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입찰

왜 거품이 생기는지 조차 모르는 척한 정권

토건종식3 2010. 5. 1. 21:16
[실록 부동산정책 40년①] ‘부동산 신호등’ 세우기 40년 걸렸다 2007-03-14 
 


#저항 “과표현실화는 조세저항을 불러일으키므로 국가안보상 곤란합니다.”
88서울올림픽이 끝나면서 집값과 땅 값이 폭등하자 경제기획원은 당시 15%에 불과하던 과표현실화율을 3년에 걸쳐 토지는 60%, 건물은 50%까지 대폭 끌어올리려 했다. 실제 1억원에 거래되는 땅에 대해 세금을 매기는 기준인 과세 표준액이 1500만원에 불과하다면 그것을 기준으로 과세하는 것은 불합리할 뿐만 아니라 투기를 잡을 수도 없다는 판단에서다.

과표현실화 재검토를 '조세저항 우려' 때문이라고 보도한 1989년 9월6일자 신문.
하지만 당시 반대 여론을 등에 업은 내무부는 조세저항에 따른 체제불안과 북한과의 대치상황까지 거론하며 과표현실화에 대해 반대론을 폈다. 정통성이 취약했던 당시 정부에게 조세저항은 체제위기로 인식됐고 실제로 불안요인을 안고 있었다.

“내무부의 반대는 예상보다 훨씬 거세더군요. 내무부 모 국장은 회의도중 ‘경제부처와는 더 이상 대화할 수 없다’며 회의장을 뛰쳐나간 적도 있습니다. 당시 내무부가 내각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한 제대로 될 수가 없는 일이었습니다.”이장규 전 중앙일보 기자(현 중앙일보 시사미디어 대표이사)의 저서 ‘실록 6공 경제’는 실무팀 관계자의 말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당시 나웅배 경제기획원 부총리는 5차례나 장관회의를 열어 설득을 거듭한 끝에 합의를 끌어내는 듯 했으나 결국엔 여론에 민감한 내무부의 반대로 과표현실화는 백지화됐다.

#그리고 2007 그로부터 19년이 지난 2007년 1월. 8·31 국민참여 부동산정책에 따라 토지와 주택에 대한 과표는 점진적으로 현실화돼 재산세의 기준이 되는 공시가격은 실제 가격의 80%까지 반영된다. 양도소득세의 과세형평을 높이기 위해 1년 유예기간 끝에 2007년 1월부터 모든 부동산에 대한 양도세는 공시가격이 아닌 실거래가로 부과됐다.

#좌절 “지금까지 역대 정권은 집권초기에 세제 및 세정의 혁신으로 공평세제 및 신뢰세정을 구현한다는 개혁안을 내놓곤 했다. 그러나 집권 뒤 일정 시일이 지나면 선거 등을 의식한 정치권의 압력과 이익집단의 로비 등으로 번번이 용두사미격으로 개혁의지가 흐지부지되곤 했었다.” (한겨레신문 1993년 5월27일자)

문민정부 출범 초기인 1993년 5월26일 재무부가 ‘신경제 5개년 계획 세제부문 개혁안’을 내놓으면서 공시지가 대비 평균 21% 수준에 머무르고 있던 토지과표를 1996년부터 공시지가로 전환하고 보유세 부담을 높이는 등 부동산투기 및 과다보유를 막기 위한 제도적인 장치를 갖추겠다고 하자 한겨레신문은 다음날 해설기사에서 이렇게 적었다.

아니나 다를까. 1995년11월17일, 정부와 민자당은 당정회의를 열어 종합토지세 과표적용비율을 동결하고 일부 토지에 대한 세율을 낮추는 내용의 지방세법 시행령 개정안에 합의했다. 이 때문에 ‘총선을 겨냥한 땅부자 달래기’라는 지적이 뒤따랐고 종토세 과표를 공시지가로 전환해 ‘땅 많이 가진 것이 고통이 되게 하겠다’던 약속은 흐지부지 돼갔다.

종합토지세의 경우 처음 시행된 1990년 1월에도 고액자산가와 땅 재벌들의 조세저항에 부딪쳐 과표현실화를 포기했었다. 당시 서울신문(1990.1.10)은 "정부가 우리 경제를 좀먹는 부동산 투기의 요인을 근절시켜 경제의 안정기조를 다져보려고 모처럼 칼을 빼들었으나 제대로 한번 휘둘러 보지도 못하고 칼집에 되돌려 넣은 셈”이라고 비판했다.

#그리고 2007 17년이 지난 2006년 12월. 공시가격 기준 6억원으로 과세기준이 강화된 부동산 보유세제인 종합부동산세를 놓고 언론은 연일 ‘세금폭탄’론을 거론했다. 또다시 ‘조세저항’이라는 표현이 신문을 덮었지만 종부세는 97.7%의 높은 자진신고율을 보이며 정착했고 2007년 1월 종부세 논란은 꼬리를 감췄다.

#유혹 외환위기의 충격이 채 가시지 않은 1998년 3월17일. 서울 강남구 논현동 건설회관에서는 정부 여당과 22개 건설관련 단체장과의 상견례가 열렸다. 정부를 대표해 나온 이정무 건설교통부 장관과 여당인 국민회의 김원길 정책위의장이 건설경기를 살리기 위한 선물보따리를 풀어놓았다.

“양도세를 우선 대폭 인하하되 궁극적으로 폐지하는 방향으로 세제를 개편해 오는 4월 임시국회에서 입법화할 방침입니다.” 김 의장은 회의장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기자들에게 화끈한 ‘1면 톱기사거리’를 제공했다.

건설경기를 살리기 위해 실현가능한 모든 처방을 내놓으려는 정부와 정치권의 움직임은 1998년부터 1999년까지 분양가 전면 자율화, 양도세 한시적 면제, 분양권 전매 허용, 토지거래 허가 및 신고제 폐지, 택지소유상한제 폐지, 민영아파트 재당첨 제한기간폐지, 무주택 우선공급제도 폐지 등 부동산 관련 규제를 줄줄이 완화하거나 없앴다. 가격폭락과 거래단절로 침체에 빠진 부동산 시장을 하루아침에 과열로 바꿔놓을 첫 단추는 이렇게 끼워졌다.

#그리고 2007 그로부터 9년이 지난 2007년 1월. 정부는 분양가 상한제를 전면 시행하고 수도권과 투기과열지구에 한해 민간택지 분양원가를 공개하기로 했다. 양질의 주택을 ‘싸게, 많이, 그리고 빨리’ 공급해 무주택 서민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주려는 정부 정책에 대해 언론은 ‘복합 불황 우려’라는 과장된 유혹과 흔들기를 계속하고 있다. 정치권에선 ‘반값 아파트 공약’ 등 ‘부동산 정치 세일’이 한창이다.

저항과 좌절과 유혹의 역사


집 값과 땅 값을 안정시키고 서민들에게 내 집 마련 기회를 주려는 대한민국 정부의 부동산 정책의 험난한 ‘오디세이’는 숱한 저항과 좌절, 그리고 유혹의 역사다.

땅 부자 · 집 부자와 투기꾼들의 조직적 저항, 이해관계에 따라 전전긍긍한 정책적 좌절, 현상을 타개하려는 임기응변식 처방과 정치적 유혹은 끝없이 시장을 왜곡했다. 요동치는 자본주의의 ‘거대한 공룡’인 부동산 시장 앞에 정부의 정책은 끊임 없이 시험 받았고 때로 경기부양의 표준식단으로, 때로 시장개혁의 상징으로 정책환경에 따라 변화를 거듭했다.

40여년 전인 1967년 강남 땅 투기열풍을 막기 위해 도입된 ‘부동산 투기 억제세’에서부터 박정희 대통령이 ‘혁명적 조치’라며 내놓은 1978년 ‘8.8대책’, 그리고 참여정부의 ‘8.31정책’에 이르기까지 수십 년 동안 쏟아낸 부동산 정책들은 현재의 가격흐름과 부동산 불패 신화의 이력으로 남아있다.

풀고 조이고…규제 강화와 완화의 반복


<국정브리핑>이 주택도시연구원, 국토연구원, 금융연구원 등의 도움을 받아 정부가 부동산 문제 해결과 시장안정을 위해 내놓은 정책을 조사한 결과, 1967년부터 2007년 1월11일까지 발표한 부동산 및 주거복지 관련 정책은 총 59건이었다. 이 가운데 부동산 투기 억제 및 가격안정을 위한 정책이 31건이었으며 규제완화 등을 통한 경기활성화대책이 17건, 임대주택 확대 등 주거복지 정책이 11건이었다.


첫 부동산투기대책인 '투기억제세'가 시행된 이후 탈세혐의가 있는 투기자가 처음 적발돼 국세청으로부터 당시 돈으로 4200만원을 추징된 사실이 신문(1968년 6월8일자)에 보도됐다.
정부는 부동산 가격이 급등할 때는 규제와 세금, 공급정책 등을 통해 시장을 진정시키고, 반대로 경기가 침체하면 손쉬운 경기부양 수단으로 건설 규제 완화를 택했다. 일례로 1977년 분양가 규제와 78년 8.8대책에 이어 1980년부터 82년까지는 주택경기 활성화 조치를 5차례나 쏟아냈고, 1989년에는 강력한 규제정책인 토지공개념 도입과 함께 주택 200만호 공급을 추진했다.

1997년 외환위기로 경기가 침체되자 경기 부양을 위해 부동산 관련 규제를 전면 완화하는 쪽으로 부동산 정책 방향을 틀었다. ‘발등에 떨어진 불’에 부동산 시장의 근본적인 체질 개선과 안정화에 대해선 언론도 침묵했다. 이런 ‘냉온탕’을 오가는 정부의 부동산 정책은 국민에게 경기 조정의 종개념이나 임시방편으로 인식되면서 ‘때가 되면 바뀌는 것’이란 잘못된 인식을 키워왔다.

주택 건설을 촉진할 필요성이 클 때는 부동산 시장에 대한 규제를 완화하고, 부동산 시장으로의 투기자금 유입이 경제에 부담을 주기 시작하면 이를 억제하는 식으로 규제 강화와 완화를 반복하며 경기의존적으로 바뀌었다. 예컨대 미분양사태가 빚어질 경우 융자제도 등을 통해 구입능력을 높여서 분양받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양도소득세를 감면하는 등의 수단으로 능력 있는 자에게 주택이 돌아가도록 해왔다. 주거안정과 경기조절이라는 다소 상충하는 두 가지 목표 사이를 시소 타듯 오가면서 ‘부동산 10년 주기설’이란 세간의 공식을 만들었다.

