교신도시 주택수를 종전 1만9000가구에서 1만가구 늘어난 2만9700가구로 늘리고, 분양시기도 2005년 상반기로 앞당긴다. 이어 2004년 12월 실시계획 승인과정에서 임대주택 수가 종전 5940가구에서 1만661가구로 늘어난다.
분양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2005년 5월에는 환경부의 반대에 부딪혀 공급가구수가 종전 2만9700가구에서 10% 가량 줄어든 2만6800가구로 재조정된다.
이처럼 판교개발의 초점이 당초 난개발 방지에서 과밀억제→집값 안정→무주택자 주거안정→환경보호로 거듭 바뀜으로써 정책혼선을 자초한 측면이 적지 않다.
특히 김포, 파주신도시의 경우 2002년 9월 당초 ‘강남대체 신도시 건설방안’(9·4대책)으로 계획됐지만 1년 뒤인 2003년 5월 막상 발표될 때는 ‘자족형 신도시’로 성격이 바뀌면서 서울 강남권 수요를 분산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지적을 받았다.
물론 한번 정해진 결정이라도 변화된 상황에 맞춰 얼마든지 조정 가능하지만 당초 ‘제2의 강남’을 표방했다가 번복하는 등 오락가락함으로써 결국 시장불안의 단초를 제공했다는 것이 일반적 평가이다.
판교발 집값도 급등
특히 2005년 들어 집값 안정을 위해 추진된 판교가 거꾸로 집값을 올리는 ‘판교발 집값 폭등’ 현상은 지금까지의 계획과 정책을 전면 재검토하는 결정적 계기로 작용했다.

2005년 초 판교신도시 분양을 앞두고 분당, 과천 등 주변 집값이 크게 올랐다. 사진은 2005년 2월 중순 판교 일대 청약통장 불법거래 현장단속에 나선 국세청 직원들의 모습
2005년 초 판교 중대형 아파트의 평당 분양가가 평당 2000만원에 이를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자마자 분당의 대형 아파트 값이 1~2주일만에 5000만~1억원 오르고, 용인·과천 등 주변 집값도 덩달아 상승했던 것이다.
판교발 집값 폭등이 심상치 않자 정부는 같은 해 2월 따로따로 분양키로 했던 중소형과 대형아파트를 같은 해 11월 일괄 분양키로 결정(2·17대책)한다. 하지만 석 달 뒤인 5월 환경부의 반대로 공급가구수마저 축소되자 판교발 집값 폭등은 걷잡을 수 없을 지경에 이르고 만다. 경제정의실천연합 등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판교개발 전면 중단, 완전 공영제 실시’ 등의 주장이 나오기 시작한 것도 이 때쯤이다.
판교 분양 사흘전 ‘전면 중단’
사태가 악화되자 6월 17일 열린 부동산정책간담회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판교신도시에 대해 공영개발, 중대형건설 등의 말이 나오니 다 검토해보자”며 판교분양 전면 중단을 결정한다. 전용 25.7평 초과 택지분양을 불과 사흘 앞두고 내린 결정이었다.
당시 김수현 국민경제비서관의 증언이다.
“판교의 택지분양 일정 연기가 결정되자 아찔했다. 모두들 '설마 중지까지야...’하는 생각이었는데 대통령이 중지하자고 했다. 당쪽을 설득하기 위해 정세균 민주당 원내대표를 만나 양해해 달라고 부탁하고, 모든 과정을 중단하고 근본대책을 마련한 뒤 움직이기로 했다. 6월 17일 부동산정책간담회에서 누구도 아무 소리 못했다. 그날 회의 끝나고 롯데호텔 31층에 관계 장관들이 모였다. 김병준 정책실장이 장관들에게 “우리 다 사표내고 시작하자”고 했다. 이렇게 해서 두 달 말미가 주어졌고, 8·31정책 준비에 들어갔다.“
일시적이 아닌 ‘긴박한 위기상황’
대통령의 ‘판교신도시 사업 중단’ 결정은 정부 정책의 대전환을 예고하는 분수령이었다.
이해찬 총리, 한덕수 부총리, 추병직 건교부장관, 정문수 경제보좌관 등이 참석한 17일 부동산정책간담회의 보고자는 얼마 전 금융정보분석원장에서 재경부 차관보로 옮겨온 김석동 씨였다.
부동산 현안에서 다소 떨어져 있던 김 차관보가 관계 부처에서 올라온 자료를 취합해 보고서를 만들면서 가장 심혈을 기울인 부분은 당시 상황을 어떻게 규정하는가였다. 정확한 처방을 내리려면 가장 먼저 정확한 진단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일부에서는 여전히 당시 집값폭등이 일부지역 중심의 일시적 현상이라는 시각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김 차관보는 보고서에서 당시 상황을 특단의 대책이 필요한 긴박한 위기상황으로 규정했다. 자칫 잘못하면 집값 폭등이 전국으로 확산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어 보고서 말미에 첨부된 가능한 대책을 보고하려는 찰나 노 대통령이 입을 열었다.
“상황파악은 제대로 된 것 같다. 그러나 그 정도 대책으로 되겠는가. 현재의 집값 폭등을 잠재우려면 원점에서부터 모든 문제를 점검해 근본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이 한 마디에 모든 것이 제로베이스에서 재검토되기 시작했고, 김 차관보는 대책반장을 맡게 됐다.
“다시 원점에서부터 근본대책 마련하라”
8·31대책 준비과정은 이전과는 달랐다. 예전에는 주무부처인 건교부가 중심이 돼 관계부처와 업무협조를 하는 수준이었지만 이번에는 재경부, 건교부, 행자부, 청와대 등을 한 팀으로 묶어 공동작업을 진행했다. 5선 의원인 이해찬 총리를 중심으로 당정협의의 틀도 마련했다. 여당인 열린우리당에서는 안병엽, 채수찬 의원 등이 참석했다. 또 사전조율을 위해 당정협의회 산하에 실무기획단을 운영했다.

7월 6일 1차 회의를 시작으로 발표 당일날인 8월 31일 오전까지 모두 8차례 진행된 당정협의에서는 매 회의 때마다 정해진 주제에 따라 △세제개편 △주택공급 및 개발이익환수 △서민주거안정대책 △주택공영개발 확대 및 판교개발 △토지시장 안정화 대책 △신규택지 공급확대 등이 논의됐다.
권도엽 전 건교부 정책홍보관리실장은 “매주 수요일 열리는 정례 회의에 맞춰 관련 데이터를 만들어야 했다”며 “실무자들이 탈진해 쓰러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신경을 많이 썼다”고 말했다.
“세세한 통계자료가 없네”
특히 공급확대의 총대는 주로 재경부가 멨다. 주무부처인 건교부가 공급확대를 주장했다가는 자칫 ‘제 밥그릇 챙기기’라는 괜한 오해를 살 소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상 공급계획을 마련하려고 보니 ‘연간 전국 50만호, 수도권 30만호’라는 대략적인 계획 외에는 세밀한 통계자료가 없었다. 주택관련 통계를 재정비하는 문제가 시급한 현안으로 떠올랐다. 그래서 대책반에서 건교부의 각종 기초 자료를 일괄 수합한 뒤 여러 자료를 비교해 신뢰할 만한 통계로 만드는 작업을 착수했다. 이와 함께 그동안 행정자치부와 건교부로 나눠져 있던 통계자료를 교통정리하는 등 통계시스템을 체계화하는 작업을 병행했다.
2005년 8·31정책은 세제 등 투기수요억제, 공급, 서민주거 등 모든 분야에서 참여정부 부동산정책을 집대성한 것이었다.
특히 공급부문과 관련, 우선 판교신도시 분양이 전용면적 25.7평 이하는 2006년 3월로, 초과는 2006년 8월로 각각 미뤄졌다. 또 중대형 물량이 당초(6640가구)보다 3000여 가구 늘어났다.
이해찬 총리 “송파로 가자”

지속적인 공급확대를 위해 연간 300만평씩 5년간 1500만평을 확보(필요시 추가 확보)키로 한 것도 특징적이었다. 강력한 투기억제대책과 함께 가시적인 공급확대 계획이 적절히 조화를 이룬 것이다.
이를 위해 송파신도시(200만평)를 추가 건설하고, 김포, 양주신도시의 규모를 종전보다 337만평 늘려 총 542만평의 택지를 확보했다.
특히 송파신도시는 당시 이해찬 국무총리의 아이디어였다. 당시 건교부 권 실장의 증언이다.
“과거 대책발표 때는 공급과 관련해 대략적인 방향만 제시하는 것이 기본이었는데, 8·31정책 때는 신도시 건설 후보지로 송파를 딱 꼬집었다. 처음에는 아무도 구체적인 위치까지 정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당시 회의를 주관하던 이해찬 총리가 제안한 것이었다. 이 총리는 즉시 강남수요 대체효과를 볼 수 있고, 보상 등의 문제로 개발이 어렵지 않은 곳을 물색한 결과 대부분 국공유지였던 거여동 부근 땅을 눈여겨보게 된 것 같다.”
곧바로 효과가 나타나지 않았다
시장심리를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손에 잡히는 공급계획을 가시화시킬 필요가 있었다. 특히 강남수요를 효과적으로 대체할 수 있다면 최상이었다. 여러 곳을 검토한 끝에 송파신도시가 새로운 신도시 후보지로 확정된 것은 8·31정책 발표를 불과 1주일 앞둔 시점이었다. 이해찬 총리가 군 당국자를 설득하기 위해 전방위로 뛰어다니지 않았다면 불가능했다는 것이 당시 관계자들의 증언이다.
