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퉁진보

진보는 있는가?

토건종식3 2007. 5. 7. 08:51

 

[진보개혁의 위기]전교조를 위한 변명과 반성

입력: 2006년 10월 24일 18:04:41

 
〈이민숙/전교조 대변인〉

전교조에 대한 보수우익세력의 비난이야 하루 이틀 있었던 것이 아니니 그리 고려할 일은 아니다. 그러나 개혁세력과 진보세력으로부터 전교조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나온다면 진지한 성찰과 반성이 필요하다. 전교조에 대하여 비판이든 지지든 하려면, 전체 한국사회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우리 교육계가 처한 현실이 어떠한지 먼저 살펴봐야 한다.

요즘 교육계는 아우성이다. 고교 평준화부터 시작해서 논술 문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과 교육개방, 사교육비 문제, 교원 성과급과 교원평가 같은 교원 구조조정 문제까지 거의 모든 영역에 걸쳐 날카로운 대립과 갈등이 멈추지 않는다. 이같은 대립은 정부와 교원단체 사이의 전면전의 모양새를 띠고 있으며 보수우익세력은 언론을 통하여 특정 계층의 입장을 끈질기게 관철시키는 데 앞장서고 일부 학부모단체가 이에 가세하고 있다. 그 가운데 전교조가 존재한다.

이러한 갈등과 대립의 밑바닥을 들여다보면 교육에 대한 ‘시각 차이’가 공통적으로 존재한다. ‘교육이란 국민이라면 누구나 누려야 할 권리이므로 가난한 아이들에게도 동등한 기회가 부여되어야 하고 그래야 교육을 통한 사회정의 실현이 가능하다고 믿느냐’, 아니면 ‘교육도 개인의 경제적 형편에 따라 구매 여부를 결정하는 단순 상품일 뿐이며, 따라서 소비자 주권, 선택과 효율의 논리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다, 하여 구매력이 있는 자들(소수 부유한 계층)에게 특별한 권리를 행사할 수 있도록 인정하여야 한다고 보느냐’가 그것이다.

요즘 추진되는 정부의 교육정책은 이른바 신자유주의 또는 시장주의라는 일련의 교육개편 전략이 관통하고 있다. 1980년대 영국에서 먼저 시작된 신자유주의 교육정책의 핵심은 한 마디로 교육에서의 ‘공공성 약화’로 요약된다. 국가가 책임지고 제공하던 공교육에서 재정보조를 삭감하거나 민간영역으로 넘기자는 것이다. 그 결과는 교육재정 삭감, 교원수 감축, 교육여건 악화로 나타난다. 교육은 이제 ‘권리’가 아니라 ‘상품’일 뿐이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신자유주의 교육정책이다.

국민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우리나라도 김영삼 정부 때 신자유주의 교육정책이 도입되어 김대중·노태우 정부를 거치며 본격화되고 있다. 요즘 교육계 갈등이 부쩍 고조되는 이유도 사실은 이러한 신자유주의 교육개편이 일단락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최근 논란을 빚고 있는 교원정원 감축, 성과급, 교원평가, 교육복지 삭감, 경쟁력을 앞세운 입시경쟁 강화, 평등교육의 퇴조도 이런 흐름 속에 위치한다. 이러한 정책들의 제도화는 사회 양극화를 넘어 ‘교육 양극화’까지 심화시키고 있다. 벌써부터 강남 아이들이 특목고와 일류대를 거의 독점하는 형편에서, 헌법이 규정한 ‘평등교육’ 이념은 사실상 무너지고, 교육은 돈 놓고 학벌 따먹는 ‘가진자들의 잔치판’으로 전락하고 있다.

전교조가 사사건건 반대만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공공성을 훼손하는 정책에 맞서 이를 막아내야 하는 것이 전교조의 일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대안 없이 반대만 한다’지만 때로는 더 나빠지지 않기 위해 막아내는 것 자체가 대안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전교조는 공공성에 기초한 올바른 학교교육의 모습을 담은 공교육 새판짜기라는 총체적 대안도 제시하고 있다. 다만 보수 언론으로부터 이는 외면당하기 일쑤고 전교조의 고군분투에 대한 비난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전교조가 모든 비판으로부터 자유롭다는 얘기는 아니다. 전교조가 부족한 부분에 대해 진지한 자기반성의 질문 역시 던져야 한다. 사회 양극화 속에서 아이들의 80%, 아니 90%가 사회경제적 어려움에 처해 있건만 어느덧 안정된 직종과 보수를 받고 있는 교사들의 가르침은 우리 아이들의 삶과 유리되어 있지는 않은가? 낮은 자들을 섬기는 참교육의 정신이 교육활동에 얼마나 구현되고 있는가? 실제 교직사회에 10만이 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삶에 얼마나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가? 동일 노동에 종사하면서도 임금 차별을 받고 있는 공립학교의 6%, 사립학교의 20% 이상의 비정규직 교사에 대한 배려가 있었는가? 교문 앞에서 여전히 멈춰서 있는 학생인권을 보장하기 위한 실천적 노력을 경주하고 있는가? 여전히 학부모들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촌지와 리베이트 등 고질적인 문제를 시정하기 위해 예전만큼 노력을 경주하고 있는가? 끝이 없는 이러한 질문에 대한 반성과 성찰이 필요하다.

전교조의 자기반성과 신자유주의 정책에 대항하는 일은 결코 유리된 것이 아니다. 가난한 아이들도 양질의 교육을 받을 수 있는 학교를 만들기 위한 것이 바로 전교조가 더욱 반성하고 싸워야 하는 일이고, 그것이 바로 신자유주의에 대항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17년 전 교육모순을 참지 못해 해직을 각오하고 전교조를 결성했던 초심이, 지금은 바로 신자유주의에 대항하는 것이 전교조가 가야 할 ‘참교육의 길’이다.

 

 

[진보개혁의 위기] 전교조는 왜 침몰하지 않는가

입력: 2006년 10월 24일 18:04:49

 
〈김대유/학교자치연대 공동대표〉

전교조에 대한 국민의 불신이 깊어지고 수구언론의 전교조 때리기가 심해질수록 전교조는 더 강성이 된다. 조직세도 여전하고, 교원평가에 따른 11월 연가투쟁이 계획되고 있으며, 해직까지 감수할 수 있는 정예 조합원은 1만명에 이른다. 전교조가 금세 무너질 것처럼 호들갑을 떠는 일부 지식인들의 속단은 부질없는 짓이다. 전교조가 정부에 준하는 지위와 권한을 행사하는 법적단체라는 사실을 잊은 것이다. 법적기구는 스스로 해체하지 않는 한 쉽게 무너지지 않는 법이다. 이제야말로 전교조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필요한 시점이다.

전교조는 왜 강성인가? 말할 것도 없이 집행부를 형성하는 소수의 핵심세력이 강성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신자유주의 반대투쟁과 노자(勞資) 모순을 통해 민중정권을 수립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당연히 노무현 정부와 열린우리당은 압박해야 할 대상이다. 이럴 때는 스스로 땀 흘리며 대중의 요구를 동력으로 삼아 대안을 창출하기보다는 정부와 강경하게 대립하고 투쟁하는 정치적 노선을 택하는 것이 유리한 방식이다.

전교조는 왜 교육개혁을 반대하는가? 결론부터 말하면 교육부와 열린우리당 때문이다. 전교조는 대통령의 핵심 공약인 지방교육자치 통합, 보직형 교장공모제, 대학입시, FTA, 국립대 법인화, 학생생활주기(Life Cycle)를 보장하기 위한 보건교과 개설, 교원평가 등에 대해 강력한 저지선을 확보하거나 소극적인 자세로 일관했다. 표면적인 이유는 그 모든 정책이 ‘완벽하지 않다’는 것이지만 속내는 다르다. 전교조는 대안과 참여를 고리로 한 이들 정책에 대해 자신감이 부족했다. 마침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고 교장과 교육관료 개혁을 전제로 한 공약의 입법화에 부담감을 느끼고 있던 우리당의 입장과 눈이 맞은 것이다. 참여정부와 우리당이 출범했던 2003, 4년은 지금의 전교조 집행부가 집권했던 시점이다. 열린우리당 교육위 의원, 전교조의 강성 집행부, 한나라당 의원들은 대통령 공약을 함께 반대하고 유보하여 침몰시키는 일에 합심했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었다.

전교조는 왜 정치적인가? 정치노조의 길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전교조는 합법화 시점에서 그 칼끝을 정치권으로 돌렸다. 교장선출보직제나 학교자치같은 현장의 절실한 요구보다는 총력을 기울여 교육감과 교육위원 선거에 올인했다. 전교조가 권력화되니 주변의 일부 교육운동가들도 그 반사이익을 따라 움직이는 일이 생겼다. 생각해보면 전교조는 한국교총이 출범하던 당시 현장개혁이냐 정치권력이냐는 극심한 노선갈등 속에서 정치권력을 택하여 교육감, 교육위원직을 독점해가던 그 전철을 밟고 있었던 것이다. 역사는 무섭다.

전교조는 왜 침몰하지 않는가? 무엇보다 교육부가 예인선 노릇을 하기 때문이다. 학부모는 교장과 교육관료를 분리하여 사고하지만 그것은 오해다. 교감과 교장이 교육청과 교육부로 가면 교육관료가 되고, 그들이 다시 학교로 돌아오면 교감, 교장이 되며, 또 그들은 빠짐없이 교총에 가입한다. 학교장과 교육청과 교총은 한 몸통인 것이다. 50년 넘게 묵은 그 몸통을 개혁하기 위해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 보직형 교장 공모제였고, 원터치 교육행정 시스템인 지방교육자치통합이었으며, 학생 건강을 보장하는 보건교과 개설이었다. 교사가 승진에 목을 매고 교육청이 승진을 지상과제로 하는 관료로 가득 차 있는 한 학교는 불행을 면할 길이 없다. 국민들은 모른다. 아이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교사일수록 학교에서 왜 따돌림을 당하는지, 왜 아이들이 촛불을 들고 광화문으로 달려가는지. 교육부는 그 모든 모순의 숙주다. 개혁을 답보하는 교육부가 건재하는 한 전교조는 갈수록 강성이 된다. 이치가 그렇다.

전교조는 왜 참교육의 첫사랑을 잃었는가? 조직이 관료화되었기 때문이다. 머리인 본부의 활동가들은 상당수가 10년 가까이 전교조 사무실과 학교를 오가며 상근을 하고 있다. 사실상 학교현장을 떠난 것이다. 그들은 학교개혁보다는 연대활동이나 정치활동에 더 익숙한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전교조 본부의 조직체계도 정책연구나 참교육보다는 사무와 조직라인에 절대적인 무게가 실려 있다. 임원을 구성하기 위한 인사위원회조차 법제화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주요한 보직일수록 선거참모들에게 배분되고 있다. 인사가 만사인 합법조직의 체계화는 애초부터 시도되지도 않았다. 그 결과 전교조의 권력이 내부 서클에 의해 사유화되고 대중 조합원이 우민화되고 있다는 지적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허리 부분에 해당하는 지역의 지회장들과 단위학교의 분회장들은 그들이 내리는 공문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학교에서 교육부패와 학생교육을 위해 고독하게 싸우되 학부모로부터 박수를 받았던 그들은 이제 학교현장을 떠나 붉은 머리띠를 두르고 광화문 정부중앙청사로 향한다. 목소리는 커지고 대오는 정연하되 열정과 자발성은 신기루가 되었다.

 

 

 

[진보개혁의 위기] 2-4. 꿈을 잃어버린 교단 ‘전교조’

입력: 2006년 10월 24일 18:10:56

 
교직 9년차로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조합원인 서울ㄱ중 김모교사(32)는 성과급 반납투쟁에 참여한 것을 요즘 후회하고 있다. 지난 7월 교육부가 일선 교사들에게 성과급 차등 지급폭을 10%에서 20%로 확대하겠다고 발표하자 ㄱ중 조합원들은 비상회의를 열었다. 분회장은 ‘성과급을 반납하더라도 정부가 받아갈 법적 근거가 없기 때문에 100% 안전한 투쟁 방식이며 나중에 이자까지 쳐서 돌려줄 것’이라고 동료 교사들에게 설명했다. 김교사는 5분도 고민하지 않았다. 너무나도 간단하고 당연하게 반납 결정을 내렸다. 다른 교사들도 마찬가지였다.

‘교원 성과급 제도는 분명 문제가 있다. 당장 90만원 정도가 없다고 생계에 지장을 받는 것도 아니다. 성과급은 어차피 임금의 일부이므로 교육부가 다시 가져갈 수도 없다. 지도부에 힘을 실어주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너무 쉽게 결정한 투쟁이었습니다. 좀더 사려깊게 결정했어야 했습니다. 학부모나 학생들 눈에 교육부의 성과급 정책이나 우리 투쟁이 어떻게 비칠지 별로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성과급 반납에는 8만여명의 교사가 참여했다. 불과 1개월여 만에 7백50억여원이 모였다. 전교조 조합원이 아닌 교사들까지 반납에 동참할 정도로 호응이 컸다. 김교사는 “이렇게 쉬운 투쟁이라는 것이 결국은 전교조를 나락에 빠뜨린 함정이 됐다”고 말했다.

지도부는 지난달 14일 전국 시·도교육청과 교육부 앞에서 동시다발적 기자회견을 열었다. 성과급 반납에 참여한 교사들의 숫자와 천문학적인 반납 금액을 공개했다. 그리고는 돈다발을 교육청 안으로 집어 넣기 위해 전경들과 몸싸움을 벌였다.

-‘교원평가’ 등 교원정책마다 ‘밥그릇 챙기기’-

하지만 전교조의 투쟁은 냉담한 반응으로 되돌아왔다. “진정으로 반납 의지가 있다면 점심을 굶는 학생들을 위해 기부하라”는 ‘안티 전교조 단체’의 한마디에도 대응 논리가 군색했다. 전교조는 고립되어 갔다.

전교조의 ‘불행’은 이같은 상황 속에서도 투쟁을 계속하고, 수위를 높여갈 수밖에 없다는 데 있다. 전교조는 최고 의사결정기구인 대의원대회를 통해 정부가 성과급 차등 지급 정책을 철회하지 않을 경우 11월20일쯤 연가투쟁을 벌이기로 했다.

전교조는 지난해 교원평가 저지를 위해 연가투쟁을 결의했지만 당시 이수일 위원장이 막판에 직권으로 연가투쟁을 철회했다. 국민들의 호응은 얻었으나 전교조는 엄청난 내홍을 겪었다. 결국 지도부는 조합원들의 불신임을 받았고, 강경파로 분류되는 현재의 장혜옥 위원장 체제가 들어섰다. 현 집행부로서는 스스로의 정체성을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연가투쟁을 강행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전교조의 한 지회장은 “우리도 어렵다는 것은 알지만 지난해 연가투쟁을 철회해 지도부가 불신임을 받은 경험도 있기 때문에 연가투쟁을 밀고 나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전교조의 연가투쟁 방침에 학부모들의 반응은 싸늘하기만 하다. 전교조는 원군이라고 할 수 있는 참교육학부모회 같은 진보 성향의 학부모단체로부터도 지원 성명 한번 받지 못했다. 1989년 전교조와 같은해 설립된 참교육학부모회는 전교조 해직교사를 위한 복직운동을 벌이고 비리 사학 척결 운동 등을 함께 한 동지였다. 하지만 지난해 교원평가 저지투쟁과 올해 성과급 반납 투쟁에서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다. 참교육학부모회가 이 정도면 일반 학부모들의 지지를 끌어내는 데 완전히 실패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학부모 최경숙씨(45·서울 성동구 금호동)는 “요즘 전교조의 투쟁을 보면 감동이 없다”며 “교사들만을 위한 이익단체로 전락한 느낌”이라고 말했다. 7~8년 전만해도 그는 전교조의 열렬한 후원자였다. 아이 담임 선생님이 전교조 운동으로 학교에서 쫓겨나자 ‘우리 선생님을 보낼 수 없다’며 교장·교감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매달리기도 했다.

“큰아이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90년대에는 담임으로 전교조 교사를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전교조 선생님들은 촌지도 받지 않고 가난한 아이를 차별하지도 않고 정말 열심히 가르쳤거든요. 그런데 지금 전교조 선생님들은 많이 다릅니다. 전교조 선생님들은 교사들을 위해서 투쟁하지 학생을 위해 투쟁하지는 않는 것 같아요. 소외된 아이들, 저소득층 자녀들을 위해 연가투쟁을 벌인다면 학부모도 백번 찬성하죠. 개구리가 올챙이 시절 기억 못하듯 전교조는 출범 당시 학부모와 학생들이 보여준 성원을 모두 잊어버린 것 같습니다.”

전교조는 80~90년대 한국 교육의 희망이자 대안이었다. 정부의 갖은 탄압을 받으면서도 아이들 교육에 헌신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조합 탈퇴를 거부한 1,527명의 교사들이 파면·해임되고, 42명은 구속되기까지 했지만 굴복하지 않았다. ‘전교조 교사=참교육 전도사’였다. 전교조 교사는 촌지를 받지 않았고, 아이들을 편애하지도 않고 열심히 가르쳤다. 전교조 교사를 담임으로 만나는 것은 학생이나 학부모에게 큰 행운이고 바람이었다.

-“학생 위해 모두 희생” 90년대 ‘한국교육의 희망’-

서울 ㅈ중 박모교사(29)는 89년 초등학교 5학년 시절 담임으로 만난 전교조 선생님의 영향으로 교직을 택했다. 당시 박교사의 담임은 매일 큰 반합을 들고 출근했다. 학급에 도시락을 싸오지 못하는 학생 2~3명을 위해서였다. 담임 선생님은 이들과 함께 1학기 동안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점심을 같이 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5학년이 되도록 한글과 구구단을 깨치지 못한 학생에게는 수업이 끝난 뒤 한시간씩 특별지도를 했다. 학교 운동장에서 학급 전체가 단체 야영을 하며 토요일밤을 보내기도 했다.

“제 인생에서 가장 재미있게 학교를 다니던 시절이었어요. 그런데 하루는 종례 시간에 담임 선생님이 저희들을 앞으로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말씀하시더군요. 그리고는 다른 담임 선생님이 오더라도 말씀 잘 듣고 공부 열심히 하라고 하셨어요. 며칠 있다가 선생님은 전교조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해직됐습니다. 선생님이 보고 싶어서 친구들과 교실에서 눈이 퉁퉁 붓도록 울었습니다. 지금도 그때 생각을 하면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

정부는 불법으로 낙인 찍었지만 학생과 학부모의 지지를 받은 전교조가 합법화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99년 1월6일, ‘교원노조 법안’이 국회를 통과하자 김귀식 위원장은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떨리는 목소리로 기자회견문을 읽어 나갔다. 장내는 엄숙했고, 배석한 교사들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우리가 그렇게 참교육의 깃발을 부둥켜안고 오늘까지 오게 된 것은 참교육이야말로 반교육의 현실 속에서 이 나라 교육과 아이들을 지키는 유일한 길이며, 그것을 간절히 염원하는 국민들의 여망에 부응하고자 한 이 땅 교사로서 최소한의 의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중략) 존경하는 학부모 여러분! 학부모 여러분의 이해와 도움이 없었다면 이런 감격스러운 결과는 없었을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결성 당시 보여주었던 그 높은 지지와 기대를 우리는 잊지 않겠습니다. 어떤 경우라도 우리는 교육적 입장에서 우리의 권익보다는 아이들을 먼저 생각하겠습니다. 아이들의 배울 권리를 침해하는 어떠한 행동도 단호히 거부하겠다는 것을 분명히 밝혀 둡니다.”

합법화 이후 전교조는 괄목할 만큼 성장했다. 1만명 안팎이던 전교조 조합원은 한때 10만명에 육박했다. 전교조의 영향력도 과거에 비할 바가 아니다. 참여정부 출범 이후에는 여권 및 청와대와 직·간접적으로 연계돼 정부의 교육정책 결정 과정에도 참여하고 있다.

-참여정부 들어선 뒤 정책결정 참여기회-

교육부의 한 관료는 “참여정부 초기 전교조의 파워는 대단했다”고 술회했다.

“위에 보고를 하면 반나절도 못돼 전교조에 내용이 들어갑니다. 특히 교원 정책, 초중등 교육 정책은 그렇습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터놓고 전교조와 협의를 하는 분위기였습니다. 위원회를 만들면 전교조 대표를 포함시킵니다. 아니 전교조의 의견을 반영하기 위해 위원회를 만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지금은 대통령이 전교조와 조금 틀어졌지만 참여정부 초기에는 정말 대단했습니다. 윤덕홍 전 부총리만해도 교육부 직원들 말은 안믿고 전교조 말이라면 거의 다 믿었습니다. 대통령과 부총리가 전교조를 신뢰하는데 관료들이 어떻게 합니까. 박박 길 수밖에 없었죠.”

교사들의 경제적 여건도 크게 개선됐다. 교사 월급은 이제 ‘박봉’이 아니다. 교육대나 사범대를 갓 졸업한 1년차 여성 교사의 급여는 연 2천7백만원, 11~12년차 교사는 연간 4천만원 안팎을 받는다. 여기에 담임 등 보직을 맡거나 보충수업을 하면 월 20만~40만원 정도가 추가된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도시근로자 가구의 월평균 소득은 3백25만원(연 3천9백만원)이다.

외국과 비교해도 우리나라 교사들의 급여는 적은 편이 아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자료에 따르면 2004년 우리나라 초등 교원(15년 경력)의 연간 급여는 구매력지수(PPP) 환산액(1달러당 784.15원) 4만8천8백75달러로 OECD 평균보다 1만3천달러 가량 많다. 선진국인 독일이 4만6천9백35달러, 미국이 3만9천7백여달러다.

특히 최고 호봉자의 연간 급여는 초등의 경우 7만8천4백72달러로 OECD 평균(4만2천3백47달러)보다 월등히 많았다. 교원 1인당 학생수 등이 외국보다 많고 생활지도 등 수업 이외의 업무 부담이 많다지만 62세까지 정년이 보장되는 교직은 ‘사오정’(40대 50대 정년퇴직기) ‘오륙도’(50대 60대에 정년퇴직하면 도둑놈)라는 말을 피부로 느끼며 사는 일반 회사원에 비할 바가 아니다.

교사는 결혼 배우자감으로도 최고 인기다. 한 결혼정보업체가 최근 20세 이상 미혼 남녀 2,000여명을 상대로 설문조사한 결과 아내의 직업으로 교사를 희망한 남성이 전체의 52.8%였다. 여성의 경우도 22.4%가 남편감으로 교사를 꼽았다.

학교 현장의 수많은 조합원과 참여정부의 출범, 교사의 경제적 지위 상승. 전교조로서는 참교육을 실천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조건이 갖추어졌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전교조의 위상과 역할은 80~90년대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역설적이게도 전교조는 합법화가 이뤄지고, 전교조에 상대적으로 우호적인 정파가 집권하면서부터 오히려 국민들로부터 멀어지고 있다.

지난 7월 치러진 전국 교육위원 선거는 전교조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전교조는 추천 후보 42명 가운데 14명이 당선되는 데 그쳤다. 2002년 선거에서 35명을 추천, 24명이 당선된 것과 비교하면 당선자와 당선율이 절반 가까이 떨어진 것이다.

전교조가 ‘민심’을 잃게 된 것은 무엇 때문일까. 전교조 출신으로 교장 정년을 채운 뒤 평교사로 다시 재직중인 고춘식 교사(한성여중)는 “합법화 이후 전교조에 대한 국민의 기대는 훨씬 커졌는데 거대 조직이 된 전교조가 국민이 가려워하는 곳을 정확히 긁어주지 못하자, 국민들도 서서히 기대를 접고 있는 것 같다”고 밝혔다.

-교원입장만 대변하다 ‘교육 바로 세우기’ 실패-

학부모들이 보기에 전교조는 합법화 이후 ‘초심’을 잊고 학생을 중심 가치로 두지 않고 교사 입장만 대변하는 이기주의적인 교사 이익단체이다. 전교조가 지난해와 올해 집중하고 있는 교원평가 반대 투쟁이 대표적인 예다. 학생과 학부모는 이 정책들을 지지하고 있다. 지난해 4월 국정홍보처가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77.4%가 교원평가제도에 찬성의 뜻을 밝혔다. 교원평가를 해서라도 교사들이 좀더 아이들을 잘 가르치도록 자극해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 교사들은 교원평가제도를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이다. 교사로서의 자존심과 권위가 무너지는 것도 문제지만 ‘교원평가가 결국 교원 구조조정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교조가 교원평가 반대 투쟁을 강하게 벌이면 벌일수록 국민으로부터 외면당하는 구조가 형성된 것이다. 교원성과급 반대 투쟁도 마찬가지이다. 국민들은 찬성하는 정책을 전교조는 반대하는 것이다.

중소기업에 다니는 김성한씨(39)는 최근 전교조 교사인 중학교 동창을 만났다가 대판 싸움을 벌인 끝에 절교까지 하게 됐다. 그는 자기 희생정신과 노동자에 대한 연대 의식이 없으며, 모든 것을 제도와 사회 구조탓으로 돌리는 전교조 동창에게 크게 실망했다고 말했다.

“과외 받지 않게 아이들을 학교에서 좀더 잘 가르쳐 달라고 했죠. 그랬더니 친구가 그러더군요. 자신의 아이가 경쟁에서 다른 아이를 이겨야 한다고 생각하는 부모의 이기심이 문제라고요. 사기업에 다니는 회사원뿐 아니라 정부 부처 공무원도 능력에 따라 성과급을 받고 필요하면 평가를 받는데 교사들은 왜 평가를 거부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동창은 ‘평가받아보니 좋더냐. 우리 보고 평가받으라고 할 게 아니라 너희들도 평가 거부 투쟁을 하는 게 옳은 것 아니냐’고 하더군요. 한마디로 기가 막혔습니다. 현실을 몰라도 너무 모르고, 배가 불러도 너무나 배부른 소리를 하더군요.”

전교조는 최근 교사를 포함한 여성 공무원의 육아휴직 전 기간을 경력으로 인정하라고 정부에 요구했다. 전체 육아휴직 기간(최장 3년) 중 1년만을 경력으로 인정하는 것은 저출산 대책의 취지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는 전교조 조합원의 과반을 차지하는 여교사들의 강력한 희망사항이기도 하다. 그러나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는 3개월 출산 휴가조차 보장받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임신 사실이 알려지면 회사에 사표를 내야 하기 때문에 불러오는 배를 졸라매고 밤늦게까지 야근하는 여성들도 많다. 전교조의 이런 요구는 국민의 공감을 얻기는커녕 상대적 박탈감과 분노를 키운다.

전교조가 전가의 보도처럼 꺼내드는 ‘연가투쟁’도 무기가 되지 못하고 있다. 전교조 초대 정책실장을 지낸 김진경 전 청와대 비서관은 “전교조가 법외노조 상황에서 반정부 투쟁을 너무 오래하다보니 관성적으로 투쟁을 벌이는 경향이 있다. 현재의 전교조는 약자가 아니고, 정부 정책에 비판만 할 게 아니라 대안을 내놓아야 한다”고 비판했다.

고춘식 교사도 “합법화는 우리 사회가 전교조에 어떤 새로운 역할을 요구한 것”이라며 “사복을 벗고 때로는 정장을 입으라는 요구이기도 하고, 부정과 거부와 공격의 자리에서 긍정과 수용과 수비의 자리에도 있으라는 요구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전교조 출신의 한 장학사는 대중 조직, 노동조합 조직으로서의 한계를 지적했다. 그는 “초창기에는 아이들 교육을 잘 해보겠다는 취지에서 가입한 열성 교사들이 많았지만 지금은 아무나 쉽게 가입하고, 그런 조합원들이 많아지다보니 조합원 대중이 원하는 투쟁만 1년 내내 벌이게 된다”고 말했다.

서울의 한 공립 중학교에서 4년째 기간제 교사로 일하고 있는 이모씨(29)는 비정규직에 대한 전교조의 이중성을 꼬집었다.

