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발오적

위기는 곧 기회다.

토건종식3 2007. 5. 7. 08:55
 

[진보개혁의 위기] 1-1. 무능한 진보개혁 세력

입력: 2006년 09월 13일 18:16:33

 
“매형은 처음에 어엿한 회사원이었습니다. 그러다 1997년 잡화점을 열었습니다. 누나가 쌍둥이 딸을 낳고, 애들을 키우기 위해 영어학원 강사 일을 그만둔 뒤였죠. 그러나 외환위기 이후 잡화점 장사가 잘 되지 않았어요. 그래서 매형은 살고있던 잠실 주공아파트를 팔아 누나에게 피부마사지실을 차려주고 운전연수 일을 시작했습니다. 매형은 여성전용 마사지실에 함께 사는 게 마뜩찮아 1년전부터 고시원에서 살았어요. 쌍둥이 딸들은 전남 구례에 있는 외가에 보냈죠. 워낙 낙천적이라 기껏 한달에 1백50만원을 버는 운전연수 일을 하면서도 언젠가 가족과 한 집에서 살겠다는 희망뿐이었는데….”

지난 7월17일 서울 잠실의 고시원 화재때 숨진 손모씨(42)의 사연이다. 처남이 빈소에서 풀어낸 매형의 곡절은 ‘생계형 기러기 아빠’의 삶의 전형이었다. “그때 학원만 그만두지 않았어도…”라고 오열했던 아내 이모씨(42)는 화재 현장에서 찾은 그의 휴대폰을 씻어 귀중품함에 보관하고, 지금도 곧잘 두통약을 먹고 잠에 든다고 한다. 이씨 가족뿐일까. 잠깐 사람들의 눈시울을 적시고 떠난 비정규직 손씨와 맞벌이 주부 이씨의 아픔은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공명한다. 나의 이야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민주화(1987년)·남북화해(1997년)·정치개혁(2002년)의 깃발을 들고, ‘역사의 동력’을 자부했던 진보·개혁세력은 지금 혼돈 속이다. 5·31 지방선거 때는 총체적으로 ‘무능’이란 주홍글씨를 받았다. ‘무능한 진보가 부패한 보수보다 더 싫다’는 극단적 여론조사도 나왔다. 민주화 시대가 종언을 고하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이다.

서울대 최갑수 교수(서양사)는 진보·개혁세력을 보는 따가운 시선을 서울 대학로에서 롱런중인 김민기씨의 연극 ‘지하철 1호선’에 빗댄다. “지하철 1호선은 94년 초연때 ‘걸레’라는 이름의 창녀가 나오고, 남자 주인공인 ‘운동권’ 청년을 숨겨주며 두 사람 사이에 싹튼 사랑과 휴머니즘(인간애)이 원래 내용입니다. 지금은 연극 설정이 바뀌었어요. 남자 주인공은 건달이고, 이 건달이 창녀를 만나며 운동권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담고 있죠.” 그는 ‘창녀 방에 숨어들던 운동권’이 ‘창녀가 만든 운동권’으로 바뀐 점을 주목하며 “민주화 이후 사회와 담론 변화도 똑같다”고 말했다. 위가 아니라 밑에서 세상을 바꿔야 삶이 바뀌고 진보한다는 비유이다. 진보·개혁의 위기는 자꾸 바닥으로 떨어지는 삶과 그런 삶을 구출할 진보적 비전의 상실, 개혁의 부재에서 잉태되고 있다. 그것은 인식의 차이의 문제가 아니다. 숫자가 말하고 있다.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 미국·멕시코와 함께 ‘3대 양극화 국가’로 기록되고 있다. 도시근로자 상위 20%와 하위 20%의 소득격차(1·4분기 기준)는 1997년 4.81배에서 2005년 5.87배로 뛰었다. 90~96년 평균 7.9%였던 경제성장률은 2005년 4%로 둔화됐지만, 개인소득증가율은 이 기간에 7%에서 0.5%로 더 떨어졌다. 노동소득(임금+자영업자 소득)이 차지하는 비율은 90~96년 평균 81.6%에서 2004년 68.4%로 낮아졌지만, 자본소득은 그 사이 18.1%에서 31.6%로 높아졌다. 소득양극화가 갈수록 커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세갈래 지표다.

“성장률의 둔화보다 노동·자영업 계층의 주머니에 들어간 돈은 더 줄었고, 고용없는 성장이 길어지며 계층간 소득불평등이 벌어지는 추세”(진보정치연구소)라는 분석이다. 잠실 고시원 화재 때 숨진 손씨의 ‘불행’은 막다른 벼랑에 내몰려 있는 ‘자영업 붐’ 시대의 단면인 셈이다. 법정 최저임금(시간당 2,840원)을 못버는 사람이 지난해 8월 기준 1백21만명(8.1%)에 달하는 빈곤도 고착화되고 있다.

양극화의 핫코너는 지난해 8백40만명에 이르고 매년 증가세인 비정규직이다. 정규직을 100으로 했을 때 비정규직의 월 임금총액은 2004년 51.9에서 2005년 50.9로 악화됐다. 현재 직장내 사회보험(국민연금·건강보험·고용보험) 가입률은 정규직 83%, 비정규직 31.3%다. 이들의 열악한 처우와 고용불안은 극단적 투쟁으로 나타난다. 최근 격렬했던 노동쟁의가 대부분 출구없는 비정규직들에 의한 것이다. 참여정부 들어 크레인 점거와 한강 투신, 방화를 낳은 화물트럭·하이닉스·포스코 사태가 그 예이다. 비정규직이 고통을 받는 사이 그 해법의 주체인 노·사·정은 상황을 악화시켰을 뿐이다. 참여정부 노사개혁 TF팀장을 맡았던 박태주 한국노동연구원 교수는 “양극화 핵심은 비정규직”이라며 “그런데 정면으로 부딪쳐서 정책적으로 성과를 낸 게 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정부가) 시급하고 심리적 초조감은 컸지만, 장관마다 성과주의에 집착한 면이 있다”고 말했다. 정부의 언행불일치는 지난해 비정규직 비율이 40.8%까지 올라선 공공서비스업이 단적인 예이다. 참여정부 정책기획자문위원으로 참여했던 고려대 김유선 교수(아세아문제연구소 노동대학원)는 “비정규직의 눈물을 씻어주겠다고 공약한 노무현 대통령이 ‘차별해소도 좋지만 수십조원이 든다’는 금융경제연구원의 박사 논문 하나에 ‘차별은 인정하고 남용을 막는’ 쪽으로 방향이 달라졌다”고 밝혔다. 그는 “입법 과정에서 정규직과 비정규직간 동일노동·동일임금 원칙이 무너진 게 그 씨앗”이라고 진단했다.

민주노동당 단병호 의원은 “문제의 본질은 알지만 노동 진영도 대안과 행동은 미치지 못했다”고 진보세력으로서의 책임을 인정했다. 그는 “그때 그때 문제를 키우지 않도록 성과주의로 접근하다 보니 문제를 피하게 됐다”면서 “그 때문에 비정규직의 50%가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을 찍게 됐다”고 자성했다. 박래군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는 “민주노총이 대기업 노조, 대기업 비정규직 문제에 집착하면서 더 소외된 비정규직을 부차적 사안으로 여기는 거 아니냐”고 물었다. 실제 민주노총은 본지 취재팀이 최근 ‘비정규직 실태 자료’를 문의했을 때 “정리된 자료가 없다”며 한 대학교수를 소개했다. 아직 종합적인 실태 파악을 못하고 있었다.

서민의 궁핍과 상대적 박탈감을 키우는 것은 부동산·사교육비·의료비다. 1997년 12월 외환위기 후 7~8개월간 지역에 따라 40~50%까지 폭락한 부동산값은 국민의정부 후반에 일어난 건설경기·주택규제 완화의 붐을 타고 ‘부익부 빈익빈’을 심화시킨 주범이다.

95년 집을 팔고 캐나다로 이민갔다가 98년 봄에 돌아온 김모씨(42·갈비집 운영)는 다시 옛날에 살던 서울 신천동의 이웃 아파트를 사며 4배 가까이 부(富)가 증가했다. 환율은 그 사이 2배로 뛰고, 예전의 신천동 집값은 반토막 가까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스스로 “외환위기와 인생의 운때가 맞은 행운아”라고 한다. 반대로 이동통신사 서비스점에서 일하는 박모씨(28·여·상담직)는 “매달 1백30만원 월급에 비정규직(배달업)인 남편(31) 월급을 합쳐도 가족 수입이 2백80만원 수준”이라며 “친정어머니에게 맡긴 세살배기 아들의 양육비와 생활비, 승용차 월부금, 비과세 적금에 들어가면 빠듯하다”고 말했다. 그는 “4천5백만원짜리 다세대 전세를 살며 청약저축도 들고 있지만, 지금 우리로선 당장 판교 아파트가 당첨돼도 그림의 떡”이라고 말했다. 되팔기 전에는 분양 대금을 감당할 수 없다는 뜻이다.

부동산 규제 정책을 쏟아낸 참여정부에서도 지난 5월 기준 전국 부동산값은 2003년 대비 7.7%가 급등했다. 서울 강남은 23.9%, 광역시는 11.2% 올랐다. DJ정부의 정책 참모였던 김태동 전 청와대 경제수석은 “99년 2천조원 정도이던 부동산 시가총액이 지금 4천조원을 넘었다. 2천조원이 땅없는 사람에게서 땅있는 사람에게로 넘어간 것”이라며 “역재분배가 일어났다”고 분석했다. 집권한 민주세력 집권의 배신이 아닐 수 없다. 전모씨(35·언론인)도 “지난 3·30 부동산대책이 서민부터 울렸다”고 했다. 그는 “지난 7월 평촌에서 전셋집을 구할 때 1주일마다 5백만~1천만원씩 올라 전쟁을 치렀다”며 “서울 강남 집주인들이 세부담을 전셋값에 얹으며, 세입자들이 비강남·신도시로 도미노처럼 밀리고 있다”는 중개업소의 설명을 들었다고 했다.

대구가톨릭대 전강수 교수(토지정의시민연대 정책위원장)는 “보유세 강화가 징벌적 세금이 아니라 부동산 보유자라면 마땅히 납부할 ‘좋은 세금’임을 알리는 게 선진국의 추세이고, 학계에서 오래전부터 입을 모은 궁극적 방향”이라며 “보유세는 증세정책의 하나처럼 착시가 일어났고, 그나마 일관성과 구체적 목표를 상실한 정부의 정책 집행방식이 혼란을 키웠다”고 지적했다. 그는 “(지난 8월 임시국회때) 주택 재산세의 연간 상승률을 3억원 이하 5%, 3억~6억원은 10%로 제한했지만, 실제 전국 공동주택에서 6억원 이상은 1.6%, 3억~6억원은 5.2%에 불과하다”며 “서울·수도권을 제외하면 3억원 이하 주택이 100%에 육박하는 상황에서 세 경감의 초점은 1억~2억원대 서민주택에 집중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사교육비 부담도 중산층과 서민들에겐 힘겨운 ‘눈물 바구니’다. 이모씨(42·방송국 일반직·연봉 4천5백만원)는 지난 5월 2억원이던 강남구 신사동의 전셋집을 빼 성북구 동소문동으로 옮겼다. 중학교 1학년·초등학교 4학년인 남매의 사교육비 때문이다. 강남에서 영어·수학·논술 학원 과외를 받는 큰 아들과 글짓기 학원과 가정학습지를 하던 둘째 딸에게 들어가던 사교육비는 월 1백30만원 정도.

둘째 딸이 “나도 영어학원에 다니고 싶다”고 해 “시켜주마”라고 약속하고 조금 싼 전셋집을 찾은 것이다. 이씨는 “학교 내신이 중요해진다는 데 상대적인 궁핍을 느끼며 강남에서 버틸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며 “다만 ‘돈 때문에’ ‘애들을 사교육 시장에서 키워야 되는 현실 때문에’ 돌이킬 때마다 씁쓸함을 감출 수 없었다”고 말했다.

지난해 국내 가계의 사교육비 지출은 19조2천4백억원으로 전체 교육비의 반을 차지했다. 특히 대학들이 논술형 고사 도입 방침을 밝힌 2004년 이후 개인교습비(현직 교수·교사외 양성화된 사교육)는 5조원을 웃도는 급증세다. 2003년 31만원이던 가구당 개인교습비는 지난해 41만6천원으로 늘었다.

전국 가구당 평균치이지만, 저소득 가정이 늘어나고 지방의 부족한 여건을 감안하면 사교육의 양극화는 통계수치의 숫자를 무색케 한다. “부유층·중상위층에서 확대되는 고액과외는 제대로 소득파악이 안된다”(교육 당국자)는 실토다.

고려대 김경근 교수(교육학)가 지난해 분석한 부모 직업별 수능성적은 ‘전문직·관리직 324점, 일반기술직·사무직 304점, 판매·서비스직 300점, 생산·기능직 289점’으로 나타났다.

부모의 소득수준별 수능성적도 5백만원 초과때 317.6점이고, 2백만원 이하는 287.7점이다. 민주세력 집권이 거듭되면서 교육양극화가 ‘대물림’되고 있는 것이다.

사회안전망과 최저 복지제도의 한 척도인 의료비도 2003년 현재 본인 부담 비율 41%(OECD 평균 18.3%), 공공지출 44%(OECD 72.2%)로 대비된다. 건강보험 지역가입자 체납가구수가 1백70만가구를 넘는 열악한 추세다. 돈이 없으면 병원을 찾지 않는 서민들의 실생활을 보여주는 수치다. 성공회대 조희연 교수는 “‘사회경제적 삶’의 민주주의가 확장되지 못하고, 빈곤과 실업을 개인의 실패로 모는 신자유주의에 함몰되며, 오히려 민주화된 정치구조에서 계급사회가 심화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사회 전체적으로도 “취업이 빈곤탈출의 청신호였던 시절은 지나갔고, 시장 탈락자에 대한 복지부담은 계속 커지는 상황”(고려대 고세훈 교수)이란 진단도 비슷한 맥락이다.