또 김포·양주신도시의 면적 확대는 이 지역에서 수행되는 군사작전에 지장이 없도록 보완장치를 마련키로 국방부와 합의한 뒤에야 발표할 수 있었다.
이후 파주신도시 확대(212만평), 검단신도시(340만평) 추가 건설 등을 통해 택지확보가 지속적으로 이뤄졌지만 주택공급까지 걸리는 4~5년간의 시차로 인해 즉각적인 주택공급효과는 나타나지 않았다.

노무현 대통령의 진노
노무현 대통령은 2005년 8·31정책에 담긴 공급계획을 차질 없이 추진할 것을 주무부처에 여러 차례 독려하는 한편 기회가 있을 때마다 주택공사 등 공공부문에서 주택공급을 늘려줄 것을 주문했다. 민간 건설사들의 공급이 위축되더라도 공공부문에서 메워주면 된다는 판단에서였다.
2006년 4월 25일 주거복지정책 토론회에서 노 대통령은 건교부·주공으로부터 임대주택건설계획 등을 보고받은 뒤 “주택공사 사장님한테 내가 화끈하게 밀어드리겠다고 몇 번이나 얘기를 했는데, 돈 빌려다 쓰십시오. 정부가 뒷감당 해 주겠습니다. (중략) 재정능력에 따른 공급정책이 아니라 수요에 맞춘 공급대책으로 전환합시다”며 공급확대를 독려했다.
노 대통령은 또 “수요를 판단하는 데 있어서 시끄럽지 않다고 수요가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최저 주거기준, 그리고 단칸방, 옥탑방을 제대로 파악해서 양적으로 수요를 채울 수 있는 정잭을 세워야 합니다. 우선 잠정적인 조사라도 해 가지고 예산을 짤 때는 확실히 반영해 근본적으로 바꿔주시기 바랍니다”고 당부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8·31정책의 공급계획을 차질없이 수행할 것을 여러차례 독려했다. 사진은 2006년 8월 말 청와대에서 열린 '8·31정책 1주년 회의'를 주재하는 노 대통령 모습.
이어 같은 해 8월 31일 청와대에서 열린 ‘8·31정책 1주년 부동산정책회의’에서도 “주공, 토공 등 공공부문이 서민주택의 시장가격 조절에 개입할 수 있는 수준으로 주택을 공급해야 하며, 이를 위한 자금조달 문제 등은 관계부처와 협의해 신속히 추진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노 대통령의 의도와 달리 주택공급은 갈수록 줄어들고 있었다.
꾸준한 택지확보에도 불구하고 공급시차에 따른 주택공급 감소로 2006년 9월 추석을 전후해 전셋값과 집값이 오르기 시작했다.
청와대 관계자는 “2006년 하반기 집값 폭등 사태에서 알 수 있듯이 그동안 공급시차에 충분히 대비하지 못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대통령이 진노해 관련자들을 강하게 질책했다”고 말했다.
송파 이어 새로운 분당급 신도시
이에 따라 같은 해 11월 발표된 11·15대책에서 정부는 ‘수도권 주택공급 로드맵’에 가장 신경을 썼다.
이 로드맵에 따르면 2010년까지 수도권 지역에 164만가구(공공택지 86만7000가구, 민간택지 77만3000가구), 연 평균 36만4000가구를 공급하게 된다.
이어 2006년 말 추병직 장관 후임으로 건교부장관에 오른 이용섭 장관은 취임하자마자 분당급 신도시 입지 발표 시기를 2007년 상반기로 못 박았다. 하루빨리 시장의 불안심리를 안정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1990년 초 분당·일산 등 1기 신도시를 지을 때는 모든 것이 속전속결로 이뤄졌다. 그러나 지금은 난개발 등 부작용에 대한 반성으로 친환경 계획개발의 기조가 강화됐고, 또 갈수록 심화되는 택지난 등으로 인해 예전 같은 방식의 신도시 건설은 힘들어졌다.
이에 따라 정부는 2006년 11·15대책에서 향후 수급상황을 고려한 구체적인 ‘수도권 주택공급 로드맵’을 발표하는 한편 택지개발절차를 간소화해 개발기간을 종전보다 1년 여 앞당기는 등 공급시차로 인한 일시적 집값 불안을 해소하기 위한 다양한 장치를 제도적으로 마련하고 있다.
| 특별기획팀 | 등록일 : 2007.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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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간 불균형 개발의 결과인 수도권 집중, 핵가족화와 고령화로 인한 도시 가구수 증가 등으로 주택 수요는 공급을 앞질렀지만 주택부족 문제를 구조적으로 해결하려는 노력은 미흡했다. 민간자본에 크게 기댄 주택시장 구조는 주택을 투기대상으로 보는 심리를 키웠다.
지난 40년간 투기억제와 경기활성화라는 두 가지 목표 사이에서 일관성 없는 정책이 추진되면서 주기적 집값 상승과 ‘부동산 불패’라는 잘못된 믿음을 심어줬고, 적절한 대체투자 시장의 미성숙은 자본의 부동산 쏠림 현상을 가속화했다. 불투명한 시장 구조와 세제상의 허점도 많았다. 공시가격과 실제 가격이 크게 달라 진짜 가격을 알기 힘들고, 가격 부풀리기와 이중 계약서로 세금탈루가 관행처럼 이뤄졌다. 편법과 허점투성의 거래 환경은 많은 국민들을 부동산 투기라는 유혹 속으로 끌어들였다.
정부는 지금도 과거 ‘투기시대 패러다임’과 씨름하고 있다. 이는 투기로 병든 우리 부동산 시장을 근본부터 치유하고 정상화하는 힘겨운 과정이다.
국정브리핑이 주택도시연구원·국토연구원·금융연구원과 공동으로 기획한 <실록 부동산정책 40년>은 ‘제1부, 왜 올랐나’에 이어 '제2부, 어떤 정책을 폈고, 왜 못잡았나' 를 통해 정부의 부동산 정책이 어떤 우여곡절 끝에 탄생 했으며 역사적 의미와 쟁점은 무엇인지 점검한다. 2부의 두번째 주제로 <안정적 주택공급 정책>을 4회에 걸쳐 연재한다. <편집자>
제2부 어떤 정책 폈고, 왜 못잡았나
<안정적 주택 공급>
① 수도권 집중과 신도시 건설-1
② 수도권 집중과 신도시 건설-2
③ 부동산과 택지조성의 방정식
④ 서민 내집 마련을 위한 금융지원







| 특별기획팀 | 등록일 : 2007.03.05
2만불 시대 주택, 5만불 시대 주택
친환경 계획개발이냐, 원활한 주택공급이냐 [실록 부동산정책 40년 ⑪] 부동산과 택지조성의 방정식
친환경 계획개발이냐, 원활한 주택공급이냐 [실록 부동산정책 40년 ⑪] 부동산과 택지조성의 방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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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간 불균형 개발의 결과인 수도권 집중, 핵가족화와 고령화로 인한 도시 가구수 증가 등으로 주택 수요는 공급을 앞질렀지만 주택부족 문제를 구조적으로 해결하려는 노력은 미흡했다. 민간자본에 크게 기댄 주택시장 구조는 주택을 투기대상으로 보는 심리를 키웠다.
지난 40년간 투기억제와 경기활성화라는 두 가지 목표 사이에서 일관성 없는 정책이 추진되면서 주기적 집값 상승과 ‘부동산 불패’라는 잘못된 믿음을 심어줬고, 적절한 대체투자 시장의 미성숙은 자본의 부동산 쏠림 현상을 가속화했다. 불투명한 시장 구조와 세제상의 허점도 많았다. 공시가격과 실제 가격이 크게 달라 진짜 가격을 알기 힘들고, 가격 부풀리기와 이중 계약서로 세금탈루가 관행처럼 이뤄졌다. 편법과 허점투성의 거래 환경은 많은 국민들을 부동산 투기라는 유혹 속으로 끌어들였다.
정부는 지금도 과거 ‘투기시대 패러다임’과 씨름하고 있다. 이는 투기로 병든 우리 부동산 시장을 근본부터 치유하고 정상화하는 힘겨운 과정이다.
국정브리핑이 주택도시연구원·국토연구원·금융연구원과 공동으로 기획한 <실록 부동산정책 40년>은 ‘제1부, 왜 올랐나’에 이어 '제2부, 어떤 정책을 폈고, 왜 못잡았나' 를 통해 정부의 부동산 정책이 어떤 우여곡절 끝에 탄생 했으며 역사적 의미와 쟁점은 무엇인지 점검한다. 2부의 두번째 주제로 <안정적 주택공급 정책>을 4회에 걸쳐 연재한다. <편집자>
제2부 어떤 정책 폈고, 왜 못잡았나
<안정적 주택 공급>
① 수도권 집중과 신도시 건설-1
② 수도권 집중과 신도시 건설-2
③ 부동산과 택지조성의 방정식
④ 서민 내집 마련을 위한 금융지원
2006년 하반기 은평뉴타운 고분양가 파동 등으로 촉발된 집값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같은해 11월 발표된 11·15대책에는 앞으로 짓는 신도시, 국민임대단지의 개발밀도를 높이는 방안이 포함됐다. 기존보다 녹지율을 줄이고 용적률을 높여 한정된 공간 안에 더 많은 아파트를 지어 주택공급도 늘리고, 분양가도 낮추겠다는 취지였다.