“말로는 비정규직 문제를 거론하면서 정부를 비판합니다. 그런데 정작 전교조가 교무실 옆 책상에 앉아 있는 비정규직 기간제 교사나 시간 강사를 위해 한 것은 거의 없습니다. 말과 행동이 따로 노는 것이지요. 개인적으로 많은 전교조 교사를 알고 있지만 동료로 인정해주는 사람은 10명 중 2명도 안됐습니다. 임용고시를 통과해 만일 정교사가 되면 저는 절대 전교조 가입 안할 겁니다.”

-‘시간제 강사’ 놓아두고 ‘비정규직’ 거론 이율배반-

문제의 심각성은 전교조가 진보세력 위기의 주범으로 인식되고 있다는 점이다. 진보진영에서도 다른 진보단체에 대한 평가는 엇갈려도, 전교조에 대해서는 자기 기득권을 지키려고, 진보세력 전체를 위축시키고 있다는 데 대체로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 이민숙 대변인은 “전교조 운동을 지지했던 세력과 인사들에게서도 전교조에 대한 비판이 적지 않게 제기되고 있다”면서 현실을 인정했다.

교육과시민사회 윤지희 공동대표는 “전교조가 교원 자신의 이해가 걸린 교원 정책과 관련해 보수적 입장을 취하면서 개혁 세력은 방향을 잃고 헤매는 반면 반대 세력은 반전교조 반개혁의 명분을 쌓고 힘을 얻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전교조도 지금의 상황을 위기 국면으로 인식하고 있다. 지난 7~8월을 거치면서 조합에 새로 가입하는 교사들이 눈에 띄게 줄었다. 지난 9월 열린 전국 대의원 대회에서 국민들의 지지를 회복하기 위해 민생 차원의 운동을 강화하기로 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전교조는 ‘민심 회복’을 위해 부교재(참고서) 가격 인하, 소외 아동을 위한 지역공부방 활성화, 학생 체벌 금지, 학교 급식에 우리 농산물 이용하기 등을 2학기 주요 사업으로 정하고 학교 단위에서 강력히 실천하기로 했다. 그러나 전교조의 한 간부는 한숨을 쉬었다. “국민에게 다가가기 위한 전교조의 이런 노력마저도 위선으로 비쳐지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권익보다 아이들을 먼저 생각하겠습니다’라는 선언은 이렇게 빛이 바래고 있다.

〈오창민기자 riski@kyunghyang.com

 

 

[진보개혁의 위기] 2-5. 시민단체-뿌리 잃은 풀뿌리운동

입력: 2006년 10월 29일 18:28:30

 
4·13 총선을 앞둔 2000년 1월 중순 서울 종로구 안국빌딩의 총선시민연대 사무국에는 하루 300여통의 격려전화가 쏟아졌다. 업무를 볼 수 없을 정도였다. “썩은 정치판을 갈아보자”는 시민들의 해묵은 분노의 분출이었다. 힘을 내라며 한밤에도 국수, 음료수 박스를 들고 오는 시민들도 있었다. 시민들이 후원금으로 수만~수십만원씩 냈다. 한 시민은 3천만원을 내놓았다.
2004년 2월03일 총선시민연대가 한국프레스센터에서 발족식을 하고 ‘부패정치 퇴장, 돈선거 추방’ 구호가 적힌 띠를 펼쳐보이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선거법 87조를 들어 “불법행위”라고 경고했지만, 총선연대는 오히려 “선거법 87조는 위헌성이 있다. 위법도 불사하겠다”며 거칠 것 없었다. 여론조사에서 나타난 90% 안팎의 압도적 국민 지지가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86명의 낙선대상자 가운데 59명(68.6%)을 떨어뜨린 선거 결과도 대성공이었다.

그러나 과연 이 총선연대 활동이 ‘시민에 의한, 시민의 운동’이었을까. 시민단체들의 시의성 있는 선도적인 활동에 시민들이 전폭적인 지지를 보낸 것은 맞다. 그러나 지지는 시민동원이었을 뿐 시민참여는 아니었다. 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 김정수 사무처장은 “총선연대가 정치를 정상화 궤도에 올려 놓았지만 전문가 중심 시민운동의 비정상적 거품도 드러냈다”고 평가했다.

그 거품은 지난 5·31 지방선거 때 확인됐다. 288개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2006 지방선거시민연대’가 `막개발, 헛공약'을 선정해 정책선거의 첫발은 내디뎠으나 2000년 총선연대와 달리 주목받지 못했다. 경실련과 매니페스토(참공약)추진본부의 정책선거 운동도 마찬가지였다. 이에 대해 6월13일 희망제작소 월례포럼에서는 “시민과 대화가 없었다" "후보의 정책변화에는 역부족이었고, 당락에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는 등 시민들의 비판이 쏟아졌다.

한때 ‘제5부’로까지 일컫던 시민운동의 영향력이 떨어지고 있다. 시민운동은 국무총리, 장관, 국회의원까지 다수 배출했지만 정작 자신은 쇠락해가고 있다. 정말 “민주화운동이 1990년대 시민운동에 사회적 지위를 내주었듯이 (기존 시민운동이 아닌) 다른 성격의 운동을 조직해야 할 때”(하승창 전 함께하는시민행동 사무처장)일까. 물론 “시민운동 위기는 경실련과 참여연대 등 거대 단체의 위기이고, 전체 시민사회 운동의 저변은 넓어졌다”는 주장도 있다. 동네 쉼터인 성미산을 아파트로 개발하는 서울시 방침에 맞서 주민들이 들고 일어선 서울 마포 성미산 운동과 옥천 지역운동 등 주민자치센터, 학교, 복지관, 동사무소와 연계한 시민자치운동이 활발해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요즘 시민운동이 신뢰를 잃어가고 있는 사실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서베이리서치센터와 삼성경제연구소가 3년동안 한 한국종합사회조사(KGSS) 결과 2003년, 2004년 연속 1위에 오른 시민단체 신뢰도가 지난해 5위로 4계단 떨어졌다. 지난 6월 한국사회여론조사연구소(KSOI)의 사회단체 정기여론조사도 ‘참여민주사회와 인권을 위한 시민연대’(약칭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에 대해 ‘신뢰하지 않는다’는 답변(52.6%)이 ‘신뢰한다’(41.5%)보다 많았다. 동아시아연구원(EAI)이 최근 국내 24개 파워집단을 조사한 결과 참여연대의 신뢰도는 지난해에 비해 8위에서 15위로, 영향력은 16위로 4계단 떨어졌다. 신뢰 추락은 시민단체 인사의 정부 참여 과정에서 불거졌다.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는 최근 “비정파를 표방하면서 시민운동을 하다가 정부조직에 들어간 사람이 은근히 많다. 사람들이 그렇게(정권의 홍위병) 생각하도록 빌미를 제공한 측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한국인권재단 양영미 사무총장은 “인권위, 고충처리위, 과거사위 등에 시민단체가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정부가 추진하는 사례가 많았다”고 설명했다. 참여연대 활동을 하던 이 가운데 상당수가 각종 정부 위원회에 참여하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국무총리실이 정책 결정과정에 참고하는 보고서 가운데 참여연대 보고서가 65개(22.9%)로 가장 많은 것으로도 나타났다. 이 때문에 사회구조 개혁을 위한 ‘중앙차원의 대변형운동’의 필요성에도 불구하고 참여연대가 과다대표되고 있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이런 정부 참여는 ‘양날의 칼’이다. 시민단체 활동을 옥죄는 결과를 초래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문화연대 지금종 사무총장은 “백배 양보해 고육지책으로 뭔가 바꿔보겠다고 정부에 참여하더라도 사안별로 참여해야지, 고임금 상근직에 몸담는 일은 조심해야 한다”고 비판했다. 대표적인 사례로 최근 논란중인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 출신의 신태섭 KBS 이사와 최민희 방송위 부위원장을 들었다. 지총장은 “신이사는 당연히 민언련 공동대표 자리를 내놓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최부위원장이 7월 방송위에 들어가기 직전(3월)에 민언련 공동대표가 된 것은 우리가 봐도 의도적으로 보이는데, 보수세력에 ‘관변단체’라는 비판을 듣는 건 당연하지 않겠느냐”고 꼬집었다.

시민단체가 정부의 사업비 지원을 받는 방식도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정부 지원을 받지 않는다는 인권운동사랑방의 박래군씨는 이렇게 말했다. “언젠가 청와대에 있는 사람이 하소연합디다. 김대중 정부 때부터 상당수 시민단체들이 개인 인맥을 통해 정부 프로젝트를 따기 위해 로비를 하는데 힘들다고요. 더구나 사업비로 다 쓰지 않고 인건비로 전용해 사람을 늘리고 조직을 키웁니다. 그러다 보면, 커진 조직을 굴리기 위해 더 큰 프로젝트를 따와야 합니다. 이렇게 덩치를 키우면 정부에 의존하게 되는 것이죠. 이런 게 바로 위기이고 한계입니다.”

부산발전연구원의 주경미 여성정책연구센터장은 지난달 한 여성운동 토론회에서 그 실상의 일부를 솔직히 설명했다. “여성단체가 정부 보조금을 확보하기 위해 상호견제하고, 지원받기 용이한 활동을 선택적으로 전개합니다. 그러다 보니 고유한 활동영역 개척에 소홀하게 되고, 정부 지원에는 더욱 의존하게 되는 악순환 고리에 빠집니다.”

거대 시민단체의 정치·사회개혁 중심 운동의 한계에 봉착한 것 아닌가 하는 논의도 활발하다. 그런 운동이 ‘시민’을 소외시켜 시민운동 위기를 키웠다는 설명이다. 여성민우회 출신의 정강자 인권위 상임위원은 “고작 총론이나 내놓을 뿐 각론에서 전문적 대응을 못한 채 시민운동이 과다대표돼 왔다”며 “분배와 일자리 창출 같은 구체적인 국민의 요구에 더 다가가야 한다”고 말했다.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 부족도 시민운동의 위기에 기여하는 큰 요인의 하나이다. 회원으로 등록하고 회비를 내는 것 자체는 시민운동의 발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회비를 내는 것에 머물 뿐 실제 참여는 저조하다. 한 시민단체 활동가는 “대체로 회원 90%는 회비만 낼 것”이라고 추정했다. 풀뿌리 시민운동 참여가 전체 인구의 10%를 넘고, 절반은 정기 회비를 내는 선진국과 대조된다. 최근 수년 사이 지역운동은 활발해졌지만 주중이나 저녁시간에 모임을 하면 절반도 참석하지 않는 게 국내 실정이다. 녹색연합 최승국 사무처장은 “바쁜 직장생활 탓에 직접 참석이 어렵다면 항의메일 보내기 등 온라인 활동을 해야 하는데 그마저 안된다”고 전했다.

시민단체 회원인 권모씨(47·서울 성동구 성수동)는 “지역문제는 지역단체가 해결해야 할텐데 모든 걸 중앙 조직이 결정하는 식이다. 주민 의견부터 반영해야 지역운동이 발전하지 않겠나”라고 의문을 제기했다. 구호나 이벤트, 집회 위주의 관성적 운동 방식도 시민의 참여를 막고 운동을 정체시키는 요인이다.

박래군 활동가는 “평택 대추리나 한·미 FTA 집회 등에 그냥 몇명씩 할당한 이들을 동원하는 식으로 하고 있다. 민주노총뿐 아니라 다른 조직도 비슷하다”고 밝혔다. 과거는 전대협이 동원을 했는데 지금은 그나마 민노총 아니면 동원할 데도 없다. 그는 “결국 시민 속으로 들어가지 못한 채 경찰 저지선 안에서 자기만족적으로 외치는 집회로 끝날 뿐”이라고 말했다.

대규모 연대집회에 맹목적인 ‘사람 대주기’도 여전하다. 또 “머릿수가 힘이라는 식으로 연대의 목적에 대한 성찰 없이 거대단체와 나란히 이름을 올리려고 몰려드는 행태”(양영미 사무총장)도 그렇다. 지난해 한양대 제3섹터연구소의 시민사회지표(CSI) 연구결과 시민단체간 연대 활동은 80.9%가 매우 활발하다고 긍정 평가한 반면, ‘실질적인 의사소통은 부족하다’는 응답이 44.6%나 됐다. ‘숟가락’만 올려놓는 형식적 연대 활동의 한계를 스스로 인정한 대목이다.

일반 시민참여 부족은 만성적 재정 위기의 중요 원인이 되고 있다. 한국시민사회단체편람에 나타난 시민단체의 회비 수입 비중은 대체로 전체 재정의 40% 이내다. 1만5천명 회원의 참여연대는 연회비 비중이 84.9%로 높은 편이다. 회원 3만5천명의 경실련은 33.3%에 그치고 있다. 환경운동연합처럼 회원수도 늘다가 정체 상태다.

이렇게 회비 부족으로 재정상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방편들이 동원되면서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지난해 10월 환경재단은 한 호텔에서 후원행사를 열어 ‘어린이 환경기금’ 명목으로 기업들에 공문까지 보내 1백만~1천만원의 후원금을 요청, 구설에 올랐다. 경실련은 2000년 1월 11주년 기념식 및 ‘후원의 밤’ 행사에 앞서 주택공사와 석유공사 등 13개 정부투자기관에 1천만원씩을 요구하는 지원요청서를 보냈고, 일부 기업은 2백만~5백만원씩 후원했다. 이는 며칠 전에 이들 기관장의 판공비 사용내역 등의 정보공개를 요청한 뒤였다.

참여연대도 올 4월 새 사무실 이전을 위한 후원의 밤 행사에 850개 기업체에 최고 5백만원의 후원금 약정서를 돌렸다. 기업체 편법상속 조사 결과 발표를 앞둔 시점이었다. 한 시민단체 활동가는 “기업 후원을 받는 어떤 환경단체는 운동을 시늉만 하고 말더라”며 “기업 돈을 받는 순간 운동의 정당성을 상실한다”고 말했다.

시민단체의 열악한 환경과 불투명한 비전은 새로운 활동가의 충원도 어렵게 만들고 있다. 요즘 시민운동가 사이에서 “인적 역량이 바닥을 드러냈다” “참신한 아이디어가 나오기도 어렵다. 지쳤다”는 말이 점차 늘고 있다. 한 인사는 “노동판에서 시민운동으로 갔던 사람들이 시민운동을 떠나면서 시민운동은 완전히 사양길”이라고 진단했다. 참여연대 출신인 양영미 총장은 “2000년 낙천·낙선운동 뒤 참여연대가 4명 신입을 모집할 때 400명이 지원한 것은 이미 옛날 일”이라고 전했다. 인력구조상 허리인 30대 활동가의 대거 이탈로 비상이 걸린 상태이다. 처우도 열악해 참여연대의 경우 지난 5년 동안 처장급이 월 1백40만원, 활동가는 85만~1백만원 남짓에 묶여 있었다. 지난해 5월 ‘시민의신문’이 시민운동가 201명에게 설문조사한 결과 월평균 급여 50만~1백만원이 49.8%로 가장 많았다. 김혜정 사무총장은 “과거 시민운동이 잘 될 때는 몰라도 지금처럼 욕먹고 박봉에 불안한 미래를 감수할 신념을 가진 사람이 많지 않다”고 털어놓았다.

새로운 담론을 생산하지 못한 것도 일반인과 운동을 갈라놓고 있다. 총선·대선·대통령 탄핵·새만금·방폐장 등 현안에 급급하게 대처하면서 미래를 준비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환경운동의 경우 국가의 도로교통정책이나 에너지정책에 대한 근본 문제제기와 대안 제시를 통해 국민을 설득하지 못했다. 참여연대 김기식 사무처장은 “결국 담론과 리더십의 위기”라고 인정했다. 대전 참여자치시민연대 김제선 사무처장은 “절차적 민주주의 위주로 운동을 하다가 사회양극화, 고용불안 같은 시민의 고통에 시민운동의 대응이 취약한 것이 위기 원인”이라고 분석했다.

〈전병역·장관순기자 junby@kyunghyang.com

 

 

[진보개혁의 위기]성명서나 발표하는 운동 반성을

입력: 2006년 10월 29일 18:32:32

 
오성규 환경정의연대 사무처장
예전에는 운동하면 반응이라도 있었는데 요즘은 거의 없다. 시민운동 진영이 의제 설정을 못한다고 보는 것 같다. 바닥부터 새 그림을 그려야 한다.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 이중대란 비판 속에 더 큰 걸 잃었다. 연대방식도 ‘환경 근본주의’가 중심에 있고 다른 단체들은 마지막에 힘이 필요할 때 ‘몸대주기’ 하는 데 그쳤다. 할 수 있는 것도 안 하거나 성명서나 내는 식에 대해서는 환경운동도 많이 반성해야 한다. 우리는 근본만 강조하고 강하면 된다고 생각하지만 아니다. 성직자는 사회 최후 보루, 버팀목 아니냐. 근본적 입장을 보이는 이분들이 운동과 사회 갈등의 전면에 나서고 운동과 결합하면서 과격해진 측면이 있다. 운동 본연의 모습을 잃어버린 것이다. 모두 죽음의 3보1배처럼 됐다. 환경운동과 종교는 구별돼야 한다.

〈전병역기자〉

 

[진보개혁의 위기]시민운동은 정계진출 위한 길목?

입력: 2006년 10월 29일 18:32:38

 
오창익 인권시민연대 사무국장
친·인척들이 가끔 내게 묻곤 한다. “언제야? 언제 돈 내면 돼? 왜 탄핵 때 안했어?” 국회의원 출마 여부를 묻는 말이다. 시민운동이 정계진출을 위한 투자쯤으로 인식된다. 김대중 정부 이후 많이들 정계에 불려갔지 않나. ‘자존심도, 비전도 확립 안돼 있는 것 같다. 우리는 활동가 4명이다. 우린 우리 할 만큼 일한다. 활동가가 16명인 어떤 단체를 보자. 정부 돈 받아 전국 단위로 별의 별 사업을 다 한다. 사람이 적으면 그만큼의 일만하면 되는 거고, 일정 부분 포기해야 한다. 교수들도 보면 참여연대 이름값에 직함 하나 걸치려고 몰려들고, 연구 프로젝트 따내는 데 그 직함을 써먹고 있다. 선출되지도 않았고, 누구의 통제도 받지 않고, 법적 근거도 없이 활동하는 시민운동 인사에게는 도덕성만이 무기다. 운동하는 사람은 부패세력과 차별화할 만한 도덕성이 있어야 한다. 현재 시민운동은 이슈 선점은커녕 이슈를 생산할 프로그램도 없다. 정부나 보수쪽 이슈에 대응만 하고 있다.

〈장관순기자〉

 

 

 

[진보개혁의 위기]환경단체-탈색된 초록운동

입력: 2006년 10월 29일 18:33:43

 

한국 정부의 환경정책은 세계경제포럼 2005 환경지속성 지수 평가에서 146개국 가운데 122위였을 만큼 문제투성이로 드러났다. 이는 정부 정책의 책임이지만, 환경운동의 실패이기도 하다. 한국의 환경운동은 ‘목소리만 크고 환경 개선은 보잘 것없는 운동’이 되었기 때문이다.

경부고속전철 천성산 터널의 경우 지난해 10개월여간 공사를 멈추게 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생산적 대안을 내놓지는 못했다. 부안 방폐장 문제는 2003년말 정부의 ‘부지 선정 원점 재검토’ 발표로 환경단체가 승리감에 취한 사이 경주로 선정되는 과정에 적극 대처하지 못했다.

새만금 사업은 중단 끝에 재개됨으로써 환경단체의 완패로 기록되었다. 제4공구 일부 물길을 터 간척을 허락하고 갯벌을 최대한 지키자는 대안이 나오기도 했으나 이런 목소리는 전투적 분위기에 눌렸다. 중재에 관여한 한 시민단체 관계자는 “새만금 사업은 계속하되 바닷물을 유통시켜 갯벌을 살리는 쪽에서 타협점을 찾자는 내용이었다”고 소개했다.

부안 핵폐기장 문제도 “2008년 수명이 다하는 고리 원전 1호기를 연장가동하는 대신 방폐장으로 활용하자”는 중재안이 나왔으나 환경단체의 완강한 반대에 무릎을 꿇었다. 한 시민단체 관계자는 “당시 정부 정책담당자도 그 제안을 충분히 고려할 수 있다는 입장이었고, 상당수 환경단체도 동의했다”고 전했다. 그러나 반핵이라는 ‘환경 근본주의’ 앞에 타협의 여지는 적었다. 그는 “애초 정부 계획에 방폐장은 경주에 들어서기로 잡혀 있었다”며 “고리 1호기를 이용했으면 경주 방폐장을 짓지 않을 수도 있었으나, 결국 막대한 비용을 들여 원래 경주로 돌아간 꼴이 됐다”고 개탄했다.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는 최근 한 강연에서 “새만금 갯벌을 한 평이라도 포기할 수 없지만, 결국 완전히 잃게 됐다”며 “반대를 위한 반대라는 비판에 정말 자신있게 ‘아니오’라고 답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대안 마련에 인색했고 솔직한 주민의견을 반영치 못한 데 대한 진영 내부 자성이 나온다. 녹색연합 최승국 사무처장은 “새만금에 대해 다른 주장을 하면 사이비 취급을 받았다”며 “환경운동도 똑같은 목소리를 내선 안되고 다양한 의견끼리 경쟁해야 했다”고 말했다.

박진섭 생태지평 부소장은 “새만금을 개발하면 전북도민이 잘 살 수 있다는 개발논리를 무시한 채 운동진영은 ‘환경보존론’만 고집했다”고 자성했다. 박부소장은 “새만금 사업의 절차상 문제를 따지는 것과 별개로 지역경제에 어떤 악영향을 주는지 구체적이고 효율적으로 설득했어야 한다”고 평가했다. 한 시민단체 관계자는 “처음에는 환경단체도 갯벌의 중요성에 대해 충분히 몰랐다”고 털어놓았다. 이후 정부 보상금을 받고 주민 대부분이 찬성으로 돌아선 뒤에야 주민 설득에 나섰으나 늦었다. 결국 “환경운동 때문에 국책사업이 표류해 막대한 손실금을 국민혈세로 메워야 한다”는 이른바 ‘개발동맹’의 주장 앞에 반대논리는 궁색해 보였다.

대법원 판결을 앞둔 지난 3월12일 환경운동연합 회원들의 결의문은 만시지탄에 가까웠다. “지금 공사를 멈추고 바닷물을 유통시키고 기존 방조제를 활용하면서, 새만금 어민들과 전북 발전을 도모하는 상생의 대안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현실을 반영하지 않고 경직된 배경에는 종교계 인사들의 ‘근본주의’가 자리잡고 있다고 활동가들은 진단했다. 죽음이냐 환경이냐의 양자택일 요구가 많은 시민들에게 부담을 안겨줌으로써 대중적 호소력을 상실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2000년 동강댐 백지화 이후 특히 새만금, 방폐장, 천성산 사태 등에 성직자 결합이 늘었다. 성향상 근본주의 입장이 강한 종교인들이 사회 갈등의 전면에 나서면서 운동이 경직됐다.

상지대 홍성태 교수(참여연대 정책위원장)는 “지속가능발전위는 생태위협을 막자고 만든 기구인데 정권의 개발논리에 이용돼 버렸다”고 비판했다. 최승국 처장은 “전체적인 국토계획이나 도시계획, 생태축 같은 큰 그림을 갖고 대응하지 못했다. 그때그때 이슈를 쫓아가는 식이었다”고 반성했다.

〈전병역기자 junby@kyunghyang.com

 

 

 

[진보개혁의 위기] 2-6. 대학, 신자유주의에 볼모잡힌 ‘知性의 요람’

입력: 2006년 11월 02일 18:10:56

 
“여러분 중에 ‘십장생’ 모르는 사람 없죠? 이제는 ‘10’대도 ‘장’래를 ‘생’각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청중들 사이에서 박수와 함께 웃음이 터졌다. 400명이 들어올 수 있는 대형 강의실이 꽉 차고도 모자라 계단에, 바닥에 앉은 채로 학생들은 강의에 귀 기울이고 있었다. 다들 진지한 표정으로 한마디 한마디 놓치지 않고 받아 적는다. ‘삼성이 원하는 인재상’이라는 제목의 특강이다. 강사는 삼성전자의 모 부장. 필기시험에서부터 면접 요령에 이르기까지 입사 시험 준비 방법을 상세하게 알려주는 1시간짜리 강의다.
지난해 “6·25는 통일전쟁”이라는 발언으로 논란을 일으킨 강정구 동국대 교수의 직위해제를 촉구하는 보수단체와 이를 반대하는 학생들이 동국대 본관 앞에서 충돌하는 모습. 2001년 강교수의 ‘만경대 방명록’ 파문 때만 해도 별 징계를 취하지 않았던 동국대는 재계가 “동국대 학생들 취업 불이익” 발언을 하자 즉시 강교수를 직위해제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실력이 없으면 누구나 해고될 수 있는 세상입니다. 저 역시 내일이라도 당장 거리에 나 앉을 수 있습니다. 한 가지 알아두어야 할 것은 ‘비정규직’이라는 게 꼭 나쁜 게 아니라는 겁니다. 삼성전자의 상무도 비정규직일 수 있어요. 그것이 기업의 효율에 이롭다면 어떤 것이든 받아들여야 합니다. 여러분도 어서 학생 티를 벗고 하루 빨리 이 규칙에 적응해야 험한 세상에서 잘 살 수 있습니다.”

강사의 말에 강의실에는 잠시 숙연함 비슷한 기운이 감돈다.

“너, 벌써부터 이런 데 관심을 갖다니 아주 바람직한 태도야. 앞에서 강의하는 저 XXX라는 부장은 해마다 취업 특강하러 우리 학교에 오는 분이란다. 저 분 얘기 하나하나 잘 들어두면 나중에 피가 되고 살이 돼.”

기자의 바로 옆자리에 앉은 한 남학생이 후배인 듯한 여학생에게 낮은 목소리로 상세하게 설명해준다.

큰 박수로 강의는 끝났다. 그러나 학생들은 강사에게 질문을 하느라 강의실을 떠날 줄 모른다. 졸업을 앞둔 이 이모씨(25)는 3년째 이 특강에 참석해 왔다.

“대기업 취업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과 같기 때문에 저 역시 3학년 때부터 이 곳에 왔어요. 여기 있는 학생들의 절반은 2~3학년생들일 겁니다. 사법고시나 행정고시 공부도 다들 1학년 때부터 하는데, ‘삼성고시’라고 미리미리 준비하지 않을 이유가 없쟎아요.”

새 학기가 시작된 지난 9월1일 고려대학교 서울캠퍼스 ‘민주광장’ 앞 한 강의실의 풍경이다.

비슷한 시간 이 강의실에서 불과 200~300m 떨어진 고려대 본관 앞에는 또 다른 장면이 펼쳐지고 있었다. 현관 바로 앞에 낡은 천막이 한 채 서 있다. 구멍 나고 헤진 천막 안에서 기타 연주 소리와 함께 고(故) 김광석의 ‘나의 노래’가 흘러 나온다. 어두컴컴한 천막 안으로 고려대 사상 초유의 ‘출교 조치’(영원히 학교로 돌아올 길이 없다는 점에서 퇴학보다 강한 징계조치)를 당한 7명의 학생들이 각자 일에 몰두해 있다. 이들은 이날로 135일째 이곳에서 먹고자며 농성 중이다.

이들 중에는 지난해 5월 4백억원을 이 학교에 기부한 삼성 이건희 회장의 명예철학박사 학위 수여식을 저지하기 위해 몸싸움을 벌인 학생도 있고, 지난 4월 고려보건대 학생 차별문제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던 학생도 있다.

“이건희 회장의 명예철학박사 학위 수여식 저지에 가담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가혹한 징계를 받았을까 궁금해요. 저희들 역시 취업 걱정이 안될 리 없죠. 집에서도 걱정이 많아요. 저희도 안락한 삶을 살고 싶고요. 사실 취업문이라는 게 아무리 좁아도 개인이 혼자서 많은 노력을 한다면 그 문을 뚫고 들어갈 길은 있어요. 그러나 문 자체가 넓어지는 것은 아니죠. 대다수는 그 문턱에 가보지도 못하고 절망합니다. 학교나 기업, 아니 사회 전체의 경쟁이 강화되고 불평등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온실 속에서 비교적 많은 혜택을 받고 자라온 저희들은 무언가 다른 얘기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이건희 회장 사건과 고려보건대 사건 모두에 가담했던 안형우씨(23·국어교육)의 말이다.

