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퉁진보

진보란, 무엇인가?

토건종식3 2007. 5. 7. 08:31

[진보개혁의 위기] 4-3. 진보의 10대 의제 : 교육정상화

입력: 2006년 11월 28일 17:58:18

 
“차라리 5공 전두환 시절이 좋았어요. 그때는 과외하다 걸린 사람들 세무 조사하고 감옥 보냈잖아요. 과외를 없애야 해요. 애들 과외비 버느라 집안이 파탄날 지경입니다.” 서울에서 택시 운전을 하는 김동현씨(41·경기 안양시)는 교육 이야기가 나오자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이틀에 한번 야근을 하고, 일요일도 쉬지 못한다. 그렇게 해서 버는 돈이 한달에 1백60만원. 그의 아내는 60만원을 벌기 위해 시간제로 식당 주방 보조 일을 한다. “식당에 접시 닦으러 나가는 아내를 볼 때마다 면목이 없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합니까. 그래도 애들 과외는 시켜줘야 나중에 원망이라도 덜 들을 것 아닙니까.”

부부가 맞벌이를 하며 모은 ‘피같은 돈’은 아이들 과외비로 너무 쉽게 나간다. 중학교 1학년인 큰아이의 국어·영어·수학 학원비(각각 15만원)와 방과후 보충 수업비가 8만원. 초등학교 4학년인 둘째의 영어 학습지와 방과후 학교 논술 과외, 태권도 학원비가 매달 25만원이다. 의식주를 위한 최소한의 경비와 전기요금, 경조사 비용 등을 내고 나면 통장에 남는 돈은 한달에 20만원도 채 안된다. 김씨는 손님이 타면 사교육 문제를 놓고 자주 토론을 한다. 한번은 교육청 직원이 그의 택시를 탔다. 김씨는 그와 주먹질을 했고, 결국 경찰서까지 갔다. ‘그렇게 불평하지 말고 아이들 과외 안시키면 될 것 아니냐’는 말에 격분한 것이다.

“내가 누구 때문에 고생을 합니까. 바로 교육부·교육청 직원들과 교사들 때문 아닙니까. 그 사람들이 일을 똑바로 했더라면 학교가 이렇게 망가지지는 않았을 것 아니에요.”

대한민국 헌법 31조는 교육의 평등권을 명시하고 있다. ‘모든 국민은 능력에 따라 균등하게 교육받을 권리를 가진다.’ 하지만 현실은 어떤가.

서울 강남의 한 초등학교 3학년 교실. 아버지가 치과의사인 이모군(9)은 올해만 외국 여행을 2번 다녀왔다.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재미교포 유학생으로부터 1주일에 3번씩 한달에 50만원하는 영어 과외를 받고, 서울대 음대생으로부터 바이올린도 배운다. 최근에는 논술 학원에 등록했다. 학교에 가지 않는 토요일은 엄마와 함께 도서관에서 책을 읽거나 서울 근교 유적지 탐방을 나간다. 일요일에는 유명 축구선수가 운영하는 축구클럽에서 운동을 한다. 이군의 담임 교사는 “공부면 공부, 운동이면 운동, 모든 면에서 완벽한 아이”라고 말했다.

같은 반의 최모군(9). 방 한 칸짜리 반지하 연립주택에서 할머니(61)와 함께 지낸다. 지방의 공업고를 졸업한 최군의 아버지는 절도죄로 수감 중이다. 어머니는 1년전 집을 나갔다. 최군은 학교 수업이 끝나면 지하철역 부근에서 좌판을 벌이고 야채를 파는 할머니에게 가서 함께 시간을 보낸다. 이군이 축구클럽에서 멋진 유니폼을 입고 운동을 하는 일요일날 이군은 할머니와 주택가를 돌며 재활용품을 수집한다.

이런 기본적인 사실만으로도 이군과 최군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쉽게 점칠 수 있다. 부모의 소득과 자녀의 성적은 정비례한다. 한국교육개발원 류방란 박사의 분석에 따르면 부모의 소득이 5단계 중 최하인 가정의 학생이 학교에서 성적 하위 25%에 포함될 확률은 소득이 5단계 중 최상인 가정에 비해 2.6배 높다. 반면 소득이 최하인 가정의 학생이 성적 상위 25%에 들 확률은 소득이 최상인 학생에 비해 4.6배 낮았다. 아버지의 교육 수준이 높으면 자녀가 공부를 잘 할 확률도 높다. 아버지가 대졸인 고교생은 성적 상위 25%에 포함될 확률이 중졸의 자녀보다 4.4배 높았다.

한때 교육은 희망이었다. 가난의 대물림을 끊을 수 있는 좋은 방법이었다. 가난해도 판·검사, 의사, 대학 교수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부잣집 자녀와 가난한 집 자녀는 인생의 출발점과 종착점 모두 다르다. 교육이 희망이기는커녕 서민들의 고단한 삶을 더욱 궁핍하게 하는 고통일 뿐이다. 사회통합과 계층 이동의 통로라는 순기능이 아니라 계층을 고착화하고 사회 양극화를 심화시키는 작용을 하고 있다. 고형일 한국교육개발원장은 “공교육이 제기능을 못하면서 ‘개천’에서 ‘용’이 나오기 어려운 구조”라고 강조했다.

교육 당국은 대학 입시제도를 바꿀 때마다 ‘공교육 강화 및 사교육비 축소’를 위해서라고 한다. 하지만 제도가 바뀌면 바뀔수록 사교육 혜택을 누리는 부유층 자녀들이 더욱 유리해진다. 학생부 성적 반영 비율을 높인 2008학년도 입시개혁안도 마찬가지이다. 교육부 기대와는 달리 대학들이 변별력 확보를 이유로 일선 학교에서 가르치기 어려운 논술 시험을 도입하면서 사교육 업체들의 배만 불려주고 있다.


‘없는 사람들’보다는 덜 하지만 ‘가진 사람들’에게도 교육은 고통이다. 양극화가 심해지면서 중산층의 입지도 불안하다. 조금만 한 눈 팔면 하층으로 전락할 위기상황에서 살고 있다. 자녀 교육에 사활을 걸 수밖에 없는 이유다. 중견 기업 임원인 서모씨(45·서울 잠실동)는 아내와 아이를 미국에 보내고 혼자 생활한다. ‘기러기 아빠’ 생활이 벌써 2년이 넘었다. 서씨의 연봉은 세금을 제하고 7천만원 수준. 그는 매달 5,000~5,500달러(약 5백만원)를 미국에 보낸다.

“어느날 주위 친구들을 보니 모두 아이들을 외국에 보냈더군요. 안되겠다 싶어 저도 아이와 애 엄마를 미국에 보냈습니다. 큰아이가 내년이면 고2입니다. 아이가 최소한 서울 지역 사립대학에 들어가 줘야 하는데 실력이 안돼 걱정입니다. 지금까지는 잘 버텼지만 회사에서 언제 잘릴지 모르는 상황이라….”

막대한 교육비도 부담스럽지만 기러기 아빠들의 삶도 삶이 아니다. 외국에 있는 가족들의 유학비와 생활비를 송금하고, 정작 자신은 불규칙한 생활습관과 부실한 식사로 건강을 망치기 일쑤다. 외로움과 직장에서 받는 스트레스 등으로 정신 건강까지 해친다. 올 초 돌연사로 사망한 개그맨 김형곤씨도 기러기 아빠였다. 최근에는 경제적 부담 때문에 오지도 가지도 못한 채 생이별을 하는 ‘펭귄 아빠’라는 신조어도 등장했다. 경제적 여유가 없어 정작 비행기는 타지 못하고 공항에서 손만 흔드는 모습을 ‘뒤뚱뒤뚱 날갯짓 해봐야 날 수 없는 펭귄’에 빗댄 것이다.

경찰관 이모씨(38)는 지난 9일 스스로 머리에 권총을 겨눠 목숨을 끊었다. 그는 평소 자녀의 교육비 때문에 마음 고생을 많이 했다고 한다. 함께 근무한 경찰에 따르면 중국에 유학보낸 딸과 초등학생 유치원생 자녀의 교육 및 양육에 매달 1백만원이 넘는 돈이 필요했고, 이 문제로 이씨는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다. 이씨의 동료는 “사교육비가 멀쩡한 사람을 잡았다”면서 “아이들은 성적 비관으로 자살하고 아버지는 과외비 때문에 스트레스로 자살하는 게 한국 사회”라고 말했다.

부모들이 자녀 뒷바라지에 적극 나서면서 학생들의 입시 경쟁은 더욱 격화되고 있다. 교육은 사회 구성원 전체가 공유해야 할 사회적 재화로 인식되기보다는 개인 또는 가족의 기득권 유지나 신분 상승의 수단으로 변질됐다.

올해만 해도 성적 비관이나 학업에 대한 부담 때문에 자살한 학생이 10여명이나 된다. 지난 9월 부산 금정구에 사는 고등학교 3학년 박모군이 성적을 비관해 자살했다. 6월 대구에서는 성적이 상위권이었던 고교 1년생 김모군이 학력평가를 하루 앞두고 아파트 옥상에서 뛰어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김군은 중학교 때까지 학교에서 최상위권의 성적을 유지하다가 고교 입학후 중상위권으로 떨어지자 시험에 큰 부담을 느꼈던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2월 인천에서는 과도한 학원 수강으로 힘들어 하던 초등학교 6학년 어린이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 지난 5~6월 전국 고교생 3,166명을 상대로 설문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20.2%가 입시 스트레스와 성적 때문에 자살을 생각했으며 이 가운데 5%는 실제 자살을 기도한 경험이 있다고 응답했다.

학생들의 생활은 지난 30년간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대학 입시가 끝날 때까지 ‘인권’은 없다. 서울 모외국어고 2학년에 재학 중인 김성진군(16·가명)은 지방의 명문 공립고를 나온 아버지처럼 고교에 올라온 이후 하루 6시간 이상 자본 적이 없다.

특히 2학년에 올라오면서부터는 공부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내기 위해 수면 시간을 30분 더 줄였다. 집에서 5시간 자고 학교에서 점심 먹고 30분을 잔다. 아침·점심·저녁 식사 시간 30분, 학교 등·하교에 1시간. 학원 오가는 데 1시간을 제외한 나머지 시간은 모두 공부시간이다. “왜 사는지 모르겠어요. 힘들지만 참고 버텨야 한다는 생각뿐이에요. 입시 지옥이 우리 세대에게만 있는 것도 아니고. 대학에 가면 그때 실컷 놀아야죠. 영화도 보고.”



특목고에 재학중인 학생이나 성적이 상위권인 학생들은 그래도 꿈이 있지만 ‘대포자’(대학포기자)는 이미 꿈꿀 기회마저 박탈당했다. 이들에게 입시는 남의 나라 이야기다. 이미 경쟁에서 탈락했기 때문이다. 수업시간에 잠을 자고 라디오를 듣고 만화책을 봐도 교사들은 내버려 둔다. 입시 지도에 바쁜 교사들은 이들을 배려할 만한 정신적·물리적인 여유가 없다.

서울 ㅅ여고 모 학급의 급훈은 ‘공장가서 미싱할래, 대학가서 미팅할래’이다. 1년 내내 칠판 상단에 걸린 이 문구를 보면서 학생들은 과연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 서울 이화여고 이형빈 교사는 “학교가 대포자들에게 낙오자라고 낙인을 찍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며 대학 못가는 사람들은 천한 일 하면서 고생하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아이들이 스스로 내면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경쟁은 대학 입시로 끝이 아니다. 지난해 연세대 사회계열에 입학한 김모씨는 지난 16일 수능 시험을 다시 치렀다. 이유는 단 하나, 서울대에 가기 위해서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부러워하는 명문대에 입학했지만 그는 지난 1년간 단 한번도 행복하지 않았다. 김씨는 고교 재학시절 전교 1~2등을 했다. 그러나 서울대 수시모집과 정시모집에서 거푸 고배를 마셨다. 지난해에도 서울대를 지원하려 했으나 수능 점수가 낮아 지원을 포기했다.

“연세대도 훌륭하죠. 하지만 서울대에 꼭 가고 싶습니다. 그래도 우리 나라 최고 대학이잖아요. 연세대 친구들 보면 열에 두명은 ‘서울대 컴플렉스’를 벗지 못하는 것 같아요.”

이같은 교육 구조 속에서는 교사도 피해자다. 사교육에 지방 중소도시의 고교에서 국어를 가르치고 있는 서모씨는 “교사의 수업권은 교육방송(EBS)에 빼앗긴 것이나 다름없다”고 말했다. 3학년 진학반을 맡고 있는 서교사의 올해 수업은 교육방송 수능 언어영역 교재로 시작해서 교육방송의 수능 막바지에 펴낸 수능 파이널 모의고사로 끝났다.

“학기초에 학생·학부모 대상 설문조사를 실시했습니다. 절반 이상이 교육방송 교재로 수업을 해주기를 바라더군요. 다른 학교도 마찬가지입니다. 고교 교육과정이 EBS 교재로 완전히 획일화되고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대학 역시 교육과 학문은 붕괴된 채 권력 획득을 위한 연고주의와 취업 준비기관으로서만 구실하고 있다. 청년 실업으로 인한 치열한 취업경쟁이 대학 교육을 규정하면서 기초 학문의 몰락은 물론이고 취업을 위한 사교육까지 확대되고 있다.

사교육비 마련을 위해 풍비박살난 가정, 가족을 이역만리에 떠나보낸 기러기 아빠, 하루 15시간 이상 책상에 앉아 공부만 하는 청소년,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도 다시 대입시, 고시 준비를 하는 대학생, 절망을 견디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어린 학생들…. 우리 교육은 사회 구성원들에게 절망과 고통을 가르쳐주고 있다.

교육 주체간 갈등과 반목도 심각하다. 학부모는 교사들의 나태와 교육부의 무능을 탓하고, 교사들은 학부모의 이기심과 교육부의 일방적인 정책이 현재의 교육 위기를 초래한 원인이라고 주장한다. 교육부는 대학들이 고교 교육 정상화에 협조하고, 일선 시도교육감들이 좀더 분발해야 한다고 책임을 돌린다.

진보 진영은 이런 교육의 문제점을 잘 인식하고 있다. 참여정부 초기 진보 진영은 교육 난맥을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하면서 교육 개혁에 적극성을 보였다. 2004년 봄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을 비롯해 전국교수노동조합,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 학벌없는 사회, 함께하는교육시민모임 등 교육·시민·학생운동 등 30여개 단체가 망라돼 있는 ‘WTO 교육개방 저지와 교육공공성 실현을 위한 범국민교육연대(범국민교육연대)’는 교육 분야의 개혁 청사진을 제시했다.

개혁안은 현재의 공교육 시스템이 ▲대다수를 패배자로 모는 실패 구조 ▲사회적 불평등을 대물림하는 불평등 구조 ▲자원과 노력을 헛되이 흘려버리는 낭비구조라고 진단했다. 대안은 공공성에 입각한 공교육 체제 확립. 초·중등 교육을 정상화해 사교육으로 인한 교육 불평등을 해소해야 한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서울대 학부 폐지, 국·공립대학 입시 통합 전형, 수능시험의 자격고사화, 중·고교 통합학교 설치, 만 3~5세 아동을 위한 통합 유아교육법 제정, 노동자·장애인·이주노동자 교육권 보장 등이 총망라됐다.

이 개혁안에 대해 손호철 서강대 교수(민교협 상임 공동의장)는 “공교육을 살릴 비상 대책”이라고 평가했다. 경상대 정진상 교수는 “그동안 독재정권에 대항해 수세적으로 투쟁해온 전교조를 비롯한 민중진영이 교육 모순의 근본적 해결을 위해 공세적으로 방향을 전환한 신호탄”이라고 개혁안을 높이 샀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사회 이슈로 부각시키지도 못했고, 실천으로 연결시키지도 못했다. 참여정부 출범 직전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 참가하고 범국민교육연대에서 개혁안 마련 작업에 참여한 한 대학교수는 “참여정부와 노무현 대통령을 믿었던 것이 실수”라고 말했다.

그는 “참여정부는 교육에 대한 철학이 없었다”며 “교육 양극화 해소를 위한 교육의 공공성을 강조하면서도 막상 내놓는 정책은 경쟁과 평가를 중시하는 시장주의적 성격의 정책뿐이었다”고 비판했다. 교원평가, 교원 차등 성과급제, 국립대 법인화, 시도교육청 평가, 국제중 설립, 조기 영어교육, 대학 산학협력 강화 등이 대표적인 예다. 특수목적고·자립형사립고 완화와 개방형 자율학교 정책도 고교 평준화의 기반을 약화시키고 초·중학생들의 특목고 입학 경쟁만 심화시켰다.

청와대와 여당이 교육부 장악에 실패한 것도 한 원인이라는 분석이다. 국회 교육위 최순영 의원(민주노동당)은 “대학 입시의 3불정책(고교등급제·본고사·기여입학제 금지)을 제외하면 각종 교육 현안에 대한 교육부 입장은 한나라당에 더 가깝다”며 “청와대의 입장이 교육부에 잘 전달되지도 않고 있다”고 말했다. 최의원은 개정 사립학교법을 예로 들었다. 열린우리당이 날치기 논란까지 벌이며 통과시킨 이 법이 시행 5개월이 다 되가지만 교육부는 학교법인의 정관 개정 작업 등 후속조치를 제대로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최의원은 “연가투쟁에 참여한 전교조 교사들 처벌하는 자세로 이 문제에 접근했다면, 진작에 해결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교육개혁을 위해서는 우선 교육 주체간 신뢰 회복과 연대가 급선무이다. 전교조 간부 출신인 한만중 교사(남서울중)는 “교육 양극화 해소를 가장 큰 목표로 삼고 서민의 자녀들이 학교와 가정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와 환경을 마련하는데 모든 힘을 집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다음으로는 교육재정 확충이다. 이수호 전 민주노총 위원장은 “참여정부가 남은 기간 동안 가시적인 성과를 내려고 하기 보다는 교육재정 확충 등을 통해 다음 정권이 공교육을 살리고 교육 양극화를 완화시킬 수 있도록 물적 기반이라도 조성해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오창민기자 riski@kyunghyang.com

 

 

[진보개혁의 위기] 4-4. 진보의 10대의제 : 재벌개혁

입력: 2006년 12월 03일 17:43:26

 
열린우리당 김현미 의원은 요즘 ‘삼성의 힘’을 체감하고 있다. “삼성직원 한명이 정기적으로 사무실을 방문합니다. 나를 전담하는 ‘마크맨’인 것 같아요. 이 사람은 이것저것 정보를 캔다기보다는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를 많이 내놓습니다. 나로서는 금시초문인 게 많은데 나중에 보니 그게 사실로 드러나더라구요.” 김의원은 “삼성이 국가정보원보다 더 정확한 것 같다”며 쓴 웃음을 지었다.

“이사람들이 맨손으로 찾아오지는 않습니다. 출자총액제한제도의 개편이나 금융산업구조개선법과 같이 삼성과 직접 관련된 법안이 걸려 있으면, 매우 논리적이고 설득력 강한 자료를 들고 옵니다. 사안을 잘 모르면 혹하게 돼 있습니다. 그런데 삼성직원이 자료를 전달한 지 얼마되지 않아 국회 정무위가 열렸는데 동료의원이 삼성자료와 똑같은 용어, 똑같은 논리로 발언을 하더군요. 깜짝 놀랐습니다. 그걸 보니 ‘삼성장학생’이 왜 생겨나는지 알겠더군요.”
편법증여, 횡령등의 혐의로 검찰조사를 받은 총수들. 왼쪽부터 김우중 전 대우그룹회장, 정몽구 현대자동차회장, 이건희 삼성그룹회장, 정태수 전 한보그룹회장 /경향신문 자료사진

여당의 한 초선의원도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다. “올해 정기국회가 시작되기 전인 8, 9월에 아는 사람이 찾아왔어요. 이 사람 하는 말이 ‘삼성생명 상장에 반대하지 말라’는 거였어요. 그뿐만 아니라 내가 알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거나 전화를 해 같은 얘기를 했어요. 모두 예전에 나를 도와주고 아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부탁을 들어주지 않으면 도저히 안될 것 같은 부담감을 크게 느끼고 있어요.”

그는 “삼성은 직원들에게 정부, 국회, 검찰, 언론 등 소위 힘있는 곳에 있는 아는 사람을 ‘밤 10시에도 만날 수 있는 사람’ ‘전화하면 약속이 가능한 사람’ ‘그냥 아는 사람’으로 분류해 적어내라고 하는데, 큰 문제가 생기면 ‘밤 10시에도 만날 수 있는 사람’이 동원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런 재벌의 힘은 ‘높은 곳’으로만 향하는 것이 아니다. ‘낮은 곳’으로도 뻗치고 있다. 일반시민에게도 재벌의 논리를 심는 데 적극적이다. 서울 강북구 미아동 SK아파트 지하상가의 식품매장에서 카트를 끄는 김미옥씨(35·서울 강북구 미아동)에게 물어봤다. “재벌이 좋은 것입니까, 나쁜 것입니까. 그 이유는 뭡니까.”

그의 대답은 이랬다. “사람들이 재벌 욕을 많이 하는데, 돈 많은 게 죄는 아니잖아요. 또 재벌기업이 국가경제에 기여도 많이 하고, 젊은 사람들은 거기 취업하려고 안달이고…. 이제는 ‘사촌이 논 사면 배 아프다’는 식의 옹졸한 마음은 버려야 하지 않나요.”

김씨의 카트 속에는 밀가루가 있었다. 그것을 가리키며 다시 물었다. “이게 대부분 재벌회사들이 만드는 것인데, 오랫동안 담합으로 소비자가격을 올렸다고 보도됐습니다. 저기 진열대에 있는 설탕이나 세탁세제도 마찬가지고…. 쇼핑하러 자동차를 몰고 오셨다면 그 차에 들어간 휘발유도 담합의혹이 있어 조사가 벌어지고 있다는 걸 아십니까.” 김씨는 겸연쩍게 웃기만했다.

재벌문제는 한국의 고질병이었다. 외환위기 직후에는 위기의 주범으로 몰리기도 했다. 그러나 위기 이후 외국자본이 물밀듯 들어오고 글로벌 경쟁체제가 강화되면서 재벌비판이 많이 사라졌다. 토종 재벌기업을 키우고 도와줘야 한다는 주장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최근에는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재벌비판론을 ‘성장에 어깃장 놓기’로 간주하고, 재벌개혁론자를 ‘평등주의에 사로잡힌 사람’으로 삐딱하게 여기는 기류가 생겨났다.

서울 강남의 한 중소기업에 근무하는 최상열씨(39). 그에게 재벌문제는 ‘문제’가 아니다.

“재벌체제는 아직도 우리나라에 필요하다고 봐요. 대기업 하나로는 글로벌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없으니까 여럿이 뭉치는 체제가 필요하죠. 물론 하도급업체를 가혹하게 대한다든지 경쟁을 제한한다든지 하는 부작용이 있는 건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게 평범한 회사원인 저와는 무슨 상관입니까.”

이렇게 ‘재벌은 좋은 것’이라는 논리가 광범위하게 퍼져나가고 있다. 김진방 인하대 교수는 “우리 국민과 국가, 국가경제는 이미 재벌의 인질이 됐다”고 단언한다. 그는 서양우화를 들어 ‘인질극’을 설명한다. ‘공주가 용에게 잡혀갔다. 용감한 기사가 나서서 공주를 구출하러 떠났다. 그런데 막상 용이 공주를 입에 문 채 하늘을 나는 모습을 보자 고민이 생겼다. 창을 날려 용을 죽이면 공주도 함께 떨어져 죽을 것이고, 그냥 내버려 두자니 공주를 구출할 수 없고….’

김교수는 “정책입안자들도 재벌기업이 넘어지면 국가경제도 같이 휘청거리는 상황에서 ‘미우나 고우나 재벌이 잘 돼야 국가가 잘 된다’는 생각을 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최근 출자총액제한제도의 적용을 받는 재벌기업이 크게 줄어드는 등 재벌총수의 지배권이 더욱 강화된 것이 단적인 예”라고 설명했다. 재벌들의 “규제가 많아서 투자를 못하겠다. 우리가 투자를 못하면 경제가 잘 굴러가지 않을 것”이라는 투정섞인 위협에 볼모로 잡힌 국민경제는 규제완화, 즉 재벌총수 지배권 강화라는 ‘몸값’을 지불했다는 해석이다. 김교수는 “값비싼 몸값을 줬지만 나라경제는 더욱 가혹한 인질신세로 떨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해방이후 정치권력의 비호 아래 귀속재산 불하와 외국원조를 독식하다시피 해 자본을 축적한 재벌은 특혜금융, 국내산업 보호 등의 지원으로 세력을 불려나갔다. 1987년 민주화 이후에는 정치권력을 사실상 압도하고, 이는 97년 외환위기의 근원이 되기도 했다.

그로 인해 재벌개혁에 관한 사회적 요구가 높아져 결국 정부는 재벌개혁을 시작했다. 외환위기 직후 등장한 김대중 정부는 과잉투자된 중화학 부문에 대한 인위적인 구조조정, 즉 ‘빅딜’을 추진했다. 동시에 재벌 총수들과 만나 ‘재벌개혁 5+3원칙’에 합의해 경영투명성 제고, 상호보증채무 해소, 업종전문화, 변칙상속 차단, 순환출자 및 부당내부거래 억제 등의 약속을 이끌어냈다. 출자총액제한제도(출총제)를 다시 도입해 재벌총수의 무분별한 영향력 확대에 제동을 걸기도 했다. 그러나 권력누수가 한창이던 임기말 재벌이 반격에 나섰다. 2002년 재벌 소속 금융계열사가 보유한 계열사 주식에 대해 30%까지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공정거래법을 개정했다. 이는 재벌이 고객의 돈을 활용해 경영권 방어수단으로 삼도록 허용한 것이다. 김대중정부에서 재벌개혁은 이렇게 좌절되었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 출범으로 다시 재벌개혁론이 등장했다. 노대통령은 2002년 대선 캠페인 당시 “재벌을 개혁한 최초의 대통령으로 남고 싶다”고 말했고, 대통령직인수위 등을 통해서도 누차 ‘재벌개혁’을 강조했다. 그러나 경제가 죽을 쑤게 되면서 ‘우선 경제를 살려야 한다’는 재벌의 논리가 압도하는 상황으로 반전되었다. 출총제라는 게임의 룰은 점차 완화돼 갔고, 최근에는 대상기업이 대폭 축소됐다. 다시 재벌이 승리한 것이다.

열린우리당도 2004년 총선에서 대승했지만, 민주화운동가 출신의 ‘개혁론자’와 관료, 기업인출신 의원들이 주축이 된 ‘실용파’간 힘겨루기로 방향을 잃은 지 오래다. 열린우리당은 선거에서 질 때마다 ‘현실론’을 들어 번번이 재벌개혁 후퇴의 길로 갔다. 특히 지난 5·31지방선거 이후에는 통합신당 등 당의 진로를 놓고 내홍을 겪는 사이 재계와 정부의 ‘경기부양’ 압박에 버티지 못하고, 출총제 폐지 카드를 만지작거리는 등 재벌개혁 의지는 실종된 상태이다. 민주노동당은 출총제 강화, 자본이득세 도입을 통한 상장주식 양도차익 과세 문제 등을 주장하며 등원했으나 ‘경제가 안좋다’는 현실론에 밀려 제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다.

최근 참여연대에서 독립한 경제개혁연대의 김상조 소장은 “노무현 대통령은 재벌규제를 사실상 포기함으로써 재벌공화국의 완성을 추인한 대통령으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라고 말했다. 재벌정책 개편안 마련을 위한 태스크포스에서 활동한 김진방 교수는 “출총제는 사실상 폐지됐고, 순환출자는 전면 허용됐다”며 “이는 우리나라 재벌정책의 일대 전환점이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재벌에 대해 체계적인 비판을 해온 세력은 참여연대이다. 장하성 고려대 교수가 이끄는 참여연대 경제민주화위원회는 삼성전자, 현대중공업 등 국내 재벌 기업의 주총장에 나타나 ‘총수경영’을 매섭게 몰아붙였다.

비판의 골자는 재벌 총수일가가 쥐꼬리만한 지분으로 그룹 전체를 지배하면서 자신의 이익을 챙기고 소액주주의 권익은 무시한다는 것이다. 올 4월 현재 삼성그룹에 대한 이건희 회장 일가의 실제 지분은 4.20%에 불과하지만 얽히고 설킨 출자구조와 금융계열사 등을 통해 의결을 행사할 수 있는 지분율은 29.00%에 달한다. 실제 보유한 지분보다 6.91배에 달하는 의결권을 행사하면서 그룹전체를 지배하는 것이다. 현대차그룹도 총수일가의 소유지분율은 6.28%에 불과하지만 의결지분율은 38.51%에 달한다.

이같이 왜곡된 기업지배구조는 재벌총수들의 전횡을 가능케 한 토양이 된다. 삼성그룹의 에버랜드를 이용한 편법 증여,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의 회사이익 빼돌리기, 두산의 분식회계 등 헤아리기 힘들 정도다.


그러나 참여연대의 활동은 소액주주 운동이라는 한계를 안고 있다. 기업의 이해관계자는 주주 이외에도 노동자, 소비자 등 다양한데 주주의 권익만 대변한다는 지적이 그것이다. 이에 대해 김상조 경제개혁연대 소장은 지배구조가 개선되면 노동자 등 다른 이해관계자도 권익을 보호받을 수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정승일 대안연대 정책위원은 참여연대를 “주주의 권익만을 생각하는 신자유주의의 첨병”으로 규정한다. 정위원은 “이들은 주주가치 경영을 최고선으로 하는 월가의 이론을 그대로 받아들여 국내기업을 공격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소액주주 운동을 통한 재벌개혁이 시민사회 내부로부터도 도전을 받고 있는 것이다. 정위원을 비롯한 대안연대의 일부 논객들은 외환위기 이후 밀려들어오기 시작한 외국 투기자본에 맞서기 위해 재벌을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재벌에게는 경영권 보호장치를 선물한 뒤 재벌로부터 투자활성화, 일자리 창출, 세금 많이 내기 등 사회적 기여를 이끌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재벌 활용론인 셈이다.

정위원은 스웨덴의 발렌베리가(家)를 모범적 사례로 들고 있다. 세계적 통신업체 에릭손을 보유한 발렌베리가는 스웨덴 국내총생산(GDP)의 30% 이상을 차지하는 가족경영 기업집단이다. 정위원은 “발렌베리가의 영향력이 지나치게 커지자 스웨덴 정부의 중재하에 노동자단체는 1938년 발렌베리가로 대표되는 재계와 살트셰바덴 협약을 맺었다”면서 “이에 따라 발렌베리가는 경영권을 인정받았고, 그 반대급부로 노동조합을 인정하고 법인세 인상에 동의했으며, 사회적 기여도 많이 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은 발렌베리가를 벤치마킹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건희 회장이 삼성을 세계적 기업으로 키우도록 도와주고, 경영권을 보호해줘야 합니다. 그래서 삼성이 일자리를 많이 만들어내도록 하고, 국민경제에 기여토록 해야죠. 대신 법인세를 올려 세금을 더 많이 내도록 하고 이 재원으로 재분배를 해 복지를 개선해야 합니다.”

정위원은 “신자유주의에 입각해 국제금융세력과 결탁한 참여연대는 꼴보수 집단”이라고 비판했다. ‘좋은정책포럼’의 김형기 공동대표(경북대 교수)도 “재벌의 경영권을 인정해주는 대신 이들이 사회적 책임을 다하도록 하고, 노동자가 경영에 참여하는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를 실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수년전 등장한 이들의 논리는 지식인사회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장하준 영국 케임브리지대 교수가 쓴 ‘개혁의 덫’, 장교수와 정승일 위원이 함께 쓴 ‘쾌도난마 한국경제’는 이같은 주장에 이론적 근거를 제공하고 있다.

그러나 재벌개혁을 주장하는 참여연대의 입장은 다르다. 김기원 방송통신대 교수는 이렇게 주장했다. “그 사람들은 이미 삼성에 포섭됐습니다. 말로는 ‘사회민주주의’를 얘기하지만 그것은 양념에 불과하고, 본질은 재벌보호, 박정희체제로의 회귀입니다.” 그에 따르면 발렌베리가는 ‘경영권 보호’가 아니라 ‘노조의 임금인상 요구 자제’를 선물로 받고 대신 세금인상, 복지기여 등을 반대급부로 내놓았다고 한다. 이 협약이 경영권 보호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얘기다.

김진방 교수는 “외부의 위협에 대항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은 우리 내부의 재벌체제를 개혁하는 것이지, 재벌체제를 강화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사실 재벌체제는 노동의 타락도 초래한다. 김기원 교수는 “기아차 노조의 ‘입사비리’에서 보듯이 재벌체제는 노동계마저 타락시켰다”며 “재벌소유의 대기업 노조는 자신들의 이익만 추구한 채 진보이념을 이미 상실했다”고 지적했다.

민주노동당은 재벌개혁이란 면에서는 참여연대에 가깝지만 자본의 이익분배에서는 다소 차이가 있다. 민주노동당 산하 진보정치연구소의 조진한 상임연구위원은 “재벌들이 빼돌리는 회사이익을 주주뿐만 아니라 노동자, 협력업체 등 이해관계자들에게 적절히 배분하고 일자리 창출 등 사회환원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소수파의 한계 때문에 민노당의 재벌개혁 동력은 힘이 달릴 수밖에 없다.

김진방 교수는 재벌개혁을 위해 진보세력간 사소한 차이를 극복하고 연대해야 한다는 제안을 했다.

“시장경제를 지향한다면 영미식이든, 유럽식이든 책임성, 투명성이 담보되는 기업지배구조가 있어야 합니다. 유럽식 자본주의를 지향한다면서 유럽에는 존재하지 않는 재벌체제를 옹호하는 것은 안되겠죠. 재벌구조가 어떻게 깨지느냐에 따라 우리 경제가 영미식, 유럽식, 아니면 제3의 길 등 다양한 모습으로 변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무엇보다도 재벌과 사회적 타협을 할 것이 아니라 재벌로는 안된다는 사회적 합의를 만들어내는 게 중요합니다.”

〈박성휴·최우규기자 songhue@kyunghyang.com

 

 

 

[진보개혁의 위기] 4-5. 진보의 10대의제 : 고령화·저출산

입력: 2006년 12월 05일 18:05:20

 
겨울비가 내렸다. 기온이 떨어져 제법 쌀쌀했다. 경로당 문틈 사이로 차가운 바람이 흘러나온다. 방 안 공기는 냉랭하다. 방바닥은 미지근하다. 그 흔한 전기 스토브조차 없다. 노인들은 가스를 아껴 쓴다고 했다. 실내에서도 외투를 벗지 않는다. 지난달 28일 서울 서대문구 구립 홍연경로당. 말만 경로당이지 수십년 된 2층짜리 단독주택이다. 노인을 위해 편리하게 고친 곳은 눈에 띄지 않는다. 일반 주택에 경로당 간판만 달았다. 다른 주택과 다른 점이라면 할아버지는 1층, 할머니는 2층을 사용한다는 점이다. 6평이나 될까. 철 지난 장판과 빛바랜 벽지가 둘러싼 방안은 여느 집 큰 안방 같다. 텔레비전 1대, 책상과 의자, 탁자. 장기판 위에 바둑판이, 그 위엔 장기알과 바둑알 통이 있다. 화장실 옆에는 겉면이 누렇게 뜬 정수기가 한대. 이런 풍경이라 최근 들여놓은 에어컨이 유별나게 반짝인다.




노인들은 낡은 경로당과 함께 늙어가고 있었다. 이런 경로당은 크고 작은 사설까지 포함해 전국에 5만여개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노인은 5명. 동그랗게 둘러앉았다. 누구는 벽에 등을 기대고 다리를 쭉 펴고 앉아있다. 다른 이는 목침을 베고 누워 대화를 듣는 둥 마는 둥 하릴없는 잠을 청한다. 윤모씨(78). “뭐 일이 있어. 그냥 이렇게 얘기하고 있는 거지”하면서 담배에 불을 붙인다. 담배를 맛나게 피우고는 방바닥에 도로 눕는다. 정모씨(69). “뭐 텔레비전도 보고 얘기도 하고, 그러는 거지. 교통수당이 1만2천원 나오는 데 뭐 그것 가지고는 아무 것도 못해.” 하루 일과를 물었다. “일과는 무슨, 그냥 이렇게 있는 거지.” 퉁명스러운 답이 돌아온다. 노인들은 이렇게 경로당에서 특별히 할 일이 없다. 그래도 경로당에 나온다. 경로당에 나오는 것, 그것이 바로 특별한 일이다.

그나마 경로당에 가는 노인들은 여유가 있는 축에 속한다. 일부 경로당은 회비가 있을뿐더러, 술 먹고, 화투 치면서 어울리려면 돈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서울 노량진에 사는 권모씨(70)는 일주일에 서너 번 종묘공원을 찾는다. 점심 먹고 집을 나온다. 지하철을 무료로 타고 오기 때문에 교통비는 따로 안 든다. 오후 1시쯤 도착해 대개 해가 뉘엿뉘엿해질 때까지 있다. 별달리 할 일은 없다. 안면 있는 노인들과 장기를 두거나, 얘기를 나누는 정도다. 그래도 집 나와 바람 쐬면 그나마 답답한 마음은 덜하다. 권씨는 건설현장에서 미장일을 하면서 자식을 키웠다. 덜 먹고 덜 입고, 노후대비용으로 3천만원 정도 마련했다. 그러나 보름 전 당뇨병으로 세상을 먼저 등진 부인의 5년 병수발에 다 날렸다. 아들 내외와 함께 살지만 편치 않다. 맞벌이하느라, 애들 키우느라 바쁘다. 자식들 벌이가 변변치 않아 권씨는 용돈 받기도 어렵다. 권씨는 “이렇게 오래 사는 세상이 올 줄 몰랐다”고 말했다.

경기 시흥시에 사는 김모씨(75). 부인을 꼭 10년 전에 잃었다. 당뇨병과 신부전증 등 때문이었다. 김씨 나이 그때 65세. 김씨는 마누라도 죽었는데 혼자 살면 더 얼마나 사나 생각했다. 하지만 이래저래 벌써 10년이 흘렀다. 자식들은 모두 지방에 있고, 게다가 손벌릴 수 있을 만큼 넉넉한 살림살이도 아니다. 기초생활보장수급자인 김씨의 수입은 매달 구청에서 30만원 남짓 받는 게 전부이다. 별다른 기술도 없고, 몸도 아프다. 그렇지만 일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새벽 인력 시장에 나가봤지만 한창 젊은이들 일감도 없단다. 김씨 몫은 돌아오지 않는다. 김씨의 유일한 낙은 하루 한두 잔 하는 막걸리가 전부이다. 그나마 겨울이면 연탄을 사야 하기 때문에 하루 걸러서 먹는다. 김씨는 “요즘엔 오래 사는 것이 마냥 좋은 일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한다.

농촌지역은 어떤가. 전북 임실군 지사면 계산리에 사는 강인구 이장(68)은 해마다 힘이 빠진다. 갈수록 휑해지고 있는 마을을 묵묵히 지켜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수년째 마을로 들어오는 사람은 없고, 나가는 사람만 있다. 수백 명이 살던 마을엔 190여명만 남았다. “빈집이 솔찬이 많이 있어 마을 전체가 황폐해졌다”면서 “혼자 사는 노인들, 어르신들 다 가면(사망하면) 마을이 없어지지 않겠나. 가슴이 탁 막히지만,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 고령화는 임실군청에도 위기다. 지난해 임실군의 예산은 1천6백20여억원이었지만, 임실군이 지방세 등으로 자체 마련한 돈은 1백95억여원에 불과했다. 재정 자립도는 12%에 그쳤다. 임실군청의 한 계장은 “지역경제의 활성화가 관건”이라면서 “기본적으로 농촌에 먹고 살 만한 일거리가 생겨 인구가 유입돼야 하는데 그럴 산업을 개발하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서울 종로구는 높아지는 노인비율로 고민이 많다. 치솟는 노인복지 수요를 미처 따라가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종로구는 지난해 12월말 기준으로 전체 거주 인구 16만9천여명 중 1만7천여명이 65세 이상이다. 노인비율 10.1%로 서울에서 가장 고령화 수치가 높은 곳이다.