지난 1월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의 조사는 단적으로 소통의 문제를 짚는다. 여론조사에서 ‘세금 덜 내고 개인소득을 늘려야 한다’는 입장이 55%였지만, ‘더 많은 복지를 위해 세금을 더 낼 용의가 있느냐’는 질문엔 52.6%가 찬성했다. 일부 희생이 있더라도 사회 전체의 복지 확대에 대해서는 여론이 우호적인 셈이다. 당초 “1% 더 내면 10%를 더 돌려준다”며 시작된 양극화 재원 논쟁이 증세·감세 논쟁만 반복하며 겉돌았다는 복기(復棋)인 셈이다.




이런 성적표는 진보·개혁세력에 대한 신뢰의 위기로 나타났다. 동아시아연구원(EAI)이 올해 ‘국내 24개 파워집단’의 영향력과 신뢰도를 조사했을 때(10점 척도), 청와대·참여연대·민변·민주노총은 모두 5점 이하로 나타났다. 지난해보다 상승한 것은 민변뿐이고, 열린우리당은 영향력·신뢰도 모두 최하위를 기록했다. 진보·개혁 세력의 신뢰도 하락은 KSOI가 지난 6월 실시한 사회단체 정기여론조사에서도 확인된다(표 참조). ‘신뢰한다’는 답은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41.5%), 민주노총(25.6%), 전경련(24.6%), 전교조(22.5%) 순이지만 ‘신뢰하지 않는다’는 답은 각 단체별로 52.6~70.9%로 신뢰도를 압도했다.

1990년대 개혁의 동력이었던 시민·사회단체에 대한 불신의 골이 그만큼 커졌다는 징표다. 참여정부 주요 부처의 신뢰도 역시 경제팀(12.6%), 교육팀(13.1%), 통일외교팀(23.8%)으로 출범 직후인 2003년 6월에 비해 급락했음을 보여준다. 김정수 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 사무처장은 “과거처럼 시민단체들의 상대는 전문성이 떨어지는 파트너가 아니다”라며 “기관장 앞에서는 큰소리 치고 6급 주사 앞에서는 꼼짝 못하는 게 시민단체의 현실”이라고 지적했다.

민주집권세력만 무능했던 것이 아니다. 진보정당이나 진보세력들은 대안 없는 반대로 할 일을 다 한 양 손을 놓았고, 진보적 비전으로 시민들의 힘을 모으지도 못하고, 이 사회의 담론을 지배하며 의제를 이끌어가지도 못했다. 시민들의 삶이 추락하는 동안 세상을 구원할 것처럼 너도 나도 나섰던 그 많은 진보개혁세력들은 다 어디로 갔나.

지난 5·31 지방선거에서 패배한 후 열린우리당 김근태 의장은 “민주화운동의 훈장을 떼겠다. 밥이 하늘이다”라고 했다. 너무 늦었다. 권영길 민노당 의원단 대표는 “대중의 피부에 와닿는 생활정치를 펴겠다”고 했다.

참여연대 김기식 사무처장은 본지 취재팀에게 고백했다. “화려한 전투에서 이겼으나 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했다. 80년대 민주화, 90년대 개혁으로 진보개혁 진영이 담론을 주도했지만, 2000년대는 그것을 상실했다.”

〈이기수기자〉

 


입력: 2006년 09월 13일 18:17:23

 

‘진보개혁세력이 위기인가.

 
이 화두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의문을 표시했다. “‘진보’와 ‘개혁’을 한데 묶는 것이 온당한가.” “진보가 언제 ‘위기’ 아닌 적이 있었던가.” 진보 인사들은 진보와 개혁을 묶는 것에 거부감을 보였다. 이들의 주장은 ‘진보’와 ‘개혁’을 한데 묶는 주류 언론과 정치권의 무지 또는 관행 때문에 개혁세력의 위기가 곧 진보세력의 위기로 이어지는, 이른바 ‘도매금’ 또는 ‘착시’ 효과가 일어났다고 한다.

김세균 서울대 교수(정치학)는 “현재 위기의 본질은 (신자유주의) 개혁세력의 위기”라며 “민중운동진영(진보진영)은 아직 세력이 크지 못하기 때문에 덩달아 위기를 맞을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노무현 정부의 주축을 이룬 ‘신자유주의’ 개혁세력이 실정을 거듭하며 무능함을 드러낸 것이 진보진영의 위기까지 초래했다”는 것이다.

‘B급 좌파’의 저자인 문화비평가 김규항씨는 “‘진보·개혁세력의 위기’라는 말은 곧 ‘좌파·우파의 위기’라는 말과 같이 모순적”이라고 지적했다.

1987년 당시 독재세력 타도를 위해 연합했던 자유주의 세력(우파)과 민중운동 세력(좌파)이 20년이 지난 지금 더 이상 한 지붕 아래 동거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민주화 이후 집권세력이 된 자유주의 세력은 YS, DJ 정권을 거쳐 현 정권에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으로 대변되는 신자유주의 개혁정책을 추진하고 있는 반면 민주노동당과 제도권 밖 진보진영은 이에 결사 반대하고 있는 것이 그 차이를 잘 보여준다.

하지만 노무현 정권은 출범 당시 언론 등에서 넓은 의미의 ‘진보정권’으로 규정됐고 스스로도 ‘진보’라는 표현을 쓰곤 했다.

노대통령이 2004년 5월 연세대 리더십 특강에서 “보수는 힘센 사람이 마음대로 하는 것이고, 진보는 더불어 살자는 것”이라고 한 적도 있다. 진보 인사들을 일부 기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진보정권이 될 수는 없다. 다만, 일부 개혁정책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한때 개혁세력이었다고 할 수는 있다.

‘개혁’이란 말 역시 간단한 개념이 아니다. 박호성 서강대 사회과학대 학장(정치학)에 따르면 원래 혁명과 대비돼 쓰이는 ‘개혁’은 이중적 의미를 갖고 있다. 진보적 개혁과 보수적 개혁이다.

자본주의의 문제를 해결하는 태도를 놓고 봤을 때의 기준이다. “서유럽의 사민주의적 개혁 노선은 진보적 개혁에, DJ 정권이 추구한 자유민주주의 및 시장기능의 정상적 작동은 보수적 개혁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현 정권은 ‘보수적 개혁정권’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 ‘보수적 개혁 세력’의 위기를 ‘도매금’으로 진보세력 위기라고 할 수 있는가.

급진파와 자유주의의 연합세력인 민주화세력이 보수 세력을 끌어안음으로써 집권이 가능했고, 정치적 민주화로 역사를 일정 정도 ‘진보’시켰다는 점, 무엇보다 진보진영의 외연을 넓힌다는 점에서 ‘진보개혁’이라는 용어는 의미가 있다.

군사정권 때 제도권 정당체제에서 보수 야당이 정치적 대표자가 없는 진보를 대변하는 역할을 했다는 인연으로, 시민들이 과거 민주화세력과 진보세력을 세밀히 구분하지 않는다는 인식상의 혼선으로 인해, 보수 헤게모니의 한국 사회에서 자유주의만으로 충분히 개혁적이 될 수 있다는 역사적 조건으로 인해 진보와 보수적 개혁세력은 결과적으로 한 묶음이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런 맥락이 노무현 정부의 위기가 보수적 개혁세력의 위기로, 이는 다시 진보세력의 위기로 전파되기에 이른 사유이고, 그것이 바로 진보개혁의 위기를 논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손제민기자 jeje17@kyunghyang.com

 

 

[진보개혁의 위기]“‘반쪽 진보’ 권력 맛본뒤 퇴화”

입력: 2006년 09월 13일 18:18:03

 
진보개혁 세력이라는 사람들 정치는 잘 한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독재냐 반독재냐, 직선제냐 간선제냐 같은 선악이 뚜렷한 이분법적 정치 문제에는 상당한 능력이 있다. 독재자를 타도하고, 부패한 정치 세력을 교체하는 데는 성공했다. 그렇지만 ‘경제는 바보’다. ‘실물’에 참여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경제 문제는 정치 문제처럼 이분법적이거나 단선적이지 않다. 복잡하다. 또 정치 문제와 달리 바로 느끼지 못하고 시간이 지나야 느낀다. 그걸 교묘하게 이용하는 세력이 관료다.

나는 그걸 DJ 때부터 봐 왔다. DJ는, 태생적으로 DJP연합이다. 정치는 진보, 경제는 보수를 택했다. DJ때 경제 정책은 모두 개발 관료에 의존해 나온 것이다. 부동산 경기 부양, 건설 경기 부양, 신용카드, 외자 유치 등이다. 그러다 말미에 아들과 측근이 개발 세력들에게 뇌물을 받거나 부패 사건에 연루되었다.

그리고 노무현 정부가 들어섰다. YS, DJ보다 나은 진보 정부라 여겼기에 서민·중산층을 위한 진보적 경제 정책을 내놓을 줄 알았다. 또 재벌·기업의 특혜를 파헤치는 경제 과거사의 진상 규명을 통해 경제 민주화를 이룰 줄 알았지만 오히려 반대였다.

◇정치만 유능, 경제는 바보

참여정부는 집권 1년간 법안을 통과시킬 의석이 적다고 변명했다. 2004년 4월 ‘탄핵풍’으로 진보개혁적 정치인들이 여의도에 대거 입성했다. 민노당도 거저 들어갔다. 여대야소 정국 의미도 있지만 더 큰 의미가 있다. 총선 승리로 진보개혁 세력이 청와대뿐만 아니라 여의도까지 점령한 것이다. 그리고는 그게 다였다. 의미있는 입법 하나 못했다.

경제에 대한 인식도 문제다. 단적인 예를 들면, 아파트 선분양은 그것 자체가 특혜다. 진보라는 사람들이 아파트는 분양받는 거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자기 돈주고 사는데 ‘구입’이고 ‘매입’이지, 왜 분양이냐. 분양이라는 말에 나눠 준다는 뜻이 있다. 강아지 분양하듯 이해하는데, 누가 주체인지 잊고 산다. 신도시 개발 방식도 들여다보자. 정부가 농민들의 농지, 임야를 30년간 헐값으로 뺏어서 건설업자에게 팔아넘겼다. 택지 조성도 하기 전에 말이다. 농민은 도시민에게 당연히 빼앗겨야 하고, 국가는 농민의 땅을 뺏어도 된다는 인식이었다. 빼앗은 농지를 건설업자에게 30년간 판 것이다. 그것도 아주 값싸게. 그리고 소비자는 분양받는다. 분양이란 말이 ‘값싸게’를 뜻한 적이 있지만, 지금은 그것도 아니다. 시세보다도 높다. 그 자초지종을 알아야 한다.

◇기득권층 얘기만 들어

청와대에 들어간 진보개혁 세력 이야기도 해보자. 학자 출신이 많은데, 이들의 공통점도 현장을 잘 모른다는 것이다. 두번째 공통점이 통계와 자료를 관료에게 의존한다는 것이다. 실제 상황, 현실을 잘 모르는 학자 출신들이 청와대 들어가서 외국에서 배운 이론만 접속시키려다가 항상 관료와 재벌 민간 연구소 연구원들에게 ‘역이용’ 당한다.

집권 이후에 청와대나 열린우리당 내 진보개혁 세력들이 주로 만나는 사람들이 관료, 재벌, 재벌 이익단체, 재벌 민간연구소 연구원, 국책연구기관 연구원들이다. 시민단체 사람도 만나지만 열에 한두번 정도일 뿐이다. 경제부문의 무능함을 외부에 의존해야 했기 때문이다. 관료, 이익단체 사람들을 계속 만나다 보면 ‘진보’가 어느날 자기도 모르는 사이 ‘보수’가 된다. 권력의 맛도 느낀다. 그런데 정치권내 진보개혁 세력들은 어떻게 접대와 로비를 피해야 하는지 모른다. 결국 즐기게 되는 것이다.

정치적으로 진보한 사람들? 경제 관료나 재벌에게 팽팽당한다. 재벌들이 다 공부시켜 준다. 운동권 출신 국회의원들 예전에 경제 공부한다고 했지만, 요즘은 제대로 스터디하나. 관료나 재벌, 이익집단의 연구소 연구원들이 다 공부시켜 준다. 자료에 데이터에 논리까지 만들어주니까 편하다. 가만 있어도 가져다 준다. 그러다 보니 그게 맞는 것 같다고 느낀다. 그런 사람들만 만나고, 또 그런 세상이니까.

각종 국가정책 용역 생산 구조가 바뀌어야 한다. 관료를 통해 나오면 관료를 위한 용역 보고서만 생산된다. 국회나 정당에서 현장 중심의 연구 보고서를 만들어야 한다. 국책 연구소도 100% 독립적으로 운영해야 한다.

미국처럼 관료나 행정부는 법안을 발의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관료는 국민을 위한 머슴이다. 머슴한테 의존하는 법안은 안된다. 대의 기구인 국회의원과 정당이 정책·제도를 파고들고 연구해 내놓아야 한다.

보수적 관료들이 진보개혁 세력에게 지시받는다고 갑자기 진보가 되는 게 아니다. 사람이 안 바뀌는 데 무엇을 바꾸겠는가. 미국의 연방 공무원은 정권이 교체되면 고위 공무원 절반이 바뀐다. 우리도 헌법이나 공무원법을 싹 바꿔야 한다. 한국처럼 ‘고시’로 평생을 보장받는 나라는 없다.

개발독재 때도 대다수 국민은 희망과 꿈을 가졌다. 열심히 일하면 잘 살 수 있다, 현재보다 나을 수 있다는 거였다. 자신감과 희망 있었다. 지금은 우선 열심히 일할 곳조차 없다. 일해도 언제 잘릴지 모른다. 미래가 안 보인다. 항상 위기 의식에 사로잡힌다. 결국 부동산 문제다. 개인 자산의 80%가 부동산이고, 대한민국 국민의 고민 80%가 부동산이라고 보면된다. 집값 폭등하니까, 5년 10년 일하면 집 사고, 평수 늘리고 했는데 지금은 그게 잘 안 된다. 투기 잘 하는 사람이 선망받는 시대이고, 열심히 일하는 사람 기를 죽여놓는다.

서민, 중산층의 삶의 질은 계속 떨어진다. 선진국 돼간다지만 재벌만 선진국이고 ‘그들만의 천국’이다. 집권 세력이 95% 대다수 국민이 아니라 5%의 기득권 세력에게 점점 살기 좋은 환경, 시스템을 만들어주고 있다. 95%는 박탈감에 점점 힘들어지는데 5%는 불로소득으로 자산 늘리면서 잘 산다. 이런 게 위기의 본질이다.