그는 “대학측에서 졸업을 위해 학생들에게 요구하는 ‘영어강의 이수’ ‘토익 점수 졸업제한’ ‘이중전공 의무화’ 등이 얼핏 대학생들의 인생에 보탬이 되는 것 같지만 실은 소모적인 경쟁을 조장하고, 진정한 ‘지성인’으로서 대학생이 되기 힘들게 만든다”고 말한다.

“사회적 제약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대학생들로서 항상 사회의 주류에 대한 거리와 긴장을 유지해야 한다”는 이 학생들을 지지하는 동료들이 없지 않지만 이들을 보는 고대인들의 시선은 대체로 싸늘하다.

천막 앞을 지나던 인문대 4학년 엄모씨(22·여)는 “출교 조치를 당한 사정이 안타깝기는 하지만 그런 문제 때문에 굳이 과격한 행동으로 학교측과 저렇게 대립해야 했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말했다. 이 대학의 한 교직원은 “이제는 소수로 전락한 운동권 학생들의 시대 착오적인 행태에 질렸다”며 “저런 학생들은 학교에 더 이상 발을 붙일 수 없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동국대 강정구 교수는 2001년 ‘만경대 방명록’ 파문으로 논란을 일으켰지만 당시 동국대측은 강교수에게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동국대라는 이름이 사람들에게 알려지기도 했고, 그런 ‘문제 교수’를 한 명 쯤 있는게 이미지 관리상 그리 나쁠 것도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런 강교수가 지난해 “6·25는 통일전쟁”이라는 내용의 칼럼을 써서 다시 구설수에 올랐다. 이번에는 사정이 달랐다. 김상렬 대한상공회의소 부회장이 “강교수 강의를 들은 사람이 시장경제를 올바로 이해하고 있을지 의문”이라며 “올바른 시장경제 이념이 뿌리내리게 하기 위해 기업들의 채용 때 대학 수업 내용 등을 참고하도록 대책을 마련하겠다”고 말한 것이다. 대기업들이 동국대 졸업생을 뽑지 않을 것을 시시한 것이다. 대학의 돈줄을 쥐고 있는 존재 정도로 여겨졌던 기업이 이른바 대학 강의의 내용에 개입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동국대는 즉각 강교수에 대한 해임 절차에 들어갔다. 동국대의 한 교수는 “강교수 직위해제는 모교 학생들을 기업들에 ‘볼모’로 잡힌 대학이 취할 수 있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고 해명했다.

1심 법원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강교수는 지난 8월 말 진보적 학풍으로 유명한 성공회대에서 ‘한국사회연구’라는 교양강의를 맡을 예정이었다. 수십명의 학생이 수강신청까지 했지만 강교수는 갑자기 강의를 포기해야 했다. 강교수의 강의 소식이 학내에 퍼지자 김성수 총장을 비롯한 대학당국이 난색을 표한 것이다.

요즘 한국외국어대학에서는 불과 10년 전만 해도 좀처럼 상상하기 어려웠던 일이 벌어지고 있다. 대학측의 비정규직 부당해고 등에 항의하는 교직원노조의 장기 파업에 총학생회가 ‘학습권 침해’를 이유로 노조를 공격한 것이다. 31일로 209일째 파업 중인 노조는 지난 9월 총학생회 소속 학생들이 사무실에 들어와 강제로 집기를 들어내는 바람에 건물 밖으로 밀려나 천막 생활을 하고 있다.

학내 여론은 좋지 않다. 졸업을 앞둔 이모씨(23·여)는 “도서 관리가 엉망이어서 학생들이 리포트 작성과 시험 공부에 애를 먹고 있다”고 말했다. 외대 도서관은 직원 26명이 일해왔으나 파업 후 상근직원이 2명으로 줄었다. 성이 김씨라고만 밝힌 한 학생은 “‘귀족노조’의 장기 파업 때문에 학생들의 정당한 학습권이 침해받고 있다”고 말했다.
삼성 이건희 회장의 명예철학 박사 수여를 저지해 출교 조치를 당한 고려대생 7명이 본관 앞에서 천막농성을 하고 있다. /손제민기자

애초 싸움은 대학당국과 직원노조 사이의 ‘줄다리기’였지만 2학기 개강 후에도 사태가 해결되지 않자 총학생회를 비롯한 많은 학생들이 노조측에 화살을 돌렸다. 이 과정에서 대학당국의 일방적인 처리를 비판하는 인쇄물을 돌린 영어과 4학년 조명훈씨(26)가 무기정학을 당했다. “인쇄물을 배포함으로써 노조 파업에 공조하고 학교의 명예를 실추시켰다”는 것이 이유다.

졸업을 위해 5학점을 남겨놓고 징계를 당한 조씨는 단지 인쇄물을 배포했다는 이유로 무기정학을 주는 것은 너무 하지 않느냐고 항변했다.

매일 아침 외대 정문 앞에서 1인시위를 벌이는 조씨는 “외면하고 지나가는 학생들의 모습에 힘이 빠지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요즘 학생들이 처한 조건에 대해 이해를 해야 한다”고 말한다.
지난해 고려대 개교 100주년을 삼성측이 4백18억원을 들여 고대 서울캠퍼스 내에 지어준 백주년기념 삼성관의 모습. 일부 고려대생들은 대학측이 감사의 표시로 삼성 이건희 회장에게 명예철학박사 학위를 수여하려 하자 강력히 반발한 바 있다. /정지윤기자

“학생들이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지 못하는 것은 사회 전체적인 분위기 때문이에요. 90년대 경제위기 이후 사회는 더욱 경쟁적으로 변하고 개인들은 원자화 됐어요. 대학은 수익을 창출해야 한다며 경쟁과 효율을 강조하고 있고요. 이제 대학은 지성의 전당이라기 보다 직업훈련소에 가까워요. 저의 바람은 대학생들이 그런 변화를 조금만 더 비판적이고 거시적으로 바라 봤으면 하는 거예요.”

그런 그도 현 총학생회에 대해서는 비판을 감추지 않았다. 그는 “등록금이 12% 포인트 올라 돈 때문에 교육받을 권리를 박탈 당한 학생들의 ‘학습권’을 거론조차 하지 않던 총학생회가 ‘등록금을 낸 다수의 학생들이 학교에서 방해 받지 않고 공부할 수 있는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학습권의 참뜻을 오해한 것”이라고 말했다.

파업에 참여 중인 외대 직원노조의 김은주씨(38·여)는 “정당한 서비스를 못받는 점에 대해 솔직히 학생들에게 미안하다”면서도 “그렇지만 학생들은 파업 역시 나름의 논리가 있음을 이해해 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과거 학생운동권은 물론 많은 대학생들의 잔치랄 수 있었던 총학생회 선거는 이제 모든 대학 구성원들의 ‘애물단지’가 된 지 오래다. 1990년대 후반부터 ‘비권(=비운동권)’ 총학생회가 등장하기 시작하더니 한동안 총학 선거에는 ‘운동권’ 대(對) ‘비권’의 대결 구도가 형성된 적이 있었다. 올해에는 급기야 황라열 전 서울대 총학생회장으로 대표되는 ‘반(反)권(=반운동권)’이 나타나는가 하면, 운동권과 비운동권의 대결 구도 자체가 무의미해진 상황이 돼버렸다.

무관심의 와중에 대학생 사회에도 ‘새 바람’이 불고 있기는 하다. 이른바 ‘뉴라이트 바람’의 대학 상륙이다. 서울대만 해도 올 가을 학생회 선거에 19개 단과대 중 7개 단과대에서 ‘뉴라이트’ 성향의 후보가 출마할 예정이다. 고려대에서도 지난 3월 총학 선거에 뉴라이트 기치를 내건 출마자가 있었다.

고려대의 학생운동 조직 ‘다함께 고대모임’측은 “이번 선거에도 이들과 뉴라이트 정치색을 표방한 후보가 출마할 가능성이 높다”며 “이들은 요즘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예상 이상으로 선전할 것”이라고 판세를 전망했다.

그런 점에서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이 서울대 총학생회가 한총련을 탈퇴한 것을 두고 요즘 대학생들을 비판한 일은 두고두고 회자된다. 그는 지난 5월 “한총련 탈퇴가 좋은 방향일지는 몰라도 대학생들이 너무 사회 의식이 없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대학생들이 취직, 공부, 연애하는 것 말고 나라 걱정도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한 바 있다. 정총장 본인이 학생운동을 한 적도 없고 그리 진보적인 성향을 보이지도 않는 주류경제학자라는 점에서 그의 말은 사회의식을 잃어가는 요즘 대학생에 대한 스승의 따끔한 충고로 남을 듯 하다.

진보의 위기 징후 가운데 공통적인 것은 ‘일할 사람’이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다. 기업에서 일할 준비가 돼 있는 사람은 넘쳐 나지만 진보 운동을 위해 일할 사람은 갈수록 줄어드는 곳이 한국 대학의 현주소다. 일차적 원인은 대학에 불어닥친 신자유주의에 있다.

한국 대학의 신자유주의화는 1990년대 말 김대중 정부가 ‘신지식인’ 개념을 유행시킨데서 시작해 “대학은 산업이다”라는 노무현 대통령의 지난해 1월 발언에서 그 모습을 완전하게 드러냈다. 신자유주의적 대학 정책은 대학을 경제적 가치 창출의 전진기지로 간주하고 교수들과 학생들에게는 이윤 창출을 위한 아이디어 생산자로 기능해줄 것을 요구한다.

‘산학협동’이라는 이름으로 기업은 이제 대학의 곳곳에 들어와 있다. 전경련 출신 손병두 총장 영입 후 재계와 협력을 강화하고 있는 서강대는 최근 삼성전자와 반도체 전문 기술인력 양성을 위한 ‘반도체 트랙’ 협약을 체결했다. 삼성전자는 서강대에 5억원의 운영기금과 30여명의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제공하고 대학은 삼성이 원하는 ‘맞춤형 인재’를 제공하는 식이다. 서강대 외에도 고려대, 성균관대, 경희대 등도 삼성과 비슷한 협약을 체결해 시행 중이다.

기업의 인력 교육을 대신해 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대학들은 기업의 경영방식까지 도입한다. 최근 서울대는 삼성경제연구소에 의뢰한 용역 결과에 따라 교수 승급 심사시 일정 비율의 탈락을 의무화하는 승급 심사제를 도입하기로 했다. 발전 기금 모금도 중요한 일이다. 각 대학마다 기금 모금 CEO를 별도 영입해 엄청난 기금을 끌어모으고 있는 미국 하버드대의 경우를 벤치마킹해 발전 기금 담당자를 별도로 두는 것은 이제 상식이다.

홍덕률 대구대 교수(사회학)는 “위기의 본질은 ‘지식의 생산·보급을 둘러싼 신자유주의적 환경’”이라며 “지금 우리 사회의 지식인들은 인문학적 통찰력과 사회학적 상상력을 거세당한 채 전환기의 혼돈과 불확실성에 무기력하게 대처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물론 레지 드브레의 ‘지식인의 종말’, 장 프랑수아 료타르의 ‘지식인의 종언’ 선언 등에서 보듯 전통적인 지식인의 퇴조는 우리만의 얘기는 아니다. 홍교수는 그러나 “우리의 경우 문제의 심각성은 지식계가 온통 신자유주의에 포위돼 있지만 대학과 교수사회가 자신의 역할을 찾지 못하는 데 있다”고 말했다. 조희연 성공회대 교수(사회학)는 “이제 대학도 조직으로서 합리성, 호율성, 수월성을 추구하면서 일반 직장과 큰 차이가 없어져가고 있다”고 말했다. 대학이 기업처럼 변하며 대학 교수 역시 연봉 4천만~5천만원씩 받는 일반 직장에 취직한 회사원 비슷하게 돼버린 것이다.

진보적 지식인이 대학에 충원되는 통로가 좁아진 것도 한 원인이다. 단적으로 경제학의 경우 미국 출신 박사가 아니면 명함을 내밀 수 없다. 그것은 경제학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최갑수 서울대 교수(서양사)는 “각 학문 분야에서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교수들이 맹위를 떨치고 있다”면서 “이들은 전문성 측면에서 깊어졌을지 모르겠지만 이들은 대부분 스스로 어느 한 분야의 기능적인 ‘전문가’임을 넘어 사회적 목소리를 내는 ‘지식인’, 더 나아가 시대적 요구를 가진 ‘시민’이라는 의식은 잘 하지 않는 것 같다”고 말했다.

최교수는 “박사 학위자 등 고학력자가 엄청나게 늘어난 것도 원인”이라고 말했다. 70~80년대만 해도 석사 학위만으로도 교수에 임용될 수 있었던 시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웬만한 박사는 교수 꿈도 못꾼다. 자연스럽게 미국 학위라는 명함과 양적 성과물이 중시되는 풍토가 생겨날 수 밖에 없다. 학문 연구자들은 돈 되는 학문에만 몰리고 그런 학문만 각광을 받다 보니 진보 성향 연구자들이 대학에 충원되기 어려운 구조라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학생들에게 비판적 교양을 길러줄 수 있는 교육이 이뤄지기는 어렵다. 손호철 서강대 교수(정치학)는 “교수의 강의와 연구가 수요 쪽에만 맞춰지다 보니 실용성이 강조되는 기능주의적 교육만 이뤄진다”고 말했다.

지난 수십년간 한국의 대학은 양적으로 엄청나게 팽창했다. 신자유주의적인 환경이 더욱 가혹한 것도 그 때문이다. 고교생의 대학 진학률이 80%를 넘어선 상황에서 등록금에 재정의 상당 부분을 의존하고 있는 대학들은 기업형 경영에 뛰어들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사립대는 물론, 국립대도 대기업 기부의 의존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 기업이 원하는 인재를 길러내는 것은 취업에 목말라 하는 학생들이 원해서이기도 하지만 재정 지원을 해주는 기업들이 ‘맞춤형 인재’를 원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홍덕률 교수는 “학생 정원을 채우지 못해 재정 위기가 초래되고 급기야 학교 문을 닫게 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지방 사립대들 사이에 높다”면서 “학생 등록금에 의존하는 재정구조, 국가의 미미한 대학 지원, 취약한 기부 문화가 모두 대학을 신자유주의적인 경쟁으로 내몰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 사회에서 대학은 이제 더 이상 ‘비판적 지성의 산실’이 아니다.

〈손제민기자 jeje17@kyunghyang.com

 

 

 

[진보개혁의 위기] 2-7. 좌담 : 진보는 왜 전진하지 못하고 있나

입력: 2006년 11월 05일 17:18:15

 
경향신문 창간 60돌 특별기획 ‘진보개혁의 위기-길 잃은 한국’ 2부를 마치며 진보진영이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는 좌담을 마련했다. 좌담에는 단병호 민주노동당 의원, 조희연 성공회대 교수, 김혜정 환경운동연합 사무총장이 참석했다. 좌담은 경향신문 이대근 정치·국제에디터의 사회로 지난 2일 경향신문사 회의실에서 열렸다.

◇ 지금은 ‘민주화 이후’ 새 길 모색의 진통기
조희연 성공회대 교수, 김혜정 환경운동연합사무총장, 단병호 민주노동당의원(왼쪽부터)이 좌담에 앞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 /김문석기자

사회=진보개혁세력이 위기에서 벗어나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얘기해보고자 한다. 우선 진보가 위기라는 데 동의하는지.

조희연=‘전환적 위기’라 본다. 어느 시기든 진보는 특정 문제에 대응하고 또 저항하는 형태로 운동해왔다. 독재 타도라는 시대적 과제 속에서 1987년 6월 민주화라는 거대한 흐름을 주도했던 민주진보 진영은 이제 전환국면에 있다. ‘포스트 민주화’ ‘지구화’ 시대의 진보로 전환하는 진통을 겪고 있다. 진보가 통째로 몰락하고 있다고는 보지 않는다. 새로운 진보로 나아가야 하는 과제가 남았을 뿐이다.

김혜정=삶 자체가 성장만 할 수 없듯 운동도 언제나 성장할 수는 없다. 시민운동이 새로운 의제를 설정하고 다양함을 요구받는 시기에 그것을 수용해내는 능력이 부족했던 것은 사실이다. 위기의 본질은 양적인 성장을 이룬 시민운동이 질적으로 성숙함을 요구받는 것이다. 환경운동의 실패라는 평가에는 완전히 동의하지 않는다. 환경운동이 없었다면 여기까지라도 왔을까 싶다. 새만금 논쟁을 통해 국민들이 갯벌의 중요성을 깨달은 것은 큰 진전이다.

단병호=현재 상황을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수십년간 운동을 해오며 느낀 직감으로는 진보운동이 위기적 상황으로 가고 있다는 건 분명하다. 진보운동을 추동해온 주체들의 계급 안에서 구심점이 사라지고 있다. 노동자·농민을 한 덩어리로 보고 우리 사회를 추동해 왔는데, 노동 내에서조차 분화가 일어나면서 민주 진보를 추동해온 세력들이 서로 고립되고 있다. 새로운 민주 진보를 추동해 나갈 수 있는 주체가 형성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조희연=민주화 이후 진보의 위기는 우리만의 현상이 아니다. 대만 천수이볜 정부, 태국 탁신 정부 등 80~90년대 제3의 민주화 물결을 이룬 아시아 국가들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우리의 경우 박정희가 개발을 성취했으나 그 개발이 가져온 새로운 모순의 위기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다. 재벌개혁이 진행됐음에도 결과적으로는 더욱 거칠고 험악한 모습의 계급사회가 출현해버렸다. 또한 민주개혁은 정치경제적 의제 중심이었다. 정치경제적 개혁조차 제대로 이루지 못했고, 생태적 진보, 생활세계적 진보로의 확장은 거의 손도 못댔다. 지금까지 성취한 민주개혁이 어떤 전환을 요구받고 있는지, 어떤 것은 여전히 성취하지 못했는지를 나눠서 봐야 한다.

사회=생활의 진보, 진보의 확장에 대해 더 말해달라.

김혜정=현재 개혁과 진보의 가장 큰 문제는 ‘녹색’이 빠져 있다는 점이다. 진보의 선봉에는 정치·경제를 포괄하는 단체가 주류인데, 참여정부의 개혁에는 환경, 평화, 문화 분야는 완전히 실종됐다. 개발독재 때보다 더하다. 20여년 환경운동을 해오며 느낀 것은 참여정부가 역대 정부 중 가장 반환경적이고 재벌편향적이라는 것이다.

단병호=일반 국민들은 개혁과 진보, 민주와 진보라는 것을 개념적으로 구분해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시민운동을 참여정부와 한 덩어리로 보고 그 정부를 출범시켜 줬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 안에서 ‘진보세력’은 아무것도 한 게 없다. 국보법이 그대로 살아있고 집시법은 오히려 더 강화됐다. 양극화는 심화됐고 고용불안정도 더 심해졌다.

조희연=참여정부에 돌 던져 버리고 끝나서는 안된다. 그 실패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것인가. 참여정부 내 준비 안된 주체와 그들의 개혁성에는 어떤 문제가 있었나. 이른바 개혁적인 386들 역시 삼성 보고서를 다 베껴 쓰는 실정이다. 정책수행 능력이 떨어졌던 것이다. 민노당도 이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국보법 실패는 참여정부가 안하려고 해서 안한 게 아니다. 국보법 해체를 우리 사회가 강제할 수 있는 진보적 역량이 사회 전체적으로도 부족하지 않았나 싶다. 민주화 이후 역설적으로 계급적 기득권 세력은 더욱 강고해졌다. 진보를 확장할 수 없는 거대한 사회적 한계가 있는 것이다. “강남 사람들은 계급의식이 투철한 데 비해 강북 사람들의 계급의식이 부족한 게 문제”라는 말이 있다. 조선일보를 친일신문, 반개혁신문으로 평가하지만 조선일보는 오히려 투철한 계급신문이라는 인식이 필요하다.

김혜정=참여정부 하에서 더욱 심해진 양극화의 주범은 건설 마피아의 득세다. 건설 마피아는 개발독재 때부터 지금까지 우리 사회를 지배해왔다. 필요하지도 않은 댐, 다리, 도로 등 대규모 공사로 모든 걸 해결하려 한다. 참여정부가 말로는 ‘친환경’ 했지만 정권을 장악한 것은 건설 마피아, 토건세력들이다. 이들에 대한 실질적 개혁 없이는 민주개혁은 물론 우리 시민들 삶의 질 성숙도, 희망도 없다. 양극화가 더 심해지고 국토는 파괴될 것이다. 양극화가 심해지면 국민들은 환경 문제 같은 삶의 질 문제에는 관심이 옅어지고 개발해서라도 잘 먹고 잘 살아야지 하는 생각을 하게 마련이다.

조희연=포스트 민주화 시대에 운동이 조급할 필요는 없다. 전두환·노태우 시대보다 노무현 정부가 더 반환경적이지는 않다. 개발독재국가에서 민주화운동, 민중운동이 쟁점화됐던 것은 독재의 성장국가 담론이다. 토건국가적 측면은 충분히 쟁점화될 기회가 없었다. 그때 쟁점화되지 못했던 것이 이제서야 터져 나오는 것이다.

단병호=참여정부, 개발 기득권층 얘기만 했는데 우리 스스로도 돌아볼 부분이 많다. 2년 전 국민들이 민노당에 13%의 지지를 보내며 10명이나 국회로 보내줬는데, 그 기대에 부응하는 역할을 했느냐 생각해 보면 사실 죄송한 마음밖에 없다. 국회 들어가 뼈저리게 느낀 것은 들어오기만 했을 뿐 우리가 준비된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는 것이다. 법이나 제도를 만들어 내는 역량이 부족했다. 광범위한 네트워크를 형성하든지 구조적인 뭔가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도 없었다. 계획도, 실행도 부족했다. 진보에 대해 국민들이 회의하고 실망한 점, 저희 민노당이 기여한 측면이 크다. 민노총 역시 한 단계 더 나아갈 수 있었는데 그러질 못했다. 노동운동이라는 게 조직원들이 일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의 이해와 요구가 중요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지난 15년간 민주노조를 해오며 그 안에서 버릴 것과 가져가야 할 것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하고 기존에 갖고 있던 형태의 운동만 고집했다. 민노총은 단협, 임금 등의 문제에 있어 자기 구성원 중심에서 한 걸음도 더 나아가지 못했다. 조직된 조합원의 임금 문제에만 신경쓰고 비조직된 8백50만 비정규직에는 소홀했다.

조희연=민주화가 진행되며 나타나는 제도화의 도전이라 본다. 민노당의 의회 진출은 진보가 제도정치적 공간으로 확장됐다는 말이다. 그 확장은 사실 탄핵이라는 보수쪽 실책에 힘입은 측면도 크다. 진보진영의 정책 역량은 많이 부족했던 게 사실이다. 제도화의 도전은 시민운동에도 적용된다. 시민운동의 의제가 주류에 포섭돼 버렸다. 특히 인권, 여성 같은 종합적 시민운동이 그렇다. 제도화가 진전된다는 것은 진보세력에게도 제도적 활용공간이 늘어난다는 얘기다. 그걸 활용하면서 보수의 일부까지도 진보가 획득하는 헤게모니의 정치를 해야 했다. 진보는 지금까지 ‘정체성의 정치’만 고민했지 ‘헤게모니 정치’에는 미흡했다. 보수를 비개혁적이라고 비판만 했을 뿐 그들을 진보 헤게모니로 끌어오는 것에 미숙했다.

사회=경향신문 진보시리즈가 나온 뒤 김창호 국정홍보처장은 “진보의 실패는 진보 안에서 찾아야지 왜 엉뚱하게 노정부(盧政府)에서 찾느냐. 진보 스스로 반성하라”는 글을 올렸다. 진보의 위기에서 노정부 책임이 더 많은가, 진보 내부 책임이 더 많은가, 아니면 신자유주의라는 외부 요인이 더 큰가.

단병호=문제가 있으면 자기 내부에서 찾아야 한다는 그 말인즉슨 맞다. 옛날만큼 진보운동이 치열했느냐, 나 자신부터 자신있게 대답하기 부끄러운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참여정부가 애초 “우리는 신자유주의자이고 보수주의자다”라고 표방했다면 이렇게 문제가 커졌을까. 참여정부는 끊임없이 자신이 민주세력이고 약간의 진보세력인 것처럼 포장하면서도 내용적으로는 신자유주의 정책을 펴왔다.

김혜정=‘좌회전 깜박이 켜고 우회전하는’ 참여정부 정책이 온국민을 혼돈에 빠트렸다. 일반 시민들은 인식하지 못했겠지만 노정부가 진보의 위기를 초래한 문제가 어마어마하다. 하지만 시민운동이 변화된 사회에 걸맞은 의제를 설정하는 능력이 부족했던 점 역시 사실이다. 이슈 중심의 운동에서 보다 정책 역량이 배가된 형태의 운동은 부족했다. 과거 환경운동은 친환경적인 언론 보도에 힘입은 측면이 크다. 이제는 언론 보도 없이도 우리 자체적인 회원이라든가 시민 참여, 축적된 정책 역량 등 자생적 힘으로 뚫고 나갈 수 있어야 한다.

◇약자가 중심된 ‘풀뿌리운동’으로 거듭나야

사회=여러 진보세력의 문제점을 보면 전망 및 대안 부재, 투쟁을 위한 투쟁, 기득권화, 정파갈등 등 몇가지 공통점이 발견된다.

조희연=가장 중요한 것은 전망과 대안의 부재다. 민주정부와 진보세력은 박정희와 다른 방식으로 서민들과 국민들을 먹고 살게 하는 방법을 제시하지 못했다. 참여정부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통해 박정희 모델을 전유하는 식으로 출구를 찾으려 했다. 사람들은 민주정부 하에서 훨씬 계급적으로 양극화돼 있고 살기 힘들어졌다고 말한다. 신자유주의 현실에도 불구하고 박정희와는 다른 방식의 작동 가능한 경제모델을 제시하고 추진력 있게 그걸 실행해야 하는데, 대안적 모델도 문제고 그걸 실행하는 정책 능력도 없었다.

김혜정=북한 핵실험에 대해 민노당이 입장을 제때 못낸 것은 아주 심각한 문제다. 한반도 평화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공당이 내부 입장을 정리하지 못하고 질질 끌다가 나중에야 슬며시 낸 것이다. 핵무장을 인정하는 진보란 있을 수 없다.

조희연=정파 구도의 고정화는 진보의 혁신이라는 차원에서 성찰해야 한다. 모든 경계가 고정되고 관성화될 때 문제가 생긴다. 정파는 민주화 초기 형성된 것으로 정파가 도전하고자 했던 미국의 패권, 계급적 억압이 여전하긴 하지만 포스트 민주화 및 지구화 시대를 맞아 그 작동방식은 변하고 있다. 정파가 배제의 범주로만 작동할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을 포섭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단병호=분단이라는 한국적 특수성 때문에 진보정당 내에는 진보적 가치와 민족적 가치가 공존해온 측면이 있다. 진보정당의 기본으로 돌아갔을 때 북한 핵문제 대응 부분은 반성해야 하는 것이 맞다. 정파 문제는 좀 다르다. 정치운동에서 정파는 없어질 수 없다. 획일이 어쩌면 더 무서운 것이다. 정파구도가 어떻게 긍정적으로 작동할 수 있게 하느냐가 문제다. 이제는 정파라는 틀이 모든 것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 다른 정책을 내놓고 활발하게 토론하고 동의와 지지를 묻고 실행을 통해 평가를 받는 식으로 가야 한다.

김혜정=민족주의는 시민운동의 큰 걸림돌이다. 민족주의가 극한으로 가면 전쟁, 파쇼적 지배로 나아가게 마련이다. 노동운동의 결과 시민운동의 공간이 마련됐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지만 이제 노동운동이 선봉에 서는 전선식 운동은 지양해야 한다.