하지만 종로구에는 올해 5월 현재 경로당 53개, 양로원 1곳 등 노인복지 관련 시설이 56개가 있을 뿐이다. 종로구 충신동에 사는 이모씨(77)는 “경로당에 가도 오는 노인들이 많아 비좁다”면서 “널찍한 곳(경로당)이 생기고 좀 재미있는 것들도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종로구 노인복지과 관계자는 “경로당처럼 소규모 복지시설이 아닌 노인복지센터 건설을 추진 중이지만 부지매입도 쉽지 않고 예산도 많이 들어가 아직 구체적인 확충계획은 없다”고 말했다.

한국은 고령화 속도가 매우 빠르다. 지난 2000년 고령비율 7%를 넘어 고령화 사회에 진입했다. 2005년에는 9.3%까지 올랐다. 통계청은 2018년에는 고령사회(14%), 2026년에는 초고령사회(20%)에 진입할 것으로 전망한다. 고령화 사회에서 고령사회로 가는데 18년, 다시 초고령 사회로 가는데 8년밖에 안 걸리는 셈이다. 반면 일본은 각각 24년, 12년 걸리고, 미국은 115년, 40년이 걸리는 것으로 분석됐다.

고령화 비율이 급격히 높아지고 있는 주요 원인은 평균 수명은 늘고 있는 반면, 출산율은 급격하게 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1970년만 해도 남자의 평균수명은 60세, 여자는 67세였다. 하지만 2003년에 와서는 평균 수명이 남성 73.9세, 여성 80.8세로 늘어났다. 남녀 모두 평균 13년가량 늘어난 것이다. 반대로 출산율은 곤두박질하고 있다. 한국 여성 한 명이 평균적으로 낳는 아이 수(합계 출산율)는 1970년에는 4.53명에 달했지만 지난해에는 1.08명 수준으로 떨어졌다. 이것은 이탈리아(1.33명), 독일(1.37명), 영국(1.74명) 등 유럽연합(EU) 국가들보다도 낮은 수치다.

요즘 여성들은 자아실현 욕구가 높고, 개인주의적 성향이 높아 결혼과 출산을 미룬다는 지적이 있다. 하지만 주위 환경이 여의치 않아 결혼과 출산을 기피하는 여성이 많다. 회사원 최모씨(31·여)는 4년째 사귀는 동갑내기 남자친구가 있지만 아직 결혼 날짜를 잡지 못하고 있다. 한마디로 먹고 살 일이 불안하기 때문이다. 남자친구는 취업하기가 어려워 30살이 넘어선 지난해 직장을 잡았다. 남자친구의 연봉은 3천만원이 채 못된다. 자신도 남자친구 못지 않게 벌지만, 목돈이 없는 탓에 신혼 집 잡기도 어렵다. 최씨는 “맞벌이를 해도 집을 구하기도, 아이를 하나 키우기도 어려운 게 현실”이라면서 “나이가 더 차면 결혼이야 하겠지만 아이 낳는 문제는 또 다를 것 같다”고 말했다.



6살난 딸을 키우고 있는 정윤주씨(36)는 “아이를 하나 낳고 너무 키우기가 힘들어 둘째 갖는 것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한다. 정씨는 회원 수가 27만여명에 달하는 ‘임신과출산그리고육아’라는 육아관련 인터넷 카페를 4년째 운영하고 있는 ‘육아전문가’다.

정씨는 “아기의 분유, 기저귀, 예방접종비, 장난감, 옷 등에 지출하는 돈이 보통 한 달에 50만~1백만원 들어가 경제적 부담이 크다”고 말했다. 정부는 지난 6월 관계부처 합동으로 ‘제1차 저출산 고령사회 기본계획’을 마련해 발표했다. 기본적으로 가정의 출산·양육부담을 줄이고, 고령자들에게 직업 기회 등을 확충한다는 것이다. 정부는 이를 통해 2020년까지 출산율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인 1.6명까지 끌어올리기로 했다.

1차적으로 2010년까지 필요한 32조원의 재원마련은 둘째 문제다. 문제의 원인이 불투명하고 다양한 만큼 정부 정책이 효과를 거둘 수 있을지 의문이다. 유시민 복지부 장관도 기본계획 발표 후 “정부가 (저출산·고령화 문제에 대해)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고 일단 가능한 것은 해봐야 하지 않겠냐”고 답답해 했다. 저출산·고령화 문제의 원인이 뚜렷하지 못한 만큼, 정당과 시민단체들은 각자의 ‘시각’으로 해법을 내고 있다.

참여연대 사회복지위 김다혜 팀장은 “사교육비가 급증하기 시작하는 초등학교에 부모들의 부담을 줄여줄 수 있는 방안을 고민 중이다”라고 말했다. 또 그는 “현 40만원인 육아 휴직금이 너무 적어 쉬려고 해도 쉴 수 없는 부분이 많다”면서 “육아 휴직금을 늘리고, 여성뿐 아니라 남성의 육아휴직 기간도 늘리고 활성화하는 운동이 필요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민주노동당 정책위원회 김원정 연구원은 “정부가 어떤 정책을 세워서 언제까지 출산율을 몇 %로 올리겠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강박관념이고 ‘보여 주기’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김연구원은 “저출산·고령화 정책은 단기간의 정책 집행으로 해결될 문제는 아니다”라면서 “결국 국민들의 삶 자체가 불안감에서 벗어나 여유있게 변하지 않으면 풀기 어려운 문제”라고 말했다. 김연구원은 “저출산·고령화 문제의 해법은 노동과 근로환경, 남녀불평등 등 기존 사회문제를 개선함으로써 점진적으로 해결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서울여성노동자회 황현숙 소장은 “직장 여성의 경우 아이를 낳으려 해도 직장에서 그런 분위기를 만들어 주지 않는 게 문제”라면서 “대놓고 ‘나가라’는 말은 예전보다 덜 하지만 산모 앞에서 담배를 피운다든가, 다른 직원을 통해서 ‘힘든데 알아서 (퇴직)해야 하지 않겠냐’고 말을 하는 직장도 있다”고 말했다. 서울여성노동자회는 고용불안정이 여성의 결혼과 출산을 막는 걸림돌이라고 보고, 이를 개선하기 위한 홍보 활동 등을 벌여왔다. 황소장은 “여성의 결혼과 출산 기피현상은 결국 직장이나 사회가 강요하고 있다”면서 “직장에서 어떤 차별과 부당함이 있는지 꾸준히 살필 것이며, 정부도 이에 대해 강한 지도단속을 펼쳐야 한다”고 말했다.

열린우리당 정책위원회 정춘생 여성전문위원은 “정부가 보육료를 주면서 그 기준을 소득으로만 따지는데 막상 도시 맞벌이 부부는 이 기준을 넘어서 혜택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고 지적했다. 정위원은 “기업이 저출산 정책에 대해 나몰라라 하는 것도 문제”라고 비판했다. 그는 “남성도 출산과 육아 등 책임을 공유하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전남대 김경신 생활환경복지학과 교수는 “정부가 적극 나서서 기업이 고령산업에 투자하기에 좋은 환경을 만들어줘야 한다”면서 “노인복지시설 등에 기부하는 기업들에 대해 세금 감면 등 여러 혜택을 주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보건사회연구원 정경희 박사는 “결국 고령지역이 자족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는 게 문제해결의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황인찬기자 hic@kyunghyang.com

 

 



[진보개혁의 위기] “돈없어 경로당에도 못가…라디오가 유일한 친구”

입력: 2006년 12월 05일 18:05:28

 
김모씨(75·여)에게 오래 산다는 것은 더 이상 복(福)이 아니다. 김씨의 하루하루는 외로움과 고통 그 자체다.

김씨는 서울 서대문구의 수십년 된 5층짜리 15평 아파트에서 혼자 산다. 10년 전 위암으로 남편을 잃었다. 원래 없는 살림이었지만, 남편 병원비로 그나마 있던 돈도 날렸다.

딸은 3명인데 다 결혼했다. 그러나 다들 사정이 여의치 않아 같이 살기는커녕 용돈 받기도 어렵다. 첫째 딸의 남편은 교통사고로 숨졌다. 그 보험금을 둘째 딸이 가져 가 사업을 했는데, 외환위기 때 부도가 나 빌렸던 보험금을 다 잃었다. 돈문제로 자식들이 싸우기 시작했다. 직장에 다니는 막내딸은 16년째 중풍을 앓고 있는 시어머니를 모시고 있다.

모아 놓은 돈은 없고 자식에게 손 벌릴 처지도 못되는 김씨는 일흔을 넘겼지만 일을 한다. 산에 다니면서 쓰레기를 줍는 일이다. 구청이 운영하는 이 녹지사업에 참가하면 월 15만원을 받는다. 산을 타는 것이 여간 힘들지 않다. 그나마 한여름과 한겨울에는 일거리가 없다. 연 7개월만 일해 번 1백여만원으로 1년을 버티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가끔 자식에게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한다. 김씨는 신문읽기를 좋아하지만 신문을 사볼 엄두를 내지 못한다. 무료 생활정보지에 실린 수필을 읽는 것으로 위안을 삼는다. 그리고 라디오가 있다. 김씨의 일과는 단순하다. 집에서 혼자 무료하게 시간을 보낸다. 그러다 답답하면 경로당에 한번 들른다. 그러나 자주 가지는 않는다. 경로당 노인들과 어울리려면 술도 먹고, 화투도 쳐야하는데 그럴 돈이 없다. “노인복지관에 가고 싶지. 그러나 마음뿐이지. 월 1만원이라도 써야되잖아.”

“하루하루 사는 게 참 힘들어요. 우울증이 올 것 같아.” 김씨는 인근 사찰에서 운영하는 무료급식소에서 점심을 먹어야 한다며 자리를 떴다.

 



 

[진보개혁의 위기] 4-6. 진보의 10대의제 : 소외된 소수

입력: 2006년 12월 07일 18:06:19

 

몽골청년 뭉크(가명)는 우연히 찾아온 한국행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한국행에는 많은 돈이 들어갔다. 열심히 일하면 대학진학의 꿈도 이룰 수 있을 것 같아 투자했다. 하지만 한국에서 이주노동자라는 딱지는 23살 청년이 버텨내기에 너무도 가혹했다. 경기도 화성의 한 금속가공공장에서 뭉크는 하루 12시간이 넘도록 철근을 잘라야 했다.


프레스기(절단기)는 안전장치도 없었다. 월 급여는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는 60여만원. 한국인 사장과 공장장은 툭하면 뭉크를 때렸다. 이유도 없었다. 술만 마시면 기숙사로 찾아와 행패를 부렸다. 한번은 공장장이 구둣발로 얼굴을 차서 부상을 입고 병원에 실려갔다. 사장은 공장에서 기르는 개에게 ‘뭉크’라는 이름을 붙였다. 시도때도 없이 그를 학대했다. 한국인 직원들과는 같이 밥을 먹을 수 없었다. 한겨울에도 혼자서 공장 밖 하수도 근처에서 수돗물로 몸을 씻어야 했다. 그가 꿈꿨던 ‘코리아’는 현실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코리안 드림’은 아예 없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결국 사고가 났다. 지난 2월 프레스기에 손가락이 빨려들어갔다. 회사는 모른 척했다. 수차례에 걸쳐 노동부에 고발했다. 그러나 회사와 사장은 처벌받지 않았다. 합의했다는 게 이유였다.

경기도 양주에 있는 섬유공장에서 일하는 러시아인 마리아나(가명·48·여). 고된 노동에 임금도 체불됐지만 열심히 일했다. 어느날 회사가 갑자기 문을 닫았다. 오갈 데 없었다. 간신히 인근 공장에서 잡역부로 일하기 시작했다. 이어진 사고. 무릎을 심하게 다쳤다. 체불임금 때문에 당장 먹고 입을 것도 없었지만 회사는 ‘나 몰라라’로 일관했다. 다행히 그녀는 지역 이주노동자센터의 도움을 받아 수술을 받을 수 있었다. 마리아나는 아직도 다리를 제대로 쓰지 못한다. 항공료도 없어 고국으로 돌아갈 수도 없다. 그녀는 지금 한 교회에서 마련한 기숙사에서 생활하고 있다.

한국에 오는 과정에서 진 빚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회사는 경영난을 이유로 밀린 봉급 2백50만원을 아직도 주지 않고 있다. 다리가 불편한 그녀를 흔쾌히 고용해줄 마음씨 고운 회사가 있을 리도 없다. 그저 회사가 어서 밀린 임금을 지불해 주기만을 기약없이 기다리는 마리아나에게 한국은 ‘어서 떠나고 싶은 나라’가 됐다. ‘가고 싶은 나라’가 단 몇개월 만에 이렇게 바뀐 것이다.

이 땅에 이주노동자가 들어온 지 13년이 지났다. 그동안 수없이 많은 이주노동자가 한국땅을 밟았고, 지금도 38만여명이 대한민국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고 숨쉬고 일하고 있다. 그러나 ‘코리안 드림’으로 불린 한국땅은 ‘약속의 땅’이 아니었다. 이들은 자신들이 한국 사회의 ‘신종 노예’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 말을 들으면 한국인들은 반발할지 모른다.

정부는 2004년 8월 ‘외국인고용허가제’를 도입했다. 산업연수생제와 병행하기는 했지만 외국인고용허가제는 산업연수생제도 때의 심각한 인권침해 문제들을 개선하는 전향적인 제도로 평가받았다. 제도적 보호를 받지 못했던 연수생들은 노동법의 보호를 받는 노동자의 신분을 얻게 됐다. 송출비리 문제도 외국의 국가기관이나 공공기관이 직접 인력을 뽑게 해 비리 가능성을 상당 부분 해소했다. 2년이 지난 지금 이주노동자들이 몸으로 느끼는 삶의 질은 나아졌는가?

포천나눔의집 소속 류지호씨는 부정적 답변을 내놓았다. 류씨는 “변화가 있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산업연수생제 때 자행됐던 비상식적인 일들이 여전히 반복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무엇보다 이주노동자들을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이 여전히 차별적이고 차갑다는 게 가장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런 사회적 편견이 이주노동자들에게는 엄청난 차별을 낳는다.

서울의 한 염색공장에서 일하는 카니(가명·26). 한국에 온 지 반년 조금 넘었다. 한국에서 번듯한 기술이라도 배워서 돌아가겠다는 게 당초 꿈이었다. 하지만 그에게 주어진 일은 긴 장대를 들고 기계 안의 오물을 건져내는 것이었다. 그럭저럭 한국 음식도 입에 맞아가고 동료들과도 잘 지내고 있지만 한국 사람들이 자신을 바라보는 이상한 시선만은 아무래도 익숙해지지 않는다고 그는 말한다.

그는 얼마 전부터 혼자 지하철을 타지 않는 버릇이 생겼다. 지하철을 탈 때마다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느꼈기 때문이다. 어쩌다 눈이 마주치면 노골적으로 적대담을 표시하는 한국인들도 있다. 그럴 땐 고개를 숙이고 다른 곳을 바라보는 게 상책이란 걸 그는 알게 됐다. “어쩔 수 없이 혼자 지하철을 탈 때가 있어요. 자리에 앉아 있으면 사람들이 전부 저만 쳐다보는 것 같아서 자리가 있어도 그냥 서서 갑니다. 그게 편해요.”

카니만의 문제는 아니다. 40만명의 이주노동자들은 소속감이나 동질감을 느낄 수 없다. 사회적으로 만연한 이질감을 극복하는 데도 상당한 어려움을 겪는다. 외국인이주노동자대책협의회 우삼열 사무국장은 “한국인들이 이주노동자들을 인간이 아닌 도구로서 바라보는 이상 이주노동자 문제는 결코 진전되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우국장은 “한국인들에게 이들은 여전히 3D업종에서 부품처럼 소모되는 노동력의 단위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한국 이주노동자들의 삶의 궤적은 유사하다. 산업연수생 제도나 고용허가제로 들어온 이주노동자들은 가장 낮은 수준의 ‘보호’를 받는다. 몇년 동안 ‘품을 팔다’ 기한이 되면 고향으로 돌아간다. 아니면 불법체류자 딱지를 달고 고행을 할 수밖에 없다. 2년, 3년의 ‘시한부 노동자’를 위한 사회적 배려는 찾아보기 어렵다. 이주노동자인권연대 최현모 연대국장은 “전세계 1억9천만명, 우리나라에만 40만명의 이주노동자들이 살고 있는데 우리 사회는 아직도 우리 민족만의 국가라는 인식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주노동자를 포함한 한국거주 외국인은 2006년 9월 현재 89만여명. 웬만한 중소도시 인구에 버금가는 숫자다. 2020년이면 1백52만명의 노동력 부족 현상이 나타나게 될 것이라는 연구 결과에 비춰보면 우리 사회는 앞으로도 훨씬 더 많은 이주노동자들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주노동자 문제는 우리 사회가 슬기롭게 극복해야 할 중대 과제인 것이다.

이주노동자인권연대 최현모 연대국장은 “우리의 미래에 대한 고민을 조금이라도 한다면 이주노동자 문제에 대한 진지하고 심각한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주노동자가 우리 사회에 등장한 지 이미 13년이 지났고 다문화공동체 사회로의 진입을 눈앞에 두고 있는 상황”이라며 “이들을 우리 사회 안에서 포용하려는 노력을 해왔는지는 우리 스스로가 더 잘 알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함께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을 노동력과 관리의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우리 사회에서 과연 어떤 ‘세계화’와 미래가 가능할 것인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전북대 설동훈 교수는 ‘새로운 시민’ 개념으로 접근할 것을 제안한다. 설교수는 “세계적인 추세나 저출산·고령화 등의 현상과 조건을 고려해보면 외국인과 함께 살아가야 할 시점이 멀지 않았다”면서 “시민 개념을 이들에게도 확대 적용해 소속감을 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주노동자를 ‘노동력’이 아닌 ‘사람’으로 바라보는 사회적 인식의 전환이 출발점”이라고 말했다.

〈이호준기자〉

 

 

[진보개혁의 위기] 인권개선 기대한 이주노동자·장애인 ‘절망’

입력: 2006년 12월 07일 18:10:33

 

지난달 29일 ‘성람재단 비리척결과 사회복지사업법 전면개정을 위한 공동투쟁단’ 회원들은 광화문에서 시작한 2박3일의 삼보일배를 마치고 여의도에 도착했다. 이들은 장애인 인권을 유린한 성람재단에 대한 특별감사와 ‘공익이사제 도입’을 골자로 하는 사회복지사업법 개정안의 조속한 국회통과를 촉구했다. 장애인이동권연대 박경석 대표는 “정부의 침묵 속에 10년 동안 반복된 장애인시설 인권유린을 이제는 끝내야 한다”고 비장하게 말했다.

1주일 뒤인 12월6일 장애인차별금지법제정추진연대 회원 1,000여명이 서울 여의도 전경련회관 앞에 모여 ‘실효성 있는 장애인차별금지법 연내 제정’을 주장했다. 이들은 “재계가 기업부담을 이유로 장애인차별 금지법을 반대하고 있고 정부도 부화뇌동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장애인들의 시위가 빈발하고 있다. 장애인교육지원법, 활동보조인서비스제도화, 장애인차별금지법, 시각장애인안마사 생존권 확보 등 이슈도 다양하다. 이들이 거리에 나선 이유는 그들의 삶이 그만큼 절박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내년 3월 이후 대선정국에 들어가면 자신들의 요구가 관철될 가능성이 적어진다는 생각도 하는 듯하다.

서울 장애인부모회 회장 김경애씨는 마음이 급하다. 장애인교육지원법이 올해 안에 통과되지 않으면 5년을 더 기다려야 할지도 몰라서다. 그때쯤이면 둘째아들 현종군(12)은 학교를 졸업할 나이다. 현종이는 일반 초등학교에 다닌다. 물론 특수학급이다. 문제는 현종이를 위한 교육이 없다는 점이다. 특수학급에는 성적이 떨어지는 학생도 있다. 그러고 보면 현종이는 수업의 들러리일 뿐이다. 수련회에 갈 때면 학교에서는 어머니 김씨에게 ‘어떤 사고가 발생해도 학교에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각서를 요구한다. 개선책을 호소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결국 김경애씨는 올해 거리투쟁에 나섰다. 싸우는 길밖에 없다는 점을 깨달은 것이다.

2006년 현재 일반학교에 설치된 특수학급은 3,645개다. 중학교에는 986개, 고등학교에는 422개가 있다. 고등학교는 초등학교의 10분의 1밖에 안된다. 장애인 학생수는 초등학생이 2만1천7백명, 중학생 6,598명, 고등학생 3,670명이다. 장애인에게는 중·고교 진학도 ‘전쟁’이다. 김씨는 “2003년 교육부 집계에 따르면 특수교육 대상자는 5만8천명 정도이지만 실제 장애인 학생은 25만명 정도”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정부는 학교에 다니지 않는 장애아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파악조차 못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1급 시각장애인 강윤택씨(28)는 지난 10월 서울시 공무원 임용시험에 응시했지만 시험을 치르지 못했다. 점자 시험지가 제공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울시에서 시험 도중 퇴실도 허락하지 않았다. 100분간 우두커니 앉아서 시험이 끝나기만 기다렸다. 강씨의 지원 분야는 사회복지직. 장애인끼리 경쟁하는 자리였다. 장애인 의무고용정책만 믿고 수년을 공부했지만 돌아온 것은 이런 ‘절망’이었다. 강씨는 공주대 사범대에서 특수교육과 사회복지를 전공했다. 현재 직업훈련교사로 일하고 있다. 관련 자격증도 가지고 있다. 강씨는 자신이 충분히 공무원으로서 일할 능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능력을 평가받을 기회조차 봉쇄돼 있다. 원서 접수 때 서울시 인사과 관계자는 “시각·청각 능력이 없는 장애인은 행정능력이 없어 시험을 볼 수 없다”고 일방 통보했다. 시험을 볼 수 있도록 하는 어떤 배려도 없었다. 강씨는 “시험날 감독관이 와서 ‘안된다고 했는데 왜 고집을 부리느냐’며 비아냥거렸다”고 폭로했다.


지난 9월 9개 부처는 장애인 지원 종합대책을 발표했다. 그러면서 정부는 ‘획기적’이라고 자평했다. 이를 위해 1조5천억원의 예산을 확보했다. 내년부터 장애수당 지급 대상을 기초생활수급권자에서 차상위계층으로 확대하고 지급 금액도 2배가량 늘릴 방침이다. 하지만 장애인은 이것으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장애인들은 장애인차별금지법, 활동보조인서비스, 장애인교육지원법, 사회복지사업법 재개정을 바라고 있다. 이 네가지 법안 모두 지지부진한 상태다. 장애인차별금지법제정추진연대 박옥순 사무국장은 “재계의 전면적인 압박에 정부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사회복지사업법 재개정과 장애인교육지원법 제정도 마찬가지. 정부안을 만들겠다고 한 지 몇달이 지났지만 진척은 없다. 활동보조인 서비스 역시 정부가 ‘시늉’만 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중증장애인 한명당 월 40시간의 활동보조인 서비스가 배정됐기 때문이다. 하루 2시간도 안된다. 장애인들에게 생존이 달린 문제인 것을 정부는 모른 체하고 있다.

우리나라 장애인은 2백14만명이다. 100명 가운데 4명꼴로 장애인인 셈이다. 하지만 길거리에서는 이렇게 많은 장애인들을 좀체로 찾아보기 힘들다. 장애인들이 거리로 나올 수 없는 환경 때문이다.

장애인과 함께 사는 사회가 되려면 우선 장애인 편의시설이 있어야 한다. 편의시설이 없으면 장애인은 이동할 수 없고, 이는 장애인들의 생존에 치명적 위협이 된다. 지하철 엘리베이터, 각종 시설의 장애인용 통로 개설, 지하철 역의 스크린도어, 대중교통 수단의 장애인용 출입장치 마련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관공서 건물조차도 장애인용 편의시설은 태부족하다. 장애인 의무고용 역시 제대로 지키는 관공서가 드물다. 민간기업의 장애인 의무고용 비율은 관공서보다 훨씬 떨어진다.

이러니 장애인 가구의 월평균 소득은 낮을 수밖에 없다. 도시 근로자 가구소득 3백1만9천원의 절반에 불과한 1백57만2천원이다. 또 전체 장애인가구 가운데 기초생활수급 가구는 13.1%다. 비장애인 가구의 6.82%에 비해 두배다. 낮은 소득은 장애인들의 활동공간을 위축시키고, 그것이 다시 소득 감소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계속된다.

돈을 주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장애인이 일할 수 있는 인프라를 구축해 주는 것이다. 시설인권연대 소속 김정하씨는 최우선적 고려요소로 사회복지사업법 재개정과 장애인교육지원법 제정을 강조한다. 김씨는 “몇달 후에 정부안이 나오더라도 기존 발의안과 병합 논의를 하면서 다시 몇개월을 허비할 가능성이 높다”고 우려했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김도현 국장은 “정부나 정치권이 선심 쓰듯 정책을 발표한다는 것이 문제”라며 “장애인 문제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시혜나 배려가 아니라 생존권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애인차별금지법제정추진연대 박옥순 국장은 “진보세력들의 요구 사항에서조차 장애인문제는 항상 후순위로 밀리고 있다”고 지적했다.

〈김준일기자 anti@kyunghyang.com

 

 

 

[진보개혁의 위기] 4-7. 진보의 10대 의제 : 건강 불평등

입력: 2006년 12월 10일 18:19:22

 
서울 강서구 가양동에 사는 정모씨(71)는 허리 디스크 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진단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수술을 받을 수가 없다. 정부에서 주는 월 30만원의 지원금으로 사는 기초생활수급자이자 의료보호대상자인 그는 자기 부담 비용 6백만원을 마련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구청이 긴박한 상황에 놓인 저소득층에 의료비와 생활비를 지급하는 긴급구호자금 지원을 받도록 알선해 주기도 했다. 그러나 지원 금액은 최대 3백만원. 정씨에게는 여전히 3백만원이 필요하다. 가양동 사회복지사 이모씨는 “의료보호 대상자더라도 건강보험 적용이 안되는 치료는 본인이 부담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저소득층은 수술을 받을 경우 생활비를 벌 수 없고 아이들을 돌봐줄 사람도 없다”면서 “이런 추가 비용을 감당할 길이 없어 치료받을 엄두를 못낸다”고 설명했다.

치료비 부담은 저소득층만의 문제가 아니다. 박모씨(43·여)는 연봉 4천5백만원인 남편의 수입으로 살아온 중산층이었다. 그러나 하나뿐인 아들(10)이 소아암의 일종인 신경모세포종에 걸리면서 생활기반이 통째로 무너졌다. 세번째 골수이식 수술과 치료를 받은 지난 8월부터 지난달까지 3개월 동안 이들이 낸 치료비는 9천3백만원. 발병한 2002년 1월부터 지금까지 2억원을 썼다. 이들이 치료받을 당시 두번째 이식수술부터 건강보험 적용이 안됐기 때문이다. 종합병원에서 치료를 받아야 하는 중병이어서 무균실·중환자실 입원비, 선택진료비 등이 만만치 않았다. 집을 담보로 대출받고 친척들에게 돈을 빌려 치료비와 생활비를 대고 있다. 그러나 아이의 상태가 좋지 않아 추가 비용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박씨는 “남편(50)이 20년 넘게 직장생활하면서 건강보험료를 내왔지만 막상 큰 일을 당하고 보니 도움이 안된다”며 “의료보호 혜택이라도 받을 수 있도록 차라리 직장을 그만두는 게 나은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고 전했다.

의료비는 이렇게 가난한 자와 여유있는 자를 차별하지 않고, 생계를 위협한다는 점에서 특정 계층의 문제는 아니었다. 그러나 최근 심화되는 ‘건강 불평등’ 현상은 의료문제 역시 계층의 문제임을 다시 부각시키고 있다. 소득수준, 생활·노동환경 등에 따라 건강에 큰 차이가 나타나고, 이것이 대물림되고 있는 것이다. 건강세상네트워크 김창보 사무국장은 “건강의 대물림은 부, 학력의 대물림에 이어 사회 불평등구조를 고착화시키고 서민층 삶의 질을 떨어뜨리는 근본적인 문제가 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최근 사회 흐름은 의료공공성 강화를 통해 건강 불평등을 해소하는 쪽보다는 의료 산업화로 역행하고 있다. 그는 “정부가 의료서비스를 산업화해 시장원리에 맡기겠다는 것은 ‘삶의 질’ 문제를 포기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노무현 대통령의 공약에는 의료 보장성 확대가 포함되어 있었다. 40~50%대인 건강보험 보장률을 70%까지 높이고 공공의료기관을 확충하겠다고 약속했다. 취임 2주년 국정연설에서는 “사회 안전망을 더욱 확충해서 최소한 돈이 없어 병원에 못가는 일은 없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그런 참여정부가 최근 의료시장 개방과 산업화 등 신자유주의적인 의료 정책으로 전환했다. 건강권실현을위한보건의료단체연합(이하 의료단체연합) 변혜진 기획국장은 “정부는 의료 보장성을 강화하면서 산업화도 같이 추진하겠다지만 지금처럼 공공의료 시스템이 약한 상황에서 산업화하면 보장성 기반 자체가 무너진다”고 주장했다. 변국장은 “의료 공공성을 확보하는 두 축은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와 공공의료기관 확충”이라며 “시장화가 아닌 보장성 강화가 우선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국의 건강보험 보장률은 60% 수준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평균치인 70%보다 낮다. 또 OECD 국가들의 공공의료기관 비율은 평균 30%지만 한국은 10%이고 국립대 병원을 제외하면 실제로는 8%에 불과하다.

특히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은 그나마 허약한 공공성 기반마저도 위협을 하고 있다. 의료단체연합 우석균 정책실장(가정·예방의학 전문의)은 “공공성이 확대되면 이익이 줄어드는 대형 병원자본, 민간 보험사, 다국적 제약회사 등이 정부에 영향력을 행사하며 의료서비스 산업화를 부추긴다”고 강조했다. 그는 “가만히 두면 ‘시장’이 이기게 돼 있는 것이 현실”이라면서 “이를 막기 위해 시민사회단체 전체가 달려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보장성 강화와 산업화 추진 사이에서 우왕좌왕하고 있는 정부가 보장성을 정책의 우선순위에 두도록 영향력을 미치는 것이 진보세력의 역할”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들의 활동은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하다. 우석균 정책실장은 “김화중 보건복지부 장관 재임 때(2003~2004년) 수가제도를 바꾸고 공공의료기관을 확대할 수 있는 계기가 있었지만, 병원계의 압력으로 유야무야되는 상황을 막지 못했다”고 회고했다. 이후 병원·제약 등 의료자본의 힘은 참여정부를 좌우하는 정도로 발전했다. 의료자본이 대통령자문 의료산업선진화위원회를 통해 의료 산업화에 적극 개입한 것이다. 그 결과 정부는 이제 의료기관의 영리법인화, 민간보험 활성화 등 의료 산업화 정책을 밀어붙이고 있다. 의료개혁 단체들은 “정부가 특정 대형병원장의 주장을 정책 근거로 삼는 등 병원 자본의 논리에 휘둘리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진보세력은 이같이 시급한 의료 산업화와 FTA 등 예상치 못한 현안에 대응하느라, 보장성 강화라는 근본적인 과제에는 힘을 집중하지 못하고 있다. 민주노동당 홍춘택 의료정책연구원의 말이다. “무상의료 1단계 실현을 위한 8개 법안을 지난해 제출했는데, 만 6세 미만 아동의 예방접종 무료화 안만 통과되고 나머지는 현재까지 계류 중입니다. 공공의료기관 확대를 위한 도시형 보건지소 확충 사업도 실질적 성과는 미미합니다. 운동단체 간의 협력이 잘 되지 않았고 민노당도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나 능력이 부족하지요.” 김창보 건강세상네트워크 사무국장은 “민주노동당이 시민단체의 입장을 조율해 원내에서 풀어내는 능력이 부족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민노당이 내세우는 ‘무상의료’의 경우 구체적 접근 방법이 없어서 현실적인 긴장감이 떨어진다”면서 “상징적인 구호로만 느껴지지 달성해야 할 목표란 생각이 들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의료문제의 공론화를 위한 시민단체 간의 발빠른 협력이 부족한 것도 문제로 지적된다. 김창보 사무국장은 “의료 시민운동이 보건운동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건강이라는 본질적인 문제로 이동해야 하는데 시민사회 안에서 공감대를 이루는 것 자체가 어렵다”고 인정했다. 민노당 홍춘택 연구원은 “수가제도, 급여·비급여 등 전문적인 내용 때문에 시민들이 의료 주제를 어렵게 생각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한·미 FTA 협상 반대 운동이 시민들 사이에 의료 공공성에 관한 관심을 부각시키는 효과가 있다는 점에서 하나의 계기가 될 수는 있다. 변혜진 국장은 “의료시장 개방 반대 운동의 호응이 별로였지만, FTA를 계기로 문제점이 부각되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홍춘택 연구원은 “진보의 핵심이 공존사회라고 한다면 의료문제야말로 사람들에게 연대정신을 강조하는 핵심 과제”라고 강조했다.

〈임영주기자〉

 

 

[진보개혁의 위기] 4-8. 진보의 10대의제 : 생태주의

입력: 2006년 12월 12일 17:31:47

 

최근 너도 나도 ‘친환경’ ‘생태’ 가치를 강조하는 게 유행이다. 그러나 이런 유행이 결코 생태를 위해 좋은 것만은 아니다. ‘친환경’ ‘생태’로 포장된 개발주의가 더욱 기승을 부릴 수 있는 공간이 형성되고 있기 때문이다. 서울 청계천·양재천 등 하천 복원사업은 그런 분위기를 더욱 확산시키고 있다. 지방자치단체가 이른바 ‘친환경개발 사업’에 경쟁적으로 나서고 있는 것이다. 이런 바람을 타고 시민들은 시민들 대로 “조깅길이 불편하고 조명이 어둡다”며 시설 개선을 요구한다. 자전거 도로가 비좁다거나 우레탄을 깔아달라는 요구도 한다.

그러나 이런 모습을 ‘친환경’으로 표현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환경정의 오성규 사무처장은 이런 현상 역시 개발주의의 한 양태일 뿐이라고 규정한다.

많은 경우 친환경을 내세우는 이면에는 여전히 개발주의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지난 2월 서울 롯데백화점 본점 앞에는 9시5분을 가리키는 시계탑이 세워졌다. 12시를 가리키면 지구가 멸망한다는 경각심을 일깨워주기 위한 환경위기시계다. 환경재단(최열 대표)의 ‘만분클럽’에 가입하면서 설치한 것이다. 만분클럽은 매출액의 1만분의 1을 환경기금으로 사용하겠다고 약속한 기업체 등이 참여한다.

그러나 이런 친환경 이미지는 인천으로 옮겨가면 다른 모습을 보인다. 인천의 마지막 숲이라는 계양산에는 인천녹색연합의 신정은 활동가(28·여)가 10m 소나무 위에 천막을 친 채 고공시위를 벌이고 있다. 영하를 오르내리는 추위 속에 12일로 47일째 맞는다.

롯데건설은 신격호 롯데그룹 회장 소유의 계양산 북쪽 목상동, 다남동 일대에 27홀 크기 골프장과 테마파크형 근린공원을 조성한다는 계획을 갖고 있다. 신씨는 이곳을 개발하기보다 자연공원으로 둘 것으로 요구하고 있다. 인천시는 골프장 건설을 허가할 태세다. 롯데그룹에게 친환경은 기업 이미지 부각을 위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북 무주군은 올해 10회째인 반딧불이축제로 관광객 70만명에 약 90억원의 경제 파급효과를 기록한 모범적인 친환경 지방정부로 인식되어 있다. 보잘 것 없던 농촌지역이 ‘생태’를 내세워 나비축제의 함평군처럼 친환경 정책으로 농촌살리기의 가능성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주군은 ‘골프장 기업도시’라는 다른 얼굴도 갖고 있다. 무주군 안성면 등지에 총 2백45만평에 2조원 가까운 돈을 들여 2015년까지 총 45홀의 골프장을 지을 예정이다. 이같이 친환경, 생태는 아직까지 개발주의를 포장하기 위한 당의정 역할에 머물러 있다.

이렇게 친환경을 내세운 개발주의는 ‘개발은 곧 선(善)’이라는, 한국인에게 여전히 뿌리깊이 박힌 인식을 변화시키지 않는 한 계속될 수밖에 없다. 이런 인식에는 시민이나, 지방정부, 중앙정부, 기업의 차이가 없다. 국민의 정부는 2000년대 ‘새천년 환경비전’, 참여정부는 2005년 ‘국가 지속가능발전 비전’을 발표하며 친환경적인 정책을 약속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신개발주의’로 나아갔다. 대통령 직속 지속가능발전 위원을 지낸 단국대 조명래 교수는 “정부는 환경영향평가나 환경 친화적 공법을 내세워 겉으로는 환경 보전을 강조한다”면서 “그러나 친환경적이라는 이유로 개발을 더 부추긴다”면서 이를 ‘신개발주의’라고 규정했다.

좋은 예가 새만금간척사업을 하면서 친환경적 개발을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내용이 갯벌 파괴를 최소화해서 생태관광 사업을 하는 그런 것이 아니다. 간척지에 108~144홀짜리 골프장과 카지노·수상레포츠 단지를 건설하는 것이 바로 친환경 개발의 실체이다. 작가 황대권씨는 최근 ‘민들레는 장미를 부러워하지 않는다’는 작품에서 새만금사업을 이렇게 묘사했다. “말 못하는 작은 생명을 짓밟고 평화로운 작은 마을들을 없애는 것을 진보라고 생각하는 한 이 땅의 미래는 없다.”

과거 개발 우선의 권위주의 정권들이 추진해온 수해대비용 댐 건설 같은 정책도 여전히 답습되고 있다. 올 여름 한탄강댐 건설 논란이 대표적인 사례다. 따라서 지속가능발전위는 정부가 개발주의를 추구한다는 사실을 희석시키는 가림막 역할을 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참여정부의 지역균형발전 사업은 개발주의의 전형에 해당한다. 환경운동가들은 “참여정부가 사회의 지배적인 토건세력인 관료·건설업자·보수언론·학자 등 ‘건설마피아’의 공고한 집단적 덫에 걸렸다”고 비판했다. 2002년 국내 총 공사액은 1백18조원으로 GDP 5백96조원의 19.8%나 된다. “토건국가”로 불리는 일본의 GDP 대비 건설업 비중 약 20%와 맞먹는다.

개발이 시민의 복지를 위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삶의 질을 떨어뜨린다. 도시의 80% 이상이 그린벨트인 경기도 하남시의 경험은 한국사회에 만연한 개발 욕구가 어떻게 비뚤어져 표출되는지 잘 보여준다. 시는 지난해 7월 64개 그린벨트 해제예정지 가운데 20곳의 취락지구를 우선 풀어줬다. 약국, 미용실 등 기본적인 근린생활시설이 턱없이 부족한 주민 불편을 감안한 것이었다. 4층까지 건축이 가능토록 1종 주거지역으로 바꿔 전원주택의 길을 터줬다. 그러자 그린벨트에 억눌렸던 하남시민들의 개발 욕구가 분출했다. 근린생활시설은 들어서지 않았다.