대통령, 정부, 여당은 ‘성장률’에 집착한다. 성적표이기 때문이다. 성적표를 잘 받으려면, 계속 성장해야 하고, 그러려면 거품을 조장해야 한다. 국민들은 자기 주머니, 집 마련, 저축, 일자리 이런 것 고민한다. 그렇지만 대통령, 정치인, 관료들은 ‘자기만의 성장률, 성적표’에 집착하고 결국 거품 유혹에 빠지게 된다. 거품 조장하면 결국 투기라는 병이 생긴다.

참여정부가 재벌에게 특혜를 늘려줬다. 주택 공급을 확대하고 기업도시 특별법을 제정하면서 각종 개발 계획을 남발하고, 거품 조장을 해왔다. 주택과 건설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이 2백만~2백50만명이다. 그중 15% 정도만 정규직이고 지식 노동자다. 나머지는 비정규직, 일용직 노동자다. 참여정부 들어 50만~1백만명 고용이 창출됐다. 그중 30%는 외국인 노동자다. 건설경기 부양을 통한 일자리 창출이란 게 우리 지식을 배운 청년, 젊은이들이 기피하는 일자리만 나오는 것이다. 게다가 외국계 투기 자본이 ‘부동산 투기장’에 투입됐고, 지금도 투입되고 있다. 자꾸 돈이 모이니까 개발과 부동산에 집중되고, 지식 산업과 거리가 멀어지고, 일자리는 점점 감소하고 병리가 나타나는 것이다.

일자리 없는 청년들은 결혼이 늦어지거나 못한다. 주택값은 폭등한다. 미래에 대한 위기, 불안 때문에 결혼 못하고 아이를 낳지 않고 저출산 문제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것이 빈부격차 심화, 양극화로 나타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자산 양극화를 심화시킨 자들이 세금 더 내라고 하니까, ‘미친 놈’ 소리가 나오는 것이다.

◇반대만 말고 대안 내놔야

진보는 그게 지식이든, 돈이든 자기 것을 남과 나눌 줄 아는 사람이다.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없는 사람을 생각하는 철학을 가진 사람이다. 내가 보는 진보는 그런 것이다. 그런데 민노당이나 민노총을 보자. 대한민국 1천5백만 노동자의 10%도 안 되는 귀족형이다. 그 10%도 다 재벌 기업, 보수 기업, 공기업, 언론, 교사, 병원 등 기득권을 누리는 세력의 종사자들이다. 1천만 자영업자를 대변하는 단체가 없다. 1천만명에 육박한 비정규직을 위한 조직도 사실상 없다. 민노당, 민노총이 비정규직 차별 철폐를 주장하지만, 자기 것을 내놓으려고는 안 한다. 내건 빼앗지 말고 소수에게, 권력자에게, 자본가에게 저들(비정규직)을 위해 더 내놓으라는 식이다. 유럽을 봐라. 자기 근무 시간 줄이고 하면서 같이 하지 않는가.

한·미 FTA 반대 시위에 참여했다고 진보인가. 반독재하고 길거리 행동했다고 진보인가. 지금 진보개혁세력은 ‘머리만 진보’거나 ‘행동만 진보’가 많다. 머리와 행동이 다 진보인 경우는 극히 드물다. ‘참진보’가 없다. 이것이 또 위기의 요인이기도 하다.

시민단체도 마찬가지다. 요즘 시민단체에는 ‘시민’이 없다. 시민이 무엇을 원하는지 모른다. 정치, 관료 사회 진입하기 위한 시민단체인가 싶을 정도다. 진보는 인재양성소가 없다. 그래서 인재도 탄생하기 힘들다. 학생운동하다 노동계로 가고, 정보도 자료도 차단된 상황에서 행동하고 일했다고 해서 본인이 인재가 될 수는 없다. 내가 속한 경실련도 마찬가지다. 무슨 정부나 지자체 위원회에 왜 그리들 많이 가는지, 시민단체가 무슨 이력 관리하는 곳인가.

우리 사회가 왜 위기가 왔고, 중병이 걸렸느냐. 황우석 거품, 부동산 거품 이런 것이 대한민국에서 선진국 진입단계에 왜 발생했나? 브로커 천국이 된 근본 원인은 뭔가. 엉터리 진단에 엉터리 처방만 쏟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위기를 예견해야 하는데 중병이 들어야 치료법을 생각한다. 그나마 병치료 늦어지고 치료하다 마는 게 반복된다. 어쩌다 먼저 떠들면 미친놈 되기 일쑤다. 지금 권력에 반대하는 자들은 많은데 견제하고 감시하고 대안을 내놓는 자들이 없다. 그것이 위기의 실체다.

〈정리 김종목·사진 권호욱기자〉


-김헌동 단장은?-

경실련 김헌동 국책사업감시단장은 1955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81년부터 19년 동안 대기업 건설회사에서 일했다. 97년 시민운동에 뛰어들었다. 2000년에는 사표를 내고 운동에 전념하고 있다. 2004년 2월 경실련 아파트값 거품빼기운동본부 출범과 함께 본부장을 맡아 분양원가 공개운동을 벌여왔다. 청와대 경제수석을 지낸 김태동씨가 친형이다.

 

[진보개혁의 위기] 민주세력 집권9년 갈수록 고단한 삶

입력: 2006년 09월 13일 18:20:56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가게 문을 여는데 날마다 빚만 는다. 요령 없고 능력 없는 내 탓을 해야 할지, 정치 탓인지 조상 탓인지, 아님 세상 탓을 해야 할지….”

지난 9일 서울 신림동에 사는 강모씨(60)는 우두둑툭 창문을 때리는 가을 소낙비를 보며 소주잔을 입에 털어 넣었다. 동네시장 어귀에 있는 그의 치킨집은 낮부터 썰렁했다. 강씨는 레스토랑을 운영하다 1998년 외환위기때 문 닫고, 일자리도 못 구해 부인이 보험일을 하며 다섯 식구가 살아왔다고 했다. 그러다 2003년 빚을 내 치킨집을 차렸다. 대학생인 막내가 취업하기 힘든 병에 걸려 치료비를 감당해볼 심산이었다. 잠시 빛을 보는가 했던 가게는 이내 파리만 날렸다. 다들 먹고 살려고 냈겠지만, 하루가 멀다하고 치킨집·음식점·술집이 시장에 들어섰다고 한다. 카드빚이 늘어 지난해 방 4칸짜리 다세대주택 전세방을 2칸짜리로 줄였다.

강씨는 “큰아들(33)은 회사에서 잘렸는지 나왔는지 대학원 가겠다며 놀고 있고, 둘째(29)는 일을 하다말다 한다”면서 “지금은 친지에게 손도 더 못벌리고 서로 서먹해질 때만 많다”고 했다. “둘째놈이 친구들에게 술 한턱 내며 십몇만원을 카드로 긁어 너죽고 나죽자며 혼낸 게 가슴에 멍이 됐다. 딱 한번, 처음이었는데…”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나도 이구백(20대 90%가 백수라는 은어)”이라고 말하는 부산 연산동의 장모씨(28). 대학에서 컴퓨터를 전공한 그는 지금 주유소에서 일한다. 편의점에서도 일했다는 그는 9급 공무원 시험을 준비 중이다. 여자친구의 동생이 “(주유기를 보며) 누나 친구는 총잡이”라고 놀릴 때 정말 슬펐다는 그는 “대학 졸업반인 그놈아도 9급 공무원 준비생”이라며 웃었다. “취업구멍도 없고 못사는 놈은 아예 더 죽이는 세상, 욕만 나온다”는 게 그의 넋두리다.

지난 6일 서울 노숙자쉼터에서 만난 윤모씨(37)는 “뭘 들으러 왔소”라며 매섭게 맞았다. 그는 “베트남 무역회사를 하다 2년전 동업자가 회삿돈 갖고 잠적해 1억원을 빚지고 도산했다. 빚에 쫓기다 이혼당하고 보다시피 노가다 생활을 한다”고 했다.

윤씨는 “정부의 숲가꾸기 사업을 해봤는데 한번 하면 다시 하기 힘들고, 그나마 4~6개월 하다 마는 수준”이라며 “창업교육이나 직업소개소를 다녀도 귀찮은 하층민 취급을 받을 때 제일 싫다”고 했다.

하루하루의 궁핍에 몸부림치고 좌절하며 분노하는 사회의 ‘저층(低層)’이 늘고 있다. 가족은 해체되고 있다. 저마다 살길이 막막해지고 있다. 그들뿐일까.

대학시절 자칭 ‘운동권’이었던 보험설계사 이모씨(41)는 “이젠 희망을 말하기 겁난다”고 했다. “3년전 재무설계를 해준 고객에게 ‘이게 뭐냐’는 항의를 받았다”는 그는 “금리·부동산·환율 모두 예상이 빗나갔는데 지금도 보험을 팔며 5~10년 뒤의 재테크 상담을 하는 게 고통”이라고 했다. 펀드매니저 김모씨(36)는 “밑에 사람을 뽑지 않아 고용불안은 없는 쪽”이라며 “98년 이후 눈앞에서 80조원이 외국 투자자의 주머니로 빠져나갔다. 그 사이 직장에서 막내인 나는 허드렛일만 많은 ‘투자기계’였다”고 했다. 그는 “언젠가 정치를 하고 싶다”고 했다. 자신의 답답함과 생각을 대변해줄 사람과 정당을 못찾겠다는 게 이유다.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한 87년부터, 짧게는 진보·개혁의 깃발을 든 사람들이 국정을 책임진 지 9년. 민주화의 흑백사진은 빛이 바래가고 민생의 그림자는 깊게 드리워지고 있다.

고려대 고세훈 교수(공공행정학부)는 “빈곤·양극화·불안의 문제는 정치적 정통성 시비에서 자유로운 90년대 이후 더 커지고 있다”며 “왕(독재)의 목을 벴다고 민주주의가 자동적으로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민주세력이 집권했지만, 먹고 살기는 어려워지고, 한 번 추락하면 다시 오를 길이 없는 ‘패자부활전’이 없는 사회가 됐다는 진단이다.

내집마련 꿈은 뛰는 집값에 저당잡히고, 미약한 사회안전망은 늙거나 일자리를 잃는 공포를 배가시키고 있다. 민주화의 대가로 무한경쟁의 냉혹사회가 찾아온 것이다.

국회 운영위는 지난해 말 ‘민주주의와 경제발전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면 어떤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느냐’고 묻는 국민의식 조사를 실시했다. 84.6%가 ‘경제발전’을 꼽았다. 30년전의 박정희 정권 시절 설문과 같은 결과이다. 진보개혁의 위기가 삶의 위기를 불러오고, 삶의 위기는 민주주의 위기를 불러오고 있는 것이다. 파시즘의 공포가 느껴진다. 세상은 진보하는가, 후퇴하는가.

진보개혁 세력이 ‘민주주의가 밥 먹여주나’라는 문제에 답하지 못하는 한, 한국의 미래, 진보의 살길은 없다.

〈이기수기자〉

〈특별취재반/이기수 오창민 김광호 박영환 김종목 전병역 최민영 손제민 장관순기자〉

 

[진보개혁의 위기]신자유주의가 ‘위기의 外因’

입력: 2006년 09월 17일 18:03:19

 
“학생운동을 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골프가 중요하다고 말하는 시대, 이것이 일본의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일본의 진보성향 월간지 ‘세카이(世界)’의 편집장 오카모토 아쓰시(岡本厚)가 지난 6월 9~10일 계간지 창작과비평 주최로 서울에서 열린 ‘동아시아 비판적 잡지 편집인회의’에서 푸념하듯 털어놓은 말이다.

일본의 학생운동 세대들이 만드는 격월간지 ‘임팩션’의 5·6월호 표제는 “만국의 ‘프리캐리아트(Precariats)’여, 공모(共謀)하라”였다. 프리캐리아트는 ‘불안정한(precarious)’과 ‘무산자(proletariats)’를 합성한 조어로 우리말로는 ‘불안정층’쯤 된다.

김영길 효성가톨릭대 교수(노문학)는 최근 계간 ‘문화과학’에서 한국보다 먼저 신자유주의화의 길로 간 일본 사회의 서민들에 대한 복지 서비스 후퇴에서 한국 사회의 앞날을 읽었다. “일본의 신자유주의화가 한편으로는 국가의 복지 영역을 민간기업에 떠넘기고 또 한편으로는 상징 천황제를 강화하며 애국주의를 부추기는 우경화로 갔다”고 한다.

이렇듯 진보의 위기는 한국만의 현상이 아니다. 전세계적인 흐름이다. 바로 이 전세계적 진보의 위기를 불러온 것이 신자유주의 세계화다. 손호철 서강대 교수(정치학)는 “현실사회주의 붕괴 이후 거시적인 변혁이론이나 대항담론이 사라진 상황에서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시대적 흐름이 됐다”고 말했다.

좌파가 집권하든, 우파가 집권하든 ‘개혁’은 지구상 거의 모든 정부의 화두다. 여기서 ‘개혁’은 대체로 ‘신자유주의’ 개혁이다. 자본에 대한 정부 규제를 줄이고, 노동 유연성을 극대화해 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줌으로써 수치상 경제성장률을 높이고 실업률을 낮추는 것이 일국 정부가 국민을 위해 해줄 수 있는 최선의 길처럼 됐다.

진보진영의 공간이 상당 부분 존재했던 유럽 국가들도 이제는 그 ‘개혁’을 얘기하기 바쁘다. 어느 정당이든 둔화된 성장률을 끌어올리고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다는 청사진을 제시하지 못하면 여간해서 집권하지 못한다. ‘성장’보다 ‘분배’ ‘복지’를 강조할라 치면 ‘독일병(病)’ ‘프랑스병’ ‘유럽병’ 각종 병의 원흉으로 지목될 각오를 해야 한다.

지난해말 프랑스 전역을 달궜던 최초고용계약(CPE) 입법 반대 시위는 신자유주의에 포위된 유럽 국가 진보진영의 위기를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22%대 청년 실업률에 시달리던 프랑스 우파 정부는 ‘개혁’ 정책의 일환으로 26세 미만 고용자들에 한해 2년간의 수습기간 중 자유롭게 해고할 수 있도록 하는 이 법안을 도입하려 했다. 학생·노동자들의 거센 반발 때문에 법 시행이 유보되긴 했지만 이를 두고 진보진영의 승리라고 말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지난해 11월 독일 총선에서 사회민주당과 녹색당의 연정을 무너뜨리고 정권을 교체한 기독교민주연합 출신 앙겔라 메르켈 총리 역시 ‘기업하기 좋은 독일’ ‘작은 정부’를 복음처럼 내세웠다. 사민당의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도 열심히 ‘개혁’을 추진한다고 했지만 보수진영의 기대엔 못미쳤고 그를 지지했던 진보진영에는 배신으로 받아들여졌다.