부동산 정책, 그 구조적 딜레마


이처럼 부동산 정책이 온갖 저항과 좌절과 유혹 속에 시장의 기초 질서를 다루는 제도적 장치와 근본적 시스템을 만들기보다는, 현상을 타개하는 ‘대증요법’이 되어 버린 데는 우리나라 부동산시장의 구조적 딜레마가 자리 잡고 있다.

우리의 주택공급 시스템은 재정지원이 극히 한정된 가운데 민간자금에 크게 의존하면서도 행정규제 수단으로 시장을 통제해 주택건설을 촉진하거나 억제하고 또 주택의 배분을 관리하는 체제이다. 자본주의 체제이면서도 선진자본주의와는 다르고, 또 싱가포르 같은 후발자본주의 사회와도 다르게, 민간 주도이면서 국가의 행정적 통제를 심하게 받는 주택공급체계를 가진다. 이 때문에 시장이 우선이냐, 공공 이익이 우선이냐의 논란은 역대 부동산정책과 함께 한다.

주택도시연구원 임서환 연구원은 “정부는 민간 자금을 유인하여 공급을 촉진하는 대신 주택의 규모 가격 공급절차 등을 통제하여 주택이 저소득층에 돌아가도록 한다는 전략을 구사했다. 그 결과 정책은 투기성 자금의 변덕스러운 흐름에 일일이 대응해야 했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경제규모가 커질수록 주택 정책은 경기조절 대책이나 물가대책으로부터 점점 더 자유롭지 못하게 됐다. 주택건설 부문이 실물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간단치 않았다. 경기 부양의 유혹도 그만큼 컸다. 대형 건설공사가 하나가 벌어지면 철근 합판 등 수많은 건자재 하청업체는 물론 인부, 공사판 식당 함바집까지 고용창출효과가 생기고 주변 유흥가까지 경제적 활기가 돌았다.

미국 국제개발처(AID)의 한 보고서(Planning and Developnent Collaborative International 1977)는 1970년대까지 우리나라에는 주택정책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고 평가하고 있다. AID는 “주택과 관련한 대부분의 결정이 그 결정에 따른 행위 또는 방치가 갖는 함의를 충분히 서면으로 입증할 수 있는 데이터나 분석 없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정확한 통계나 과학적 분석을 통한 정책이 아니라 ‘한국에는 주어진 자금이 허용하는 한도까지 일정한 질적 수준의 주택을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짓는다는 일반적 목표 이상의 주택정책이 없다”고 지적했다.

“돈 생각하지 말고 공급해라”


이같은 구조적 딜레마와 그에 따른 정책적 고민은 현 정부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우리가 지금까지 주택정책을 하는데 있어서 주택의 수요, 정책의 수요와 목표를 먼저 전제하고 거기에 맞도록 정책을 맞춰가지 못하고 돈의 조달, 재원의 한계를 먼저 생각하고 그 범위 안에서 최선을 다하려는 그런 수준인데 여기에 발상의 대전환을 아직 못하고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이번에는 좀 각별한 결단을 해야 한다.” 2006년 4월25일 대한주택공사 국민임대주택 홍보관에서 열린 ‘주거복지정책 토론회’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주택정책의 ‘발상의 대전환’을 강조하며 “재정 능력에 맞춘 공급정책이 아니라 수요에 맞춘 공급정책으로 전환합시다”를 몇차례 반복했다.

민간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주택공급에서 벗어나 공공의 공급능력을 획기적으로 높이고 “이것을 국민들의 마음 속에 그리고 주택 문제를 생각하는 사람들의 머리 속에 도장이 박히도록 해야 한다”는 노 대통령의 주문은 진행형이다.

우리나라 부동산 정책의 역사가 갖는 구조적 딜레마와 재정적 한계를 감안한다 하더라도, AID가 지적했던 ‘정책 부재론’과 주택공급정책의 발상전환은 여전히 숙제로 남아있다.

일관된 신호등 없었던 부동산 시장


이동성 전 건설부 주택국장은 “정치상황, 경제상황에 밀려 전매제한 등 부동산 시장의 질서를 잡는 데 꼭 필요한 것까지 오락가락하며 풀었다 죄었다를 반복한 것은 큰 불행”이라고 말했다. “사고가 나지 않더라도 교통질서를 위해 신호등이 필요하듯, 부동산시장의 질서를 잡는데 꼭 필요한 제도와 시스템들이 있다”며 “그런 것까지 풀어버려 제도들이 일찍부터 자리를 잡는데 실패했고 수많은 시행착오와 경험을 하고도 제대로 실천하지 못했다”고 털어놓았다.

부동산 시장이라는 얽히고 설킨 도로에 제대로 된 신호등 기능을 해야 할 제도와 시스템들이 어떤 때는 빨간불에 건너지 말라고 했다가 상황이 바뀌면 빨간불에도 건너고 초록불에 건너지 말라고 한다. 부동산 열풍이 지나갈 때마다 정부는 투기꾼이나 중개업자에 대해 사법조치의 의지를 밝히는 등 대증요법을 꺼내들고 허겁지겁 ‘수신호’로 부동산 시장의 무질서를 정리하기 급급했다.

‘신호등’ 세우고 투기소득 숨을 곳 없애는 데 40년 돌아

실제 거래된 가격을 신고해 이를 등기하고, 이에 합당하게 세금을 매기거나 선진국처럼 고액의 부동산을 소유하는데 따른 보유세 부담을 높이거나, 분양권의 전매를 제한하는 것과 같은 시장의 기초 질서를 다루는 ‘신호등’같은 인프라와 시스템을 만드는데 우리는 40년을 빙빙 돌아온 셈이다.

사실 우리의 부동산 시장은 수십 년 동안 ‘명의(이름)도 가짜, 가격도 가짜’였다. 1995년 도입된 부동산실명제가 ‘이름’ 부분의 시장 투명화 조치였다면, 2006년부터 실시된 부동산 실거래 가격 신고제(1월) 실거래가 등기부 기재(6월)는 ‘가격’부분에서 부동산 시장을 투명하게 만든 획기적 제도들이다. 이를 통해 우리 사회에서 이제 투기소득이 숨을 거처가 사실상 없어졌다. 과거에는 장부상 부동산 가격이 실거래가와 다르고 국세와 지방세가 각각 다른 과표를 가지고 있어서 거래자들은 실제 거래된 가격과 무관하게 낮은 가격으로 신고하고 그 덕분으로 세금을 적게 내는 데 동참했다. 전 국민이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투기소득 불감증에 걸려 있었던 셈이다.

변양균 청와대 정책실장은 “종부세 등 보유세의 강화 조치는 지난 수 십년 간 역대 정부가 하지 못한 것들이다. 실거래가 신고 역시 금융실명제에 버금갈 정도로 부동산 시장에서는 획기적 조치다. 정부로서는 이제 투기는 더 이상 발붙일 수 없게 제도를 정비했다고 자부한다”며 “하지만 이런 조치들이 효과를 나타내려면 한참 시간이 걸린다”고 말했다. 투명한 시장거래 자료는 부동산시장이 정상적으로 작동하기 위한 필요조건일 뿐만 아니라 항후 부동산 정책 수립에 귀중한 자료로 활용될 수 있다.

8.31 정책의 세제부문 입안을 주도했던 김용민 전 재정경제부 세제실장(현 조달청장)은 “실거래가 과세로 부동산 거래질서를 바로 잡고 부동산 투기이익을 환수하며 능력에 맞게 보유세를 부담하도록 하는 8.31 세제개혁은 오히려 늦은 감이 있다”고 했다. 취득세와 등록세를 낮추기 위하여 이중계약서를 작성하고 실거래가격이 전혀 파악되지 않아 실제 양도차익에 대하여 양도소득세를 과세하지 못하며, 많은 부동산을 보유함에도 너무 낮은 보유세를 부담하는 등의 잘못된 관행과 제도가 아주 느리지만 분명하게 역사 속으로 묻혀 가고 있다.

투기억제 인프라 깔기, “꿀릴 게 없다”


6공화국 시절 경제수석과 건설부 장관을 지내며 1기 신도시를 입안했던 박승 전 한국은행 총재는 <국정브리핑>과의 인터뷰에서 “부동산 보유과세 강화는 박정희 정권 때부터 하려다 여러 가지 저항 때문에 못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유세 강화 조치는 국가의 백년대계를 위한 역사적인 개혁조치로 평가할 만하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불투명한 거래관행과 형평성 없이 턱없이 낮았던 부동산 세제는 “세금 부담도 없는 가장 확실한 재테크는 부동산”이라는 한국사회의 잘못된 신화의 원인제공자였다. 부동산에서 발생하는 초과이익을 ‘일관되게, 지속적으로 환수’하는 것은 부동산 가격의 거품을 빼는 출발점이다.

참여정부의 부동산 정책은 가격안정 측면에서 여전히 진행형이지만, 부동산 세제 정상화와 거래투명화 등 부동산 시장의 제도적 인프라를 처음 놓았다는 측면에서는 또 다른 역사적 평가가 기다리고 있다.

돌이켜 보면 40여년 동안 부동산 정책이 일관된 제도와 시스템으로 자리잡지 못한 것은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이해관계와 잘못된 관행에서 비롯됐다. 수십년간 주택 수요자와 공급자, 정부 모두가 ‘개발연대’의 패러다임에 길들여져 왔고, 남의 돈을 꿔서라도 집을 산 사람은 이익을 남겼고 이사를 많이 다닐수록 돈을 많이 버는 결과를 낳았다.

이제 부동산 정책 40년 역사를 돌아보며 미래의 희망을 담는 사회적 합의를 추구해야 한다. 부동산 정책이 반드시 성공하고 일관되게 뿌리내려야 하는 이유는 어느 정부의 정책 성패의 문제가 아니라 국민의 삶이 달려 있기 때문이다.

 
       [실록 부동산정책40년②] 제1부 ① 경기부양과 부동산의 딜레마 2007-03-14 09:45:50


2006년 7월 12일, 국회 재정경제위원회. 이날 인사청문회는 청와대 정책실장에서 경제부총리로 옮겨온 권오규 후보자와 열린우리당 강봉균 정책위의장간 설전으로 후끈 달아올랐다. 주제는 경기진단과 경기부양. 두 사람은 과거 경제기획원(EPB)에서부터 상하관계로 일해 오며 인연이 깊었다.