대신 축사나 창고 등이 우후죽순처럼 들어섰다. 초이동 동사무소 근처 등 1만여평을 채운 것도 근린시설이 아니라, 40여개에 달하는 대형 활어회판매장이다. 자연이 훼손되고 주거환경은 나빠졌다. 하남YMCA 안창도 사무총장 “녹지를 최대한 살려 쾌적한 생태도시를 만들 수 있었는데, 땅주인이나 자영업자들은 대단위 개발로 인구가 늘어나기만 바라고 있다”고 말했다. 환경사회연구소 구도완 소장은 “노무현 정부에서도 ‘위로부터의 변화’는 기대할 수 없다”며 “아래로부터 녹색화를 모색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라고 평가했다.


생태주의적 삶은 결코 경제적 이익을 포기한 완고한 사람들의 삶이 아니다. 오히려 풍요로운 삶의 길을 제시해 주고 있다. 2000년 7월 용인 대지산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살펴보자. 경주김씨 종친회가 자신의 땅을 그린벨트로 지정해 달라는 청원을 했다. 종친회가 “조상에게 물려받은 땅이 죽전지구 택지개발로 난도질 당하는 모습을 도저히 볼 수 없다”며 수백억원의 보상금 대신 땅을 지키기로 한 것이다. 토지신탁운동인 내셔널트러스트운동을 벌인 환경정의도 여기에 힘입어 ‘대지산 땅 한평 사기운동’으로 정상 부근의 100평을 매입했다. 그렇게 총 8만5천여평을 지킨 대지산은 올 5월 생태공원으로 주민 품에 돌아왔다. 아파트 숲이 될 뻔한 대지산에는 지금 야생화 단지, 곤충서식지가 들어서고, 생태교육시설, 태양열 가로등이 설치되었다.

생태적 오리농법 덕에 20년 만에 제비가 돌아온 경기 여주군 삼교리 사례는 환경보존이 윤택한 삶을 향한 지름길임을 일러준다. 토박이 농부 손부남씨(65)는 “100여가구 중 약 30가구에 제비가 둥지를 틀고 있으며, 줄어들었던 개구리, 메뚜기도 늘어났다. 농약 피해도 없으니 좋다”고 말했다. 손씨는 “앞으로 농약을 친 농산물은 소비자가 외면할 때가 올 것이라는 생각에 친환경농법을 시작했다”며 “수확량은 떨어지는 대신 가격을 30% 정도 더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1986년 6가구로 시작했으나 현재 50여가구에서 오리농법을 한다. 40㎏ 한 포대 수매가가 일반벼는 6만원선인데 무농약벼는 8만~9만원씩 한다. 가구당 200~300마리씩 키우는 오리도 내다팔 수 있다.

녹색평론의 김종철 발행인을 비롯한 일단의 생태주의자들은 아예 동아시아의 전통적인 소농업 체제로 가고, 농업 비중을 대폭 늘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일부에서는 농어촌 생태관광을 한 방안으로 내놓고 있다. 생태적 소농업 위주의 동아시아연대가 WTO 중심의 세계화를 대체할 모델일 수 있다는 주장도 나온다. 생태경제학을 전공한 우석훈 성공회대 외래교수는 농업과 관련해 스위스와 영국이 시도하는 ‘유기농 전면화’를 검토해볼 만하다고 한다.

농업 문제 못지 않게 중요한 생태적 과제가 지구온난화나 화석연료 고갈에 대비한 재생가능한 대안에너지 분야다. 환경운동연합은 옥수수나 유채기름 등으로 만든 바이오디젤을 석유 대체에너지로 추진하고 있다. 풀뿌리 시민단체인 에너지전환(옛 대안에너지센터)은 생태적인 전환의 핵심을 에너지 전환에 두고 있다.

지난해 4월 교사 농부 주부 건축가 등 37명은 시민기업 ‘시민발전’을 출범시켰다. 학교 등 공공기관 지붕에 태양광발전기를 다는 것이 목표다. 지난해 방사성폐기물처리장 건설 문제로 첨예한 대립을 보인 부안에는 태양열발전을 하는 ‘부안시민발전소’를 3군데 세웠다. 방폐장 반대를 외친 문규현 신부, 김인경 원불교 교무 등 종교 지도자와 환경연합 생태도시센터 등이 돈을 보탰다. 부안성당의 1호기는 최대 3㎾, 한달에 4인 가구 평균 전력 사용량과 비슷한 약 300kwh 전기를 생산한다. 3곳에서 약 900kwh를 생산해 한국전력에 팔아 수입을 올린다.

그러나 이런 생태주의적 삶은 아직 우리 사회에 뿌리 내리지 못하고 있다. 무엇이 문제일까. 우석훈 교수는 한 토론회에서 “70% 대외경제 의존과 98%의 에너지 해외의존이라는 한국경제의 기형적 모습을 해소하는 것이 출발점”이라고 강조했다. 한 행정단위에서 생태주의를 시범적으로 실천하는 것도 효과적일 수 있다.

최승국 사무처장은 “성미산마을의 마포구, 문당리 생태공동체의 충남 홍성군 전체를 시범 녹색모델로 만드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성미산, 함평군(나비) 등 모범사례를 발굴, 확산하기 위해 진보·민주세력간의 녹색연대가 절실하다”고 말했다. 나아가 계급이익 우선의 진보운동의 한계를 넘을 녹색정치 세력화도 요구되고 있다.

구도완 소장은 “87년 민주화 이후 위로부터 민주화에는 힘을 기울여 왔는데 시민들 스스로 생태주의적으로 생각하거나 노력하는 것은 아직 부족하다”며 “이제는 시민사회가 생태적 자각과 성찰을 해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그는 “국가, 경제, 시민사회를 녹색으로 바꾸는 일은 구불구불 돌아가는 먼 길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오성규 사무처장은 “사회민주주의도 거치지 않은 채 급격한 생태주의를 한국사회에 적용하기는 쉽지 않다”고 평했다. 그는 “기존의 강력한 개발주의를 극복할 ‘디딤돌’이 필요하다”며 “개발보다 복지를 강조하고 인간과 자연이 함께 공존하는 방안을 찾는 가운데 사람들의 환경의식을 자리잡게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명래 교수는 진보는 녹색임을 주장했다. “진정한 진보는 인간과 자연이 조화되는 녹색을 띠지 않으면 안됩니다. 국책사업에서도 생명의 가치를 우선하고, 환경용량에 걸맞은 지방분권적 발전을 모색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참여정부는 녹색색맹에 가깝다고 할 수 있지요. 한국 사회의 위기는 탐욕스러운 개발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과도한 인간중심주의 이념의 위기입니다.”

〈전병역기자 junby@kyunghyang.com

 

 

[진보개혁의 위기] 성미산 생태공동체 “서로 믿고 사는게 생태적인 삶”

입력: 2006년 12월 12일 17:33:09

 
풀뿌리 시민운동의 대표 사례인 마포 성미산마을은 도시 속에서 생태공동체를 실천하는 곳이다. 1994년 공동육아를 위한 협동조합 형태로 공동출자한 ‘우리 어린이집’이 모태였다. 성미산 배수지 건설을 반대하며 2년간 전개된 성미산 지키기 운동을 통해 공동체가 형성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생태공동체인 서울 마포 성미산마을 주민들이 성미산에 나무를 심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성미산마을 주민들에게 생태공동체는 미래나 이상이 아니라 일상 생활 속에서 겪는 현실이 되어 있다.

주민 유창복씨(45)는 96년 7살이던 아들을 위해 경기 안산에서 마포로 이사왔다. “당시 유치원에서 너무 인지교육을 하는 게 싫었습니다. 놀면서 클 곳이 없을까 고민했지요. 흙도 만지며 사람 냄새 나는 자연친화적인 어린이집을 찾다가 여기까지 왔어요.”

아이들은 해만 뜨면 성미산에 올라가 놀았다. 마을 시장 작은 점포의 할머니가 주는 사탕도 받아먹으며 마을이 하나의 공동체임을 배운다. 어린이집에서 아이들이 먹는 것은 유기농 재료이다.

유씨는 “가장 좋은 것은 교사와 부모가 소통할 수 있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부모님들이 출자해 만든 조합형 유치원이었던 까닭에 부모 참여가 전제조건이었다. 그는 “사실 아이 때문에 갔다가 어른들이 좋아져 살게 됐다”며 웃었다.

아이들은 ‘동네꿈터’로 이름 지어진 공간에서 택견을 배운다. 아빠들은 아이들을 위해 수학공부방을 운영한다. 유씨는 “일반 학원은 아이들을 돈으로 보는데 이곳은 사람으로 봅니다”라고 말했다. 내년에는 과도한 사교육을 협동방식으로 푸는 방안을 모색할 예정이다.

유씨네는 먹거리를 생협에서 다 해결한다. 반찬은 ‘동네부엌’이라는 생협 반찬 가게에서 산다. 여름철 아이들의 아이스크림도 ‘그늘나무’라는 녹색가게에서 사먹는다. 자동차가 고장 나면 믿음이 가는 협동조합형 카센터 ‘차병원’에 맡긴다.

마포두레생협의 구교선 사무총장도 97년 공동육아로 아들 둘을 성미산에서 키우면서 마포 공동체에 매료됐다. 한 아이는 여전히 12년제 대안학교인 성미산학교에 다닌다. 그는 뜻있는 회원들과 음식물 쓰레기를 친환경적으로 처리해주는 지렁이가 든 화분도 함께 장만했다.

구씨는 집에서 마포FM(100.7MHz)을 들으며 하루를 연다. 1W의 소출력 공동체 라디오이다. 수신이 반경 1~2㎞에 그쳐 자주 끊기지만 일반방송에서 듣지 못한 지역의 현안 등 피부에 와닿는 내용을 접한다.

구씨는 “이곳은 의사소통이 가능한 친밀한 이웃이 있어 좋다”며 “만약 여기를 떠난다면 사람들과의 관계 문제로 불안감을 느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마포 공동체는 무엇보다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자주적으로 통제하는 것이 특징”이라며 “각자가 사는 동네를 이렇게 조직화하면 그것이 곧 다른 세상을 꿈꿀 수 있는 토대가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유씨는 “사람간 신뢰관계를 복원하고 사는 것이야말로 생태적인 삶”이라고 말했다.

〈전병역기자〉

 

 

 

[진보개혁의 위기] 4-9. 진보의 10대의제 : 빈곤을 잡아라

입력: 2006년 12월 14일 18:18:01

 

잔뜩 흐린날. 바람 마저 매섭다. 서울 지하철 교대역 11번 출구 앞. 깨끗하게 정리된 강남 거리가 펼쳐져 있다. 오가는 사람들에게서 연말 분위기가 난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에게 이 곳은 ‘절망의 길’이다. 100m쯤 되는 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서울 중앙지방법원 별관이 나온다. 그리고 별관 1층. 개인 파산신청을 받는 곳이다. 이 곳을 찾는 사람들은 서울에 사는 극빈자들이 대부분이다. 돈도 희망도 없으니 끝간 데 없는 채무독촉에서 해방시켜달라고 법원에 호소하는 것이다.

지난 6일 서울 중앙지법 별관 남관 1층. 종합접수실 왼편에 개인회생과 파산 등을 신청하는 창구가 있다. 대기표를 뽑아 든 뒤 자기 순서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10여명 남짓. 손에는 각종 서류를 들고 있다. 눈빛은 초조하다. ‘딩동’하고 차임벨이 울릴 때마다 사람들이 창구로 다가간다. 다들 표정이 무겁다. 웃거나 밝은 모습은 없다.

개인회생 81건, 파산·법인회생 399건, 각종 문건 안내 723건. 접수 순서를 알리는 전광판에는 다녀간 사람들의 숫자가 적혀있다. 오전 11시50분. 이날 오전에만 1,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찾았왔다. 법원 파산과 직원은 “파산 신청을 하는 사람들이 늘었다. 개인파산 신청자만 하루 200~250명에 달한다”고 전했다. 사람들이 몰리는 오후 3~4시쯤에는 업무 처리하느라 정신이 없을 정도라고 설명했다.

이모씨(42·여). 화장기가 없는 얼굴에 기미가 잔뜩 끼어 있다. 퍼머가 풀려 푸석푸석한 머리를 검은색 머리끈으로 질끈 동여맨 모습이다. 역시 파산신청을 하러 온 사람이다. 기자가 곁에 다가가 질문을 하자 대뜸 지갑을 열고 사진 한 장을 보여준다. 가족 사진이다. 본인과 세 아들이 사진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아들들이 착하고 공부도 잘 한단다. 한동안 아들 자랑을 하던 이씨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는 사연 많은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 놓았다.

남편이 자신의 인감을 가져가 대출도 받고, 사업도 했단다. 이혼한 다음에야 이 사실을 알았다. 남편 사업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빚은 1억원이 넘는다. 정상적인 직장은 잡을 수 없다. 월급에 압류가 들어가 있어서다. 낮밤 가리지 않고 일용직으로 뛰었다. 기초생활수급자로 나라 도움도 받고, 일도 억척같이 했다. 하지만 중학교, 고등학교를 다니는 아이들 때문에 어렵게 번 돈이 스펀지에 물 스며들듯 눈깜짝할 사이 빠져나갔다. 신용불량자가 됐다. 이씨는 “신용불량자여서 기록이 남을까봐 돈을 은행 계좌로 부치지도 못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돈을 봉투에 넣어서 직접 갖다주는 기분은 겪어 본 사람만 안다”고 토로했다. 파산신청을 한 뒤 이씨는 종종걸음으로 법원을 빠져나갔다. 법원이 알선한 변호사 무료 상담을 받기 위해서다.

이씨와 같은 개인파산 신청자 수는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파산신청자는 지난 11월말 기준으로 8만5천4백여명이다. 시행 초기인 지난 2001년에는 신청자가 672명이었다. 5년새 13배 이상으로 늘었다. 앞으로도 계속 증가할 것이란 게 일반적 전망이다. 그 만큼 삶이 갈수록 팍팍해질 것이라는 의미이다.

서울 강동구청 관계자들은 최근 개인파산·회생 설명회를 열었다가 깜짝 놀랐다. 설명회가 열린 구청 5층 강당에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300여 명이 몰린 것이다. 강의시간도 1시간이나 연장됐다. 구청 기획공보과 김현정씨는 “설명회 참석자는 관내 주민 뿐 아니라 인근 경기도 하남시 주민도 적지 않았다”고 전했다. 심지어 대구와 강원도에서 찾아온 사람들도 있었다고 했다. 김씨는 “어렵게 사시는 분들이 생각보다 너무 많은 것 같다”고 말했다.

개인파산자의 급증은 정부가 지난 2003년부터 신용회복 지원에 본격적으로 나선 데도 기인한다. 하지만 근본적 원인은 장기간 이어진 경기침체와 안정적인 일자리 부족, 소득재분배 실패 등이다. 한국빈곤문제연구소 류정순 소장은 2003~2004년 카드 대란을 오늘날한국 사회 빈곤문제의 원인으로 꼽았다. “외환위기 때 한번 크게 술렁거렸는데 그래도 그때 사람들은 벌어놓은 것이라도 있었다. 까먹을 재산이라도 있었던 것이다. 퇴직금이나 전세금이라도 있지 않았느냐. 하지만 지금의 신용 대란은 모아둔 돈을 다 까먹은 사람들이 카드 쓰다 빚더미에 올라 선 것이다. 탈출구 없는 빈곤이다.”

개인파산자 증가를 도덕적 해이 문제 차원으로 접근하는 사람들도 있다. 열심히 노력하면 빚을 갚을 수 있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고 파산신청을 해버리는 파산자 개개인의 무책임이 문제라는 것이다. 전성인 홍익대 교수(경제학과)의 입장은 다르다. 전 교수는 지난 10월 열린 경제정의포럼에서 이런 시각을 반박했다.

“가계부채 문제는 단순히 금융기간의 건강성 확보, 경제적 불안정 제거 등의 관점이 아니라 금융활동이 정지되면서 개인이 겪게 될 고통과 인격적 모욕을 완화해야 한다는 사회적 보험제의 관점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개인채무자의 도덕적 해이는 기업채무자의 도덕적 해이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적습니다.”

이인철 파산전문 변호사는 “파산신청 상담자는 대부분 사업 실패나 카드로 생활비를 메우다 채무 곤경에 빠진 사람들로 사정이 워낙 어렵다 보니 신청이 거의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정부는 노숙자나 기초생활수급자 등 빈곤층의 자활을 돕는 정책을 시행 중이다. 기술과 영업 교육 등을 통해 저소득층의 취업이나 창업을 지원한다는 취지이다. 이 사업에는 지난해 2천3백34억원, 올해는 2천6백55억원이 지원된다. 그러나 수혜자들이 일자리를 갖는 일은 드물다. 자활성공률이 2001년 9.5%를 기록한 뒤 떨어져 이후로는 해마다 5~7%대에 그치고 있다.

서울 용산 ‘다시 서기 상담보호센터’는 노숙인들의 자활을 돕고 있다. 노숙인들은 여기서 잠 자고, 씻고 세탁도 한다. 하루에만 200여명이 이용한다. 대부분 센터 관계자들에게 낯이 익은 사람들이다. 한 번 온 사람이 다시 찾는 경우가 많다. 노숙을 하게 되면 그 생활에서 빠져나오기 힘들다는 것을 웅변한다. 이 센터 김자옥 사회복지사는 이 서비스에 참여한 노숙자들의 형편을 이렇게 전했다.


“서울시에서 공공근로 형식의 자활 근로 서비스를 실시하고 있는데 노숙인들이 관심을 갖고 이 서비스에 참여하지만 실제로 빈곤에서 탈출하는 것은 어려워요. 주로 건설현장 등지에서 막일을 하는데, 한 달에 15~20일 밖에 일할 수 없을 뿐 더러 그나마 오전만 일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받는 돈은 40만~50만원입니다. 일을 하려면 주거지가 있어야 하는데, 쪽방 마련하는데 월 20만원 들고, 먹고 입고 하면 남는 돈이 없어요. 계속 그 일을 하며 지낼 수는 있지만 노숙자 신세를 벗어날 방법은 안됩니다.”

서울 강서 등천자활후견기관 장재승 실장은 “자활서비스가 효과를 보려면 자활하려는 동기를 부여하는 과정이 보완돼야 한다”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활훈련을 통해 일자리를 갖지만 일부는 후견기관을 돌아다니며 월 수십 만원의 지원금만 타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이렇게 해도 자활사업을 받는 사람들 자체가 대개 고령자나 여성 등이어서 성공률이 낮을 것으로 내다봤다.

‘빈곤해결을 위한 사회연대’ 유의선 사무국장은 정부의 자활사업으로는 빈곤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단언했다. “정부가 빈곤층에게 주는 일자리는 고용이 불안하고, 저임금에 지나지 않습니다. 저소득층을 일용직 노동자로 전환시키는 정책에 다름 아니죠. 또한 창업정책도 살벌한 경쟁시장에서 덜렁 가게 하나 마련해 주고 알아서 자립하라는 수준입니다. 창업지원자금도 결국 빚입니다.”

빈곤의 또 다른 문제는 대물림이다. 가난한 집 아이들이 양질의 교육을 받을 기회는 적다. 결국 소위 ‘명문대학’, 안정된 직장을 들어갈 수 없고, 결국 빈곤층으로 편입되는 악순환을 낳는다.

서울 신림동 거주 중 2년생 이모군(14)의 예를 보자. 그는 학원 종합반에 다니고 싶어 한다. 주변 친구들은 거의 다 다닌다. 아버지에게 말했지만 답은 없다. 방 두칸 짜리 전세 빌라에 사는 처지에 종합반 다닐 여유가 없는 것은 자신도 안다. 김군은 수학이 싫다. 교과서에 있는 문제에도 절절 맨다. 성적은 반에서 하위권이다. 학원에 ‘못 다니는’ 친구들하고만 어울린다. 그럼에도 김군은 집 근처에 있는 서울대에 가고 싶다. 아버지의 꿈이기도 하다. 하지만 최근 3년 동안 서울대 입학생 중 사회계층의 하위 20%에 속하는 빈곤층이 입학한 비율은 전체의 2%에 불과했다. 김군 아버지는 택시운전사. 2004학년도 서울대 신입생 조사에서 아버지 직업이 화이트 칼라인 경우는 67.%에 달했다. 블루 칼라는 서울대 학생의 부모에 어울리지 않는 직업이 돼 가고 있는 것이다.

빈곤층에 대한 정의는 명확치 않다. 정부는 최저생계비 이하 가정을 빈곤층으로 잠정 규정하고 지원을 하고 있다. 하지만 최저생계비의 몇 배가 되는 돈을 버는 사람들도 자신이 가난하다고 생각한다. 상대적 박탈감 때문이다.

7만 명을 대상으로 한 통계청의 ‘빈곤 인식’ 조사결과를 보자. 자신을 상류층이라고 답변한 사람은 1.5%였다. 중산층은 2003년 조사 때보다 2.8% 포인트 감소한 53.4%였다. 대신 하류층은 늘어 45.2%를 기록했다. 국민 절반 가량이 자신이 가난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 들어 ‘신빈곤’이라는 말이 자주 사용된다. 신빈곤층은 노동의 유연화로 인해, 일자리는 불안해졌지만 소비는 늘고, 물가가 오르면서 예전처럼 자신의 소득으로 원하는 만큼의 소비를 할 수 없게 된 계층이다. 한국도시문제연구소는 최근 ‘한국사회의 신빈곤’이란 책을 펴냈다.

이 책은 신빈곤이 상대적 박탈감에서 비롯된다고 규정했다. 신빈곤층의 주류는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하층민으로 내려온 예전의 중산층들이다. 인구 대다수가 빈곤층이던 1960~70년대의 절대적 빈곤과는 다르다. ‘빈곤해결을 위한 사회연대’ 유의선 사무국장은 “예전에는 실직을 하거나 아파서 일을 못하는 사람들이 빈곤층에 편입됐지만 이젠 ‘일 하는 빈곤층’이 늘어나고 있다”며 “이는 2000년대 이후로 새롭게 등장한 빈곤의 형태”라고 지적했다.

정부는 2004년 대통령 직속 빈곤격차·차별시정위원회를 만들었다. 하지만 빈곤문제 해결은 요원하다. 유의선 사무국장은 “정부 정책으로 빈곤층 문제를 푸는 데 한계도 있겠지만 위원회 내에서도 이견이 많아 재정경제부 등의 반대로 사업이 제자리 걸음인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

양승조 열린우리당 의원은 “결국 빈곤은 좋은 일자리 창출로 해결해야 하는데 우리당이 이 부분에 소홀했고, 실패했다”면서 “특히 중소 제조기업의 붕괴 등을 예상해 각종 지원책을 해야 했는데 타이밍을 놓친 감이 있다”고 말했다.

현애자 민주노동당 의원은 “빈곤의 양과 질이 매우 나빠진 상황”이라며 “진보정당인 민주노동당도 이런 문제에 대한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말했다. 현 의원은 “국회 보건복지위원회에서 활동하면서 기초생활보장 대상자 확대, 건강보험 급여확대, 국민연금 개혁 등의 문제에 대해 국회 내외에서 수십 차례 토론을 하고, 뛰어다니며 입법 추진을 했지만 결국 허사로 돌아가는 경우가 많았다”고 전했다.

현의원은 “앞으로는 복지예산 내에서의 증액이 아니라 예산배분시 복지 중심으로 근본적인 틀을 새로 짤 수 있도록 방안을 강구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참여연대 사회복지위 김다혜 팀장은 논리개발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복지 문제는 예산처와의 싸움입니다. 정부가 주장하는 성장을 우선하는 경제논리에 대한 반박 논리를 만들어야 하는데 치밀한 준비를 하지 못했지요. 그러다 보니 밀리곤 했습니다. 결국 일반 국민들도 정부의 경제논리에 동화되고, 진보진영의 주장을 단순 비판으로 치부하는 경향까지 생겼습니다.

빈곤 문제는 결국 원인을 따라 올라가면 주택문제와 사교육비 문제와 연결됩니다. 하지만 이런 부분을 사적인 영역으로 판단하는 바람에 문제의식이 부족했어요.”

〈황인찬기자 hic@kyunghyang.com

 

 

 

[진보개혁의 위기] “나라 도움 안받고 홀로서는 게 꿈”

입력: 2006년 12월 14일 18:18:37

 

남들은 그렇게 말한다. 나라에서 돈도 주고 일자리도 구해줘서 편하겠다고. 뭘 걱정이냐고.

기초생활보장수급자로 세 아이를 키우고 있는 전수현씨(36·여)는 이런 소리만 들으면 피가 거꾸로 선다.

“하루 종일 발바닥이 갈라지도록 뛰어다니고 일했지만 결국 수급자가 될 수 밖에 없었어요. 창피하게도 생각했어요. 아파도, 돈이 없어도 동사무소 문턱 넘는 일은 죽기보다 싫었어요. 하지만 아이들을 생각하면 그럴 수 밖에 없었어요. 아이들을 생각해서….”

적어도 전씨는 그랬다. 기초생활수급자란 딱지가 싫었다.

3년 전 남편은 하루 아침에 사라졌다. 집을 나가 연락을 끊은 것이다. 사업이 부도났다. 당시 전씨는 임신 7개월이었다. 5살, 4살인 딸 둘도 있었다. 망치로 머리를 맞은 것처럼 멍했다. 하지만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친정 어머니의 친구가 안산시 초지동 빌라를 보증금 1백만원, 월 10만원에 내줬다. 그마저도 보증금은 친정 어머니의 쌈짓돈으로 마련했다. 친정식구는 다들 여유가 없었다. 전씨는 안 그래도 살기 어려운 친정 식구들에게 짐이 되는 게 두려웠다. 아쉬운 소리 한 번 못했다. “정말 단돈 100원이 없는 때도 있었어요. 애들은 과자 사 달라고 졸라대는데, 정말 미치겠더라고요. 과자 한 봉지 사줄 수 없는 사람이 무슨 어미인지.”

아이들 때문에 일도 제대로 못했다. 전자제품 부품공장에 다녔다. 하지만 전씨는 아이들 때문에 오후 6시면 퇴근을 해야 했다. 아침에 출근해 한 달 꼬박 일해도 받는 돈은 60만원. 그나마도 공장측은 야근을 못하는 김씨를 해고했다. 이렇게 한 두 달 일하다 그만 둔 공장만 여러 곳이다.

10원 한 푼이 아쉽다. 쉴 틈이 없다. 해고됐을 때는 부업을 했다. 자동차 부품에 들어가는 철사를 끼는 작업이었다. 한 개 당 1원도 채 안 됐다. “새벽에 일어나 아이들 돌보고, 집안 일 하는 시간 빼고는 하루 4시간 자며 부업에 매달렸지만 한 달에 15만원도 못 벌었다”고 말했다.

그러다 일자리도 부업 일감도 없는 날이 이어졌다. 전씨는 동사무소를 찾았다가 우연히 기초생활수급자가 됐다. 전씨의 얼굴이 몹시 상해있는 것을 보고 동사무소 직원이 면담을 했다. 우연히 수급자로 선정된 것이다.

수급자로 선정된 전씨는 삶의 희망을 다시 찾기 시작했다. 김씨는 현재 안산시 초지동 종합사회복지관에서 단기 노인보호센터에서 일한다. 여기서 받는 60만원과, 수급자 지원금까지 합쳐 한달 수입은 1백만원 선. 초등학교 1학년이 된 큰 딸은 방과 후 센터가 운영하는 ‘무료 학습 교실’에 다닌다. 7살난 딸과 3살된 아들은 안산시가 운영하는 어린이교실에 다닌다. 끼니를 걱정하던 옛날에 비하면 사정이 나아졌다.

하지만 전씨에게 삶은 여전히 ‘푸른 빛’은 아니다. 전씨가 사는 연립 빌라 단지는 요즘 재개발이 추진되고 있다. 커가는 딸들에게 새 옷 하나 사주고 싶지만 그 때마다 손이 떨린다. 옷에 신경 쓸 나이가 됐지만 대부분 얻어입을 수 밖에 없다. 아이들이 자기 집이 가난하다는 걸 알게 되는 게 두렵다고 했다.

“부자가 되기를 바라지는 않아요. 사실 정부나 다른 분들에게 더 바라지는 못 하겠어요. 아이들도 커가는데 들어갈 데는 많고. 어쩌면 여기서 주저 않을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이를 악물고 할 겁니다. 내년에는 간호조무사 학원에 다닐 거예요. 받은 만큼 돌려주겠다는 다짐도 생겼습니다.”

밥도 안 먹고 점심 시간을 쪼개 만난 전씨는 일하러 돌아가기 전 한마디 덧붙였다. “사실 수급자가 되기를 원치 않는 사람은 많아요. 당장 먹고 살 방편은 생길 지 모르지만, 남의 도움을 받고 살아간다는 생각에 자존심이 깡그리 사라져요. 아이들이 수급권자라는 말이 뭔지 알기 전에 제 힘으로 서고 싶은 게 소망입니다.”

〈황인찬기자〉

 

 

[진보개혁의 위기] ‘비정규직 모범’ 네덜란드

입력: 2006년 12월 17일 16:51:01

 

네덜란드는 비정규직의 ‘천국’이다. 시간당 임금으로 볼 때 차별이 없다. 근로시간에 따른 차이만 존재한다. 유럽에서 드물게 근로자 파견제를 수용했지만, 4대 보험 혜택에서는 정규직과 대우가 동일하다. 유연안정성(Flexecurity)의 대표적인 모델로 꼽힌다.

네덜란드는 1980년대에 임시직, 파견직, 호출노동 등이 급속히 증가했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사회적인 보호는 무척 취약했다. 사회보장을 하려면 재정이 필요했지만 확충할 방법이 없었다. 이에 ‘경직됐다’는 비판까지 나올 정도로 직업 안정성을 보장받던 정규직 노동자들은 비정규 노동자들과 상생을 모색하며 밥그릇의 일부를 희생했다.

97년 노동법 개정에서 정규직에 대해 엄격한 해고제도를 완화하는 대신 비정규 노동자 보호를 강화하도록 한 것이다. 이에 따라 회사는 비정규 노동자를 24개월 이상 고용할 경우 의무적으로 정규직으로 전환해야 한다.

차별이 사라지면서 단시간 노동자의 노동시장 비중이 늘어났다. 2004년 현재 전체 노동자의 45.5%이며, 특히 여성노동자의 74.7%가 하루 중 몇 시간만 선택적으로 일하고 있다. 가사·육아를 노동과 병행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만족도가 높다. 전체 노동자 중 91%가 기업연금의 수혜를 받고 있다. 소외계층이 없도록 기업이 아닌 ‘산별’ 차원에서 강제적으로 연금을 채택토록 했다.

중소기업이 많은 덴마크는 고용보호수준이 OECD 국가 중 다섯번째로 낮다. 하지만 직장 불안정성도 OECD 국가 중 가장 낮다. 비결은 국가가 제공하는 일자리나 직업훈련기회에 응하고 구직노력을 계속할 경우 최장 4년간 실업급여가 주어지는 적극적인 노동복지 정책이다. 급여규모는 저소득층의 경우 순소득대체율이 90%에 달한다. 기업에는 유연성을 보장하는 동시에 국가가 노동자의 재취업 및 복지를 적극 지원하는 방식으로 노동자의 실직 불안감을 지운 것이다.

〈최민영기자〉

 

 

 

[진보개혁의 위기] 4-10. 진보의 10대의제 : 비정규직

입력: 2006년 12월 17일 16:51:07

 

윤금옥씨(47)는 9년째 ㄹ호텔 룸메이드로 일하고 있다. 50개 가까운 비품을 챙기고 45가지 사항을 점검하는 특급호텔 방 정돈이 호텔의 얼굴을 만든다며 자부심을 가져왔다. 하지만 2001년 이후 달라졌다. “호텔에서 룸메이드 업무를 외주화한다고 했어요. 2년간 고용도 보장해주고, 임금도 직접고용 수준으로 주겠다고 했죠. 100여명이 동의했어요. 외주화가 정확히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그렇게 했지요.”

이후 간접고용으로 바뀌었고 4년 동안 용역회사는 4번이 바뀌었다. 월급은 3년간 동결. 지난해 ‘일일 4시간 근무’로 계약된 룸메이드가 손에 쥔 기본급은 47만원. 월급은 많아야 1백만원. 신입은 60만~80만원이다. 정규직이었을 때는 연봉이 3천만원까지 올라갔었다. 불만의 기미가 보일 때면 회사측에서는 “아쉬워서 여기 일하는 거 아니냐”며 고용문제를 들먹였다. 지난 가을, 한계에 달한 룸메이드들은 노동조합을 결성했다. 평범한 아줌마였던 윤씨는 노조위원장을 맡았다. 그러나 원청업체에서 하청업체를 또다시 바꾸는 과정에서 그를 포함한 9명은 노조 핵심 인사라며 고용승계를 하지 않았다. 윤씨는 뒤늦게 후회했다. “괜히 노조를 만들었나 봐요. 노동청에서는 ‘우리도 방법이 없다’며 도움을 못주더군요.”

구로디지털단지에 있는 기륭전자의 김소연 분회장은 중소·영세기업의 현실을 이렇게 전한다. “요즘 1년짜리 파견계약이 어딨어요. 3개월, 6개월짜리가 넘쳐나요. 정규직인데도 아침조회 시간에 ‘아르바이트’로 일하라고 일방적으로 회사에서 통보를 하기도 해요. 그래도 울며 겨자먹기죠. 딱히 일자리가 없으니까요.”

구로단지에서 비교적 규모가 큰 기륭은 노동부로부터 불법파견 판정을 받고서도 도급회사 4개 업체에서 노동인력을 공급받고 있다. 김분회장은 “인건비를 줄이고 노동자들의 단결을 막으려는 위장도급”이라고 주장했다. “상여금은 꿈도 못꿔요. 특근 안하면 생활이 안돼요. 1주일 내내 일해야 1백만원쯤 받아요. 회사도 사람들을 함부로 대하고요.”

근시안적인 경영이 근로의욕을 꺾는다고 김분회장은 말했다. “그전에는 문제 있으면 ‘불량이다’ ‘고쳐달라’ 말할 수 있었지만, 파견이고 보니 내 회사라는 인식이 없어요. 그런 회사가 장기적으로 발전할 수 있겠어요.” 현재 구로디지털단지 내에서는 20~30명되는 사업장에서도 파견직을 쓰는 경우가 많다. 쉽게 자르고, 다시 쉽게 고용하기 위해서다.

비정규직 문제는 단순한 고용문제로 그치지 않는다. 경제·사회적 불안 요소로 연결된다. 경제개발협력기구(OECD) 국가의 비정규직 비율은 평균 15%지만 한국은 50%를 넘는다. 윤진호 인하대 경제학부 교수는 비정규직이 결코 ‘싼 값’이 아니라고 설명했다. “비정규직 증가는 단기적으로 기업의 비용을 절약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사회적 비용이 늘어납니다. 실업률, 소득 불평등이 심해지면서 범죄, 질병, 이혼, 자살 등 사회적 문제가 발생하죠. 이는 복지비용이 늘고 그만큼 세금을 더 걷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근로의욕, 기업의욕도 해칩니다.”

그러나 비정규직 문제는 오히려 뒷걸음질치고 있다. 지난달 국회를 통과한 비정규직 3개 법안은 노동계에서 ‘개악안’으로 평가받는다. 민주노동당 이상훈 정책연구원은 “기간제 근로자의 사용기한을 2년으로 정한 것은 오히려 비정규직을 증가시킬 뿐”이라며 “사용사유를 제한하지 않는 한 비정규직 문제는 해결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법안이 국회에서 쉽게 통과됐다. 그 배경에는 비정규직 문제를 제대로 의제화하지 못한 진보세력의 잘못된 접근법이 있다. 이상훈 연구원은 “비정규직 문제가 사회 양극화에 대한 해법이라는 것을 부각시키지 못하고 단순히 노동권 문제로 협소하게 접근했다”고 반성했다.

취임 초기 ‘비정규직의 눈물을 닦아주겠다’며 노동계에 기대를 품게했던 노무현 대통령과 여당의 정책 방향이 신자유주의 기조로 바뀐 것도 노동계의 입장을 더욱 고립시켰다. 전국비정규연대회의 오민규 사무국장은 “2004년 9월 이번에 통과된 법안이 제출되면서 노동계와 선긋고 가겠다는 정부의 의지가 분명히 드러났다”고 평가했다. 한국비정규센터 남우근 사무국장도 “정부는 비정규직 문제를 사회 양극화를 해결하겠다는 것이 아닌 노동시장 유연성 확대 측면으로만 접근했다”고 지적했다.

노동운동의 중심 세력인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이 정규직 노동자 중심으로 구성돼 있어 비정규직 문제에 전력을 기울이지 못한 것도 문제다. 민주노총 조합원 중에서 정규직의 비중은 90%에 이른다. 오민규 사무국장은 바로 이런 점이 “민노총과 민노당의 심각한 위기”라고 주장한다. “강한 노조를 갖고 있는 정규직은 비정규직을 희생하는 조건으로 고용조건과 임금을 보장받는 데 합의합니다. 사용자와 정부도 이 같은 관리 방법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정으로 비정규직은 스스로 문제를 푸는 길을 찾을 수밖에 없다. 오민규 사무국장은 “비정규직이 노조를 결성, 요구하는 바를 이뤄내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비정규직의 조직화는 물론 쉽지 않다. 비정규직이 노조를 결성하면 바로 해고당하고 아웃소싱업체는 계약을 해지당한다. 그래도 비정규직의 조직화가 ‘더디 가지만 가장 빠른 길’이다.

비정규직 문제를 사회적 의제로 전환하는 것도 중요한 과제이다. 신광영 중앙대 사회학 교수는 “비정규직 문제는 사회 전체를 불안하게 만들고 위기로 빠뜨리는 구조적 문제라는 인식을 해야 한다”면서 “ 기업, 노조, 시민 사이에서 단기 기업 이익이 아닌 사회 전체를 생각하는 합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최민영·임영주기자 min@kyunghyang.com

 

 

 

[진보개혁의 위기] 사회적 ‘대타협’ 하자

입력: 2006년 12월 19일 18:01:28

 
지난달 27일 울산. 현대자동차 노동조합 상임집행위원들이 모여 있는 자리에서 민주노총 초대 위원장을 지낸 바 있는 민주노동당 권영길 의원단대표가 마이크를 잡았다. 팽팽한 긴장감이 돌았다. “우리 노동운동에 대해 사회적 책임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노동 내부에서 보다 밖에서 더 그렇습니다. 그런 말을 들으면 일면 분하고 답답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언제부터인가 민주노총이 사회발전을 가로막고 있는 것처럼 되어 있기 때문이죠. 가슴이 아픕니다. 하지만 실정과 다르더라도 이를 극복하는 게 중요합니다. 노동운동이 어려울 때 큰 역할을 했던 현대자동차 노조가 노동운동의 새로운 미래를 위해 나서주길 바랍니다.”
2004년 6월 4일 첫번째 노사정대표자회의에 앞서 참가자들이 손을 마주 잡고 있다. 왼쪽부터 박용성 대한상의회장, 김금수 노사정위원장, 이수호 민주노총 위원장, 김대환 노동부 장관, 이수영 경총회장, 이용득 한국노총 위원장. /경향신문 자료사진

현대차 노조가 사회적 연대를 위해 ‘국민연금보험료 지원방안’에 동참할 것을 호소한 것이다. 한마디로 정규직 노동자가 자기 몫을 줄여 저소득 노동자를 도와주자는 제안이다. 국민연금에 가입하지 못한 저소득 노동자는 4백23만명. 이들에게 2008년부터 5년간 보험료를 지원하려면 최소 8조5천억원이 소요된다. 이중 3조원은 정규직 노동자가 미래 급여를 줄여 마련하고 나머지는 고소득자의 보험료 누진율을 올리고, 국민연금기금 이자 차익으로 충당한다는 구상이다. 그리고 대형 사업장 중심의 불평등한 임금인상 방식을 수정해 임금격차를 완화하고, 노동자들의 세금 기여 확대를 통해 고소득자들의 의무를 더 크게 요구하는 부유세 도입 등도 추진할 계획이다.