이에 따라 김포, 파주, 광교 등 2기 신도시의 용적률이 종전 평균 175%에서 191%로 16%포인트 높아지고, 녹지율은 종전 평균 31.6%에서 27.2%로 4.4%포인트 줄었다.
2005년 5월 분양을 얼마 남겨놓지 않은 시점에서 판교신도시의 공급가구수가 환경부의 거센 반발에 부딪혀 종전 2만9700가구에서 2만6800가구로 10% 가량 줄어든 지 1년 여 만이다.
2006년 11·15대책의 기본 취지는 한정된 땅을 좀 더 효율적으로 활용하자는 것이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2000년 이후 강조됐던 ‘친환경 계획개발’의 기조가 주택공급 확대라는 현실론쪽으로 다소 기울어진 것이다.
‘친환경 계획개발이냐, 원활한 주택공급이냐.’
2000년 이후 주택 정책의 최대 딜레마 중 하나인 이 문제의 배경에는 집을 지을 땅(택지)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구조적 원인이 자리잡고 있다.
원활한 택지확보를 위한 노력
주택문제를 풀려면 먼저 땅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이 구체화된 것은 1980년 12월 제정된 ‘택지개발촉진법’(택촉법)에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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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택 500만호를 짓기 위해 신규택지를 확보하고, 이를 위해 택지개발촉진법을 제정하겠다'는 정부 발표를 보도한 1980년 10월 3일자 조선일보 |
이 법은 특정지역의 땅을 건설부장관이 택지개발예정지구로 지정하면 이 땅에 적용되는 도시계획법 등 19개 관련법령의 효력을 일시에 정지시킨 뒤 한국토지공사, 대한주택공사, 지방자치단체가 일괄 매수해 택지로 개발할 수 있도록 허용한 법이었다.
이 법은 원래 5공화국의 주택 500만호 건설계획을 뒷받침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후 500만호 건설계획은 여러 현실적 난관에 부딪혀 흐지부지됐지만 대규모 택지확보 계획은 택촉법 제정으로 결실을 맺었다.
이 법에 의해 1993년 말까지 서울 개포동(242만평), 고덕동(90만평), 상계동(112만평), 목동(130만평) 등 전국 406개 지구, 7700만평의 땅이 택지로 개발됐다. 6공화국 들어 분당·일산 등 5개 신도시 건설이 가능했던 것도 이 법 덕분이었다. 홍철 전 청와대 경제비서관의 평가다.
체비지 팔아 사업비 충당
“5공 시대의 부동산 정책이 만족스러울 정도라고 할 순 없다. 그러나 비교적 집값을 안정시킬 수 있었던 것은 역시 집을 꾸준히 지었고, 또한 그렇게 집을 지을 수 있는 땅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맨 처음 들고 나온 것이 개포지역 개발사업이었다. 개포에 이어 고덕지구를 100% 공영개발로 착수했고, 그걸 끝내고 나서 또 다른 대단위 개발지역을 찾다가 나온 것이 목동지구였다. 이것은 서울시가 주도했던 것인데 한편으로는 주택공사가 중심이 되어서 상계동 개발작업이 추진됐다”
택촉법이 제정되기 전 택지확보는 주로 토지구획정리사업을 통해 이뤄졌다.
급속한 경제성장으로 1960년대 37%에 불과했던 도시화율이 1970년 51%까지 확대되면서 서울·부산·대구·인천 등 대도시를 중심으로 급속한 도시화에 따른 문제점들이 불거졌다. 종전의 도시규모나 도시계획법을 가지고는 적절한 도시개발을 시행하는데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늘어나는 도시인구를 효과적으로 수용하기 위해서 신규 대단위 택지조성, 도로 신설과 확장 등 도시계획시설 확충을 쉽게 하는 것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에 따라 1966년 8월 기존 도시계획법에서 토지구획정리사업법이 분리, 제정된다.
토지구획정리사업이란 자연상태의 땅을 택지로 조성하면서 원 토지면적에서 일부를 떼어내(감보) 공공용지로 활용하고, 이중 일부 땅(체비지)을 팔아 사업비를 충당하는 환지방식을 말한다.
강남 개발도 구획정리를 통해
서울시의 ‘서울토지구획백서’(1990년 발간)에 따르면 1960년대 이후 1990년까지 서울에서만 여의도 면적(87만평)의 43배에 달하는 땅(3686만평)이 구획정리돼 택지나 공공용지로 개발됐다.
특히 1960, 70년대의 강남 개발을 뒷받침했던 것도 토지구획정리사업이었다.
정부는 1968년 제3한강교~양재동 구간의 경부고속도로 용지를 확보하기 위해 이 구간 428만평(영동 1지구 구획정리사업지구, 이후 520만평으로 확대)을 확보한데 이어 1970년 삼성동에 상공부 산하 12개 국영기업체가 들어설 종합청사 부지를 마련하기 위해 이 일대 365만평(영동 2지구) 등 모두 합쳐 총 900만평의 땅을 토지구획정리사업으로 개발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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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70년대 급속한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현재의 서울 강남 지역은 토지구획정리사업 방식으로 대규모 택지공급이 이뤄졌다. 사진은 삼성동 무역센터에서 바라본 영동대로 일대 전경. |
그러나 토지구획정리사업은 체비지를 통해 사업자금을 마련할 수 있어 재정부담이 적은 반면 토지개발과정에서 땅값이 급등해 투기가 극성을 부리는데다 사업기간이 길어 신속한 택지 확보에 어려움이 많았다.
이러한 어려움을 해결하고, 속전속결로 필요한 택지를 확보하기 위해 제정된 것이 바로 택촉법이었다.
시가보다 훨씬 낮은 값으로 공장용지 수용
한편 급속한 산업화과정에서 필요한 공장용지는 도시계획법(1962년 1월 제정)과 산업기지개발촉진법(1973년 12월)을 통해 공급됐다.
1960년대 소규모 경공업단지 조성은 도시계획법이 활용돼 서울 영등포기계공단, 부산 사상·신평공단, 인천 기계공단, 서대구공단, 성남공단 등 대도시 주변의 공단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1973년부터 자본집약적 중화학공업화가 추진되면서 기존 도시계획법으로는 대규모 중화학공업단지를 조성하는데 한계가 많았다. 도시계획구역 안에 산업기지를 설치하기에는 단지 규모가 너무 컸고, 기지조성을 위한 토지구입비도 너무 방대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1973년 12월 산업기지개발촉진법을 제정, 이 법을 통해 반월·광양·창원·여천·울산·포항 등 19개 지역에서 총 1억7210만평, 우리나라 전체 공업단지의 약 70%를 마련할 수 있었다. 또 1972년 제정된 국토이용관리법을 통해 공공사업의 수용보상가를 정할 때 시가보다 현저히 낮은 기준지가를 적용케 함으로써 천문학적인 보상비용 부담을 해결할 수 있었다.
그린벨트 안쪽 땅은 바닥났다
택촉법이 아무리 강력한 법이라고 하더라도 제한된 땅에서 택지공급을 무작정 늘리는데는 한계가 있었다. 이미 1980년대 말에는 서울 안에 개발 가능한 택지는 거의 소진된 상태였기 때문에 수도권 5개 신도시는 그린벨트를 뛰어넘어 서울로부터 반경 20㎞ 범위 안에 위치할 수밖에 없었다.
수도권 5개 신도시 건설 당시 건설부장관이었던 박승 씨의 증언이다.
“당시 상황을 점검해봤더니 서울 시내에 집지을 땅이 없었다. 그때만 해도 그린벨트는 절대 손댈 수 없다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땅은 없고, 그린벨트는 손댈 수 없으니 대안은 그린벨트 밖에 신도시를 짓고, 지하철로 교통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신도시 후보지로 평촌, 산본, 중동, 분당 4곳이 나왔다”
하지만 1994년 신도시 건설이 마무리될 쯤 신도시는 애물단지로 전락해 있었다. 신도시 건설과정에서 불거진 자재·임금파동과 그칠 줄 모르는 부실공사 시비는 정부 안에서조차 신도시를 거론하는 일 자체를 금기로 만들었다. 문민정부 시절 모 건설부장관이 신도시 얘기를 꺼냈다가 교체되는 일까지 벌어질 정도였다.
그러나 신도시를 짓지 않더라도 택지공급은 원활히 이뤄져야 했다. 택지공급이 막히면 주택공급이 끊어져 결국 집값 불안이 재연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준농림지라는 묘수
이에 따라 대안으로 등장한 것이 1994년 도입된 준농림지 제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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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농림지 제도 도입을 보도한 1993년 9월 21일자 중앙일보 |
집이나 공장을 지을 수 있는 도시용지 공급을 늘리고, 민간에 의한 토지개발을 촉진할 목적으로 1993년 8월 전면 개정된 국토이용관리법을 통해서였다. 이 개정안을 통해 종전까지 10개로 나눠졌던 용도지역이 5개(도시/준도시/농림/준농림/자연환경보전지역)로 단순화됐고, 특히 준농림지역 안에서 민간이 손쉽게 토지개발사업을 할 수 있도록 한 것이었다.
특히 당시 준농림지 제도가 도입된 배경에는 기존 신도시 건설에 대한 거부감 외에도 1990년대 불기 시작한 세계화(당시에는 ‘국제화’라는 다소 모호한 개념으로 불림) 추세 속에서 탈규제(de-regulation), 민영화(privatization)의 요구가 거셌기 때문이다. 당시 문민정부는 ‘신경제 5개년 계획’이라는 이름으로 이러한 세계적 추세를 뒤쫓고 있던 참이었다.