강봉균 열린우리당 정책위의장=만약에 작년도에 4%밖에 성장이 안됐다면 내년쯤에서 6% 성장한다고 해서 크게 문제될 게 없는 거란 말이에요. 경기부양이라는 것은 거시경제 정책을 운용하는 정책 당국의 인위적인 노력을 의미합니다.
권오규 경제부총리 후보자=시장에 잘못된 시그널을 주거나 지나치게 확장적으로 경제 운용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에 경제정책 방향은 잠재성장률 경로를 따라가는 한에 있어서는 인위적인 부양을 하지 않는다는 스탠스를 유지하는 것이 바른 방향이라고 생각합니다.
강 의장=지금 체감경기가 너무 어려운 상황이기 때문에 잠재성장률 기준을 놓고 보더라도 1, 2% 정도 성장을 높일 수 있는 방법만 있다면 이것을 해서 하나도 나쁠 게 없다 이게 제 생각인데.
권 후보자=저는 그점은 조금 생각이 다릅니다. 잠재성장률 경로에서 벗어나는 쪽으로 일단 경기가 들어가게 하면 그 다음 단계에는 분명히 잠재성장률 아래쪽으로 반작용이 생기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지 성장률 경로를 벗어나지 않도록 관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국회 재정경제위원회 속기록)

경기부양을 둘러싼 입장차는 얼마 뒤 제주에서 열린 전경련 하계포럼에서 다시 불꽃을 튀었다. 같은 달 29일 강 의장은 “건설경기는 정부정책에 의해 강온조절이 가능한 유일한 분야다. 건설분야를 단기적 경기관리 수단과 영역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경기 전반을 살리기 위해 ‘건설경기 부양’ 카드를 과감히 쓰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바로 하루 전날 같은 자리에서 권 부총리는 “인위적 건설경기부양은 바람직하지 않다. 경기가 좋지 않다고 해서 재정을 투입해 건설경기를 띄우던 시절은 지났다”며 정반대의 입장을 밝혔다.

경기부양을 보는 관점


경기부양에 대한 입장은 기본적으로 한 나라의 잠재성장률을 어느 수준으로 보느냐에 달려 있다. 만약 잠재성장률이 낮은데도 이를 초과해 경기를 부양한다면(인플레이션 갭) 경기과열, 물가상승 등이 일어난다. 반면 잠재성장률이 높은데도 실질성장률이 여기에 못미친다면(디플레이션 갭) 경기침체 등의 부작용이 나타난다.

거시경제에 대한 시각차 외에 정치적 입지도 경기부양에 대한 입장이 갈리는 이유이다. 여론에 민감한 여당으로서는 체감경기와 일자리에 직접적으로 연관된 경기부양에 적극적인 반면, 경제의 안정적 운용을 중시하는 정부는 경기부양에 신중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정부가 잠재성장률을 웃도는 경기부양에 거부 반응을 보이는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인위적인 경기부양은 당장의 약발은 좋지만, 궁극적으로 경제의 기초체력(성장잠재력)을 갉아먹는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특히 부동산시장이 극도로 불안한 상황에서 재정확대, 규제완화 등 대대적인 경기부양은 투기심리를 자극해 큰 낭패를 초래할 수 있다.

◆ 참여정부의 뼈아픈 실책
참여정부도 딱 한 번 경기부양의 유혹에 흔들린 적이 있다. 그 결과 투기의 부활이라는 뼈아픈 교훈을 얻게 된다.

2004년 6월 18일 열린 경제장관간담회에서 당시 이헌재 경제부총리는 “성수기인데도 건설·제조·서비스업은 물론 농업부문에서도 고용증가가 나타나지 않고 있다”고 포문을 연 뒤 며칠 뒤 정례브리핑에서 “건설수요는 올 4분기부터 내년에 걸쳐 전반적으로 가라앉을 것이며, 건설투자의 급감을 막는 것이 관건”이라고 말한다.
당시는 2003년 10·29대책으로 건설경기를 중심으로 내수가 위축되면서 침체된 경기를 살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한창 힘을 얻고 있을 때였다.

조선일보 2003년 12월 10일자. 2003년 10.29대책으로 집값이 잠잠해지자 지방건설경기를 살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건설경기 회복을 돌파구로 정한 이 부총리는 다음달 1일 사회간접자본(SOC) 등 건설투자를 확대하고, 주택건설지원을 강화하는 내용의 ‘건설경기연착륙방안’(7·1방안)을 발표한데 이어 8월에는 전국에 골프장 250개를 지어 일자리를 만든다는 ‘골프장 경기부양론’을 들고 나온다.

때마침 한국은행도 당시 3.75%인 콜금리 목표치를 13개월 만에 3.5%로 낮춘다. 당시 박승 한은총재는 “예상치 못한 고유가로 경제성장률이 떨어진데다 내수는 더디게 회복되는 반면 수출·건설경기가 너무 빠르게 식고 있다. 금리인하가 물가를 자극할 수도 있지만 지금은 경기를 살리는 게 더 급하다”고 인하 배경을 설명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이 부총리는 “오히려 만시지탄(晩時之歎)의 감이 있다”며 환영의 뜻을 밝혔다.

한은의 콜금리 인하가 결정되던 바로 그날, 당시 재경부 이종규 세제실장은 “부동산경기가 하락할 때 쓰는 정책은 상승할 때의 정책과 같을 수 없다”며 종합부동산세 등 부동산세제의 완화를 시사한다.
이 때를 기점으로 정부와 여당 안에서 종부세 도입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 당시 청와대 이정우 정책기획위원장 등을 중심으로 다른 목소리를 내고 나섰지만, 2004년 말 입법과정에서 종부세 과세대상은 원래 생각했던 공시가격 6억원 이상에서 9억원 이상으로 완화되고, 가구별 합산도 개인별 합산으로 크게 후퇴한다. 시민단체는 종합부동산세가 ‘종합구멍세’가 돼버렸다며 정부를 강하게 비판한다.

정책후퇴의 신호


잇단 건설경기 부양책, 종부세 후퇴는 시장에서 정책 후퇴로 받아들여졌다.
2003년 10·29대책 이후 1년 넘게 잠잠했던 집값은 2005년 들어 판교신도시분양, 강남 압구정동 초고층 재건축 추진 등 휘발성 강한 재료와 겹치면서 다시 오르기 시작했고, 정부는 2005년 8·31대책을 통해 후퇴시켰던 종부세 등을 원상복귀시켜야 했다.

종부세의 후퇴와 원상복귀 과정은 원칙의 후퇴가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잘 보여준다. 특히 투기심리가 팽배한 부동산시장에서 작은 후퇴의 신호 하나도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런 의미에서 투기꾼들이야 말로 ‘겨울이 지나면 반드시 봄이 온다’는 믿음의 수호자이자 기다림의 달인이다. 이들은 아무리 혹독한 투기근절책이 나와도 언젠가는 풀린다는 사실을 오랜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이들의 소위 ‘학습효과’를 뒷받침하는 것이 바로 주기적으로 되풀이되는 경기부양의 요구였다.

투기꾼들에게 가장 화창한 봄날은 역설적이게도 IMF외환위기였다.
IMF외환위기 이후 경기부양은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대세였고, 경기부양을 이유로 각종 부동산관련 규제가 대대적으로 풀리기 시작한다.

◆ IMF외환위기 이후 대대적인 경기부양
2001년 2월 7일, 건설업계가 마련한 당시 김윤기 건설교통부장관 초청 간담회.
이날 행사에서 김 장관이 “올해 건설예산의 85%를 상반기 중 집행하는 등 건설경기를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운을 떼기 무섭게 건설사 사장들의 요구가 쏟아졌다.

이중근 부영회장=과거 투기억제 수단으로 도입된 양도세는 주택보급률이 100%에 육박하는 만큼 폐지돼야 한다. 집을 살 때 부담하는 취득·등록세도 주택업을 제조업으로 분류해 감면해 달라.
박성대 대동주택 명예회장=유지, 관리가 미흡해 붕괴사고가 일어나도 건설업계의 책임으로 돌아온다. 시설물의 유지, 관리비 책정을 늘려야 한다.
김언식 삼호건설 사장=대한주택보증 출자금을 담보로 대출을 받았으나 주택보증의 부실화로 출자금은 날아가고 대출 빚만 남게 됐다. 주택보증 출자금은 업체가 원해서 낸 게 아니라 주택업을 하려면 의무적으로 내도록 했던 것으로 출자금이 없어졌으니 대출금도 탕감해줘야 한다. (중앙일보 2001년 2월8일)

그리고 3개월 뒤인 5월 23일, 정부는 생애최초 주택구입자에게 집값의 70%까지 대출해주고, 2001년 말까지 구입한 신축주택에 대해 양도세 면제, 취득·등록세 50% 감면 등의 내용을 담은 ‘건설산업 구조조정 및 투자적정화방안’(5·23방안)을 발표한다. 국민의정부 들어 10번째 발표된 주택경기 활성화 대책이었다.
당시 정부는 1998~2001년 5월까지 3년 6개월동안 모두 10번, 평균 4개월에 한 번꼴로 부양책을 내놓은 것이다. 정부는 물밀듯이 밀려드는 업계의 요구를 대폭 수용해 대대적으로 규제를 풀어서라도 건설경기를 살리는 것이 절실했다.

2001년 2월 청와대가 대통령 취임 3주년을 맞아 공개한 김대중 대통령의 메모에는 당시 대통령이 건설경기부양을 위해 얼마나 고심했는지를 엿볼 수 있다. 김 대통령의 노트에는 깨알 같은 글씨로 ‘지방경제 어렵다는 여론, 건설경기 위축, 재래시장 문제, 기업 지방 이전, 지방건설업 자율조정, SOC사업 조기 시행’ 등의 친필 메모가 적혀 있었다.

취임 1년 반 만인 1999년 8월 15일, 광복절 경축사를 통해 ‘IMF졸업’을 공식선언했던 정부는 같은 해 8월 말 대우그룹 사태, 다음해 3월 현대그룹 ‘왕자의 난’ 등으로 경기가 급속히 얼어붙자 경기부양효과가 큰 주택시장 부양책을 쓰기 시작한다.

대대적인 규제완화


조선일보 1999년 4월 9일자. 당시 정부는 주택경기 활성화를 위해 대대적인 규제완화를 실시한다.
1998년 먼저 아파트 분양가를 자율화한데 이어 99년 아파트 분양권 전매 허용, 아파트 재당첨 제한 폐지 등의 조치를 잇달아 내놓는다. 또 2000년부터 아파트 임대사업을 장려하고, 아파트 리모델링 사업자금을 지원하는 대책 등을 본격화한다.
2001년에는 2003년 6월까지 전용 25.7평 이하 신규 주택을 취득할 때 취득·등록세 25% 감면, 부동산 투자회사가 부동산을 취득할 때 취득·등록세 감면, 소형주택 구입자금 저금리 지원 등의 지원이 잇따른다.
이런 조치들은 정부가 암묵적으로 투기를 감수하더라도 주택경기를 부양시키겠다는 의지를 공식화한 것이었다.