민주노동당의 이 사회적 연대방안은 국가와 자본을 상대로 양보를 요구하고 투쟁하는 방식이 아니라, 자기 희생을 통해 사회적 타협을 유도하고 주도해 나가겠다는 진보진영의 대담한 최초 시도라는 점에서 주목되고 있다. 노동계의 반응은 미묘하고 복잡하다. 민주노동당이 산별노조 대표자들을 대상으로 설명회를 했을 때는 “우리(노조)가 의사협회나 약사협회와 다르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는 긍정론이 나왔다. 그러나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에 대한 사회적 비판을 그대로 수용함으로써 보수적인 ‘노동 때리기’에 동조하는 꼴” “정부의 반노동 정책이 노골화된 시점에 어울리지 않는 제안”이라는 비판도 많다.

이런 반응에서 보듯이 사회적 타협을 위한 한국 사회의 토대는 매우 취약하다. 노동에 대한 자본의 절대적 우위, 노동과 정부 간의 불신과 배척, 정부의 노동배제 정책, 낮은 노조 조직률, 노동계의 대표성 문제, 내부 정파갈등 등 ‘숙제’가 산적해 있다. 그리고 “정부는 사회적 대화를 위한 능력도 의지도 철학도 없다”(한국노동교육원 박태주 교수). 자본은 “노동이 사회적으로 고립되면서 사회적 타협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진보정치연구소 조진한 상임연구위원).

노·사·정간 사회적 타협을 위한 첫 시도는 1998년 1월 외환위기를 계기로 출범한 노사정위원회 활동에서 찾을 수 있다. 경제위기는 고용불안과 대량실업, 대외신인도 추락, 정치·사회적 균열을 유발했다. 그러자 세 사회 세력인 노·사·정이 대화와 타협을 통해 이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조성됐다. 하지만 다음해 2월 민주노총은 ‘정리해고 수용’이라는 ‘아픈 상처’만 간직한 채 노사정위원회를 탈퇴했다.

실패의 가장 큰 원인은 정부의 노동배제적 정책이다. 노동과 자본을 중재할 만한 ‘공정한 조정자’ 역할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참여정부는 노동운동 세력에 대한 인내심 부족 끝에 적대정책으로 돌아섰다. 초기 ‘사회통합적 노동정책’을 기치로 내걸고, 노동계의 원로인 김금수씨를 노사정위원장으로 임명하는 등 사회적 타협 의지를 보였던 참여정부였다. 하지만 2003년 6월 철도노조 파업에 대한 공권력 투입으로 정부는 인내의 한계를 예상보다 빨리 드러냈다. 특히 2004년 노사정위원회 참여를 공약으로 내걸고 당선된 민주노총 이수호 집행부가 출범하기도 전에 정부는 민주노총을 배제한 채 ‘2·8 일자리 창출을 위한 사회협약’을 체결했다. 그해 10월에는 양대 노총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비정규직 보호입법안을 국회에 상정, 완전히 등을 돌렸다. 참여정부 초기 노사개혁TF팀장을 지낸 박태주 교수는 “이 정권에서 사회적 타협은 불가능하다”고 단언했다. 그 이유는 참여정부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제출한 보고서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보고서는 민주노총을 ‘암적 존재(scourge)’로 규정하고 ‘죽음에 이르는 파업전략(strike to death strategy)’을 구사한다면서 민주노총에 대한 극도의 적대감을 드러냈다. 민주노총의 참여를 배제한 채 한국노총과 협의를 거쳐 확정된 비정규직 보호법을 두고 “충분한 대화와 타협을 통해 공감대를 형성한 명실상부한 사회적 대화의 결과물”이라는 청와대 국정브리핑의 주장은 현정부 노사관계의 현실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조진한 연구위원은 “정부는 한쪽 팔로는 재벌을 껴안고 한쪽 발로는 노동을 차고 있다”면서 “노대통령은 취임 이후 재벌들과는 수차례 회동했지만 노동계와 직접 만나 진지한 이야기를 나눈 적은 한 번도 없다”고 말했다.

대화와 타협을 위한 준비가 부족하기는 노동계도 마찬가지다. 내부 정파갈등, ‘총파업’ 관행에 따른 경직성과 전략적 판단 부재로 대화의 분위기를 조성할 능력이 없는 것이다. 민주노총은 2005년 사회적 대화 체제로 복귀를 선언한 지도부를 당선시킨 이후에도 노사정위원회 참여를 결정하려던 대의원대회를 연이어 세 번이나 폭력사태로 무산시켰다. 이는 대중으로부터의 고립을 가속화시켰다. 당시 위원장이던 이수호씨는 지난달 30일 “정파적 대립구도 때문에 ‘사회적 타협’은 훼절이라는 비난을 받고, 결국 무조건 싸워야 한다는 강경론만 우세해진다”고 비판했다. 정부의 반(反) 노동정책에 총파업으로 맞서고, 대중은 지치고 파업의 의미는 사라지면서 노동세력은 사회적으로 고립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현실이 이렇다고 해서 ‘사회적 타협’의 필요성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먼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대응하기 위해 필요하다. 박태주 교수는 “노·사·정이라는 사회적 주체가 세계화를 어떻게 인식하고 대응하는가, 그 과정에서 어떻게 서로 대화하며 타협하는가에 따라 세계화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세계화에 대한 사회적 대응이야말로 ‘87년 노사관계 체제’를 ‘2007년 체제’로 이행시킬 핵심적 연결고리”라고 말했다. 특히 박교수는 “세계화에 대한 노동조합의 지지와 참여를 이끌어내지 못하면 정부와 사용자측이 추진하는 세계화 전략은 노사관계의 덫에 걸릴 수 있다”며 정부의 노동정책 전환을 조건으로 제시했다.

사회 세력간 타협은 양극화나 비정규직 양산 등으로 상징되는 사회해체를 막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분열과 대결 구도에서 심화되는 ‘노동의 고립’ 현상을 그대로 두고는 그런 사회문제를 풀 방법이 없다. 그런 조건에서는 노동자의 이익을 실현시킬 수도 없고, 사회적 발전도 이룰 수 없다. 김형기 경북대 교수는 “노·사·정·민 간의 사회적 대타협 없이는 진보적 사회발전을 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무엇보다 노동문제는 노동자라는 특정 집단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노동문제는 사회적 갈등의 축이자 원천으로서 사회모순이 응축되어 있는 공간이다. 노동문제로 인한 갈등은 사회 평화, 산업 평화를 깨뜨리고, 이념적 대결을 부추기며 적대적 정치의 토양을 제공한다. 그러나 사회적 대타협은 생산, 사회복지, 대화의 정치, 진보적 사회 발전의 원동력이 된다. 고려대 최장집 교수는 “노동문제가 해결되면 다른 많은 것들을 풀 수가 있다”면서 “그러나 이것을 못 풀고서는 사회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사회적 타협의 제1조건인 노동정책 전환이 이루어지도록 정부에 대한 사회적 압력을 가하는 것이 절실하다. 노동계의 변화도 요구된다. 민주노동당이 제시한 사회연대 전략의 성패는 노동계의 전략적 판단이 가능한지를 판단하는 시금석이 될 것이다. 오건호 전문위원은 “(노동계도) 사회적 대화와 조정을 거부하면서 스스로에게 맨 족쇄를 풀고 진취적으로 가야 한다”며 “사회적 연대전략은 총파업 같은 ‘기동전’에만 집중할 게 아니라 정책적 콘텐츠와 대중의 지지를 바탕으로 한 ‘진지전’을 병행하자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박영환기자 yhpark@kyunghyang.com

 

 

[진보개혁의 위기] ‘연대’가 필요한 때다

입력: 2006년 12월 19일 18:04:20

 

〈최태욱/ 한림국제대학원대 교수·국제정치경제〉

한미FTA 이슈가 온 나라를 시끄럽게 하고 있지만 그것이 우리 사회에 미치는 긍정적이고 건설적인 효과도 있다. 무엇보다 한국 사회의 미래상에 대한 심각하고 구체적인 논쟁을 촉발케 했다는 점이다. 미국과의 경제통합은 결국 한국의 사회 및 경제체제를 미국화로 치닫게 할 것인 데, 그것이 과연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이 동의해줄 수 있는 것인지, 아니라면 그 대안은 무엇인지 등에 관한 논의가 활발하다.

자본주의에는 여러 유형이 있다. 예컨대, 영미식이라고 불리는 자유시장경제체제와 유럽식이라 불리는 조정시장경제체제가 있다. 영미식은 시장과 자본의 자유를 최우선시 함으로써 경제의 효율성을 강조하는 반면, 유럽식은 국가나 사회에 의한 시장의 조정을 장려함으로써 사회공동체의 유지를 도모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들 간에 소위 ‘자본주의 표준경쟁’이 일고 있다는 점이다. 자신들의 자본주의가 세계 표준으로 설정될 경우 그 표준의 고안자 혹은 선도자로서 얻는 이익이 상당할 것임을 서로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서남포럼 주최로 지난 13일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열린 ‘동아시아 연대운동의 현황과 전망’ 학술회의. /경향신문 자료사진
이 경쟁에서 미국이 유럽에 비하여 훨씬 공세적이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유일한 경쟁상대인 유럽조차 수세에 몰리고 있는 상황에서 여타 지역이나 국가들이 미국의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압력에 거의 무방비로 노출돼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1980년대의 중남미 그리고 1990년대의 동아시아 국가들이 IMF 관리체제 하에 들어가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을 강요당한 것은 그 실상을 여실히 보여주는 예이다. 우리 역시 IMF 구조조정을 뼈아프게 경험했고 이제는 다시 FTA 방식에 의한 미국의 압력에 직면해 있다. 만약 우리가 우리에게 가장 합당한 자본주의 유형을 스스로 선택하고 그 성취를 위해 필요한 효과적 기제와 유리한 환경을 만들어가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국 미국식 자본주의로 살아갈 수밖에 없을지 모른다. 물론 미국화가 이로운 것이라면 문제될 것은 전혀 없다. 그러나 문제는 대부분의 한국인들에게 미국화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특정한 자본주의 유형은 특정한 복지체제 혹은 민주주의 형태와 친화성을 갖는다. 조정시장경제의 국가들은 대부분 사회민주주의나 조합주의적 복지체제를 발전시키고 있다. 약자에 대한 배려가 보편주의적 복지정책으로 제도화돼 있는 것이다. 한편, 자유시장경제는 자유주의 복지체제로 연결되는 경향이 강하다. 복지의 질과 양 조차 시장에서 결정되는 것이 원칙이므로 있는 자는 최상의 복지를 누릴 수 있으나 없는 자는 누군가의 시혜만을 바라보아야하는 굴욕적 처지에 빠지게 된다. 전자의 민주주의가 보다 참여적이고 포괄적이라면 후자의 민주주의는 배타적이거나 제한적이기 마련이다. 노동이나 농민 혹은 중소상공인들과 같은 약자집단들의 실질적 정치 참여는 당연히 전자의 민주주의에서 제대로 보장된다. 그들에 대한 사회적 보호가 더 튼실할 것임은 물론이다.

우리가 미국식 자본주의로 갈 경우 우리 민주주의는 사회경제적 약자들을 구조적으로 배제하고 소외시키는 절름발이 민주주의로 전락될 가능성이 크다. 사회안전망이나 복지체계의 미비로 인해 가뜩이나 심각한 수준에 있는 사회양극화 현상은 현재의 미국이 그렇듯이 당연한 현실로 고착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미국과 달리 격차 수용 정도가 매우 낮은 사회이다. 미국이 갖고 있는 다양한 인종, 광활한 영토, 무한의 내수, 최강의 군사력, 그리고 세계기축통화의 발행권 등 여러 형태의 격차 용인 기제가 우리에겐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는 배고픈 것은 참아도 배 아픈 것은 참지 못한다고 하지 않는가. 양극화와 격차 확대를 당연시하는 미국화를 우리가 수용하기 어려운 까닭이다. 그렇다면 이제 미국화의 압력을 피할 수 있는 길을 심각히 모색해야 할 때이다.

이 지점에서 동아시아 연대의 필요성이 재론된다. 유럽인들이 미국화의 압력에서 자유로울 뿐 아니라 심지어 미국의 대안 세력으로까지 발전할 수 있게 된 데에는 무엇보다 그들 간의 강력한 연대가 있었다. EU는 그들의 공동체적 연대가 제도화된 결정체이다. 최근에는 중남미 국가들도 과거의 무방비 상태에서 벗어나고자 중남미 연합을 도모하고 있다. 그들은 일국 경제나 일국 민주주의로서는 미국의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압력을 떨쳐내기 어렵다는 인식을 공유하고 있다. 동아시아 국가들 역시 1990년대 말의 외환위기를 겪으며 공세적 세계화 압력에 대한 지역주의적 공동대응의 필요성을 절감한 바 있다. ASEAN+3을 중심으로 동아시아공동체 형성 논의가 전개된 핵심 배경이었다. 그리고 그 논의 전개의 선두에는 한국의 김대중 정부가 있었다.

한국의 민중가요 ‘일을 위한 행진곡’이 수록된 태국 노동자밴드 파라돈의 음반 표지.
그런데 요 몇 년 사이 동아시아연대론은 그 동력을 상당히 잃고 있다. 한국은 안보 중심 담론인 동북아시대 구상에 매몰됐고, 일본은 미국과의 일체화 길을 걸으며 중국과의 대립을 심화시켰다. 그렇다고 ASEAN이 자체적인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것도 아니다. 미국화의 압력에 직면해 있는 우리 스스로는 물론 동아시아 전체의 미래를 위하여 이제 한국의 국가와 사회가 다시 나서야할 때이다. 우리 국가는 중-일 간 및 동북아-동남아 간의 교량 역할을 강화함으로써 역내 국가들의 협력과 연대의 틀을 유지 발전시켜야 하며, 우리 사회는 그 연대의 내용을 구체화하는 작업에 몰두해야 한다. 특히 중요한 것은 후자, 즉 무엇을 위한 연대인지를 분명히 하는 작업이다.

동아시아 연대는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동아시아 표준을 설정해가기 위함이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동아시아의 다른 나라들에게도 미국의 표준은 맞지 않는다. 동아시아인들은 대체로 이(利)보다는 의(義), 그리고 효율성보다는 형평성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동아시아의 표준 설정 작업에는 분배와 형평 그리고 약자에 대한 배려의 가치를 중시하는 진보의 특징이 반영돼야한다. 동아시아의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는 진보주의적이어야 합당하리라는 것이다. 그런데 진보주의적 표준의 형성과 공유는 일국의 노력으로서는 불가능하다. 일국의 진보는 미국이 주도하는 신자유주의 즉 신보수주의 세계화 압력에 구조적으로 취약한 것이 작금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세계화 압력은 기본적으로 일국에 대하여 개별적으로 가해진다. IMF를 앞세울 경우에도 소위 ‘창구일원화’ 원칙에 따라 IMF와 해당국만이 양자적으로 교섭하게 하며, FTA 협상 역시 양자주의가 원칙이다. 복수나 다자주의 환경에서 가능한 상대국들의 집합적 행동은 미국의 압력 효과를 감소시키기 때문이다. 이는 개별 대응의 취약성과 집단 대응의 유효성을 동시에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한국의 진보는 독자적으로는 동아시아의 표준은커녕 스스로의 것도 만들어 내거나 지켜낼 수 없다. 진보를 표방했던 김대중과 노무현 양 정부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를 추진하고 있는 모습은 사실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동아시아의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는 오직 연대를 통할 때만이 스스로에게 가장 적합한 형태와 속도로 발전해갈 수 있다.

 

 

 

[진보개혁의 위기] 국경 없는 사회문제 국경 넘어 ‘한몸’ 대처

입력: 2006년 12월 19일 18:04:30

 
‘동아시아’라고 하면 수출시장으로만 이해되는 우리 현실에서 ‘동아시아 연대’라는 말은 아직도 생소한 감이 있다. 하지만 최근 동아시아 연대는 진보 진영의 새로운 전략으로 부상하고 있다. 다양한 영역에서 새로운 방식의 연대 활동이 활발하다.

최근 서남포럼에서 펴낸 ‘2006 동아시아연대운동단체 백서’에는 동아시아 연대 활동을 하는 단체 73개가 소개돼 있다. 여기에는 참여연대, 민주노총, 환경운동연합 등 기존 시민운동 단체들도 포함돼 있지만, 인권과 평화를 위한 국제민주연대, 베트남을 이해하려는 젊은 작가들의 모임, 한국동남아연구소, 아시아평화와역사교육 연대 등 동아시아를 중점으로 하는 단체들가 많다.

김혜정 환경운동연합 사무총장은 “환경운동은 문제 자체가 지구적인 문제여서 출발부터 국제연대가 자유로웠다”면서 “특히 동아시아 국가들은 황사와 사막화 문제 등으로 밀접하게 연관돼 있어 공동의 대안 모색이 불가피하다는 점을 공감하고 있다”고 말했다.

각 나라의 시민사회와 국가의 관계, 시민운동의 특성 등이 달라 국제연대가 순조로운 것만은 아니지만 환경운동의 경우 이제 안정적인 대화의 채널을 확보했다. 한·중·일의 환경단체들은 각국의 대표적인 환경단체 주도로 만든 다국적 환경정보 사이트인 ‘인바이로아시아(EnviroAsia)’를 통해 매주 3개국 언어로 정보를 공유하고 있다. 이 사이트를 통해 ‘에어컨 설정 온도 높이기’ ‘원자력발전 반대’ 등에 대한 아이디어를 주고 받고 공동 보조를 취한다.

지난 13일 서울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열렸던 ‘2006년 동아시아연대의 현황과 전망’ 포럼의 휴식시간에 귀에 익은 노래가 연주됐다. ‘임을 위한 행진곡’ 비디오였다. 놀랍게도 한국어 가사가 아니었다. 태국 민중가요 밴드 부른 태국어 ‘임을 위한 행진곡’이 태국 노동박물관에서 연주되는 모습을 담은 것이었다. 이 장면을 담아온 전제성 전북대 교수는 “태국 노동자 밴드가 부른 이 노래에는 아시아 연대에 대한 희구가 담겨 있다”고 말했다. ‘운동의 수출’이라는 비판이 존재하지만 한국 노동운동의 경험은 동아시아 다른 국가들에게도 많은 참고가 되는 것은 사실이다.

노동운동의 연대는 해외 진출 한국기업들의 부당노동행위를 감시하는 것을 중심으로 이뤄진다. 최근 언론을 통해 본격적으로 공론화된 대우인터내셔널의 미얀마 가스전 개발 사업의 문제(경향신문 12월8일자 1면 보도)를 끈질기게 추적해온 국제민주연대가 대표적이다. 불과 연간 3천만원의 예산에 상근자 두 명, 약간명의 비상근자로 이뤄진 이 단체는 한국 또는 다른 아시아 국가에서 활동 중인 미얀마 민주화 운동 인사들의 도움을 받아 현지조사를 수차례 했다. 조사대상에는 필리핀, 스리랑카, 방글라데시도 포함된다. 그 과정에서 공고히 한 네트워크를 활용해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국제기준을 정리하는 사업도 벌였다. 민주노총 역시 지난해 10월 태국에 현지법인을 둔 ‘삼성 일렉트로-메카닉스’가 현지 노동자들이 노조를 설립하려 하자 수당과 복지가 떨어지는 하청업체로 부당전출시킨 편법 조치 등을 고발하는 보고서를 내기도 했다. 최미경 국제민주연대 사무국장은 “해외 한국기업의 인권 문제를 우리가 감시하는 이유 중 하나는 한국에서 본사에 접근이 쉽다는 장점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미얀마 출신 이주노동자로 한국에서 미얀마 민주화운동을 하고 있는 마웅저씨는 “우리들의 도움으로 ‘버마’(현 독재정권을 인정할 수 없다며 이 명칭을 고집한다)에 들어갔다온 한국인들이 지난 3년간 100명이 넘는다”며 “한국의 시민사회 덕분에 버마가 더 투명하게 변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밖으로 나가지 않더라도 이른바 ‘우리 안의 아시아’에 더욱 관심을 갖는 연대 활동도 활발하다. 40만명을 넘어선 국내 이주노동자들의 대다수는 아시아 출신이다. 외국인 이주여성의 인권 보호와 권익 신장을 위한 일을 하는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가 대표적이다. 국제결혼 여성들이 겪는 가정폭력과 성폭력을 상담하고, 이들의 모성보호와 무료진료 등을 한다. 한국염 대표는 “21개 국가에서 온 외국인 여성노동자 15만명의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다 보니 운명적으로 아시아의 21개 국가 여성들과 연대할 수 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동아시아 연대 활동은 반전평화, 인권일반, 노동, 여성과 소수자, 환경, 문화와 학술, 국제개발협력, 재외동포 등 서로 다른 분야에서 다양한 목표를 지향한다. 하지만 진보 운동의 역량이란 한 나라 내에 갇히지 않고 국경을 넘어서 약한 자들의 연대를 이룰 때 비로소 힘을 얻고 보편적인 흐름을 만들 수 있다.

〈손제민기자 jeje17@kyunghyang.com

 

 

 

[진보개혁의 위기] 5-1. 진보의 확장과 심화

입력: 2006년 12월 19일 18:29:09

 
‘진보의 가치를 확장하고 심화시키는 것.’ 지칠 대로 지친 진보운동 진영이 다시 힘을 얻어 한국 사회의 건강한 비전을 제시하기 위해 짜야 될 전략의 핵심이다. 우리 사회에서 가장 소외 받고 차별 받지만 목소리조차 낼 수 없었던 비정규직이나 이주노동자와 같은 사회적 약자들이 진보운동의 중심으로 나와 진보운동의 새로운 동력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진보의 가치는 거대담론에만 그쳐서는 안된다. 생활세계로까지 내려와 우리 안의 보이지 않는 억압, 이중적 행태를 깨고 깊숙이 침투해야 한다. 진보운동 진영은 투쟁을 위한 투쟁이 아니라, 사회 세력간의 대타협을 주도해 진보적 발전의 토대를 준비해야 할 때가 왔다. 미국 따라하기, 미국닮기에 골몰했던 한국사회의 좁은 상상력을 벗어나 우리의 터전인 동아시아 지역의 민중과 연대하며 진보운동의 외연을 넓히는 것도 진보진영의 과제이다.

KTX 전 승무원 100여명이 지난 9월 28일 국회 앞에서 포승으로 몸을 묶은 채 침묵시위를 하고 있는 모습(왼쪽)과 해고 KTX 승무원으로 시위대의 일원이던 오미선씨가 지난 7일 서강대에서 강의하고 있는 장면을 합성했다.
#‘승무원에서 대학강사로’

“여러분들은 졸업 후에 다들 대기업에 취직할 것 같죠. KTX 승무원의 90% 이상이 4년제 대학 졸업생인 것 아세요? 저 역시 건국대 98학번이고요. 대학 다닐 땐 돈 없고, 빽 없고, 배우지 못한 사람들만 비정규직이 되는 줄 알았어요. 노동운동의 ‘노’자도, 여성문제의 ‘여’자도 몰랐어요. 스타크래프트나 DDR, 소개팅 그리고 내 앞날에만 관심이 있었을 뿐이죠.”

지난 7일 서강대의 한 여성학개론 강의실. 강단에 선 오미선씨(27·여)의 이 말에 다소 심드렁하게 앉아 있던 학생들이 의자를 바짝 당겨 앉는다.

오씨는 불과 2년 반 전 ‘지상의 스튜어디스’ ‘KTX의 꽃’ 등 화려한 찬사를 받으며 당당하게 사회생활을 시작한 KTX 승무원이었다. 노조를 조직해 해직된 300여명의 비정규직 승무원들이 차가운 길거리로 나와 파업을 한 지 300일이 다 된 지금 그는 “당신도 언제든 비정규직이 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대학 강의실에서 전하고 있다. 오씨는 10월30일 중앙대를 시작으로 한달 남짓 동안 벌써 20여차례 대학 강의를 한 베테랑 강사다. 서울대와 성공회대, 이화여대, 전남대 등에서 특강 요청이 하루가 멀다하고 들어온다.

오씨는 주로 정치학 또는 여성학 개론 수업 등에서 특강을 한다. KTX 승무원의 예를 들어 ‘비정규직’ 또는 ‘간접고용 노동자’(하청노동자)들이 어떻게 노동시장에 자리매김되고 있는지, 그 가운데 여성이 얼마나 많은지 등에 대해 설명하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이른바 ‘서울소재 주요 4년제 대학’ 학생들에게 비정규직 문제는 아직도 남의 일만 같다. 하지만 오씨의 강의를 들은 학생들의 생각은 조금씩 바뀐다.

“꿈 많은 20대의 여자 승무원들이 아직도 100명이나 남아 추운 날씨 속에 300일 동안 농성을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생각해 보셨어요? 한 인간이 한 인간을 지배하고 노예로 부려먹을 수 있는 것에 대해서….”

오씨는 철도공사의 자회사(외주하청)인 KTX관광레저에 정규직(간접고용)으로 취업해서 승무원 일을 하는 것이 왜 철도공사 비정규직(직접고용)보다 못한지를 설명한다.

“KTX 승무원들은 입사 당시 1년간 근무하면 정규직 전환이 보장되는 철도공사 비정규직인 줄 알았지만 사실은 홍익회라는 자회사의 비정규직이었어요. 성희롱을 당해도, 생리휴가를 못챙겨도, 정당한 수당을 못받아도 어느 쪽도 우리를 책임져 줄 수 없었던 거죠. 이번에 통과된 비정규직 법안도 사실 하청노동자를 늘림으로써 비정규직 수를 줄이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눈속임이에요.”

오씨는 “승무원이라는 직업은 한번 쓰고 버리는 ‘티슈’와 같은 존재”라며 “안타깝게도 티슈 인생은 앞으로도 계속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큰 박수와 함께 강의는 끝났다. 강의 도중 오씨가 틀어준 승무원의 투쟁을 담은 영상물에 눈물을 훔쳤던 몇몇 학생들이 남아 매주 금요일 광화문 사거리에서 열리는 KTX승무원 문화제 행사에 함께 가자고 약속했다.

서강대 4학년 김이슬씨(23·여)는 “지금까지 비정규직 문제라고 하면 나와 무관한 일로 생각했는데 이 강의를 듣고 생각이 바뀌었다”며 “KTX 승무원들의 직접고용 복직이 갖는 상징성이 크고 그것이 곧 나의 일일 수도 있는 만큼 나도 이 분들께 힘을 보태고 싶다”고 말했다.

#‘스펀지 공장 노동자에서 웹마스터로’

13일 저녁 서울 대방동 여성플라자.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처음엔 잘 몰랐는데 한국도 알고보니 좋은 사람들이 참 많은 곳인 것 같아요.”

5인조 록그룹 ‘스탑 크랙다운(그만 좀 탄압해요)’의 멤버로 이날 키보드를 연주한 해리 켄 아흐마드(33)가 무대에서 내려왔다. 그는 인도네시아 출신 이주노동자다. 5년 전 산업연수생으로 한국에 처음 와 경기 파주의 한 스펀지 공장에서 일하다 지금은 ‘한국노동네트워크협의회’라는 시민단체에서 한국 노동자들과 인도네시아 출신 이주노동자들을 위해 일하고 있다. ‘스탑 크랙다운’은 해리를 비롯해 네팔, 미얀마, 한국 등 혼성 국적의 노동자들이 결성한 이주노동자 그룹사운드다.

“한국이 내게 가르쳐 준 것 중 가장 소중한 것은 ‘차별’이에요. 언젠가 아프리카에서 온 흑인 친구랑 지하철을 탔는데, 사람들이 다들 피하는 거예요. ‘사장님’들은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못난놈들’이라며 욕만 하고. 같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이렇게 차별이 있을 수 있구나 느꼈어요. 인도네시아에서는 느낄 수 없던 기분이었어요. 그래서 다짐했어요. 한국의 차별을 없애는 데 도움이 되어 보겠다고.”

인도네시아에서 대학을 졸업한 그는 할 수 있는 일이 많았다. 무슨 일이든 잘 배웠다. 그는 요즘 노동운동 관련 뉴스를 올리는 노동네트워크의 웹마스터 일과 한국에 온 인도네시아 출신 3만 이주노동자들의 공동체에서 미디어팀장을 맡고 있다. 한국 노동자들과 인도네시아 노동자들에게 홈페이지를 만드는 법과 동영상 찍는 법도 교육한다.

“한국에 대해 나쁜 인상을 갖고 모국으로 돌아가는 이주노동자들이 90%가 넘는다고 해요. 5년 넘게 한국에 살아 제2의 고향으로 느끼는 저로서는 무척 안타까워요. 저 같은 사람이 그 간격을 줄여나가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어요. 이제는 내가 가진 것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싶어요.”

해리가 만들어 운영 중인 웹사이트 ‘인도네시아 커뮤니티-삶, 사랑 그리고 평화’(http://tkikorea.com)에는 ‘고용허가제’ 등 한국의 이주노동자 관련 새 법들에 대한 소개와 ‘한국어 한마디-우리들이 쓰는 글’이라는 생활 한국어 코너 등이 있다. 많은 인도네시아 노동자들이 그에게 조언을 구하고, 또 정보를 공유한다.

해리는 이주노동자들과 한국인들 사이의 문화 차이에 대해서도 주목한다.

“인도네시아에서는 부모님이라도 나의 머리를 함부로 만지지 않아요. 그런데 여기 와선 사장님이 머리를 툭툭 치는 경우가 많았어요. 별안간 화가 났죠. 사장님은 ‘별 이상한 놈 다 보겠네’라며 저를 더 미워했죠. 다른 문화를 이해하지 못하는 한국인들에게도 잘못이 있지만 한국에 대해 충분히 알지 못한 이주노동자들도 문제가 있어요.”

해리와 함께 일해온 이용근 노동네트워크 사무국장은 “홈페이지 관리에 큰 도움을 받고 있으며 언어 감각이 뛰어나 국제연대와 관련된 일에 많은 역할을 하고 있다”고 그를 평가했다. 해리는 “서로 조금씩만 더 알면 진짜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 수 있을 것 같다”며 “내가 하는 작업이 아주 작은 것이지만 한국사회를 문화적으로 더 풍요롭고 따뜻한 사회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대상에서 주체로’

‘비정규직’과 ‘이주노동자’.
이주노동자들로 구성된 5인조 그룹 ‘스탑 크랙다운(그만 좀 탄압해요)’의 멤버들이 지난 6월 서울 상도동의 청운노인복지센터에서 공연을 하고 있다. 인도네시아 출신 해리 켄 아흐마드(맨 오른쪽)는 이 그룹에서 키보드를 담당하고 있다.

그동안 한국사회 주변부의 한 끝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목소리를 내기조차 힘겨웠던 이들이다.

이들은 지금도 ‘보호’ 받아야 할 대상 또는 ‘관리’돼야 할 대상으로 더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한국사회의 주요 구성원이고 생산자이다. 당당한 사회의 일원으로서 대접을 받을 자격이 있다.


하지만, 그들은 누구보다 많은 차별과 불이익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왜 이들이 진보운동의 동력이 되어서는 안되는 것인가. 최근 이들을 진보운동의 활력을 불어넣을 잠재적 에너지로 흡수하자는 움직임이 활발히 일고 있다.

2006년 8월 통계청의 경제활동인구부가조사에 따르면 전체 임금노동자 가운데 54.8%(8백41만4천여명)가 비정규직(장기임시노동자 포함)이다. 지난해보다 2만명이 늘었다. 이 비율은 OECD 국가 평균의 2.5배에 달하는 수치다. 이들이 받는 차별도 OECD 국가들 중 최악이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월평균 임금 차이는 2000년 73만원에서 올해 1백10만원(정규직 2백26만원, 비정규직 1백16만원)으로 크게 늘었다. ‘동일노동 동일임금’ 원칙을 적용해 정규직 임금의 90%까지 받는 구미 선진국들의 비정규직에 비해 우리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51%의 임금을 받는 열악한 조건에서 일한다. 여기에 한국의 비정규직이 세계 어느 나라의 비정규직보다 국민연금, 건강보험, 고용보험 등 사회복지 시스템의 사각지대에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렇게 사회 노동력의 다수를 차지하는 이들이지만, 이들의 불만과 이익을 표출할 통로는 없다. 노조를 통한 의사 표현은 불가능에 가깝다. 비정규직은 특성상 노조를 조직해도 금방 와해된다. 한국비정규노동센터는 비정규직의 노조 조직률을 2.8%(정규직은 21.6%)로 추정했다. 이들이 가진 잠재적 에너지는 올초 프랑스 전역을 달궜던 최초고용계약법(CPE) 파동에서 읽을 수 있다. ‘26세 미만 취업자에 관한 한 정당한 설명 없이 2년 내 해고 가능’이라는 조항이 포함된 CPE안이 의회에 상정되자 프랑스 대학생과 젊은이들은 거리로 몰려나왔다. 이들의 ‘젊은’ 물결은 ‘늙은’ 거대 노조단체들을 각성시켰고 한바탕 프랑스를 ‘거리의 정치’가 휩쓸었다. 그 결과 프랑스에 불어닥친 노동시장 유연화의 상징이던 CPE는 철회됐다.

한국의 경우 지난달 불만족스러운 ‘비정규직법’이 통과됐어도 프랑스 같은 불길이 일어나지 않은 이유는 무엇보다 ‘비정규직’이 바로 ‘나의 일’이라는 인식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남우근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사무국장은 “정규직 노조는 비정규직 문제가 자본주의의 구조적인 문제라는 인식이 부족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한국사회도 느린 속도로나마 변하고 있다. 최근 대부분의 노동관련 문제가 비정규 사업장에서 발생하고 있는 것이 좋은 예이다. 이는 비정규직 문제가 한국사회의 모순으로 부상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한국사회가 매달려야 할 심각한 사회문제로 서서히 부상하고 있는 것이다. ‘제2, 제3의 오미선’이 나타나 “당신도 언제든 비정규직이 될 수 있다”는 메시지가 확산되면 사회인식이 달라질 수 있다. 이는 비정규직이 한국사회 진보의 새로운 동력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들이 스스로 조직하고 자기권리를 찾는 적극적인 노력을 통해 노동운동의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 줄 수 있는 것이다.

이주노동자들 역시 차별과 소외 속에 한국사회의 밑바닥을 이루고 있는 집단이다. 한국에 들어온 이주노동자가 지난 9월 현재 41만5천여명. 이들이 일손을 놓는다면 한국에는 ‘3D 업종 대란’이 온다. 2003년 11월 정부의 미등록 이주노동자에 대한 대대적인 단속 때 건설현장에서 일할 사람이 40%나 격감해 인력대란이 일어났다는 한국건설산업연구원의 분석이 있었다. 이들이 가진 잠재력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있다.

이들이 이 사회의 가장 소외받고 착취당하는 집단으로서 자기 정체성을 확인하고, 사회적 발언을 한다면 한국사회를 진보적 사회로 이끌어가는 새로운 힘으로 등장할 수 있다. 이들은 다양한 문화의 소지자로 특히 한국과 같은 문화적 획일주의에 갇힌 사회에 남다른 기여를 할 수 있는 부분이 많다. 최근 몇년간의 이주노동자 급증은 한국적인 법 제도의 한계를 드러내는 순기능을 했다. 그와 더불어 한국사회에 만연한 민족주의, 단일민족의 신화를 비판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계기도 제공했다. 우리 사회 내에 가득 찬 ‘다름’에 대한 비뚤어진 시선을 자각하게 만들어 준 것이다.

또 전 세계적인 네트워크를 갖고 있는 이들은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광풍을 제어해 낼 수 있는 ‘사람의 힘’을 갖고 있다. 한국에 온 이주노동자들이 주축이 돼 만든 웹사이트 ‘레이버아시아넷’(http://laborasia.net)이 좋은 사례다. 아시아, 태평양 지역 25개국 이주노동자들이 참여하고 있는 이 웹사이트에는 25개의 다른 언어로 해당 국가와 관련한 소식들이 올라와 있다. 인도네시아인 해리와 같은 각국 출신 이주노동자들이 자국 관련 소식 또는 한국 소식을 자국어로 이 곳에 올리고 있다. 세계무역기구(WTO) 회의, 자유무역협정(FTA), 해당 국가의 노동인권 문제 등이 주로 다뤄진다.

올3월 홍콩 WTO 회의장 주변에서 열렸던 반세계화 시위장에서 이들은 처음 만난 사이임에도 그동안 교환하며 쌓아온 우정을 바탕으로 일사불란하게 반대시위를 조직해 냈다. 해리는 “각국에서 온 시민운동가들에게 활동 공간을 제공하고 현지 사정을 알려줌으로써 반세계화 운동의 조직화에 앞장선 것은 필리핀과 인도네시아에서 홍콩에 와 있던 가사노동자들이었다”고 말했다. ‘제2, 제3의 해리’가 아시아 곳곳에서 네트워크를 만들며 자본에 대항하는 노동의 힘을 조직하고 있는 것이다.

오산이주노동자센터의 장창원 목사는 “자본은 국경 없이 넘나들고 있지만 노동은 국경에 많은 제약을 받고 있다”면서 “신자유주의 세계화 속에서 이주노동자들의 역할이 엄청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노동자·민중 중심의 현장 교류 방문이 지역 평화와 상호 발전에도 큰 힘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1세기 반 전에 칼 마르크스가 변혁 주체로 내세운 ‘노동자’가 오늘날 한국 현실에서는 ‘비정규직’ ‘이주노동자’로 재정의되고 있는 현상이 목도되고 있는 것이다.

〈손제민기자 jeje17@kyunghyang.com

 

 

[진보개혁의 위기] 획일과 편견 깨는 ‘생활속 진보’ 절실

입력: 2006년 12월 19일 18:29:47

 
올해 50세인 조희연 성공회대 교수는 기르던 콧수염을 1년전 말끔히 깎았다. 지난달 좌담을 위해 경향신문사를 찾았을 때 그 이유를 물었다.

“아직도 한국사회에는 수염을 기르면 반사회적이라는 인상이 강한가 봐요. ‘교수라는 사람이 점잖지 못하게…’라는 눈으로 바라보는 것 같아서 그냥 밀어 버렸어요.”

조교수는 가끔 개량 한복을 입기도 하지만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잘 입지 않는다. 수염 깎은 것과 비슷한 이유다. 함께 좌담에 참여한 김혜정 환경운동연합 사무총장(43·여)이 조교수의 말에 맞장구쳤다.

“시민운동 하는 사람들이 한때 즐겨 입던 개량 한복을 요즘은 다들 거의 입지 않아요. 고집스럽다는 인상을 준다는 이유죠. 시민운동 한다고 하면 그렇지 않아도 고집 세다는 인상을 주는데 개량 한복까지 입으면 최악이라는 얘기죠. 그래서인지 종로나 인사동 쪽에 있던 개량 한복 집이 거의 망했다네요.”

이화외고에서 시민들을 대상으로 영어회화를 가르치는 미국인 영어강사 파이퍼 칼슨(34·여)은 어느 날 수강생들과 군대에 대한 대화를 나눴다. 어떤 경우에 병역 면제를 받느냐는 칼슨의 물음에 한 학생이 “문신을 새기면 군대에 안간다”고 답했다. 칼슨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반문했다.

“문신이 어때서요?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것도 아닌데. 그 것도 표현의 자유 아닌가요?”

“한국 정서에 안맞는다” “저 사람 너무 튄다”는 말은 ‘모난 돌이 정 맞기 쉬운’ 한국사회에서 사람들이 듣기 싫어하는 말들이다. 이 말들은 ‘우리 안에 보이지 않는 억압’으로 작용한다. 일상생활을 획일적으로 규율하는 무서운 질서이자 규범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조희연 교수는 “일상의 진보라는 관점에서 볼 때 다양성을 제약하는 획일주의를 깰 필요가 있다”며 “한국사회도 생활 세계에서의 진보, 미시적 진보로 진보의 범위를 확장하고 심화시킬 때가 왔다”고 말했다. 남과 조금만 달라도 그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사회적 억압이 존재하는 한, 그런 심리적 억압을 당연시하는 한 결코 진정한 의미의 진보적 삶은 실현될 수 없다.