영국은 토니 블레어의 노동당 정부가 10년째 집권하고 있지만 노동당의 정책은 보수당의 신자유주의 정책을 거의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 김수행 서울대 교수(경제학)는 “‘제3의 길’을 표방한 노동당 정부 하에서 사회보장제도가 매우 축소돼 영국 내에서도 사회 양극화가 매우 심해졌다”면서 “노동당의 우경화에 반대하는 좌파들도 있지만 아직까지는 큰 세력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월가, 재무부, 워싱턴 정가를 중심으로 형성된 ‘워싱턴 컨센서스’는 추상적으로 존재하던 신자유주의를 성문화(成文化)했고, 패권국가 미국 덕에 미국식 신자유주의는 글로벌 스탠더드가 되어 남미 일부 국가를 제외하고 전세계 국가들을 호령하고 있다. 남미에서 불고 있는 좌파 바람이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대한 강력한 대항이긴 하지만 석유·천연가스 자원을 바탕으로 한 것이어서 얼마나 지속 가능성이 있을지는 미지수다. 김은중 부산외대 교수(중남미 문학)는 “남미에서 출현한 중도좌파는 결국 새로운 급진적 대안이나 개혁적 대안을 갖지 못해 오히려 ‘변종 신자유주의’에 가깝다”고 말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세계화=진보의 위기’라는 등식이 자동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데서 진보의 위기가 초래됐다고 보는 게 옳다.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대안은 없다’는 수사가 광범위하게 퍼지고 있는 것이 진보세력의 가장 큰 위기”라는 조지 카치아피카스 미 웬트워스 공대 교수의 지적도 이런 맥락이다. 카치아피카스 교수는 “신자유주의 신봉자들은 신자유주의 후에도 국가간 소득격차가 줄어들지 않는 이유에 대해 개방화를 통한 경제발전 전략을 거부하는 국가 때문이라는 논리를 편다”며 “진보진영은 이해관계에 기반한 사람 관계로 규정되는 신자유주의 시스템의 문제점을 드러내기 위해 단호하게 대처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손제민기자 jeje17@kyunghyang.com〉

▶ 신자유주의

근대 서구를 풍미했던 ‘자유주의’의 현대판이다. 자유주의가 19세기 ‘권력으로부터 개인의 자유’라는 정치적 의미였다면 신자유주의는 ‘자본활동의 자유를 보호하는 국가’라는 정치경제적인 의미로 쓰인다. 1970년대 초반 세계자본주의가 위기를 맞았던 때 등장했다. 대안으로 나온 것은 국가 개입을 최대한 배제하고 노동유연성을 극대화해 기업의 자유로운 활동을 최대한 보장해야 한다는 프리드리히 폰 하이예크(오스트리아 경제학자)의 이론이다.

 

[진보개혁의 위기]靑으로·보수野로 ‘뿔뿔이’

입력: 2006년 09월 17일 18:05:16

 

‘독재타도’ ‘민중생존권 쟁취’를 위한 투쟁의 결실로 1987년 민주화가 시작된 이래 19년이 흘렀다. 그 사이 거리에서 돌팔매질을 하고 최루가스에 눈물을 쏟아내던 재야민주세력들은 지금 한국정치와 사회를 지배하는 세력으로 성장했다. 그들 가운데는 여전히 과거의 열정을 품고 ‘시민사회의 폭발’로 잉태한 시민운동에 투신, 재야운동의 맥을 잇고 있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현실정치에 참여, 대통령이 되고, 여당과 야당의 대표가 되었으며, 총리·장관이 되고, 국회의장이 되었다. ‘그들의 세상’이 왔다. 그리고 가장 과격한 운동권이 가장 보수적인 정치세력·시민운동가로 변신하기도 했다. 과거 민주세력은 이제 하나의 세력, 하나의 정치적 견해, 하나의 이념적 지향을 갖고 있지 않다. 그들은 지금 여당과 야당으로, 진보와 보수로 대립하며 서로 다른 길과 가치를 추구하고 있다.

87년 민주화 이후 투사로 이름을 날리던 재야인사들이 88년 각자의 인연을 따라 두 거물정치인 YS와 DJ의 야당에 참여했다. 88년 13대 총선에서 이해찬·임채정·이상수는 DJ의 평민당으로, 노무현은 YS의 민주당으로 들어갔다. 양김의 통합과 노동세력과의 연대를 모색하며 재야로 남아있던 이부영도 92년 YS가 떠난 ‘꼬마 민주당’을 발판으로 제도정치를 시작했다. 이부영과 쌍벽을 이루던 김근태는 뒤늦은 96년 DJ의 새정치국민회의에 합류하며 재야생활을 마감했다.

군사정권 때 거리에서 성명을 발표하고 저항하던 이들 가운데 3명이 대통령이 되고 2명이 총리가 되었으며, 그외 수많은 이들이 장관직을 차지했다.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등 과거 민주세력이 연속 3차례 집권을 하면서 재야 민주인사도 고관대작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김영삼정부에서는 부산 재야의 거물 김정남이 청와대 교문수석이 되었으며, 해직교수 한완상은 통일부총리, 이인제는 노동부장관을 했다. 김대중정부에서는 이해찬이 교육부장관, 노무현이 해양수산부장관을 지냈으며, 노무현정부에서는 이해찬·한명숙 총리를 배출했다. 경찰의 고문을 받았던 김근태는 집권여당의 대표가 되었고, 공권력의 감시대상이던 고영구는 안기부의 후신 국가정보원의 수장을 지냈다.

운동권의 핵심세력들이 선택한 현실정치의 공간에는 의외로 보수정당이 많았다. 서울노동운동연합 사건으로 유명한 노동운동가 김문수는 “혁명의 시대는 갔다”며 94년 김영삼의 민자당에 입당한 뒤 한나라당에서는 초강경파로서 대여 투쟁의 선봉장으로 이름을 날렸다. 남민전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이재오는 96년 16대 총선을 앞두고 민자당이 신한국당으로 이름을 바꾼 뒤 합류, 이제 한나라당을 좌우하는 거물 정치인이 되었다. 조영래·김근태와 함께 서울대 운동권 삼총사로 불리던 손학규는 민자당에 들어간 뒤 한나라당의 대통령 경선을 노리고 있다. 이부영은 민주당에서 보수당인 한나라당으로 적을 옮겨 한동안 보수정치인으로 활동했다.

진보정당 불모지 한국사회에 진보정치를 실현하겠다는 오랜 꿈을 간직해온 이들은 제도권 정당을 거부하고 진보당 건설에 나섰다. 이우재·김낙중·장기표·이재오·안영근·김문수 등은 90년 민중당을 결성했다. 그러나 정당득표율 1.5%란 초라한 성적을 받은 뒤 지리멸렬해졌다. 그로부터 10년의 세월이 흘러 민주화 이후 활발해진 노동운동을 배경으로 한 세력과 민족해방파(NL)의 결합으로 2000년 민주노동당이 결성됐다. 언론노동조합 운동을 주도해던 권영길, 전노협이라는 노동운동의 주력부대를 이끌던 단병호,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의 핵심 노회찬, 서울노동운동연합의 보스였던 심상정이 의회에 진입하는 새로운 역사가 쓰여졌다.

민주화로 재야의 공간이 사실상 사라지면서 진보인사들이 대거 시민운동으로 진입했다. 90년대 ‘시민단체의 대폭발’ 시대가 온 것이다. 89년 서경석 목사가 주도한 경제정의실천시민운동연합(경실련)은 시민단체의 대표주자가 되었다. 최열 주도의 환경운동연합이 93년 4월 출범, 진보적 시민운동의 신호탄을 올렸다. 이어 94년 9월에는 박원순·김기식·이태호 등이 자유주의적인 경실련을 대신할 ‘진보적 시민운동’을 표방하며 참여연대를 결성, 대표적 시민운동 조직으로 키웠다.

과거 운동권들은 노무현정부 들어 활발해진 보수세력의 조직화에도 주도적으로 나서고 있다. 도시산업선교회에서 노동자 의식화에 앞장서 왔던 서경석 목사는 이제 보수 시민단체인 ‘선진화국민회의’의 사무총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지하 노동운동을 해왔던 신지호는 좌파와의 대결을 선언하며 신자유주의연대를 조직, 뉴라이트 운동의 기수가 됐다. 주사파 홍진표·한기홍은 북한민주화네트워크를 결성, 반김정일·북한인권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박영환기자〉

 

 

[진보개혁의 위기] 1-2. 민주세력 집권의 그림자

입력: 2006년 09월 17일 18:21:55

 
“80년대 캠퍼스나 거리의 최루가스만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뛰고 숨이 막힙니다.” 회사원 유모씨(43)는 1987년 6월의 기억을 묻자 “참 많은 게 달라졌다”고 말했다. 그리고 압축해서 ‘열망과 절망’이라는 두 단어로 표현했다. 82학번인 그는 미국 유학중이던 87년 6월 한 학기를 포기하고 귀국했다. 학교를 다니고 있거나 막 취직해 넥타이를 맨 친구들과 종로와 명동 일대에서 어깨동무를 하고 뛰어다녔다. “‘호헌철폐·독재타도’ ‘한열이를 살려내라’는 구호였죠. 빌딩에서 휴지와 음료수가 떨어지고, 가판 아줌마가 김밥 꾸러미를 싸줄 때 ‘정말 되겠구나’ ‘귀국하길 잘했다’며 가슴 저 밑에서 솟구치는 게 있었어요. 노태우가 항복선언하던 6월29일, 그날 밤 대학 앞에서 밤새 친구들과 막걸리를 퍼마시던 희열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습니까.”

10년이 흐른 98년의 크리스마스 전날,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해 취직한 유씨는 명동에서 한 프랑스 라디오 기자를 만났다고 한다. ‘DJ정부 1년을 보는 소감이 어떠냐’는 질문을 받았다. “많은 젊은이들이 대학생활을 포기하고 민주인사들을 따라 반독재투쟁에 나섰고 정권교체도 이뤘지만 변한 건 없습니다. 허탈해요.” 유씨의 학과 동기 50명 중 정상적으로 대학을 졸업한 친구는 9명에 불과했고, 동기 중 한명은 공안기관의 조사를 받고 정신병원 신세도 졌다.

그러나 98년 겨울, 민주화된 세상이 시민들에게 던져준 것은 외환위기였다. 가난한 자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고, 거리는 학생과 넥타이 부대 대신 노동자들의 시위로 넘쳤다. 민주화 이전과 이후의 차이는 거리투쟁을 하는 세력의 교체뿐이었다. 대학 동기 한 명이 보수정당인 한나라당에서 정치를 시작한다는 소문을 들은 것도 그 즈음이다. 그가 말했다. “결국 6월의 꿈은 짧았죠.”

선거는 주기적으로 치러지고, 정권교체가 이루어지고, 권력을 비판한다고 남영동 지하실이나 경찰에 끌려가 고문을 받는 일은 없어졌다. 그러나 꿈과 열정을 안고 집권한 그들은 위선과 부패로 얼룩져갔다.

소통령으로 불린 YS의 차남 김현철씨, ‘홍3 게이트’로 명명된 DJ의 세아들, 기득권화된 386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가는 우울한 그림자다. 특히 민주화의 상징 인물인 YS와 DJ의 두 집권세력은 서로 질세라 부패경쟁을 했다. YS정권 초기 청와대 교육문화사회수석비서관을 지낸 김정남씨는 “민주정권이 부정부패하면서 민주화운동 세력도 ‘위선과 거짓으로 나라를 망쳤다’ ‘인간적으로 못된 놈들’이라는 손가락질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김영삼·김대중·노무현 등 민주정부는 전두환·노태우 정부가 부분 적용하기 시작한 개방과 시장주의를 확대 도입하면서 사회를 무한경쟁의 정글사회로 변화시켜 나갔다.

94년 11월. 김영삼 대통령은 호주 시드니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 정상회의(APEC)에 참석, “국정목표를 세계화에 두겠다”고 선언했다. ‘세계화’는 우루과이라운드 타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 금융시장 추가 개방때 현실화됐고 자본시장 개방은 외환위기라는 직격탄을 맞았다. 김대중 정부는 IMF 프로그램에 따라 은행 통폐합과 기업 구조조정을 했다. 거리에 나가 민주주의를 목타게 부르던 넥타이 부대들은 그토록 원하던 민주화가 다가오자 다시 거리로 쫓겨났다. 우리사회 첫 사회안전망 개념으로 기초생활수급제도를 만든 ‘생산적 복지’ 정책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소외와 빈곤은 그보다 더 크고 빠르게 진전되었다. 97년 0.283이던 지니계수는 DJ정부 말기인 2001년 0.319로 악화됐다.

노대통령은 지난해 5월 기업총수들과 만나 “이제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고 말했지만, 정확하게 말하자면, 넘어간 것이 아니라 민주정부들이 넘긴 것이다.

98년 ㅂ은행과 ㅎ은행이 통폐합할 때 1억5천여만원의 명퇴금을 받고 나온 김모씨(50·지점장 출신)는 다른 명퇴자와 동업해 명동에 일식집을 차렸다가 2년 만에 퇴직금을 다 까먹었다. 긴 불경기에 월세조차 메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나야말로 ‘잃어버린 10년’이다. 명퇴자들이 그렇듯이 한번 처진 약자는 어디에도 비빌 언덕이 없다”라고 술회했다. 카드채와 부동산 부양의 후유증을 안고 출범한 참여정부에서도 시장의 무한경쟁을 강조하는 ‘신자유주의’ 흐름은 더 빨라지고 있다. 개방과 친자본 정책에 맞서 분신하거나 사망한 노동자·농민은 15명에 달하고 있다. 평택 대추리 때도 그렇고, 지난 7월 한·미FTA 시위를 막기 위해 전국 경찰의 70%를 서울에 집중한 ‘공권력 과잉’은 80년대로 되돌아온 느낌이다.