경기부양을 위한 확장적 재정, 통화정책이 총동원되면서 콜금리도 2001년 한 해 동안 모두 4차례 인하돼 사상 최저치인 연 4%로 떨어진다. 같은해 9월 19일 4번째 콜금리 인하를 결정한 뒤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당시 전철환 한은총재는 “미국 테러 참사에 따른 대외여건 악화가 실물경제와 금융시장에 미치는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해 콜금리 인하를 결정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대대적인 규제완화와 풍부한 유동성으로 건설경기를 중심으로 서서히 경기가 달아오르고, 강남 재건축단지를 중심으로 투기조짐이 나타나자 2002년부터 부동산정책은 완연한 안정정책으로 돌아선다.
당시 청와대 건설교통비서관이었던 이춘희(현 건교부 차관)의 회고다.

“2001년 경기가 싸늘할 때 5·23부양대책을 발표하고 한 달 뒤 당시 이기호 경제수석에게 업무보고를 하면서 ‘이제부터는 투기대책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때만 하더라도 대부분 집값이 오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당면과제는 투기억제가 아니라 경기부양이었다. 그런데 불행히도 내가 걱정했던 것이 현실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2001년 12월부터 집값이 오르기 시작했고, 연말 이 수석에게 투기대책을 발표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그래서 2002년 들어 1·8대책, 3·6대책 등이 발표됐다.”

대대적인 규제완화로 투기가 부활할 조짐이 보이자 2002년 완연한 안정정책으로 돌아선다. 표는 재정경제부, 김종찬 저서 '황금낙하산' 109페이지 인용

2002년 들어서는 1, 3, 9, 10월 등 하루가 멀다 하고 안정대책이 쏟아진다. 주택경기 부양을 위한 대대적인 규제완화의 효과, 확장적인 통화정책에 따른 유동성 과잉 그리고 IMF외환위기 이후 3년(1998~2000년)간 연간 50만호를 밑돈 주택공급 부족분 등이 한꺼번에 겹치면서 집값 상승도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됐기 때문이다.
1970년대 말 부동산 1차 순환기, 80년대 말 2차 순환기 등 집값 폭등기 때의 공통적 특징은 과잉 유동성과 주택공급 부족이 집값 상승의 원인이었다. 2001년 이후부터 참여정부 기간 내내 지속된 최근 집값 파동은 이러한 2가지 원인 외에도 이전 정권에서 이뤄진 대대적인 규제완화의 부작용이 한꺼번에 노출됐다는 특징을 갖는다.

규제완화의 부작용


국민의정부 시절 IMF외환위기 이후 침체된 경기를 되살리기 위해 추진된 대대적인 규제완화가 결국 부동산투기 부활이라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2003년 초 당시 인수위 경제2분과로부터 부동산관련 대책을 보고받는 자리에서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는 “이렇게까지 많이 풀었습니까”라고 말했다.(이춘희 현 건교부 차관의 회고)
건설경기부양을 위해 일정 수준 규제를 푸는 과정에서 투기억제를 위한 필수 규제마저 무장해제 시켰다는 지적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2003년 참여정부 출범 이후 발표된 일련의 대책들은 이전 정권에서 마구잡이로 해체된 투기억제책을 다시 원상복귀 시키는 과정이었던 셈이다.

◆ 82년의 경험
경기부양을 위해 섣불리 규제를 풀었다가 부동산투기를 일으켰던 경험은 5공화국 시절인 1982~84년에도 있었다. 1982년은 이철희·장영자 사채파동을 수습하기 위해 자금이 집중적으로 풀린데다, 그린벨트에서도 목장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초지조성계획’(10년간 1조원 투자사업)이 발표되면서 부동산경기가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앞서 1980년 사상 초유의 마이너스성장을 기록하는 등 경기침체가 가속화되자 정부는 경기부양을 위해 여러 차례 양도소득세를 내리거나 각종 건축규제를 풀고, 부동산 거래자금의 출처 조사와 특정지역에 대한 투기활동에 대한 감시를 중단한다.
이러한 규제완화의 효과가 누적되면서 1982년부터 한동안 잠잠했던 투기가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한 것이었다.

투기조짐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1982년 11월, 당시 김준성 경제부총리는 긴급대책회의를 열어 대책마련에 나선다. 이에 따라 1983년 4월 아파트 불법전매, 아파트 구입자금 출처, 부동산 중개업소의 불법 거래중개행위 등에 대한 조사를 강화하는 등 주택시장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는 내용의 ‘4·18조치’가 발표된다.
1982년 12·22 주택투기억제대책, 1983년 2·16 부동산투기억제대책에 이은 3번째 대책이었다.

1978년 8·8조치 이후 침체됐다가 1982년을 전후해 반짝했던 부동산시장은 당시 5공 정부의 투기억제 대책으로 다시 1986년까지 침체기로 빠져든다.
규제완화의 유혹은 언제나 경기부양의 목소리와 함께 시작되며, 규제완화를 동반한 섣부른 경기부양책은 결국 투기의 부활이라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사실은 1982년의 경우에는 어김없이 맞아떨어졌다.

◆ 경기부양의 정치논리
그렇다면 왜 경기부양의 요구는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것일까.
이는 경기 자체가 상승기와 하강기를 반복하는 자율적인 순환사이클을 갖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정부가 재정과 금융통화라는 정책수단을 동원해 경기의 진폭을 줄이는 경기부양은 바람직한 측면이 있다. 문제는 한 나라의 경제가 감당하기 힘든 수준(잠재성장률을 초과하는 수준)으로 인위적으로 경기를 자극할 경우 각종 부작용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특히 경기 하강기에는 생산 감소, 실업증가 등으로 경기부양에 대한 요구가 거세지기 때문에 여론에 민감한 정치권은 인위적 경기부양의 카드를 꺼내드는 경우가 많다. 이중 선거는 가장 정치적으로 민감한 시절이기 때문에 인위적 경기부양의 무리수를 두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선거가 끝난 뒤에는 반드시 부동산투기라는 부작용이 연례행사처럼 뒤따르곤 한다. 6공화국 출범 직전인 1987~88년이 대표적이다.

당시 여야 대선후보들은 전국을 돌면서 선심성 개발공약을 남발, 이들이 지나간 곳은 어김없이 땅값이 폭등하곤 했다. 특히 당시 노태우 후보가 서울과 설악산을 잇는 동서고속전철을 건설하겠다는 공약을 발표하자 해당지역 땅값은 평당 50만원에서 150만원으로 뛰어올랐고, 역시 노 후보의 공약이었던 서해안종합개발계획으로 평당 8000원짜리 녹지가 1만5000원으로 치솟았다.

2007년 1월 현대경제연구원이 1995~2004년 4월까지 총 8번의 전국 선거(대선, 국회의원선거, 동시지방선거 등)를 분석한 결과 1998년 2회 동시지방선거를 제외한 7번의 선거에서 선거가 열린 달의 전국 아파트 값이 6개월 전과 비교해 빠르게 상승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 기간동안 평균 가격상승률은 약 2.8%였으며, 특히 강남은 4.05%의 높은 상승률을 기록했다.
이는 선거를 앞두고 강력한 경기부양책이 등장하는데다 각 후보들이 득표를 위해 그린벨트 해제, 재건축규제완화, 도시재개발사업 등 각종 선심성 공약을 쏟아내 투기심리를 자극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 건설업과 경기부양
그렇다면 경기부양의 요구가 나올 때마다 건설업이 단골메뉴로 등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가장 직접적으로는 건설업의 특성상 전후방산업연관효과, 고용창출효과가 매우 커 경기부양의 효과가 가장 화끈하기 때문이다. 2005년 건설산업연구원은 1조원의 건설투자가 이뤄지면 대략 2만8000명의 일자리가 만들어지고, 1조9900억원의 부가가치가 창출돼 경제성장률이 0.1%포인트 높아진다고 분석하고 있다.

건설업의 국민경제적 비중이 커짐에 따라 건설경기를 살려야 한다는 주장이 주기적으로 반복된다. 사진은 2006년 서울 은평뉴타운 공사현장

건설업의 국민경제적 비중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한국경제에서 건설업이 차지하는 막대한 비중에서 찾을 수 있다.
한국은행, 통계청 등에 따르면 부가가치를 기준으로 건설업의 국민경제적 비중은 2005년 9%였다. 한 나라에서 생산되는 총 부가가치 중 9% 가량이 건설업에서 나온다는 뜻이다. 또 2005년 기준으로 국내총생산(GDP)대비 건설투자의 비중은 19%였다.
특히 건설업의 총 부가가치 비중과 GDP 비중이 1990년대 초를 전후해 급격히 높아졌다. 부가가치 비중은 1985년 7%에서 1990년 11.3%, 1995년 11.6%까지 높아졌다가 2000년 8.3%로 다소 낮아진다. 또 GDP 비중 역시 1980년대까지 15% 안팎에 머물다가 1990년 22%로 높아진 뒤 1998년까지 20%대를 유지하다가 1999년부터 다소 낮아지고 있다.

1990년대 초를 전후해 건설업의 비중이 획기적으로 커진 것은 이 시기 분당·일산 등 5개 신도시를 포함, 주택 200만호 건설이 본격화됐기 때문이다.
1980년대 중반까지 25만호 수준에 머물던 주택건설 실적은 1989년 46만호로 늘어났다가 1990년 사상 최대인 75만호까지 폭증한다. 건설과열을 빚자 1991년 들어서는 잇달아 건설경기 진정책을 내놓아야 할 지경에까지 이른다.

이처럼 주택 200만호 사업을 계기로 건설업의 국민경제적 비중이 확고해짐에 따라 건설업의 부침에 의해 국내 경기 전체가 오르락내리락하는 현상이 벌어지는 것이다. 이는 결과적으로 인위적 경기부양을 위해 가장 먼저 건설업, 특히 주택부문을 자극하게 되는 구조적 원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토건국가적 사고방식


건설업이 경기부양의 단골메뉴로 등장하는 역사적 뿌리는 1960, 70년대 개발연대의 토건국가적 사고방식일 것이다.
토건국가란 원래 우리처럼 건설업이 비대해진 일본의 정·관·건설업계의 부정적 공생관계를 분석하기 위해 고안된 개념이다. 상지대 홍성태 교수(사회학)는 “개발국가의 가장 타락한 형태가 바로 토건국가”라며 “토건국가는 토건업과 정치권이 유착하여 세금을 탕진하고 자연을 파괴하는 국가를 뜻한다”고 말했다.