그리고 진보는 주장이나 선언이 아니라 체화된 일상적 습관이어야 한다. 경향신문 취재진이 지난 4개월간 ‘진보개혁의 위기’ 시리즈 취재 도중 ‘진보진영의 문제가 뭐라고 생각하느냐’는 물음에 일반 시민들로부터 가장 많이 돌아온 대답은 “언행일치가 안된다”는 것이었다. 진보를 표방하는 사람들에게 ‘성인 군자(聖人 君子)’를 기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자신의 생활 속에서 자신이 외치는 가치를 실천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것으로 해석됐다.

진보성향의 계간지를 내는 모 출판사에서 일했던 윤모씨(43·여)는 몇년 전 그 직장을 그만뒀다. 윤씨가 진보를 표방하는 그 계간지의 방향성이 좋아 옮긴 지 2년 만이었다.

“밖에서 알던 것과 많이 달랐어요. 그곳 역시 가부장적 문화가 지배하는 곳이었죠. 여성이 생리휴가를 갖는다든지, 강한 주장을 하는 모습을 봐 주질 못해요. 소위 ‘진보’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환멸을 느꼈어요. 그래서 미련 없이 나왔지요.”

시민단체에서 진보성향의 교수들과 함께 일했던 서울대 대학원생 오모씨(30·여)는 “진보운동을 하는 지식인들은 왜 하나같이 둥글둥글한 사람이 없고 모난 성격만 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오씨는 “그들이 불의에 항거해 몸을 내던지며 우리 사회를 바꿔오는 과정에서 형성된 자연스러운 성격으로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다”라며 “그러나 항상 불만에 가득 차서 욕지거리만 해대는 모습에서 이 분들이 과연 언제 대안이 될 것인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고 말했다.

성공회대 한홍구 교수는 안식년을 맞아 조희연 교수가 포기한 수염을 기르고 있다. 그의 말이다.

“전에는 사상과 이념으로 사람을 따졌는데, 그게 다가 아니고 이념과는 전혀 기준이 다른 사람됨이라는 게 있더군요.”

〈손제민기자〉

 

 

[진보개혁의 위기] 5-2. 진보적 발전전략

입력: 2006년 12월 21일 18:26:50

 
진보개혁의 위기는 진보개혁에 대한 환멸과 서민·중산층의 ‘삶의 위기’를 초래했다. 참여정부의 사이비 개혁 세력은 그 ‘위기’를 심화시켰다. 참여정부의 45개월은 ‘진보적인 것’을 ‘새로운 것’이 아닌 ‘낡은 것’으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분배’와 ‘복지’에는 ‘해롭고 나쁜 것’, 혹은 ‘불온한 것’이란 빨간 딱지가 붙었다. 그로 인해 이 사회에는 과거 어느 때 보다 신자유주의, 성장과 경쟁 제일주의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이런 위기 속에 진보개혁 진영이 탈출구를 찾는 시도가 활발해지고 있다. 진보가 투쟁과 반대로 자기 존재를 확인하는 과거 방식 대신 실천적 대안을 내놓고 사회를 바꿀 수 있는 실력을 보여주자는 것이다.

‘위기에서 대안으로’라는 모토 아래 10개 싱크탱크가 처음 머리를 맞댔다. 김대중도서관에서 지난달 24일 ‘한국경제의 대안을 찾아서’라 는 주제로 열렸던 첫 토론회 모습.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제공
진보가 나서서 ‘실사구시(實事求是)’의 대안으로 삶의 위기를 구출하자는 ‘정공법’을 시도되고 있다.

최근 대안 찾기 작업은 싱크탱크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다. 두드러진 현상은 싱크탱크들의 연대이다. 지난달 24일 한국의 주요 진보개혁 진영 싱크탱크들이 대안 모색을 위해 한자리에 모였다. 진보정치연구소, 새로운사회를 여는 연구원(이하 새사연) 등 10개 싱크탱크가 ‘위기에서 대안으로’라는 기치 아래 ‘한국 경제의 대안을 찾아서’란 주제로 첫 토론회를 열었다. 새사연 손석춘 원장은 “그 동안 진보 진영은 경제나 외교·통상 같은 현실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약했다. 안티 신자유주의만 있었지 어떻게 대안을 찾아보자는 계기는 없었다”며 연대 배경을 설명했다. ‘느슨한 연대’에 싱크탱크간 이견 노출, 진보에 대한 인식 차이가 있지만 진보진영 주요 싱크탱크들이 한자리에 모여 머리를 맞댔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는 행사였다.

이들은 20일 진보정치연구소 주관으로 두번째 토론회 ‘사회연대국가전략’를 열었다. 내년 1월에는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 주관으로 ‘차베스 대통령 집권 후 베네수엘라 국가 모델’, 2월에는 코리아연구원 주관으로 진보적 외교·안보·통상 정책에 대한 토론회를 가질 예정이다. 정당·대학 산하 및 부설 연구소, 민간 연구소등 10개 단체를 중심으로 이들 진보 싱크탱크는 큰틀의 경제·사회 체제에 대한 전략은 물론 개별 의제에 대한 정책 구상도 짜고 있다.

민주노동당 부설인 진보정치연구소는 진보 진영에서 가장 활발하고 안정적으로 대안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경상대 장상환 교수가 소장이며 전문 연구원 10명이 일하고 있다.

연구소 김윤철 정책실장은 “경제, 복지, 정치 등 각 분야에서 사회적 공론 형성을 위한 대안 만들기에 중점을 두고 있다”고 말했다. 연구소는 그 결과물의 하나로 20일 열린 10개 싱크탱크의 2차 토론회에서는 ▲사회연대적 성장 모델 ▲사회연대적 복지 모델 ▲진보정당 헤게모니 프로젝트로 구성된 ‘사회연대국가전략’을 발표했다.

한겨레 전 논설위원 손석춘씨가 원장으로 있는 새사연은 교육인, 의료인, 법조인, 언론인, 기업인, 문화예술인, 종교인, 노동조합 간부, 그리고 일반 직장인에 이르기까지 사회 각계를 아우르는 100여명의 생활인이 모인 민간 싱크탱크다. 세대로는 386이 주축이라고 한다. 정회원은 수입의 10%를 회비로 내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회원 10명당 1명의 연구원을 고용해 현장 전문성과 학문성의 결합을 시도하고 있다. 새사연도 최근 ‘노동중심 국민경제론(그래픽 또는 각주)’을 발표했다.

지난해 2월 창립한 ‘새로운 코리아 구상을 위한 연구원’은 동국대 박순성 교수가 연구기획위원을 맡고 있다. 고려대 김연철, 한신대 백준기, 숭실대 이정철 교수 등이 연구위원으로 참여중이다. 코리아연구원은 최근까지 북핵 위기, 미국 중간선거, 동북아 정세 등에 대한 정치·외교 연구 결과를 많이 내놓았다. 1월에는 한·미, 한·일, 남북, 한·중, 한·러 관계의 전망과 과제 등 외교뿐만 아니라 ‘한반도 정세전망과 시민사회운동의 과제’, ‘진정한 국가경쟁력 제고를 위한 경제 정책 방향’, ‘사회통합을 위한 사회정책 방향’ ‘2007 대선 국면과 진보·개혁 진영의 과제’ 등에 관한 특별 기획을 진행하기로 했다.

박원순 변호사가 주도해 만든 희망제작소는 ‘인간·생태·문화’에 중심을 두고 개발 지상주의에 대한 비판적 대안 찾기 작업을 진행중이다. 거시적 담론보다는 미시 담론, 가능성 있는 아이디어의 현실화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김창국 전 국가인권위원장이 이사장을 맡고 있다. 국민대 조원희 교수가 운영위원장을 맡고 있는 대안연대회의는 신자유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민주적이고 자주적인 대안 정책을 개발하고 한국이 처한 현실에서 이를 구체화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는 활동을 하고 있다. 지난 5일 민노당 심상정의원실과 함께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관한 연구발표회를 가졌다. 8일에는 한국사회과학연구소, 한국사회경제학회화 함께 ‘글로벌 체제하의 통합과 갈등’이란 주제로 공동 학술 대회를 열었다.

민주사회정책연구원은 진보 성향 대학으로 알려진 상지대·성공회대·한신대의 민주대학 컨소시엄으로 만들어졌다. 신정완(성공회대), 홍성태(상지대), 윤상철(한신대) 교수 등 3개대학 정치·경제·사회학과의 교수 25명이 참여하고 있다. 사회운동연구소, 세교연구소, 좋은정책포럼, 참여사회연구소도 10개 싱크탱크에 참여한 단체들이다.


청와대 전 참여혁신 수석비서관 박주현 변호사가 만든 시민경제사회연구소는 ‘한국형신성장동력 복지모형과 그 실현을 위한 조세재정 개혁 과제(그래픽 또는 각주)’란 제목의 664페이지짜리 보고서를 내 주목을 받았다. 연구소는 대안의 유통과 소통을 위해1억원 정도의 비용이 들어간 보고서를 홈페이지에 올려 놓았다.

현장 운동가들도 대안 작업을 준비중이다. 인권·노동·학술·환경 영역 진보 진영 20여개 운동 단체의 활동가 70여명이 내년 2월 1일 창립 목표로 한 ‘진보전략포럼’이 대표적이다. 참세상의 홍석만 사무처장은 “정세분석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운동의 싱크탱크로서 한국사회의 주요 전략에 대한 진보적 정책을 내놓을 것”이라고 말했다. 학자들의 대안 제시도 활발하다.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신정완 교수는 최근 ‘한국형 사회적 시장경제 모델’ 구상(그림참조)을 발표했다. 한성대 김상조 교수는 ‘중소·중견기업 발전 전략’을 내놓았다. 성공회대 조희연 교수는 “국가가 재벌을 지원하는 것만이 아니라, 사회적 일자리, 공공 부문, 중소기업, 골목경제에 대한 지원을 통해 지구화 시대의 완충적 선순환 기제를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을 담은 ‘생태·사회민주주의 국가’를 제시했다.

최근 진보 진영이 내놓은 대안은 사회·경제적 토대를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에 중점을 두고 있다. 보수 진영의 ‘기업하기 좋은 정부=작은 정부론’, ‘성장 우선·제일주의’을 극복하면서 아킬레스건으로 지적됐던 ‘성장 전략의 부재’, ‘이념형’을 벗어나 ‘성장’의 개념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인 게 특징이다.

그러나 몇몇 구체적 작업 결과물을 빼고는 여전히 실현성·구체성이 부족한 ‘스케치’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지적이 많다. 고려대 박상훈 교수는 “지금 나온 전략들은 실현 가능성과 총체적 비전이 약하다”며 “특히 경제 발전 전략은 사회·교육정책과 정당 체제와 결합할 수 있는 체계적 대안이어야 하는데 아직은 단편적”이라고 평가했다. 박교수는 “진보는 정치의 방법으로 변화를 모색하는 힘이어야 하는데 대부분 비정치적 접근이 많다”면서 “정치적 조건을 갖추는 문제에 대한 진지한 고려가 없어 진보파도 정책 로드맵만 양산하는 인상”이라고 말했다. 서울산업대 정이환 교수는 “어떻게 실천될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은 많이 부족하다”며 “아직도 진보 진영의 대안 논의는 거대 담론 투쟁 수준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한국적 대안의 부재’도 지적되고 있다. 신교수는 “모두 ‘한국적’ 대안을 제시하겠다고 말하지만 대부분 스웨덴과 독일, 덴마크 등 유럽의 경험을 취사선택하는 정도에 머물고 있다”고 말했다. 성공회대 조희연 교수는 “보수 담론에 대항하는 현실적인 대안 정책을 만들어야 한다”며 ‘실현 가능한 정책으로 무장한 진보’를 강조했다. 분단 현실과 세계화 체제 문제를 그냥 지나치고 있다는 지적도 나왔다. 한신대 이해영 교수는 “현재의 세계화 체제에서 국내 논의만으로는 그것이 무엇이든 ‘반쪽’ 미만의 진실일 뿐”이라며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예로 들었다. 그는 “한·미 FTA의 개혁 없이 또는 이를 포함한 발전 전략 없이 진행되는 국내의 프로그램은 온전히 그 성과를 거둘 수 없다”고 지적했다. 진보 진영은 WTO(세계무역기구), IMF(국제통화기금)의 해체 내지 개혁 의제도 선점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경북대 김형기 교수는 “현재 한국의 정세에 비추어 볼 때 진보적 성장 담론과 진보적 안보 담론이 결여되어 있는 것이 큰 문제”라며 “세계 유일의 분단 국가이므로 반드시 통일 문제가 포함되어야 하고 한반도 전체 수준에서 사회 발전 전략이 제시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진보가 해결해야 과제로 ▲현장과의 연대 ▲대중과의 소통 ▲사회적 대화 문제도 제기됐다. 새사연의 손석춘 원장은 “‘어떤 사회가 가능한가’를 보여주는 치밀한 정책 대안 만들기 뿐만 아니라 싱크탱크와 노동·농민운동 영역의 현장 운동가들과의 네트워킹을 통해 함께 문제를 풀어나가는 것도 과제”라고 말했다. 김형기 교수도 “진보적 사회 발전 전략은 그 자체로 고립된 학술적 논의에 그쳐서는 아무런 쓸모가 없다”며 “진보적 사회 운동과 연계하여 제기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다양한 사회 계층과 대화하면서 수립해야 한다”고 말했다.

경북대 이정우교수는 “사회적 대화 모델의 필요성과 현실적 가능성이 충분히 논의되어야 실현 가능성이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이에 대한 논의가 생략되고 있어서 자칫 사상누각이 될 수 잇다”고 우려했다. 2007년 대선 국면을 적극 활용해야 한다는 주문도 나왔다.

시민경제사회연구소 박주현 소장은 “대선은 발전 전략을 상품으로 내놓고 국민들로부터 판단을 받아볼 수 있는, 큰 줄기의 변화를 내세울 수 있는 좋은 기회”라며 “진보·개혁 진영은 정교하게 책임감 있게, 국민의 삶과 연관된 전략을 대선 국면에서 분명하게 제시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종목·손제민기자〉

 

 

[진보개혁의 위기] 투자→성장→분배 ‘노동’이 연결 고리

입력: 2006년 12월 21일 18:26:58

 

최근 진보·개혁 진영에서 내놓은 국가 및 사회 발전 전략·모델 중 주목할만한 것은 민노당의 ‘사회연대국가 전략’과 시민경제사회연구소의 ‘한국형신성장동력 복지모형’이다.

‘사회연대국가 전략’의 핵심은 ‘노동-혁신 주도형 성장 체제(그림참조)’다. 사회연대국가전략은 ‘사회연대적 복지+성장기여형 분배 정책’을 통해 성장과 분배의 접합이 핵심이다. 기본생활보장·복지동맹 구성을 기본으로 ‘사회연대복지모델’을 만들고, 이를 기본으로 복지 정책의 ‘투자적 성격’과 사회 구성원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고 있다. 전략에서는 ‘투자’가 ‘분배↔(인적)투자↔성장’의 중간 고리 역할을 담당한다. 예를 들어 저소득층에 대한 교육 및 훈련 지원은 인적자원에 대한 직접적인 투자(분배)인 동시에 기술 혁신 환경을 개선하는 성장 정책이란 설명이다.

노동의 ‘참여’도 전략의 주요 개념 중 하나다. 연구소는 “세계 경쟁에서 안정된 기업의 수익 구조를 유지하기 위해선 기술·작업장 혁신과 생산성 강화 등이 이루어져야 하고, 노동이 개입을 주도해야 대중의 지지를 얻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한국형신성장동력 복지모형(그림참조)’은 ▲학습복지(Learnfare) ▲일자리복지(Jobfare) ▲사회적 안전망(Welfare)으로 구성된 ‘3-fare’다. 노동 시장에서 배제된 노동자가 낭떠러지로 떨어지지 않도록 사회적 안정망을 갖추고, 평생학습시스템을 통해 산업수요에 맞는 지식·기술을 지속적으로 습득하며,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을 통해 이들을 다시 노동시장에 투입시키는 구조를 만들자는 것이다. 연구소는 실현을 위해 ‘자본과 건설 중심’의 현 예산 구조를 ‘사람 중심(투자)’ 예산으로 바꾸고, ‘사회부총리’를 신설, 예산권을 줄 것을 제안했다. 박주현 소장은 “산업구조가 성숙화되고 지식기반경제로 진입한 지금은 인적 자본과 지식이 성장을 이끌고 있다. 경제 투자보다는 사람의 역량을 강화하는 사회 투자가 더 큰 성장 동력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성공회대 신정완 교수의 ‘한국형 사회적 시장경제 모델’은 사회·경제 발전 전략·모델로는 처음 나온 것으로 이후 대안 구상에 주요 참고 모델로 활용되고 있다. ‘성장-효율-혁신’과 친화성이 있는 ‘유연성’과 ‘분배-균형-복지(점진적 동반성장)’와 친화성이 있는 ‘안정성’를 결합한 ‘유연안정성(flexecurity)’ 확보가 핵심 주장이다. 미국과 영국은 유연성 중점을 두었기 때문에 경제적 불평등과 서민대중의 경제적 불안정성 수준이 높고, 독일·프랑스는 안정성에 초점을 둬 저성장, 고실업 문제를 안고 있다. 신교수는 이런 분석에 따라 “덴마크 등 북유럽 국가는 튼튼한 사회안전망을 배경으로 노동시장 유연화를 이루고 학습복지(learnfare)를 강화해 노동력의 질을 높였다”며 “한국의 경제 모델도 북유럽의 사민주의와 가까운 것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김종목·손제민기자〉

 

 

[진보개혁의 위기] 진보엔 ‘SERI’가 없다

입력: 2006년 12월 21일 18:28:01

 
“진보진영에는 SERI(삼성경제연구소)가 없다.”

삼성경제연구소는 박사급 100명을 포함, 상근 연구인력 120여명을 보유한 국내 최대의 싱크탱크다. 삼성경제연의 지난해 예산은 8백50억원을 넘었다. 주식의 100%는 삼성계열사가 보유하고 있다. 기업체 경영자문이나 국가기관 용역보고서 등으로 벌어들인 영업수익도 8백36억여원에 달한다.

진보진영 내 가장 큰 싱크탱크는 민주노동당 부설 진보정치연구소이다. 진보진영의 SERI를 목표로 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는 골리앗과 다윗의 싸움에 불과하다. 국고보조금 등으로 이뤄진 연간 예산은 6억원이고, 상근 연구원이 10명 뿐이다. 진보정치연구소 외에 자립적인 경제 기반을 가진 싱크탱크는 몇개 안된다. 박원순 변호사라는 걸출한 스타 활동가가 있는 희망제작소와 ‘충성도’가 높은 386 직장인 100여명의 ‘십일조’로 운영되는 새로운 사회를여는연구원, 박주현 전 청와대 참여혁신 수석비서관이 유한킴벌리 등의 지원을 받아 프로젝트를 진행 중인 시민경제사회연구소 정도다. 이들 역시 재계 버팀목이 있는 보수 싱크탱크들에 비하면 ‘구멍가게’ 수준이다.

참여사회연구소, 좋은정책포럼 등 싱크탱크들은 대부분 상근자가 1명에 불과하거나 상근자 없이 운영되고 있다. 진보진영의 힘은 결국 네트워크에 있다고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약한 물적기반을 극복하는데 한계가 있다. 최근 진보진영간의 연대와 대안 제시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있지만, 열악한 물적·인적 기반의 한계를 벗어나지는 못하고 있다. 대안논의 수준도 낮다.

김윤철 진보정치연구소 정책실장은 “논의가 지나치게 공허하고 추상적”이라고 지적했다. 김실장은 “정책 대안을 내놓으려면 정확한 연구조사에 기반해 최소 1년 이상 지속적으로 토론해야 하는데 친분 있는 연구자들끼리 모여서 그나마 새롭게 연구한 것도 아닌 결과물을 세미나 수준에서 공유하는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미국의 경우처럼 새로 들어설 정부의 정책기조를 잡아주는 싱크탱크의 역할을 할 곳이 없었던 우리 진보진영으로서는 삼성경제연구소가 그 일을 대신 하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다. 김실장은 “교수 중심의 싱크탱크를 벗어나 ‘사회운동+정책+학술’을 겸비한 정책 활동가들을 양성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 우물을 파는’ 꾸준함도 요구된다. 신정완 성공회대 교수는 “홍준표 의원이 ‘반값아파트’ 하니까 약간의 전환이 일어났음을 부인할 수 없다”면서 “진보쪽에도 교육만 10년 동안 판 사람, 부동산만 10년 연구한 사람이 나와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신정완 교수는 “진보진영이 물적기반이 취약하지만, 한국개발연구원(KDI), 산업연구원 등 기존 국책 연구기관의 연구 결과나 통계만 잘 활용해도 얼마든지 진보적 시각에서 해석해내고 의미있는 결과를 도출해낼 수 있다”고 말했다.

〈김종목·손제민기자

 

 

[진보개혁의 위기] “진보적 가치는 여전히 유효하다”

입력: 2006년 12월 21일 18:31:04

 
진보적 지식인들은 진보개혁의 위기가 곧 삶의 위기를 초래했다는 인식에 공감을 표시하며 진보세력이 삶의 질을 개선하기 위한 실천적 노력을 통해 대안세력으로 나서야 한다고 지적했다.

진보적 지식인 12명은 경향신문이 21일 창간 60주년 특집 ‘진보개혁의 위기’ 연재를 끝내면서 진보개혁의 과제에 관해 경향신문과 가진 직접·서면 인터뷰를 통해 경향신문이 제기한 ‘진보개혁의 위기=삶의 위기’라는 문제 인식에 동의하며 “평등, 사회적 약자 보호, 복지 등의 진보적 가치는 여전히 유효하다”고 밝혔다.

이들은 “공허한 담론이 아니라 사회·경제적 개혁과 이를 구체적으로 담아내는 사회 발전 전략, 정책 대안의 필요성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이를 위한 진보개혁의 주요 과제로 이들은 ▲신자유주의 ▲시장 만능주의 ▲성장 우선·제일주의에 따른 사회 양극화 해소를 제시했다.

이들 중 다수는 진보전략으로 공공부문 일자리 확대, 실직자 및 무상 교육 확대 등 ‘사회적 투자’를 통해 ‘성장’을 해야 한다는 견해를 밝혔다.

중소·중견기업 발전 전략, 생태·사회민주주의 국가, 한국형 사회적 시장경제 모델 등의 대안 전략을 밝힌 이들도 있었다. 진보적 발전에서 논쟁이 되는 ‘성장과 분배’ 문제에 대해 응답자의 대부분은 “성장과 분배를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것부터가 비현실적이고 이념적”이라고 지적했다. 분배를 희생하지 않고도 ‘성장’을 이룰 수 있고, ‘성장과 분배는 동행하는 것’이라는 분석도 나왔다.

‘진보적 발전을 위해 증세가 필요한가’라는 물음에 대해 많은 이들이 ‘세금폭탄’을 보수 진영의 담론 투쟁으로 규정하며 증세를 위한 진보개혁 진영의 ‘정면돌파’ 필요성을 강조했다.

증세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조세의 형평성 문제를 먼저 해소하고 ▲‘국민 부담(조세)’과 ‘혜택(복지)’의 조합을 먼저 제시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다.

사회적 타협 문제와 관련, 이들은 대체로 “진보적 발전을 위해 사회적 타협은 꼭 필요하다”고 밝혔다.

그러나 현재 노동-자본관계에서 힘의 균형이 깨져 현실화되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2007년 대통령선거에서의 정치적 리더십 구축을 묻는 질문에 응답한 지식인들은 여권 중심의 정치공학적인 정계개편이나 반(反)한나라당 연합 전선 논의에 대체로 부정적 견해를 나타냈다.

경향신문 서면·직접 인터뷰에 응한 지식인은 최장집 고려대 교수, 이정우 경북대 교수, 김상조 한성대 교수, 조희연 성공회대 교수, 김윤철 진보정치연구소 정책실장, 김형기 경북대 교수, 박상훈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교수, 박주현 시민경제사회연구소장, 신정완 성공회대 교수, 양재진 연세대 교수, 이해영 한신대 교수, 정이환 서울산업대 교수이다.

〈김종목·손제민기자〉

 

 

 

[진보개혁의 위기] 최장집 교수 “민주주의 실천이 진보 출발점”

입력: 2006년 12월 21일 18:31:48

 

최장집 고려대 교수는 ‘진보세력의 과제’를 묻는 경향신문의 설문에 최근 자신의 ‘민주주의론’ 강의에서 한 학생의 이메일 질문에 답하기 위해 작성했던 글로 답변을 대신했다. ▲민주노동당에 기대를 걸 수 있는가 ▲북핵문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 ▲민주화 이후 ‘운동’은 어디로 갔는가 등의 주제로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최교수의 글을 요약한다.

▶최장집 교수의 ‘위기 진단’ 인터뷰 전문


◇ 민주노동당, 기대할 수 있나요

“ “난 민노당을 생각하면, 딜레마 같은 걸 느끼네. 민노당이 한국정치와 사회의 민주화를 열망하는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선, 오늘의 당 구조와 성격 갖고는 어렵지. 지금 당을 주도하는 사람들이 제도적 실천으로서의 민주주의를 이해하고,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로 경제·사회적 삶에 심각하게 충격을 받은 사람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할 수 있는 정당으로 발전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보네. 그게 어렵다면, 민노당 밖에 새로운 정당을 만들어야겠지.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 둘 다 어렵다는 게 민노당에 대한 기대를 어둡게 하지. 당을 이끄는 사람들이 변화하는 것은, 민주화운동 시기에 가졌던 추상적 이념을 벗어 던지고 정당으로서 투표자들에게 어필할 수 있고, 선거경쟁에서 표를 많이 획득할 수 있는 인물, 당의 이념과 강령이 만들어져야 하는데 그게 가능할 것 같지 않기 때문이지.

민노당 지도부가 보통사람들의 삶과 직접 관련된 정치경제적 이슈는 미뤄둔 채, 북한을 방문해 김일성 묘소를 참배한다든가, 통일문제의 사명을 갖고 무비판적으로 북 지도부와 회담하는 모습을 볼 때, 민노당은 해야 할 것을 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과 동떨어져 스스로 자기정당화를 위한 행위에 몰두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네. 민주주의의 제도적 실천이란 어떻게 일반 대중들에게 어필하고, 이를 통해 표를 동원할 수 있는가 하는 것, 투표자들이 당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중요하지, 당 지도부가 그들 이념에 부합하는 행위를 하면서 자족하는 것은 아니니까. 그렇다고 민노당이 아닌 다른 그룹, 또는 그룹의 형성으로부터 새로운 당을 만든다는 것은 스스로 변하는 것보다 더 어려울지 모르지. 오늘날 진보, 개혁, 민중적인 것에 대한 환멸의 시대에 그들 아닌 누가 보통사람들을 대변할 정당을 만드는 일에 뛰어들려 할 것인가. 현실적으로 민노당이 발전하는 문제는, 곧 현재 당을 이끌어가고 있는 사람들이 변하는 것에 기대를 걸 수밖에 없을 것 같네.

FTA를 반대하는 것, 그것이 노무현 정부의 의도대로 관철되느냐 아니냐가 문제의 핵심이 아니라, 이를 반대하는 힘이 정치세력화되고 대안을 조직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네. FTA는 단순히 미국과 협정을 하느냐 마느냐의 문제라기보다 기존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연장선상에서 나타나는 정책적 표현이라는 점이 중요하네. 이 거대한 힘을 운동만의 힘으로 막아낼 수 있을까? 또 막아낼 수 있다고 할 때 어떻게? 막았다고 하더라도 그 다음은? 온 사회의 가치관, 비전이 그런 방향으로 움직이는데 어떻게? 지금은 운동이 문제를 제기하고 힘으로 맞서고 있지만, 정치적으로 조직된 다수를 갖지 않을 때 결국 국가의 힘, 여론의 힘, 정책의 힘은 다른 형태로 관철될 것이기 때문이지.”

◇ 북핵문제 어떻게 풀어야 하나요

“한국현대사는 양분법적으로 이해돼 왔다. 한편에선 ‘김일성은 국제공산주의 세력 앞잡이이므로 남한만 정당성을 갖는다’(가)고 하고 다른 한편에선 ‘남한은 친일지주와 식민지 부르주아의 보수적 민족주의 체제이고 북한은 민족자주의 구현’(나)으로 이해하지. 이 양자택일의 역사관을 화해불능으로 만드는 게 바로 민족주의네. 그런데 한국의 많은 식자들은, (가)를 말할 때 무언가 떳떳치 못한 느낌을 갖는 경우가 많고 (나)에 대해 말할 때 현실과 동떨어진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을 것일세. 보수파 인사들 사이에 이런 심리적인 불편함을 없애기 위해, 아니면 보수적 체제를 정당화하기 위해 민족주의를 부정하고, 발전주의로 대체하는 것이 역사 재해석의 방법으로 시도되고 있음을 최근 들어 자주 보게 되지. 또 혹자는 민족주의를 재강조하거나, 탈근대 이론을 들고 나오거나, 동아시아 공동체론을 들고 나와 이러한 분열의 역사를 봉합하고 무언가 합리성을 부여하려고 시도하는 것 같네.

여기서 이상한 건 아무도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현대사를 분석하려 시도하지 않는다는 거지. 민족주의가 민주주의를 포괄하는 것으로 이해하기 때문일까. 내가 이해하는 민족주의는 일정 시기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이념이고 운동이지만, 지금은 이념으로나 가치로나 유효하다고 보지 않네. 오히려 한국사회 민중들의 사회경제적 삶의 현실을 민주주의의 제도적 실천을 통해 해결하는데 장애로 기능하고 있네.

이 점에서 대안은 분명해지네. ‘민족주의-통일’을 다시 추구할 게 아니라, ‘민주주의-공존’으로 가야 한다고 믿고 있네. 여기서 강조할 점은 평화공존이 통일의 중간단계라고 설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네. 평화공존은 평화공존 그 자체가 목표요 가치일 뿐. 남북한 각각이 독립된 주권국가로서 발전하게 될 때 한반도 평화의 제도화, 안정적 유지가 가능하다고 믿네. 평화공존의 이념적 기초 위에 북한 핵문제도 다룰 수 있을 것일세.

북한이 핵무장을 포기토록 하는 것이 대북정책과 대외정책의 최우선 과제가 돼야 하네. 북한 인권문제 역시 외부로부터의 개입이 북한체제를 붕괴시키기 위한 어떤 틈새를 만들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조건에서, 그리고 그것이 북한주민들의 기본권을 지원하는 데 효과가 있기를 기대할 수 있다면 정당하다고 생각하네. 나는 한국사회가 강자와 약자, 부자와 빈자로 양분되고 힘을 가진 집단들이 모두 제어할 수 없는 자기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과거보다 더 많이 허용되는 이 불안정한 민주주의 사회, 극단적 갈등과 이익 충돌을 제어하고 이를 민주적으로 통제하지 못하는 체제가 어떻게 전혀 다른 사회를 민족의 이름으로 통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솔직히 이해할 수 없네.”

◇ 민주화운동은 어디로 갔습니까

“나는 민주화의 궤적을 들여다 보며 민주화 이후 민중주의적 요소가 왜 이렇게 드라마틱하게 사라져 버렸는가 하는 문제에 큰 관심을 갖네. 온 사회를 혁명에 가깝게 뒤흔들어 놓은 그 운동은 어디로 사라졌나. 그 요란함, 그 영웅주의, 그 많은 민중주의적 담론들, 그 많은 변혁을 향한 외침들은 다 어디로 갔나.

참여적이고 개혁적이고 자주적이라며 큰소리 쳤던 민주정부가 왜 그 외침과는 정반대로 노동자·농민 같은 생산자 집단을 소외시키고, 삶의 희망을 상실한 사회저변층이 살인·자살·가정해체 등을 겪도록 허용하는지, 왜 권위주의 시절보다 더 재벌중심-노동배제를 축으로 하는 성장일변도 정책을 추구하는지 설명돼야 한다고 보네. 이 시점에서 운동이 만들어낸 민주주의의 결과를 되돌아 보자는 걸세.

운동이 어떤 비전이나 가치를 구체화해 헤게모니에 대항하고, 시민사회에서 상당히 큰 역할을 하기에는 너무 취약한 게 입증된 셈이지. 민주화 이후 시민운동은 헤게모니의 한 주변에 불과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정부에 참여한 그룹, 정치사회와 시민사회에서 새로운 엘리트로 등장한 민주화세대의 역할은 때론 헤게모니에 충실하고, 때론 어설픈 전달자가 되고, 때론 개혁의 이름으로 더 빨리 더 유능하게 헤게모니를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보이네.

한가지 예를 들 수 있네. 서구의 ‘68혁명’에서 추구된 목표는 ‘개인자유’와 ‘사회정의’였네. 이 두 가치는 지양되면서 하나로 통일되기보다 긴장과 함께 좌파운동의 결과를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이끌었네. 좌파운동은 두 가치가 내장하는 긴장을 제대로 이해하고 대면하는데 실패했어. 파리, 버클리, 베를린 등에서 학생들이 추구했던 운동의 가치는 가족·기업·국가 등의 권위로부터의 더 많은 개인자유와 동시에 사회정의를 가장 중요한 목표로 삼았지. 그러나 자유와 정의는 언제나 공존 가능하진 않다는 데 문제가 있지. 68혁명 때 불안정하게나마 결합된 두 가치는 이후 운동의 과정에서 해체됐지. 그 중 개인자유는 신자유주의 레토릭과 교묘하게 결합했고. 반권력, 시장자유, 정체성의 정치, 다문화주의, 나르시즘적 소비주의 등의 요소를 국가권력의 획득을 통해 사회정의를 추구하고자 하는 사회세력으로부터 분리해내는 효과를 발휘했지.

서구 사례가 한국 경험과 꼭 같진 않지만, 한국의 민주화운동과 이후 시민운동들이 도시의 교육 받은 중산층 중심 운동이었다는 사실, 그리고 이 중산층적 비전과 가치가 그들의 경험세계와 동떨어진 노동문제, 사회저변층, 소외계층의 삶의 문제를 절박하게 인식하고, 그에 정치적으로 대처하고자 하는 관심과 의지를 강하게 하는데 얼마나 기여했을까 하는 것을 생각해보면, 오늘날 운동이 가진 성격이나 문제점이 쉽게 이해될 것이라 보네.”

〈정리|손제민기자〉

 

 

 

 

[진보개혁의 위기] 전문가 12인 “성장·분배는 동전 앞뒷면”

입력: 2006년 12월 21일 18:38:49

 
경향신문은 ‘진보개혁 진영의 과제’에 대해 학계 및 현장 전문가들에게 설문을 구했다. 12명이 진보의 발전전략, 증세논쟁, 사회적 대타협, 성장동력 등에 대해 소상한 답변을 보내주었다. 이메일 설문 또는 인터뷰에 응한 사람은 김상조 한성대 교수, 김윤철 진보정치연구소 정책실장, 김형기 경북대 교수, 박상훈 고려대 교수, 박주현 시민경제사회연구소 소장, 신정완 성공회대 교수, 양재진 연세대 교수, 이정우 경북대 교수, 이해영 한신대 교수, 정이환 서울산업대 교수, 조희연 성공회대 교수, 최장집 고려대 교수 등이다.

◇ 진보적 발전과 세금인상…삶의 질 개선 확신부터 줘야

진보 진영이 구상중인 사회·경제 발전 전략은 사실상 ‘증세’를 전제하고 있다. 때문에 보수 진영이 내세운 ‘세금폭탄’ 조어와 프레임을 어떻게 극복하느냐가 과제이다. 설문에 응한 지식인들은 ‘세금폭탄’을 보수 진영의 담론 투쟁으로 규정하며 정면돌파를 주장했다. 경북대 김형기 교수는 “증세냐 감세냐의 소모적 논쟁에 휘말리지 않고 보수 진영이 만든 참주선동적인 ‘세금폭탄’이란 프레임의 덫에 걸리지 않기 위해서는 ‘지속가능한 진보를 위한 조세개혁’ 담론을 제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비전과 발전 전략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를 확보한 뒤 그 토대위에서 ‘국민 부담(조세)’과 ‘혜택(복지)’의 조합을 제시, 국민들이 선택하게끔 하자는 주장이다. 이정우 교수도 “한국의 조세부담률 20%는 우리 소득 수준에서 결코 높은 것이 아니다. 빈약하기 짝이 없는 사회서비스를 개선하는 데는 돈이 들며, 세금을 늘릴 필요가 있다”면서 “다만 세금 인상이 나의 삶을 개선시킨다는 확신을 주어야 하며, 그런 점에서 사회서비스 개선을 반드시 패키지로 발표해야 한다”고 말했다. 조희연 교수는 “한국 사회는 세계 10대 무역 대국에 걸맞은 증세가 불가피하다”며 “적극적 증세와 복지를 통해 안정성을 만들어가는 게 기업과 시장에 합리적”이라고 말했다.

▶[서면 인터뷰 전문] 김상조 교수
▶[서면 인터뷰 전문] 김형기 교수
▶[서면 인터뷰 전문] 이해영교수
▶[서면 인터뷰 전문] 양재진 교수
▶[서면 인터뷰 전문] 조희연 교수
▶[서면 인터뷰 전문] 박상훈 교수
▶[서면 인터뷰 전문] 이정우 교수
▶[서면 인터뷰 전문] 정이환 교수

정이환 교수는 선(先) 조세 정의 확립을 주장했다. 그는 “우선 조세의 형평성 문제를 해결하고, 조세 증가가 국민에 대한 실제 혜택으로 돌아온다는 것을 납득시켜야 한다”면서도 “진보 진영은 모든 것을 조세와 국가에 의해 해결하려는 유혹을 자제하고, 민간 부문이 할 수 있는 역할을 적극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양재진 교수도 “증세는 먼저 신규로 필요한 국가 서비스가 무엇인지를 명확히 제시하고 이 소요를 마련하는 차원에서 다루어져야 한다”며 “OECD 국가보다 예산 규모가 작으니까 하는 식으로 접근해선 곤란하다”고 말했다.

◇ 어떤 가치를 추구해야 하나…복지 강화·약자 대변이 본분

박상훈 교수는 “평등”이라고 답했다. 그는 “평등의 조건이 위협받으면 자유 역시 숨쉴 수 없다”며 “지금 한국 사회는 불평등의 과도한 심화가 자유도 위협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박교수는 “불평등 문제의 핵심은 중산층이 하층으로 전락하는 양극화의 문제가 아니라 오로지 노동 소득에 의존해야 하는 기존의 중하층의 사회 저변층이 급격히 빈곤화된 데 있다”고 말했다.

김윤철 실장은 “예를 들어 분배 정의가 절실한 상황에서 증세하자고 하는 현실 정치 세력이 없다”면서 “증세를 통해 복지를 강화하자는 유일한 세력이 진보”라고 강조했다. 그는 “정치의 본분이 사회적 부나 권력을 분배하는 것인데 이 과정에서 사회적 약자의 입장을 대변할 수 있는 유일한 세력도 진보”라고 말했다. 이정우 교수는 “어느 나라든 시장과 국가, 그리고 시민사회의 적절한 조합을 찾아가는데 우리는 유독 불균형이 심하다”며 “세 가지의 조화, 특히 한국에 빈약한 공공의 영역을 확대해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조희연 교수는 “복지국가의 합리적 핵심을 계승하면서 지구화 시대의 대안적인 사회적 완충국가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양재진 교수는 “좌파 혹은 진보라고 자처하는 분들이 신자유주의와 시장을 진보와 대척점으로 설정한다면, 당분간 진보의 미래는 없다고 본다”고 말했다.