1994~1998년까지 준농림지에서 민간에 의한 택지개발량은 여의도 면적(87만평)의 8배에 달하는 총 678만평에 이른다. 그러나 민간에 의한 무분별한 토지개발은 1990년대 후반부터 난개발과 환경파괴 등 심각한 사회문제로 부각된다.
난개발, 포도송이처럼 주렁주렁
준농림지 제도 도입은 당시까지 택촉법에 의한 공영개발 위주였던 택지 공급의 주도권이 민간으로 넘어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규제완화로 준농림지에 대한 민간 개발이 봇물을 이루면서 전국은 난개발의 몸살을 앓기 시작했다. 서울과 가까운 용인, 화성, 남양주, 이천, 고양군 일대는 도로변을 따라 러브호텔과 대형 갈비점이 빼꼭히 들어차기 시작했다. 또 분당, 일산 등 기존 신도시의 잘 갖춰진 기반시설에 무임승차하기 위해 신도시 주변에 포도송이처럼 주렁주렁 단독주택이나 소규모 아파트촌이 형성되면서 이 일대의 교통난 등이 심화됐다.
특히 1995년 7월 외지인도 거주지에 관계없이 논밭을 사고 팔 수 있는 방향으로 농지법이 개정되자 무분별한 준농림지 개발이 더욱 기승을 부렸다.
이어 같은해 10월 건설교통부가 국토이용관리법 시행령을 고쳐 음식점 및 숙박시설의 설치를 지방자치단체 조례로 제한할 수 있도록 했지만 지방세 확보에 눈이 먼 대부분의 지자체들이 그대로 방치함으로써 난개발은 아무 규제를 받지 않는 실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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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준농림지가 도입되면서 서울 인근 강변, 도로변을 따라 러브호텔 등이 우후죽순으로 들어서면서 환경오염과 난개발을 부추겼다. 사진은 경기도 가평군 청평호 부근에 들어선 건물들. |
당시 상황에 대해 한 언론(중앙일보, 1996년 10월 28일자)은 이렇게 보도하고 있다.
러브호텔 음식점 카페 호프집
“국토이용관리법 개정에 따라 경기도 내 총 면적 1만163㎢ 중 33%인 3312㎢가 준농림지역으로 지정됐다. 그러나 준농림지역 지정 이후 △94년 1598㎢ △95년 1887㎢ △96년 8월 말 현재 456㎢ 등 총 3942㎢의 준농림지역이 타 용도로 전용됐다.
대신 이곳에는 농촌지역에 어울리지 않는 러브호텔 등 숙박업소 206곳, 음식점 2483곳, 아파트 250동, 다가구주택 897동, 주유소 78곳 등이 들어서 미관을 크게 해치고 있다. 이 때문에 특히 양평, 광주군 등 남한강변과 경기도내 국도, 지방도변에는 휘황찬란한 네온사인과 대형간판을 내건 러브호텔, 대형 음식점, 호프집, 카페, 찻집들이 즐비하게 들어서 마치 도시지역의 유흥가처럼 돼 버렸다.”
이처럼 사태가 심각해지자 1996년 10월 당시 최양부 청와대 농림해양수석은 비서관회의에서 김영삼 대통령에게 “94년 준농림지역에서의 자유로운 농지전용 시책 이후 러브호텔과 음식점들이 무질서하게 들어서고 이에 따른 땅값 상승, 환경파괴로 전면개선이 불가피해졌다”며 “사치성 향락시설과 공해업체의 무질서한 개발, 분산 입지를 최대한 규제해 나가겠다”고 밝힌다.
이어 농림부의 농지법 시행령 개정으로 1997년 1월부터 무분별한 준농림지 농지전용이 억제된다.
또 같은해 9월 국토이용관리법 시행령 개정을 통해 준농림지 내 아파트 건립 기준을 용적률 100% 이하(종전 400% 이하)로 강화하고, 최소 건립 주택수는 300가구 미만(종전에는 50가구 이내 소규모 개발도 가능)으로 현실화했다.
그러나 준농림지에 대한 규제는 곧이어 닥친 IMF외환위기 여파로 유야무야된다. 1998년 12월 ‘건설 및 부동산경기 활성화대책’으로 준농림지에 대한 토지이용 규제가 대폭 완화된 것이다.
난개발 용인시 연이은 감사 홍역
경기활성화 대책으로 준농림지에 대한 규제가 느슨해진 틈을 타고 마구잡이 개발이 다시 기승을 부리자 2000년 들어 난개발을 규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거세게 일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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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이후 마구잡이 주택건설에 따른 난개발은 커다란 사회문제로 떠올랐다. 사진은 난개발의 대명사였던 용인지역의 한 아파트 공사장 현장. |
2000년 3월 국내 양대 환경단체의 하나인 녹색연합 환경소송센터는 ‘수도권 난개발 저지 시민연대’를 결성, 용인·파주·김포 등 난개발 피해주민들로 구성된 원고인단을 구성해 집단소송을 추진하겠다고 밝힌다.
난개발에 대한 사회적 비난여론이 커지자 같은해 4월 건교부와 경기도는 용인지역의 신축허가를 향후 1년간 묶고, 분당선 오리~기흥~수원 노선 등을 조기 완공한다는 교통대책을 담은 ‘수도권 난개발 방지대책’을 내놓는다.
특히 난개발의 대명사가 된 용인시청은 건축 인·허가 과정에 대한 경기도 감사(4월 24~28일)를 시작으로 감사원 특별감사(5월 17일~30일), 건교부 감사(6월 7일~30일) 등 연이은 감사로 홍역을 치러야 했다.
"장관직을 걸고 준농림지 대책 마련하라"
같은 해 5월 3일 당시 김윤기 건교부장관의 업무보고에서 김대중 대통령은 “수도권 인구집중은 국가안보 차원에서도 위험하고, 경제효율성 면에서도 비능률적”이라며 “장관직을 걸고 획기적인 수도권 과밀해소 대책을 시행하라”고 지시한다.
대통령까지 나서 난개발 방지대책을 지시하자 정부는 부랴부랴 같은 해 5월 30일 ‘난개발 종합대책’을 발표한다.
대책의 골자는 마구잡이 개발의 주범인 준농림지 제도를 아예 없애고, 전 국토를 개발대상지와 보전대상지로 분류해 개발대상지는 ‘선(先)계획 후(後)개발’을 유도하고, 보전대상지는 철저히 보전한다는 것이었다.
8년만에 사라진 준농림지
이 대책은 2002년 2월 제정된 ‘국토의 계획 및 이용에 관한 법률’(국토계획법, 시행은 2003년 1월 이후)로 구체화된다.
기존 국토건설종합계획법, 국토이용관리법, 도시계획법 등 3개 법률을 통합한 이 법에 따라 종전 5개였던 용도지역이 4개(도시/관리/농림/자연환경보존지역)로 재조정되면서 1994년 도입된 준농림지는 도입 8년 만에 사라지게 됐다.
이에 대해 김용창 서울대 교수는 “준농림지 개발을 허용한 것은 토지공급을 늘리기 위함이었고, 현재 준농림지에서 일어나고 있는 문제들이 토지공급의 증가를 포기할 만큼 심각한 것은 아니었다는 일부 시장주의자들의 견해가 있지만, 이는 안이한 생각에 불과하다. 준농림지의 난개발 경험에서 보듯이 계획적 개발제도를 확고하게 정비하지 않고 성급하게 추진한 도시용지 공급확대는 엄청난 사회적 비용을 지불하게 된다”고 평가했다.
경향신문(2000년 12월 26일자)도 ‘부동산칼럼’에서 “난개발의 주범으로 지목됐던 준농림지제도 폐지 발표는 아파트 시장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용인 등 수도권 지역의 아파트 분양시장이 한파를 맞기는 했지만 쾌적한 주거환경을 보장받을 수 있다는 측면에서 긍정적”이라며 제도 폐지를 옹호했다.
허공에 뜬 300만평
2000년 준농림지 폐지가 공식화되자 한동안 잠잠하던 신도시 건설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른다.
첫 번째 포문을 연 것은 업계를 대표하는 상공회의소였다. 2000년 6월 21일 상공회의소는 “수도권의 무분별한 개발을 막고 주택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200만평이 넘는 대규모 신도시 건설이 시급하다”며 문산, 파주, 교하 등 경기 북부에 자족형 신도시를 건설해야 한다고 청와대, 건교부 등에 긴급 건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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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들어 준농림지가 폐지되자 신도시 건설이 다시 논의되기 시작한다. 사진은 신도시가 들어설 경부고속도로 판교IC 모습 |
사실 상공회의소의 긴급 건의는 건설업계의 요구이기도 했다. 2000년 7월말 현재 주택업체가 보유한 준농림지는 약 300만평으로, 금액으로는 약 5조원에 달했다. 막대한 규모의 자산이 묶이게 될 판인 건설업계로서는 신도시 건설을 통해 활로를 모색해야 했던 것이다. 또 주무부처인 건교부 역시 대통령까지 건설경기를 부양하라고 엄명한 상황인데다 계획적 개발이 가능한 신도시 건설에 긍정적이었다.