홍 교수에 따르면 개발독재시대 비대해진 건설, 토건업은 자신의 국민경제적 비중이 커짐에 따라 건설, 토건업이 경착륙하면 경제가 갑작스럽게 침체에 빠진다는 논리를 앞세워 주기적으로 경기부양의 요구를 들고 나온다는 것이다. 반대로 대규모 공공사업을 일으키고 이에 투자하는 것을 전체 경제성장과 동일시함으로써 끊임없이 대규모 토목·건축사업을 부추기게 된다.

과도한 건설투자(특히 주택부문)의 문제점은 건설업의 한계자본계수(GNP 한 단위를 늘리는데 필요한 자본량)가 제조업에 비해 크기 때문에 수요 진작 효과는 크지만 생산유발효과는 크지 않은, 기본적으로 소비성 투자라는 점이다.
따라서 적정수준을 넘어선 건설투자는 경기부양이라는 반짝 효과는 크지만 장기적인 성장동력 확충에는 별 효과가 없다.

과거의 부정적 유산과 결별


2001년 한국과학기술평가원이 1970~94년까지 25년동안 투자유형별로 1조원을 투자했을 때의 경제적 효과를 분석한 결과 건설경기 부양에 쓸 경우 △첫 해에 0.42%의 경제성장 효과가 나타나지만 △5년 후 첫해 대비 마이너스 0.01% △20년후 마이너스 0.16% △30년 후 마이너스 0.31% 성장하는 것으로 분석됐다.
반면 1조원을 연구개발(R&D)에 투자할 경우 △첫 해에 0.25%의 경제성장을 가져온 뒤 △5년 후 첫해 대비 0.06%로 성장률이 떨어지지만 △10년 후 0.24% 성장으로 높아지고 △30년 후 1.54% 성장하는 등 시간이 흐를수록 성장기여도가 높았다.

2006년 7월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당시 권오규 경제부총리 후보자는 인위적 경기부양을 요구하는 정치권의 요구에 대해 “나는 조금 생각이 다르다”고 답했다. 이 한마디는 개발독재시대의 토건국가적 사고와 손쉬운 단기 경기부양 처방, 부동산투기를 무릅쓰고서라도 경기부양에 매달리는 모험주의적 정책관행 등 부정적인 과거유산에 대한 참여정부의 결별 선언이자, 정책적 원칙에 대한 확인이었다.

 
       [실록 부동산정책40년③] ‘큰 칼’이냐 ‘작은 칼’이냐   2007-03-14 09:52:04
 

우리나라 부동산 가격은 1960년대 본격적인 경제개발과 함께 크게 움직이기 시작해 지난 40년간 수도권 집중화에 따른 수급 불균형과 공급시차, 경제성장에 따른 소득향상과 과잉 유동성, 건설경기 부양 유혹, 부동산 투기심리에 무력했던 제도, 정책 미비 등의 요인들에 의해 변동을 겪었다. 과거 집값이 급등할 때는 항상 시중에 돈이 너무 많이 풀리고 주택공급이 부족했으며 투기로 얻은 불로소득을 환수하는 시스템이 갖춰지지 않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총론-'부동산 신호등'세우기 40년 걸렸다
<1부> 왜 올랐나
1-경기부양과 부동산의 딜레마:"이렇게까지 많이 풀었습니까"
2-유동성과 부동산:'큰 칼'이냐, '작은 칼'이냐
3-공급시차와 시행착오
4-부동산 심리와 정책불신


판교발 집값 불안이 확산되던 2005년 5월. 부동산 투기조사를 벌이던 국세청 직원들은 한 사람이 강남에서만 무려 40채의 아파트와 상가를 사들인 사례를 적발하고는 깜짝 놀랐다. 김 모(56세·무속인)씨는 1999년부터 2005년4월까지 본인과 자녀 3명의 이름으로 강남 개포동과 대치동에서만 아파트 36채와 상가 4채를 집중 매입했다. 이후 아파트 값이 급등하자 본인 명의의 아파트 7채를 팔아 13억원의 양도차익을 챙겼다.

한 사람이 134억 은행대출로 강남 아파트·상가 40채 사들여

국세청 직원들을 한 번 더 깜짝 놀라게 만든 것은, 이 아파트를 사들인 자금이 불법 자금이나 탈루소득 같은 ‘검은 돈’이 아니라 은행 대출이라는 점이었다. “과거 부동산 투기자금의 출처 조사를 하면 어김없이 사업 자금 전용이나, 상속·증여세 탈루 자금이 드러나기 마련인데 당시 투기조사에서는 은행 주택담보대출을 통한 것이어서 양도소득세 축소신고 외에는 달리 처벌할 것이 없을 정도였다”는 게 당시 조사 직원의 설명이다.

김 씨는 주택담보대출로 아파트를 사고 그 아파트를 담보로 다시 대출을 받는 방법으로 10개 금융기관에서 무려 134억원의 대출을 받았다. 그가 세무서에 신고한 연 소득은 1200만원인 반면 대출이자만 매년 8억원에 이르렀다. 김 씨가 신고한 소득으로는 한 달 이자도 갚기 어렵지만 은행 등 금융권에서는 거액의 대출을 받을 수 있었다. 당시 신문은 “국세청이 밝힌 부동산 투기혐의자의 사례를 보면 은행들이 투기꾼들에게 투기자금을 대주는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음을 잘 알 수 있다.”(경향신문 2005년 6월14일자)고 지적했다.

2005년 상반기 주택담보대출금의 43%가 강남 분당 등 5개 집값 급등지역의 집을 사는데 들어갔다. 사진은 분당 전경 <사진=홍보지원팀>

세간에서는 당시 ‘무리해서라도 빚내서 집 사면 돈 번다’는 것이 공식처럼 됐다. 당시 은행에서 1억원을 빌려 3억 짜리 강남 아파트를 샀을 때 연간 은행에 내는 이자는 573만원(대출 금리 5.73%)인 반면, 3억짜리 집값은 16%(2005년)올랐다. 1년 동안 대출이자보다 9배 많은 4500만원의 차익이 생긴 셈이다. 2006년 말까지 저금리 기조 속에서 대체투자 부진까지 겹쳐 은행권에서 주택담보대출로 218조2700억원의 돈이 가계로 풀려 나갔고, 이 돈은 고수익을 쫓아 부동산시장으로 몰려갔다.

과잉유동성이 만든 버블, "돈 있는 곳에 투기 있었다"

부동산 시장에서 주택수요에 큰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 ‘돈’이다. 부동산이 좋은 투자처로 여겨지는 상황에서 돈이 많이 풀려 통화량이 증가하면 어김없이 투기성 부동산 수요를 유발해왔다. 주택도시연구원 박신영 연구원은 “우리나라는 1960년대 이후 급격한 경제성장과 도시화 과정에서 시장기본가치의 증대, 통화량의 증가, 적절한 대체투자 시장의 미성숙 등으로 부동산 값이 상당기간 큰 폭 상승했다”고 말했다.


1970년대 말 중동특수와 1980년대 말 3저 호황 등 국내 유동성이 풍부해졌을 때 어김없이 집값이 크게 상승했다. 서울대 김용창 교수는 저서 ‘한국의 주택토지정책’(2004년)에서 “그동안 부동산가격 급상승의 특성을 보면 해당 시기별로 특수한 과잉유동성에서 비롯된 자본순환의 위기에서 발생한 것”이라며 부동산 가격 변동의 큰 특징으로 ‘과잉유동성에 의한 외생적 위기’를 꼽았다.

국토개발연구원의 ‘주택시장 모형연구’(1994년)는 “통화공급량 변동은 12개월 후부터 주택시장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여 장기간 동안 계속되며, 실질통화량 1% 증가는 주택공급을 4.3% 증가시키는 반면 주택수요 총 증가효과는 9.9%에 달해 주택가격을 1.58% 올려놓는다”고 분석했다.

1978년-사람은 중동으로, 돈은 땅으로…

‘중동열기’ 속에 부동산 값이 급등했던 1970년대 말, 언론은 ‘77년을 특징지었던 증권 붐, 부동산을 중심으로 일어난 환물투기(換物投機), 건축경기의 과열, 이에 따른 일손 부족, 건축자재의 품귀파동이 모두가 중동을 떼어놓고는 설명할 수 없는 현상들이었다.’(조선일보 1978년 1월1일자)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중동건설 붐을 타고 들어온 ‘오일 달러’와 중화학공업 육성책으로 유발된 통화팽창은 물가를 치솟게 했고, 시중에 넘치는 부동자금은 땅과 아파트로 몰려 부동산시장을 달궈놓고 있었다.

중동특수 열기로 인한 경기호황과 부동산값 상승을 예측하는 1978년 1월1일자 조선일보 특집면.
1974년 1차오일 쇼크로 침체하던 한국 경제는 1976년부터 세계 경제 회복과 함께 회복되기 시작하면서 1977년에는 수출이 100억달러를 돌파했다. 수출호조에 중동진출 효과까지 겹쳐 당시 우리나라는 1230만달러나 되는 경상수지 흑자를 냈다. 중동 진출 인력은 1년 사이 3배가 늘어 해외기능공만 4만여 명이 진출했다. 1976년 경제성장률은 10.6%. 1977년에도 10.0%였다. 정부가 중화학공업을 육성하기 위해 막대한 자금을 풀면서 통화량은 급속히 팽창했다. 도매물가 상승률이 11.6%에 달했다.

유동성 증가와 인플레 압력은 부동산 시장을 자극하여 토지와 주택가격을 밀어 올렸다. 1977년 초부터 1978년까지 아파트 투기열풍이 이어졌다. 삼익주택이 여의도에 지은 목화아파트는 당시로는 최고인 45대1의 분양경쟁률을 기록했다. 뒤이어 지은 화랑아파트 분양에서는 70대1. 화랑아파트 당첨자는 하루아침에 15만~250만원의 웃돈을 거머쥐었다. 건설부 표본조사에서는 이런 아파트의 절반 이상이 투기세력에 분양된 것으로 나타났다. 한 다리 건너면 20~30%의 프리미엄이 붙는 미등기 전매가 극성을 부렸다. 1978년 전국 땅값은 평균 49%, 6대 도시는 79%, 서울은 136%나 상승하는 기록을 쏟아냈다.

당시 정부는 ‘8.8조치’라는 강력한 부동산 대책을 내놓았지만, 통화 금융을 다루기보다는 규제와 제도개편에 초점을 맞출 뿐 중화학공업 육성과 고성장이라는 달리는 말의 고삐를 멈추지는 못했다.