민주화의 최대 수혜자는 서민이 아니라 민주화 운동 경력으로 집권하고 고관대작 자리를 차지한 이들과 대자본이다. 최갑수 서울대 교수는 “97년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는 이제 누구나 누릴 수 있는 공공재가 됐다. 그러나 그 공공재의 혜택을 가장 많이 누리는 쪽은 다름 아닌 자본이다”라고 지적했다. 민주세력 집권 이후 계급이라고 할 만한 세력이 뚜렷이 형성되고 있는 현상, 즉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양극화 심화가 그 현실을 잘 말해준다.

87년 4월13일 늦은 아침을 먹다 TV에서 ‘호헌 조치’를 발표하는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숟가락을 던졌다는 홍성태씨(42·상지대 교수). 그는 87년 대항쟁이 끝나고 서울대 총학생회에서 벌어졌던 한 토론회의 삽화를 전했다. 뭔가 찜찜하고 허탈해하던 사람들에게 “작지만 귀한 승리다. 이 중요한 첫 발자국을 어떻게 이어나갈 것인가가 더 중요하다”고 직접 토론회를 정리했던 장면이다. 홍교수는 그러나 “이제는 보수에 포위된 민주화라는 표현을 쓴다”며 “진보·개혁세력이 개혁은 둘째치고, 재벌에 투항하는 게 위기의 실체”라고 말한다.

중학생과 초등학생 자녀를 둔 직장인 최모씨(41·서울 은평구 녹번동)는 IMF 이전에 4천만원대이던 연봉을 10년이 지난 지금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최씨는 “아이들이 30만원짜리 학원을 하나 더 다닌다고 해도 부담이 되는데 강남에 사는 친구들이 한 아이에 1백50만원씩 학원비를 쓴다는 말을 들으면 답답하기만 하다”며 “일할수록 빚이 늘어나는 게 현실”이라고 답답해했다.

대다수 중산층·서민들이 민주세력에 대해 느끼는 절망의 핵심은 그들이 어떻게 민주화의 열망을 이런 참혹한 절망으로 바꾸어 놓을 수 있는가이다. 2004년 OECD 통계에 따르면 한국의 소득10분위 분배율은 9.4로 평균(4.3)의 두배를 넘었다. 누가 이런 민주주의를 타는 목마름으로 불렀겠는가.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는 “87년 6월 항쟁과 7·8 노동자 대투쟁이 따로 분리돼서 열린 게 위기의 씨앗이고, 87년체제의 그늘이자 한계였다”고 분석했다.

노대통령의 후보시절 TV 찬조연사로 나섰던 ‘자갈치 아지매’ 이일순씨(61)가 참여정부 출범 3주년을 맞아 경향신문과 가진 인터뷰는 이 땅의 서민들이 가슴에 품고 있는 응어리 그대로였다. “불경기와 싸움질밖에 기억이 안 납니더. 아귀 장사 30년째인데 매출이 뚝 떨어져 일당도 못 주는 날이 생길 정도였습니더. 가게 문 닫는 줄 알고 얼마나 가슴 졸였는지.”

고려대 최장집 교수는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서문에서 이렇게 썼다. “뮤지컬 ‘레미제라블’의 초반부에 민중들은 ‘변한 것이 아무 것도 없네’라고 노래한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에 민중의 실망, 민중혁명 이후에도 변한 것이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사회도 민주화 이후 달라진 게 뭐냐는 회의적인 질문이 광범위하게 제기되고 있다.”

그런데도 집권자는 지금의 절망을 보지 못하고, 6월의 거리에서 다시 지지를 모으려 애쓰고 있다. 87년 인권변호사 시절 부산의 ‘거리투사’였던 노무현 대통령은 취임 첫해 “6월 항쟁은 내 존재의 근거”라고 말했다.

〈박영환기자〉

*특별취재팀 : 이기수 오창민 김광호 박영환 전병역 최민영 손제민

 

 

[진보개혁의 위기] 386세대 80% “진보개혁의 위기 공감”

입력: 2006년 09월 19일 18:29:03

 

386세대의 대부분이 진보개혁세력이 위기라는 담론에 공감하고 있으며 그 책임은 참여정부와 열린우리당, 그리고 노동운동 세력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경향신문과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가 학계·시민단체·국회·언론계·기업 등 5개 분야에 진출한 386세대(36~45세) 전문가 집단에서 각각 20명씩 모두 100명을 대상으로 지난 4~8일 전화면접조사를 실시한 결과 이같이 분석됐다.

386세대 전문가 집단의 80%는 “한국사회의 진보개혁세력이 위기에 처했다는 주장에 공감한다”고 밝혔다.

또 “위기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느냐”는 질문에는 참여정부가 53%로 가장 많았다. 다음으로는 열린우리당과 노동운동단체가 각각 17%로 조사됐다.

그들은 진보개혁세력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문제 해결 및 정책 능력의 부족(59%)을 꼽았다. 다음으로는 대안 및 비전 제시 부재(12%), 국민과의 소통 부족(9%) 등을 들었다.

진보개혁세력이 우선 개선해야 할 점은 나만 옳다는 오만과 독선(42%), 그리고 문제해결 및 정책추진 능력 부족(30%)이라고 답했다.

또 참여정부 출범 이후 국민들의 이념성향이 ‘이전보다 보수화되고 있다’(71%)는 응답이 ‘이전과 별 차이가 없거나 진보개혁적 성향이 강해졌다’(28%)는 진단보다 훨씬 많았다. 한국사회 진보와 보수의 구분 기준은 ‘성장과 분배에 대한 인식’(65%)이라고 응답, 서구식 진보·보수의 개념이 자리잡혀가고 있음을 드러냈다. 전통적으로 진보·보수의 기준이 되었던 남북관계와 한·미관계에 대한 인식을 기준으로 꼽은 경우는 각각 13%와 7%에 불과했다.

진보개혁세력이 가장 관심을 두고 추진해야 할 정책분야로는 교육개혁(23%), 고용확대(15%), 복지문제(13%)가 우선 순위를 차지했다. 정치개혁은 11%였다.

386세대는 진보개혁세력의 장점으로 사회변화를 위한 실천(63%), 높은 도덕성(19%), 미래지향적 이념노선(13%) 등을 꼽았다. 보수세력의 장점으로는 정책추진능력(42%), 현실적인 이념노선(29%)이 높게 나타났다.

〈박영환기자 yhpark@kyunghyang.com

 

 

[진보개혁의 위기] “진보세력 문제해결·정책추진 능력 없다”

입력: 2006년 09월 19일 18:30:28

 
6월항쟁의 주역인 386세대 100명에게 물었다. 그들이 발동한 민주화, 그들이 구축한 87년 체제에 그들은 얼마나 만족하고 있을까. 아니 그들 스스로 얼마나 변했을까. 경향신문과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가 학계·시민단체·국회·언론계·기업 등 5개 분야에 진출한 386세대(36~45세) 100명을 대상으로 지난 4~8일 전화면접조사를 실시했다. 그들의 의견을 분야별로 정리했다.

◇ 여당·노동운동 세력도 위기초래 책임

진보개혁의 위기에 대해서 80%가 공감한다고 밝혔다. 진보개혁세력이 사회의 진보와 개혁을 위해 자기 역할을 잘 수행했느냐는 질문에는 70%가 잘 못했다고 답했다. 위기의 첫번째 책임은 참여정부에 있다는 응답이 53%로 압도적이었다. 다음은 열린우리당(17%), 노동운동단체(17%), 시민단체(5%), 진보개혁 지식인(4%), 민주노동당(1%)의 순이었다. 2순위 중복응답을 합하면 참여정부(69%), 우리당(55%), 노동운동단체(31%) 등의 순으로 집권세력 책임론이 더 많았다.

참여정부 책임론은 진보(66%), 보수(77%)에 상관없이 모두 높게 나타났다. 학계(70%)와 기업(60%)으로 진출한 386의 다수도 참여정부의 문제를 크게 지적했다. 집권세력이 아닌 집단으로는 노동운동단체가 수위를 차지한 점도 눈에 띈다. 노동운동단체에 대해서는 지난 7월 KSOI의 여론조사에서도 ‘일부 노동자 기득권 보호 등 부정적 측면이 더 크다’고 나타난바 있다.

◇ 노정부 출범 이후 국민들 보수화

386세대는 참여정부 출범 후 국민들의 이념성향이 보수적으로 바뀌고 있으며, 노동계와 시민단체를 제외한 모든 분야에서 보수안정세력이 강하다고 진단했다. 국민들의 성향변화에 대해 71%가 보수안정화 경향이 높아졌다고 답했으며, 진보개혁적 성향이 강해졌다는 응답은 16%에 그쳤다. 특히 사회가 보수화되고 있다는 진단은 본인이 보수라고 밝힌 386세대(45%)보다 진보적이라고 밝힌 응답자(81%)에서 높게 나타났다.

각 분야에서의 보수 대 진보세력의 영향력 평가에서는 정치권(78%대 20%), 재계(96%대 3%), 공무원사회(91%대 7%), 언론계(78%대 14%), 학계(63%대 26%) 등에서 보수세력이 압도적으로 강하다고 분석했다. 대학은 49%대 45%로 엇비슷했으며, 시민단체와 노동계는 진보세력이 각각 91%와 85%로 우세인 것으로 봤다.

- “나도 보수화됐다” 48%

386세대 스스로는 본인을 진보적이라고 답한 사람이 64%로 보수(22%)보다 많았다. 본인의 이념성향 변화에 대해서는 과거에 비해 보수화됐다는 대답이 48%였으며, 이전과 별 차이가 없다고 답한 사람은 52%였다. 직업별로는 기자만 유일하게 본인이 보수(40%)라는 응답이 진보(35%)라는 응답보다 많았다.

◇ 비전과 소통 부재의 문제도 심각

진보개혁세력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는 문제해결 및 정책추진 능력부족(59%)이 꼽혔다. 다음으로는 대안 및 비전제시 부재(12%), 도덕성의 약화(10%), 국민과의 소통부족(9%) 등이 제시됐다. 복수응답을 합하더라도 그 순위는 변하지 않았다. 가장 시급히 변해야 할 점으로는 나만 옳다는 오만과 독선이 42%로 가장 많았다.

다음으로는 문제해결 및 정책추진 능력부재(30%), 이상적이고 비현실적 주장(10%), 주장의 과격한 표출(7%) 등의 순이었다. 복수응답을 합하면 문제해결 능력부재(68%)가 오만과 독선(57%)보다 더 많이 지적됐다.

이는 노대통령의 가장 큰 문제로 정책수행능력(43%)이 지적된 지난 2월 실시된 KSOI의 일반인 상대 여론조사 결과와 일치한다. 지난 4월 조사결과 역시 우리당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정책추진 능력부족(32.6%)이 지적됐다.

◇ 정치보단 민생…고용확대·복지 시급

진보개혁세력의 가장 큰 기여분야를 묻는 설문에는 정치개혁(30%)과 인권(30%)이 많았다.

남북관계(18%), 복지문제(11%), 지역균형발전(5%) 등은 다음 순위였다. 2순위 응답을 합쳤을 경우 인권(53%)이 정치개혁(44%)보다 높았다.

특히 보수적이라고 답한 응답자들이 인권(36%)을 가장 많이 꼽았으며, 진보적이란 응답자들은 정치개혁(34%)을 지목했다.

사회발전에 기여한 가치로는 권위주의문화 타파(53%), 사회의 투명성 강화(23%), 왜곡된 역사의 복원(10%), 사회적 차별 완화(10%) 등의 순이었으며 빈부격차 완화라는 응답은 3%에 그쳤다.

그러나 진보개혁세력이 가장 관심을 두고 추진해야 할 정책분야로는 사회경제적 개혁이 제시됐다. 교육개혁(23%), 고용확대(15%), 복지문제(13%) 등의 순서이다.

다음으로는 정치개혁과 부동산 문제가 각각 11%로 나왔으며, 비정규직문제(6%), 저출산고령화문제(5%), 조세개혁(5%) 등이 꼽혔다.

3가지 중복응답을 합해도 교육개혁(42%), 복지문제(35%), 고용확대(34%), 부동산문제(32%)가 정치개혁(28%)보다 앞섰다.

◇ 진보와 보수는 ‘성장과 분배’로 구분

386세대는 한국사회의 진보와 보수를 나누는 기준으로 남북관계보다 ‘성장과 분배에 대한 인식(65%)’을 압도적 다수로 꼽았다. 다음으로는 소수자 권리에 대한 인식(14%)이라고 답했으며, 남북관계와 한·미관계에 대한 인식이라는 답변은 각각 13%와 7%에 그쳤다. KSOI의 지난 12일 일반인 상대 여론조사에서도 진보와 보수의 구분은 남북관계가 아닌 성장과 분배에 대한 인식이라는 답변이 다수였다. 남북간 화해와 협력이 국민적 합의를 형성하고 있어 진보·보수간 의미있는 차이를 두기 어렵게 된 현실이 반영된 것으로 분석된다. KSOI 장형철 분석팀장은 “과거 진보와 보수 간에는 대북관계에 대한 인식차가 컸으나 최근에는 성장과 분배라는 서구적 진보와 보수의 분류기준이 자리잡고 있다”고 설명했다.

◇ 사회기여도는 ‘보수보다 진보’59%

진보와 보수 세력 가운데 어느 쪽이 한국사회에 대한 기여도가 높은가라는 설문에 진보개혁세력이라고 응답한 이는 59%로 보수안정세력이라고 한 33%보다 많았다. 이는 산업화 세력의 사회발전 기여도가 64.5%로 민주화세력 26.8%보다 크다는 KSOI의 지난 3월 일반인 상대 여론조사와 대비된다. 386세대가 다른 세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진보적 성향이라고 할 수 있는 근거다. 진보개혁세력의 장점으로는 사회변화를 위한 실천(63%), 높은 도덕성(19%), 미래지향적 이념노선(13%) 등이 꼽혔다. 중복응답을 합하면 미래지향적 이념노선(60%)이 가장 많았다. 도덕성에 대한 평가는 본인이 진보적이라는 응답자 중에서는 25%로 높게 나타났으나 보수적이라는 응답자 중에서는 5%에 그쳤다.