다시 고개든 신도시 건설
더욱 근본적으로 수도권 택지공급의 오아시스였던 준농림지 제도가 폐지되면 수도권 택지공급 부족이 결국 집값 불안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신도시 건설이 대안으로 떠오른 것이었다.
2000년 10월 10일 경기 안양시 국토연구원 강당에서 열린 ‘수도권 도시성장관리와 신도시개발’이라는 주제의 정책토론회는 그동안 묵혀뒀던 신도시 건설 카드를 공식화하는 행사였다.
이 행사에서 국토연구원은 판교(250만평), 화성군 중부지역(400만평), 충남 천안·아산지역(890만평) 등 3곳에 우선적으로 신도시를 건설할 것을 제안했고, 여전히 신도시 건설에 부정적인 여론을 의식한 건교부는 전문 연구기관의 정책건의를 받아들이는 형식으로 우회적으로 신도시 건설 논의를 공식화한 것이었다.
1990년대 초반 기피됐던 신도시 건설의 대안으로 각광받았던 준농림지가 숱한 부작용을 남긴 채 사라지자 다시 신도시 건설이 새로운 대안으로 떠오른 것이다.
친환경 계획개발이냐, 원활한 주택공급이냐
택지공급의 새로운 대안으로 신도시 건설이 떠올랐지만 2000년대의 상황은 1990년대 초반처럼 마구잡이식 신도시 건설이 불가능해졌다. 1990년대 말부터 환경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커지면서 토지개발사업이 힘들어지고, 그 과정도 기존 3년 내외에서 환경영향평가, 교통영향평가 등 환경규제 강화로 5~6년 가량이 걸리게 됐기 때문이다.
‘친환경 계획개발이냐, 원활한 주택공급이냐’라는 주택정책의 딜레마 중 전자가 대세로 굳어진 것이다.
2003년 1월부터 시행된 국토계획법에 따라 난개발이 제한되고 계획적 개발이 강조되면서 민간의 택지확보가 더 어려워졌다. 여기에 도심지 난개발을 막기 위해 주차장과 일조권 확보 요건이 강화되면서 연간 10만~20만호씩 지어졌던 다가구·다세대주택이 2003년부터 크게 줄어들었다.
특히 갈수록 늘어나는 택지개발비용도 원활한 택지공급을 어렵게 했다.
1990년대 초 분당신도시 개발 당시 수용보상가는 평균 평당 19만2000원 선이었지만 2000년 이후 판교신도시 개발에는 보상가가 평당 200만~300만원을 웃돌았다. 여기에 상하수도, 전기, 가스, 도로 등 각종 기반시설비용까지 보태져 판교신도시의 경우 조성원가만 평당 734만원에 달해 전체 분양가(평당 1300만~1857만원)에서 택지비 비중이 53%에 이르렀다. 2006년 하반기 고분양가 파동의 주역인 은평뉴타운의 경우 분양가(1151만~1523만원) 내 택지비 비중이 57.2%였다.
이처럼 주택공급을 위축시키는 모든 조건들에다 일부 지역의 고분양가 파동이 보태지면서 2006년 하반기 집값 상승현상이 본격적으로 나타났다.
이에 따라 같은 해 11월 발표된 11·15대책은 친환경 개발과 주택공급 확대라는 두 명제 사이에서 고민한 흔적이 역력하다. 이와 관련, 건교부 관계자는 “그동안 우리는 국민소득 2만불 수준에 살면서 주택공급정책은 5만불 시대를 지향했다”고 말했다.
여하튼 11·15대책은 토지의 효율적 이용을 기하여 주택공급물량을 늘리는 계획을 담았다. 개발밀도를 높이고 녹지율을 약간 낮추지만, 중심지는 압축개발해 대중교통 중심으로 생활편리성을 갖추도록 하고, 단지내 생태녹지율을 높이는 새로운 친환경개발기법을 도입하는 내용이 포함됐다.
5만달러 시대의 주택, 2만달러 시대의 주택
대책에서는 신도시와 국민임대단지의 개발밀도를 상향조정했고, 택지개발절차를 간소화해 신도시 개발기간을 종전보다 1년 여 앞당겼다. 또 기반설치비용을 지자체와 적절히 분담해 택지비 인상을 최대한 억제키로 했다.
친환경 계획개발이라는 큰 틀 안에서 민간주택공급을 촉진하기 위해 계획관리지역 내 2종 지구단위계획 구역의 용적률을 종전 150%에서 180%로 확대키로 했다. 다가구·다세대주택의 주차장 기준 완화 등도 포함됐다.
이를 통해 2010년까지 신도시 등 공공택지에서 86만7000호(53%), 민간택지에서 77만3000호(47%)를 각각 공급해 2007년부터 매년 수도권에 36만호를 공급한다는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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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지공급의 용이성만을 고려해 개발을 최우선으로 할 경우 준농림지의 난개발과 유사한 문제들이 또 다시 발생할 것이다. 또 계획개발이 필요한 지역보다 개발이익이 발생하는 곳을 중심으로 택지개발이 이루어져 국토공간이 왜곡될 수 있다.
반면 친환경 계획개발이 강조된 나머지 택지공급이 원활치 못할 경우 주택가격 상승을 초래해 국민들은 난개발 못지않은 부담이 생긴다. 난개발을 생각하면 환경규제는 당연히 이뤄져야 하지만 지속적인 주택공급을 위한 택지확보와 이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빚어지는 공급시차의 문제도 제도적으로 반드시 해결해야 할 숙제다.
| 특별기획팀 | 등록일 : 2007.3.6
“주택대출, 이러다 큰 일 납니다”
주택은행에서 주택금융공사까지 [실록 부동산정책 40년 ⑫] 서민 내집마련 위한 금융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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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어떤 정책 폈고, 왜 못잡았나
<안정적 주택 공급>
① 수도권 집중과 신도시 건설-1
② 수도권 집중과 신도시 건설-2
③ 부동산과 택지조성의 방정식
④ 서민 내집 마련을 위한 금융지원
2003년 2월, 참여정부의 첫 재정경제부 장관으로 내정된 김진표 씨의 집무실로 변양호 금융정책국장과 신제윤 금융정책과장이 찾아왔다. 이들의 첫 대면 업무보고의 핵심내용은 ‘주택대출 만기구조의 장기화’였다.
“외환위기 이후 시중은행들이 앞 다퉈 주택담보대출에 뛰어들면서 주택금융 이용도는 현격히 높아졌지만 대부분 3년 만기 변동금리 대출이다 보니 안정성은 급격히 떨어졌습니다. 금리 상승이나 집값 하락으로 가계의 채무불이행 위험이 높아지면 또 다른 금융위기로 이어질 수 있는 우려가 있습니다.”
신 과장(현 재경부 국제금융심의관)이 제시한 해법은 두 가지. “3년 위주로 돼 있는 주택담보 대출을 20년 이상 장기 고정금리 대출로 전환해 가계의 채무상환능력을 높이고, 또 급증한 금융권의 주택저당채권을 시장에 원활히 유통시켜(유동화) 금융기관의 위험도를 줄여줘야 합니다.”
이 두 가지를 전담할 공신력 있는 기관으로 ‘한국주택금융공사(가칭)’를 설립하는 방안이 보고됐고 김 내정자로부터 “좋은 아이디어다. 그대로 추진하자”는 지시가 내려졌다.
단기변동 금리 ‘싹쓸이’ 주택금융 우려 확산
당시 재경부 뿐만 아니라 한국은행과 금융감독위원회 등 금융정책 당국으로서는 취약한 단기 변동금리 주택대출 급증이 골칫거리였다. 시민단체와 학계·전문가 그룹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당시 KoMoCo(주택저당채권유동화회사) 유동화 팀장이었던 이중희 박사(현 한국주택금융공사 조사부장)는 “옛날 주택은행이 국책은행이었을 때는 주택대출이 장기 분할상환이었으나, 외환위기 이후 단기 일시상환대출로 급격히 바뀌었다. 1998년만 해도 신규 취급 대출의 4분의 3이 20년 이상 장기대출이었으나 2002년 1분기에는 정반대로 3년 이하 단기 대출이 약 4분의 3이나 차지했다”며 “시중은행이 단기 변동금리로 ‘싹쓸이’ 해버린 주택대출시장에 대해 참여정부 출범 직전인 2002년 말부터 ‘이러다 큰 일 난다’는 우려가 폭넓게 형성됐다”고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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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경부의 의뢰로 건국대 사회과학연구소 고성수 교수가 분석한 보고서(2003년 9월)는 “주택담보대출 증가분 중 만기 3년 이하 단기 일시상환 형태의 대출이 77%에 달해 향후 경기변동에 따라 주택대출 부실화 및 금융기관 부실화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며 “이 같은 한국의 대출구조는 미국의 대공황기에 엄청난 문제를 일으켰던 단기일시상환형 대출과 유사하다”고 경고했다.
“주택금융공사법이 통과되도록 도와주십시오”
취약한 주택대출구조에 따른 금융 위험을 낮추고, 장기 고정금리로 주택구입자금을 빌려줘 서민들의 내 집 마련 기회를 넓히기 위해 ‘주택금융공사’라는 별도 기관을 설립하는 방안은 그해 3월27일 청와대에서 열린 참여정부 첫 경제정책조정회의에서 보고됐고 곧바로 공식 발표됐다.