L.B. 크라우스 UCSD(캘리포니아대학교 샌디에이고캠퍼스) 명예교수는 1978년의 한국경제를 진단하는 한 기고에서 “부정적인 방법으로 손쉽게 축재한 자금은 자산, 특히 부동산 가격의 상승을 부추겼다. 부동산 투기자들에게 부동산 과열의 책임이 있지만 사실 은행으로부터 손쉽게 대출을 받을 수 없었다면 이런 과열 사태는 일어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당시 대출의 주체는 개인보다는 기업이었지만 이미 30년 전, 손쉽게 얻은 자금은 투기로 연결됐다.

1988년-흑자경제의 그늘…투기의 부활

1980년대 후반의 부동산 투기열풍도 저달러·저유가·저금리가 가져다 준 흑자경제에서 비롯됐다. 달러 평가절하(엔화 평가절상) 상태를 만들기 위한 이른바 ‘플라자 합의’ 에 이어 유가가 하락하면서 ‘단군 이래 최대 호황’이라고 불리는 ‘3저 호황’이 이어졌다. 1986년 47억달러로 시작한 경상수지 흑자는 이듬해 100억달러, 1988년에는 145억달러에 이르렀다. 1986년부터 3년 연속 10%대를 넘긴 경제성장률은 1988년까지 3년 평균 10.76%를 기록했고 대선이 치러진 1987년 통화량 증가율은 전년 대비 30.8%에 달했다.

돈이 시중에 흘러넘치자 또다시 부동산 투기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1987년 토지가격 상승률이 전년의 2배를 기록, 투기 광풍의 전조를 보이더니 1988년에 들어서자 본격적으로 불붙기 시작했다. 1980~1987년 연평균 10.5%였던 지가상승률은 1988년 전국 평균 27.5%, 이듬해 32.0%로 가파르게 상승했다. 1988년 13.2%를 기록한 집값 상승률은 이듬해 14.6%, 1990년에 최고인 21.0%를 기록했다.

급기야 정부는 1988년 투기억제 지역의 확대, 양도세 중과, 투기꾼 및 부동산 업자에 대한 세무조사 강화 및 토지공개념 도입을 골자로 하는 ‘8.10 부동산종합대책’을 내놓았지만 투기억제의 강도에 비해 통화량 축소와 물가안정에 관한 부분은 그해 총통화량 증가율을 18% 선에서 억제한다는 것 외에는 뚜렷한 내용이 없었다.

2005년- 내수부진 속 과잉유동성과 부동산 투기의 딜레마

2001년 이후 부동산시장 불안은 세계적 저금리 추세에다 IMF 외환위기 이후 금융 패러다임의 변화와 맞물려 있다. 외환위기 이후 기업들의 차입금 축소 등 재무구조 개선 요구와 투자 부진 등으로 기업 부문에 대한 대출은 급속히 축소된 반면, 지금까지 은행 자산운용에서 비중이 극히 낮았던 가계 대출이 안정적 자산운용처로 부각됐다.

부실우려가 높은 기업 부문 대출은 자연스럽게 줄였고, 대신 담보(집)가 확실하고 이자 수익률도 높은 가계대출은 늘였다. 이전까지만 해도 은행의 공공성을 강조하며 생산성이 없는 가계 부문 대출을 제한하던 정부도 외환위기 극복과정에서 가계 대출에 대한 창구지도를 풀었다. 외환위기 이후 쏟아진 규제완화 및 유동성 확대를 통한 경기부양은 갈 곳 없는 시중자금의 단기부동화를 더욱 부추겼다.

은행의 가계대출 추이를 보면 2000년 말 54조2,000억원에 불과하던 은행권 주택담보대출은 2006년 상반기 200조8000억원(2006년 말 218조 3000억원)으로 부풀었다. 특히 2001년과 2002년 중 주택담보 대출은 매년 50% 이상 초고속으로 늘어났다. 여기에 카드사와 할부금융사 등 기타 여신전문 회사의 대출까지 포함할 경우 총 가계대출은 1999년 214조원에서 2006년 초에는 545조5000억원으로 불어났다. 이러한 막대한 자금의 일부가 부동산 시장으로 흘러들었으니 부동산 시장이 조용할 리 없었다.


부동산 '버블' 대책과 금리논쟁

이처럼 1970년대 말과 1980년대 말, 그리고 2001년 이후의 부동산 과열에는 통화량이 상당한 영향을 미쳤지만 정작 부동산시장을 잡는 정책적 노력에 유동성과 금리 등 통화운용정책의 고려비중은 낮았다. 서울대 김용창 교수는 “그동안 부동산 가격 상승에 대응하는 대책의 특징은 이처럼 부동산 부문 이외의 원인(과잉유동성)에서 발생한 문제에 대해 부동산 부문 자체에서만 해결책을 찾는 것이었다”고 지적했다. 부동산 시장 교란의 원인과 처방 사이에 괴리가 있었던 셈이다.

삼성경제연구소 최호상 수석연구원은 2006년 11월 발간한 ‘주택시장 불안과 금리’ 보고서에서 “영국 호주 미국 등은 주택가격 급등에 따른 인플레이션 압력을 줄이기 위해 금리를 단계적으로 인상해 주택가격 상승을 둔화시킨데 비해 한국의 주택경기 연착륙 정책은 주로 수급조절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보고서는 2005년 상반기 기준 국내 주택가격 버블의 크기는 17%이며, 이 중 금리요인에 의한 것이 11.6%로 총버블의 3분의2를 차지한다고 진단했다. 또 경기 상승기에 금리조절 속도가 늦어진 것이 부동산 시장 과열의 큰 원인이 된 것이라는 판단을 내놓아 지난해 말 ‘금리논쟁’에 불을 지폈다.

경기와 부동산, 다른 방향으로 튀는 두 마리 토끼

유동성과 관련해 정부가 신중한 접근을 한 배경에는 2001년 이후의 부동산가격 상승이 과거와는 달리 내수 부진과 부동산 과열이 함께 찾아온 어려운 상황이 있었다.

“지금은 심각한 경기침체와 부동산과열이 같이 왔기 때문에 현재 상황에서는 거시적인 방법으로 유동성을 줄여서 부동산투기를 막는 것은 부동산 투기 억제의 효과는 별로 없고 그 대신 경기를 죽이는 효과가 더 크게 나타날 우려가 있어...”(2003년 6월17일 국회재정경제위원회 속기록)
‘정부 행정력에 의존한 미시적 부동산 가격 안정대책만으로는 급등하고 있는 부동산가격을 잡기는 역부족’이라는 지적에 대한 당시 박승 한국은행 총재의 답변에는 부진한 경기와 부동산 과열이라는 각기 다른 방향으로 뛰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데 대한 고민이 드러난다.

2001년 이후 저금리 속 부동산 값 급등이라는 고민은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영국의 유력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2004년 9월9일자)에 따르면, 세계 20개 국가의 주택가격을 조사한 결과 11개 나라의 집값이 두 자리 수 상승률을 기록했다. 가장 높은 곳은 홍콩으로 무려 28.7%나 급등했으며, 남아프리카공화국 25.5%, 뉴질랜드 22.1% 등이 20%가 넘었다. <이코노미스트>는 “세계 집값이 과거 정점기보다 과대평가돼 있다”면서 “중국과 남아공을 비롯해, 세계 3분의 2 지역에서 주택가격 거품 위험이 있다”고 경고했다.

세계적 저금리 속 주택 거품…각기 다른 처방

이 같은 세계적 주택가격 거품 앞에 경기 조절의 여유가 있는 국가들은 통화조절이라는 ‘큰 칼’을 사용했다.
영국은 2003년 11월 중앙은행이 주택가격 거품붕괴로 인한 경기침체를 방지하기 위해 정책금리를 인상한다고 발표한 이후 9개월 동안 5차례에 걸쳐 정책금리를 1.25% 포인트 인상한 결과 주택가격 상승률이 2003년 19.6%에서 2005년 5.3%로 둔화됐다. 호주도 2002년 5월부터 4년6개월 동안 8번에 걸쳐 기준금리를 2%포인트 인상해 지난해 11월 기준금리를 6.25%까지 높였다. 그 결과 2003년 18.2%이던 주택가격 상승률이 2004년 6.9%로 안정됐다.

이처럼 영국과 호주 미국은 점진적 금리인상과 정책대응으로 연착륙에 성공한 것으로 평가받는 반면, 부동산 버블 붕괴로 10년간 복합불황을 겪은 일본과 스웨덴은 경착륙으로 인한 후유증을 크게 겪은 것으로 평가받는다. 스웨덴은 1985년 이후 부동산 대출이 급증하면서 상업용 부동산이 1991년까지 116%나 상승하자 1988년 중반 이후 2년 반 동안 80여 차례 기준금리를 변경하면서 7%포인트 인상한 결과 부동산 가격이 1992년과 1993년 각각 9.2%, 11.2% 하락하며 부동산 관련 대출의 부실화와 금융위기를 초래했다.

우리나라의 경우 부동산 담보대출 급증 등 유동성 과잉의 조짐이 2005년 1분기에 나타났지만 경기부진이라는 딜레마 때문에 2005년 10월부터 금리인상에 나섰다. 속도도 조절해 2~4개월 주기로 0.25%포인트씩 5차례 인상하는 한편, ‘작은 칼’인 금융기관의 대출 규제라는 미시적 방법을 병행했다.

‘작은 칼’, 미시적 대응의 사각지대를 잡아라

2005년 당시 미시적 대응은 바로 ‘투기지역’에서 아파트 담보대출을 1건이라도 받은 차입자의 추가 대출을 제한하는 ‘1단계 주택담보대출 리스크 관리 강화방안’ 이었다. 하지만 주택담보대출 관리방안 1단계에서는 시장의 충격 정도를 감안, 대출 제한을 개인으로 정해 동일세대이더라도 배우자나 자녀, 또는 그들의 명의로 투기지역에서 여러 건의 추가 주택담보 대출을 받을 수 있었다. 다른 은행에서 주택담보대출을 받은 후 돌려 막는 경우도 있었다. 한국은행과 금융감독원이 주택담보대출 실태조사에 나서 현장을 확인한 결과 강남 송파 서초와 분당 용인지역에서 2건 이상의 주택담보대출을 받은 차입자가 배우자 또는 자녀 명의로 추가대출을 받은 건수가 7개 은행에서 2116건에 총 1881억원에 달했다.

이후 2005년 8월 후속 대책에서 처음으로 소득에 따라 상환능력을 고려하는 제도인 DTI(Debt To Income) 규제까지 추가 도입됐지만 주택담보대출 증가세는 2006년 하반기까지도 꺾이지 않았다. 은행권주택담보대출은 2006년 4월 및 5월에 각각 3조1000억원과 3조원 증가했는데 이는 2005년 중 월 평균 1조7000억원에 비하면 상당히 높은 수준이었다. 이는 당시 은행권에서 ‘4강 체제’에 뒤쳐지지 않으려는 경쟁의식이 맞물리며 시장점유율을 높이기 위해 주택담보대출을 경쟁적으로 확대한 데도 원인이 있었다.