〈박영환기자〉

 

 

[진보개혁의 위기] 보수 최대 문제는 ‘부패’ 38%

입력: 2006년 09월 19일 18:30:42

 

386세대는 국내 보수안정 세력의 최대 문제점으로 부패(38%), 사회변화에 대한 저항(26%), 자기혁신 노력의 부족(16%), 미래지향적 비전 제시 부재(9%) 등을 꼽았으며 ‘참신하고 신뢰할 만한 인물의 부족’도 8%나 응답했다.

1, 2순위를 응답을 합했을 경우는 자기혁신 노력의 부족이 49%로 가장 높게 나타났다. 다음으로 사회변화에 대한 저항(48%), 부패(45%), 미래지향적 비전제시 부재(25%) 등의 순이었다.

이념성향별로 자신을 진보라고 답한 386들은 사회변화에 대한 저항(55%)을, 자신이 보수라는 응답자들은 자기혁신 노력 부족(50%)을 보수안정 세력의 가장 큰 문제로 들었다.

직업별로 학자(65%)와 국회에 있는 사람들(50%)은 사회변화에 대한 저항을 보수안정세력의 최고 문제로 봤고, 기업체 근무자들은 자기혁신 노력 부족(65%)을 꼽았다.

보수안정 세력의 장점으로는 1순위 응답에서 정책추진 능력(42%)과 현실성 있는 이념 노선(29%)을 들었다. 무응답이나 모름도 25%였는데 2순위까지 합칠 경우는 68%나 됐다. 특히 진보 성향의 응답자(42%)를 비롯, 거의 모든 응답군에서 정책추진 능력을 보수안정 세력의 최고 장점으로 꼽은 점이 돋보였다.

〈전병역기자〉

 

 

[진보개혁의 위기]“진보 대표는 민노당” 15%

입력: 2006년 09월 19일 18:31:14

 
진보개혁세력의 대표집단이나 인물로는 민주노동당(15%)을 가장 많이 지목했다. 다음은 참여연대(14%). 노무현 대통령과 열린우리당은 각각 11%였으며, 김근태 열린우리당 의장은 3%만이 진보개혁진영의 대표라고 답했다. 민주노총 등 노동운동단체는 4%로 나타났고, 장하성 교수(3%), 최장집 교수(2%), 박원순 변호사(2%), 리영희 교수(2%) 등도 대표인물로 꼽혔다.

노대통령과 열린우리당에 대해서는 본인이 진보적이라고 밝힌 사람 중에서는 각각 8%와 5%만이 진보개혁의 대표주자라고 꼽았다. 반면 보수라고 응답한 사람들은 각각 노대통령에 대해 23%가, 열린우리당에 대해 27%가 진보개혁세력으로 간주했다. 이는 상대적으로 보수층이 노대통령을 진보개혁세력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높다는 것을 말해준다. 386의 시각에서는 노대통령과 우리당이 진보개혁세력의 대표주자도 아니면서 위기의 원인을 제공한다는 이미지가 고착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보수안정 세력을 대표하는 집단·인물로는 한나라당(33%)에 이어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17%), 조선일보(14%)의 순서로 응답했다.

조선일보의 경우 진보성향 응답자의 19%가 보수안정 세력의 대표 집단으로 지적한 반면, 보수성향의 응답자는 5%만 조선일보라고 답해 큰 차이를 보였다. 반면 대권주자인 이명박 전 서울시장(1%), 손학규 전 경기도지사(1%)는 전경련(2%) 박세일 서울대교수(2%)보다 보수 대표성이 낮았다. 뉴라이트(5%) 한국기독교총연합회(4%)도 각각 4·5위에 올랐다.

〈전병역기자〉

 

 

[진보개혁의 위기] 1-3. 기득권이 된 민주세력

입력: 2006년 09월 19일 18:37:00

 

지난 5월 서울 양천구 한 중학교의 전교조 교사들이 격론을 벌였다. 서울시가 추진중인 ‘국제중학교’ 설립 저지를 위해 단식투쟁에 들어간 전교조 서울지부장 정진화씨를 격려방문할 것인가 하는 문제 때문이었다.

교육양극화 심화 우려라는 단식의 명분에도 불구하고 이제 학부모의 입장에 선 그들이 농성장을 찾는 일은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결국 아무도 단식현장을 찾지 않았다. ‘평등교육’에 대한 전교조의 신화는 더 이상 없었다.

휴머니즘과 ‘공동체’를 향한 ‘6월의 열정’도 잃어버린 민주화세력에게 남은 것은 비루한 현실과 과거에 기대 딱딱해진 껍데기뿐이었다.

민주화 운동의 경력은 권력으로 바뀌었고, 그 권력은 다시 돈으로까지 미쳤다. 1987년 체제 이후 20년, 짧게는 민주정부가 들어선 지난 13년 세월의 풍경이다. 저항의 투사에서 능숙한 정치인과 사업가, 기성인으로 변신한 그들은 이제 모순투성이 사회의 기득권 세력으로 전화했다. ‘오만과 (기득권에의) 안주’는 이제 그들의 ‘주홍글씨’가 됐다.

‘국민의 정부’ 초인 15대 국회 말. 신년을 맞아 당시 실세 동교동계 중진의 집을 찾았던 한 여권 인사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청와대 밖의 권부(權府)답게 예상대로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지만, 정작 놀란 것은 거기서 만난 한 정치인 때문이었다. 당시 가장 촉망받던 386세대 정치인이던 그는 멋쩍은 모습으로 방문객들의 신발을 정리하고 있었다.

386들은 너무 쉽게 기성문화에 물들었다. 2000년 5월 광주에서 소위 386정치인들의 단란주점 파문은 기득권이 된 민주세력의 실상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스스로를 ‘80년 광주의 자식’이라고 규정해온 그들이 바로 5월 그곳에서 권력자의 술판을 벌인 것이다. 구(舊)정치인들에게 머리 조아리고, ‘충성 서약’까지 하며 얻어낸 작은 권력에 취해, 무뎌진 이성의 증거였다.

정태인 전 청와대 비서관은 “로비와 압력은 다 386을 통해서 올라온다”고 했다. “관념화된 급진화, 생활에 뿌리박지 못한 급진화”(조희연 교수)의 결과이다.

최근 전문가 100명을 대상으로 한 민주노동당 진보정치연구소의 여론조사 결과 ‘386의원(78.9%)’이 ‘17대 국회에서 가장 큰 실망을 준 집단’으로 낙인찍힌 것도 이런 사정과 무관치 않다.

실제 과거 ‘재야·운동권’에서 속속 사회의 주류로 진입한 그들이 보여준 실상은 이전 세대들이 쳐 놓은 ‘관습’의 덫을 답습했다. 정권창출에 성공한 후 급격히 권력화 됐고 일상에 매몰됐다.

- 기득권의 상징된 골프 -

이호웅 의원. 독재의 발톱이 서슬퍼런 시절 저항단체 민통련을 이끌며 수배와 잠적, 미행과 영어의 나날을 보냈던 재야투사다. 한때 민중의 세상을 위해 목숨걸고 저항하던 그도 2002년 불법 정치자금의 덫은 피하지 못했다.

수해가 한창이던 지난달에는 골프를 즐기기 위해 외국행을 한 여당 의원들 일행 속에 포함되어 있었다. 얼마전 법원으로부터 정치자금의 덫 때문에 당선무효형을 받고, 외유골프를 가능하게 한 그의 기득권, 의원직을 잃었다.

지난 7월 증권선물거래소 노동조합은 주요 일간지에 이례적인 광고와 함께 총파업을 선언했다. 운동권 출신 열린우리당 인사가 상임감사에 내정된 것으로 알려진 뒤였다. 총파업에 들어갈 경우 주식거래가 전면중단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질 상황이었다.

결국 그 인사의 상임감사 임명을 강행하려던 임시주주총회는 무기한 연기됐다.

이해찬 전 총리. 역시 재야의 전략가로 엄혹한 시절을 단단한 기개로 견디며 시민들의 희망 재야조직을 지켰던 그는 의원이 되어서도 자기의 원칙을 꼿꼿하게 지켰다. 수많은 의원들이 골프취미를 즐길 때도 그는 사양했다. 골프를 배운 자신의 보좌관에게 “골프는 무슨 골프냐”며 호통을 쳤다.

그러나 건강을 위해 골프를 하라는 의사의 권유로 시작한 것이 결국 ‘총리’ 낙마에 이르는 원인이 됐다. 식목일 날 문화재가 산불로 유실되는 상황에 골프를 쳤다는 이유로 곤욕을 치르고도, 이듬해 3·1절에 부산의 기업인들과 부적절한 골프를 한 것이 결정타였다. 결국 그는 재야시절 상상할 수 없었던 이유, 바로 골프 때문에 총리직에 물러났다. ‘권력의 비극’인 셈이다.

이전총리 외에 임채정 국회의장 등 재야출신, 동교동계 인사들에게 골프는 김대중정부 출범 이후 집권의 전리품이나 마찬가지였다. 대부분 그 이후 골프를 시작한 것이다. 이런 재야 인사, 야권 인사의 골프취미는 변해버린 민주세력의 삶을 보여주는 한 증거로 회자되고는 했다. 국민의 정부 당시 한 관계자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화를 내면 골프 금지령을 내렸다가 다시 슬그머니 조금씩 치고는 했다”고 회고했다.

- 지갑엔 빳빳한 수표 빼곡 -

실제 권력을 잡으면서 주류로 편입된 민주세력들에겐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보상도 뒤따랐다. 과거 군출신이나 관료들이 차지하던 자리들은 이제 그들의 무대가 됐다. 문민정부부터 참여정부까지 매번 ‘낙하산은 없다’던 공언(公言)은 말그대로 ‘공언(空言)’이 됐다. 공기업 등 권력의 입김이 미치는 곳은 그들로 채워졌고, 그것은 과거 민주화 운동시절 ‘풍찬노숙’의 당연한 보상으로 받아들여졌다.


그 자리에는 최저 6천만원에서 최고 7억원까지 연봉이 주어진다. 문제가 된 증권선물거래소 상임감사는 연봉만 2억1천만원을 받는 자리이다. 양극화가 심각한 사회문제도 대두되던 신자유주의의 물결 속에서 그들은 나름의 피난처를 찾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 결과 집권한 민주세력들은 기득권을 공유하고, 재생산하기 위해 알음알음의 ‘모임’을 만들고 유지했다. 민주산악회(문민정부), 인동회(국민의정부), 청맥회(참여정부) 등이 바로 그것이다. ‘친목 모임’으로 출발했지만, 국감·개각·공기업 인사때마다 ‘제2의 하나회’로 공격받아온 ‘공신그룹’ 모임일 뿐이었다. 하나회를 해체한 민주세력이 자기들을 위한 ‘새로운 하나회’를 만든 것이다. 1981년 정치규제때 결성된 민주산악회를 빼면 인동회나 청맥회는 모두 집권 첫해에 만들어졌다.

참여정부 들어서도 이우재(마사회장·연봉 1억6,200만원), 이철(철도공사사장·8,450만원), 윤덕홍(한국학중앙연구원장·1억400만원), 박금옥(원자력문화재단이사장·9천만원), 권재철(고용정보원장·6,660만원) 등 많은 민주운동 출신들이 공공기관에 자리를 잡았다. 참여정부 공신그룹중 공기업 임원 모임인 청맥회의 경우 올해 들어 회원이 130여명까지 늘었다.

전북대 강준만 교수는 “민주투사 내에서 서열은 있기 마련”이라며 “재미를 본 것은 지도자 그룹일뿐”이라고 지적했다. 민주세력들은 충분히 보상을 받았다. 일각에선 ‘과잉보상’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권력, 사회적 지위를 넘어 금력에 까지 이른 것에 대한 지적이다.

이런 권력은 필연적으로 ‘부패’를 수반하기 마련이다. 민주세력의 부패는 과거 그들의 쌓아놓은 정통성의 계좌를 텅 비게 만들었다.

지난 16대 국회 당시 율사 출신의 한 민주당 의원은 어느날 서울 인근의 골프장을 찾았다. 그 때 한 당내 실세 중진과 우연히 조우했다. 지인들과 골프를 치던 그 실세 의원은 율사 출신 의원이 몇몇 언론인과 동행한 것을 보고 반가워 하며 즉석에서 “잘 대접하라”면서 수표 다발을 건넸다. 그는 “당시 지갑속에 빳빳한 수표들이 빼곡하게 꽂혀 있더라. 상당히 놀랐다”고 말했다.

- “말로만 서민의 대변자” -

국민의 정부 당시 권노갑 전고문 등 동교동계 의원들의 돈잔치는 좀더 나중에 밝혀졌다. 그들은 줄줄이 ‘돈’ 문제에 연루돼 옥살이를 했다. 그 과정에서 이들의 간단찮은 씀씀이가 일부 공개된 바 있다. 박지원 전비서실장이 국민의 정부 시절 기자들과의 한끼 식사값으로 1천만원을 쓴 적도 있다거나, 권노갑 전고문의 경우 시내 특급호텔의 한 중식당에서 한끼에 1백20~1백30만원에 이르는 식사를 일주일에 3~4차례 즐겼다는 것이다.

모두 본인들은 부인했지만, 현대비자금 등 공판 과정에서 나온 증인진술들이다. 그래도 그들은 스스로를 중산층과 서민의 대변자라는 간판을 잊지 않았다.

김대중 정부의 부패 시리즈, 즉 ‘정현준·진승현·최규선·이용호’ 등 이른바 4대 게이트는 결코 ‘국민의 정부’가 아니었음을 증거하고 있다. 이 사건으로 김대중 대통령 자신이 레임덕에 빠졌고, 그의 아들들이 구속됐다. 문제는 김대통령 부자의 고통이 아니라, 그런 장면을 바라보는 국민들의 민주세력에 대한 배신감과 절망의 깊이이다. 참여정부 들어서도 추문은 끊이지 않았다.

노대통령의 최측근인 최도술 전 청와대 총무비서관은 SK 비자금을 수수, 노대통령의 ‘대국민 사과’와 ‘재신임’ 소동을 몰고 왔다. 최전비서관 외에도 정대철 전 선대본부장, 여택수 전 수행비서, 안희정씨 등이 불법으로 거액을 받아 수감이 됐다. 당시 공판에서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은 안씨에게 ‘용돈’으로 2억원을 줬다고 주장했다. 권력은 언제든지 현금으로 바꿀 수 있는 ‘환금성 높은 유가증권’이 된 것이다.