이어 2003년 9월9일 국무회의. 김진표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이 그해 정기국회에 제출될 한국주택금융공사법에 대해 설명하고 법안에 대한 국무회의 의결이 끝나자 노무현 대통령이 각별한 관심을 표명하며 각료들에게 당부했다. “이 법안은 주거안정의 획기적 전기를 마련하는 것이고 나아가 부동산 안정에 크게 기여하는 대표적인 민생법안인 만큼 통과될 수 있도록 전 각료들이 노력해 주십시오.”
서민들 내 집 마련에 ‘물꼬’
노 대통령의 지적대로 주택금융공사법안의 목표는 “서민·중산층 주거안정을 위한 획기적 전기를 마련하고 부동산 안정에 근본적으로 기여하기 위해” 주택금융공사를 2004년 1월 설립하는 것이었다.
주택금융공사는 은행 등 금융기관을 통해 장기 주택자금을 대출하면서 생기는 주택저당채권을 현금으로 사들이고, 이를 담보로 주택저당증권(MBS:Mortgage-Backed Securities)을 발행해 이를 채권시장에 유통시켜(유동화) 보험사나 투신사·연기금 등 기관투자가들로부터 장기자금을 조달해 다시 서민들에게 장기 주택구입자금인 모기지론을 공급한다. 주택금융공사가 발행하는 MBS는 국가기관이 하는 만큼 신용도가 높고 한도가 자기자본의 50배까지 발행할 수 있어 공사의 자본금이 2조원으로 확충될 경우 최고 100조원의 주택자금을 조성할 수 있다.
주택금융공사가 설립되면 10년 이상 장기 주택구입자금을 대출 받을 수 있어 서민·중산층의 내 집 마련 기회를 촉진하게 된다. 당시 재경부의 시뮬레이션으로는 월 소득 250만원인 직장인의 경우 월 68만원을 부담(20년 만기 1억원 대출, 세제혜택 감안)하면 1억5000만원 수준의 25평형 아파트를 구입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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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3월2일 한국주택금융공사 출범 및 현판식에 이헌재(왼쪽)경제부총리와 박승(오른쪽) 한국은행 총재가 함께 입장하고 있다 |
그해 9월 국회에 제출된 법안은 정기국회 파행으로 12월29일 본회의를 통과했고 이듬해인 2004년 3월2일 주택금융공사가 출범했다. 2006년6월까지 주택금융공사는 총 11만1000가구에 10년 이상 장기 고정금리로 8조원의 주택구입자금을 지원했다.
장기 저리의 주택구입자금 대출 제도가 성숙되지 않아 내 집을 마련하지 못했던 서민들에게 ‘물꼬’가 트이고, 금융기관의 과잉경쟁으로 뒤틀린 우리나라 주택금융시장을 바꾸는 ‘씨앗’이 뿌려진 셈이다. 1967년 주택은행에서부터 2004년 주택금융공사 설립까지 서민의 내 집 마련을 위한 자금 지원과 주택건설 위한 주택금융의 뒷자락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우선분양권 쥔 주택은행
개인이 집을 사려고 할 때 돈을 빌려주기도 하고, 건설업체들이 주택을 짓는데 자금을 대주기도 하는 역할(주택금융)은 1967년부터 30년 가까이 ‘한국주택은행’이라는 단일 국책은행의 몫이었다.
국민은행과 합병돼 지금은 간판이 사라진 주택은행은 일반 저축자들의 예금과 주택저축을 통해 자금을 끌어들이고, 금융시장에서 주택채권을 발행해 돈을 조달한다. 여기서 나온 자금을 운용해 일정한 의무비율을 주택공급자와 수요자에게 대출해준다.
특히 주택은행은 신축주택의 우선분양권이 부여되는 청약예금과 청약부금, 대출우선권이 부여되는 주택부금을 단독으로 취급해 여기서 조달된 재원을 독점적으로 ‘장기·저리’로 주택부문에 다시 투자해왔다. 일반 시중은행들은 산업자금 공급을 위해 법적으로도 오랫동안 주택관련 금융을 취급하는 것이 제한됐다.
‘모든 돈은 중화학공업 육성으로…’
1960년대 산업화와 도시 인구팽창에 따른 땅값 상승과 주택수요 증가는 소득 수준이 낮은 서민들로 하여금 주택소유를 더욱 어렵게 했다. 장기저리의 주택자금을 풍부하게 조성해 집 없는 서민들에게 공급하는 등 주택금융에 대한 정책적 노력이 절실했지만 당시 저축능력 부족에다 정부 재정으로 충당되는 주택자금이 투자재원 우선순위에서 밀리면서 예산 규모 대비 주택자금의 규모는 미미했다.
1957년 한국산업은행이 처음으로 주택자금 융자를 시작한 이래 1966년 말까지 10년간의 주택자금 대출액은 54억원, 주택수로는 4만8698가구에 불과했다. 주택부문이 정부의 공업화와 중화학공업 육성정책에 우선순위에서 밀리면서 국민총생산 대비 주택투자율은 1.7%에 지나지 않았다.
바닥 난 주택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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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설립당시 주택금고 모습 <사진:주택은행 30년사> |
당시 신문(68년12월26일자 조선일보)은 이렇게 소개했다.
“지난 10월말 금고 바닥이 드러나 주택자금 융자를 중단하고 일찌감치 동면에 들어갔던 주택금고가 24일 주택은행으로 간판을 갈아달면서 새로 활기를 띠기 시작.
주택금고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한 이날 주택금고(이제부터 주택은행)는 바깥 간판만 아니라 이사장실의 팻말도 즉각 은행장실로 바꾸는 등 아래 위 없이 온통 축제 분위기.
지금까지 정부예산에만 매달려온 주택금고가 은행으로 바뀌면서 한은차입뿐 아니라 외자(달라)로 액면을 쓴 주택채권까지 발행하게 되어 내년부터는 자금부족의 염려가 없게 됐다는 것.
(중략) 내년에 적어도 주택금고 발족 이래 16개월 동안의 총 대출액 70억원보다 30억원이 많은 1백억원 정도의 주택자금을 융자, 서민주택(20평 이하) 2만채를 짓도록 하겠다는 주택은행은 요즘 전례 없이 방대한 새해 사업계획을 짜느라 여념이 없는 듯.”
꽹과리 치며 복권 팔아 자금마련
주택금고가 금고라는 명칭과 점포수 제약 등으로 인해 선발 은행과의 경쟁이 어려워 예수금보다는 자본금과 정부 차입금에 크게 의존했지만 주택은행으로 변경된 후에는 1969년9월 주택복권을 발행하는 등 자금 조달의 폭을 서서히 넓히기 시작했다.
주택금고 행원으로 출발해 주택은행장까지 역임한 김재기 전 행장(현 씨름연맹 총재)의 증언. “복권은 불특정 다수의 소액 소비자금을 모아 투자자금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당시 취약한 주택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선진국 형태의 복권을 도입했다.
재무부 장관 승인에다 첫 회 서울시장 허가까지 받아 그해 9월15일부터 29일까지 15일간 100원권 50만매를 발행했지만 그 때만 해도 복권이 무엇인지 모르는 때여서 잘 팔리지 않았다. 급기야 주택은행 전 직원이 가두판매에 나서 서울역 앞에서 모판을 메고 꽹과리를 치며 복권을 팔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주택복권 판매액은 국민주택기금으로 편입돼 서민주택 건설 자금으로 쓰였다. 숫자가 적힌 동그란 과녁에 화살을 쏘는 형태의 추첨을 통해 나온 1등의 당첨금은 300만원. 당시 단독주택의 평균가격이 90만원 정도였던 점을 감안하면 꽤 높은 당첨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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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장의 허가를 얻어 발행된 1회 주택복권은 액면 100원에 1등 당첨금이 300만원이었다. |
1970년 초 주택복권 판매기금 1억원으로 서울 암사동에 파월장병·군경유가족·일반원호대상자·이재민을 위한 ‘복권 아파트’라는 이름의 아파트 단지가 조성됐으며, 그해 2월21일 <대한뉴스>는 남덕우 재무무장관의 복권아파트 기공식 행사 소식을 전하면서 ‘복권아파트’ 입주자들이 “낮은 이자와 장기 상환혜택을 받는다”고 소개하기도 했다.
1억원짜리 올림픽복권
88서울올림픽 개최가 확정되면서 1983년 4월부터 주택복권 대신 최고 당첨금 1억원의 올림픽 복권이 대신 발행됐다. 올림픽에 대한 국민적 관심과 1억원 기대심리로 발행 초기 발매 1~2일 만에 매진되는 등 폭발적 인기를 누렸다.
올림픽복권을 통해 조성된 자금 1827억원 중 국민주택기금에 639억원, 올림픽 기금에 1188억원을 지원했다. 올림픽 기금에 지원한 금액은 전체 올림픽 사업비 9098억원의 13%에 달했다. 끊임없는 사행심 조장 논란 속에서도 1969년부터 1997년6월까지 주택복권의 총 판매액은 1조6900억원에 달했으며 당첨금 및 발행비용을 차감하고 판매액의 38.9% 정도인 6568억원이 국민주택기금으로 조성됐다. (주택복권은 2006년1월5일, 도입된지 36년 만에 로또에 밀려 사라졌다.)
건설업자에게 빌려주는 국민주택기금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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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주택은행 여의도 본점 전경 |
이 때부터 발행된 국민주택채권은 주택건설촉진법이 정하는 매입의무자가 일정 기준에 따라 강제 매입토록 돼 있어 매년 발행실적이 크게 늘어나 1980년 말까지 3688억원의 자금조달 실적을 올렸다.