조희연=우리 사회에 아직 계급적, 친미적 권력이 강고하게 존재하는 상황에서 노동운동의 바리케이드가 시민운동을 확장시켜 주는 측면이 있다. 노동운동은 현재의 계급적 역관계를 돌파하는 역할을 하고 시민운동은 공공성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공동행동을 폭넓게 형성하는 방식으로 가야 한다. 민중운동의 계급적 실현과 시민운동의 공공성이 만나는 접점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단병호=노동운동과 시민운동의 갈등은 조금만 토론했으면 커지지 않았을 문제다.

조희연=운동의 일상적 분화는 불가피하고 노동운동과 시민운동의 긴장·갈등은 오히려 있는 게 더 좋을 수 있다. 시민사회 일각의 보수화 현상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도 문제다. 진보 위기 이후 보수의 능동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사회=사회경제적 조건이 많이 변했는데 여전히 ‘투쟁을 위한 투쟁’을 고집한다는 비판도 있다. 가령 정부를 활용하는 방법도 있을 텐데.

김혜정=과정은 다 무시하고 결과적으로 운동이 투쟁을 위한 투쟁만 했기 때문에 실패했다고 평가하는 건 문제다. 가령 방폐장과 새만금 문제에서 환경운동 진영이 일반 대중의 지지를 얻고 운동적 성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이슈를 제기하고 사회의제로 만들어야 하는 부분이 있었다. 하지만 언론은 기본적으로 대립 구도를 선호한다. ‘보존이냐 개발이냐’는 제목이 일단 나와야 기사화한다. 투쟁으로 반대 입장을 이슈화하지 않을 수 없는 구조다. 우리 역시 법률구제 활동이나 연구조사 등 다양한 방식으로 환경운동을 해오고 있으며 갯벌을 살릴 수 있는 조정안을 냈지만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다.

단병호=언론도 그렇고, 고향이나 지역에서 사람들 만나봐도 투쟁, 집회에 대해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더라. “시대와 상황이 바뀌었는데 투쟁 방식만 고집한다” “자기 이해관계만 집착한다”고들 하는데 이거야말로 정부의 통치 이데올로기다. 물론 통치 이데올로기가 국민들에게 먹혀들어가는 것은 투쟁 주체가 과제 설정을 잘못했기 때문인 측면도 있다. 그렇지만 다른 방법으로 집권여당, 참여정부를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느냐. 국회 들어가 보니 그건 불가능하더라. 사회적 조건이 구비돼 있지 못해 국보법 문제를 해결 못했을까. 아니다. 힘을 가진 사람들의 실행 의지 문제였다. 정부여당은 민노당을 비정규직법 제정을 막는 당으로 몰고 있다. 현재 정부 방안으로는 비정규직 문제를 결코 해결할 수 없다. 은행 창구에 함께 근무하는 정규직과 비정규직 차별을 없애겠다며 정규직을 모두 비정규직으로 대체해버리는 식이기 때문이다. 이 사람들을 어떻게 활용하겠나.

조희연=민주화 이후 민중·시민운동 단체가 순수한 약자 집단은 아니다. 이제는 정치적 고려를 좀 해야 한다. 지하철 노조나 전교조 파업이 그렇다. 전교조가 현장에서 약자 집단이라고 인식되진 않는다. 독재 하에서는 일직선적인 전투성이 계몽 효과를 가져왔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그렇다고 전투성을 포기할 수는 없다. 정치력과 전투성을 병행해야 한다. 계급적 우위자들, 즉 자본이 계급적 약자를 낭떠러지로 내모는 비타협성이 있기 때문에 벼랑끝 전술이 나올 수밖에 없다. 우리 사회에는 이렇게 자본과 기득권 세력의 비타협성 때문에 불필요한 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

김혜정=방사성폐기물 처리장 건에서 보듯 우리 사회는 핵 마피아 집단이 갖고 있는 기득권이 강고하다. 부안 주민들이 처음부터 투쟁했겠나. 평화시위로는 안먹혔기 때문이다. 방폐장이 경주로 선정된 것을 두고 참여정부는 지역주민들의 지지 하에 성취한 민주주의의 성공 사례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것은 민주주의를 악용해 가장 나쁜 방식으로 문제가 해결된 경우다. 매표와 금권선거, 관권 개입에 지역주의까지 붙었다. 우리 사회가 피 흘리며 이뤄온 민주주의가 다 실종됐다. 국가는 자신의 국토 관리 권한을 자본에 넘겨버렸다.

단병호=투쟁이라고 하면 노동, 그 중에도 민노총으로 상징화돼 있다. 정책이든 정치적 의제든 반대만 한다는 이미지로 굳어져 있다. 하지만 시민·사회단체도 민노총의 투쟁을 엄호해줘야 한다. 순망치한이라고 하지 않나. 민노총 투쟁이 무력화되면 본격적인 화살은 바로 시민사회로 향한다. 물론 투쟁에 대한 비판도 수용해야 할 측면이 있다. 민노총 조합원들은 전체 노동자들 중 기득권층으로 비쳐지는 점을 부정할 수 없다. 이 사람들의 투쟁이 국민들에게는 물론 노동자 계급 내에서도 부정적으로 비치는 것이다. “우리는 죽도록 일해서 월 1백만원 받는데 저 사람들은…”이라고 푸념하는 비정규직의 현실을 냉철하게 돌이켜봐야 한다.

조희연=전투적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중요치 않다. 대중이 전투적인 분노를 느끼는 의제를 발굴하고 그것에 대해 투쟁해 대중이 환호하면 문제가 없다.

사회=진보가 위기에서 탈출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조희연=신자유주의 지구화 시대의 대안적인 사회적 국가모델을 만들어야 한다. 서구의 국가 사회주의 모델은 자체 문제로 실패했고 사회민주주의 모델은 신자유주의 공세 속에 무력화됐다. 새로운 사회적 국가모델을 구체화하기 위해 일국적·지구적·계급적 사회모델의 형성을 고민해야 한다. 포스트 민주화 시대 진보의 재구성이라는 과제도 고민해야 한다. 정치경제적 진보보다 더 급진적인 새로운 차원으로 심화하는 지점을 찾아야 한다. 강고한 계급적 장벽을 뚫고 다양한 진보의 차원을 생태적 진보와 풀뿌리 진보로 확장하고 내부화해야 한다. 새로운 조건 속에서 고통받는 약자 집단과 저항적 주체들, 가령 비정규직과 외국인 노동자가 한국 진보운동의 중심으로 더 나와야 한다.

단병호=더 큰 소유를 위해서는 가진 걸 버릴 수 있는 용기도 필요하다. 어쩌면 문제가 있는 부분은 1백만 조직 노동자들의 일부에 있을 뿐인데, 전체 노동자의 문제로 비쳐지고 있다. 지금 상태로라면 조직 노동자들이 고립돼 살아남기 힘들다. 기존 조직원의 임금, 단협에 매몰되지 않아야 운동의 새로운 주체 형성도 가능하리라 본다.

김혜정=시민운동, 진보세력이 성장하는 게 우리의 희망이기에 이런 논의를 하는 것 아닌가. 한국 사회에서 진보는 전인미답의 길이다. 그동안 부족했던 정책 역량을 강화하고 전문성을 강화하고, 시민들의 많은 참여를 위한 풀뿌리 운동의 확대, 무엇보다 미래를 열어가는 의제 설정의 역량 강화가 중요하다.

단병호=이렇게 볼 수도 있다. 내재적 불만은 커져 가고, 자괴감과 상실감이 도처에서 심해진다는 점에서 오히려 역동성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진보가 재결집할 수 있는 내재적 동력은 커가고 있는 게 아닌가.

<손제민기자>
<특별취재팀=이기수 오창민 김광호 박영환 김종목 전병역 최민영 이주영 손제민 장관순기자>

 

 

 

[진보개혁의 위기] 한국사회에 부는 보수바람

입력: 2006년 11월 07일 17:29:42

 
“김대중 대통령을 뽑을 때엔 군대에 있었고, 노무현 대통령을 뽑을 때는 회사에 막 입사한 시점이었죠. 정권이 바뀌면 그동안 보수세력이 독점해온 기득권이 해체되고 세상이 뭔가 달라질 거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김대중 정권에선 호남세력이 기득권층이 돼버렸고 노무현 정권 역시 전혀 기대한 것과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지난해 11월7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뉴라이트 전국연합’ 창립대회가 열렸다. 뉴라이트는 개혁성, 도덕성, 국가정체성을 주장하며 기존 보수와 구별되는 신(新) 보수주의를 지향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회사원 구정환씨(32)는 지난 대선 때 노무현 대통령을 지지했다. 사회 초년병이던 구씨에겐 노무현 후보가 정권을 잡으면 뿌리 깊이 박힌 나쁜 관행들이 진정으로 개혁될 것으로 믿었다. 정치에 별 관심이 없던 그가 ‘노사모’에 가입하고 후원금까지 냈다. 하지만 구씨는 “요즘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다”고 말한다.

“처음엔 열린우리당과 참여정부가 여러 개혁정책을 시도하면서 세금 내는 게 아깝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지금 보니 현 집권층도 개혁을 명목으로 자기 몫 챙기기에 바빴더군요. 공공부문을 개혁한다면서 한편으론 수많은 자리 만들어 측근들을 챙겨준 것 아닙니까. 변화와 개혁은 장기적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 해야 하는 것이지만 현 정권은 눈에 보이는 개혁조차도 한 게 없는 것 같아요. 진보세력이 완전히 무너지면서 이제는 한나라당을 다시 한 번 믿어보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노무현정부 출범 초기인 3~4년 전만해도 인터넷 공간은 진보의 세상이었다. 오마이뉴스, 프레시안 등 진보개혁적 매체가 네티즌들간 의사소통과 여론 형성을 주도했다. 특히 현 정부 출범 후 오마이뉴스의 영향력은 대단했다. 노대통령이 취임 직전 인터뷰를 자청했고, 여권의 내로라하는 인사들이 오마이뉴스 기자를 앞다퉈 만났다. 그러나 2004년 초를 기점으로 보수성향의 인터넷 매체들이 우후죽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신(新) 보수를 표방한 뉴라이트운동이 태동한 시점과 거의 일치한다. 독립신문, 미래한국신문 등 몇개에 불과했던 보수진영의 인터넷 사이트는 2004년 4월 창간한 ‘데일리안’을 비롯해 뉴라이트 운동 계열의 ‘뉴데일리’, 이원창 전 한나라당 의원이 만든 ‘프런티어 타임스’, 폴리뉴스, 브레이크뉴스, 데일리NK, 프리존, 코나스 등이 잇따라 등장하면서 급속히 불어났다.

보수 사이트는 진보매체의 성공 사례를 따라 배우며 성장했다. 이들은 보수논객들의 글을 서로 공유하고 ‘댓글’ 등을 통해 활발히 의견 교환을 했다. 인터넷이 진보개혁 세력의 도구라는 인식은 이제 과거의 것이 되었다. 최근 인터넷 공간에서 보수네티즌들은 북한 핵실험 이후 대북정책, 전시작전통제권 환수 문제 등을 놓고 진보성향의 네티즌들과 한치 양보 없는 논쟁을 벌인다.

시장점유율에선 아직 비중이 크지 않다. ‘랭키닷컴’에 따르면 인터넷 신문 중 데일리안 점유율은 4% 미만으로, 오마이뉴스(29.3%)나 프레시안(9.9%)에 비해 미미한 수준이다. 그러나 10위권 내에 데일리안, 브레이크뉴스, 독립신문, 데일리NK 등 우파성향 매체가 4개나 진입해 있고, 일부 매체는 1일 방문자 수가 10만명에 이르는 등 상승세다. 진보진영 매체들의 목소리가 줄어든 것과는 대조적인 흐름이다.

‘데일리안’ 김영 기획실장은 “보수적인 사람들은 공개적으로 얘기하거나 글을 써서 참여하기를 꺼려 하는 편인데, 참여정부가 들어선 후 내재돼 있던 욕구 불만들이 분출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는 “뉴라이트 운동이 시작된 2004년 초 이후 보수쪽 시민사회단체가 등장하면서 보수성향 매체들의 취재원이 다양하게 확보된 것도 한 요인”이라고 설명했다.

2002년 대선 국면의 온라인 세상을 ‘노사모’가 지배했다면, 2006년의 온라인 세상은 ‘박사모’(박근혜를 사랑하는 모임)가 장악하고 있다. 회원 수 4만3천명에 이르는 ‘박사모’는 온라인 활동은 20~30대가, 오프라인은 40대가 주축이다. 이들은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가는 곳이면 어디든 나타난다. 지난 5월 박전대표의 피습 사건이 발생한 뒤로는 여성 회원 20~30여명이 박전대표 주변에 밀착해 자발적인 경호활동까지 하고 있다. 지난해엔 일부 회원들이 ‘사이버 전사대’라는 이름의 조직을 만들어 각종 인터넷 사이트에서 박전대표에 대해 우호적인 이미지 만들기에 나서기도 했다. 박사모 대표인 정광용씨(48)는 “좌(左)편향적인 네티즌, ‘노사모’ 등이 온라인을 점령하다시피 하자 그에 대한 반발로 보수성향의 네티즌들이 대응, 균형 맞추기에 나선 것”이라고 말했다.

2004년 초반은 보수가 부상하는 분기점이다.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국회에서 통과되고, 한달 뒤 치러진 17대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은 탄핵 역풍에 힘입어 의석의 과반 수를 확보하고 민주노동당이 의회에 진출하는 등 정치권내 진보개혁과 보수의 지형이 획기적으로 바뀌던 시기였다. 보수진영에서 위기감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한나라당 지도부는 천막당사를 짓고 자신들의 오만과 독선에 대해 사죄하고 다녔다. 이렇게 보수가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을 때 보수의 작은 희망이 떠올랐다. 정치권 밖에서 구(舊) 우파와 차별화한 신(新) 보수, 즉 뉴라이트 운동이 태동했다.

뉴라이트는 노동운동가 출신인 신지호 대표가 ‘자유주의 연대’를 만들면서 시작됐다. “산업화와 민주화 세력을 거쳐 이젠 선진화세력이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는 신대표의 주장은 초기만해도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기존 보수진영의 냉전수구적 시각과 차별화하고 있음이 알려지고, 마침 노무현정부의 실패가 분명해지면서 조명을 받기 시작했다. 그해 11월 자유주의 연대가 정식 출범하자 보수진영은 ‘이런 보수를 기다렸다’며 뜨겁게 환영했고, 이후 보수진영의 새로운 흐름을 이끌어갔다. 그로부터 1년 후인 지난해 11월. 김진홍 목사는 ‘뉴라이트 전국연합’의 결성을 주도, 보수진영의 결집에 불을 댕겼다. 차기 대선을 2년 정도 앞둔 때이자 보수진영 대권 후보들의 지지율이 급등하기 시작한 시점이다.

이 단체는 아예 “정권 교체를 위한 보수 대연합”을 기치로 내걸었다. 이들은 보수진영의 저변 조직을 구축하는데 전력을 기울이고 있다. 지난 9월말 뉴라이트 학부모연합과 신노동연합이 출범한 데 이어 이달 들어 뉴라이트의사연합, 불교뉴라이트가 결성됐다. 여성 뉴라이트, 대학생 뉴라이트, 뉴라이트 경제인연합 등도 곧 출범한다. 서울, 대구, 광주·전남 연합 등 지역별 세(勢) 불리기도 진행중이다. 뉴라이트 전국연합 회원 수를 모두 합치면 6만명에 육박한다.

김목사는 드디어 7일 창립 1주년 기자회견을 갖고 1년 만에 이룬 보수의 성장에 감격했다. 자유주의연대의 경우 가입비 10만원에 매달 3만원씩의 적지 않은 회비 부담에도 불구하고 회원 수가 200명이 넘는다. 뉴라이트 학부모연합에 참여한 하진숙씨(여·46)는 “수시로 바뀌는 입시제도, 평준화 제도와 같은 통제 위주의 교육정책 하에서 자녀를 교육시킨다는 게 내키지 않는다”면서 “해외 유학까지 생각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자 더 이상 구경만 할 수 없다는 생각에 동참하게 됐다”고 말했다. 하씨는 학교에서 편향적 시각의 교과서가 사용되지 않도록 하고, 연가투쟁을 일삼는 교사의 퇴출 및 교원평가제 도입 운동에도 적극 가담할 계획이다. 학부모연합에는 전국 16개 지부에서 1만5천여명의 학부모들이 회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뉴라이트 운동은 개인의 자유와 인권, 창의성을 최대한 존중하는 것을 첫번째 가치로 삼는다. 정부의 개입과 간섭을 줄이고 민간의 자율적 선택 폭을 늘려주자는 것이다. 기존 보수의 반공주의적 성향은 배척한다. 신(新) 보수는 87년 민주화의 아들이라는 점에서 구 보수와 다르다. 그들 가운데 민주화운동에 가담했거나 386 운동권 출신 인사가 많다는 사실이 그런 특징을 잘 말해준다.

김목사는 70년대 빈민운동, 유신반대 운동에 앞장섰던 인물이다. 한때 사회주의에 경도됐지만 지금은 보수주의자를 자처한다는 그는 자신의 변화를 “변질이 아니라 성숙”이라고 말한다.


“선진국이 되려면 사회주의나 평준화로는 안되고 도덕성과 공동체주의가 뒷받침된 자유민주주의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그는 믿고 있다.

신지호 대표 역시 90년대 초반까지 울산지역의 노동 운동가로 활동했다. 보수 시민단체인 선진화국민회의 사무총장을 맡고 있는 서경석 목사는 민청학련 사건·YH사건 등에 연루돼 투옥된 적이 있다. 뉴라이트재단 이사장인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는 한때 좌파운동권의 이론적 기반을 제공했다. 자유주의연대 조직위원장인 최홍재씨는 90년대 고려대 총학생회장과 한총련 간부를 지냈다.

지난 2월 출간된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은 보수의 확장이 지식사회에도 급속히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1980년대 진보와 개혁의 의식화를 위한 교과서였고, 386세대들의 현대사 인식에 큰 영향을 미쳤던 ‘해방 전후사의 인식’에 맞서 현대사를 재조명하겠다며 김일영 성균관대 교수, 이영훈 서울대 교수 등 뉴라이트 계열 학자들이 주도해 만든 책이다. 이 책은 출간되자마자 보수언론들이 “좌파 수정주의 사관(史觀)에 대한 반박”이라며 극찬을 했고, 뉴라이트 단체들이 저자와의 만남 자리를 잇따라 개최하면서 큰 홍보 효과를 거뒀다. 지난 3월 인터넷서점 ‘YES24’가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 구매자를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이 책이 시대에 맞는 새로운 역사적 평가와 비판이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응답자의 69%가 ‘그렇다’고 답했다. 이 책을 출간한 ‘책세상’ 관계자는 “10월말 현재까지 총 1만8천여권이 판매됐다”며 “언론이 많이 다루고 학계의 이슈가 되면서 보통 인문서들에 비해 3~4배 팔렸다”고 말했다.

그동안 민주정부 등장이래 ‘침묵하는 다수’를 자처했고, 독재체제의 유산을 물려받은 구 보수의 한계 때문에 자신을 드러내는데에 머뭇거리던 보수들이 이제 발언하기 시작했다. 아니 ‘행동하는 보수’로 나서고 있다. 보수의 ‘커밍 아웃’과 보수의 부상이다. 온·오프를 막론해 보수주의자이 속속 집결하고, 그동안 조심스러워하던 보수성향의 학자들도 이젠 경쟁적으로 “나는 보수”라고 외친다. 무엇이 이들의 커밍 아웃을 이끌어냈나. 운동권출신의 열린우리당 민병두 의원은 “보수언론과 진보언론,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 등 기존 대립하던 세력끼리의 양분화가 심해지고 있지만 일반인들 의식속에선 오히려 그러한 경계가 엷어지면서 보수도 자신의 성향을 쉽게 드러낼 수 있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이는 진보개혁 세력의 위기와, 그로 인한 중간층의 급속한 팽창과 맥을 같이 한다. 노무현정부의 국정 운영 미숙과 개혁 실패에 대한 실망감이 커지면서 시민들이 중간지대로 이동하면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보수의 부상은 보수 내부의 혁신으로 더욱 주목을 받는다. 대안없는 반대, 반공주의, 수구적 집단으로 각인된 기존 보수의 이미지를 벗어버리고 개혁성과 도덕성, 합리성을 갖춘 새로운 보수상(象)을 정립하자는 목소리가 분출하고 있다. ‘상실의 10년’을 지내온 보수주의자들이 깨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박세일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그동안 우리나라의 보수진영은 정책적 능력은 좀 있지만 철학적 자기 성찰이 부족했고, 현실에 안주해 잠자고 있었다”며 “그러나 진보진영의 도전을 받고 정권이 2차례 넘어가면서 보수의 ‘자각’이 시작됐다”고 진단했다. 그는 “앞으로 보수진영의 결집과 응집은 계속 진행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신지호 대표는 “신(新)보수 운동은 노무현 정권의 실정에 대한 반대로도 나왔지만 보수정당을 자임하면서도 대안은 내놓지 못한 채 ‘방어’와 ‘수비’에 전념하는 기존 보수세력, 한나라당이 없었다면 성립이 안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마디로 신 보수는 구보수의 위기, 노무현정부의 무능이란 토양에서 새 싹을 튀운 것이다.

‘박사모’에서 보듯 보수화 흐름이 20~30대 젊은층에서 두드러진다.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에 따르면 20대의 열린우리당 지지율은 2004년 평균 38.9%에서 2005년 평균 30.5%로 떨어졌다. 올 10월24일 조사에선 21.4%까지 내려갔다. 30대의 열린우리당 지지율 역시 같은 시점 35.1%에서 25.5%→16.2%로 급감했다. 반면 20대에서 한나라당을 지지하는 비율은 2004년 19.3%에서 2005년 23.2%, 현재 23.6%, 30대에선 20.0%→22.7%→25.5%로 상승중이다. 40대 이상 중장년층에 이어 20~30대에서도 한나라당 지지율이 열린우리당보다 높게 나타나면서 ‘젊은층=진보, 기성 세대=보수’라는 통념이 깨지고 있는 것이다.
‘박근혜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회원들이 유세 도중 피습당한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입원중인 서울 신촌 세브란스 병원 앞에서 지난 5월 21일 쾌유를 기원하는 촛불집회를 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대학생 박찬근씨(24·고려대 체육교육학과 3학년)은 한나라당 대학생 디지털정당위원회인 ‘블루엔진’ 운영위원장으로 활동중이다. 지난해 한나라당 소장파 의원들이 마련한 대학생 아카데미에 우연히 참여한 게 계기였다.

박씨는 “원희룡, 박형준의원 등 젊은 의원들과 얘기를 나눠보니 부패, 기득권 등 안 좋은 이미지만 갖고 있던 한나라당에 대해 다시 보게 되더라”고 말했다. ‘블루엔진’에는 14명의 대학생이 운영위원으로 참여중이고, 온라인 활동 멤버들을 합치면 1,500명이 넘는다고 한다. 이들은 대학생의 정치 참여를 높이는 캠페인 활동을 넘어서 내년 대선을 앞두고 20대 중심의 공약 아이디어 개발에도 나설 계획이다.

대학생 박세완씨(28)는 2002년 ‘보수주의 학생연대’를 만들었다. 당시 제대 후 학교로 돌아온 박씨에게 눈에 띈 건 학내 이슈인 양심적 병역거부 문제였다. “당시 양심적 병역거부 문제에 대해 대다수 학생들이 학생회와 다른 생각을 갖고 있었지만 학생회는 자신들의 이념만을 내세우며 대다수의 목소리를 반영하지 못했죠. 내용도 모른 채 운동권 선배의 요구로 서명해 준 02학번 새내기들의 이름이 양심적 병역거부 지지자 명단에 있는 것을 보면서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보수와 진보의 대화의 장을 만들겠다’며 시작된 보수주의 학생연대에는 현재 4,000명 이상의 대학생이 카페 회원으로 가입돼 있다. 박씨는 “대학생은 마땅히 진보적이어야 한다는 교조적인 틀은 깨어져야 한다”며 “더 이상 보수를 기득권을 지키려는 생각없는 풋내기들로 봐선 안된다”고 말했다.

대학신문의 지난 9월 설문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대학생들은 가장 시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로 29.1%가 ‘경제 성장’을 꼽았다. 빈부격차 해소(16.1%)나 부정부패 척결(12.2%) 등 진보적 성격의 이슈들은 상대적으로 뒤로 밀렸다. 또 희망 직장으로는 안정성과 급여가 보장된 국공영기업이 압도적인 지지율(45.4%)로 1위를 차지했다. 지난달 치러진 서울시 7급이하 공무원 임용 필기시험 경쟁률이 162대 1에 달하고 수험생들의 대규모 이동으로 KTX가 임시열차를 증편했던 장면도 이런 흐름을 반영한다.

임용고시를 준비중인 대학생 강영미씨(24·이화여대 4학년)는 “교사가 되겠다는 게 교육에 뜻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선생님=철밥통’이라는 생각 때문인 친구들이 대부분”이라며 “20대가 먹고사는 문제에 급하다보니 자기중심적이 되고 사회 문제에도 점점 관심이 멀어지게 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처럼 보수화 현상은 부문과 세대를 막론해 광범위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보수가 압도하는 상황에 이르지는 않았다. 한국사회여론연구소의 지난 1일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스스로의 정치적 이념 성향에 대해 ‘진보’(50.5%)라는 답이 ‘보수’(43.6%)라는 답변보다 많다. 차기 대통령의 바람직한 이념성향을 묻는 질문에도 ‘진보’(63.8%)가 ‘보수’(29.1%)보다 높다. 한국사회여론연구소의 한귀영 연구실장은 “보수바람이 진보개혁 세력에 대한 불신으로 나타난 반작용적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사회 전반이 보수화되고 있다고 단정하긴 어렵다”고 강조했다. 보수들의 자각과 커밍 아웃, 20~30대의 보수화가 보수의 성장을 실제 키 보다 커 보이게 만들고 있다.

〈이주영기자 young78@kyunghyang.com

 

 

 

[진보개혁의 위기] “수구 한나라당 이미지 바꿔야 정권교체 성공”

입력: 2006년 11월 07일 17:30:30

 
김진홍 뉴라이트전국연합 상임의장은 7일 창립 1주년을 맞아 서울 당주동 이 단체 회의실에서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내년 대선에서 정권교체를 확신한다”고 말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이석연 변호사가 참여했는데 어떤 역할을 맡나.

“앞으로 직능·지역 대표들이 공동으로 조직을 운영할 계획인데, 이변호사가 상임공동대표를 맡게 된다.”

-야권 대선주자들을 평가한다면.

“이명박 전 시장, 손학규 전 지사, 박근혜 전 대표 모두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다. 누가 돼도 기본은 돼 있는 분들이어서 다행이다. 경선 과정은 투명해야 하고, 후보가 단일화되면 전력을 다해 밀 것이다.”

-한나라당에 대한 의견은.

“과거 수구와 부패 이미지에서 벗어나야 한다. 지난 전당대회에서처럼 때아닌 색깔론 제기는 곤란하다. 한나라당이 바뀌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이 우리의 딜레마다.”

-뉴라이트네트워크 쪽과의 연합은 진행되고 있나.

“기독교에 교파가 나뉘지만 근본은 같은 것처럼 시작할 때의 시기와 인맥이 다르다보니 갈라진 것이지 분열됐다고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 정권교체 범국민연합 구성을 위해 협의 중이다.”

-정당정치에 너무 개입, 시민운동이 아니라는 비판도 있다.

“우리는 종래의 시민운동과 다른 ‘시민정치운동’을 하고 있다. 단체에는 나처럼 계속 남아서 운동을 할 사람과, 우리가 운영하는 목민정치학교에서 훈련을 거쳐 개혁성과 대한민국 국가정체성을 수호하는 정당에 들어가 활동할 사람들이 있다.”

-정권교체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가 어느 정도 된다고 보나.