◇ 사회적 타협 어떻게…개혁하려면 ‘대타협’은 필수

“사회적 타협은 꼭 필요하지만 현재와 같은 노동-자본 힘 관계에서는 쉽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대체적인 대답이었다.

이정우 교수는 “사회적 대화 모델의 현실적 가능성이 충분히 논의되지 않으면 모든 진보적 발전전략이 허황된 말장난에 그칠 수 있다”고 말했다.

정이환 교수는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의 개혁이라는 것을 전제로 한다면 사회적 타협은 필수”라며 “타협 자체를 백안시하는 일부 진보진영의 시각은 바뀌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어떤 타협인가가 문제다.

박상훈 교수는 “현재 사회적 타협은 주로 기업의 투자와 고용 확대, 재벌의 소유권 보장, 노동의 임금억제, 생산성 향상 중심이고, 노동의 시민권에 대한 관심은 매우 약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사회적 타협을 주관하고 향후 그 협약을 지속시킬 정치적 힘이 취약하다”고 지적했다.

신정완 교수는 “스웨덴이 19세기 말 사회적 타협이 가능했던 것은 무시할 수 없는 노조의 힘, 사회주의 물결이 있었기 때문 “이라며 “그러나 민노당의 사회연대방안은 정부의 협조를 이끌어내지 못할 것”이라며 진단했다.

김상조 교수는 “작은 성공 경험의 확립과 규칙 위반에 대한 제재를 전제하지 않고는 성공 못한다”고 말했다.

◇ 성장동력 우선순위는…中企·부품소재 산업 묶어라

중소기업, 지식산업, 여성, 지방, 부품소재 산업, 서비스산업…. 개별 부문들 가운데 학자들은 대체로 중소기업과 부품소재 산업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김상조 교수는 “진보적 성장모델은 산업정책의 대상을 중소기업과 소재부품 산업으로 명확히 하는 데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이환 교수는 “대기업의 수출이 국민경제에 기여하는 바는 감소 중”이라며 “부품소재 산업이 대개 중소기업의 몫이니 둘을 하나로 묶어 그것이 성장동력의 최우선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박상훈 교수는 “중소기업과 부품소재 산업은 한국의 제조업이 강해지기 위해 가장 중요한 분야”라고 말했다. 김형기 교수는 “지방에 있는 부품소재 산업의 중소기업을 혁신적 지식기업으로 육성하는 정책 패키지를 추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지식기반 산업과 서비스업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렸다. “서비스산업이 ‘성장의 엔진’으로서의 역할은 크지 않지만 다른 산업의 경쟁력을 좌우하는 ‘중간재’로서 중요하다”(김상조)는 주장이 있는 반면 “서비스산업은 대안이 될 수 없다”(박상훈)는 의견이 있었다. “현재 한국 제조업 수준으로는 향후 지식산업을 통한 상품의 부가가치를 높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주장과 “벤처산업의 여러 결과들이 입증하듯 지식기반 산업의 담론은 과장이 많다”(박상훈)는 의견이 맞섰다.

◇ 참여와 연대, 그리고 환경…실용·생태 적절한 조화 필요

진보의 소중한 가치라는 점에 대해 많은 학자들이 이의를 달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진보의 핵심가치, 최우선 순위여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이의가 존재했다.

조희연 교수는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또 그것을 하면 잘 살 줄 알고 진행한 다양한 프로젝트들을 재검토해야 한다”며 “국가는 거대한 토목건설 사업으로 경기를 부양하고 개인은 어떻게든지 부동산으로 재산을 불리는 이 구조를 혁신해야 한다”고 말했다.

반면 정이환 교수는 “참여와 연대가 진보의 핵심 가치가 되어야 한다는 점에는 이의가 없다”며 “그러나 한국에서 단기간에 진보가 생태주의를 최우선 가치로 내세우기는 어려워 보인다”고 말했다.

박상훈 교수는 “어느 사회든 물질적 기초의 생산이 기본이고 이를 둘러싼 계급의 문제가 중심이고 이를 개선하려는 정치적 갈등과 국가의 문제에 어떻게 접근하느냐가 중요하다”며 “이에 대한 기초 없이 비물질적 가치에 초점을 둔 이른바 신정치학(new politics)을 과도하게 불러들이는 것은 결국 중산층적 비전을 넘어서기 어렵다”고 말했다.

이해영 교수는 “어째 참여정부의 슬로건 이상이 아닌 듯하다”며 “국내차원의 문제에 갇히지 말고 한걸음 더 나아가 세계화 레짐의 개혁도 포함돼야 한다”고 말했다.

양재진 교수는 “이 가치들이 진보 이념에서 중요하긴 하지만, 이 때문에 문제해결적인 실용주의적 처방이 경시되거나 순수함을 잃지 않기 위해 실용주의가 회피되는 운동적 차원의 접근이 적어도 정치사회 내에서는 사라졌으면 한다”고 말했다.

◇ 성장과 분배의 관계…성장정책도 소홀히 말아야

많은 응답자들이 “성장과 분배를 동일선상에 놓는 것부터 이데올로기적”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이해영 교수는 “성장과 분배를 동일면에 놓는 것부터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이데올로기라 본다”며 “성장의 지표로 제시되는 GDP 몇% 따위의 지표 자체가 신자유주의 세계화 체제의 도구이므로, 여기에 집착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박상훈 교수는 “현 상황에서는 분배 효과가 큰 정책을 더 많이 선택해야 하지만 그것이 근본적인 대안이 될 수는 없다”며 “성장과 분배의 이분법은 비현실적이고 문제를 자주 이데올로기적인 선택으로 만든다”고 말했다.

조희연 교수도 “지구화 시대에 분배와 성장의 단순대립은 구 모델일 수 있다”고 말했다. 분배를 희생하지 않는 성장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이정우 교수는 “한국처럼 성장일변도로 국가를 운영해온 나라는 유례를 찾기 어렵다”며 “그런 불균형과 비대칭을 과감히 제거하기 위해 성장과 분배는 동행하는 것이라는 인식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진보 진영이 분배와 평등을 절대시 하지 말고 성장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학자들도 적지 않았다.

양재진 교수는 “서구 좌파가 성장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모른다”면서 “한국 좌파의 성장에 대한 무관심, 성장을 논하면 우파인 양 몰아세우는 듯한 분위기는 없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김형기 교수는 “그동안 진보의 정책대안에서 분배와 복지만 강조되고 성장은 소홀히 해왔다”며 “한국경제는 앞으로 적어도 20년간은 5%대의 경제성장을 유지해야 선진복지사회에 진입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정이환 교수는 “진보 진영이 성장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기 위해서는 분배나 평등을 절대시하지 않는 것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김종목·손제민기자〉

 

 

[진보개혁의 위기] 최장집 교수의 ‘위기 진단’ 인터뷰 전문

입력: 2006년 12월 21일 18:43:50

 
남군의 질문은 간단한 것 같지만 많은 내용을 담고 있고, 그에 답하려면 현재 한국 민주주의 상황의 중요한 부분을 얘기해야 하고, 그 뿐 아니라 그에 대한 전망까지 묻는 것이어서 답하는 일이 간단치 않다고 느껴지네.

강의를 통해 민주주의, 특히 보통사람들의 참여와 요구가 정치체제에 많이 투입될 수 있는 민주주의는 정당이 중심적 역할을 하는 것 이외에 다른 대안이 없다고 되풀이 강조해 왔지. 그러할 때 으레 제일 먼저 떠오르는 질문은 민주노동당의 역할과 위상이 어떠한가, 이 당에 기대를 걸 수 있는 것인가가 아닐 수 없겠지. 그런데 민노당을 생각하면, 어떤 딜레마 같은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네. 민노당이 한국정치와 사회의 민주화를 열망하는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는 지금의 당 구조와 구성원들의 정향을 가지고는 어렵다고 생각하지. 당의 개혁을 위해 두 가지 생각이 가능할 것 같네. 하나는 지금 당을 주도하고 있는 사람들이 현재의 이념적 성격과 행동양식을 바꿔 제도적 실천으로서의 민주주의를 이해하고, 당을 힘 있는 정당 그러니까 실제로 사회의 소외계층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로 경제적, 사회적 삶에 심각하게 충격을 받은 사람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할 수 있는 정당으로 발전할 수 있어야 하겠지. 다른 하나는 이것이 현실적으로 어렵다면, 민노당 밖에 어떤 새로운 정당을 만드는 것일 수 있겠지.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 둘 다가 어렵다는 것이 민노당에 대한 기대를 어둡게 만드는군. 첫 번째 당을 이끄는 사람들이 변화하는 것은, 민주화운동 시기 가졌던 추상적 이념을 벗어던지고 정당으로서 투표자들에게 어필할 수 있고, 선거경쟁에서 표를 많이 획득할 수 있는 당의 인물, 당의 이념과 강령이 만들어져야 하는데 그것이 가능할 것 같지 않기 때문이지. 그것은 당의 노선이 현실적이면서도 이상적인 것을 가져야 하는데 그런 것을 현재의 조건에서 만들어내기란 지난할 것 같아 보이네. 현실로부터 이념이 괴리되는 것은 당의 성원들이 갖는 일종의 타성, 안일함, 나르시즘의 결과라고 보네. 스스로가 강한 정당이 될 수 없는 것에 대한 자기합리화의 심리적 기제가 작동한 결과라고 할 수 있고. 민노당의 지도부가 보통사람들의 삶과 직접 관련된 정치경제적 이슈는 뒤로 미뤄둔 채 북한을 방문해서 김일성묘소를 참배한다든가 통일문제에 사명을 갖고 무비판적으로 북한지도부와 회담하는 모습을 볼 때, 민노당은 해야 할 것을 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과 동떨어져 스스로 자기정당화를 위한 행위에 몰두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네. 민주주의의 제도적 실천이란 투표자들이 당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중요한 것이고 따라서 어떻게 보통 당원과 일반대중들에게 어필할 수 있고 표를 동원할 수 있는가 하는 것에 있지, 당 지도부가 그들 이념에 부합하는 행위를 하면서 스스로를 자족하는 것은 아니니까. 그렇다고 민노당이 아닌 다른 그룹/ 또는 그룹의 형성으로부터 새로운 당을 만든다는 것은 민노당이 변하는 경로보다 더 어려울지 모르지. 오늘날 진보, 개혁, 민중적인 것에 대한 환멸의 시대에 이들 이외에 누가 보통사람들을 대변할 정당을 만드는 일에 뛰어들려 할 것인가. 현실적으로 민노당이 발전하는 문제는, 곧 현재 당을 이끌어가고 있는 사람들이 변하는 것에 기대를 걸 수밖에 없지않을까 싶네.

남군의 생각과는 달리 사회경제적 하부구조가 새로운 당의 출현을 불가능하게 하는 요인은 아니라고 보네. 정당의 출현은 사회경제적 구조의 반영이나 표출이 아니라 어느 구조에서든 민중적인 부문 내지 보통사람들 가운데서 각성된 일부 사람들의 헌신적 참여의 결과이지. 사회경제적 하부구조는 어느 사회든 항상적으로 존재하는 것이기도 하지. 그러니 하부구조가 정당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정당이 하부구조를 표로 재조직할 수 있고 또 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제도적 실천 즉 선거경쟁의 이치라 할 수 있지. 정당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하부구조는 통계수치이거나 그렇다고 상정되는 것일 뿐, 그 자체가 정치적으로 특별한 의미를 갖지는 못한다고 보네.

한미FTA를 반대하는 것, 그것이 노무현정부의 의도대로 관철되느냐 아니냐가 문제의 핵심이 아니라, 이를 반대하는 힘이 정치세력화되고 대안을 조직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네. 한미 FTA는 단순히 협정을 하게 되느냐 마느냐의 문제라기보다 기존의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연상선상에서 나타나는 정책적 표현이라는 사실이 중요하네. 이 거대한 힘을 운동만의 힘으로 막아낼 수 있을까? 또 막아낼 수 있다고 할 때 어떻게 막아낼수 있으며, 또 그 다음에 오는것은 무엇인가? 온 사회의 가치관, 비전이 그런 방향으로 움직이는데 어떻게? 지금은 운동이 문제를 제기하고 힘으로 맞서고 있지만, 정치적으로 조직된 다수를 갖지 않을 때 결국은 국가의 힘, 여론의 힘, 정책의 힘은 다른 형태로 관철될 것이기 때문이지.

북핵문제와 관련해서는, 한국의 진보파들이 대북문제에 대한 분명한 인식, 새로운 인식을 가져야 할 것으로 보네. 새로운 인식이란 민족주의의 시각, 가치관, 비전, 역사이해의 방법을 통해서 문제를 보는 것과는 다른 어떤 인식을 말하는 것일세. 내 생각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일세.

무엇보다 먼저 민족주의와 남북한의 정당성 문제가 중요하지. 남북한 문제를 생각할 때면 늘 정당성 문제가 걸리게 되지. 진보파들에게나 보수파들에게 이 문제가 서로 극단적 관점으로 갈리지만 그것은 거울이미지일 뿐 본질적으로 다른 것은 아니지. 해방이후 남북한은 분단되면서 어느 한쪽이 정당성을 독점할 수 없는 상태, 즉 정당성을 분점하고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분할된 민족정체성 의식을 갖고 있지. 그런데 이 정당성과 관련된 한에 있어서 북한은 남한보다 우위의 입장에 있는 것으로 보이네. 남한은 이 문제에 대해 열등감이 크고 말이지. 무엇이 그렇게 만드나?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민족주의의 이념이고 가치이지. 그것은 북한이 거의 경제적인 자립이 어려운 가운데서도 정신적, 도덕적 우월의식을 가지고 큰 소리 치는 이유가 아닐까 하네. 그리고 남한의 진보파들은 북한이 자주적이고 진보적이고 민중의 이익을 대변하고, 반대로 남한은 보수적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 같네. 이러한 내용이 이른바 NL이라고 부르는 한 진보파그룹의 이념과 가치, 논리구조가 아닐까 하네. 그런데 과연 그럴까?

나는 그렇게 생각지 않네. 일제하 민족독립운동과정에서 북한을 만든 그룹들이 여러 정파들 가운데서 가장 전투적으로 일제와 싸웠다는 점에서 그렇게 주장할 수 있는 면이 있을지 모르겠네. 그러나 해방이후 북한체제를 만든 사람들의 정책에 대해서는 전혀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없네. 그리고 그 이후 현재에 이르는 북한체제의 내용과 성격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고. 나는 오늘의 북한을 볼라치면 고대 스파르타가 떠오르고는 하네. 최고통치자로서 두 사람의 왕, 소수의 원로원, 5명의 선출된 감시관을 가졌다는 점에서 정부형태는 다소 다르지만, 통치자가 절대 권력을 가지고, 소수의 엘리트들과 더불어 통치하는 동안 모든 주민이 먹고살기 위해 최대한 노동하지만 평등하게 못사는 가부장적이고 전체주의적인, 고도로 규율된 통제된 사회라는 점에서 말이지. 이런 사회를 진보적이라거나 민중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만약 한국의 진보파의 일부가 이런 체제를 진보적, 민중적이라고 믿는 어떤 이념, 가치를 갖는다면, 그러한 진보파는 출발지점에서 파탄을 면치 못할 것일세.

그동안 한국현대사는 양분법적으로 이해돼왔네. 한편에서는 (가) 남한만이 정당성을 갖는다고 주장하면서 김일성 국제공산주의세력의 앞잡이라고 말했지. 그런가하면 다른 한편 (나) 북한과 급진 NL그룹 또는 진보적인 민족주의의 이념을 갖는 사람들은 남한은 친일 지주와 식민지부르조아의 보수적 민족주의를 실현하는 체제로 이해하고 있지. 따라서 북한은 민족정당성을 대표하고, 반제식민지투쟁의 기지이고, 반미민족자주의 구현이라고 이해하게 되지.

이는 극단적인 양자택일의 사관을 가능케 하는 논리라고 생각하네. 이것은 화해불가능의 현대사에 대한 인식이고, 어느 한 쪽이 폐기되지 않으면 안 되는 역사관이지. 이 문제를 화해불능으로 만드는 것은 이념으로서 민족주의라고 믿네. 그런데 한국사회의 많은 식자들은, (가)처럼 말할 때 무언가 떳떳치 못한 느낌 그리고 도덕성에 있어 열등감 비슷한 것을 갖는 경우가 많았지. 그러면서도 (나)처럼 북한에 대해 긍정적인 정조를 가지고 말할 때, 만약 그가 이성적이라면 현실과 동떨어진 말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을 것일세. 나는 하나의 좋은 체제 내지 인간사회란 반드시 도덕성의 발원을 그 출발점으로 하는 것은 아니라고 보네. 많은 한국 사람들 특히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사람들 혹은 진보적인 사람들 사이에서 모든 문제를 도덕성의 기준으로부터 바라보는 것을 극복, 지양하는 것은 중요한 과제라고 보네.

보수파 인사들 사이에서 심리적인 불편함을 없애기 위해, 아니면 보수적 체제를 정당화하기 위해 민족주의를 부정하고 이를 발전주의로 대체하는 역사재해석의 방법이 시도되고 있음을 최근 들어 자주 보게 되지. 이를 통해 그들은 일제식민통치 - 해방 후 반공주의체제 - 박정희 개발독재 등으로 이어지는 흐름을 한국사회 발전의 기원이라고 강조하곤 하지. 혹은 다른 측면에서 민족주의를 재강조하거나, 탈근대 이론을 들고 나오거나, 또는 동아시아 공동체 등을 들고 나와 이러한 분열의 역사를 봉합하고 무언가 그에 합리성을 부여하려고 시도하는 것 같네. 그런데 여기에서 이상하게 느껴지는 것은 아무도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현대사를 분석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지. 진보파, 또는 민주주의의 과거 지지 세력들이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그들이 민족주의는 민주주의를 포괄하는 것이라고 이해하기 때문일까?

나는 민족주의를 부정하지는 않네, 그러나 내가 이해하는 민족주의는 일정한 역사적 시기에 역할을 했던 중요한 이념이고 운동이라고 생각하지. 즉 역사적 현상으로서의 민족주의, 근대화의 초기, 제국주의 시기에 하나의 ‘시대정신’이라고나 할까. 그러나 현재의 시점에서 그것은 이념으로나 가치로나 유효하다고 보지는 않네. 더구나 민족주의는 민주주의의 실천과 향상을 위해, 또 한국사회의 민중들의 사회경제적 삶의 현실을 민주주의의 제도적 실천을 통해 해결하는 데 별로 도움이 안 되거나, 오히려 장애로 기능하고 있다고 믿네. 이 문제는 특히 남북한관계를 이해하고 풀어나가는데 있어서도 그러하다고 믿네.

무엇보다 민족주의가 진보적이고, 자주적이고, 민중지향적이고, 통일지향적이라고 생각하는 것부터 성찰해야 될 것일세. 그리고 동시에 통일은 반드시 의문의 여지없이 한국민들이 추구해야할 최우선의 이상이요, 국가목표요, 과제로 여기는 것 역시 다시 생각해봐야 할 걸세. 민족주의와 통일을 거의 종교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많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네. 해방 후 민족주의를 내세운 통일된 민족독립국가의 수립운동은, 밖으로부터 들어온 냉전반공주의의 힘을 이겨낼 만한 것은 아니었고, 결국 그것은 분단과 전쟁으로 귀결되었지. 일민족-일국가의 민족주의의 가치와 이념은 첫 번째 단계에서 분단을 막지 못했고, 두 번째 단계에서 분단된 상태에서 공존의 가치와 이념을 배울 수 없게 했지. 김일성정권에 의한 남침결정은 이러한 민족주의 이념의 가장 확실한 추구라 할 수 있겠지.

이 점에서 우리의 대안은 분명하다고 보네. 변화된 국제환경하에서 민족주의-통일을 다시 추구할 것이 아니라, 다른 노선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지. 그 대안은 민주주의-공존이라고 생각하네. 여기에서 강조해야 할 것은 평화공존이 통일에 이르는 수단이요, 과도기적 중간단계로 설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지. 평화공존은 평화공존 그 자체가 목표요 가치여야 한다는 것이지. 여기에서 평화공존의 내용은 무엇일까? 그것은 곧 남북한 각각이 독립된 주권국가로서 발전하는 것이고, 그렇게 될 때 남북한간 평화의 제도화, 안정적 유지가 가능하다고 믿네. 이러한 것들이 전제될 때, 그리고 평화공존의 이념적 기초위에서 우리는 북한 핵문제를 다룰 수 있을 것일세. 북한이 핵무장을 포기토록 하는 것이 대북정책과 대외정책의 최우선과제가 돼야 한다고 믿네. 북한의 인권문제 역시 외부로부터의 개입이 북한체제를 붕괴시키기 위한 어떤 틈새를 만들려 한다든가 하는 전술적 의도를 갖는 것이 아니라는 조건에서, 그리고 그것이 북한주민들의 인간의 기본권과 생존권을 지원하는데 효과가 있기를 기대할 수 있을 경우 정당하다고 생각하네. 나는 이점에서 오늘날 보수적인 한나라당의 그동안 정부정책에 대한 비판도 어떤 점들은 수용할만한 것이 있다고 생각하지.

나는 한국사회가 강자와 약자, 부자와 빈자로 양분되고 힘을 가진 집단들이 모두 제어할 수 없는 자기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과거보다 더 많이 허용되는 이 불안정한 민주주의 사회, 극단적 갈등과 이익 충돌을 제어하고 이를 민주적으로 통제하지 못하는 체제가 어떻게 전혀 다른 사회를 민족의 이름으로 통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솔직히 이해할 수 없네. 민족주의를 정서적으로 수용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 남북한 사이에 가로놓인 문제들, 그리고 나아가서는 통일이 이산가족 상봉 때 볼 수 있듯이 만나서 얼싸안고 눈물을 흘리면서 민족의 재결합을 다짐한다고 해결될 수 있는 것은 아닐세. 불행하게도 한반도를 가로지르는 분단선은 남북한 간의 분단일 뿐만 아니라 세계적, 그리고 동아시아 지역수준에서 모두 국제적 힘의 관계가 만들어낸 균형점의 표징이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일세. 그럼으로 그 해결을 위해서는, 남북한 간의 협의와 합의는 물론, 한반도분단이 만들어내는 효과에 직접적으로 이해관계를 갖는 관련 당사국들 사이의 주도면밀한 협의와 이를 통한 합의를 끌어냄이 없이는 현재의 분단 상태를 변화시키기는 어려울 것일세. 그것은 냉철한 현실정치의 산물이고, 이를 풀기 위해서는 역시 냉철한 현실 정치적 접근이 절대로 필요한 것이지. 이 문제에 대한 정서적, 감상적 접근이나 포퓰리즘은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하지. 이러한 현실적인 조건들을 고려하지 않고, 남북한의 경계선이 허물어지는 어떤 돌발적인 변화가 생긴다면, 그것은 평화나 통일이 아닌, 6.25전쟁에 버금가는 재난이 아니겠나? 나는 동서독이 통일된 이후 독일을 보면서, 통일이라는 역사적 현상을 부러워하기보다 그 통일을 감당해낼 수 있었던 서독의 민주주의의 힘, 전전의 독일 민족주의의 헤게모니적 힘을 극복한 민주화된 서독사회의 힘을 보면서 무한한 부러움을 느꼈지.

남군, 자네가 생각하듯이 한미 FTA, 북한핵 문제 때문에 한국의 민주주의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제대로 된 정당이 없는 , 즉 민주화세력이 정치적으로 조직되지 못한 것, 그럼으로 인해 민주화운동세력들의 무능력, 민주화세력임을 자임하는 정치인들의 무능력이 오늘날 한미FTA를 낳고, 북핵위기를 속수무책으로 맞고 있다고 보네. 내가 정당의 중요성을 강조할 때 많은 학생들이, 그리고 자네도 마찬가지로 내가 운동이 민주화를 가져왔다고 말하면서 왜 민주화의 동력으로서 운동이 아닌, 정당을 강조하느냐 하는 의문을 갖지. 그리고 자네가 묻듯이 운동은 민주화, 민중주의적 성격을 갖는데 어떤 방식으로 엘리트적인 내용으로 귀결된다 하는지 여러 사람들이 의문을 갖는 것 같네. 마땅히 가질 수 있는 질문인 것 같네.

나는 현재의 시점에서 한국 민주화의 궤적을 들여다보면서 민주화이후 오늘의 사회에서 왜 민중주의적 요소가 이렇게 드라마틱하게 사라져버렸는가 하는 문제에 큰 관심을 갖네. 온 사회를 혁명에 가깝도록 뒤흔들어 놓은 민주화운동은 어디로 사라졌나, 그리고 그것은 무엇을 남겼나 하는 것이지. 그 요란함, 그 영웅주의, 그 많은 민중주의적 담론들, 그 많은 변혁을 향한 외침들은 모두 어디로 갔나? 오늘의 민주적이고 참여적이고 개혁적이고 민족 자주적이라며 큰 소리 치는 민주정부(오늘의 민주정부만은 아니지만)가 그 외침과는 동떨어지게, 아니 그와는 정반대로 왜 노동자와 농민과 같은 생산자집단을 소외시키고, 빈부격차와 사회양극화를 몰고 나가고, 확대되는 저소득층, 빈곤층을 방기하고, 그로 인해 삶의 희망을 상실한 사회 저변층이 살인, 자살, 가족과 함께 죽는 집단자살, 반인륜적 범죄, 가정해체와 같은 범죄 및 사회해체의 온상으로 변해가고 있는 것을 허용하고 있는 것인지, 지난날의 권위주의시절 보다 더 재벌중심-노동배제를 중심으로 하는 성장일변도 정책을 추구하는지, 설명돼야 할 것이라고 보네. 나는 오늘의 시점에서 운동이 만들어낸 민주주의의 결과에 대해 되돌아보게 되는 것일세. 운동의 효능이 갖는 문제를 회의의 눈으로 바라보면서.

민주주의에서는 시민사회의 역할, 헤게모니의 역할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갖지. 그간의 현실은 운동이 어떤 비전이나 가치를 구체화해서 헤게모니에 대항하고 시민사회에서 상당히 큰 역할을 하기에는 너무 취약하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지. 민주화이후 시민운동들은 지나놓고 보면 헤게모니의 한 주변에 불과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네. 정부에 참여한 그룹, 정치사회와 시민사회에서 새로운 엘리트로 등장한 민주화세대들의 역할은 때로는 헤게모니에 충실하고, 때로는 어설픈 전달자가 되고, 때로는 개혁의 이름으로 더 빨리 더 유능하게 헤게모니를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 이들이 그렇게 된 이후 민주화된 한국사회는 순식간에 ‘현상의 유지’ (status quo) 를 복원하게 된 것이지. 그 결과로서 민주화에도 불구하고 권위주의 때보다 결코 적지 않은 소외세력들은 민주 체제 내에서 대표되거나 포섭되지 못하고 있고.

서구에서의 운동의 경험도 한국에서의 민주화운동 이후의 사례와 상당한 유사성을 갖는 것처럼 보이네. 60년대 신세대가 주도한 반체제운동이 ‘신좌파’라는 말을 탄생시키며 유럽과 미국을 휩쓴 바 있지. 최근 내가 읽은 한 책이 이런 문제를 비판적으로 다루고 있는데 자네의 질문 내용과 관련이 있어 소개해 보겠네. 60년대 서구의 운동에서 추구된 목표는 개인자유와 사회정의 두 가지였는데, 이 두 목표랄까 가치는 지양(止揚)되면서 하나로 통일되기보다 긴장과 함께 좌파운동으로 하여금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갖게 만들었다는 주장이지. 좌파운동은 이 두 개의 가치가 내장하는 긴장을 제대로 이해하고 대면하는데 실패했다는 것이지. 파리, 버클리, 베를린 등지에서 학생들이 추구했던 운동의 가치는 더 많은 개인적 자유 즉, 가족, 교육, 기업, 관료체제, 국가의 권위주의적 제약 등으로부터 자유였다는 것일세. 그러면서 동시에 이들은 사회정의를 중요한 운동의 목표로 삼았다는 것이지. 그러나 개인자유와 사회정의는 반드시 언제나 공존 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데 문제가 있지. 사회정의의 추구는 개인적 욕구나 필요와 같은 개인적인 것을 사회적 평등이나 환경적 정의와 같은 일반적 투쟁의 대의에 종속시킬 수 있는 용의를 필요로 하는 것일세.

어쨌든 ‘68 혁명’은 불안정하게나마 이 두 가치를 결합했었는데, 결국은 이후 이두 가치는 분해되었고 그중 개인적 자유의 가치는 신자유주의적 가치와 교묘하게 결합하게 되었다는 것이지. 즉 신자유주의의 레토릭은 반권력적 자유, 정체성의 정치, 다문화주의, 나르시즘적 소비주의 등을 국가권력의 획득을 통해 사회정의를 추구하고자하는 사회세력으로부터 분리해내는 효과를 발휘하면서 말이지. 미국 진보파들은 개인자유의 추구, 소수아이덴티티의 인정과 같은 요구를 추구하는 것과 사회정의의 실현에 필요한 정치적 행동 그리고 이를 위한 집단적 규율을 강화하는 것을 현실에서 양립시키지 못했다는 것일세. 진보파 운동은 신자유주의가 이러한 균열을 쉽게 이용할 수 있는 기회를 허용하고 말았다는 것이지. 지금 내가 소개하는 서구의 사례는 한국의 경험과는 다르지만, 한국의 민주화운동과 이후 시민운동이 도시의 교육받은 중산층 중심 운동이었다는 사실, 그리고 이 중산층적 비전과 가치가 그들의 경험세계와 동떨어진 노동문제, 사회저변층, 소외계층의 삶의 문제를 절박하게 인식하고 그에 정치적으로 대처하고자 하는 관심과 의지를 강하게 하는데 얼마나 작용했을까 하는 것을 자문하게 된다네.이런 문제를 생각해본다면, 오늘날 운동이 갖는 성격이나 문제점이 쉽게 이해될 수 있을 것으로 보네. 요컨대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사회의 일반적 갈등, 그리고 사회정의를 실현하는 문제들은 어떻게 해서든 정당을 통해 대표되게 하고, 선거경쟁에서 사회이슈로 부각되게 하지 않고서는 개선되기 어렵다는 사실을 다시 강조하고 싶네..

 

 

 

[서면인터뷰 전문] 김상조 교수

입력: 2006년 12월 22일 11:33:01

 
- 진보진영, 성공 경험의 축적이 필요 -

<김상조/ 한성대 교수·경제개혁연대 소장>

* 김상조 교수는 11월 오마이뉴스에 발표한 칼럼을 대신 보내주셨습니다.

◇ 경제위기 이전의 10년

1987년 노동자대투쟁은 한국 자본주의의 축적구조가 그 이전 30년 동안의 그것에 비해 질적으로 달라졌음을 선언한 것이었다. 그리고 80년대 말 현실사회주의의 붕괴는 세계화로 표방되는 신자유주의적 국제경제질서의 확립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80년대 말 이러한 대내외적 축적조건의 변화는 한국 자본주의의 역사에서 한 시대가 마감되고 새로운 시대가 준비되어야 할 필연성을 의미한다.

그러면, 대내외적 축적조건의 변화에 직면하여 국내 지배블록(정치권력과 경제권력)은 어떠한 내용의 축적전략 변화를 계획하였고 또 실제로 진행시켰는가? 그리고 이러한 축적조건의 변화에 대응하여 진보진영은 어떠한 내용의 대안을 제시하고 또 실천하였는가?

유감스럽게도, 90년대 한국 자본주의의 질서에는 근본적인 변화가 없었다. 5.16 군사쿠데타 이래 30여년간 유지되었던 한국 자본주의 질서(정부주도적?재벌중심적?노동배제적?대외의존적 질서)는 이미 낡은 것이 되었음에 불구하고, 이를 대체할 새로운 질서 형성과 관련하여 국내의 그 어떠한 세력도 주도권을 행사할 수 없었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10년간의 한국 자본주의 역사는 이미 생명력이 고갈된 낡은 질서를 억지로 끌고 온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상황의 대표적 사례가 바로 1996년 말 노동관계법 날치기 전후의 전개과정이다. ‘참여와 협력의 새로운 노사관계 구축’을 표방하였던 김영삼 정부도, ‘노동시장의 유연화’를 획책하였던 독점재벌도, ‘노동악법의 개폐’를 요구하였던 노동운동세력도 모두 자신의 의도를 관철시키지 못하였다. 노동관계법의 날치기 처리로 정부와 독점재벌은 노사관계에서 주도권을 획득하기는커녕 절차적 민주주의의 명분마저 상실하였다. 노동운동세력은 두 달간의 총파업을 통해 날치기 법률의 폐지에는 성공했으나, 사실상 동일한 내용의 법률안이 또다시 입법되는 것을 막지는 못하였다. 결국 모든 사회세력이 정치적 패배자가 되고 말았다.

1997년 경제위기는 단순히 경제위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정치위기이기도 하다. 재벌은 독점자본으로서의 경제권력을 확립하였지만, 천민자본으로서의 속성을 탈각하지 못하고 오히려 강화할 뿐이었다. 정부는 자본에 대한 절대적 권위를 상실한 지 이미 오래되었을 뿐만 아니라, 축적조건을 정비하는 총자본으로서의 기능과 관련하여서도 재벌과 끊임없이 마찰을 빚었다. 이러한 지배블록 내부의 균열은 결국 노동대중과 시민사회에 대한 헤게모니 상실로까지 이어졌고, 사회통합력은 완전히 마비되었다. 한편 노동대중과 시민사회는 1987년 이후 한국 사회의 새로운 세력으로 등장하였지만, 객관적 조건의 악화와 주체적 역량의 미성숙으로 인해 대안세력으로 결집되지 못하였다. 1997년 경제위기는 그 모순의 폭발일 뿐이다.

◇ 경제위기 이후의 10년

어떠한 계층계급도 사회통합의 주체로 기능할 수 없을 정도로 낡아버린 기존 질서에 대해 1997년 경제위기는 IMF라는 외적 강제를 통해 한국 자본주의를 새롭게 재편하는 계기가 되었다.

재편의 기본방향은 IMF가 대변하는 앵글로색슨식 경제질서, 즉 신자유주의적 경제질서를 확산시키는 것이었지만, 동시에 그 과정은 과거 기득권층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수구적 노력으로 크게 왜곡되었다. 이러한 이중적 모순의 결과 노동대중은 더욱 열악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으며, 시민사회의 에너지는 분산된 반면, 삼성그룹을 핵으로 한 소수의 거대재벌은 보다 근대화된 독점자본으로서 경제영역을 넘어 정치사회적 영역으로까지 그 지배력을 확장하였고, 정치권력(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은 그 주관적 의도와는 무관하게 이 모든 과정의 충실한 집행자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 결과가 현재 우리 눈앞에서 전개되고 있는 산업별·기업규모별·고용형태별·소득별 심각한 양극화 현상이다.

그렇다면 경제위기 이후의 구조조정을 통해 한국사회에는 새로운 안정적 질서가 확립되었는가? 이른바 신자유주의적 지배구조가 안정화되었는가? 결코 그렇지는 않다. 최근 한국사회가 급격하게 보수화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노무현 대통령도, 삼성그룹의 이건희 회장도, 조중동도, 민주노총도 한국사회의 미래를 자신의 의도대로 기획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이다. ‘대안이 없다’라는 위기감이 진보진영에 깊게 드리워져 있는 것만큼이나, 기득권 세력도 내일을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다.

한국사회의 어떤 세력도 자신의 의도를 다른 세력들에게 강제할 수 있는 권위는 갖고 있지 못하지만, 모든 세력이 다른 세력들의 의도를 좌절시킬 수 있는 거부권(veto power)은 확실히 갖고 있는, 그 결과 어떠한 변화도 불가능한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 사회 제세력들이 모두 불만족스러워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부 동력에 의해서는 그 어떤 변화도 불가능한 상황, 바로 10년 전에 경험했던 그 최악의 사회구조가 지금 재현되고 있다. 한?미 FTA 추진이라는 ‘외부 충격요법’을 통해서 (죽이 되던 밥이 되던) ‘내적 변화’의 실마리를 찾으려고 한 노무현 정부의 절망적 선택이 현 상황을 대변하고 있다.

경제위기 이후 10년 동안 한국사회는 결코 과거로 되돌아갈 수 없는 비가역적 변화(irreversible changes)를 경험하였다. 원했든 원치 않았든, 그렇다. 그러나 과거의 낡은 질서는 이미 사망선고를 받았지만, 새로운 질서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그 와중에 현재의 고착화된 이해관계 구조를 벗어날 수 없는 최악의 불안정 균형 상황이 만들어졌다. 혁신을 위한 내부 동력을 창출할 수 없다면, 이는 위기의 징후이다. 그런 의미에서 2006년은 1996년과 별반 다르지 않다.

◇ 사회통합의 전제조건

경제위기 이후 10년이 경과한 현재까지 한국사회는 여전히 통합의 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른바 ‘양극화’ 현상을 극복하기 위한 사회통합의 새로운 조정메커니즘을 모색하는 것은 진보진영의 가장 중요한 과제이다. 아직도 과거 개발독재시대에 대한 향수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한국의 보수세력에게서 새로운 변화의 동력을 기대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여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결코 그 ‘진정성’을 의심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지난 20년 동안의 진보진영의 노력이, 그리고 지난 4년 동안의 노무현 정부의 노력이 사실상 아무런 성과를 낳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 통합의 새로운 조정메커니즘은 선험적 설계의 대상만은 아니다. 계몽과 설득에 의해 사회통합의 설계도가 현실에서 작동하는 것이 아니다. 노무현 정부의 지리멸렬함은 그 ‘진정성’의 부족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다.

사회통합은 다양한 이해관계자 사이의 권리와 의무를 재정의하는 문제이지만, 동시에 그 권리와 의무가 이행되는 과정을 변화시키는 현실의 문제이다. 따라서 통합을 촉구하는 사회적 담론이 선험적 당위성 차원을 벗어나지 못한다면, 그로 인한 실패의 경험은 오히려 새로운 대안에 대한 신뢰를 잠식할 뿐이다. 김근태 의장의 뉴딜 제안은 노무현 대통령의 실패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지금 한국의 진보진영에게 가장 결여되어 있는 것은 ‘대안’ 그 자체라기보다는 ‘결코 과거로 되돌아갈 수 없는 작은 성공 경험들의 축적, 그로 인한 대안의 실현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다.

사회통합, 즉 협력 게임(cooperative game)이 비협력 게임(non-cooperative game)보다 우월한 균형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은 경제학에서 널리 인정되는 명제이다. 노무현 정부의 과제는 협력 게임의 우월성을 논증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개개의 경제주체들이 협력 게임의 규칙을 충실히 준수하도록 유도하는 제도와 관행을 확립하는 데 있다.

유감스럽게도, 지난 4년 동안 노무현 정부의 경제정책은 그 반대방향으로 진행되었다. 경기침체를 빌미로 한 재벌들의 사보타주와 관료들의 책임회피에 밀려 구조개혁의 과제는 방기되었다. 정부정책은 경제주체들의 의사결정 과정에서 외생변수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로비의 대상으로 전락하였을 뿐이며, 규칙을 준수하는 것은 바보와 같은 일로 치부되기에 이르렀다.

사회통합은 규칙위반에 대한 제재를 전제하지 않고서는 성공할 수 없다. 노무현 정부가 사회통합의 새로운 조정메커니즘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규칙 위반에 대한 엄정한 제재의 원칙을 확립하여야 한다. 개별 경제주체가 협력 게임의 규칙에 충실하고자 하는 유인(incentive)은, 협력으로부터 나오는 추상적 이익(benefit)을 선언함에 의해서 아니라, 협력 게임으로부터 이탈했을 때의 구체적 불이익(cost)을 보여줌으로써 생성되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의미에서, 기업지배구조 개선(재벌개혁과 금융개혁)은 통합의 새로운 조정메커니즘 구축을 위한 충분조건은 아니지만, 결코 생략할 수 없는 필요조건이다. 재벌개혁과 금융개혁은 과거 개발독재시대 이래 고착화된 권리와 의무의 불균형을 시정(불특정다수 이해관계자의 권리를 강화)하고, 그리고 그 권리와 의무의 집행과정의 왜곡을 개선(감독기구와 사법기구 등 국가관료기구의 민주성을 강화)하는 것이다. 특히 재벌개혁과 금융개혁은 노동대중과 시민사회의 주도 하에 구체적 성공 경험을 축적할 수 있는, 그럼으로써 진보적 대안의 실현 가능성에 대한 믿음을 축적할 수 있는 과제이다.