하지만 주택건설 물량은 매년 15만호 안팎으로 계획물량을 크게 밑돌았다. 건설업자에게 국민주택을 더 많이 짓도록 장려하기 위해서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장기(20년)·저리(7.5~9.5%)의 자금을 공급할 필요가 있었다.
이에 따라 1981년 국민주택자금을 주택은행 계정에서 별도로 분리해 독립된 공공기금인 ‘국민주택기금’으로 전환하면서 공공과 민간의 역할 분담체제가 확립됐다. 국민주택기금의 지원대상은 임대주택 또는 전용면적 25.7평 이하 국민주택을 건설하는 사업자이며 완공 때 입주자로 대출이 전환됐다.
아파트 열풍과 주택청약예금
1970년대 후반 아파트에 대한 선호도가 급증하고 투기가 기승을 부리자 건설교통부는 민영아파트 공급 질서를 확립하고 투기억제 및 주택자금 재원 조성을 위해 ‘주택청약정기예금제도’를 마련 1978년 2월4일부터 서울 부산 대구에서 우선 시행했다.
1983년 주택경기 호황과 아파트청약 0순위제 폐지 채권입찰제 실시 등으로 주택청약 정기예금의 신규가입이 크게 늘어나고 주택부금이 높은 신장세를 보였다. 반면 1984년 주택경기 진정을 위한 강력한 투기억제정책으로 하반기 주택경기가 침체하자 주택청약 예금과 국민주택기금 일시 예치금 해약이 급증하기도 하는 등 주택자금 조달 규모는 부동산 경기에 따라 등락을 거듭했다.
1987년 주택금융신용보증기금이 신설돼 담보능력이 미약한 근로자 등을 대상으로 신용을 보증해줌으로써 주택자금이 보다 원활하게 지원되도록 했다. 주택보증신용보증기금은 1991년 말 기준으로 30개 금융기관과 보증계약을 체결했고 40만4000가구 1조5930억원의 보증을 지원해 무주택 서민의 주택마련 기회를 제공했다. 주택금융신용보증기금이 신설되면서 주택은행은 국민주택기금과 주택금융신용보증기금 등 2개 기금까지 관리하는 ‘주택금융 그룹’이 됐다.
200만호 건설에 돈을 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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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택200만호 건설을 공약한 6공화국은 막대한 주택건설 자금 조성에 골몰해야 했다. 주택금융 확충을 1면에 보도한 1987년 11월 11일자 조선일보화면 |
6대 원칙과 6대 시책으로 요약된 경제 공약중 하나로 ‘내 집 시대의 조기실현’을 들고 “이를 위해선 국민주택금융을 앞으로 5년간 2조원이상으로 늘리고 값싼 공공개발택지를 3천만평 이상 공급, 주택건설 단가를 인하토록 하여 누구나 내 집을 마련할 수 있도록 하고 앞으로 250만 무주택 가구에 정부지원을 집중하여 향후 5년간 50만 채의 공공임대주택을 건설하는 등 92년까지는 모든 국민들이 내 집을 갖는 시대를 맞도록 하겠다”고 공약했다.
다음날 신문은 ‘주택금융 2조 확대’라는 제목을 큼지막하게 1면에 뽑아 노 대표의 정책 내용을 상세히 소개했다. 하지만 당시 ‘주택금융’이라는 말과 ‘2조원’이라는 돈은 사람들이 가슴에 와 닿지 않았다. 다만 ‘모든 국민들이 제 집을 갖는 시대’라는 구호만 머릿속에 남았다.
이렇게 시작된 주택 200만호 건설은 주택자금 수급 시스템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신도시 건설을 위해 시중 부동자금을 주택건설 재원으로 흡수하는 방안이 총동원됐다. 다시 김재기 전 주택은행장의 회고.
“주택 200만호 건설을 위한 자금동원은 주택은행이 전담했다. 200만호 주택건설계획의 자금 지원을 위해 그해를 ‘총력수신증강의 해’로 정하고 자금조달의 극대화를 위해 전 은행차원의 저축증강 운동을 펼쳤다. 이에 따라 1991년 5월15일 주택은행 예수금이 10조원을 넘어 총예수금 1위 은행자리를 차지했다. 은행장 직속으로 ‘주택금융특별기획실’을 설치하고 여기서 만든 주택금융확충방안에 따라 200만호 건설 계획 중 민영주택부문에서 82만호 건설을 위한 자금 지원을 주택은행이 도맡았다.”
'차세대 주택통장' 한국판 기네스북 올라
200만호 건설 당시 주택은행을 통해서만 1989년부터 1991년까지 매년 2조원에 가까운 돈이 주택건설에 지원됐다. 건설업자 지원확대, 개인주택 구입자에 대한 대출금 상향, 신청자격 완화, 대출제도 개선 등 주택금융 활성화 방안이 잇따라 나오고 아파트 중도금 납입자금, 임차자금, 다가구단독주택 건설자금, 주거환경개선사업자금, 조립식주택설비자금대출 등 새로운 대출제도도 이때 대거 쏟아져 나왔다.
당시 주택건설 붐을 타고 1992년 30년 정도 저축하면 내집 마련을 할수 있는 차세대주택종합통장은 발매 1달만에 100만명이 가입할 정도로 선풍적 인기였다. 이 주택통장은 1993년2월 최단 기간내 최다 가입자 금융상품으로 한국판 기네스북에 올랐고 1993년에는 단일 상품으로는 드물게 300만계좌를 돌파했다. 당시 우리국민들의 ‘저축을 통한 내집마련 꿈’이 어느 정도 였는지를 실감케 하는 대목이다.
그 결과 주택은행은 창립 24년만에 1991년말 직원수가 1만2000명에 이르고 282개 점포를 가진 총 예수금 10조3372억원에 이르는 초대형 금융기관으로 성장했다.
그래도 모자라는 주택자금
갈수록 수요가 커지는 주택금융의 확충을 위해서는 주택자금 취급기관을 다변화하고 전문기관(은행 보험 새마을금고)을 적극 육성하며, 서구식 주택저당증권제도(MBS) 도입을 통해 중산층 이상의 여유자금을 주택자금으로 활용하는 방안을 강구할 필요성이 높아져갔다.
주택200만호 건설 과정에서 만성적인 주택자금 부족현상을 경험한 정부와 주택은행은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주택자금 조달방안 마련에 골몰했다. 그 결과 대안으로 검토한 것이 바로 현재의 주택금융공사가 하고 있는 주택저당채권 유동화(MBS)다.
주택금융공사 이중희 박사는 “자본시장의 여유자금을 주택부문에 활용하는 선진국의 MBS제도는 정부 입장에서 솔깃한 대안이 아닐 수 없었다”며 “하지만 경제적·법률적 장애요인으로 인해 MBS 제도는 도입되지 못하고 그후 10여년 동안 조사연구와 논의 수준에 그치고 말았다”고 했다.
주택저당 채권을 시장에 유통시키기 위해서는 채권금리보다 대출금리가 높아야 하지만 당시에는 국가가 정잭적으로 대출금리를 조절하던 시기여서 오히려 채권시장의 금리보다 대출금리가 더 쌌다. 이같은 구조에서는 MBS를 도입해도 시장에서 작동하지 않는다. 또 법률적으로도 저당권을 양도하는데는 당시 민법상 큰 장애가 있었다.
그러던 것이 외환위기 이후 IMF(국제통화기금)의 금융구조개혁 권고에 따라 국민의 정부가 1999년 주택저당채권유동화회사법이라는 특별법을 만들어 법률적 장애를 극복하고, 채권금리 등 금융시장이 시장원리에 따라 작동하면서 2000년 KoMoCo(주택저당채권유동화회사)를 세워 처음으로 MBS를 발행하게 됐다. 하지만 일반 기업형태의 유동화회사로는 공신력이 낮아 MBS가 활성화되지 못했다.
배급제도인 주택자금대출
MBS와 같은 장기 주택자금 조달 시스템이 갖춰지지 않은 상황에서 단기성 예금을 유치하는 형태로 자금을 모아 장기 저금리 주택자금을 공급한다는 것은 구조적으로 어려움이 있었다. 미국과 일본 등 선진국에서는 개인이 자기 집을 취득할 수 있도록 주택 구입자금 대출만 전담하는 금융기관이 존재지만 우리나라에는 주택금융공사가 출범하기 전까지 이 같은 형태의 금융기관이 없었다.
주택은행의 개인주택구입자금 대출은 만성적 재원부족 때문에 청약부금이나 예금·저축을 가입한 사람에게만 자격이 주어졌고 엄격한 가입순위와 조건을 따져 일정 한도의 돈을 ‘배급해주는’형태여서 구조적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1967년 초창기 개인 주택구입 대출 대상은 무주택자로 신축 후 1년 이내의 주택을 건설업자로부터 최초로 매입하는 사람으로 한정됐으며 대출한도는 주택부금 가입여부에 관계없이 60만원이었다. 그러나 1975년부터는 대출 대상자가 주택부금 가입자로 한정됐고 1978년에는 대출기간이 20년으로 늘어났다.
1997년 발간된 ‘주택은행 30년사’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1987년 3월에는 개인주택구입자금의 대상주택 경과년수를 신축 후 5년에서 10년 이내로 완화하는 등 실수요자 위주로 지원대상을 확대했다. 1987년 5월에는 근로자의 주거안정과 목돈마련 지원에 관한 법률을 제정 근로자저축제도를 신설해 전 은행에서 취급토록 해 사실상 모든 은행에서 주택자금 대출을 취급할 수 있도록 했다.