“국민들의 생각은 6대 4 정도로 기울어져 있다. 지난해 출범 당시에는 불리한 여건이었는데 1년 만에 뉴라이트 회원이 10만명을 넘는 등 국민정서가 있다. 정권교체를 확신한다.”

〈김유진기자〉

 

 

[진보개혁의 위기] 2030 ‘젊은 보수’가 말하는 자화상

입력: 2006년 11월 07일 17:31:34

 
경향신문 특별취재팀은 전통적으로 진보개혁 세력의 지지기반으로 인식돼온 20·30대의 보수화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 이들과 노변정담을 가졌다. “나는 보수다”라고 말하는 20·30대의 대학생과 직장인 6명을 지난 3일 경향신문사 근처 한 레스토랑에 초청, ‘보수의 부상’에 대한 솔직한 생각을 들었다. 저녁 8시부터 밤 11시30분까지 맥주를 마시며 진행된 이날 모임에서 그들은 왜 보수가 됐는지, 젊은 보수들은 무슨 고민을 하며, 사회와 경제, 정치 현안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는지 털어 놓았다. 이들은 “보수냐 진보냐가 아니라, 누가 더 잘 하느냐”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먼저 ‘왜 나는 보수가 되었나’ 이런 이야기로 시작합시다.

탁진희(32·LG전자 연구원)=저는 예전부터 일관되게 보수적인 거 같아요. 우리나라가 항상 강대국들 사이에 치여있는 게 억울하고, 이를 극복하려면 좀더 강대국이 돼야 한다고 생각해요. 국민소득 3만달러가 될 때까진 경제발전 기조를 유지해야 하고, 진보진영이 말하는 분배의 문제는 두번째라고 봅니다.

김남희(23·여·단국대 4년)=대학에 온 뒤 신문 공부와 학회 토론을 하다보니까 사안별로 제 입장을 갖게 됐고 최근에야 제가 보수구나 생각했어요. 주변에서 젊은 애가 왜 보수냐는 말도 들었죠. 처음엔 진보적 친구들에게 눌려 입 닫고 지냈지만 요즘엔 소신을 갖고 얘기를 합니다.

김태영(20·경희대 1년)=전통적으로 보수적 성향의 집에서 자랐어요. 대북정책 논란에 대해서도 부모님은 “우리가 내는 세금이 아무도 모르게 북한으로 가고 있다”고 얘기하죠. 무의식적으로는 4살 때부터 부모님이 읽어주신 보수신문의 영향 같아요. 어렸을 때부터 진보적 신문을 봤다면 달라졌겠죠.(웃음)

정성원(32·LG전자 연구원)=난 기본적으로 보수이지만 사안별로 달라요. 노무현 정권도 과거사 청산 같은 건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드러난 현상으로 볼 때는 실패한 정권이지만 몇 년이 흘러갔을 때 분명히 평가받을 부분은 있을 겁니다. 요즘 진보매체를 의식적으로 보려는 것도 다양한 의견을 알고 싶어서예요.

박경화(29·여·한국투자증권 인력개발부)=부모님이 경상도 분들이라 보수적 성향이 짙은 편입니다. 학생 때에는 운동권과 접하면서 내가 진보주의자인줄 알았어요. 하지만 직장생활을 하다보니 너무 한 쪽에 편향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물론 현실에 안주하는 건 싫어요. 좋은 건 지키되 고인 물이 썩지 않도록 계속 변화를 시도하는 개혁적 보수 성향이 아닌가 싶어요.

특별취재팀=20~30대의 보수화에 대해 어떻게 보십니까.

김태영=대학에 민주노동당 학생위원회가 있는데 좀 거부감이 있어요. 하지만 의외로 보수적 성향을 가진 학생들도 주위에 많아요. 취직하고 돈 잘 벌 수 있게 해주는 게 보수라면 난 보수라 말할 수 있죠. 그동안 외환위기를 겪은 정부와, 지금 정부는 그런 걸 못해주지 않았나요.

김남희=정치적으로 보수화됐다기 보다, 아예 정치에 무감각해졌어요. 저 역시 학교에서 정치 관련 집회를 한다고 해도 관심이 없어요. 다만 등록금 투쟁은 등록금이 환급되면 바로 내 통장에 돈이 들어오기 때문에 참여할 거예요. 한나라당의 어떤 의원이 ‘대학생들이 보수화돼서 좋아했다’는 기사를 본 적 있는데, 대학생들이 한나라당을 많이 지지하는 건 절대 아니거든요. 보수정권이냐 진보정권이냐를 보는 게 아니라, 양쪽 모두 민주주의를 추구하고 있으니까 이제는 어디가 더 잘 할까를 보는 겁니다.

정성원=좌파, 우파라는 게 보수, 진보로 잘못 개념화된 것 같습니다. 정권 차원의 편의성이나 언론 홍보를 위해 보수라는 개념을 지금까지 왜곡해온 것 아닌가요. ‘수구’ 이미지를 일반 보수에도 덮어씌운 겁니다. 스펙트럼이 매우 넓은데 우리사회가 너무 흑백논리로 잘라버렸어요.

탁진희=인터넷 시대가 되면서 사람들 관심이 다양해진 것 같아요. 탈(脫)정치화라기보다는 정치에 어느 정도 관심은 있지만 보수화된 것 같아요. 노무현 정부가 말한 세상은 ‘동화 속 파랑새’에 불과하지 현실에 존재하진 않는 거 같아요.

박경화=우린 소위 베이비붐 세대로 경쟁이 심화된 세대입니다. 자연히 개인주의적 성향이 깊어졌어요. 우리 세대를 흑백논리로 나누기엔 참 어중간하다고 생각해요. 난 개인적으로 보수적 성향이 짙지만 완벽한 보수라 하기는 힘들어요. 보수적 성향이 짙어진 건 보수가 좋다기보다는 진보정권에서 갈등만 깊어지고 모든 것들이 실타래처럼 얽혀진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라고 봐요.

특별취재팀=요즘 여러분들의 일상적 관심사는 무엇입니까.

탁진희=사람들과 모이면 부동산 얘기를 제일 많이 해요. 가격이 급등하기 전에 집을 산 사람이 있으면 부러워하고 못 산 사람들은 얼른 사야겠다거나 그런 이야기죠. 직장동료 중 이자로만 매달 1백만원씩 나가지만 최대 2배까지 아파트 값이 뛴 사람도 있습니다.

박경화=주식과 부동산 얘기를 주로 해요. 회사에서 부동산이나 세무 특강을 한다고 하면 접수 1시간 내에 정원이 다 찹니다. 지금 사면 상투 잡는 거 아니냐는 말도 있지만, 정권이 바뀌면 반드시 부양정책을 할 거라는 기대감에 지금이 적기라는 이야기가 많아요.

정성원=저는 부동산보다 자기 계발에 관심이 많습니다. 독서하는 걸 좋아해 집에 서재를 꾸며보고 싶습니다.

김태영=요즘은 군대 일찍 가는 게 대세라서, 대학 1학년 마치고 간다는 친구들도 있어요. 일찍 갔다와야 취업에 올인할 수 있으니까요.

김일용(38·한나라당 의원보좌관)=두살배기 딸 보리를 낳고서 교육에 관심이 많아졌습니다. 너무 어릴 때부터 공부에 길들여져 있고, 나 혼자 안하면 소외되는 것 같은 분위기가 있어요. 대안학교를 선택해 인간성 넘치는 아이로 키우고 싶은데 내가 부모로서 그런 결단을 내릴 수 있을까 고민입니다.

김남희=여대생들의 최대 관심사는 영어 성적 올리기입니다. 교수님들도 과목을 이수하기 위해 올해 안에 토익시험을 몇번 보고 오라는 기준을 말해줄 정도고, 학교에서 모의 토익시험도 마련해줘요. 그거 개설하면 신청자가 바로 마감되죠. 모두 연수 프로그램, 유학 등을 알아보는데 혈안이 돼 있어요.

특별취재팀=정치 이야기를 해볼까요.

김태영=한나라당은 대안 정당은 아닌 듯해요. 지지율 40%는 비판만 해서 거저 얻은 거죠. 노무현 정권내 수많은 이슈 가운에 한나라당이 내놓은 게 뭐가 있나요. 늘 반대하기 위한 헌법소원만 해왔죠.

김남희=한나라당은 햇볕정책이 잘못됐다고 비판하는데, 북핵 문제에 대한 어떤 대안이라도 내놓은 게 있나요. 가장 유력한 대권주자가 3명이나 있는 한나라당이라면 어느 정도의 대안은 제시해줬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런 노력은 없이 계속 “너희는 잘못했다, 너희는 빨갱이지” 하는 헐뜯기만 하는 건 싫어요.

탁진희=대안이 없었다기보다는 묻혔다고 봅니다. 언론에 비판하고 싸우는 게 나오기 쉽지, 야당이 잘하는 건 안나와요.

김일용=맞아요. 아무리 좋은 대안을 갖고 있어도 힘의 역학 관계에서 야당의 한계가 있습니다.

정성원=지금이 한나라당에 절호의 기회인데 잘 못살리고 있는 건 맞아요.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이 석권했지만 반사이익 아니었습니까.

김태영=박근혜·김근태·심상정을 좋아해요. 박근혜 전 대표는 말을 바꾸지 않는 진정성 있는 정치인 같아요. 애국심도 보통이 아니죠. 김근태 의장은 겸손한 민주화운동 정치인 같고, 심상정 의원은 당에 맞는 정책을 많이 내놔서 맘에 들어요.

김남희=손학규 전 지사는 말이 앞서지 않고 조용히 할 일 하는 게 좋고, 이성권 의원은 겸손하고 한·일관계에 대해 아는 게 많은 거 같아요.

박경화=박전대표는 여태까지 보여준 언행에서 한결 같은 모습이 국민을 배신하지 않을 거 같은 믿음이 있어요. 원희룡 의원은 굉장히 폐쇄적인 당에서 자기 목소리를 내고 개혁을 외쳐 당이 변화하는 모습을 보이게 해서 좋아요.

정성원=손학규의 민생투어가 쇼라고 할 수도 있지만 몇십년 전부터 나환자촌을 방문하는 거 보고 진정성 있는 정치인이라 생각했습니다.

탁진희=박전대표가 원칙 중심의 리더이고, 심상정도 진지하게 일하는 모습이 마음에 듭니다. 열린우리당은 생각이 안 나네요.(웃음)

특별취재팀=진보에 대한 인상은?

정성원=대학 때 운동권 학생들을 보면 민주주의를 외치면서도 정작 스스로는 다양성을 담아내지 못하고 제일 편견이 심하더군요.

김태영=주변에 김종필씨를 좋아하는 친구, 민노당 당원인 친구도 있지만 다 같이 노래방 가면 잘 놀아요. 한 번은 박정희 논쟁을 하면서 친구들끼리 정면으로 부딪힌 적이 있지만 요즘은 서로 인정하고 감정 상하지 않도록 넘어가죠.

김남희=보통 친구들 만나면 대화 주제가 주로 남자, 연예인, 드라마, 취업이에요. 그렇지만 민노당쪽이든 한나라당쪽이든 정치에 관심있는 친구들 만나면 다른 얘기도 할 수 있으니 좋아요. 3년간 만나온 남자친구가 진보적 성향이지만 문제가 안돼요.

박경화=저는 성향이 다른 분들과는 같이 잘 지낼 수 있어요. 그렇지만, 배우자 등 특수관계로는 좀 부담스러워요.

탁진희=정치적 성향에 대해 별로 신경 안 씁니다. 상대를 존중해주면 되는 거죠.

김일용=저는 지난 대선 때 ‘노사모’였고 학생운동하느라 대학을 11년 만에 졸업했어요. 하지만 보수, 진보에 대한 개념이 잘 안 섭니다. 80년대, 90년대, 2000년대 느끼는 게 참 달라요.

〈전병역·이주영기자 young78@kyunghyang.com

 

 

 

[진보개혁의 위기] 3-1. 한국사회에 부는 보수바람

입력: 2006년 11월 07일 18:32:24

 
새로운 보수가 등장했다. 최근 자유주의, 시장경제 등 보수적 가치를 소중히 여기면서도 변화와 혁신을 추구하는 신(新) 보수층이 부상하고 있다. 이념의 틀에 갇혀 성장이냐 분배냐, 친미냐 반미냐 등 이분법에 매몰되어 있는 구(舊) 보수와는 다르다. 20~30대 젊은층에서 나타나는 ‘열린 보수’의 모습이다. 이러한 흐름은 지난 3일 경향신문 ‘진보개혁의 위기’ 특별취재팀이 보수주의자를 자처하는 20~30대 대학생·직장인 6명과 가진 방담에서도 확인됐다. ‘신 보수’의 특징은 이렇다.

① 이념 보다 실리 우선

‘2030세대’에게 보수란 정치나 이념이 아니다. 경제적으로 성장하고 사회가 안정돼 ‘내 생활’이 풍요롭도록 하는 게 보수다. 대학생 김태영씨(20)는 “취직해서 돈을 잘 벌 수 있게 해주는 게 내가 생각하는 보수”라고 강조했다.

그는 “그러나 보수진영이 ‘잃어버린 10년’이라고 부르는 두 진보정권에선 이런 걸 해주지 못했다”고 말했다. 대학생 김남희씨(여·23)도 “우린 보수정권이냐 진보정권이냐를 보는게 아니라, 어느 쪽이 일을 더 잘할 것인가를 보자는 것”이라고 말했다.

② 흑백논리는 NO!

직장인 박경화씨(여·29)는 “우린 ‘베이비붐’으로 경쟁이 심해진 세대라, 남을 누르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한다는 생각과 개인주의 성향이 강한 편”이라며 “우리 세대를 예전처럼 좌파와 우파, 진보와 보수의 흑백논리로 나누긴 어중간하다”고 말했다. 김태영씨도 “내가 보수이긴 하지만, 진보와 보수의 장점이 섞인 게 좋다”면서 “그런데 한나라당을 지지하면 나 역시 강경우파가 되는 것인가”라고 반문했다. 김태영씨는 “박근혜, 김근태, 심상정을 다 좋아한다”면서 “김종필 좋아하면서 민주노동당원인 친구도 있다”고 했다. 한국사회여론연구소 한귀영 연구실장은 “과거에는 진보와 보수를 정치적 측면으로만 구분했다면 이제는 정치·경제·사회 등 그 기준이 다양해졌다”고 설명했다.

③ 한나라 ‘無대안’ 비판

한나라당을 지지하지만, 한나라당을 비판한다. 수구·냉전적 시각에 갇힌 한나라당이 아닌, 혁신하는 한나라당을 지지하는 것이다. 김남희씨는 “북핵문제가 터진 지 한참 됐지만 대권주자가 3명이나 있는 한나라당에서 대안을 내놓은 게 있느냐”며 “늘 여당을 향해 햇볕정책이 잘못됐다고 비판만 한다”고 지적했다. 박경화씨는 “현실에 안주하는 보수가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를 시도하고 발전해 나가는 개혁적 보수가 좋다”고 밝혔다. 직장인 탁진희씨(32)와 박경화씨는 여당의 사학법 개정에는 반대하지만 사학 운영방식은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④ 민노당에도 호감

호감이 가는 정치인으로 6명 중 2명(복수응답)이 민주노동당 심상정 의원을 꼽았다.

“민주노동당의 개혁적 성향에 맞는 정책들을 많이 내놔서”(김태영씨), “진지하게 일하는 모습이 보기 좋아서”(탁진희씨)가 이유였다.

명지대 신율 교수는 “노무현 정권이 싫어서 한나라당을 지지하고 스스로 보수라 자처하는 경향이 있다”면서 “그러나 실제로는 개혁성에 호감을 갖고 진보적 성향을 지닌 사람들이 많다”고 분석했다.

〈이주영기자 young78@kyunghyang.com

 

 

 

[진보개혁의 위기] 3-2 결집하는 보수

입력: 2006년 11월 12일 17:51:20

 
2001년 8월 21일 한산하던 김포공항 청사가 북적댔다. 8·15 평양 대축전 방북단이 도착하면서 보수단체들 회원 800여명이 이른바 ‘빨갱이들’을 규탄하기 시작한 것이다. “좌경불순 세력” “북한의 꼭두각시” “민족의 반역자, 김정일의 하수인들은 북으로 돌아가라”는 따위의 격한 구호가 터져나왔다. 이에 맞선 한총련, 민화협, 통일연대 등 진보적 단체 회원과 멱살잡이 등 몸싸움이 벌어졌다.
한나라당과 뉴라이트 김진홍 뉴라이트 전국연합 상임의장(가운데)이 지난 달 22일 대구 프린스 호텔에서 열린 ‘뉴라이트 대구연합 창립대회’에 참석, 박근혜 한나라당 전대표(오른쪽)와 함께 국민의례를 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1997년 김대중 정부 출범으로 여야간 정권교체가 이루어진 이후 숨죽어 있던 보수세력이 마침내 폭발하는 순간이자, 보수세력의 ‘총궐기 신호’였다.

50년 만의 정권교체라는 국민의 정부 출범, 대북포용정책 및 6·15공동선언은 반북·반공주의에 기초한 보수파의 존립기반을 뿌리째 뒤흔들어 놓았다. 그런데 다음 대통령선거에서도 노무현 정부의 집권으로 이어지자 해방 후 줄곧 중심세력으로 자리잡아온 보수세력은 심각한 위기의식에 휩싸였다. 지난해 7월27일 강정구 동국대 교수가 한 인터넷 매체에 기고한 “6·25전쟁은 북한의 지도부가 시도한 통일전쟁”이라는 칼럼은 이런 보수세력들의 피를 끓게 했다. 이런 상태에서 두달 뒤 9월 중순 진보단체의 맥아더 동상 철거 주장이 나오자 ‘궐기’하기에 이르렀다.

삼성경제연구소가 2005년말 임원급 대상 유료 정보사이트인 ‘세리 CEO’ 회원 537명에게 ‘올해 가장 걱정스러웠던 사회적 이슈’를 물은 결과 단연 강정구 동국대 교수 발언(27.2%)을 가장 많이 꼽았다. 맥아더 동상 철거논란(11.6%)도 4번째였다. 이런 진보세력의 도전 외에 노무현 정부의 공격적 태도는 그렇지 않아도 생존의 기로에 처해 있다고 여기던 보수를 폭발직전의 상황으로 몰아갔고, 결국 그들을 결집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자유주의연대 신지호 대표는 “노무현 정부가 실제 이상의 위기의식을 부채질해 보수진영을 활성화시켰다”고 설명했다.

 



 

보수세력의 결집은 다층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보수세력은 크게 전역군인 모임이나 보수 기독교계 등 전통적인 구 보수세력과 최근 등장한 ‘뉴라이트 계열’로 대별할 수 있다. 강경보수로 분류되는 구 보수쪽에는 재향군인회, 성우회, 국민행동본부 등과 보수기독교계의 대표주자인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가 있다. 최근 2년 사이 등장한 자유주의연대, 뉴라이트전국연합과 선진화국민회의 같은 뉴라이트 계열은 상대적으로 온건 성향의 보수로 평가된다. 주축은 70·80년대 재야·학생운동이나 90년대 시민운동 경험자 또는 교수 출신 지식인 그룹이다. 기존보수 단체들이 각종 반공 집회 등을 통한 세력 과시에 치중하는 반면 뉴라이트 계열은 ‘두뇌 플레이를 통한 보수의 혁신’에 힘을 쏟는 편이다. 보수의 변신 과정에서 나온 자연스러운 역할 분담이다.

보수세력의 행동대격인 재향군인회는 서울시청 및 서울역 광장의 대규모 집회에 막강한 회원 동원력을 자랑한다. 종신회원만 1백만명 이상으로 알려져 있고, 최대 6백50만명 이상이라고 주장한다. 육·해·공군장성 모임인 성우회, 예비역대령연합회, 학사장교(ROTC)연합회 등 전역장교들은 특히 전작권 환수 과정에서 그 활약상을 드러낸 바 있다.

전시작전 통제권 환수 논란이나 북핵실험 등 보수세력이 스스로에게 유리한 의제라고 여기는 굵직한 안보문제가 등장하면서 과거 재야운동 단체가 그랬듯이 작은 단체들을 묶은 연대 움직임이 활발하다. 우익논객인 ‘조갑제닷컴’의 조갑제 대표와 예비역대령연합회 등으로 결성된 국민행동본부가 대표적이다. 국민행동본부는 점차 안보쟁점 외에 호주제 폐지 등 사회적 의제로 투쟁대상을 넓혀가고 있다. 지난해 10월 경기 부천지부를 시작으로 부산·경남, 대전·충남, 강원, 충남 아산지부 등을 결성, 전국 조직으로 발돋움하고 있다.

이들 구 보수단체의 규모는 지난 10월9일 ‘한·미연합사 해체 반대 1000만명 서명운동본부’에 서명·가입한 227개 정도로 추정한다. 회원수가 수십~수백명에 명맥만 유지하는 단체도 적지 않다. 하지만 “두차례 대선 실패 후 패배주의로 흩어져 있던 보수세력들이 조직화에 나서고 자신감을 얻었다는 것만으로 의미가 있다”(한나라당 이정현 전 부대변인)는 평가다.

간헐적으로 서울역 광장 등지에서 수천명씩 모이던 보수세력은 어느덧 서울시청 앞 광장을 차지했다. 이전까지만 해도 대규모 시위는 진보·민주화세력의 전유물이었다. 이제는 보수세력이 대집회를 통해 세를 과시하는 것으로 임무교대가 된 것이다. 올 9월2일 서울시청 앞 광장에는 재향군인회를 비롯한 200여개 보수단체 소속 약 5만명이 모여 ‘전시작전통제권 환수 반대 집회’를 열었다. 앞서 국가보안법 폐지안으로 몸살을 앓은 2004년 10월 한국기독교총연합회와 반핵반김국민협의회가 진행한 ‘나라와 민족을 위한 구국기도회’ ‘국가보안법 수호 국민대회’에도 신도와 회원 등 수만명이 운집했다.

구 보수와 달리 대학생, 학부모, 종교인에 이르기까지 부문별로 뭉치는 새로운 보수의 조직화가 최근 급속히 진행되고 있다. 새로운 보수의 조직화는 뉴라이트 계열이 주도하고 있다. 2004년 7월 신지호 자유주의연대 대표가 주도한 초기의 뉴라이트 운동은 독재와 부패로 얼룩진 구보수세력을 비판하고 좌파진보주의에 대항한 ‘개혁적 보수주의’ 지식인 운동 성격이 강했다. 그러나 지난 9일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뉴라이트전국연합 창립 1주년 기념식은 신보수의 광범위한 조직화라는 점에서 다르다.

1,000여명으로 시작한 전국연합은 1년 만에 현재 11만여명 회원에 15개 광역시·도연합 및 183개 시·군·구 조직과 교사·청년 등 99개 부문별 조직 5만3천명, 뉴욕·LA 등 해외조직 2,000명을 둘 만큼 성장했다고 밝혔다. 지난 2일 광주전남 뉴라이트연합을 창립, 보수단체의 불모지 호남에 깃발을 꽂기도 했다. 향후 대학·여성·천주교연합도 창립할 방침이다. 지난 6일 ‘불자 애국운동’을 표방한 뉴라이트불교연합까지 출범하면서 기독교에 이어 불교까지 아우르게 됐다. 국민의 정부 이래 의약분업 등에 불만을 표출해온 의사들도 4일 뉴라이트의사연합을 꾸려 “개혁 우파정권 탄생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뉴라이트신노동연합과 교사연합, 학부모연합은 각각 진보진영의 민주노총과 전교조 대항조직이다.

-‘관변’ 벗어나 ‘서울광장’에 나섰다-

9월 출범한 신노동연합은 권용목 민노총 초대 사무총장 출신이 대표를 맡는 등 민노총과 한국노총 출신 전 노조위원장급이 포진했다. 권대표는 1987년 현대그룹 노조협의회 의장으로 울산 현대노조를 일으켰던 인물이다. 신노련은 서울, 부산, 대구, 울산 등 6대 광역시와 경남 거제, 마산 등 23개 시·군에 지역조직을 확보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아직 신노련을 뒷받침할 노동자, 현장 노조조직은 미미한 상태다.

보수 불 지핀 북핵실험 한 보수단체 소속 인사가 최근 북한 핵실험으로 긴장이 고조되자 핵폐기를 요구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1월 창립한 뉴라이트교사연합은 교육현장에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에 입각한 가치관 운동을 전개키로 했다. 이명준 대변인(중경고 교사)은 “교육의 총체적 위기는 획일적 교육정책과 전교조의 전횡 및 이념 편향성 때문”이라며 “전교조를 대체하는 것이 목표”라고 밝혔다. 뉴라이트학부모연합은 교육 수요자인 학생과 학부모 중심의 ‘교육 주도권 쟁취 운동’을 주장한다. 이들은 학교선택권과 교육선택권, 학교 전통과 개성 회복, 학생 선발권 보장, 사립학교법 재개정, 교원 평가제 적극 도입 등 전교조와 정반대의 정책을 제시하고 있다.

보수단체 중 가장 중도성향인 자유주의연대는 극좌파는 물론 극우파를 배격하고 ‘균형감 있는 중도우파’를 추구하고 있다. 신지호 대표와 홍진표 집행위원장 등 전향한 386 운동권 10여명과 자유주의 전문가들로 구성돼 있다. 이지수 명지대 북한학과 교수와 이동호 한반도정책연구원 연구위원, 김광동 나라정책연구원 대표, 한기홍 북한민주화네트워크 대표, 도희윤 피랍탈북인권연대 사무총장, 하현준 북한인권정보센터 연구위원 등 북한 전문가가 많은 것이 특징이다.

박세일 서울대 교수, 이석연 변호사, 이명현 전 교육부 장관이 주도하는 선진화국민회의는 ‘개혁적 보수’를 표방한다. 김영삼 정부 시절 세계화의 기수였던 박교수는 2005년 한나라당 정책위의장 당시 ‘공동체적 자유주의’ 하의 한반도 선진화전략을 마련한 주역이다. 뉴라이트전국연합과 달리 선진화국민회의는 기성 정치권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다. 몸집 불리기를 통한 운동보다는 ‘10년 내 선진국 진입’ 같은 전략 마련에 치중하고 있다. 박교수는 “반 대한민국세력만 빼고는 다 같이하자는 것”이라며 “옛날에 안주하는 보수가 아니라 몸으로 실천하는 개혁적 보수와 합리적 진보도 다 같이 선진화 세력으로 본다”고 말했다. 곧 “산업화, 민주화 그룹이 힘을 합쳐 선진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입장으로서 “한국사회가 건강한 좌우 양날개로 날아야 한다”는 인식은 자유주의연대와 일맥상통한다.

이밖에 최근 2~3년 사이 각종 신생 보수단체들이 생겨났다. 경실련 사무총장을 지낸 이석연 변호사의 헌법포럼이나 이동복 전 자민련 의원의 북한민주화포럼, 박효종 서울대 교수 등의 교과서포럼, 국민통합포럼, 세계평화포럼 등이다.

보수세력의 영토확장은 최고 취약지이던 20·30대 젊은층에도 뻗치고 있다. 특히 진보의 요람으로 통하던 대학에 뉴라이트가 속속 파고드는 추세다. 2만여명 회원의 뉴라이트청년연합과 뉴라이트대학생연합, 자유개척청년단, 무한전진, 청년아카데미 등이다. 대학생연합의 진성회원은 500~800명이다. 아직 수적으로는 미약하다. 그러나 뉴라이트 계열 후보가 지난해 경희대·경북대 등 대학총학생회장 선거에 당선됐다. 올해 부산대 등 8개 대학 총학선거 과정에 뉴라이트전국연합이 개입했다는 의혹도 나오고 있다. 그만큼 대학가 진출이 매우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뉴라이트 단체들은 보수의 이론무장을 위한 싱크탱크 설립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뉴라이트전국연합은 브레인 격인 ‘바른정책포럼’과 200여명의 교수로 ‘뉴라이트 싱크탱크’를 만들었다. 우파 지도자 양성을 위한 ‘목민정치학교’도 운영, 사상 무장과 인재 육성을 통한 보수이념 확산을 목표로 하고 있다. 4월에는 안병직 서울대 교수와 제자 전문가 그룹인 ‘낙성대 경제연구소’ 사단이 ‘전향 386’ 세력을 규합해 ‘뉴라이트재단’을 출범했다. 뉴라이트재단에는 성균관대 이대근, 서울대 이영훈 교수 등 20여명의 학자가 참여했다. 이 재단은 기관지인 계간 ‘시대정신’을 발행하고 일반인 상대 강좌도 할 계획이다. 80년대 ‘강철 서신’으로 활약한 전향한 주사파 운동권 김영환씨가 편집위원이다.