◇ 진보진영의 과제

서구 자본주의의 역사에 비추어본다면, 재벌개혁 및 금융개혁(즉 시민적 권리의 강화 및 국가기구의 민주성 확립)은 진보진영의 과제라기보다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과제이다. 그러나 과거 한국 자본주의가 실현하였던 ‘압축과 비약’의 성장은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과제를 생략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고, 그 결과로서 형성된 현재의 지배블록(정치권력과 경제권력)은 여전히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자신의 과제로 인식하지도 못하고 있다. 또한 진보진영은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부르주아의 것’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나아가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진전이 신자유주의적 지배질서의 강화로 귀결될 것을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과제로 설정하기를 거부하고 있다.

그 결과는 무엇인가? 정치적?절차적 민주주의의 진전에도 불구하고, 경제적?실질적 민주주의는 후퇴하고 있다. 한국 역사상 가장 진보적인 대통령의 집권에도 불구하고, 한국사회는 가장 보수화되었다. 정치적 집권세력의 교체에도 불구하고, 경제정책의 결정권은 관치경제의 화신인 관료집단이 장악하고 있다. 소재부품산업과 중소기업의 몰락에도 불구하고, 산업간?기업간 연관관계를 더욱 약화시키는 재벌 보호정책, 아니 재벌총수 보호정책이 득세하고 있다. 노동대중의 절망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정규직 노동자를 통해 비정규직 노동자를 통제하는 분리지배 전략은 더욱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시민단체의 성장에도 불구하고, 시민운동가의 인적 역량의 재생산 기반은 더욱 척박해지고 있다.

무엇이 진보적 과제이고, 무엇이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과제인가? 한국의 진보진영은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가? 그 기준은 무엇인가?

지금 한국의 진보진영에 대안이 없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거대담론은 과잉이다. 진보진영의 모든 세력들이 하나의 대안에 합의하지 못한다고 해서 위기라고 말하면 안된다. 진보의 과제는 다양하며, 우리의 지척에 널려 있다. 알파에서 오메가까지 진보의 설계도를 다 완성한 다음에 실천에 나서야 하는 것도 아니다. 각자 중요하게 생각하는 진보의 과제를 충실히 수행하는 것이 우선이다. 분업과 협업의 원리를 통해 진보진영의 전체 역량을 강화하는 것이 급선무다. 작은 성공 경험이 축적되어 갈 때, 진보의 큰 그림은 발견될 것이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20년, 30년 후의 추상적 목표를 던져놓고서는, 5년 후의 구체적 성과에 집착하는 노무현 대통령의 실패를 반복해서는 안된다.

무능하고 부패한 보수세력이 거부하는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이 진보진영의 과제이다. 그것이 어떠한 변화이든 간에…. 지금은 실패의 경험이 아니라 성공의 경험을 축적함으로써 대안의 성공 가능성에 대한 자신감을 회복하는 것이 필요한 시점이다.

 

 

[서면인터뷰 전문] 김형기 교수

입력: 2006년 12월 22일 11:39:21

 
<김형기/ 경북대 교수·경제학>



1. 신자유주의 시대 사회발전을 위한 진보적 가치의 당위는.

2. 진보·개혁 진영 발전 전략·모델 중 한국 실정에 가장 적합한 것은.

3. 성장과 분배는.



<1,2,3 통합 답변>

=〉 시장근본주의, 자유기업주의, 성장지상주의를 핵심이념으로 가지는 신자유주의는 경제와 사회의 불안전성과 불평등성을 증대시킬 뿐만 아니라 장기적으로 성장잠재력도 떨어뜨리는 자기모순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지속불가능하다. 신자유주의의 중요한 한 부분을 구성하는 주주자본주의, 즉 기업지배구조에서 주주만이 의사결정에 참여하고 주가수익의 극대화를 위한 단기주의적 경영이 이루어지는 자본주의가 기업의 장기적 투자를 저해하여 저성장의 원인이 되고 있다는 사실은 재벌 계열인 삼성경제연구소의 연구에서도 밝혀지고 있다. 신자유주의의 첨단을 달리는 미국에서 그것을 주도해온 부시정권이 2006년 중간선거에서 참패한 것은 이라크 전쟁 요인 못지않게, 신자유주의 경제가 초래한 중간층 붕괴, 빈부격차 확대 때문이라는 진단은 신자유주의의 지속불가능성을 시사해 주고 있다. 사회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해서는 보수적인 신자유주의가 아니라 진보적인 대안적 발전모델을 지향해야 한다.

주주만이 기업의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주주자본주의가 아니라 주주, 노동자, 채권자 등 기업 이해관계자들이 함께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이해관계자 자본주의, 시장에 대한 규제철폐에 따라 부익부 빈익빈이 되고 경제불안정성이 증폭되고 있는 자유시장경제(liberal market economy)가 아니라 공평성 실현과 경제안정을 위해 시장에 국가가 적절하게 개입하고 노사정민 등 경제주체들간의 사회적 대화와 사회적 합의를 통해 경제를 운영하는 조정시장경제(coordinated market economy), 지구촌을 양극화시키고 경제위기를 초래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적 글로벌화가 아니라, 지구촌의 모든 국가와 사람들에게 기회균등을 보장하는 공정한 글로벌화(fair globalization)와 세계경제의 격변성(volatility)과 불공평성을 줄이기 위한 ‘글로벌 거버넌스’를 구축하는 관리된 글로벌화 등 대안적 발전모델을 구성하는 경제사회 질서들은 한국의 지속가능한 발전 즉 지속가능한 한국(sustainable Korea)를 위해 반드시 요구된다.

21세기 초 지금의 시대 정신은 더 이상 신자유주의가 아니다. 신자유주의를 넘어서는 대안적 발전모델이 시대정신이다. 대안적 발전모델은 더 이상 지속불가능한 기존의 진보 모델, 즉 기존의 사회주의와 사회민주주의, 한국의 경우 발전국가 혹은 개발독재 모델이 될 수 없다. 그것은 글로벌화와 지식기반경제라는 새로운 경제질서에 적합하면서 경제적, 사회적, 환경적으로 지속가능한 진보(sustainable progress) 모델이라야 한다. 요컨대 ‘지속가능한 진보를 위한 대안적 발전모델’을 지향하는 새로운 진보 이념이 21세기 세계와 한국이 요구하는 시대 정신이다.

필자와 필자가 참여하고 있는 좋은정책포럼은 ‘지속가능한 진보’를 21세기 한국사회가 추구해야할 새로운 이념으로 보고 있다. 필자가 제안하고 있는 새로운 진보인 지속가능한 진보는 ‘참여-연대-생태’라는 3대 가치를 지향하고 ‘분권-혁신-통합’라는 3대 정책을 추진함으로써 구현될 수 있다. 시장경제의 토대위에서 한편으로 시장경제의 역동성을 최대한 발휘시키면서 다른 한편으로 시장경제의 역기능과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참여(참여민주주의), 연대(복지공동체), 생태(생태주의)의 가치를 지향할 때 비로소 지속가능한 발전을 할 수 있다. 한국의 경우 중앙집권적 수도권일극발전체제, 대량생산경제가 이미 한계에 달하고 경제사회의 양극화가 심각하기 때문에, 이러한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정책 패러다임이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분권-혁신-통합이란 3대 정책이다(졸저, 한국경제 제3의 길: 지속가능한 진보를 위한 대안적 발전모델, 2006, 한울아카데미 참조).

중앙집권 수도권 일극발전체제를 지방분권 다극발전체제로 전환시키는 분권정책, 요소투입형 대량생산경제를 혁신주도형 지식기반경제로 전환시키는 혁신정책, 경제사회적 양극화와 정치사회적 갈등을 해소하는 통합정책이 추진되어야 지속가능한 진보를 기대할 수 있다. 이러한 지속가능한 진보를 위한 대안적 발전모델의 핵심은 진보적 신성장체제(New Growth Regime)인 ‘혁신주도 동반성장체제’, 복지공동체와 학습복지를 포함하는 새로운 진보적 복지모델이다. 저성장과 양극화라는 한국사회경제가 당면한 양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혁신주도 동반성장체제’를 구축해야 하고, 지식기반경제에서 성장과 복지의 선순환 구조를 정착시키고 국민의 삶의 질을 실질적으로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복지공동체와 학습복지를 지향해야 한다.

이러한 참여-연대-생태의 가치를 지향하고 분권-혁신-통합의 정책을 추진하는 것을 통해 대안적 발전모델을 실현하는 것이 한국경제의 제2 장기상승을 추동하고 한국사회를 선진화하는 길이다. 그것은 기존의 개발독재(발전국가)와 현재의 신자유주의 양자를 넘어선다는 의미에서 ‘한국형 제3의 길’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의 핵심은 ‘혁신주도 동반성장체제’와 새로운 진보적 복지모델이다.

여기서 동반성장체제는 대-중소기업간, 수출부문과 내수부문간 산업연관의 강화, 계층간 기회 및 소득격차를 줄이고 사회적 배제를 없애는 사회통합의 강화가 이루어지는 성장체제이다. 이러한 동반성장체제가 지속가능하기 위해서는 혁신주도 경제가 되어야 한다. 혁신없는 동반성장은 동반침체로 퇴락하기 쉽고, 동반성장 없는 혁신은 사회적 갈등을 심화시킬 가능성이 높으므로 모두 지속가능한 성장을 할 수 없다. 치열한 글로벌 경쟁이 이루어지는 현대자본주의에서 진보가 동반성장만 강조하면 국민경제가 동반침체할 우려가 있다. 지속가능한 성장을 위해서는 진보가 동시에 혁신(innovation)을 강조해야 한다. 오늘날 글로벌 지식기반경제에서 유효수요를 높이는 수요측면 국가개입과 분배를 강조하는 케인주의만으로는 지속가능한 성장을 할 수 없다. 혁신능력을 높이는 공급측면 국가개입과 혁신을 강조하는 슘페터주의도 필요하다. 케인즈주의와 슘페터주의의 결합이 필요하다.

그동안 진보적 정책대안에서는 분배와 복지 정책만이 강조되어 왔고 성장정책은 소홀히 되어왔다. 성장지상주의에 빠져있는 보수적 신자유주의는 마땅히 비판해야 하지만 성장 담론을 보수 담론으로 치부하여 배척하는 관점과 태도도 비판받아야 한다. 성장이 없으면 복지의 원천과 일자리를 창출할 수 없다는 냉엄한 경제현실을 외면하면 진보진영은 비현실적 집단으로 낙인찍히고 따라서 국민의 지지도 잃게 된다. 진보적인 성장 담론이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필자가 주장하는 ‘혁신주도 동반성장체제’론이다. 성장지상주의에 편향되어 있는 보수적 성장담론보다 이러한 진보적 성장 담론이 우월해야 다수 국민들이 진보를 지지할 것이다. 한국경제는 앞으로 적어도 20년간은 5%대의 경제성장을 유지해야 선진복지사회에 진입할 수 있다.

이와 함께 기존의 복지국가 모델을 넘어서는 새로운 복지모델을 지향해야 한다. 실업자와 저소득층에게 중앙정부가 일률적으로 현금급부를 하는 기존의 복지국가(welfare state) 모델로는 글로벌화와 지식기반경제 시대에 국민의 삶의 질을 실질적으로 높이는데는 한계가 있다. 다른 한편 국가복지를 축소하고 교육, 의료, 육아, 양로 등 사회서비스를 재상품화하는 신자유주의적 복지모델은 지지할 수 없다. 복지국가와 신자유주의 복지모델을 넘어서는 제3의 길은 바로 복지공동체(welfare community)와 학습복지(learnfare)를 핵심 내용으로 하는 새로운 진보적 복지모델로 나아가는 것이다.

복지공동체는 육아, 양로, 교육, 의료 등 사회서비스를 지방정부가 지역 NPO/NGO와 파트너십을 형성하여 현물급부를 하는 것이다. 제3섹터 혹은 사회적 경제(social economy)가 적극적 역할을 하는 이러한 복지공동체는 선진국에서 기존의 복지국가의 한계를 넘어서는 새로운 진보적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학습복지는 기존의 단순한 현금급부 중심의 복지(welfare)로는 노동자와 빈민의 실업과 빈곤을 극복하는데는 한계가 명백하다는 반성에서 출발한다. 최대의 복지는 괜찮은 일자리(decent job)를 가지는 것인데 지식기반경제에서 노동자가 괜찮은 일자리를 가지게 만들려는 것이 바로 학습복지이다. 학습복지는 노동자들에게 지식기반경제가 요구하는 지식과 숙련을 습득시키는 학습(learning) 특히 평생학습을 제공함으로써 고용을 통한 복지를 실현하고자 한다. 참여정부가 2007년부터 실시하는 근로소득지원제도(EITC)는 실업급부를 받는 것보다 일을 하는 것이 이익이 되도록 하여(’Make Work Pay’) 고용을 촉진하려는 것인데 이는 아직 학습복지로까지 나아가지 못하고 단순한 노동연계 복지(workfare)에 머무는 것이다. 단순한 복지(welfare)와 노동연계복지(workfare)를 넘어 학습복지(learnfare)를 실현해야 지식기반경제에서 국민의 삶의 질을 실질적으로 향상시킬 수 있다.

혁신주도의 지식기반경제에서 노동자의 혁신능력과 지식 및 숙련수준을 높이는 학습을 제공하는 방향으로 분배정책이 수립될 때 성장과 분배, 성장과 복지가 선순환을 하여 지속가능한 성장과 지속가능한 복지가 실현될 수 있다. 실업자와 빈민에게 단순한 소득재분배를 하는 방향으로 분배정책과 복지정책을 실시하면 실질적 복지가 구현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분배 혹은 복지가 성장을 저해할 수 있다. 지식기반경제에서는 학습복지와 복지공동체가 실현될 때 성장과 분배, 성장과 복지의 양립이 가능하다.



4. 증세와 감세 문제는

=〉 대안적 발전모델의 핵심 요소중의 하나인 복지공동체와 학습복지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그것에 적합한 재원조달 방안이 마련되어야 한다. 이 문제가 증세냐 감세냐의 소모적 논쟁에 휘말리지 않고 보수진영이 만든 참주선동적인 ’세금폭탄’이란 프레임의 덫에 걸리지 않기 위해서는 ‘지속가능한 진보를 위한 조세개혁’이란 담론을 제시해야 한다. 지속가능한 진보의 관점에서 우리나라의 조세제도의 문제점이 무엇인지를 국민에게 알리고 국민에게 가능한 선택지를 제시하고 국민적 합의를 도출하는 방향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해결해야 한다. 진보진영이 제시하는 비전과 발전전략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를 폭 넓게 확보하고 그 토대위에서 국민의 부담(조세)과 혜택(복지)의 조합들을 제시하고 국민이 선택하게 만드는 것이다. 여기서 진보진영으로는 ‘저부담 저복지의 저수준 균형이냐 고부담 고복지의 고수준 균형이냐’는 양자택일의 담론을 제시할 수 있다. 이 경우 비생산적이고 비복지적이며 상층 기득권 유지적인 정부지출을 대폭 줄이는 정부 예산개혁 프로그램을 동시에 제시해야 한다.



5. 앞서 진보 진영의 사회발전 전략 논의 문제는.

=〉 무엇보다 실현불가능하고 지속불가능한 사회발전전략을 제시해서는 안된다. 가까운 장래에 실현가능하고 장기적으로 지속가능한 비전과 정책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그리고 현실 사회주의 체제의 붕괴에서 보여주는바 고비용-저효율의 진보는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뼈저린 역사적 교훈을 명심해야 한다. 그리고 사회발전 전략은 단순한 도상 전략이나 이상주의적 아이디어 제시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현실적인 제약조건 즉, 세계경제의 흐름, 사회세력 관계, 국민들의 지배적인 가치관 등을 고려하여 실현가능한 발전전략을 제시해야 한다. 이러한 현실주의적 관점에 설 때 사회발전전략은 점진적인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다. 사회운동은 급진적으로 전개할 수 있으나 사회발전전략은 점진적으로 추진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냉철하게 인식하지 못하는 논의들이 진보진영내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문제점을 극복해야 한다. 그리고 사회발전전략은 언제나 사회적 타협에 기초하여 추진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사회발전전략은 혁명전략이 아니기 때문이다.

진보적 사회발전전략은 그 자체로 고립된 학술적 논의에 그쳐서는 아무런 쓸모가 없다. 한편으로는 진보적 사회운동과 연계하여 제기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다양한 사회계층과 사회적 대화를 하면서 수립해야 한다. 진보적 사회운동의 뒷받침 없는 진보적 사회발전 전략은 사상누각에 불과하고 다양한 사회계층과의 사회적 대화 없이 수립된 ‘우리끼리’ 발전전략은 헤게모니적 프로젝트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진보적 사회발전 전략은 대안적 발전모델에 동의하는 각계각층의 사람들을 결집하는 ‘대안적 발전 연합’(alternative development coalition)의 결성에 기여할 수 있는 방향으로 수립되어야 한다. 좁은 진보진영내에서만 동의될 수 있는 폐쇄회로적 발전전략을 제시해서는 사회발전을 주도할 수 없다.

현재 한국의 정세에 비추어 볼 때 진보적 성장 담론과 진보적 안보 담론이 결여되어 있는 것이 큰 문제다. 다수 국민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성장과 안보에 대해 진보적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아울러 아직까지 사회발전 전략을 한편으로 거시(mecro) 체제수준, 중시(meso) 제도수준, 미시(micro) 개별 경제사회주체수준(생활세계) 등 세 수준에서, 다른 한편으로 세계Global-한국National-지방Local 등 세 수준에서 상호연관되게 통합적으로 제시하고 있지 못한 한계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남북한을 포괄한 한반도 전체수준에서의 사회발전전략이 제시되어야 한다. 한국이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이므로 한국의 사회발전전략 수립에는 반드시 통일 문제가 포함되어야 한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진보진영은 한국특수적인 분단체제를 넘어서는 통일한국의 사회발전전략이 제시되고 있지 못하다.



6. 중소기업, 지식, 여성, 지방, 부품소재 산업, 서비스 산업 등 여러 부문의 개별적 성장 동력 중 우선 순위?

=〉 서로 다른 차원의 것이라서 우선순위를 정하기보다는 종합적으로 상호보완적으로 성장동력 확보 정책을 추진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지방에 있는 부품소재 산업의 중소기업을 혁신적 지식기업으로 육성하는 정책패키지를 추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굳이 우선순위를 부여한다면 지식, 부품소재산업을 상위에 위치지울 수 있을 것이다.



7. 지속가능한 진보는 참여-연대-생태의 가치, 분권-혁신-통합의 정책이란 정의도 있습니다만, 가치 부분에서 참여, 연대의 문제와, 환경의 문제는 어떻게 자리매김?

=〉 참여는 민주주의의 심화, 연대는 복지의 확충, 생태는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한 가치이다. 3대 가치가 결합되어야 지속가능한 진보를 실현할 수 있다. 이 3대 가치는 자본주의내에서(within capitalism)의 대안적 발전모델의 실현, 나아가 자본주의를 넘어서는(beyond capitalism) 대안체제의 구상에도 기여할 수 있다.



8. 경향신문은 ‘진보가 선점해야 할 10대 의제’로 ①조세개혁 ②부동산 ③교육정상화 ④재벌개혁 ⑤저출산고령화 ⑥소수자문제 ⑦건강불평등 ⑧생태주의 ⑨비정규직 ⑩빈곤문제를 제시한 바 있습니다. 진보 전략에서 개별 의제들은 어떻게 다루어져야?(앞선 질문에 반영해주셔도 좋습니다)



=〉교육불평등 해소(공교육 정상화와 사교육비 절감)가 가장 중요한 의제라고 생각한다.



9. 진보 전략 하에서 ‘사회적 대타협’의 문제?

=〉 앞에서 지적했듯이 진보적 사회발전모델은 노사정민간의 사회적 대타협 없이는 실현될 수 없다. 물론 현재 한국의 현실에서 노-사 양측의 지향과 행태를 볼 때 사회적 대타협이 한꺼번에 이루어지기를 기대할 수 없다. 한편에서 사회적 투쟁이 진행되면서 다른 한편에서 사회적 투쟁의 타협물인 제도화가 진행되는 과정이 누적되어 마침내 사회적 대타협이 이루어진다고 봐야 할 것이다. 즉 Mini 타협들이 축적되어 Grand 타협이 이루어진다고 봐야 할 것이다. 진보진영에서 아직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사회적 대타협 불가능론을 제기하고 있으나 글로벌화와 지식기반경제 시대에 지속가능한 성장을 하려면 사회적 대타협이 불가피하다는 점을 경제주체들이 인식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문제는 노-사-민(시민사회)간의 사회적 대화를 주선하고 지원하는 정부의 능동적 역할이 중요한데, 정부가 그렇게 역할을 하려면 정부가 노와 사 그리고 민으로부터 신뢰를 받아야 한다. 그리고 정부는 사회적 대타협의 토대인 사회적 대화를 가능하게 하는 경제사회주체 상호간의 신뢰와 협력이라는 사회자본을 형성시키는 작업을 꾸준히 추진해야 한다.



10. 2007년은 대선의 해, 진보 진영의 정치적 리더십 구축 문제?

=〉 2007년 대선국면에서는 ‘지속가능한 진보냐 지속불가능한 보수냐’라는 담론이 형성될 수 있도록 프레임을 짜서, 지속가능한 진보를 위한 대안적 발전모델을 지지하는 각계각층의 사람들을 결집시키는 폭넓은 대안적 발전연합을 결성한 토대위에서 그것에 적합한 정치적 리더쉽을 구축하고 진보적이지만 국민을 통합할 수 있는 인물을 대통령 후보를 옹립해야 한다. 이미 땅에 떨어진 진보개혁세력의 위신을 획기적으로 회복시킬 비전과 담론 제시없이 단순한 정치공학적 접근을 통해 합종연횡하여 정권을 재창출하려는 시도는 무모하다고 생각된다. 한편 대안적 발전연합을 주도할 세력이 이미 국민에게 신뢰를 잃은 정부 여당의 핵심인물이나 집단이 된다면 국민의 지지를 받는 대안적 발전연합이 형성될 수 없고 따라서 2007년 대선에서 진보는 가망이 없을 것이다.

 

 

[서면인터뷰 전문] 이해영교수

입력: 2006년 12월 22일 11:34:15

 

<이해영/ 한신대 교수·국제경제>

1. 신자유주의와 진보적 가치는.

=〉 우리시대 최고의 진보적 가치는 평등과 연대라고 봅니다.


2. 한국에 적합한 진보 발전 전략은.

=〉총체적 발전대안에 대한 모색은 저로서는 답하기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현재 한국경제가 당면한 성장잠재력 약화의 가장 큰 원인은 신자유주의라고 봅니다. 다시 말해 신자유주의 자체가 성장지체의 핵심요인으로 전화되었다는 것이죠. 예를 들어 성장잠재력 약화의 원인으로 지목되는 산업연관의 약화, 고용없는 성장, 금융의 중개기능 약화, 사회양극화, 저출산 이모든 것이 신자유주의에 원인을 두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를 견제, 제어하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성장효과가 나올 수 있습니다. 또한 한국사회에 안착된 세계화레짐은 단순히 내부요인으로는 설명되지 않기 때문에 trade를 통해 외부적으로 유입되는 요인의 비중이 갈수록 증대됩니다. 결국 이를 필터링할 수 있는 방법은 국가권력이외에 사실상 찾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통상레짐을 개혁하기 위한 대안으로 공정무역협정(FTA!)을 구상중입니다.



3. 성장과 분배 문제는.

=〉성장과 분배가 동일면에 놓일 수 있는 것인지 부터 살펴야 합니다. 이 자체가 저는 이데올로기라 봅니다. 그리고 성장과 발전은 서로 다른 개념입니다. 그리고 먼저 성장을 보자면 성장의 지표로 제시되는 GDP 몇 %따위의 지표로는 신자유주의를 넘어서기 어렵습니다. 왜냐 면 GDP개념 자체가 세계화레짐의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GDP=소비+정부지출+투자+순수출)



4. 증세와 감세 문제는.

=〉한국의 담세율은 여전히 낮습니다. 증세는 불가피합니다. 하지만 그 자체가 정치적 힘관계의 산물이기 때문에 이는 사실 정치공학의 문제로 접근해 왔습니다. 어쨋든 직접세를 중심으로한 세제개편은 불가피하겠죠.





5. 진보 전략 논의의 문제는.

=〉현재의 세계화레짐에서 국내논의만으로는 그것이 무엇이든 반쪽’미만’의 진실입니다.

세계화레짐은 그 자체로 국내의 policy space를 구조적으로 제약합니다. 특히 한미FTA가 그 대표적 사례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의 개혁없이, 혹은 이를 포함한 발전전략없이, 세계시장의 민주적 거버넌스의 도출없이 모든 대내프로그램은 온전히 그 성과를 거둘 수 없습니다. 현재의 논의는 이를 간과하고 있습니다.



6. 중소기업, 지식, 여성, 지방, 부품소재 산업, 서비스 산업 등 여러 부문의 개별적 성장 동력 중 우선 순위?

=〉현재 한국의 제조업 수준으로는 향후 지식산업을 통한 상품의 부가가치증가가 가장 중요하다고 봅니다. 즉 제조업 상품에 지식가치를 더해서 상품가치를 높이는 것이죠. 나아가 지금의 trade balance는 지식수지 knowledge balance개념으로 보완되어야 하겠죠.



7. 지속가능한 진보는 참여-연대-생태의 가치, 분권-혁신-통합의 정책이란 정의도 있습니다만, 가치 부분에서 참여, 연대의 문제와, 환경의 문제는 어떻게 자리매김?

=〉어째 참여정부의 슬로건이상이 아니네요. 한걸음 더 나아가 세계화레짐의 개혁도 포함되어야 하겠네요. 아래 질문과도 함께 고려해 볼 때 10개 의제 모두가 국내차원에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은 절반미만의 진실입니다. 진보는 WTO, WB, IMF의 해체 내지 개혁의제를 선점해야 합니다. 참여 역시 미시적, 생활정치적 접근도 중요하지만, 역시 거시적, 정치체제 개혁의 차원도 같이 보아야 합니다. 즉 양원제 개혁, 연방제적- 북한식 연방제가 아닙니다!- 성격의 강화라는 의제도 이 차원에서 고려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민족주의적 주권이 아닌 새로운 주권개념의 제안도 필요합니다. 통일문제 역시 자칫하면 우익적 동원의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에 통일문제를 진보적으로 풀기위한 의제의 선점도 중요합니다.



8. 진보 전략 하에서 ‘사회적 대타협’의 문제는.

=〉대타협의 결국 정치적 힘관계의 결과입니다. 또 대타협의 물적 기초가 확보되지 않는 다면 이 또한 허상일 뿐입니다. 하지만 진보진영에서 사회적 대타협 선제적 proactive제안은 고려해 볼만 합니다. 문제는 재벌입니다. 한국사회의 물적 기반을 사실상 장악하고 있는 재벌의 경제권력에 대한 올바른 통제전략없이는 이 또한 가능하지 않을 것입니다.



9. 5년, 10년을 내다보는 진보 전략은.

=〉노정권의 대실패를 통해 교훈을 얻어야 할 것입니다. 좁게는 재경, 외통관료집단의 통제 크게는 신자유주의 통제가 없이는 그 어떤 권력도 힘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세계화레짐의 정치적 통제(통상절차법도 그 시도중 하나입니다)없이는 설사 민노당이 정권을 잡더라도 국내정책의 효력은 발휘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안과 밖의 균형잡힌 접근과 이에 기초한 전략이 필요합니다. 대선과 관련해서 진보진영의 적극적 coalition전략이 요구됩니다.

 

[서면인터뷰 전문] 양재진 교수

입력: 2006년 12월 22일 11:35:26

 
<양재진/ 연세대교수·행정학과>


1. 신자유주의 속 진보의 가치.

- 아직도 우리나라의 좌파 혹은 진보라고 자처하는 분들이 ‘신자유주의’와 ‘시장’을 진보와 대척점으로 설정한다면, 우리나라에서 당분간 진보의 미래는 없다고 봅니다. 진보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상과 대중의 인식변화에 적응해 가야 합니다. 세계화, 지식경제의 도래, 후기산업화, 저출산고령화 등 변화하는 세상에서 미래를 선도할 수 있는 답을 주어야 합니다. 진보가 미래를 대비하고 한발 앞서가지 않는다면 진보일 수 있나요? 세상변화에 화답하지 못하는 진보는 좌파라 불리울 수는 있을지는 모르지만 결국 수구좌파가 되겠지요.

- 서구 좌파정치세력이 추구하는 제3의길을 우리나라의 기존 진보세력(혹은 좌파세력)들은 너무 폄하하는 것 같습니다. 이유는 이들이 신자유주의와 시장원리를 과감하게 수용하였다는 데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의 좌파가 신자유주의에 범주적인 비판(혹은 무조건적인 비판)만을 고집하는 등 전통적 노선에 머물러 있는다면, 지금의 위기는 벗어날 수 없습니다.

- 오늘 기사를 봤더니, 세계경제포럼에서 경쟁력강화를 위한 리스본전략 실천도 평가에서 1위가 덴마크, 2위가 핀란드, 3위가 스웨덴이더군요. 아시겠지만, 유럽에서 가장 좌파의 정치권력이 강한 나라들입니다. 이들 집권 좌파들이 시장과 경제관리를 어떻게 하는지 눈여겨 봐야합니다. 이들이 시장과 대척점에 서서 경제관리를 해왔을까요? 아닙니다. 이들이 신자유주의적 노동시장개혁에 반대해 왔을까요? 아닙니다. 세계화시대 살아남기 위해, 또 시장의 활력을 위해 신자유주의를 수용하여 왔습니다. 범주적인 무조건적인 거부가 아니라, 노사정이 머리를 맞대며 ‘조정된’ 수용정책을 펴 온 것이지요. 무조건 반대하는 우리네 좌파가 눈여겨 봐야할 부분입니다.

- 좌파는 늘 변화하여 왔습니다. 최초의 시험은 혁명이냐 개혁이냐 이었고, 혁명적 노선을 버리고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받아들였을 때, 집권세력으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작금의 시대적 변화는 시장을 제어할 것이냐 아니면 이를 수용하되 인민대중의 삶의 질 제고의 원천으로 활용할 것이냐를 두고 결정을 내려야 할 단계라고 봅니다.

- 이미 1980년대 유럽의 좌파는 이러한 고민과 노선경쟁을 치열하게 하였고, 결국 1990년대 제3의 길로 좌파의 부활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적어도 순수 좌파의 자기만족에 머물러 있을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를 진정 변화시키고 싶다면, 국민대다수를 차지하는 중도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현실성 있는 대안들을 만들어 내고, 이를 실천해 경제사회적 성과를 보여주어야 할 것입니다.



2. 성장과 분배의 문제는.

- 우리 좌파와 우파 혹은 진보와 보수의 공통된 문제는 성장과 분배를 서로 분리해 양자택일의 문제로 본다는 것입니다. 신진보의 입장에서 말씀드리자면, 성장없이 분배가 있을 수 없습니다. 서구 좌파정치세력이 성장에 대해서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일자리창출에 대해 얼마나 소중히 생각하는지 모릅니다. 2005년 스웨덴 사민당의 당대회 논의안건이 “Growth for Welfare"입니다. 물론 목표는 동일한 성장이나 그 방법은 미국과 다르지요. 그러나 여기서 눈여겨 봐야 할 것은 이분법은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나라 좌파의 성장에 대한 무관심, 성장을 논하면 우파인 양 몰아세우는 듯한 분위기는 없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3. 증세와 감세 문제는.

- 증세는 신중하게 접근해야 합니다. 증세는,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국왕의 세금인상을 막기 위해 부르조아 혁명이 일어나고 의회민주주의가 발달했을 정도로, 매우 민감한 문제이지요. 그런데 노 정부에서 증세문제로 곤욕을 치르고 있는 이유는 증세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세금인상을 너무 쉽고 당연히 국민은 따라야 하는 일로 가벼이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의 순서를 그르쳤고 그 결과 여론에 뭇매를 맞았습니다. 국가경영의 미숙함이 드러난 것이지요.

- 증세는 먼저 신규로 필요한 국가서비스가 무엇인지를 명확히 제시하고, 이 소요를 마련하는 차원에서 다루어져야 합니다. 어설프게, 미래를 대비해야하고 국가가 할 일이 많으니까, 다른 OECD국가보다 예산규모가 작으니까 하는 식으로 접근해서는 곤란합니다. 이 보다는, 구체적으로 공보육을 확대하는 데 매년 소요예산이 얼마다. 저출산을 막고 맞벌이 가정의 사회활동을 돕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정책이다. 그러니, 어느어느 세목을 신설 혹은 세율을 몇 %인상해 충당하겠다. 이해해 달라 하는 식으로 접근해야 했습니다.

- 그런데, 용처도 잘 모르겠는데 세금부터 올리겠다고 하니 이를 이해해 줄 사람이 없지요.

- 세금인상을 가벼이 여기는 집권세력 내 분위기는, 세금을 이용해 부동산 문제를 잡겠다는 발상에서도 드러납니다. 어쩌다 강남 가보면, 아파트 골목 길거리마다 분수대 설치하고, 근린공원 화장실은 화강암과 대리석으로 장식된 것을 보고, 큰일이다 싶습니다. 얘기를 들어보면, 실효세율이 인상되어 지방세가 많이 걷히는 데 쓸 데가 없어 그런다더군요.

- 마찬가지로. 중앙정부도 급증할 종합부동산세 수입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 그림이 그려지지 않습니다. 그 돈이 일반국민의 복지를 위해 쓰여질 것이라는 확신이 있다면 수긍이 가지만, 전투기 구입에 쓰이거나, 멀쩡한 도로 뜯어내고 포장하는 데 쓰이고, 공무원 회식비 늘이는 데 쓰인다면, 증세에 대해 국민들이 이해해줄리 만무합니다.

- 만약 같은 일이라도, 공공임대주택을 건설하기 위한 재원마련 차원에서 종부세를 도입한다고 하였다면, 조세저항은 그리 클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 유럽 복지국가들도 예산규모가 GDP의 50%를 넘나들지만, 세금인상은 매우 신중하며, 보다 저항이 적은 방법을 동원합니다. 대표적인 게 간접세를 통해 재원마련하는 것입니다. 직접세는 근로의욕 감퇴와 기업의 투자를 저하시키기 때문에 그리고 세계화로 인해 더 이상 인상이 불가능한 상태이기도 하구요.

- 우리의 경우는, 먼저 비과세와 감면대상을 줄이고, 필요하다면 간접세를 올리는 게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영업의 비중이 높아 조세파악이 제대로 안되고 있는 현실에서, “소득은 속여도 소비는 속일 수 없기”에 간접세의 조세형평성이 교과서에서 배운 것보다는 매우 높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 그리고 무엇이든 항상 먼저 용처에 대해 국민적인 설득과 이해를 구한 후, 여기에 맞는 수준에서 효율적으로 쓰겠다는 믿음을 국민에게 주면서 증세노력을 해야 할 것입니다. 이는 좌.우를 떠나 국가가 국민을 대하는 최소한의 양식이지요.



4. 중소기업, 지식, 여성, 지방, 부품소재 산업, 서비스 산업 등 여러 부문의 개별적 성장 동력 중 우선 순위를 두신다면?

- 부품소재 산업에 특화된 중소기업(혹은 중견기업)과 서비스산업의 선진화가 중요할 것 같습니다.



5. 지속가능한 진보는 참여-연대-생태의 가치, 분권-혁신-통합의 정책이란 정의도 있습니다만, 가치 부분에서 참여, 연대의 문제와, 환경의 문제는 어떻게 자리매김?

- 참여·연대·환경 등 진보적 이념과 가치가 중요하지만, 이 때문에 문제해결적인 실용주의적 처방이 경시되거나 순수함을 잃지 않기위해 실용주의가 회피되는 운동적 차원의 접근이 적어도 정치사회내에서는 사라졌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6. 경향신문은 ‘진보가 선점해야 할 10대 의제’로 ①조세개혁 ②부동산 ③교육정상화 ④재벌개혁 ⑤저출산고령화 ⑥소수자문제 ⑦건강불평등 ⑧생태주의 ⑨비정규직 ⑩빈곤문제를 제시한 바 있습니다. 진보 전략에서 개별 의제들은 어떻게 다루어져야?(앞선 질문에 반영해주셔도 좋습니다)

- 진보가 무엇을 선점하려는 생각보다는, 우리사회의 문제 해결을 위해 중도우파도 수긍할 수 있는 합리적 정책을 마련하는 데 힘을 쏟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대화와 설득노력에도 힘을 기울여야 합니다. 선점하고 대결하고 하는 자세로서는 국민으로부터 신뢰받는 수권세력으로 성장할 수 없습니다.





7. 진보 전략 하에서 ‘사회적 대타협’의 문제는.

- 진보가 대결적 자세를 견지하면서 사회적 대타협을 논하는 것은 모순이라고 생각합니다.

- 하지만, 사회적 대타협을 진정으로 원한다면, 먼저 스스로 진보 내 분파주의 그리고 노동 내 기업별노조주의를 극복하는 데 힘을 쏟아야 합니다.

- 최근 쓴 제 글을 하나 보내드리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8. 2007년은 대선의 해, 진보의 정치적 리더십 구축 문제?

- 단기적인 사고로, 정치공학적인 접근으로 재집권을 꿈꾸어서는 안된다고 봅니다. 그러다가는 진보의 싹 마져 꺼지게 될 것입니다. 다시는 회생불가능 할지도 모릅니다.

- 이 보다는 새로운 국가비전과 발전전략으로 무장된 신진보가 10년을 내다보고 새로운 진보세력의 영역을 개척해야 할 때라고 봅니다.

- 영국 블레어의 new labor가 재집권하는데 18년이 걸렸습니다만, 만약 단기적인 사고로 정치공학적인 접근으로 대응하여 왔다면 아마 집권을 커녕 지금과 같은 헤게모니를 구축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노동조합과 구좌파와 치열한 노선투쟁과 자기개혁의 결과입니다. 우리도 이정도의 각오로 새롭게 태어나야, 그나마 10년 후 집권을 통해 한국을 새롭게 이끌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무수한 수많은 시행착오 없이 말이지요.

- 쉬레더의 독일 사민당도 라퐁텐 전 당수가 이끄는 당내 좌파와 분당을 감수하면서도 Neue Mitte에 입각한 노동시장 개혁과 복지개혁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독일 현대화에 사민당이 나선 것입니다. 그 결과, 분당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상외로 총선에서 선전해 대연정을 구성할 수 있었습니다. 중도의 국민들이 수권능력이 있는 정치집단으로 인정해 주었다는 얘기입니다.





9. 5년, 10년을 내다보는 진보 전략은.

- 새롭게 진보의 사회개혁 전략을 짜는 것은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 그러나 한가지 잊고 있는 것은, 진보가 지금 이런 위기에 처한 것은 단순히 미래전략이 없어서가 아니라, NL적 사고로 인해 국민의 신뢰를 잃은 점도 크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 즉, 진보세력 내에 널리 퍼저있는 NL적 사고로 인해 인류의 기본적인 가치(자유, 평등, 연대, 민주주의, 인권)보다 ‘민족’이 앞서고 북한에 대해 지나치게 편향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는 점들이 위기를 자초하고 있다고 봅니다.