특히 1989년 1월부터 중도금납입자금 대출이 시행되고 1995년 10년이 넘은 주택에 대한 대출도 허용되면서 개인 주택자금 대출은 크게 증가했다.”
주택은행이 1967년부터 1996년까지 30년 동안 공급한 주택자금은 22조4934억원으로 주택 수로는 207만 가구에 해당한다. 이중 개인의 주택구입 자금 지원은 15조617억원이었다.
나머지 자금은 주택을 공급하는 건설자금으로 쓰였다. 경기진작과 건설경기 부양이 필요할 때는 건설업체에 대한 돈줄을 늘리고 정부가 건설경기 진정책을 추진하면 건설업에 대한 자금지원을 억제하는 형태였다. 주택경기가 침체할 때는 건설업체 자금난을 완화하고 주택건설을 촉진하기 위해 건설업자 운전자금과 미분양주택 구입자금을 대출해주기도 했다.
분양 주택 돈 많은 계층에게만 돌아가
그렇다면 이 같은 자금 지원으로 많은 서민들이 자기 집을 마련했을까?
‘주택보급률은 100%를 넘는데 자기 집에 거주하는 비율은 55.6%.’ 통계청의 인구주택총조사 결과 일반가구의 자가거주율은 1970년 71.7%였으나 1990년 49.9%로 하락했다가 2005년에는 55.6%에 머물렀다. 절반 가까이 전월세를 살고 전세비율은 1975년 17.6%에서 2005년 22.4%로 오히려 높아졌다. 전세로 사는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왜 주택구입 자금 대출을 통해 자기 집을 못 사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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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택도시연구원 박신영 선임연구원의 분석은 이렇다.
“자가거주율이 낮은 것은 장기저금리 주택자금을 대출해주는 제도가 미성숙했기 때문이다. 주택가격의 50% 이상의 자금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전세로 주택을 임차한 가구가 주택을 사기는 쉽지 않았다. 만일 정부가 주택자금을 많은 사람들에게 장기저리로 대출해주는 제도와 더불어 많은 신규주택을 공급했더라면 전세거주자중 자가를 취득한 가구가 많아졌을 것이다. 주택자금 대출제도가 성숙되지 않은 상황에서 많은 전세거주자는 자가를 취득하지 못한 채 매년 인상되는 전세보증금을 마련하기에도 역부족이었다고 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1982년 이후 2004년까지 신규로 공급된 1090만가구의 주택은 주택자금 대출 없이도 집을 살 수 있었던 계층에게만 돌아갔다.”
외환위기와 2000년 이후 주택금융 무한경쟁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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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이후의 금융 국제화와 금리 자유화가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주택은행의 민영화 추진도 빨라지면서 주택은행의 주택금융 독점 시대는 서서히 저물고 일반 상업은행들의 주택금융시장 진입과 은행간 경쟁도 본격화됐다. 1997년 주택은행 민영화를 계기로 주택금융시장은 정책논리보다는 시장원리를 중시하기 시작했으며 외환위기를 계기로 더욱 빠른 속도로 시장 중심적 체제로 변했다.
외환위기 이전에는 은행의 자산운용에서 비중이 낮았던 가계대출이 기업들의 부도 등을 계기로 안정적인 자산운용처로 서서히 인식되기 시작했다. 기업대출의 부실우려가 높아지면서 기업대출을 줄이는 대신, 마땅한 자산운용처를 찾기 어려운 상황에서 저금리와 부동산경기 상승이 맞물리면서 담보가 확실하고 수익률도 높은 가계대출을 늘리게 된다.
2001년과 2002년 중 주택담보대출은 매해 50%이상 성장하였고 그 결과 2000년 말 54.2조원에 불과하던 은행권 주택담보대출은 2006년 상반기말 200조8000억원으로 급격히 증가했다.
“부동산 투기자에게 종자자금 제공”
박원석 대구대 부동산학과 교수가 ‘주택문제의 해법’(삼성경제연구소, 2005)에서 ‘건전하고 효율적인 주택금융시스템 구축’을 주제로 내놓은 지적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주택담보대출 구조의 문제와 결합하여 주택담보대출의 활성화가 주택시장의 안정보다는 오히려 주택시장의 단기 변동성을 확대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중략) 다시 말하면 공적자금 투입을 통해 살려놓은 금융기관들이 부동산 투기자들에게 종자자금을 제공하는데 골몰하고 있다는 의심을 버릴 수 없는 것이다.
외환위기 이전에는 주택금융의 활성화가 정책의 목표였다면 이제는 주택금융시장의 연착륙, 주택금융 시장의 건전화가 우선적인 정책목표가 되어야 하는 상황이 도래했다.”
주택금융공사의 성과와 한계
이 같은 단기 변동금리 주택담보대출의 급증은 저금리에 따른 통화량 증가와 부동산투기 열풍이 맞물린 결과다. 아무리 높은 이자에 단기 대출을 받아도 3년 만 지나면 집값이 ‘화끈하게’올라 대출금을 갚고도 남는 구조에 너무나 길들여져 있었다.
금융연구원 이명활 연구위원은 2006년 말 내놓은 연구자료에서 “은행권 주택담보대출 가운데 시장금리 연동 변동금리 대출비중은 98%에 이르고 있다. 만기연장이 원활히 이뤄지지 않거나 금리급등으로 이자부담이 가중될 경우 부실화될 우려가 있는 등 여전히 취약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정홍식 전 주택금융공사 사장도 2007년 초 매일경제와의 신년인터뷰에서 “거액을 대출받아 이자만 내다 2~3년 뒤 집값이 오르면 일시에 상환해도 되는 주택대출 시스템으로는 집값을 잡기 힘들다”며 “주택시장 안정을 위해서는 장기 고정금리 대출 비중이 전체 주택대출 중 70% 이상으로 늘어나야 한다”고 말했다.
주택자금, 모자라도 '문제' 남아도 '탈'
주택구입을 위한 장기 모기지론이 서민들에게 보다 폭넓게 확산되지 못한데 대해 주택금융공사 설립 준비단계에서 테스크포스(TF) 팀장을 맡았던 박병섭 부장은 “그 동안 우리 금융시장의 유동성이 너무 좋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은행들이 돈이 남아 대출 할 곳이 없어 가계대출에 집중하는 상황에서 주택금융공사의 20년 장기 모기지론을 팔아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은행의 돈으로 주택담보 대출을 파는데 바빴다. 은행에 돈이 남아도는 상황에서 은행 입장에서 장기모기지론을 대출해주고 그 채권(주택저당채권)을 주택금융공사에 팔아 현금을 가져가야 하는데 돈이 남아돌다 보니 그렇게 할 유인이 낮았다.”
박 부장은 “주택금융공사 출범 이후 은행들도 자체적으로 20년 상환 상품을 만드는 등 주택자금 대출 구조가 서서히 장기 구조로 전환되고, MBS시장 규모가 커지면서 3년물 중심이었던 채권시장이 장기물 유통구조로 바뀌고 있는 것은 긍정적 변화”라고 말했다.
지난 30년 동안 서민 내 집 마련을 위한 자금지원이 바늘구멍처럼 좁았던 것은 돈(재원)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주택금융 시장에 경쟁체제가 도입되면서 자금부족 문제가 해소되고 소비자들은 내 집 마련을 위한 주택자금을 쉽고 싸게 대출받을 수 있게 됐다. 하지만 돈이 풍부해진 저금리시대에는 지나친 경쟁과 단기 변동금리대출 편중으로 인해 또 다른 부실 위험을 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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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틀린 주택금융시장을 바로잡는 ‘씨앗’
이 두 가지를 해소해 ‘보다 풍부한 재원으로 보다 많은 서민에게 장기간 고정금리로 안정되게’ 주택구입자금을 지원해주려는 정부의 노력은 이제 첫 단 추를 끼웠을 뿐이다. 주택금융공사 이중희 박사는 “담보가치 위주의 주택담보대출 심사체계를 차입자의 채무상환능력 위주로 전환하기 위해 총부채상환비율(DTI: Debt-To-Income) 규제를 도입하고, 주택담보대출에 대한 대손충당금 적립기준을 강화하는 등 주택담보대출의 선진화를 위한 다양한 정책을 추진하는 것도 단기 변동금리 위주로 급팽창한 주택담보대출시장이 초래할 수도 있는 잠재적 금융불안을 예방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소비자를 보호하기 위하여 정부가 추진하는 정책이 결실을 거둘 경우 우리나라의 주택금융시장의 구조가 한결 튼튼해져 집값 하락이나 금리 상승과 같은 외부적 충격을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장기 고정금리 대출과 이를 기초자산으로 한 MBS 발행이 활성화됨으로써 자본시장의 발전을 촉진하고 주택가격의 안정에도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2007년 3월6일 경제전문 미디어 <이데일리>는 ‘e-모기지론 인기몰이’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기사를 송고했다.
‘시중은행의 주택담보대출 금리가 꾸준히 오르면서 고정금리 장기대출상품인 ’e-모기지론‘의 인기가 날로 높아지고 있다. 주택금융공사는 지난 2월 e-모기지론이 1592억원 가량 판매돼 전체 보금자리론 판매액 중 57.2%를 차지했다고 6일 밝혔다. 이는 전월비 25.5% 증가한 것으로 지난해 7·8월 두 달간 판매실적을 합친 1080억원보다도 절반이상 늘어난 규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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