저금리-부동산과열-대출증가-소비부진-저금리 악순환

결국 낮은 금리는 상당수 전세 수요자를 매매 수요로 돌아서게 했다. 아파트 매매계약서만 있으면 은행은 돈을 빌려주고, 직장인들은 벌어들이는 소득의 4분의 1 이상을 이자로 내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주택담보대출이 증가하면서 이자 부담 때문에 소비를 하지 않고, 소비 부진은 내수부진으로 이어지고, 이는 다시 금리를 올리지 못하는 순환 고리가 지속됐다.


금융연구원 한재준 연구원은 “소비위축 우려로 정책당국이 금리를 높은 수준에서 유지하기 어려웠던 점은 인정되나, 부동산시장이 폭등하고 있는 상황에서 공급확대에는 시차가 따르고 금리 이외의 수단인 단기적인 대출규제 방책만으로 안정을 도모하는 데는 무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부동산 공룡을 다루는 새로운 방법

정부는 지난해 11.15 ‘부동산시장 안정화방안’과 올해 1.11 ‘부동산시장 안정을 위한 제도개편 방안’에서 주택담보대출 규제를 강화해 부동산 버블이 더 커져 금융 시스템의 건전성을 해치는 것을 방지하는 조치를 적극 취하고 있다. 토지보상금이 부동산시장으로 흘러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채권보상을 확대 하는 등 토지보상제도를 고치고, 다주택 보유자에 대한 주택담보대출 규제를 강화하는 등 더 강력하고 근본적인 유동성 관리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하지만 ‘부동산언론’과 투기세력들은 이 같은 미시적 대응과 대출규제조차 ‘서민의 내집마련 기회를 옥죈다’고 흔들고, 서너 발 앞서 부동산 시장 ‘경착륙’과 ‘복합불황’을 경고하며 꺼져가는 ‘부동산 불패’ 신화에 끝없이 불을 지피고 있다. 대출규제 대상인 투기지역 내에서 2건 이상의 담보대출을 받은 사람이 묵묵히 생업에 종사하는 서민층이라고 보고 정책적으로 보호해야 할 대상인지 반문하게 한다.

대표적인 시장왜곡의 결과물인 부동산이라는 공룡 앞에 정부는 ‘저금리를 통한 성장촉진’과 ‘부동산 가격 억제’라는 서로 상반된 목표의 정책 퍼즐을 맞춰가고 있다. 외환위기 이후 경제 살리기 골격을 그대로 유지하기 위해 정부는 ‘한 쪽 손’이 묶인 채 부동산 시장왜곡과 맞서 싸우고 있다. 그런데도 ‘나머지 한 쪽 손’마저 무력화시키려는 시도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고 정부의 싸움은 그만큼 힘겹다.

 

 
[실록 부동산정책40년④] 주택공급에서 생긴 일 2007-03-14 09:53:31

총론-'부동산 신호등'세우기 40년 걸렸다
<1부> 왜 올랐나
1-경기부양과 부동산의 딜레마:"이렇게까지 많이 풀었습니까"
2-유동성과 부동산:'큰 칼'이냐, '작은 칼'이냐
3-공급시차와 시행착오
4-부동산 심리와 정책불신


“부동산, 죄송합니다. 너무 미안합니다. 올라서 미안하고, 국민을 혼란스럽게 하고, 한번에 잡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2007년 1월 23일 신년연설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거듭 사과했다. 한 달 전 부산지역 상공인과의 오찬 간담회에서 “부동산 말고 꿀릴게 없다”고 말한데 이어 두 번째였다. 같은 달 31일 열린 국정과제위원회 합동심포지엄의 자료집은 부동산정책과 관련, 좀 더 구체적으로 “공급확대 대책의 추진 및 시중유동성 관리가 미흡했다”고 밝혔다.

전국 기준으로 2002년 67만호에 달했던 연간 주택건설 실적(승인 기준)은 참여정부가 시작된 2003년부터 매년 조금씩 줄다가 2006년 11월 현재 36만호 수준으로 감소했다. 수도권도 줄곧 감소하다가 2006년 11월 현재 11만호로 떨어졌다. 연말 주택건설승인이 집중되는 점을 감안하면 2006년도 전년도 수준을 유지할 것으로 추정되지만 참여정부 들어 주택공급이 추세적으로 감소했다.


2006년 10월 당시 추병직 건설교통부장관의 ‘신도시 추가건설’ 발언은 시장에서 공급 부족을 인정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렇다면 참여정부 기간 주택공급과 관련해 어떤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수도권 택지 1500만평 확보하라”

“이번 대책발표 때 어느 지역에 언제까지, 얼마만큼의 주택을 공급할 지를 구체적으로 국민들에게 알려야 합니다”
2005년 8월 말, 이후 8·31대책으로 알려진 부동산종합대책 발표를 앞두고 당시 부동산대책반장이었던 재경부 김석동 차관보(현 차관)는 건교부에 강하게 요청했다. 해당지역의 투기 우려 등이 제기됐지만 결국 주택공급 지역과 일정을 공개하는 쪽으로 결론났다.
이와 함께 8·31대책에는 향후 5년간(2006~2010년) 수도권에서 연간 300만평씩 총 1500만평을 확보하되, 그래도 택지가 부족하면 추가대책을 마련한다는 계획을 담았다.

8·31대책 공급계획은 향후 5년간 수도권에 연간 30만호를 지어야 하지만 실제 공급가능 물량은 24만호(공공 10만호, 민간 14만호)로 추산했다. 따라서 부족분 6만호를 채우기 위해 추가로 공공이 5만호, 민간이 1만호를 더 공급해야 한다고 봤다. 공공부문에서 연간 300만평의 택지를 확보한다는 계획은 바로 공공부문이 추가 공급키로 한 주택 5만호(주택 1호당 60평 가정)에 필요한 땅이었다. 민간의 1만호 추가 공급은 규제합리화를 통해 해결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민간의 공급 감소는 예상을 뛰어넘었다.

8·31대책은 향후 5년간 수도권 1500만평 확보계획을 가시화하기 위해 서울 송파구 거여동 일대 특전사와 남성대 골프장, 문무대 부지 등 200만평의 정부 땅에 5만 가구 규모의 신도시를 개발키로 하고, 기존의 김포·양주신도시의 규모를 종전보다 337만평 넓혀 총 542만평의 택지를 확보했다.

특히 송파신도시를 위해 당시 이해찬 총리가 국방부 설득에 적극 나섰고, 조영택 국무조정실장이 이 총리의 지시를 받고 환경부 등과의 업무조율을 맡았다.

남은 958만평은 건교부가 책임지고 확보키로 했다. 김 차관보(현 차관)는 “시장을 안심시키기 위해 강남대체 효과가 큰 송파신도시 등을 발표했고, 미확보 택지는 건교부측이 책임지되 정부가 정기적으로 추진실적을 점검하기로 했다”고 회고했다.

택지확보에서 주택공급까지의 시차

이후 파주신도시 확대(212만평), 검단신도시(340만평) 추가 건설 등으로 2007년 2월 현재까지 미확보택지는 400여 만평. 정부는 앞으로 남은 400여 만평도 순차적으로 확보할 계획이다.
문제는 택지확보가 곧바로 주택공급으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택지확보에서 실제 입주까지는 적어도 5~6년의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1990년대 초 분당·일산 5개 신도시의 경우 계획 발표에서 분양, 입주까지 2년 만에 초고속으로 진행됐다. 그러나 5개 신도시 이후 난개발 등의 문제로 사전환경성검토, 광역교통대책협의 등이 추가됐고, 관계부처와 지자체간의 협의도 보다 내실있게 진행하기 때문에 이제는 과거처럼 일사천리로 신도시를 짓는 것이 제도적으로 어렵다.

따라서 택지확보~입주까지 기간의 수급 불균형으로 인한 집값 상승 가능성을 어떻게 잠재우느냐가 숙제였다. 정부는 추 장관의 ‘신도시 추가건설’ 발언이 있은 지 한 달 뒤 발표한 11·15대책에서 개발·실시계획을 통합하고, 환경영향평가 등도 지구 지정 전후로 앞당겨 개발기간을 1년 가까이 단축할 수 있도록 했다. 특히 정부는 공급부족에 대한 우려를 씻기 위해 ‘수도권 주택공급 로드맵’의 구체적 모습까지 발표했다.

이날 대책을 발표하면서 권오규 경제부총리는 “정부가 분양가 완화와 공급확대에 노력하고 있는 만큼 무리하게 대출을 받기보다 이제는 마음의 여유를 갖고 공급계획을 지켜보면서 필요한 시점에 필요한 지역을 선정해 접근하는 냉정함이 필요하다”고 당부했다.

민간 공급의 위축

수도권지역 적정 공급량인 연간 30만호를 맞추려면 대개 공공과 민간이 각각 15만호씩을 분담해야 한다.
그러나 IMF외환위기 이후 경기부진의 여파로 1998~2002년까지 공공부문이 확보한 택지량은 크게 줄었다. 이 기간 확보한 수도권 공공택지는 연평균 360만평으로, 문민정부(1993~1997년)시절 실적(연평균 446만평)의 81%에 불과하다. 택지확보~주택분양까지의 공급시차를 감안하면 국민의정부 시절 택지확보 부족분은 이후 시차를 두고 주택공급 부족을 초래하는 한 요인이 됐다. 공공택지 확보량은 2004년 이후 연평균 600만평 이상으로 늘어났지만 역시 주택분양·입주까지 걸리는 시차로 인해 즉각적인 수급안정 효과는 나타나지 않았다.


또 2003년 1월부터 국토계획법(‘국토의 계획 및 이용에 관한 법률’) 시행, 다가구·다세대주택 규제 강화 등은 민간부문의 주택공급이 위축되는 요인이 됐다.
국토계획법에 따라 난개발이 제한되고 계획적 개발이 강조되면서 민간의 택지확보가 예전에 비해 어려워졌다. 또 도심지 난개발을 막기 위해 주차장과 일조권 확보 요건이 강화되면서 연간 10만~20만호씩 지어졌던 다가구·다세대주택이 2003년부터 급속도로 줄어들었다.


민간부문의 공급 감소로 수도권(2003년 29만호→2005년 19만호)과 서울(2003년 11만호→2005년 5만호)의 주택공급이 줄어들자 이를 보완하기 위해 정부는 주택 공급에 대한 ‘발상 전환’을 통해 공공부문의 역할 확대를 꾀한다.