지난 9월에는 박세일 교수를 이사장으로 한 중도보수 성향 싱크탱크인 ‘한반도선진화재단’이 창립됐다. 나성린 안민정책포럼 회장(한양대 교수)과 이석연 헌법포럼 공동대표가 이사직을 맡고 조순 전 서울시장이 고문으로 위촉됐다.

보수단체의 자금력은 어디서 나올까. 출처는 알 수 없지만, 재향군인회의 사례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향군의 3백여억원 예산은 회원 회비보다는 대부분 보훈기금 보조금 등에 의존한다. 2004년 예·결산 결과 제대군인 복지사업에는 예산의 10%만 쓰고, 상당수는 각 지회 운영비로 나갔다. 2004년 운영보조비로 57억원, 운영비지원에 36억원 이상을 썼다. 민주노동당 이영순 의원의 9월 국감 자료를 보면, 향군이 100% 지분을 가진 중앙고속의 경우 연평균 10억원 정도 손실을 보면서도 2000~2005년 6년동안 ‘보훈성금’을 2백78억원이나 지출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밖에 산하 7개 출자회사와 향군회관 등 6개 직영업체에서 매년 1백80억~2백억원 정도 보훈기금을 기탁했다. 향군이 대규모 서울집회 때 각 지부 회원 동원용 버스를 대절하고 참석자에게 식대를 지급할 수 있는 토대인 셈이다.

그러나 뉴라이트 계열은 회비나 외부 후원에 의존하고 있다. 11만여명의 회원을 자랑하는 뉴라이트전국연합은 서울 광화문의 40여평 사무실에 10명의 상근자가 있으며, 대부분 회원 후원금으로 운영한다는 설명이다. 충무로에 있는 20여평 규모 사무실에 약 10명의 상근자가 있는 한반도선진화재단은 외부 후원이나 스폰서를 받는 것으로 알려졌다. 자유주의연대는 가입비 10만원에 매달 3만원씩 내는 회원 200여명의 회비로 살림을 꾸려나간다.

뉴라이트 운동의 이런 양적 팽창에 비해 질적 발전을 이뤘는지에 대해서는 평가가 엇갈린다. 신지호 대표는 최근 “광범위한 조직을 꾸리는 형식적, 양적 확산에만 주력한 나머지 정책 제시 등 콘텐츠 확보에 심혈을 기울이지 못하는 한계가 드러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처럼 보수세력들이 충실한 내부보수에 앞서 급하게 덩치를 키워가고 있는 이유는 2007년 대선을 겨냥한 때문으로 풀이되고 있다. 이미 김진홍 뉴라이트전국연합 상임의장은 “한나라당 단일 후보를 전력을 다해 밀겠다”고 공개선언한 바 있다. 그러나 자유주의연대, 구 보수단체는 한나라당에 직접 참여하는 활동에 부정적이다.

〈전병역기자 junby@kyunghyang.com

 

 

 

[진보개혁의 위기] 보수담론 ‘전도사’ 공병호 “우리도 잘살수 있다”

입력: 2006년 11월 14일 17:37:17

 

“좀 전에 삼성생명에 새로 들어온 보험설계사들에게 강연 끝내고 왔어요. 저녁에는 내일 오후에 예정된 KT 강연 원고도 준비해야 합니다. 한국경제신문에 ‘나폴레옹 리더십’이라는 제목의 글을 내일 오전 9시까지 넘겨야 하고요. 11월, 12월에 나올 두 권의 책 원고도 손봐야 합니다.”

9일 오후 5시 서울 가양동 자택에서 만난 공병호 박사(46)는 인터뷰 시간을 빼앗는 것이 미안할 정도로 바빴다. 그는 1년에 300회에 달하는 외부 강연을 한다. 지난 5년간 쓴 저서만 50여권이고 매달 30회가량 신문, 잡지 기고를 한다. 강연에 오는 청중이 평균 100명이고, 그의 책이 연간 1만권 정도 팔린다고 가정하면 그는 1년에 적어도 13만명의 사람들을 만나서 자신의 사상을 전파하는 셈이다.

그는 분, 초를 쪼개 살면서 세상 사람들에게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일까.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그를 원할까.

살인적인 일정을 소화하면서도 여유를 잃지 않을 수 있다는 그는 “내 스스로 인간 가능성의 무한함을 증명해 보이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멸치어장을 하는 아버지 밑에서 태어나 자본주의가 작동하는 모습을 보고 자랐다”며 “이러한 경험에 책에서 얻은 지식이 더해져 비로소 확고한 신념으로 자리잡게 됐다”고 말했다. “기업체 강연이 가장 많아요. 기업 내에는 비즈니스에 유능한 분들은 많지만 강의할 수 있는 분은 적죠. 국가기관, 병원, 교육기관, 학원, 지자체 등에서도 강연 요청이 옵니다. 특히 시골 지자체에 가서 강연할 때엔 우리가 정말 잘 살아야겠다는 느낌을 많이 받아요. 어린 학생에서부터 촌로들에 이르기까지 눈을 반짝이며 들어요. 제 책과 강연이 대중들에게 설득력을 갖는 것은 바로 제가 저의 사업을 해오며 체득한 신념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에 대한 ‘안티’가 강했지만, 생각이 다르더라도 공병호란 양반이 정말 열심히 산다고 인정하기 때문이지 많이 줄었어요.” “자유기업센터에서 번역한 자유주의 시리즈가 40여권입니다. 요즘 ‘뉴라이트’가 나서서 뭔가 새로운 흐름인 것처럼 얘기하지만 제가 세상의 흐름을 10년쯤 먼저 본 것이죠.”

〈손제민기자〉

 

 

 

[진보개혁의 위기] ‘대한민국 선진화 전략’ 신보수 정치인 필독서

입력: 2006년 11월 14일 17:37:25

 
박세일 서울대 교수가 올 2월 내놓은 저서 ‘대한민국 선진화 전략’은 신보수 담론의 교과서로 통한다.

책은 “시간이 15년 정도밖에 안남았다”는 ‘위기론’으로 시작된다. 그러면서 한국 현대사를 건국, 산업화, 민주화, 선진화로 구분하고 “지금은 민주화에서 선진화로 넘어가야 할 단계”라고 규정한다. 선진화를 위해서는 작은 정부가 시장의 양적 성장을 도와야 하고, 약자를 보듬는 ‘공동체 자유주의’로 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개혁적 보수와 합리적 진보가 뭉쳐야 한다고도 한다.

책은 나오기가 무섭게 정가의 화제가 됐으며 정치 관련 서적으로는 드물게 일반인들에게도 많이 팔렸다.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최근 들어 “‘선진화’는 법치주의와 시장자유주의” “나라 ‘선진화’”를 자주 언급하는 것이나, 남경필 의원이 ‘선진화’ 세력 대통합론을 제기하는 것도 모두 이 책의 영향이다.

박재완 한나라당 의원은 “개인의 자유를 진작하는 게 진정한 보수인데 한나라당은 거기에 대해 제대로 목소리를 못냈다”며 “올초 정강정책을 바꿀 때 ‘공동체 자유주의’를 포함, 박교수 개념을 당의 이념으로 채택했다”고 말했다. 나경원 의원은 “사각지대에 계신 분들을 보호할 수 있어야 한다는 ‘따뜻한 보수론’은 지금도 회자된다”고 말했다. 한나라당 초선의원의 한 보좌관은 “초·재선의 ‘생각있는 의원들’은 대부분 이 책을 읽은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책이 나온 지 9개월이 채 안됐지만 판매부수가 이미 1만부(6쇄)를 넘어선 것은 일반인들의 관심을 반영한다. 출판사 ‘21세기북스’ 관계자는 “경제·경영서에 비해 정치 서적은 거의 팔리지 않는 현실을 감안하면 벌써 1만부가 팔린 것은 기록적”이라고 말했다. “책은 요즘도 매달 1,000부가량 꾸준히 나가며 주 독자층은 서울·경기 지역의 중년 남성들”이라고 덧붙였다.

박교수는 또 자신이 조직한 ‘선진화 국민회의’를 통해 전시작전통제권 환수 반대 시위를 조직하며 뉴라이트, 올드라이트를 모두 통합시키는 구심점 역할도 했다.

〈박영환·손제민기자〉

 

 

 

[진보개혁의 위기] 3-3. 보수담론 어떻게 형성되고 소비되나

입력: 2006년 11월 14일 17:56:58

 
“1인당 국민소득 2만달러 시대로 가자.” 출범 초기 참여정부가 외친 중요한 구호 중 하나다. 노무현 대통령은 집권 4개월 후인 2003년 6월30일 ‘참여정부 경제비전 국제회의’ 개막연설을 통해 “2만달러 시대로 가자”고 제안했다. 그후 노대통령은 틈만 나면 ‘2만달러 시대’ 얘기를 꺼냈다. 노조 지도부를 비판할 때도 “2만달러 시대의 선결 조건은 노사화합”이라고 말했고, “2만달러 시대를 위해선 시장과 기술 모두 혁신을 일상화해야 한다”고도 했다. 정부 각료들은 ‘2만불 시대로의 항해’와 같은 기고문을 언론에 싣고 적극 홍보에 나섰다.

이‘2만달러 운동’은 선진국 반열에 들기 위해 분배보다는 성장과 개발에, 노조 활동보다는 기업 활동에 좀더 힘을 몰아줘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었다. 출범 전만 해도 최소한 ‘성장과 분배의 조화’를 외쳤던 참여정부가 왜 갑자기 이런 구호를 내세웠을까.

‘2만달러 시대론’은 당시 청와대 국정상황실장이었던 이광재 열린우리당 의원이 주도적으로 기획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 아이디어는 삼성경제연구소와 전국경제인연합회에서 나왔다는 게 정설이다. 전경련은 노대통령이 취임하던 2003년 2월25일 “새 정부와 함께 2만달러 시대를 열어갑시다”라는 현수막을 서울 여의도 전경련 회관 건물에 내걸었다. 그에 앞서 인수위 시절인 그해 2월7일에는 전경련 총회에서 새 정부에 대통령 직속기구로 민관합동 ‘2만달러 추진위원회’ 신설을 제안하기도 했다.

‘2만달러 시대’의 원조는 삼성경제연구소란 얘기도 있다. 삼성경제연구소는 인수위 시절부터 참여정부에 많은 정책 아이디어를 비공식적으로 제공해 왔다. 삼성경제연구소의 윤순봉 부사장은 “인수위 시절 우리가 만든 대외비 보고서가 대통령 당선자에게 건네졌다는 항간의 추측은 확인해줄 수 없다”면서 “그러나 우리가 참여정부에 많은 정책적 아이디어를 준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삼성 이건희 회장도 노대통령이 2만달러 시대를 얘기하기 한달쯤 전인 2003년 6월5일 2기 신경영 선언을 통해 “이 고비를 어떻게 넘기느냐에 따라 선진국이 될 수도, 후진국으로 전락할 수도 있기 때문에 파이를 빨리 키워 ‘국민소득 2만달러 시대’에 돌입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참여정부를 포함, 한국 전체가 갑자기 ‘2만달러 시대론’의 포로가 되면서 반론을 허용치 않는 분위기가 형성된 것이다. 김창엽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는 “난데없이 등장한 구태의연한 구호가 내용적 충실성 없이도 국가발전의 핵심 비전이 돼버린 사회 분위기에 아연해 한 적이 있다. 뭔가 의도가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온 사회가 그 방향으로만 흘러갔다”고 회고했다.

‘2만달러 시대’는 갓 출범한 참여정부의 보수화가 예상보다 빨리 왔다는 정도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그것은 한국사회에서 보수 담론이 어떻게 형성되고 이 사회에 뿌리를 내리는지, 보수담론의 재생산 구조를 보여주는 사례로도 적지 않은 의미를 담고 있다.

“매력있는 한국” “개인 경쟁력이 곧 국가 경쟁력” “15년 안에 못하면 영영 선진국 못될 수도….”

‘2만달러 시대’와 비슷한 함의인 이 말들 역시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져 의제로 발전된 것들이다. 그러나 그런 의제의 유경은 잊혀지고 사람들은 그냥 물, 공기처럼 당연시 받아들인다. 그러면 시민들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한국사회의 의제로 자연스럽게 굳어지게 된다. 그리고 이 말들은 우리를 한시도 그냥 내버려 두지 않는다. 끊임없이 자신을 계발하고 타인과의 경쟁에 대비하지 않는 것은 일종의 ‘죄악’인양 몰아간다.

그러면 이 얘기들은 누가 만들어냈고, 어떤 과정을 통해 확산돼 우리 머릿속에 튼튼히 뿌리내리게 됐을까. 이 물음은 곧 한국사회의 보수담론이 어떻게 생산돼 어떻게 소비되는가라는 물음으로 바꿔 볼 수 있다.

강력한 보수 담론의 생산은 주로 재계 관련 연구소와 이른바 신(新)보수 지식인들에 의해 이뤄진다. 신광영 중앙대 교수(사회학)는 “구시대적 냉전 논리 등으로 무장한 구보수, 이른바 수구세력들은 담론 생산 능력까지 갖고 있지는 못하다”며 “대신 삼성경제연구소와 전경련 산하 자유기업원처럼 재계에 밀착된 민간 싱크탱크들이 연구를 통해 보수 담론을 생산해 정치권과 언론을 통해 사회 전반에 제공한다”고 말했다.

기업들이 낸 돈으로 설립된 전경련 산하 자유기업원은 막대한 자본력을 바탕으로 한 심포지엄, 출판, 각급학교 자본주의 경제교육 등을 통해 시장 가치의 확산과 반기업 정서 없애기, 기업하기 좋은 국가 분위기 조성 등에 주력하고 있다. 최근 유석춘 연세대 교수(현 한나라당 참정치 운동본부장)가 대기업들이 지원한 자유기업원 연구자금으로 “참여연대는 교수와 시민운동가들이 정권 내부로 들어가는 통로”라는 ‘참여연대 보고서’를 펴내며 참여연대의 삼성 비판에 역공을 편 것이 좋은 예이다. 전경련은 또 해마다 ‘중국 산업시찰’이라는 이름으로 서울 주요대학의 학보사 기자들을 데리고 중국에 진출한 한국 기업 견학을 시켜준다. “대학생이 매주 접하는 학보에 중국에서 활약하는 우리 기업의 노력을 게재함으로써 (대학생들의) 반기업 정서 완화에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이 전경련이 표방하는 사업 추진 이유다.

삼성경제연구소는 좀더 ‘객관성’과 ‘전문성’으로 무장한 재계 싱크탱크로 분류된다. 재계 논리를 체계적으로 국익과 연결시키는 보고서로 정부 정책에 큰 영향을 행사해 왔다는 점에서 보수담론 생산의 핵심 공장이라고 할 수 있다. 연구소의 웹사이트 회원은 올 2월 1백12만명을 넘어 단일 연구소로는 세계에서 최다 회원을 갖고 있다. 보고서가 나오기 무섭게 웹사이트에는 “기다리던 논문이 드디어 올라왔네요” “좋은 내용 감사합니다”라는 답글이 수십건 달릴 정도로 호응이 높다. 삼성경제연구소의 힘은 어디에 있을까. 박사급 연구원 100여명 등 120명의 고학력 연구인력이 쏟아내는 연구 보고서들은 경제에만 국한되지 않고 저출산, 연구윤리, e-스포츠, 황사피해 대응방안 등 일반인들의 최근 관심사를 망라한다. 일반에 공개되는 대외발표용 보고서만 한 해 평균 300건에 이른다.

이들이 발표하는 보고서는 여과없이 대부분 언론에 상당한 비중으로 소개된다. ‘삼성’이라는 공신력과, 그것이 담고 있는 많은 정보 때문이다. 이렇게 소개된 보고서들은 정부부처나 정치인, 교육기관, 연구자 등에 의해 반복적으로 활용된다. 삼성경제연구소의 의제는 자연스럽게 대한민국의 의제로 재생산된다.

14일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를 찾은 시민들이 자기계발서을 보고 있다. ‘성공학 서적’이라고도 하는 이러한 책들은 대부분 외국 필자들이 쓴 것이지만 최근 들어 공병호 경영연구소 소장 같은 한국 필자의 책도 널리 잃히고 있다. /남호진기자
삼성경제연구소가 올 1월 낸 ‘대학혁신과 경쟁력’이라는 보고서는 대학 사회 내에 효율과 경쟁이라는 담론이 뿌리내리게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 보고서는 ▲대학사회 내 시장원리 및 경쟁원리 작동을 위한 규제 개혁 ▲국립대 법인화, 시·도립대학 전환 등을 통한 대학경쟁체제 도입 ▲엄격한 교수 평가 및 보상 시스템 ▲총장의 임기 보장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이는 경제신문 등을 통해 꾸준히 소개돼 온 ‘대학경영도 삼성을 배워라’라는 담론을 체계적인 보고서로 명확히 정리해낸 것이다. 효과는 바로 나타났다. 서울대 자연과학대는 한달 뒤 전체교수회의에서 교수승급심사시 일정 비율의 탈락을 의무화하는 방안을 통과시켰다. 당시 자연대 교수들은 “이번 결정에는 프린스턴, 하버드 등 미국 유수 대학을 벤치마킹해 내놓은 삼성경제연구소의 대학경쟁력 확보방안 보고서가 많은 참조가 됐다”고 밝혔다.

이제 누가 들어도 익숙한 문구인 ‘매력있는 한국’ 역시 삼성경제연구소의 작품이다. 프랑스 출신 방송인 이다도시의 ‘매력있는 한국론’, 강운태 전 내무부장관이 강연에서 자주 쓰는 ‘매력있는 한국’도 모두 여기서 나온 말이다. 39명의 연구원을 대거 동원해 만든 이 보고서는 지난해 6월 국회 심포지엄에서 발표됐다. 보고서는 잘 사는 나라의 객관적 기준을 ‘국민소득 3만달러’로 명시, 아직 달성하지 못한 ‘2만달러 시대’ 목표를 은근슬쩍 ‘3만달러’로 상향 조정한다.

“이제는 양보다는 질이 중요합니다. ‘강소국’이라는 말도 제가 2001년에 처음 쓰기 시작해서 유행한 겁니다.” 삼성경제연구소 윤순봉 부사장의 말이다. 그러나 삼성경제연구소 보고서가 완전한 것인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이도 있다. “그들의 보고서를 꼼꼼히 읽다 보면 학문적으로 함량미달인 것이 많습니다. 데이터나 논리의 오류 때문에 학술지에 지원할 경우 상당수 거절당할 겁니다. 가령 지난 9월 나온 ‘설비투자에 관한 3대 논란과 평가’ 보고서는 과잉투자 소지가 있는 90년대에 비교기준을 두고 ‘투자부진론’을 펴는 오류를 범했습니다. 8대 재벌은 이미 외환위기 이전 수준의 투자를 회복했음에도 여전히 재벌의 선도적 투자 확대론을 주장하는 것은 논리에도 맞지 않습니다. ‘과학성’과 ‘객관성’으로 포장하고 있지만 이들은 기본적으로 ‘국가대표로서 재벌을 키우자’는 얘기를 하고 싶은 재계 이데올로그들입니다. 문제는 이런 보고서들이 여과없이 한국사회의 의제로 상정되는 현실입니다. 언론은 삼성경제연구소에서 나온 보고서라면 비판적 검토 없이 그대로 소개해주고, 정부 관료들도 이것을 그냥 받아들입니다.”

시민단체인 경제개혁연대 소장을 맡고 있는 김상조 한성대 교수(경제학)의 말이다. 이에 대한 윤순봉 부사장의 의견은 다르다.

“우리는 스스로를 보수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우리만큼 진보적인 조직이 대한민국에 어디 있습니까. 연 7% 성장과 4만달러, 5만달러 소득 시대를 얘기하는 것만큼 진보적일 수 있습니까. 대한민국에서 돈되는 것을 우리만큼 고민하는 곳은 없을 것입니다.”

이런 ‘위기론’ ‘성장론’ 같은 보수 담론이 일반 국민들 사이에 자리잡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전통적 보수세력뿐이 아니다. 보수정당 한나라당보다 참여정부가 더 큰 역할을 했고, 이른바 보수언론을 포함한 대부분 언론이 이 과정에 동원됐다. 진보 지식인들이 이 보수 담론의 유포에 결과적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김상조 교수는 “우리 사회의 진보적 기반이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선 토종자본론 같은 이야기와 섣부른 사회적 대타협론이 보수, 진보의 경계를 희석시키고, 재벌체제를 통한 성장모델에 대해 진보학자들도 동의하는 듯한 여론을 만들어냈다”고 말했다.

그러나 보수 담론의 재생산을 논할 때 ‘한나라당-보수언론-보수지식인’이라는 강력한 연결 고리를 빼놓을 수는 없다. 보수언론은 ‘뉴라이트’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열풍과 같이 최근 한국사회의 보수화 분위기 형성에 큰 역할을 하고 있다. 보수 지식인의 역할도 적지 않다. 대표적인 인물은 박세일 서울대 교수. 박교수는 올초 펴낸 ‘대한민국 선진화 전략’이라는 책을 바탕으로 언론에 칼럼을 쓰며 보수담론을 전파하고 있다. 그의 ‘선진화’라는 말은 노무현 대통령도,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도 자주 입에 올릴 만큼 정치권과 지식사회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보수담론의 대중화에는 공병호 박사가 큰 기여를 했다. 1997년 외환위기 직후 대기업들의 돈을 갹출해 전경련 산하에 자유기업센터(자유기업원의 전신)를 세우며 자유주의 소개에 열중했던 그는 요즘 개인 연구소를 바탕으로 왕성한 강연과 저술 활동을 하고 있다. 환경 의제에서 보수담론이 부상하는 모습 역시 한국사회의 보수 연결고리가 작동하는 방식을 잘 보여준다. 지난해 4월 대한상공회의소가 낸 ‘주요 국책사업 중단 사례 분석 및 시사점’ 보고서는 “새만금, 천성산 터널공사 등이 환경단체의 문제제기로 중단됨으로써 이미 4조원의 손실이 났으며 앞으로 35조원의 손실이 발생할 것”으로 추정했다. 당시 환경운동진영은 “이 같은 계산의 근거가 된 자료는 건설사와 시공사의 주장을 여과 없이 단순 합산한 것에 불과하다”고 반박했다.

그러나 이 일로 환경운동진영은 많은 국민들에게 국고 낭비의 주범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환경 의제에서도 보수담론의 생산 주체는 재계다. 대한상공회의소 산하 지속가능경영원과 전경련 산하 지속가능발전기업협의회가 주도하고 있다. 92년 리우 환경회의에서 처음 사용된 ‘지속가능한 발전’이라는 말은 이제 기업들이 ‘지속가능한 성장’이라는 뜻으로 더 많이 쓰는 말이 돼버렸다.

대기업을 배경으로 한 단단한 물적 토대, 그 토대 위에선 연구소와 보수지식인들의 정력적인 의제 생산, 언론·출판 미디어 및 정당을 통한 의제의 대중적 확산, 그리고 여론의 지배. 한국사회는 아직 이 재생산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손제민기자 jeje17@kyunghyang.com

 

 

 

[진보개혁의 위기] 3-4. 보수가 보는 보수의 강점과 약점

입력: 2006년 11월 19일 18:18:18

 
경향신문 창간 60돌 특별기획 ‘진보개혁의 위기-길 잃은 한국’ 3부를 마치며 보수인사는 보수세력의 부상과 혁신을 어떻게 보는지 진단해보는 좌담을 마련했다. 신지호 자유주의연대 대표, 유석춘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한나라당 참정치운동본부 공동본부장), 원희룡 한나라당 의원이 지난 14일 경향신문사 8층 회의실에서 만나 토론을 했다. 이 토론은 경향신문 이대근 정치·국제에디터의 사회로 진행됐다.

사회=아직 ‘보수’라 하면 부정적인 이미지가 있다. 보수에 대한 절실함이 국민들 사이에서 많은지 의심스럽다. 보수가 왜 필요한가.
유석춘 한나라당 참정치운동 본부장, 원희룡 한나라당 의원, 신지호 자유주의 연대 대표(왼쪽부터)가 지난 14일 좌담을 마친 뒤 경향신문 인근 공원에서 환담을 하고 있다. /강윤중기자

유석춘=요즘 보수가 주목받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진보의 실패와 무능이라고 본다. 우리 사회에서 과거 보수적 시각이 자리잡고 있다가 최근 정권이 2번 진보에 넘어갔지만 무능했다. 무능에 대한 사람들의 반성이랄까, 성장은 성장대로 안되고 사회는 ‘개판’이 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오면서 보수가 주목받고 있는 것 아닌가. 보수건 진보건 공통적으로 선진화를 내세우는데 아무리 봐도 역시 보수적, 우파적 성장을 해야 나눌 것도 있다는 말이 맞다는 생각이 들면서 앞으로 현 수준을 유지할 것이냐, 아래로 내려갈 거냐, 선진화할 것이냐를 생각하게 된 거라고 본다.

신지호=경제학자 하이에크가 ‘내가 보수주의자가 아닌 이유’라는 에세이를 썼는데 똑같은 심정이다. 난 보수주의자와 일정 부분 일치하는 부분이 있지만 자유주의자이지 보수주의자는 아니다. 역사적, 사상적으로 자유주의와 보수주의는 뿌리가 다르다. 난 굉장히 변화 지향적이다. 산업화와 민주화를 넘어 선진화를 이루기 위해선 자유주의 개혁을 해야 한다. 노무현 정부가 하는 개혁은 평등주의 개혁이 많다. 그런 잘못된 개혁으로는 선진화는커녕 더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

원희룡=지속적인 경제 성장을 통해 선진국에 진입하는 게 우리시대의 과제다. 그러면 그 방법이 무엇이냐. 시장의 경쟁과 민간의 창의력을 우선시하고 시장의 실패에 대해 국가가 보완해주는 시스템을 가동해야 한다. 그러려면 좌·우파를 가르는 낡은 대립보다는 생산성의 혁명을 이룰 수 있는 혁신, 그리고 민주화 시대에 수준 높아진 국민들 삶의 질에 대한 요구에 실용적이고 진취적인 방법론을 제시하는 의미에서의 새로운 보수가 필요하다. 자유와 인권, 시장 경제, 현대사의 성취, 산업화와 민주화, 국가로서의 독립과 안보를 지켜왔던 현대사 50년 전통에 대해 부정적인 부분은 극복하더라도 큰 줄기에서 연속선으로 이어간다는 긍정적 의미에서, 굳이 붙이자면 보수다.

사회=20~30대에도 보수화 바람이 불고 있고 보수의 조직화도 활발하다. 왜 보수가 부상하고 있다고 보나.

유석춘=보수가 2번 정권을 잃고 자각을 많이 했다. 보수가 아무리 열심히 하겠다고 해봐야 김대중·노무현 정권이 잘했으면 별로 관심 못받았을거다. 노무현 정부가 처음부터 못한 게 주택·부동산 정책이다. 공급을 얼마나 늘리고 수요가 어느 정도가 되는지 예측하고 대비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 국민들은 이제 더 이상 이들에게 맡겨서는 안되겠다고 자각한 것이다. 이제 ‘터닝포인트’를 넘었다. 앞으로 흥행은 우파의 것이다.