- 인류의 기본적인 가치라는 관점에서 볼 때 대한민국과 가까운 나라는 북한이 아니라 미국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부시가 미워도 말이지요. 따라서 진보라고 자처하는 사람 혹은 집단들이 거의 무조건적으로 반미를 펼치는 데 대해서 일반국민들이 수긍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다가 반미 안하는 사람들을 보수꼴통으로 몰아, 그 만큼 함께 연대할 수 있는 중도적인 지식인과 시민들을 진보와 단절시키는 전략적 우까지 범하고 있지요.

- 이세상의 그 어떤 진보도 인권, 자유, 평등과 같은 인류의 기본적인 가치보다 민족을 우선하지 않습니다.

- 따라서 미래전략도 중요하지만, 전근대적인 NL적 사고로부터 시급히 벗어나는 게 우리나라 진보의 생존과 미래를 위해 가장 중요한 선결과제라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서면인터뷰 전문] 조희연 교수

입력: 2006년 12월 22일 11:36:29

 
<조희연/ 성공회대 교수·사회학>



1. 신자유주의 시대 사회발전을 위한 진보적 가치의 당위는.

- 신자유주의적 지구화의 거대한 광풍 앞에서, 대안적 사회국가 모델을 고민해야 한다. 복지국가의 합리적 핵심을 계승하면서 지구화 시대의 대안적인 사회적 완충국가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 나아가 글로벌 가버넌스 체제 자체의 민주화와 공적 규제를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시장절대주의에 의해서 ’고삐풀린 세계화’에 대한 글로벌 차원의 규제장치가 필요하고 그러한 노력이 필요하다.

반기문 외교부 장관의 사무총장 임명은 이런 점에서 UN민주화와 UN적 ’지구적 정치’가 WTO를 규제하는 장치를 만들어야 한다.



2. 진보·개혁 진영 발전 전략·모델 중 한국 실정에 가장 적합한 것은.

- 생태평화 사회민주주의 국가 모델이 필요하다. 그리고 재벌 중심의 성장전략이 아니라, 중소기업, 큰 것이 아니라 작은 것의 창의성을 국제적 경쟁력으로 키워가는 노력이 필요하다. 1명의 대자본과 천재를 키워서, 100명이 혜택을 보는 체제는 지구화 시대에 불가능하다. 지구화 시대에는 ’큰 것’의 성장의 결과가 작은 사람들과 공유되는 기제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국민경제의 작동방식을 바꾸어야 한다. 지구화 시대의 경쟁력은 대자본 중심의 경쟁력 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일국 내에서 지속가능한 호혜적 모델을 만드는 것, 작은 것과 큰 것의 선순환 구조를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국가가 재벌을 지원하는 것만이 아니라. 사회적 일자리, 공공부문, 중소기업, 골목경제에 대한 지원을 통해서, 지구화 시대의 완충적 선순환 기제를 만들어야 한다. 하나 키워서 나누어 먹는 것이 아니라, 하나가 커도 나누어 먹을 수 없는 구조를 선순환적인 구조로 만들어야 한다. 지금까지 한국의 국가는 일방적으로 대자본과 큰 것의 성장 중심의 국가였다.



3. 성장과 분배는.

- 진보진영의 전략은 중소기업, 골목경제, 공공부문, 사회적 일자리, 사회적 기업, 자조적 부문 등이 그 자체가 지구적 경쟁력, 일국적 경쟁력을 가지도록 하는 촉진적 역할을 할 수 있고, 분배가 단순히 낭비가 아니라, ’사회투자’의 의미가 되는 순환구조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지구화 시대 어떤 의미에서 분배와 성장의 단순대립은 구 모델일 수 있다. 진보진영에서도. 복지가 단순히 낭비라고 하는 생각을 넘어서야 하고 진보는 실제 그러한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 복지가 투자가 되는, 기업의 사회공헌이 사회적 투자가 되는 제도적 기제를 만들어야 한다(물론 그 구체적 상이 현재 명확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지구화시대, 지구적 경쟁력을 갖는 부문만의 성장을 중심을 두는 체제는 어떤 의미에서는 ’정치적으로’ 생존불가능하다. 신자유주의적 지구화를 추동하는 쪽에서도 현재와 같은 시장일방주의적 지구화가 더이상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아가고 있다.



4. 증세와 감세 문제는.

- 한국의 기업과 시장도 이제 미시적 합리성에만 치중해서는 않된다. 증세와 감세에서 한국사회는 세계 10대 무역대국에 걸맞는 증세가 불가피하다. 한국은 세계적으로 역동적인 시민사회, 세계적인 전투성을 갖는 노동운동을 기업과 시장이 마주하고 있다. 오히려 보다 적극적인 증세와 복지를 통해서 ’거시적 합리성’과 그를 통한 거시적인 안정성을 만들어가는 것이 기업과 시장에 합리적이다.

증세만 나오면,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고, 증세 논의를 꺾는 것이 기업에 우호적이라고 생각하고 ’세금 폭탄’ 등의 담론을 거세게 유포하는 보수언론은 미시적으로는 합리적으로 행위하지만 거시적으로 ’반자본적’으로 행위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단지 참여정부는 ’남북의 획기적인 군축’ 등을 통해서 새로운 세원을 만들고 그에 대한 저항을 극복하면서 ’돌파’를 했어야 하는데 이를 못했다. 한국사회의 보수주의와 반공주의적 알레르기가 이러한 것을 막았지만 말이다.

삼성과 현대가 8000억과 1조를 사회적 비용으로 자발적으로 투자할 생각을 왜 해볼수 없었을 까 고민해본다. 더 적게 내기 위해 인색한 것이 자신에게 꼭 큰 도움을 주는 것은 아니다.



5. 진보파의 사회발전 전략 논의는.

- 시민운동이나 사회운동은 단순히 하나의 의제를 제기하는데 초점을 두고 그것만으로도 칭찬을 받는다. 그러나 진보세력의 일부가 국가통치세력이 된 마당에, 실현가능한 정책으로 무장한 진보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단일변수 분석이 아니라 ’다변수분석’에 기초한 주장과 정책을 가져야 한다. 사실 개별 정책에 대해서는 많은 안들이 있고, 개별적인 실천들은 풀뿌리 수준에서 다양하게 전개되고 있다. 이것들을 보수담론에 대항하는 현실적인 대안정책패키지와 프레임으로 만들어야 한다.



6. 중소기업, 지식, 산업, 서비스 등 여러 요소들 중 가장 중요한 성장동력은.

- 지식, 부품소재, 중소기업, 여성, 서비스, 지방 등으로 들 수 있겠다.



7. 참여-연대-생태, 분권-혁신-통합 등 지속가능한 진보에 대한 견해는.

- 민주정부 조차도 여전히 박정희 시대 이래의 ’토건국가’ 모델을 따르고 있다. 거대한 국가프로젝트가 현실성이 있는지 검토해보아야 한다.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또 그것을 하면 잘 살 줄 알고 진행한 다양한 프로젝트들---예컨대 광주와 부산의 지하철이 수백억원의 적자를 매년 기록하고 있다--을 검토해보아야 한다. 경부운하도 마찬가지이다. 거대한 국가 적자가 오히려 국민생활을 파탄으로 몰고 갈 수 있다. 우리 국민경제의 순환구조를 바꾸어야 한다. 국가는 거대한 토목건설 사업으로 경기를 부양하고 개인은 어떻게 든지 부동산으로 재산을 불리는 이 구조를 혁신해야 한다.



8. 경향신문이 ‘진보가 선점해야 할 10대 의제’로 제시한 ①조세개혁 ②부동산 ③교육정상화 ④재벌개혁 ⑤저출산고령화 ⑥소수자문제 ⑦건강불평등 ⑧생태주의 ⑨비정규직 ⑩빈곤문제에 대해서는.

- 조세개혁, 부동산, 교육, 비정규직 등의 문제가 특히 중요하다, 문제는 현재의 대중들의 반공주의, 친미적 시각 등으로 인하여, 진보세력이 선택할 수 있는 정책의 폭이 대단히 제한되어 있다. 그래서 나는 87년 6월 민주항쟁으로 조성된 ’계급적, 사회적 역관계’의 틀 내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은 거의 이루어졌다고 생각한다. 그 틀 자체를 넘어서는, 새로운 계급적,사회적 지형을 만들어야 한다. 예컨대 부동산 문제만 하더라도, 세금중과 정책만으로는 부동산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그것에 저항하는 부동산 기득권세력들과 보수세력들의 힘이 너무 강력해져 있다. 예컨대 ’1가구 2주택 금지’를 생각해보자. 이것을 단순히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 그것을 강제하고 실현할 수 있는 계급적, 사회적 역관계(거기에는 국민들 자신의 열린 진보적 의식이 필요하다)가 필요하다. 조금 강력한 정책이 나오면, 위헌소송을 하고, 보수언론이 난리치고, 국민들은 또 그렇게 생각하는 구조가 바뀌어야 한다. 남미의 반미 동맹(차베스 등)은 그것을 뒷받침하는 대중들의 급진적 의식이 있다. 그래서 석유회사의 국유화같은 것도 가능하다. 대중이 행복해지기 위해서도 더 의식이 급진화되어야 한다. 보수언론의 ’선전’에 현혹되지 않고, 우리 사회의 기득권층의 저항에 대해서 분노하는 대중, 더 급진적이고 근본적인 정책을 취하지 않는 참여정부와 열린우리당 한나라당에 대해서 분노하는 대중이 필요하다. 환매조건부 분양도 거대한 부동산 기득권세력의 저항을 뚫을 때 비로서 정책이 된다.



9. 사회적 대타협 문제는.

- 당연히 대타협을 해야 한다. 기업과 시장도 거시적 합리성의 관점을 가져야 한다. 대타협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힘의 관계가 필요하다. 자본과 시장이 일정한 타협을 수용하지 않을 수 없는 조건이 필요하다. 스웨덴의 모델은 옆나라 소련의 사회주의 혁명의 위협과 서유럽에서의 혁명운동의 고양으로 스웨덴 대자본과 시장의 타협수용에 의해 비로서 가능하였다. 하나의 경제정책은 정치적 조건에 의해 그 현실성이 결정된다. 98년 대타협이 가능했던 것은 IMF위기로 자본이 실제 이상의 ’가공의 위기의식’을 가졌고 그로 인해 ’가상적인 힘의 균형’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자본과 시장의 비타협성이 타협을 방해한다.


10. 2007년 대선에서 정치적 리더십 문제는.

- 열린우리당의 해체는 불가피해보인다. 정치적 개혁주의가 사회경제적 개혁주의로 자기발전을 해야 한다. 2000년 낙선운동에 열광했던, 정치민주화, 정당개혁, 투명성에 대해서 대중은 환호하지 않는다. 더 참혹한 양극화와 불평등, 비정규직, 노동시장의 유연화 등으로 고통받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진보성을 사회경제적 정책에서 발휘해야 하고 보수적 저항을 돌파할 수 있는 리더쉽이 필요하다. 대안적인 사회경제적 정책으로 국민들이 ’박정희와 다른 방식으로 먹고 살 수 있다’라고 하는 희망을 주는 리더쉽이어야 한다.



11. 5-10년 진보 전략은.

- 진보세력은 하나가 아니다. 과감하게 분화되어야 한다. 통치세력까지에 이르는 ’중도자유주의 개혁세력’과 여전히 10년 앞을 내다보고 거리에서 싸우는 급진진보세력으로 분화되어야 한다. 양자는 미덕이 다르다. 전자는 더욱더 헤게모니 정치를 고민해야 한다. 보수를 어떻게 획득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책임성과 현실성을 고민해야 한다. 후자는 보다 원칙적으로 생태주의, 연대주의, 분배주의를 실현할 계급적, 사회적 힘을 형성하기 위해 아래로부터의 실천을 계속해야 한다.

 

 

 

[서면인터뷰 전문] 박상훈 교수

입력: 2006년 12월 22일 11:37:29

 
<박상훈/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연구교수·후마니타스 주간>

1. 신자유주의 시대 사회발전을 위한 진보적 가치의 당위는

- 평등입니다. 현재 가장 큰 문제는 민주주의가 그 애초의 가치와 이념과는 달리 평등화의 기제로 기능하지 못하는 데 있다고 봅니다. 평등, 이 조건이 지금처럼 위협받게 되면 자유 역시 숨쉴 수 없을 겁니다. 자유와 평등의 긴장관계는 적어도 오늘의 한국사회에서는 호사스럽고 한가한 이론이 아닐 수 없게 되었습니다. 불평등의 과도한 심화가 자유마저 위협하는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다수 시민이 자유로운 조건을 갖지 못하면 참여와 대표 등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는 자극받지 못하게 됩니다. 참여 이전에 공적 영역에 대한 관심마저도 취약해 져 가고 있습니다.

사회통합이나 분배 등의 가치에 호소하는 것은 결과에 대한 소극적 차원의 개선이라 보입니다. 참여 민주의도 사회경제적 조건이 안되면 작돋하지 못합니다.

양극화 혹은 양극화 극복이라는 개념 역시 문제가 있습니다. 이 개념은 조중동도 쓰고 한나라당도 쓰고 신자유주의자도 쓰고 진보주의자도 씁니다. 이데올로기화된 개념이 된 것입니다. 이 개념은 양극화의 피해자를 중산층으로 상정하게 만드는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동반합니다. 한국사회 불평등 문제의 핵심은 중산층이 하층으로 전락하는 문제가 아니라 자산소득을 갖지 못하고 오로지 노동소득에 의존해 살아야 하는 기존의 중하층에서 사회저변층이 급격히 빈곤화된 데 있습니다. 노동소득에 의존해야 하는 이들이 실업과 불완전고용, 노동소득 감소 등으로 고통받고 있는 것이 핵심이고 이것이야 말로 불평등과 빈곤화의 문제인 것이지 중산층이 양극화되는 문제가 아니라고 봅니다. 양극화=중산층 붕괴=경기활성화=기업 투자의욕 고취=일자리 창출=노동시장 유연화로 이어지는 논리구조는 불평등과 사회하층의 빈곤화 문제를 못보게 만들 뿐 아니라 지배적 논리를 강화하는 데 자주 동원되곤 합니다.

언제나 그런 것이지마난 진보의 기본가치이자 민주주의의 이념이 기초하는 것은 평등이고, 지금 한국사회에서는 더욱 절실한 가치이지 않나 싶습니다. 평등이 있어야 인권도 있고 자유도 있고 통합도 있고 참여도 있을 수 있습니다.



2. 발전 모델 중 한국 실정에 가장 적합한 것은

- 제조업 중심의 노동참여적 생산체제를 만드는 것입니다. 정부나 보수진영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서비스산업 중심의 생산체제로의 전환은 바람직하지도 않고 새로운 성장동력이 될 수 없다는 점에서 현실적이지도 않습니다. 미국처럼 지적 생산물의 압도적 우위와 금융자본이 강한 나라를 제외하고, 고급 서비스 산업 중심의 생산체제는 대안이 될 수 없습니다. 독일이나 일본 등 선진국들 중 서비스산업이 지엔피에서 차지하는 높은 비중은 모두 그들 나라의 강한 제조업이 파생해 낸 것입니다. 한국은 제조업이 강합니다. 아직 지엔피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30%가 넘습니다. 더 이상 제조업이 기반이 망가지기 전에, 노동참여와 생산성 증대가 결합될 수 있는 방향이 개척되어야 합니다.

- 한국과 같이 대외의존도가 높은 부존자원보다는 인적 자원에 의존하는 경제체제에서 노동참여의 생산체제 없이 경제발전을 지속하기는 불가능합니다. 노동이 생산의 과정에 참여하지 않은 채, 현재의 한국과 같은 노사관계로는 경제의 성장과 발전이 사회의 발전으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제조업은 노사관계를 민주화하는 데 친화성이 높습니다. 뿐만아니라 생산적 노동에 기초를 튼튼히 갖기 때문에 사회문화적으로도 긍정적인 효과를 갖습니다. 제조업 중심으로 노동의 참여가 생산력의 기초가 될 수 있는 체제를 만들어야 합니다.

- 이때 문제는 현재의 재벌체제에 대한 것이 됩니다. 현재 재벌개혁론과 국가-재벌 발전연합론을 둘러싼 논쟁이 있으나 두 접근 모두 노동의 참여에 대한 전제가 빠져 있습니다. 발전을 목표로 한 국가와 재벌의 연합론은 결국 재벌의 반노동적 기업운영체제를 용인하는 결과를 피할 수 없습니다. 노동은 성장의 혜택과 소득향상, 일자리 안정 등의 혜택을 볼 지 모르나, 이를 위해 현재와 같은 생산체제를 지속시킬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국가의 적극적 산업정책, 노사관계의 민주화, 재벌의 지배구조 개선의 전제위에서만 국가-재벌의 발전연합은 상상될 수 있다고 봅니다.

-재벌개혁론은 중요하나 산업구조와 생산체제 전반에 대한 문제의식이 없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특히 국가의 적극적 역할에 대한 고려가 약하다는 문제도 큽니다. 진보적 자유주의에서 사민주의, 맑스주의를 아우르는 진보파의 사회발전 전망의 공동적인 것은 국가입니다. 국가를 통해 시장체제의 불평등효과를 완화하고, 신분과 계급적 차이에서 오는 차별을 보편적 시민권의 관점에서 개선하고, 보통교육과 시민교육 등 교육적 기능을 강화하는 것입니다. 국가가 중심이 된 경제개혁의 전망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 중소기업에 대한 정책없는 발전모델은 있을 수 없습니다. 고용인구의 80% 이상을 차지하는 이들 중소기업이 활력을 갖지 않는 한 건전한 경제구조의 미래는 없습니다. 이 분야를 재벌대기업과의 상생에 소극적으로 의존하는 것은 국가의 책임 방기입니다. 중소기업의 발전은 국가의 산업정책이 책임져야 할 의무이자 과제입니다. 이에 대한 고려없이 유연화된 노동시장 더 유연화하고 안정화하려는 정부 정책은 그래서 나쁜 문제만을 양산해내고 있습니다.


3. 성장과 분배?

- 현재와 같은 상황에서 분배효과가 큰 정책을 더 많이 선택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근본적인 대안이 될 수는 없습니다. 기본적으로 성장과 분배의 이분법은 비현실적이고 문제를 자주 이데올로기적인 선택으로 만듭니다. 진보파가 생각하는 핵심은, 모든 경제주체들이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경제를 만드는 것이고, 이들의 경제활동의 성과가 곧 분배효과를 갖도록 하는 내용의 생산체제를 만드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업구조의 민주화, 노사관계의 민주화에 대한 전망없이 경제 외적인 차원에서 분배를 위한 정책의 투입을 주장하는 것만으로는 한게가 있습니다. 좋은 생산체제에 대한 비전없는 분배강화론은 늘 사후적인 차원의 무력한 대안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4. 세금문제

- 세금 문제에 대한 부유층의 요구와 이를 이데올로기화하는 보수세력의 접근은 용인될 수 없습니다. 정부의 조세정책 집행은 후퇴해선 안될 것입니다. 또한 조세부담률은 한국의 경제규모에 비해 매우 낮고, 형식논리상으로는 당연히 증대해야 할 겁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사회정책 혹은 사회복지체제 내지 산업정책적 계획과 전망을 분명히 하지 않은 채 조세부담 증가만을 말할 수는 없다는 점입니다. 감사원의 여러 조사결과가 말해주듯 조세를 낭비해온 현재의 관료행정체제를 그대로 둔 채 조세증대를 말하는 것도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대안적 사회경제정책이 먼저이고 이를 집행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추는 것이 다음이고, 이를 바탕으로 일정한 사회적 합의의 기초를 다지는 것이 그 다음이고, 이 토대위에서 조세부담율의 증가가 이루어져쟈 할 것입니다.



5. 진보파의 사회발전 전략 논의에 대해

- 무엇보다 실현가능성이 약합니다. 진보적 언술만 있는 경우가 많고, 다른 한편에서는 대중적 정서를 고려한 절충도 있으나 무엇보다 실천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 총체적 비전이 약합니다. 경제 발전전략은 사회정책과 결합될 수 있어야 하고 교육정책과 정당체제 등 여타 분야와 결합될 수 있는 체계적 대안이 되어야 하는 데 단편적입니다.

- 진보는 정치의 방법으로 변화를 모색하는 힘이어야 하는데 대부분 비정치적 접근이 많은 것도 눈에 많이 띱니다. 정치적 조건을 갖추는 문제에 대한 진지한 고려없이 진보파 역시 정책 로드맵만 양산하고 있다는 인상을 많이 받습니다.



6. 여러 요소들 중 가장 중요한 성장동력은 ?

- 당연히 중소기업입니다. 지식기반 산업의 담론은 과장이 많습니다. 벤처산업의 여러 결과들이 이를 실증하고 있습니다. 여성을 성장동력 문제로 접근하긴 어렵습니다. 지방을 성장동력으로 접근한다는 것은 자칫 정치적 목적에 활용되기 쉽습니다. 지방을 산업구조의 문제와 무관하게 중앙 대 지방의 문제로 접근하는 것은 백이면 백 전부 보수적 결과 내지 부작용을 심하게 낳습니다. 집중화는 나쁘고 분권은 좋다는 것은 지나친 이분법입니다. 참여정부의 경험은 이를 잘 보여줍니다. 중소기업 강화와 같은 산업구조의 차원에서 접근하는 것이 튼튼한 기반을 가진 위에서 균형발전이나 분산을 접합할 때 의미가 있습니다. 부품소재 산업은 중소기업의 한 분야이고 한국의 제조업이 강해지기 위해 가장 중요한 분야라고 생각합니다. 서비스 산업은 대안이 될 수 없습니다.


7. 참여-연대-생태, 분권-혁신-통합 등 지속가능한 진보

- 어느 사회든 물질적 기초의 생산이 기본이고 이를 둘러싼 계급의 문제가 중심입니다. 나아가 이를 개선하려는 정치적 갈등과 국가의 문제에 어떻게 접근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이에 대한 기초 없이 비물질적 가치에 초점을 둔 이른바 신정치학new politics를 과도하게 불러들이는 것은 결국 중산층적 비전을 넘어서기 어렵습니다. 분권-혁신 등의 개념 역시 마찬가지 문제가 있을 뿐 아니라 현실에서는 신자유주의적 가치와 결합이 잘 된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언제나 생산체제와 계급문제, 이를 정치적 대안으로 조직하는 문제가 가장 중요하고 이 기초위에서 생태적 가치와 차이의 정치학이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합니다.



8. 경향신문이 ‘진보가 선점해야 할 10대 의제’로 제시한 ①조세개혁 ②부동산 ③교육정상화 ④재벌개혁 ⑤저출산고령화 ⑥소수자문제 ⑦건강불평등 ⑧생태주의 ⑨비정규직 ⑩빈곤문제에 대해서는.

- 각론도 중요하지만, 질서있는 진보개혁 페키지를 만드는 일이 먼저가 아닐까 합니다. 일반적으로 실질적 민주주의의 의제라고 할 수 있는 사회경제적 문제들이 우선순위를 갖는 방법으로 개혁과제가 위계적으로 재구성되어야 할 것입니다. 시간적으로도 단기, 중기, 장기 과제가 구분되어야 할 것이고, 그러다 보면 단계별 실천프로그램이 가능하지 않을까 합니다. 이것이 바로 정치적 지도부가 할 일인데, 결국 가장 큰 문제는 진보개혁세력의 정치적 지도부가 없다는 점이 아닐까 합니다.


9. 사회적 대타협

- 사회적 대타협이란 유럽 사민주의 체제가 현실에서 실현될 때 필요했던 역사적 실천형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에서 필요한 사회적 대타협은 재벌이 조세부담 및 고용확대 등 국민경제적 책임을 다하고 노조를 경영과 생산의 파트너로 수용하면서, 노동측은 생산성 향상과 고임금 정규직 임금억제와 비정규직 임금상승을 연계하는 연대임금정책 수용 등을 중심으로 하는 것일 겁니다. 하지만 현재 사회적 대타협을 둘러싼 논의네는 두가지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우선 첫째는 대부분의 논의에서 사회적 대타협은 기업의 투자와 고용확대, 재벌의 소유권보장, 노동의 임금억제, 생산성 향상 노력 등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요컨대 노동의 시민권에 대한 적극적 관심이 약하고, 오히려 재벌의 소유구조와 불법행위를 용인하는 경향이 강하다는 사실입니다. 둘째는 사회적 타협을 주관하고 향후 그 협약을 지속시킬 정치적 힘이 취약하다는 사실입니다. 1998년 2.6 협약도 일종의 사회적 대타협이라 할 수 있지만 결과적으로 구조조정만 허용했을 뿐 이후 국민경제 전반의 문제를 의제로 다룬다는 것에 대해선 별로 지켜! 지지 못했던 것이 그 한 예입니다. 피조르노라는 이탈리아 정치사회학자는 이를 political exchange라고 정의한 바 있습니다. 결국 문제는 정치적으로 협약을 주도하고 계속 확대해갈 정치적 권위체가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민주노총 이수호체제의 사례나 지금의 민주노동당이 갖는 여러 혼란 등에서 알 수 있듯이, 현재와 같은 현실에서 사회적 대타협이 이루어지기 어렵지 않나 싶습니다.


10. 정치적 리더십 문제

- 정치적 리더십과 관련된 핵심은 내년 대선과 4개월 뒤에 치러지는 총선에 어떻게 대응할 것이냐의 문제일 겁니다. 이 국면을 이끌 힘은 크게 세 블럭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한나라당을 중심으로 한 보수블럭이고 다른 하나는 민주노동당으로 대표되는 진보블럭이며, 그 중간에 열린우리당을 포함한 중간블럭이 있습니다. 진보세력의 정치전략이라 할 때 그 핵심은 진보블럭 내부의 문제(예컨대 민주노동당의 대선 후보 문제 등)가 한편있고 다른 한편 이들과 열린우리당 내지 시민운동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이냐의 문제가 있을 겁니다. 향후 논쟁에서 예상 가능한 세력갈등의 구도는 첫째 보수블럭에 대항해 진보와 중간블럭을 통합하는 단일 후보를 내자는 주장이 얼마나 동원력을 가질지, 둘째, 기존의 개혁세력과 구분되는 매우 응집력있는 독자적 진보 후보를 내자는 주장이 얼마나 동원력을 갖게 될지에 따라 결정되지 않을까 합니다. 이 문제들은 이 차원은 매우 유동적인 영역이라 사전에 어떤 고정된 결론을 갖기는 어렵습! 니다. 정치공학 말씀하셨는데, 우리나라 정치용어에서 정치공학이란 말은 나쁜 의미로 사용되기 때문에 이에 대해 정치공학이 필요하다 말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겁니다. 따라서 정치공학을 객관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분위기가 먼저 있어야 대답이 가능하지 않을까 합니다. 사르토리라고 하는 정치학자에 따르면, 헌법이란 말의 constitutiom은 그 어원이 political engineering의 의미를 갖는다고 합니다. 헌법을 신성시하는 주장에 대해, 헌법이란 사회구성원이들의 요구나 시대의 변화에 따라 이를 반영하기 위해 정치적으로 만들고 변경할 수 있다는 의미를 강조하려는 것이었지요. 이런 차원에서 말한다면, 정치공학은 정치의 본질인 측면이 있습니다. 제 생각엔 진보블럭과 중간블럭은 현재의 상황에선 반한니라당 연합전선을 주장하는 것은 옳치 않고 우선 각자의 대안을 조직하는 것이 중요하다 봅니다. 그러나 그 이후 문제에까지 모든 대안을 닫아두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봅니다.



11. 5-10년 진보전략

- 제 생각엔 운동의 에너지로 버텨온 지난 민주화 1단계는 종결되었다고 봅니다. 1단계의 성과라면, (권위주의로 퇴행할 가능성이 사라지고 국가권력의 소유권은 오로지 민주적 선거에 의해서만 결정되어야 한다는 규범이 확고하게 자리잡앗다는 점에서,) 민주주의를 절차적으로 공고화했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그 대가는 민주주의의 실질적 측면이라 할 평등화의 확대는 오히려 역전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민주주의는 민주주의로되 민중적 가치와는 멀어진 민주주의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제 민주주의 역시 하나의 정치경제체제로 이해해야 한다고 봅니다. 다시말해 현재와 같은 중산층 상층에 편향된 수혜체제로서 한국 민주주의는 다시 민주화되어야 합니다. 민주주의를 내용적으로, 실질적으로 심화시키는 2단계 민주화가 이제 우리 앞에 놓인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이를 위해선 정치적 대안이 조직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지는 예상, 주장하긴 어려우나 우선 한국의 진보파 안에 뿌리깊은 반정치와 반국가, 반정당, 반권력적 경향에 대한 비판적 검토가 전제되어야 헐 것입니다. 민주주의의 핵심은 정치와 권력과 국가를 선용해 사회의 다수를 이루는 가난한 민중의 이익을 돌보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진보세력은 5-10년 사이에 대안적 정치 지도부를 만들어야 하고, 이를 바탕으로 한국의 정치경제를 어떻게 개혁해가야할지 비전과 전략을 제시해야 하고, 실제로 이를 실천함으로써 하위체계의 영역에서부터 모델을 만들어야 하며, 이를 바탕으로 사실상 집권을 바라볼 수 있는 대안정부(alternative government)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서면인터뷰 전문] 이정우 교수

입력: 2006년 12월 22일 11:38:19

 
<이정우/ 경북대 교수·경제학>

1. 신자유주의 시대 사회발전을 위한 진보적 가치의 당위는.

- 시장과 국가, 그리고 시민사회의 적절한 조합이 필요하다. 어느 나라든 이 세 가지의 적절한 조합을 찾아나가는데, 우리나라는 유독 불균형이 심하다. 과거 관치경제 시절에는 국가의 과잉성장이 특징이었고, IMF 사태를 겪고 난 뒤로는 급속히 시장만능주의가 판을 치고 있다. 둘 다 답이 아니다. 답은 세 가지의 조화, 특히 한국에 빈약한 공공의 영역을 확대해 나가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시민사회의 역할이 더 커져야 한다.



2. 진보·개혁 진영 발전 전략·모델 중 한국 실정에 가장 적합한 것은.

- 위에서 말했듯이 발전국가-시장주의를 뛰어넘는 공공의 확대가 필요하고, 성장이냐 분배냐의 2분법을 뛰어넘는 동반성장 전략이 필요하다. 40년 성장지상주의를 거치면서 사회에 대한 경제의 우위가 워낙 강하므로 양자 사이에 균형을 잡아 나가야 한다. 그를 위해 필요하다면 사회부총리 신설도 고려할 만하지만 그 과정에서 과도하게 방만한 정부 부처를 선진국처럼 대폭 축소, 통합하는 개혁이 동시에 추진되어야 한다 


3. 성장과 분배는.

- 한국처럼 성장일변도로 국가를 운영해온 나라는 유례를 찾기 힘들며, 그 과정에서 국민의 삶의 질 저하, 저소득층의 민생고 등 많은 희생이 있었다. 그런 불균형과 비대칭을 과감히 제거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고 해서 분배 위주로 가는 것은 곤란하며, 성장과 분배를 조화시킬 많은 방책을 도입할 필요가 있다. 성장과 분배는 결코 양자택일의 관계가 아니며, 동행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참여정부의 동반성장 철학은 정당했으나 그 추진 의지와 동력이 충분했느냐 하는 점에서 반성할 점이 있다.



4. 증세와 감세 문제는.

- 세금내기 싫어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한국의 조세부담률 20%는 우리 소득 수준에서 결코 높은 것이 아니다. 빈약하기 짝이 없는 사회서비스를 개선하는 데는 돈이 들며, 세금을 늘일 필요가 있다. 다만 세금 인상이 낭비되지 않고, 나의 삶을 개선시킨다는 확신을 주어야 하며, 그런 점에서 세금 인상과 사회서비스 개선을 반드시 패키지로 발표해야 한다. 동시에 정부의 방만한 살림을 대폭 개혁해서 허리끈을 졸라매겠다는 청사진을 함께 내놓아야 국민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점만 확인되면 우리 국민은 세금을 더 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다고 본다. 그러면 더 이상 ‘세금폭탄’ 운운 하는 세계 대세에 뒤떨어진 비열한 악선전에 현혹되지 않을 것이다.


5. 진보파의 사회발전 전략 논의는.

- 사회적 대화 모델의 필요성과 현실적 가능성이 충분히 논의되어야 이 모든 대안의 실현 가능성이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이에 대한 논의가 생략되고 있어서 자칫 모든 청사진이 사상누각이 될 우려가 있다. 우리 사회에서 사회적 대타협은 결코 불가능하지 않고 진정한 의지가 있으면 실현 가능한 미래다.



6. 경향신문이 ‘진보가 선점해야 할 10대 의제’로 제시한 ①조세개혁 ②부동산 ③교육정상화 ④재벌개혁 ⑤저출산고령화 ⑥소수자문제 ⑦건강불평등 ⑧생태주의 ⑨비정규직 ⑩빈곤문제에 대해서는.

- 너무 많아서 일일이 답할 수 없네요. 노사문제가 빠져 있는 것이 아깝네요.


7. 사회적 대타협 문제는.

- 앞서 말했듯이 사회적 대타협 없이는 이 모든 논의가 허황된 말장난에 그치고 말 것입니다. 이 모든 논의의 전제가 사회적 대화 모델의 구축에 있고, 그 기초 위에서 이런 10가지 의제가 한걸음씩 나갈 수 있겠지요.

 

 

 

[서면 인터뷰 전문] 정이환 교수

입력: 2006년 12월 22일 11:40:09

 
<정이환/ 서울산업대 교수·노동사회학>



1. 진보·개혁 진영 발전 전략·모델 중 한국 실정에 가장 적합한 것은.

=〉아직 ‘가장 적합한 것’은 찾기 어렵다고 봅니다. 그러나 서구 사민주의 국가의 경험과 우리의 사정을 나름대로 고민하여 대안을 제시한 것으로 신정완 교수의 ‘한국형 사회적 시장경제 모델’과 윤종훈 회계사(시민경제사회연구소)의 사회투자 모형(?)을 들 수 있니다. 둘 모두 연대와 복지라는 가치를 추구하면서도 성장의 필요성을 적극 제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2. . 성장과 분배는.

=〉한국의 상황에서 진보 진영이 국민적 지지를 얻으려면 성장이라는 문제에 대해 적극적 대안을 제기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한국 진보개혁의 미래는 ‘비자유주의적 성장모델’을 제시할 수 있느냐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세계적 신자유주의 국면에서 이런 모델을 제시하는 것이 매우 어려운 과제임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분배를 희생하지 않는 성장은 가능합니다. 지금까지 한국 진보 진영은 이런 모델을 연구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데에 게을리 해왔습니다. 사실 한국 진보진영의 그간의 발전은 우파의 무능력으로부터 반사이익을 얻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야말로 한국의 진보진영이 진정한 시험대에 올라있는 셈입니다.

진보진영이 성장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기 위해서는 분배나 평등을 절대시하지 않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제는 평등이냐 아니냐 분배냐 아니냐가 아니라, 어떤 평등이냐 어떤 분배냐를 얘기해야 합니다. 증세와 감세 문제는.

=〉정공법 외에 다른 방법이 있을지요? 이런 문제가 중요한 논쟁의 대상이 된다는 것 자체가 우리나라 정치 및 사회가 발전했음을 보여준다고 생각됩니다. 다만 (1) 조세의 형평성 문제가 해결되어야 하고 (2) 조세 증가가 국민에 대한 실제 혜택으로 돌아온다는 것이 납득되어야 하겠지요.

또한 진보진영은 모든 것을 조세와 국가에 의해 해결하려는 유혹을 자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민간 부문이 할 수 있는 역할에 대해 적극적으로 고려해야 합니다.


4. 중소기업, 지식, 산업, 서비스 등 여러 요소들 중 가장 중요한 성장동력은.

=〉미진하거나 부족한 점이 너무 많습니다. 지금은 대략적인 스케치만이 제시되고 있는 초보적인 상황이고 이것이 어떻게 실천될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은 많이 부족합니다. 아직도 진보진영의 대안논의는 거대담론 투쟁 수준(예를 들어 진보가 지양하는 바가 사민주의인가가 소위 ‘사민주의를 넘어서는’ 것이어야 하는가 등)이라고 보입니다.

진보대안이 제시하는 수많은 내용들이 구체적으로 한국에서 어떻게 적용되고 실현될 수 있을지, 과연 의도한 정책이 실제 성과를 낼 수 있을 것인지 등이 별로 고민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모든 대안들이 ‘한국적’ 대안을 제시하겠다고 말하고 있지만, 대부분은 유럽(특히 스웨덴과 독일, 그 외에 덴마크 등)의 경험을 취사선택하는 정도에 머물고 있습니다. 한국의 경제와 사회가 가진 기존의 특수성을 더 고려하는 정책대안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이례적으로 빠른 고령화, 매우 빠른 서비스산업화, 그러면서도 자영업자 비중이 높은 것 등등 수많은 한국적 특성들이 충분히 고려되어야 합니다.





5. 중소기업, 지식, 여성, 지방, 부품소재 산업, 서비스 산업 등 여러 부문의 개별적 성장 동력 중 우선 순위를 두신다면?

=〉부품소재 산업이 대개 중소기업의 몫이니 둘을 하나로 묶을 수 있을 것 같고 그것이 성장동력의 최우선이 되어야 한다고 봅니다(대기업의 수출이 국민경제에 기여하는 바가 감소 중). 다음은 고용비중이 압도적인 서비스산업이 되어야 할 듯. 그 다음은 별 의견이 없습니다.


6. 지속가능한 진보는 참여-연대-생태의 가치, 분권-혁신-통합의 정책이란 정의도 있습니다만, 가치 부분에서 참여, 연대의 문제와, 환경의 문제는 어떻게 자리매김?

=〉참여 및 연대에 대해서는 별 논란이 없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것은 당연히 진보의 핵심 가치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문제는 환경일 것입니다. 한국의 진보가 성장을 중시하는 경우 생태가치와 충돌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설령 성장과 다소 부딪친다고 해도 생태의 가치는 중요한 가치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환경의 가치를 잃을 경우 진보는 진보가 아닌 매우 보수적 입장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한국에서 단기간에 진보가 생태주의를 최우선 가치로 내세우기는 어렵다고 생각됩니다. 중요하긴 하지만 최우선 가치이진 않은 정도로 자리매김되지 않을까요. 그러나 중장기적으로는 생태도 최우선 가치의 하나로 격상되어야 할 것입니다.



7. 경향신문은 ‘진보가 선점해야 할 10대 의제’로 ①조세개혁 ②부동산 ③교육정상화 ④재벌개혁 ⑤저출산고령화 ⑥소수자문제 ⑦건강불평등 ⑧생태주의 ⑨비정규직 ⑩빈곤문제를 제시한 바 있습니다. 진보 전략에서 개별 의제들은 어떻게 다루어져야

=〉(무응답)


8. 진보 전략 하에서 ‘사회적 대타협’의 문제?

=〉사회적 대타협은 적극적으로 검토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진보가 어떤 대안을 제시하던 그것이 자본주의 체제하에서의 개혁이라는 것을 전제로 한다면 사회적 타협이 필수적입니다. 무엇보다도 자본과 노동(그리고 시민사회) 간의 타협이 필요합니다. 이런 점에서 타협 자체를 백안시하는 일부 진보진영의 시각이 바뀌어야 합니다.

물론 이 타협이 진보의 내용을 실현하는 것이어야 하겠지요. 한국에서는 그간 국가 주도로 무원칙한 타협이 추진되고 강요된 경험이 있습니다. 내용이 없이 무조건적인 타협만이 부각된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타협인가가 중요합니다.



9. 5년, 10년을 내다보는 진보 전략은?

=〉단기적 지지율 등락에 일희일비하지 말고 한국에 적합한 진보의 대안을 차근차근 세워나가고 대중에게 알려가면 대중적 대안세력의 위치를 굳힐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