-끊임없는 과거 우려먹기-

이렇게 민주화 운동의 보상을 차고 넘치게 받은 이들이 더 많은 보상이 필요해서인지 세상사람들에게 끊임없이 민주화 운동 시절의 회고담을 잊지 않게 들려준다. 한 동교동계 중진은 “(과거 옥살이가 생각나) 난 지금도 항상 의자끝에 앉는다” “겨울엔 내복도 입지 않는다”고 말하곤 한다. 그들의 집권으로 삶이 더 팍팍해진 서민들이 그 회고담을 듣고 뭘 더 해주기를 바라는 것일까. 민주화 운동이라는 마패(馬牌)는 여전히 통용된다고 믿고 있어서일까. 그것을 내밀면 누구라도 말이라도 내줘야 한다고 여기는 것일까.

‘민주화 운동’의 훈장을 달고 당선된 대통령들은 예외없이 국정난맥에 대한 비판을 참지 못하고 개혁에 맞선 수구세력 및 반민주세력의 저항으로 치부하며 자신의 실정을 보수세력의 음모의 결과로 전가하려 했다. 민주집권세력을 비판하는 것은 반민주세력이 될 각오를 해야 했다. 김영삼 정부가 대표적이다.

노무현 대통령도 화물연대 파업 등 노사문제가 한창 꼬이던 2003년 5월 노사협력 유공자 초청 오찬에서 “지금 가장 강력히 정부를 비판하는 노동운동 지도자들은 내가 변호사때 열심히 변호하고 면회 다녔던 분들”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과거 ‘노동·인권 변호사’로서의 도덕성에 대한 자부심이지만, 노동운동 지도자가 노대통령을 비판할 만큼 훈장을 달고 있느냐는 독선으로 비춰질 수 있다.

이런 오만은 ‘나만이 옳다’는 ‘독선’으로, 자기 실정에 대한 무감각증으로 발전하고는 한다. 국회 본회의장에서 정부를 대표해서 출석한 이해찬 총리가 국민을 대신해 정책을 따질 준비를 하고 있는 야당을 향해 “차떼기 당”이라고 공공연히 모욕을 가한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여당 한 핵심당직자는 “갈등을 당연시하는 태도, 우월한 담론과 논리 다툼의 일상화 등 도덕적 우월주의로 전선정치만 벌였다”고 밝혔다.

-휴머니즘 사라진 진보-

노대통령은 2006년 신년기자회견에서 “여러 사람들의 의견이 꼭 역사 흐름에 부합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라고 놀라운 주장을 했다. 조기숙 청와대 홍보수석은 “때로 국민들을 끌고 갈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한번의 민주화 운동이 ‘나는 무오류’라는 절대 신념을 낳고 그래서 우중을 올바른 길로 인도할 천부권력을 부여 받기라도 한 듯한 언사였다.

노대통령의 한나라당과의 대연정 제안은 ‘나는 뭘 해도 옳다’는 오만의 극점으로 비쳐졌다. 지금종 문화연대 사무총장은 “민주진영을 중심으로 탄핵에서 구출했는데 거꾸로 한나라당과 대연정하자고 하니 코미니 아니냐”고 했다. “정책결정이나 집행은 여전히 박정희식 조급증”(이남주 성공회대 교수)이라거나 “청와대는 여전히 독립투쟁하는 것 같다”(여당 관계자)는 조소를 받는 것도 그런 이유다.

그 연장선에서 진보진영의 경직된 의식도 대중과의 거리감을 가져오는 요소로 작용했다. 지난 6월 민주노동당 홈페이지를 뜨겁게 달궜던 ‘월드컵-진보 논쟁’이 대표적이다.

“진보세력 안에서는 마치 월드컵을 무시해야 진보인 것처럼 주장하는 이들이 있는데, 이것은 잘못된 진보이며 오만한 주장이다. 월드컵에 대해 언급하면 상업주의에 놀아나는 것이라는 식의 경직된 주장이 진보인 양 오해되고 있다. 그것은 민중을 가르치려는 오만하고 고압적인 진보다.”(박용진 대변인)

월드컵 당시 무비판적인 애국주의 광풍과 상업주의는 비판 받아야 하지만, ‘민중’에 대한 믿음과 휴머니즘이 ‘진보’의 출발점이어야 한다는 원론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진보진영의 진지였던 시민단체도 기득권 구조 재편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문민정부 이후 많은 시민운동가들이 정부로 옮겨 갔고, 이는 궁극적으로 시민운동의 내적 에너지를 고갈시키는 요소로 작용했다. 일부 운동가들은 현실권력으로의 진출을 위해 시민단체를 발판으로 삼기도 했다.

문화연대 지금종 사무총장은 “시민운동 경험을 개인적 사회 진출의 디딤돌로 삼는 사람이 적지 않다. 노무현 정부 이후 이런 경향을 두드러졌다”면서 “정계나 산하기관, 각종 위원회 진출이 대표적”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들로 인해 시민운동 역량이 소진된 것도 사실”이라고 비판했다.

실상 민주진영 오만의 상징은 여전히 ‘민주화의 훈장’이 유효할 것이란 착각에서 나온 소위 ‘민주개혁세력대연합론’이다. 더구나 ‘민주개혁세력연합론’이 분출된 시점 자체가 민주화 운동 때의 선의와는 너무 거리가 먼 선거를 위한 ‘정치공학’이나 다름없었다.

정권재창출 가능성이 암울하던 2002년 대선정국이나 여권의 지방선거 참패가 기정사실화되던 최근 등 주로 ‘위기’ 국면에서만 돌출되었다는 점에서 특히 그렇다.

정치공학 차원이 아니더라도 재야 인사 박형규 목사 같은 이는 김영삼·김대중 정부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땅에 떨어질 때 민주세력 연합론을 제기, 심판받아야 할 처지의 정권에 새로운 정통성을 부여하려 했다.

-민주화=도덕성 아니다-

재야 출신 여당의 한 핵심관계자는 “이제 민주대연합 같은 논의로는 국민들에게 다가가기 어렵다. 더이상 국민들이 민주화 운동 경력을 도덕성의 근거로 보지 않는다”며 “하나의 정치적인 주장으로 볼 뿐”이라고 말했다.

그 현상을 고려대 고세훈 교수는 이렇게 묘사했다. “(민주세력은) 순진하고 오만하게도 1987년 체제를 부여잡고 그 이후의 세월을 덤으로 살려했던 유토피안이었는지 모른다.”

〈김광호기자 lubof@kyunghyang.com〉

* 특별취재팀 : 이기수 오창민 김광호 박영환 전병역 최민영 손제민 장관순기자

 

 

[진보개혁의 위기] 1-4. 민주정부 무능, 이유가 있다

입력: 2006년 09월 24일 17:49:31

 
2003년 2월 김헌동 경실련 국책사업 감시단장은 이정우·허성관·이동걸 등 경제분야 대통령직 인수위 책임자들을 만났다. 그는 두 가지를 주문했다. 후분양제와 공공 공사의 가격경쟁입찰제 도입이었다. 그는 “DJ정부때도 관료들이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가도 약속을 어겼다. 관료들에게 속지 말라”고 거듭 충고했다.

이정우 청와대 정책실장 등은 “국정과제에다 명기해 두면 고칠래야 고칠 수도 없다”고 자신했다. 실제 두 달여 뒤 노대통령은 취임후 첫번째로 건교부장관에게 후분양제 도입을 지시했다. 관료들이 움직인 것은 이 때부터이다. 소위 ‘전통적 방식’이다. 연구 용역을 준다, 여론수렴 공청회를 연다면서 시간을 끌었다. 언론에 내용도 흘렸고 ‘후분양제하면 몇십조원이 필요하다’는 보도들이 잇따랐다. 재벌기업의 경제연구소도 나섰다. 그렇게 꼬박 1년여뒤인 2004년 2월 ‘후분양제 활성화 방안’이라는 보고서가 노대통령에게 보고됐다. 연간 주택건설 물량 40만~50만채중 2007년에 한해 1,000가구만 후분양으로 하겠다는 것이었다.

참여정부 3년반. 출범당시 ‘참여’를 간판 삼아, 가장 역대정권 가운데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정부로서 기대를 모았던 참여정부는 지금 없다. 노무현 대통령 스스로도 지난 4월 정통부 ‘혁신현장 이어달리기’에서 “국민들이 이 정부를 참여정부로 많이 믿지 않는다”고 말했다. 왜 참여정부에서 ‘참여’가 사라졌을까.

- 밀린숙제 하듯 일처리 -

“정부 초기 부안사태와 미군기지 재배치 문제는 결과적으로 잘 모르고 당한 측면이 없지 않다. 사실 모두 90년대 정부의 해묵은 숙제였다. 당시 산자부 공무원들은 임시처리장이 2008년이면 포화가 되기 때문에 2004년엔 착수해야 한다고 다급하게 보고했다. 그러다 부안사태 터지고 결국 깨졌다. 그러고 나서야 새로운 응축기술이 개발되서 몇년 더 여유 있다고 그러더라. 한마디로 속은 거다. 관료들은 정부 출범초 새 정부가 아직 업무를 파악하기 전에 밀린 현안들을 숙제 해치우듯 밀어붙이는 습성이 있더라.” 청와대 한 참모의 증언이다.

이처럼 청와대를 포위한 ‘관료의 벽’은 견고했다. 관료들이 숙제를 해치우듯 방폐장 문제를 처리한 탓에 주민들이 반으로 갈라져 싸운 부안의 상처는 아직도 아물지 않고 있다. 노대통령이 지난해 7월 국무회의에서 ‘삼성 면죄부’ 의혹을 산 금융산업구조개선법 개정안 예외조항 문제에 격노한 사건이 말해주듯 관료들의 교묘한 저항은 정책 혼선의 한 원인이었다.

“장사의 원리에 어긋난다”는 노대통령의 발언으로 논란을 빚은 ‘분양원가공개’ 무산 전후의 정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헌재 사단’ 등 당시 재경부와 청와대, 여당의 경제라인은 ‘모피아’(재경부를 마피아에 빗댄 말)들로 도배된 상황이었다. 김헌동단장은 “당시 청와대 모비서관을 만났더니 ‘노대통령이 이헌재 부총리 손을 들어줬다. 부동산정책, 서민중산층 정책으로 갈 수가 없다’고 하더라”고 말했다.

10·29, 8·31 부동산대책을 논의하던 부동산 당정에 참석했던 한 관계자는 “이정우·김병준 실장 같은 이들이 부동산 대책을 만들어 가면 관료 출신 의원들이 서류를 집어던지곤 했다”고 전했다. 그는 “여당 정책위 라인들이 모두 재경부 출신 아니었나. 이헌재 부총리가 군단장이면 청와대나 당의 재경부 출신들은 사단장”이라고 꼬집었다. 청와대 정책실장을 지낸 이정우 경북대 교수도 관료의 저항과 관련, “등 뒤의 화살이 보수의 화살 보다 더 무섭다”고 의미심장한 한마디를 던졌다.

관료의 저항은 비단 참여정부만의 문제는 아니다. 국민의 정부 당시 ‘재벌개혁’ 좌절은 대표적이다.

“외환 위기 이후 누구 때문에 경제가 안됐다고 한다면 나는 독재시절 성장해온 관료에게 너무 기댄 결과라고 본다. 2003년에 신용카드 위기를 또 겪었다. 그건 2001, 2002년에 원인이 있다. 김대중 대통령이 감독기구 검토해보라고 했더니 어디든 ‘다 괜찮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김대중이든 노무현이든 개혁 말만했지 제대로 못했다는 게 문제였다. 관료들은 개혁을 하지도 않고 한 것처럼 한다. 군대에서 사열 받을때만 단정히 하고 사열 끝나면 그대로 인 것과 마찬가지다. 역사적 과제나 책무 생각 안하는 사람들이다. 개혁의 중요한 내용이 머리에 들어 있는 사람들이 가서 개혁을 해야 한다. 기존의 관료로는 안된다.” 국민의 정부 경제수석을 지낸 김태동 성균관대 교수의 말이다.

박주현 전참여혁신수석은 “정책 라인에 공무원이 100명 있다면, 그 중에 (집값) 다 떨어지길 바라겠느냐. 교묘한 정책 개입이 있을 수 있다. ‘오버 작전’을 한다. 오버할때 국민저항 일으킬만한 것을 오버하는 것이다. 증세, 비과세 감면 리크한게 누구인가. 서민정책 편든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고 말했다. “오랜동안 보수언론과 전문가들의 지지”(박주현 전수석)를 받고, “정책의 근거나 정보 등을 장악”(오성규 환경정의 사무처장)한 관료와의 싸움은 애초 힘겨운 것이었다.

- 민주적 리더십 부재 탓 -

그러나 노무현정부가 관료의 저항으로 개혁을 못했다는 것은 정확한 진단이 아니다. 개혁실패는 노무현정부가 관료를 장악할 실력과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최장집 고려대 교수는 “관료들에 포위됐다는 것은 표면적인 해석에 불과하다”면서 “민주적 리더십이 있거나 민주정부가 유능할 때는 관료들을 민주적으로 지휘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정부 초기에 최저임금제를 고쳐야 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노동부 관련 국장에게 브리핑 하라고 했다. 듣고 있으니 내가 별로 지적할 수 있는 부분이 없더라. 나중에 자문위원들 만나 그 브리핑 이야기했다가 박살이 났다. 내가 무식했던 것이다. 관료들은 다음날 아침까지 무슨 보고서 해오라고 하면 칼같이 출근전에 메일이 와 있다. 그런데 내용이 없다. 꼭 어떤 방향으로 하라고 지시를 해야 그렇게 온다. 내가 알지 못하는 부분은 그만큼 관료들에게 장악당하게 돼 있는 것이다. 글은 몇줄 그럴듯하게 진보적으로 쓰지만 집행과정에서 무식하고 정책적으로도 무능했다.” 박태주 전 청와대 노사개혁TF 팀장의 고백이다. “청와대에 있어보니 내가 그렇게 무능할 수 없더라”(박태주 팀장)거나, “경제문제에 관해서는 붙을래도 실력이 없어서 못붙겠더라”(박주현 전수석)는 토로는 관료를 움직일 능력의 부재를 증명해준다.