원희룡=보수는 구시대 유물처럼 보이고 부패에다, 소수 특권층의 것으로 여겨진다. 인권탄압과 권위주의에 이르기까지 벗어나야 할 구시대 유물이라는 게 정확한 표현이다. 그러나 진보의 실패는 무능함에서 왔다. 게다가 노무현 정부는 국민을 가르치고 훈계하는 듯한 태도를 보인다. 그래서 보수세력이 자각하게 된 거다. 게다가 ‘신보수’라는 깃발 때문에 도덕성, 합리성, 대안적 책임성을 자각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충분히 만족스러운 상황까지 온 것은 아니다. 국민들이 보기에 보수·진보니, 좌·우니 갈라져서 싸우는 것은 자기들끼리의 싸움으로밖에 안본다. ‘흑묘백묘’라 하지 않나. 누가 생활의 문제를 책임감있게 풀어줄 것이냐 하는 실용적 태도에서 심판하겠다는 것이다.

신지호=보수의 부상 원인에는 두가지가 겹쳐있다. 현 정부 실패로 인한 반사이익적 요소와, 자체 혁신을 통한 경쟁력 강화란 부분이 있다. 어느 요인이 더 강력하게 작용할 것인지, 답은 이미 여론조사에서 나왔다. 언젠가부터 이념 분포가 3분법으로 나오고 있다. 노무현 정부 초기와 달리 최근 중도파가 2배나 늘었다. 스스로 진보다, 보수다 하는 일관성을 가진 층은 늘지 않았다는 말이다. 보수의 부상이 아직은 반사 이득적 효과가 크다는 의미이다. 그동안 기득권으로서의 보수는 있었지만 철학과 신념으로서의 보수는 없었다. 뉴라이트라는 새로운 흐름이 바람직한 것이지만, 아직까지는 미약하다. 한나라당이 잘 해서 지지도가 높은 거라고 자만한다면 지지층은 언제든 이탈할 수 있다. 착시현상에 빠지면 안된다.

-신·구 보수의 차이는?-

사회=뉴라이트 운동이 시작됐지만, 아직 보수는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점보다는 노무현 정부 반대라는 네거티브 운동에 집중돼 있다. 그렇게 반노로 결집하게 되니 구보수와 신보수가 똘똘 뭉치게 되고, 결국 둘 간의 차이가 모호해진다.

신지호=자유주의 연대는 구(舊)우파 사람들로부터의 맹공을 받으면서도 새로운 우파의 목소리를 내놨다. 구 보수는 반공주의다. 자유가 목표이고 반공은 수단이어야 하는데 반공이 목적이 되었다. 그러나 뉴라이트는 반공주의가 아니라 자유주의다. 국가보안법 개폐 논쟁 때 구보수는 한 글자도 못고친다는 거였고 우리는 사상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는 요소, 7조 찬양 고무죄 조항은 없애자고 했다. 그거 때문에 ‘아직도 빨갛다’고 욕먹는다. 일심회 사건도 마찬가지다. 마치 386 전체, 민주화운동 전체를 주사파인 것처럼 하면 안된다. 민주화 운동 내에서 주사파적 요소와 긍정적인 부분은 분리해서 봐야 한다.

유석춘=약간 생각이 다르다.

신지호=유교수님은 정체를 분명히 밝히셔야 한다. 여전히 올드라이트인데, 자꾸 뉴라이트를 표방하시면 좀 곤란하다. 불과 1년쯤 전 MBC ‘100분 토론’에 나와 유교수랑 같이 나갔던 적이 있는데, 그때 유교수는 올드라이트 자리에 있었고 신대표는 뉴라이트 자리에 있었지않나.

사회=유교수님은 올드라이트와 뉴라이트를 어떻게 정의하고 계시나.

유석춘=대한민국의 성공 스토리를 만든 사람들이 ‘올드라이트’로 불리는 분들인데 이 분들을 제대로 평가해 드려야 한다.

신지호=잠깐!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재평가를 주도적으로 이뤄낸 것은 뉴라이트다. 내가 문제삼는 건 아직도 과거 반공주의적 접근을 하는 올드라이트를 말하는 거다.

유석춘=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 같이 일했던 사람들이 성공 스토리를 만드는 과정에서 그늘이 있었다. 그걸 개선하자는 게 내 입장인데 이를 자꾸 올드라이트라 하면 안된다. 박정희 시절의 개발모델이 있었는데 이를 업데이트, 리모델링해서 대한민국의 성공스토리를 이어가자는 거다. 그런 점에서 생각이 비슷하니까 같이 가자는 거다. 그런데 자꾸 신대표 같은 사람들이 우리를 올드라이트라고 밀쳐낸다.

신지호=유교수님은 (뉴라이트라고) 아예 커밍아웃을 하는 게 낫겠다.

유석춘=내가 생각하는 바른 길은 미국식 시장주의로 가자는 것도 아니고 노무현식 평등주의로 가자는 것도 아니다. FTA, WTO에 맞는 개혁을 하자는 것이다.

신지호=얼마 전 오세훈 서울시장이 최열씨를 인수위 공동위원장으로 한다니까 뉴라이트 전국연합에서 “최열이는 뻘거죽죽한데 오세훈 너도 그런 거 아니냐”고 지적해서 충격받았다. 뉴라이트가 뭔지 알고나 하는 말이냐. 빨갱이 타령하는 반공주의와 다를 게 없다.

유석춘=최열씨는 좌파 아니냐. 우파가 좌파보고 좌파라고 하는데 왜 뻘거죽죽하다고 하냐. 한나라당 간판 걸고 당선된 서울시장은 우파인데 왜 좌파를 데려다 쓰냐고 말할 수 있지 않나.

원희룡=뉴라이트라는 깃발이 올라왔는데 과연 뭐가 ‘뉴(New·새로운)인가’에 궁금한 부분이 있다. 세력이나 깃발과 무관하게 보수가 대한민국의 한 기둥으로서 제대로 역할하는 방향이 무엇인지를 얘기해야 한다. 기존 보수는 도덕성에서 치명적 얼룩이 져 있다. 조금 더 들어가서, 이념적 틀에 따라 적대적인 논쟁과 세력 규정을 하는 부분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신대표처럼 자유주의를 일관되게 적용해 이념이나 반공주의와 거리를 둬야 한다는 쪽, 유교수처럼 그래도 좌우는 있다는 쪽이 있다. 친북좌파라고 하는데 이는 굉장한 정치적 딱지이다. 예를 들어 김용갑 의원이 광주 6·15축전을 갖고 광주는 친북좌파가 장악한 해방구였다고 했고, 이규택 의원이 이재오 의원한테 남민전 전력 갖고 있다고 지적하는 것 말이다.

-한나라당 보는 시각은?-

특히 경제 성장의 틀에 있어 정말 민영화와 자유주의로 가야하는지, 아니면 새로운 국가의 역할이 필요한건지 이런 정책적 노선에 대해서도 보수간에 서로 다른 얘기를 하고 있는게 아닌가. 그래서 바라보는 사람들한테 ‘과연 뭐가 ‘뉴’인데?’ 라는 생각을 한다. 과거 보수는 기득권과 권력을 갖고 있었다. 그 권력에 대한 향수가 이제 분노로 이어져 사회적 에너지가 됐다. 여기에 지역주의, 엘리트주의, 반공세력이 붙어 그냥 대한민국을 끌어간다면 이게 과연 신보수인가.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권력 탈환의 차원을 넘어 생산성의 혁명과 삶의 질 향상이라는 실질적 과제에 대한 대안과 틀에 대해서 다 대답할 수 있어야 하는데 자유주의만 갖고는 부족하지 않나.

신지호=뉴라이트는 좌파를 인정한다. 20세기적 좌파, 수구좌파가 아니라 서구형 좌파를 인정한다. 영국 노동당 같은 좌파라면 적대시하지 않고 국정을 함께 풀어갈 파트너로 인정하겠다는거다.

유석춘=나도 인정한다. 여기까지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신지호=최열씨는 주사파가 아니다. ‘최열이 친북좌파니까 오세훈 너도?’ 이런 식의 접근은 뉴라이트에 맞지 않다.

유석춘=최열씨가 왜 친북좌파가 아니냐. 최열씨가 부안사태를 일으켰다. 부안에 환경운동연합이 들어가 무법천지로 만들지 않았나. 이 사건과 북한핵을 연결시켜 생각해보자. 최열과 환경운동연합은 남한이 평화적으로 사용한 핵에 대한 방사능 처리시설도 못 짓게 하는 사람들인데, 그렇다면 북한 핵실험에 대해 더 심각하게 대응해야 하지 않나. 38선 넘어 화염병이라도 던져야 하지 않나. 나도 반공주의자는 아니다. 유럽의 좌파 같은게 나와 경쟁했으면 좋겠는데 왜 우리나라엔 북한 편드는 좌파 밖에 없나. 좌파, 진보가 우리보고 극우, 수구라고 하던데 극우는 테러하는 안중근 같은 사람이지, 난 연필 하나도 못던진다.

사회=한나라당을 접근하는 자세가 신보수 사이에서도 차이가 있는 것 같다.

유석춘=한나라당이 잘해서 정권교체 하는게 우파가 사는 지름길이다. 시기의 문제인데, 신대표도 지금은 아니라 하지만 결국은 내년 대선에서 한나라당 지지할거 아니냐. 기존 정당 중 우파가 비빌 언덕이 한나라당 말고 어딨나.

신지호=지금 같은 정권이 재탄생 한다면 재앙이다. 그렇다고 현재의 한나라당이 집권하면 국민에게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이냐에 대해서도 물음표다. 전시작전통제권 얘기하면서 나라가 절단 날 것처럼 하다가 국감준비하다고 평일 골프 치는게 제정신이냐. 새로운 세력은 한나라당에 대해 마음 줄 때가 아니다. 이번에 유교수나 몇몇 사람들을 끌어들이면서 마치 한나라다이 대안 정당이 된거처럼 폼을 잡는데 그건 오히려 한나라당의 개혁을 더디게 한다.

원희룡=한나라당 내에서 나름대로는 정말로 국민이 추구하는 가치가 담긴 정당이 돼야한다고 몸부림 치는 사람으로서, 내부에서 좌절도 많이 하고 호의적이지 않은 환경에 많이 부닥친다. 때문에 외부에서의 수혈을 통해 한나라당이 개혁하는 계기가 된다면 양탄자 깔고 엎드려 도와드릴 생각이 있다. 얽히고 설킨 정치적 속박과 집단논리에 묻혀있던 목소리를 과감하게 대변해주고 밖의 올바른 목소리들을 당에 불어넣어 줄 수 있지 않을까하는 기대에서다. 그러나 ‘한나라당의 변화가 이 정도면 됐다’ 라고 해서 융합되기 시작하는 순간, ‘결국 본인들도 정치적 활동의 입지를 확보했으니까 볼 일 봤다는 얘기구나’ ‘저렇게 정치권에 진입하는구나’ 라는 실망을 줄 수가 있다. 치열하고 건강한 긴장을 유지하면서 한나라당의 체질을 바꾸겠다고 할 대 가치가 인정되는 것이지, 흡수돼버리면 신보수의 깃발까지도 사리사욕을 위해 이용했다고 욕을 두 배로 먹을 수 있다. 한나라당도 선거때마다 새 피를 받아들이는데 지금 현주소가 어떠냐. 눈물 찔끔 흘리고는 다시 원래 체질로 돌아갔다.

-보수의 대안과 전략은?-

사회=진보쪽에선 보수는 옛날 모델만 추구하기 때문에 대안이 될 수 없다고 한다. 보수에게 어떤 대안과 비전이 있나.

원희룡=우리 국민도 보수쪽 정치세력을 가질 권리가 있다. 합리적 진보와 보수가 경쟁하며 타협해 나가는 식이 되는 거다. 아파트값 치솟고 불평등 때문에 사람들 죽어가도 보수 편 못들어줄 국민이 절반이지만, 기업들 보따리 싸들고 나가지 않길 바라는 국민도 절반은 된다. 보수가 과거를 답습한다고 비판하는데 이것도 이데올로기다. 과거의 연속선상에서 점진적으로 문제를 해결해 나갈 뿐이다. 사실 국민은 차선(次善), 차악(次惡)이라도 선택해야 한다. ‘그래도 보수가 낫겠지’라는 생각이 현실 정치에서는 중요하다.

신지호=뉴라이트가 대안도 없고, 역시 박정희 모델 아니냐고 하는데 그건 잘못 본거다. 고교 평준화가 박정희 때 됐다. 뉴라이트는 이제 평준화의 틀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한다. 교육 자율화가 필요하다. 학교에는 학생 선발권을 주고, 학생에게는 학교 선택권을 주자는 것이다. 또 박정희 때는 정부 주도형이었지만 우리는 큰 시장, 작은 정부로 가자는거다.

유석춘=보수가 지향하는 가치는 큰 시장, 작은 정부, 가족의 소중함이라는 전통적 가치 부활, 강력한 국방 등 4가지로 압축된다. 이를 잘 추진하는 정권이 보수정권이고, 그것을 뉴라이트라 할 수도 있다. 신대표와 나는 알맹이 면에서 별로 차이 없다. 나 역시 좌파가 필요하다고 하는데, 그걸 반공주의로만 얘기하는 건 좀 그렇다.

사회=신보수의 목표와 전략은 무엇인가. 정권 교체인가, 아니면 보수가 다수가 되는 사회를 만들겠다는 것인가.

유석춘=단기적 목표는 2007년 정권 교체이고, 장기적으로는 보수가 진보를 파트너로 인정해도 상대적으로 우위에 설 수 있게 하는거다.

신지호=단순하게 정권교체로 접근 안한다. 2007년 대선의 의미가 좌파정권의 종식, 우파정권의 탄생이 아니다. 건국 48년체제, 산업화 63년체제, 민주화 87년 체제를 거쳐 2007년 대선은 선진화 체제가 개막되는 것이어야만 의미가 있다. 국가 선진화를 위한 우리의 비전과 전략에 부합된다면 꼭 한나라당이 아니라, 열린우리당이라도 지지할거다. 목표와 수단을 분명히 구별해야 한다. 한나라당 집권은 수단이지 그것 자체가 목표는 아니다.

원희룡=한나라당 집권 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한나라당이 왜 집권해야 하느냐, 집권시 우리 사회가 뭐가 좋아지냐, 어떤 과정을 통해 집권해야 하냐 이런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보수의 혁명, 집권 얘기하면서 당장 양도소득세 문제 나오면 1가구2주택 가진 사람들 양도세 낮추겠다, 종부세 부과 기준을 9억원으로 올리겠다 이런다. 부동산 때문에 국민들이 힘들어하는 이 상황에서 한나라당이 이런 정책 들이대는걸 어떻게 생각하는지... 우리가 만약 과거 퇴행적, 수구적이라는 혐의를 가진 채로 집권한다면 거기에서 벌어지는 지역갈등, 이념갈등, 상류층내 인맥을 둘러싼 갈등 등으로 나라가 더 엉망이 될 수도 있다. 보다 통합적, 안정적이고 국민적 신뢰가 있는 집권블록을 만들어야 한다.

-보수의 약점·과제는-

사회=보수의 최대 약점·과제는 무엇이라고 보는가.

유석춘=좌파와 비교했을 때 조직화가 덜 돼 있다. 민주노총 집회에 수천명 동원하는 건 일도 아닌데 보수단체는 몇천명 동원하려면 사력을 다해야 한다. 또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부분이 아직 많다. 정책적 쟁점에 대해 큰 노선은 있지만 각론이 없는 경우가 많다. 원희룡=집회장소에 수만명 모이는 게 중요한게 아니다. 집에 있는 수백만명의 국민들 머릿속에 아직 보수에 대한 피해의식이 가득하다. 과거에 잘못했다는 혐의가 있기 때문에 국민들은 의심의 고삐를 늦추지 않고 있다. 이 의심을 어떻게 녹일 것인가, 과거 단절과 전향이 보수에게 더 필요하다. 기득권에서 단절 했는지 안했는지도 모른 채 슬그머니 뉴라이트에 묻어가려는 이들이 너무 많다. 자꾸 이념 잣대로 편가르기 하지 말고, 우리가 더 실력이 있으니 우리 믿고 따라오라고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콘텐츠를 많이 내놔야 한다. 인기없는 정책이라도 솔직하게 제시할 부분은 제시하고 양보할 건 해야 한다.

신지호=결정적 약점은 ‘지력(知力)’이다. 앨빈 토플러는 권력의 3요소로 완력, 금력, 지력을 꼽았다. 21세기 권력이동에서는 지력이 가장 중요하다. 정당에서 지력이란 비전과 정책, 전략이다. 한나라당도, 구우파도 이게 취약하다. 한나라당은 행정수도, 국보법, 사학법 모든 문제에서 ‘하지말자’고만 했지 먼저 아젠다를 선점해본 적이 없다. 두 번째는 헌신성이다. 기싸움에서 밀린다. 가진 것 중 버릴 건 버리는 헌신성이 있어야 한다.

〈이주영·손제민기자〉

 

 

 

[진보개혁의 위기] 4-1. 진보의 10대 의제 : 조세개혁

입력: 2006년 11월 21일 17:59:08

 

“우리보고 제대로 세금내라고 하기 전에 경기가 어떤지 직접 와서 장사나 해보라 그래.” 서울이 올들어 처음으로 영하권으로 떨어지며 입동 추위가 몰아닥친 지난 6일. 청계천 공구상 거리에서 20년 가까이 장사를 해왔다는 박모씨(50)는 기자가 세금문제에 대해 취재를 하고 싶다고 하자 대번에 손사래부터 쳤다. 그는 “이 정권 들어와서 자영업자들한테 세금 거두려고 별짓 다하지만 경기가 바닥인데 누가 제대로 세금을 내려 하겠느냐”고 말을 잘랐다.
서울 강남구 일부 주민들이 종합부동산세 시행에 반발 재산세 인하를 요구하는 현수막을 내걸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그는 지난해 매출 6억2천만원, 연소득 1억2천만원으로 신고했다. 그는 “청계천 복개공사 이후 매출이 20% 줄었지만 그래도 여기서 장사하는 사람들은 이명박씨를 지지한다”고 말했다. 경기활성화에 대한 기대감도 있지만 적어도 장사하는 사람을 세금 갖고 피곤하게 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 때문이다.

그는 비닐 커버로 씌워놓은 현금영수증 단말기를 가리키며 말했다. “(세무서에서) 하도 닦달해서 들여놨지만 지금까지 딱 한번 사용했을 거야. 이 바닥에서는 아무도 저런 것 안써.”

강원도 춘천의 한 중소업체에 근무하는 강형구씨(32). 그는 올해 5월 결혼해 월평균 1백50만원의 급여로 생활하고 있다. “아파트 관리비나 1년에 2번씩(각 20만원) 나오는 자동차세는 신경을 조금 써도 솔직히 내가 얼마나 근로소득세를 내는지 몰라요. 하지만 요즘 경기가 워낙 죽어 있잖아요. 내년 대선에서 세금을 적게 걷겠다는 사람에게 귀가 기울여질 것 같습니다.” 세금을 내기 싫어하는 것은 그도 마찬가지이다. 연소득이 1억원이 넘는 박씨나 연봉 2천만원이 안되는 강씨나 세금문제에 대한 인식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이것이 바로 우리 사회에서 세금을 더 거둔다는 정책이 정치적으로 얼마나 위험한 선택인지 증명해준다.

이런 분위기의 한국에서도 증세론이 나온 적이 있다. 올해 1월18일 노무현 대통령 신년연설 때이다. 노대통령은 일자리 마련, 사회안전망 구축을 위해 ‘근본적인 해결책’이 필요함을 역설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었다. 노대통령은 세금인상 제안을 하지도 못했다.

왜 그랬는지는 올 2월 증세를 포함한 조세개혁 중장기방안을 담은 한국조세연구원의 용역안 일부가 외부에 공개되었을 때의 반응을 보면 알 수 있다. 대부분의 언론과 국민들의 반응은 격렬했다. ‘조세개혁을 한다면서 국민만 쥐어짜나.’ ‘조세개혁 명목의 가렴주구(苛斂誅求)나 다름없다.’ ‘약탈적 증세이다.’ 특히 세금문제에 관한 한 자영업자에 비해 항상 피해의식이 많은 근로소득자, 이 중에서도 면세점에 가까운 서민일수록 세금 증가에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이는 제대로 된 시민권력을 경험해보지 못한 한국 사회에서 시민들이 세금을 사회적 연대와 통합,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비용으로 인식하기보다는 자신의 부를 폭력적으로 빼앗아가는 국가통치비용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연 ‘약탈적 증세’라고 할 만큼 한국 사회 일반의 조세저항은 정당한 것일까. 통계청 가계수지 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도시근로자가구 연평균 근로소득은 3천3백62만원, 세금은 1백28만원으로 근로소득 대비 세부담률은 3.8%에 불과하다. 소득의 20~30%를 세금으로 내는 선진국에 비해 한국의 소득세 부담은 턱없이 낮은 수준이다. 전체 근로자의 50.7%가 각종 소득공제 적용을 받아 세금을 한 푼도 안내고 있다.

조세연구원 박기백 연구위원은 “근로소득자들이 실제보다 세부담을 과도하게 느끼는 것은 월급여에서 국민연금과 의료보험이 세금과 함께 빠져나가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실제 세부담만 놓고 보면 한국 근로자보다 적게 세금을 내는 나라를 지구상에서 찾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그런데도 한국인은 무조건 세금 내면 안된다는 고정관념에 빠져 있다.

정부가 80명의 조세학자들을 동원해 1년 동안 공을 들여온 조세개혁안은 유야무야되고 있는 것도 그런 인식 때문이다. 2월로 예정됐던 공청회 일정이 5월 지방선거를 이유로, 다시 7월 재·보선을 이유로 연기를 거듭하다 이제는 다음 정권의 과제로 넘어갈 운명에 처하게 됐다. 양극화 해소와 경기활성화 양쪽 모두에서 신뢰를 잃어버린 참여정부가 세금에 관한 고정관념을 깨기에는 역부족일 수밖에 없다. 게다가 참여정부 스스로 조세개혁에서 일관성을 유지하지도 못했다. 정부는 2003년과 2004년에 법인세와 소득세를 각각 2%와 1% 포인트 인하한 바 있다. 세금 인하에도 불구하고 경기가 살아나지 않으면서 4조원이 넘는 세수 부족사태가 발생하자 결국은 2005년부터 ‘소주세율 인상’ ‘담뱃값 인상’ 등이 시도됐다. 하지만 술이나 담배에 붙는 간접세는 서민이나 부자나 할것없이 동일한 세율이 적용된다. 소득분배구조의 왜곡을 가져올 수밖에 없다. 참여정부가 입으로는 양극화 해소를 외치면서 실제 조세개혁정책에서는 정반대의 길로 간 것이다. 민주노동당 심상정 의원은 “양극화 해소를 위해 직접세를 강화해 복지세수를 늘려야 하는데도 임기 동안 두 차례나 세율 인하를 단행한 노무현 대통령은 양극화 해소를 위한 조세개혁을 얘기할 자격이 없다”고 공박했다.

하지만 민주노동당도 한국 사회 전반에 깔린 왜곡된 세금인식에 정면으로 부딪쳐 보려는 노력이 부족하기는 마찬가지다. 민주노동당은 심상정 의원 대표발의로 지난해말 소득세법 개정안을 제출하면서 2004년 소득세 인하로 왜곡된 소득분배구조를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며 과표구간별로 1~3%포인트씩 세율을 차등인상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을 폈다. 과표구간 1천만원 이하는 4인가족 기준으로 대략 연봉 2천만~3천만원, 과표구간 1천만원 초과~4천만원은 연봉 3천만~6천만원 이상 중상위 근로소득계층들로 ‘사회적 연대개념’에서 볼 때 저소득근로자의 복지를 위해 세금을 더 내야 하는 계층이다. 그럼에도 민주노동당의 소득세법은 이들에게는 2004년 이전 수준이나 그 이하의 세금부담만 지도록 하고 있다. ‘증세’의 공론화가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는 사례라 할 수 있다. 민주노총 김태연 정책실장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와 비교할 때 턱없이 낮은 소득세율과 복지지출 비중을 고려하면 노동자부터 세금을 더 걷자는 주장을 내놔야 하는데 머리로 생각한 것을 입으로 옮기기가 쉽지 않다”고 토로했다.

이처럼 보수나 진보 가릴것없이 ‘고양이 목에 방울달기’ 식으로 ‘증세’를 금기시하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 1997년 60조원에 불과하던 국가채무가 내년에는 3백조원(3백2조9천억원)이 넘을 것으로 보인다. 흔히 우리 사회의 재정적자 문제는 ‘폭탄돌리기’에 비유된다. 전문가들은 65세 이상 인구비중이 20%가 넘어 우리 사회가 초고령 사회로 접어드는 2020년쯤을 재정이 버틸 수 있는 한계점으로 보고 있다. 급속한 고령화로 자연스럽게 증가하는 의료, 연금 등 복지지출 수요만도 재정으로 감당할 수 없는 사태가 임박했다는 것이다.

KDI 문형표 연구위원은 “프랑스의 경우 고령화 사회에서 초고령 사회로 접어드는 데 155년이 걸렸지만 우리나라는 불과 25년밖에 안 걸린다”며 “선진국은 서서히 제도를 변화시킬 시간적 여유가 있었지만 우리는 지금 준비하지 않으면 고령화 폭탄을 맞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태수 현도사회복지대 교수는 “현재처럼 국채를 발행하거나 경제개발예산을 줄여 복지지출에 필요한 예산을 메우는 방법으로는 2020년이 아니라 향후 4~5년 안에 근본적인 한계에 봉착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재정적자가 이처럼 심각한 상황인데도 한나라당은 소득세율·법인세율 2%, 3% 포인트 인하 카드를 내놓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접근이 큰 사회적 호응을 얻고 있다는 점이다. 동대문시장에서 의류도매상을 하는 정모씨(45)는 “요즘 상인들의 70%는 적자상태에서 가격경쟁이 점점 심해지면서 마진율이 5%도 채 안되는데 단 1%라도 세금을 깎아준다고 하면 누가 싫어하겠냐”고 말했다. 국민들이 증세보다 감세에 쉽게 동의하는 것은 국민혈세가 정부나 공무원들에 의해 제대로 쓰여지기보다 상당수 비효율적인 사업에 낭비되고 있고, 피부로 느낄 수 있는 복지혜택이 별로 없다는 데도 원인이 있다.

한국신용평가정보에 근무하는 정종규씨(40)는 “국가적으로 봐서 증세가 필요하다는 데 동의하는 편이지만 솔직히 공무원들이 내가 내는 세금을 제대로 쓰고 있다는 데 믿음이 안 간다”고 말했다.

CJ홈쇼핑 이창형 과장(36)은 “대출이자에 아이 2명 앞으로 들어가는 사교육비(1백50만원) 등을 빼고 나면 빠듯하게 사는 형편인데 한해에 상여금까지 포함해 소득의 7~8%인 5백만원정도가 세금으로 빠져나간다”며 “별로 돌아오는 혜택은 없는 것 같고 세금 내는 게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결국 국민들의 조세저항을 누그러뜨리고 장기적인 균형재정 달성을 위해서는 주납세자인 중산층이 체감할 수 있는 보육, 교육, 의료 측면에서 복지전달체계의 획기적 개선이 필요하다.