“공급 부족에 선제적 대책 마련 못해”

민간 공급이 추세적으로 위축되던 당시 정부가 적절히 개입할 여지는 없었던 것일까.
대개 집값이 오르기 전에는 먼저 전셋값이 뛰는 현상이 나타나곤 한다. 이는 전세값이 주택 실수요의 변화를 가장 정확하게 반영하기 때문이다. 2차 급등기였던 1989년, 3차 급등기였던 2002년의 상황이 그랬고, 2006년 집값 급등 때도 마찬가지였다.

건교부 관계자는 “무엇보다 선제적으로 다가구·다세대 관련 대책을 마련해 전·월세 급등에 대비하지 못한 점이 가장 아쉽다”고 말했다. 이 말은 곧 실수요의 변화에 적절히 대응할 타이밍을 놓쳤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정책당국을 당혹스럽게 한 것은 민간의 공급위축이 예상을 뛰어넘었다는 점이다. 수도권 내 민간 공급가능물량을 14만호로 추산하고, 규제합리화를 통해 부족분 1만호만 추가 공급하면 된다고 봤던 8·31대책의 공급계획에 차질이 생긴 것이다.

여기에는 공급확대에 대한 정책당국간 ‘온도차’, 정확한 수요예측의 문제, 주택보급률 100%의 함정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주택보급률 100%의 함정

8·31대책에 참여했던 한 관계자의 증언은 부동산시장 안정의 양대 축인 수요관리와 공급확대정책 중 ‘어디에 강조점을 두냐’를 놓고 논박이 있었음을 말해준다.

“일부에서 주택보급률이 100%를 넘었는데 왜 공급이 더 필요한지 문제제기를 했다. 그러면 다른 편에서는 1000명당 주택수가 동경은 440호인데 비해 서울은 240호에 불과한 점을 근거로 주택보급률 100% 이후에도 지속적인 주택공급이 필요하다고 반박했다”

특히 통계적 요인으로 인해 적절한 공급대책을 세우는데 일정한 한계가 있었다. 8·31대책에 참여했던 또 다른 관계자는 “8·31대책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주택공급물량을 산정하려고 통계를 들여다봤더니 어떤 자료에서는 건축허가를 기준으로, 또 다른 자료는 착공을 기준으로 하는 등 제각각이어서 정확한 공급계획을 세우기에 어려움이 있었다”고 말했다.
이런 문제가 총체적으로 압축된 것이 ‘주택보급률 100%의 함정’이었다.

만성적인 주택부족에 시달리던 우리나라는 2002년 말 공식적으로 주택보급률 100%를 달성한다. 주택보급률 100%를 넘더라도 멸실주택, 신규가구 증가, 주택교체수요 등을 감안하면 지속적인 주택공급이 필요한데도, 이 지표는 ‘더 이상 급하지 않다’식으로 정책당국의 긴장을 늦춘 측면이 있다.

주택보급률(주택수/가구수)이란 주택수를 가구수로 나눈 비율이다. 문제는 분모인 가구수에서 1인 가구가 빠지기 때문에 실제보다 주택보급률이 높아 보이는 착시현상이 발생한다는 점이다.

통계청 센서스에 따르면 1인 가구를 뺀 총 가구수는 2000~2005년까지 5%(2000년 1208만 가구→2005년 1271만 가구), 주택수는 15.3%(2000년 1147만호→2005년 1322만호)씩 각각 늘어난다. 이처럼 가구수보다 주택수가 3배 가량 빨리 늘었기 때문에 주택보급률은 2000년 96.2%에서 2005년 105.9%로 개선된 것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가구수 산정에서 제외되는 1인 가구(317만가구)를 포함할 경우 2005년도 주택보급률은 82.7%로 떨어진다. 여기서 분모인 가구수 역시 다가구가 주택 1채로 계산되고, 주거용 오피스텔이 제외돼 실제보다 주택수가 적게 산정됐다는 점을 감안하면 주택보급률은 다소 높아진다.
정부는 이런 문제점 등을 바로잡기 위해 ‘1000명당 주택수’ 등 주택 수급상황을 좀 더 정확히 반영하는 새로운 지표의 개발을 서둘렀지만 이미 누적된 문제가 폭발한 뒤였다.

오일달러와 3저 호황 급등기의 경험

과거 집값이 급등할 때는 항상 시중에 돈이 너무 많이 풀리고, 주택공급이 부족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중동특수에 따른 오일달러 호황기였던 1970년대 말 1차 급등기의 경우 도시화, 핵가족화 등으로 인한 가구수 증가가 주택공급을 앞지르면서 주택사정은 갈수록 악화됐다.
1975~1980년까지 가구수 증가율은 연평균 약 4%, 총 19.9%에 달해 아무리 집을 지어도 주택보급률은 더욱 떨어지는 상황이 벌어진다. 1970년 주택보급률은 전국 78.2%, 서울 56.8%였지만 1975년에는 전국 74.4%, 서울 56.3%로 오히려 주택난이 가중돼 결국 1970년대 말 집값 폭등의 원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3저 호황으로 달러가 넘치던 1980년대 말 2차 급등기 때도 주택공급이 달리기는 마찬가지였다.

1978년 30만호에 달했던 주택공급은 경제위기를 겪었던 1980년 15만호로 격감한 뒤 1983~87년까지 연간 25만호에 머물렀다. 그 결과 1987년 주택보급률은 전국 69.2%, 서울 50.6%에 불과했다. 또 풍부한 시중유동성 등으로 1988~90년까지 6공화국 집권 3년만에 집값이 56% 폭등했다. 여기에 대기업들까지 사업확장을 이유로 땅 투기에 나서며 부동산가격 급등을 부추기자 주택문제에 대한 불만이 체제안정을 위협할 정도로 심각해졌다. 이에 당시 6공 노태우 정부는 1989년 5개 신도시를 포함한 주택 200만호 건설사업을 추진한다.

이렇게 시작된 주택 200만호 건설사업은 전국을 공사현장으로 바꾸고, 임금·자재파동, 경기과열 등 숱한 부작용을 남기며 당초 계획보다 1년가량 앞당겨진 1991년 8월 조기 달성(공식기록은 214만호)됐다. 4년여 만에 우리나라 총주택(1987년 기준 645만호)의 33%를 몰아짓는 공급대책으로 서울 집값은 1991년 처음으로 하락한 뒤 1992~97년까지 하향안정세를 유지했다.

‘빨갱이’ 경제수석

집값을 잡으려면 대규모 공급대책이 필요하다는 주장은 이 시기의 경험을 주요 근거로 내세운다. 그러나 이 시기 부동산시장이 안정된 데는 공급확대 뿐 아니라 1989년 12월 국회를 통과한 토지공개념 3법(택지소유상한제, 개발이익환수제, 토지초과이득세)이라는 강력한 수요억제책의 영향도 컸다.

당시 토지공개념 3법을 주도했던 문희갑 경제수석은 보수진영으로부터 ‘빨갱이’라는 비난을 무릅쓰고 “6공의 운명을 걸고 토지공개념제도 도입을 실현 하겠다”며 밀어붙였다.

문 수석을 이은 김종인 경제수석도 재벌들의 비업무용 토지 강제매각을 주요내용으로 하는 1990년 5·8조치를 주도함으로써 부동산투기 근절을 위해 대기업군과의 일전을 불사했다.
1990년대 초반 유례없는 집값 안정이 화끈한 공급대책과 강력한 투기억제책이라는 ‘투 트랙 정책’의 결과라는 점을 감안할 때 투기억제 없는 공급확대는 반쪽짜리에 불과하다.

“공공부문에서 충분히 지어라”

“개인 사업자들이 집을 못 짓겠다고 하는 경우도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주택공사, 토지공사 같은 공공 분야에서 대대적인 주택공급을 할 수 있는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2006년 9월 28일 MBC 100분 토론에 출연한 노무현 대통령은 민간의 공급위축에 대비해 공공부문의 역할을 강화하겠다고 밝힌다.

한 달 전 청와대에서 열린 ‘8·31정책 1주년 부동산정책회의’에서 “주공, 토공 등 공공부문이 서민주택의 시장가격 조절에 개입할 수 있는 수준으로 주택을 공급해야 하며, 이를 위한 자금조달 문제 등은 관계부처와 협의해 신속히 추진하라”고 말한 것과 같은 맥락이었다.
갈수록 뚜렷해지는 민간 주택공급 감소를 메우기 위해 공공부문의 역할을 강조한 것이다.

그러나 노 대통령의 강력한 의지가 곧바로 실행되진 못했다. 2006년 10월 당시 집값 급등 이후 소집된 회의에서 노 대통령은 그동안 지지부진했던 주택공급에 대해 실무자를 강하게 질책했다.

공공부문의 역할을 강화하려는 시도는 과거 정부에서도 종종 있었지만 결국 재원부족으로 용두사미가 되곤 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2년 10월 유신개혁 직후 열린 비상국무회의에서 향후 10년간 주택 250만호를 짓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발표했다. 특히 주목할 점은 250만호의 44% (110만호 가량)를 공공부문에서 짓기로 했다는 것이다. 1960년대 공공주택건설 비율이 12.6%에 그쳤다는 점을 감안하면 상당히 획기적인 시도였지만 이 계획은 결국 ‘돈 문제’ 때문에 실현되지 못했다.

이런 고질적인 재원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도입된 것이 2007년 ‘1·31대책’에서 발표된 ‘임대주택펀드’이다. 이 펀드는 연기금, 우체국, 보험사, 투신 등으로부터 2006~2019년까지 연평균 7조원, 총 91조원의 자금을 끌어와 2017년까지 매년 5만호, 총 50만호의 비축용 장기임대주택을 짓는 재원으로 활용된다. 이렇게 마련된 임대주택은 기본적으로 서민주거안정을 위한 것이지만 정부가 주택을 충분히 확보함으로써 집값 급등기 때 수급조절용으로도 활용하겠다는 다목적 포석이 깔린 것이다.


주택도시연구원 임서환 연구원은 “지금까지 우리나라는 재원부족으로 인해 공공부문의 주택공급이 충분치 않았기 때문에 투기성 자금의 유입을 허용하거나 나아가 조장하는 방식에 크게 의존했다”며 “이는 결과적으로 한쪽에선 투기와 싸우고, 다른 한쪽에서는 투기적 수요를 부추기는 모순적 상황을 야기했다”고 지적했다.
공공부문 역할 강화와 이를 위한 재원인 임대주택펀드는 민간 의존적인 불안한 주택시장의 안전판 구실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출처: 국정브리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