최영태 참여연대 조세개혁센터 소장(회계사)은 “증세에 대해 동의를 얻으려면 세금 덕분에 누리는 복지혜택을 확실히 보여줘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근로소득자로부터 세금을 더 거두려면 고소득 전문직 세금이 2배 이상 늘었다든지, 특정계층의 비과세·감면 규모를 3분의 1로 축소했다는 구체적인 데이터의 제시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세금을 더 거둬서 사회복지예산을 확대하면 경제성장을 저해한다는 편향된 사고에서도 벗어날 필요가 있다. 올해 초 조세개혁특위위원장을 사임한 곽태원 서강대 교수는 “지금은 성장이 중요한데 정부가 세금을 걷어 양극화 해소용으로만 쓰려는 데 문제가 있다”며 복지를 강조하는 조세개혁안에 정면으로 문제를 제기한 바 있다. 이는 기본적으로 사회복지예산은 비생산적 지출로 적을수록 성장에 도움이 된다는 판단을 바탕에 깔고 있다. 하지만 중앙대 김연명 교수는 “복지정책이 경제성장의 발목을 잡는 게 아니라 지금은 오히려 복지가 부족해서 경제성장의 발목을 잡고 있다”고 주장한다. 개발독재 시기 이래 성장위주정책을 펴온 결과 주거, 교육, 의료, 아동보육 등의 부담을 가정에 전가했기 때문에 여성의 경제활동이 제약을 받고 출산율도 하락해 성장잠재력을 훼손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독일과의 국경도시인 프랑스 스트라스부르에서 딸을 데리고 남편과 함께 유학생활을 하다 2004년 귀국한 조의행씨(38)는 독어와 불어를 동시에 구사할 줄 아는 보기 드문 어학 특기자다. 그럼에도 조씨는 최근 다니던 벤처의료기기회사를 계속 다닐지를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다. 조씨는 “최근 회사에서 어학 특기를 살려 해외영업부에 배치하겠다는 제의가 왔지만 초등학교에 다니는 딸아이가 너무 오랫동안 혼자서 방치돼 있는 게 마음에 걸린다”며 “귀국할 때 각오는 했지만 프랑스에 있을 때와 너무 다른 사회복지시스템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복지의 문제가 단순히 장애인, 저소득층에 대한 시혜의 차원이 아니라 성장동력의 공급 확대와도 직결된 문제인 것이다.

대기업이 항상 투자의 걸림돌로 거론하는 ‘노동경직성’도 주거, 의료, 교육 등 공공부문이 담당해야 할 일을 개인에게 지나치게 짐을 지워놓은 데 원인이 있다. 김연명 교수는 “복지정책이 너무 부실해 노동시장에서 퇴출되는 즉시 가계의 생존을 위협받는 상황에서는 합리적 수준의 산업구조조정조차 노동자들의 극단적 저항을 불러올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한국은 OECD 국가 중 최하위의 사회지출비를 기록하고 있다. 2001년 기준으로 복지후진국으로 일컬어지는 미국(14.8%)과 일본(16.9%)의 절반, OECD 평균(22.5%)의 3분의 1에 불과하다. 한국 경제발전 정도에 비춰 복지예산이 결코 적지 않다는 반론도 나온다. 하지만 한국의 사회복지는 서구의 1950년대 수준이다. OECD 국가들이 1인당 1만달러를 기록할 당시의 사회복지지출 규모를 보면 일본 10.4%(84년), 미국 13.6%(78년), 영국 20.5%(87년), 스웨덴 24.5%(77년) 등 국민소득 2만달러를 눈앞에 둔 한국의 2005년 사회복지지출 비중(9.8%)을 이미 넘어섰다. GDP 대비 조세부담률(19.5%)이나 사회보험금을 포함한 국민부담률(25.3%)도 OECD 회원국 평균치인 26.5%와 35.9%를 크게 밑돌고 있다. 조세부담률, 국민부담률을 따지기에 앞서 지난해 2월 11평 임대주택에서 딸 2명과 함께 월 67만원의 생계보조금으로 살다가 목을 매 자살한 1급 장애인의 비극이 대한민국 복지의 현주소다.

정부는 ‘비전 2030’을 통해 복지지출 수준을 2020년에는 미·일의 2001년 수준, 2030년에는 선진국의 2001년 평균수준으로 끌어올리겠다고 제시했다. 하지만 이를 위해 필요한 1천1백조원의 재원 마련 방법에 대해서는 ‘국민적 합의’라는 말로 얼버무리고 있다. 1천1백조원이 천문학적인 금액으로 느껴지지만 물가상승분을 제거한 현재가치로 환산하면 연간 16조원의 세금을 더 거두면 된다. 방법은 사회적 연대와 통합을 위해 세금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것이다. 우선 전체 세수의 15%에 불과한 개인소득세를 점차 선진국 평균수준(20~40%)으로 높여 나가는 한편 고소득층뿐 아니라 중산층이나 서민근로계층도 세금 인상에 공동노력할 필요가 있다. 특히 특정계층에게만 이익이 돌아가는 연간 20조원대의 비과세·감면의 과감한 수술이 필요하다. 의사, 변호사 등 고소득 자영업자에 대한 소득파악 강화를 위해 차명계좌를 금지하고 과징금을 부과하는 방안도 검토해야 한다. 물가상승에도 불구하고 96년부터 10년째 연간 4천만원으로 고정된 금융종합소득 과세기준를 현실화하는 방안과 소득세 포괄주의 도입, 상장주식 양도차익 과세도 적극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최영태 참여연대 조세개혁센터 소장은 “현정권 내에서는 세율 인상은 힘들더라도 특정 이익집단과 연결된 비과세·감면이 더 늘어나는 것은 막아야 한다”고 말했다. 씨티그룹 오석태 이코노미스트는 “한국의 재정여건은 세금을 올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며 “반대한다면 반대하는 쪽에서 20년 플랜을 짜와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강진구기자 kangjk@kyunghyang.com〉

◇ 盧대통령의 1·18연설

“일자리 대책, 사회안전망 구축, 그리고 미래 대책을 제대로 해나가기 위해서는 많은 재원이 필요합니다. 2030년까지 장기재정계획을 세워보면 아무리 재정의 효율성을 높이고 지출구조를 바꾸더라도 재원이 절대적으로 부족합니다. 미래를 위해서 해결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라면, 어디선가 이 재원을 조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럼에도 오히려 감세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론조사를 해보아도 세금을 올리자는 사람은 없습니다. 정부는 이미 톱다운 예산을 도입해서 예산 절약과 구조조정을 강력히 추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탈세를 막기 위해 거래의 투명성을 높여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지 않으면 안 됩니다.”

◇ 조세개혁 중장기방안

올 2월 공개된 정부의 중장기조세개혁 용역안은 근로소득공제를 대폭 삭감하고 면세점(4인가족 기준 1천5백80만원)을 고정시켜 근로소득자의 50% 수준에 불과한 과세자비율을 70%까지 끌어올리는 것이다. 학원 등 부가가치세 면세대상도 축소하고 간이과세대상 기준(연간매출액 4천8백만원)과 납부 면제자(2천4백만원) 기준을 고정시켜 납세자 비율을 점차 늘릴 것을 요구했다. 상장주식 양도차익 및 금융종합소득과세대상(연간 4천만원)의 확대도 포함됐다. 경기진작을 이유로 인하했던 소득세율의 경우 1% 재인상을 주장했으나 법인세 인상은 국가간 조세 경쟁을 이유로 반대했다.

◇ 정부의 법인세 인하과정

참여정부는 2003년말 법인세율을 2% 포인트 인하했다. 이는 참여정부의 만성적인 세수 부족의 최대 원인으로 지목된다. 2003년 9월 정부가 국회에 세제개편안을 제출할 때만 해도 법인세 인하는 고려하지 않았다. 하지만 외환위기 이후 처음으로 그해 2·4분기와 3·4분기 연속해서 기업투자 감소세가 나타나자 전경련을 중심으로 법인세 인하 요구가 거세졌다. 국회 과반 의석을 보유한 한나라당은 ‘10·29 부동산대책’에 따른 보유세 강화에 반대하면서 법인세 인하 카드를 들고 나왔고, 여당(통합신당)은 내부 논란끝에 예산안 처리 등 ‘빅딜’을 위해 수용했다.

◇ 검증되지 않은 감세론

세금을 인하해 고소득층이 지갑을 열게 하고 기업의 투자욕구를 자극함으로써 경기가 활성화되어야 저소득층에게 도움이 돌아간다는 주장. 재정지출과 복지를 늘리는 분배 위주의 정책보다 성장을 촉진함으로써 사회 전체의 파이를 키우자는 견해이다. 경제위기를 ‘시장’을 통해 해결하자는 것으로 ‘작은 정부론’과 연결된다. 미국의 ‘레이거노믹스’가 대표적인 감세론에 기초한 정책이다. 그러나 검증되지 않은 이론이다.

 

 

[진보개혁의 위기] 사회보육땐 가계부담 75% 감소

입력: 2006년 11월 21일 18:00:03

 
경기도 과천에 사는 허경칠(38·안양 범계중), 용인 수지에 살고 있는 최하연(34·용인 서원고)씨는 함께 공부하다 2002년에 나란히 교원임용시험에 합격한 맞벌이 여교사다.

각각 초등학교 3학년 아들과 5살난 딸을 1명씩 두고 있다. 월평균 급여는 실수령액 기준으로 2백만원(상여금 제외)을 조금 넘는다. 하지만 아이 앞으로 들어가는 기본 양육비를 제외하고 나면 가처분소득에서 2배 정도 차이가 발생한다. 용인 수지에 사는 최교사는 아이를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30분까지 종일반 유치원에 보내는 데 기본보육료로 50만원, 영어·미술 등 두 과목 특강형식으로 18만원 등 도합 68만원이 든다.

여기에 오전 7시부터 유치원이 문을 여는 9시까지 아이를 맡아줄 사람을 쓰는 데 20만원이 추가로 든다. 최씨는 “용인 수지에는 구립 유치원이 없어서 버스로 10분 거리나 떨어진 사립에 맡길 수밖에 없는데 이것저것 자질구레한 비용까지 포함하면 월급의 절반(1백만원)가량이 아이 1명의 양육비용으로 나가는 것 같다”고 말했다. 과천에 사는 허교사의 사정은 다르다. 이 지역 초등학교가 전부 무료급식을 하는 데다 방과후에는 시민회관으로 아이를 보내 퇴근전까지 시간을 보내게 하고 있다. 아이는 여기에서 태권도(2만8천원), 동양화(무료), 국악(5,000원), 천자문(1만원) 등 4개 강좌를 월 4만3천원의 수강료만 내고 배우고 있다. 거의 선진국형 복지를 누리고 있는 것이다.

허씨는 둘째 아이를 낳더라도 걸어서 5~10분 거리에 시립 어린이집이 6곳이나 있어 큰 걱정이 안된다. 최교사가 과천의 시립 어린이집을 이용한다면 월 15만8천원에 오전 7시30분부터 저녁 7시30분까지 추가비용 없이, 밤 9시까지는 시간당 1,700원에 5살난 딸아이를 맡길 수 있다.

두 사람의 보육환경이 이처럼 큰 격차가 나는 것은 과천은 한해 6백79억원(2006년)의 마권세 수입을 주민복지에 지출할 수 있는 여력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가구당 사회복지지출비에서 과천(2만2천가구)은 3백55만원, 용인(27만7천가구)은 51만원으로 7배나 차이가 난다. 용인시가 과천 수준의 복지를 제공하기 위해서는 가구당 연간 3백4만원씩(월 25만4천원)을 추가로 세금으로 내야 한다. 적지 않은 부담이지만 최교사가 아이 앞으로 연간 1천2백만원(월 1백만원)의 양육비를 지불하는 것을 감안하면 결코 많은 액수는 아니다.

〈강진구기자〉

 

 

 

[진보개혁의 위기] 4-2. 진보의 10대 의제 : 부동산

입력: 2006년 11월 26일 16:52:42

 
지난 8월 판교신도시 2차 청약접수장소인 성남시 탄천종합운동장 신청접수처가 몰려든 청약신청자들로 붐비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국내 유명 건설회사에 10년 이상을 함께 근무했던 박모씨(52)와 김모씨(49). 두 사람은 집 하나 때문에 전혀 다른 인생을 살고 있다. 1992년 결혼한 김씨는 93년 서울 도곡동에 25평 아파트를 장만했다. 이후 아이가 생겨 좀더 큰 집으로 이사가기 위해 95년 수서동에 32평 아파트를 1억7천만원에 분양받았다. 그러나 외환위기가 터지면서 분양받은 집은 시세가 1억2천만원까지 떨어졌다. 도곡동 아파트를 담보로 맡겨 빌린 돈은 금리가 살인적으로 올랐다. 월급의 거의 대부분을 이자 갚는 데 써야 했다.

빚에 신물이 난 김씨는 2000년 두 집을 다 팔고 빚을 갚았다. 그리고 서초동 삼풍아파트에 전세로 들어갔다. 전세를 살았지만, 빚을 다 갚았다는 홀가분함이 너무 좋았다. 그러나 다음해 그는 구조조정을 당했다. 40대 초반의 나이. 재취업은 어려웠다. 학원강사라도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경기 군포시 산본의 5천만원 전셋집으로 옮겼다. 이후 집값이 오르기 시작했다. 집을 살까 고민을 했다. 그러나 빚을 내 집을 샀다가 당한 고통이 떠올랐다. 그리고 집값을 잡겠다는 정부를 믿기로 하고, 집을 사지 않기로 했다.

그런데 집값을 잡을 것이라고 확신했던 노무현 대통령이 탄핵을 당할 위기에 처했다. 그는 광화문으로 달려갔다. 촛불시위에 동참했다.

“만약 그때 집을 샀으면 어떻게 됐을까요. 아마 15억원대의 자산가가 되어 있을 겁니다. 그 때 집값이 너무 비정상적이라고 생각했어요. 저렇게 오르다 또 떨어지면 어떻게 하나 겁도 났고요. 그래서인지 정부를 너무 믿었어요. 그러나 집 한 칸 장만하지 못한 내가 바보지, 누굴 원망하겠어요.”

반면 박씨는 다르다. 그는 대치동 주공아파트 18평을 94년에 구입했다. 그런데 이 아파트가 재건축으로 대치 동부센트레빌로 탈바꿈했다. 박씨는 건설회사 현장소장이라는 이유 때문에 재건축조합장이 됐다. 재건축을 하면서 집값도 오르고 조합장이라며 활동비도 생기자 그는 2001년 사표를 던지고 공인중개사 공부를 했다. 2002년 압구정동에 중개업소를 차린 박씨는 재건축 공사 때문에 이사간 청실아파트 35평형이 투자가치가 있다고 보고 이를 4억원에 샀다. 또 중개업소 근처에 있는 한양아파트 39평형도 7억원을 주고 구입했다. 집을 사는 데 자기 돈은 거의 필요없었다. 집을 담보로 내세우면 은행에서 돈빌리기는 너무 쉬웠다. 현재 그가 사놓은 아파트 가격만 동부센트레빌 32억원, 청실아파트 12억원, 한양아파트 15억원으로 60억원에 가깝다.

‘정부 덕’에 부자가 된 박씨는 정부에 고마워 할까. 그는 김씨만큼 정부에 불만이 많다. “이 정부는 강남 사람들을 적으로 봐요. 세금 꼬박꼬박 내고 사는데 모두 투기꾼으로 몰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뭐 집값 올리라고 부채질했나요.”

결혼 6년차로 맞벌이를 하고 있는 정금희씨(36·경기 부천)는 초등학교 교사이다. 연구원인 남편의 수입과 합치면 연봉이 7천만원에 이르는 중산층이다. 재작년 급한 마음에 과천 재건축 아파트를 사놓았지만 이자 부담을 이기지 못하고 지난해 집을 팔았다. 그런데 과천 집값은 최근 한달 새 1억원이나 올랐다.

중앙대 신광영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서울을 5개 권역으로 나눴을 때 강남지역(강남, 서초, 송파, 강동구)의 가구당 소득(월 2백98만원)은 평균(월 2백85만원)보다 크게 높지는 않았다. 그러나 강남지역의 가구당 부동산 재산 규모는 3억1천4백12만원으로 타지역보다 70%까지 많았다. 신교수는 “2002년 서울시정개발연구원의 표본자료로 분석했기 때문에 현재는 그 차이가 훨씬 클 것”이라고 내다봤다.

경기 성남시 중원구에 사는 최현진씨(37). 그는 판교에 모든 희망을 걸었다. 그러나 분양가가 올라가고 분양 일정이 늦춰졌다. 그 사이 자신이 사는 성남뿐 아니라 직장이 있는 분당, 인근 용인 집값이 천정부지로 뛰었다. 아내는 판교 경쟁률이 높을 테니 판교 청약 대신 조그만 집이라도 사놔야 되는 거 아니냐고 했다. 귀기울이지 않았다. 그 판교에서 떨어졌다. 그리고 지금이라도 집을 사야겠다고 성남, 용인, 광주, 하남 등을 임신한 아내와 함께 돌아다녔다. “집값이 뛴다기에 조그만 아파트라도 마련하려고 돌아다녀봤지만 내 소득으로는 강북의 다 쓰러져가는 아파트도 살 수 없었어요. 그동안 한눈팔지 않고 회사일만 열심히 한 결과가 이렇게 세입자 신세입니다.”

중소기업에서 직장생활 13년차인 허승범씨(38·서울 염창동). “월급 2백50만원 중 1백50만원을 저축해요. 그 중 2004년부터 2년 동안 월 불입액 25만원씩 넣은 적금통장이 만기가 됐다기에 은행에 갔더니 손에 쥔 돈은 5백25만원 정도였죠. 차라리 이 돈을 저금하지 않고 2년전 용인에 집을 산 친구처럼 은행돈을 굴려 집을 샀다면 최소한 5천만원을 벌었을 거에요. 열심히 아끼고 저축해도 집 한 칸 장만하지 못하는 세상이 정상입니까.” 허씨는 세상으로부터 배신당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도 전략을 바꾸었다. 저금을 모두 해약하고 은행 융자금을 더해 집을 장만할 생각이다.

대한주택공사 산하 주택도시연구원 지규현 박사의 분석에 따르면 근로자가구의 월 평균소득(3백22만원)을 기준으로 대출받아 구입할 수 있는 적정 주택구입 가격은 3억3천6백61만원이다. 시세의 60~80%에 불과한 정부의 공시가격으로도 6억원이 넘는 강남의 30평형대 아파트를 사려면 월 7백만원 정도를 벌어야 가능하다. 시세대로 집을 사려면 월소득이 1천만원이라도 부족할 판이다. 이 때문에 ‘로또 당첨’이나 부모에게서 받은 재산이 없는 한 ‘자수성가’는 불가능하다. 부동산뱅크가 지난해 월평균 소득과 금리, 아파트값 등을 기초로 분석한 결과, 서울에서 대출을 받지 않고 32평형을 마련하는 데 27년5개월이 걸리는 것으로 나왔다.

서울 강남구 개포우성 2차 45평형은 올초 17억원에서 11월 초 현재 27억원을 넘었다. 목동 5단지 35평형은 같은 기간 7억9천만원에서 13억2천만원으로 올랐다. 그동안 집값 상승이 이뤄지지 않던 강북과 수도권 외곽도 마찬가지다. 노원구 중계동 청구3차 32평형은 올초 3억6천만원에서 11월 4억7천만원으로, 구리시 교문동 토평동양 45평형은 4억5천만원에서 7억2천만원으로 올랐다. 또 상위 5%가 토지의 82%를 소유하고 있다. 이것이 “하늘이 두쪽 나도 집값만은 잡겠다”는 참여정부의 성적표이다.

판교신도시 임대주택에 당첨된 한 시민이 너무 높은 임대료에 망연자실해 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이렇게 열심히 해도 서민들이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는데 삶의 질 개선 운운하던 진보·개혁 세력들은 이 지경이 되도록 어디서 무엇을 한 것일까.

“부동산 자본이 기득권 세력에 의해 독점되고 총자본이 건설과 토지에 집중되고 있지만 오히려 신도시 용적률 상향조정 등 퇴보적 개발방식으로 부동산의 소유 독점을 심화시키고 있어요. 그러나 보수세력은 ‘공급을 늘리자, 신도시를 건설하자’ 하면서 이를 시장의 논리로 둔갑시키고 있습니다. 반면 진보세력은 부동산이나 토지에 대한 심층적인 연구가 없어요. 그러다 보니 심각성을 모르고 제대로 된 대안도 내놓지 못하고 있습니다.”(김용창 세종사이버대 교수)

정부와 열린우리당은 여전히 부동산 문제에 대해 갈팡질팡이다. 총선공약인 원가공개를 실현시키지 못했다. 5·31 지방선거 패배 이후 종합부동산세 완화로 비난을 받고도 최근에 또다시 종부세 기준을 9억원 이상으로 상향조정한다고 하다가 취소하는 등 우왕좌왕이다. 유일한 진보정당이라는 민주노동당의 사정도 마찬가지다. 온 나라가 부동산 문제로 들썩거릴 때도 “투기 무관심당”이란 혹평을 받았다. 민노당이 부동산 문제 해결을 위해 한 것은 거의 없다. 있다면 지난해 8·31대책을 전후로 ‘부동산문제 TF’를 임시 운영한 것이 전부이다. 현재 부동산 문제를 전담하는 기구도 없다. 당의 경제민주화본부가 내는 논평이 부동산 활동의 대부분이다. 그 내용이라는 것도 1년전이나 지금이나 비슷하다. 관심과 연구가 부족했다는 얘기다. 원가공개를 내세우고 있지만, 입법화하는 활동은 찾기 어렵다.

민주노총 대변인 출신인 손낙구 심상정의원 보좌관의 말이다. “집값이 오르면 얼마나 열불납니까. 그런데 명색이 서민정당인 민노당이 당지도부부터 당원까지 관심은 딴 데 있어요. 부동산 문제에 대해서는 그냥 멍한 상태죠. ‘무관심당’이 아니라 ‘무심당’이에요. 전대협·한총련 출신 그룹은 통일운동, 민주노총 출신 그룹은 기업별 노사활동에 주력하지 부동산은 관심 밖입니다. 한국의 진보는 아직도 추억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요.”

시민단체도 마찬가지다. 그나마 경실련의 활동이 눈에 띈다. 경실련은 2004년부터 ‘다시 경제정의를 세우자’는 목표로 부동산 문제에 집중했다. 최근에는 10만 서포터즈 운동을 통해, 직접 거리로 나서는 등 부동산 대란 와중에서 이슈를 생산하며 정부를 끊임없이 압박하고 있다. 그러나 후분양제나 전면적인 원가공개, 신도시내 완전 임대주택 공급 등의 대안은 아직 완전한 공감대를 얻어내지는 못하고 있다.

최대 시민단체인 참여연대의 부동산분야 활동은 ‘백화점식 운동의 구색 맞추기’라는 지적을 받고 있다. 참여연대 안에는 부동산 문제를 전담하는 기구도 없다. ‘분양가 TFT’란 회의체를 통해 원가공개와 철저한 검증 등의 대안을 제시했지만 ‘재벌개혁’만큼 이슈화시키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경실련과의 경쟁을 의식, 경실련의 제안에 물타기를 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2004년 분양원가 공개요구가 뜨겁자 정부는 학계와 업계, 시민단체 등으로 구성된 주택공급제도검토위원회를 만들어 이를 논의한 바 있다. 여기에 참여연대도 참여했는데, 이 위원회는 분양원가 공개가 사회적 혼란을 유발할 가능성이 높다며 분양가상한제 적용에 손을 들어줬다. 참여연대는 지금 원가공개를 주장하고 있다.

토지정의시민연대가 뒤늦게 조직됐지만 경실련이나 참여연대의 그늘에 가려 큰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 토지보유세 강화란 명제에만 집중, 활동영역이 너무 제한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민주노총은 조합원의 근로조건이 조금만 위협받아도 파업을 운운하지만 정작 집값 상승으로 노동자의 삶이 나락에 빠져드는데도 그 흔한 성명 하나 낸 적이 없다. “몇 번 민주노총 고위 간부들을 만나 부동산 문제에 대해 설명한 적이 있어요. 그런데 다들 ‘너무 어렵다’는 표정만 짓더군요. 정말 어려워서 침묵하는 건지, 보수언론이 말하듯 가난한 노동자들의 실상을 모르고 이념적 구호만 외치는 ‘귀족노동자’여서 입을 닫는 것인지 알 길이 없었습니다.”(김헌동 본부장)

고영근 토지정의시민연대 정책부장은 “민중연대 등 소위 진보단체에서는 자유무역협정(FTA), 재벌 문제 등 정치적 이슈에 매달리고 있다”면서 “그러나 부동산 문제에 대한 외면은 그들이 대변해야 할 사람들의 삶을 외면하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말했다. 홍종학 경원대 교수는 “진보·개혁 세력은 박정희식 개발에서 정치적인 대안만을 강구하면 시장을 통제할 수 있다고 봤다”면서 “그러나 자본주의의 힘은 몰랐다”고 지적했다.
판교신도시가 들어설 예정인 경기 성남 분당구 일원.

 

 

[진보개혁의 위기] ‘개발 5적’ 집값 거품 먹고 산다

입력: 2006년 11월 26일 16:53:34

 

호주의 동북아 전문가 개번 매코맥은 1996년 현대 일본을 ‘토건국가’로 정의했다. 경제성장 명목으로 대형 건설사업을 하고, 여기서 생기는 눈먼 돈을 관료, 지방토호, 토건업체들이 나눠먹으며 개발에 필요한 여론을 조성하고 자본을 동원하는 구조를 말한다. 최근 이 개념이 한국에도 적용되고 있다. 많은 전문가들은 한국에 대해 일본을 능가하는 토건국가로 간주한다. 참여정부 역시 신도시 건설, 혁신도시, 기업도시, 행정도시, 경제자유구역 등 박정희식 개발에 못지않은 건축·토목 공사를 경제정책의 근간으로 삼고 있다는 점이 그 근거이다. 군사정권의 개발이 국가 주도였다면, 민주정부들의 개발은 신자유주의에 근거한 신개발주의라는 분석도 있다.

김헌동 경실련 아파트값거품빼기 운동본부장도 저서 ‘대한민국은 부동산 공화국이다?’에서 부동산 문제는 ‘개발 5적’이 이끄는 토건국가이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토건국가에서는 집값 하락을 원하지 않는 강한 기득권 구조가 있는데 ‘개발 5적’이란 것이다.

“집값이 폭등해 국민들이 아우성을 쳐도 건설업체의 폭리구조가 바뀌지 않는 데는 이유가 있어요. 국민보다는 업계의 이해를 대변하는 재정경제부와 건설교통부의 관료, 건설업계의 검은 돈을 챙기고 지역개발 사업에 개입하는 정치인, 독자의 알 권리보다는 부동산 광고매출에 의존하는 언론, 정부와 업계로부터 각종 용역을 받는 연구집단이 단단한 이익구조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실제 정부는 집값 상승이 공급 부족 때문이라면서 수천만평의 땅을 아파트 공사장으로 바꾼다. 건설업계 연구기관과 많은 대학 교수들은 집값에 거품이 끼었다고 단정하기 어렵다면서 강남 수요를 만족시킬 만한 고급 주거단지가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언론은 이를 받아 정부 규제가 오히려 집값 상승을 부추긴다면서 투기수요를 잡기 위한 세제 및 규제의 완화를 요구한다. 정치권은 이를 근거로 정책 방향을 바꾸라고 정부를 압박한다.

청와대도 상당 부분 이런 개발동맹이 집값을 부추긴다는 점을 인정한다. ‘청와대 브리핑’이 부동산 정책의 실패를 일부 건설업체·금융기관·부동산중개업자·부동산 언론 등 정부정책에 대항하는 ‘세력’ 때문이라고 강조한 것이 좋은 예이다. 다만 정부 자신이 가장 핵심적인 ‘부동산 세력’이란 점은 인정하지 않고 있다. 사실 관료와 기업간의 유착은 이미 ‘공공연한 비밀’이다.

건설 관련 협회의 한 간부는 “아무리 ‘낙하산 시비’가 붙어도 대부분 관료들이 퇴직 이후 협회나 산하 기관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관료조직의 숨통을 열어두려는 정부, 이들의 인맥과 영향력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시키려는 업계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건교부의 경우 최재덕 전 차관은 건설협회 산하 건설산업연구원장이 됐고, 최종수 전 부산지방국도관리청장은 건설협회 부회장, 김일중 전 차관보는 전문건설협회 이사장, 박성표 기획관리실장은 주택보증 사장이 됐다.

홍종학 경원대 교수는 “공급 확대책을 내세운 정부의 11·15대책은 건설업체의 논리를 대변하는 건설산업연구원이 한달전에 펴낸 ‘민간아파트 분양원가 공개의 타당성 검토 및 분양가 인하를 위한 정책대안’이란 보고서의 핵심 내용을 그대로 옮겨놓고 있다”면서 “정책이 민간의 이익에 따라 입안되고 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례”라고 말했다.

〈박재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