“대통령이 소비 줄어들고 있는데 어떻게 할 것인가 물었다. 경제학자고 담당인 청와대 수석보좌관이 그때 20분간 문제점에 대해 강의했다. 그래서 대통령이 해결책이 뭔가 물었다. 해결책은 알 수가 없다고 답하더라. 경제학자들 그래프 그리고 통계만 그린다. 솔루션이 없다”고 증언했다. 전 청와대 고위관계자의 설명이다. 박래군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도 “(노대통령이) 대선공약으로 5대차별 시정이니 발표했지만, 인수위에 들어간 사람들 말이 그런 정책이나 계획에 대해 철학도 비전도 프로그램도 준비된게 없었다고 하더라. 재벌, 분배, 부동산 등등 제대로 분석도 안돼 있더라는 거다”라고 전했다.

실제 비정규직 대책의 방향이 ‘동일노동·동일임금’의 차별철폐에서 ‘차별 남용 방지’ 쪽으로 굴절된 배경에서도 이런 혐의가 감지된다. ‘차별해소도 좋지만 수십조원이 든다’는 2003년 금융경제연구원의 한 논문이 정부와 정치권에서 강하게 회자됐고, 그 이후 방향이 틀어진 때문이다. 참여정부 정책기획위원으로 참여한 고려대 김유선 교수는 “(노동계에서) 당시 정치권에 들어간 사람들은 너도나도 그 논문을 읽어보라고 그랬다. 내용상 상당히 영향을 미친 것 같은데, 일개 연구원이 쓴 글이고 나로선 황당했다”고 말했다.

특히 “운동엔 짱짱했지만 경제는 몰랐던 386참모”(오성규 사무처장)들의 경우 쉽게 ‘자본의 논리’에 경도됐다. 초기 노대통령 주변의 386참모들의 ‘경제교사’가 삼성이라는 소문까지 돌았다. 김기식 참여연대 사무처장은 “인수위 시절 노무현 당선자 책상에는 인수위 보고서와 삼성경제연구소(SERI) 보고서가 같이 놓여 있었다. 386측근 참모가 SERI와 같이 만든 보고서였다. 핵심 내용이 ‘대미·대북관계는 진보적으로, 사회경제정책은 보수적으로’ 였다”고 말했다. 실제 참여정부 정책의 궤적을 보면 이런 흐름은 확인된다. 노대통령은 한·미관계, 북핵문제, 전시작전통제권에 관해 레토릭 차원에 불과하지만, 미국에 자극적 발언을 자주했던 반면, 경제쪽은 ‘법과 원칙’에 따른 노사분규 대응, 비정규직 입법, 아파트 원가연동제, 한·미자유무역협정(FTA)추진등에서 그 상반된 흐름을 읽을 수 있다.

- 경제는 전원 관료출신 -

재야출신 전 청와대 관계자는 “실제로 경제의 많은 부분을 관료에 의존하게 되는 과정이 있다. 의사결정이나 정보의 접촉 같은 부분들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실제 참여정부 출범당시 청와대 비서관급 이상 참모와 내각의 구성을 지금과 비교해 보면 이런 경향은 뚜렷하다. 출범초기 75명중 24명(32%)이던 관료출신은 현재 34명(40%)로 늘었다. 같은 기간 진보개혁 진영 출신은 오히려 39명(52%)에서 37명(43%)으로 줄었다. 특히 경제라인의 경우 이정우 정책실장 등이 물러나면서 현재는 100% 관료출신으로 채워졌다.

이정우 전실장은 “참여정부에서 학자 출신들이 좀 더 갔으면(오래 했으면) 좋았을 것”이라며 “학자들은 큰 방향을 잡고 관료들은 실무를 담당하는 분업이 이상적인데 그런 분업체제가 사라졌다”고 진단했다.

실천가능한 개혁프로그램도 없이, 개혁할 능력도, 개혁에 필요한 지식도 없이 스스로 관료에 장악된 셈이다. 참여정부가 지금 방향을 잃어버린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김광호기자 lubof@kyunghyang.com

 

 

[진보개혁의 위기] 前 靑비서관 “국민과 의사소통 안됐다”

입력: 2006년 09월 24일 17:55:02

 

참여정부에 대한 ‘좌·우회전’ 비판은 참 가슴 아픈 비판이다. 왜 국민들은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해석하게 될까 고민한다. 언론 탓만 하기는 어렵고, 풀어야할 고민의 지점이다. 기본적으로 하려고 한 것들이 아직 성과를 내지 못했다고 초기와 중기에는 그렇게 이해했다. 그런데 나중엔 어어 이게 아닌데….

국민들은 더 멀어졌다. 국민들과의 의사소통에 중대착오가 있었던 것이다. 지난해 4% 경제성장하고 국정에 대한 여러가지 부분들을 정비하고, 대통령께서 역사에 충분히 기여하는 역할을 했다고 생각하는데, 그 부분에 대해서는 국민들에게 아무 것도 전달이 안된다. 시민사회와 관련해서 보면 몇가지 우왕좌왕한 측면도 있었던 것 같다.

대연정은 심대한 타격이었다. 그 이야기 나올때 대통령께서 무엇을 걱정해서 심사숙고 끝에 운을 뗀 것인지 바로 알았다. 이전부터 죽 해온 말씀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고향가서 친구들이나 농민운동 하던 사람들 만나 보니까 전혀 다르게 해석하더라. 참으로 이거 큰일 났구나 했다. 대연정은 취지에 맞는 제기 방식이 필요했다.

내 개인적으로는 한·미FTA 통과 못 시킬 것 같다. 감이라는게 있지 않나. 용산기지 평택 이전 막 반대하는 것 같아도 ‘이건 될 거다’라는 그런게 있는데 FTA는 그렇지 않다. 참여정부와 현재의 우리당과 지지기반이 통째로 넘어간다. 옳고 그름을 넘어서 그것을 선택할 수 있는 대중정당과 대중정권은 없을 것 같다.

‘참모들의 직언이 없다’고 하는데 아무래도 점점 시간이 가면 최고 권력이 다 그렇다. 최고권력자에게 모든 정보나 이런 것이 집중되고 실제로 고민도 제일 많이 한다. 그래서 국민의 정부때도 그런 이야기 많이 들었다. ‘4년차 증후군’이란 것이 그렇게 나온다는 것 아닌가.

〈김광호기자〉

 

 

[진보개혁의 위기] “등 뒤에서 화살…적은 내부에 있었다”

입력: 2006년 09월 24일 17:55:10

 
참여정부 인사 4인이 노무현대통령·참여정부가 왜 개혁에 실패하고, 오늘 날과 같이 좌표를 잃고 수렁에 빠졌는지 자기 진단을 했다. 이들은 아무런 준비없는 ‘수사(修辭)로서의 개혁’으로만 일관한 노대통령에 대한 신랄한 비판, 그래도 남아 있는 노대통령에 대한 여전한 기대와 애정, 개혁을 위해 좀 더 헌신하지 못한 것에 대한 자기반성등이 뒤섞인 복잡한 심경을 털어놓았다. 경향신문 특별취재팀은 수차례에 걸쳐 이들을 각각 따로 면담했다. 다음은 면담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이정우 前청와대 정책실장

참여정부에 몸담았던 사람으로서 조심스럽지만, 학자적 양심에 따라 얘기할 수밖에 없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끊임없이 조정을 비판했다. “제 목을 치십시오”라며 목숨 걸고 임금한테 상소하지 않았느냐. 비판하는 참모가 진정한 참모다. 비판이야말로 참여정부를 살리고 대통령을 돕는 길이다.

개혁이 혁명보다 어렵다. 개혁은 끊임없이 참고 참아야 한다. 중국의 마오쩌둥(毛澤東)이 ‘혁명은 100인(忍)’이라고 했다는데, 내가 보기에 ‘개혁은 1,000인(忍)’ 같다.

하루 아침에 모두 개혁하긴 힘들다. (8·31 부동산대책처럼) 가운데쯤에서 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그런 몇 가지 점진적 개혁조차도 추진과정에서 갈팡질팡, 왔다갔다했다는 점이다. 안에서 의견이 안 맞는 내분이 문제다. 의원 숫자가 중요한 게 아니다. 대의명분이 중요한데 대의가 손상되면 지지가 떨어진다.

- 1년도 안 돼 관료들 주도권 -

2005년 1월부터 1가구 3주택 이상에 대해 양도소득세를 중과하기로 하고 준비를 마쳤다. 그러나 불과 1개월여 앞둔 2004년 11월 당시 이헌재 경제부총리가 느닷없이 “투기가 가라앉았다”며 양도세 중과 방침 연기를 검토한다고 했다. 아무런 사전논의도 없이 기자간담회에서 개인 견해를 흘린 것이다. 당시 다주택 보유자들은 정말 집을 팔아야 할지 끝까지 정부 눈치를 보고 있던 상황에서 충격이 컸다. 앞서 가을 국회에서 열린우리당이 종부세 대상을 6억원 이상에서 9억원 이상으로 대폭 완화하자고 한 것도 부동산 정책이 오락가락하는 데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이는 10·29대책 후 1년간 부동산 가격이 안정되고 내려가기 시작하다가 다시 올라간 계기가 됐다. 이부총리도 이걸 너무 쉽게 받아줬다. 이런 식으로 정부가 걸핏하면 냉·온탕을 오갔다.

진보진영에서 관료를 장악하지 못했다는 비판이 있는데 나는 다르게 본다. 관료는 설득하면 따라온다. 오히려 당에서 딴소리하면서 자중지란에 빠졌다.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가 공통적으로 초기에 학자들을 참여시켰다가 뒤에 가서 관료에게 넘겨줬다. 국민의 정부는 김태동, 윤원배 등 소수의 학자 출신이 들어갔으나, 1년도 못 가서 관료에게 주도권을 넘겼다. 들어간 학자들 수가 너무 적었고 힘을 실어주지 않았다.

-고시제 서열구조 버려야-

물론 시행착오도 있었고, 자성할 점이 많다. 그러나 아마추어리즘, 위원회공화국 운운하는 비판은 번지수가 틀렸다. 각계 전문가들이 참가해서 수없는 토론, 검증을 거쳐 정책을 입안하고 있다. 참여정부의 위원회 방식은 과거의 관료주도 정책에서 민간참여 정책으로 전환한 획기적 진보라고 생각한다. 아마추어가 희망이다. 위원회 방식은 좋았다. 안타까운 것은 아마추어, 위원회가 중상모략을 받아 힘을 많이 잃어버렸다는 사실이다. 보수언론과 보수세력의 생트집과 반대로 막혔다. 일부 여당의원과 관료도 여기에 동조했다.

등뒤에서 오는 화살이 눈앞에 보이는 보수의 화살보다 더 무섭다. 조·중·동의 생트집은 다 반박이 가능하지만 등뒤의 화살은 더 깊이 박힌다. 적은 내부에 있다. 말하자면 ‘브루투스 너마저…’라는 것이다.

참여정부에는 강철규, 허성관 등 ‘사림파’가 많았다. 위원회는 광복 후 한국에 처음 나타난 사림이었다고 생각한다. 국민의 정부에 비해서 꽤 오래갔다.

학자들은 세계 흐름 같은 큰 방향을 잘 보는 반면 실무에 약하고, 관료들은 실무에 능한 대신 큰 방향에는 어둡다. 이 분업이 제대로 이뤄지는 게 이상적이다. 그러나 이런 분업체계가 사라졌다. 관료에 전적으로 의존하게 되면서 방향이 어렵게 됐다. 학자들의 담론은 때로 공허하지만 사실 길을 잃지 않기 위해 매우 중요하다.

내가 청와대에 있을 때는 관료들의 실무 뒷받침이 잘 됐다. 처음에는 관료들이 우리들에 대해 ‘과격하다’는 의구심을 가졌던 거 같다. 예를 들어 그들이 거부감을 가졌던 근로소득보전제(EITC), 부동산정책 등에 대해 다른 나라에서는 부작용이 없다는 걸 알려주자 수긍했다. 둘이 보완적으로 결합하는 게 필수적이다.

관료라고 해서 개혁 반대파가 다수는 아니다. 3~5급만 해도 대부분 개혁에 공감한다. 1·2급은 아무래도 좀더 보수적이긴 한데 그렇게 개혁에 저항한 것은 아니다. 재경부 등 경제관료들은 유능한 사람들이지만 시야가 좁다. 옛날 틀에서 벗어났으면 한다. 요즘은 경기부양이 능사가 아니라는 원칙을 지키고 초연해지고 있다. 달라지고 있다. 물론 위로 갈수록 보수적이다.

개혁적인 사람이 위로 올라가지 못하는 구조는 바뀌어야 한다. 지금 같은 고시제 아래선 어렵다. 고시제도의 근본을 바꿔 기수 서열구조를 파괴해야 한다. 우리의 모델인 일본도 개혁했다. 정부혁신위원회에서 해줬으면 했는데 안 됐다. 인수위 때도 이 부분은 준비하지 못했다.

시민단체들이 반대한 한탄강댐 건설문제는 좀더 잘 했으면 성공할 수 있었는데 안타깝다. 갈등 해결의 ‘사회적 대화 모델’을 만들 수 있었다. 사회적 대화 모델이 맞다. 다만 몇 가지 성공사례가 나오지 않았을 뿐이다. 지금 같은 전환기에 독재시대의 강압적인 방법은 안 된다. 많은 사람이 참여하기 때문에 뜸을 들여야 밥이 된다. 숙성 과정이 필요하다. 적당히 임시방편으로 땜질하는 것은 불신만 야기할 뿐이다.

개혁세력 간 참고, 인정하고 협력하는 게 필요하다. 그러면서 단체의 타성을 고쳐야 한다. 잘못을 했으면 준엄한 상호비판은 하면서 서로 연대해야 한다. 사소한 분열로 동력이 떨어져선 안 된다. 사소한 이념차이를 극복하고 대동단결해야 한다.

- 갈등 풀 대화모델 절실 -

최근 한·미FTA 반대서명에 동참한 뒤 조·중·동이 참여정부에 등돌렸다고 음해해서 정말 곤혹스러웠다. 기회가 되면 수구언론에 직접 반박할 생각이다. 나는 기본적으로 개방은 해야 된다고 본다. 그러나 준비 없는 성급한 추진에 반대하고, 특히 상대가 미국이라는 데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한·미FTA는 단순한 개방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체질을 미국화하는 길이다. 협정 이후는 돌이킬 수 없게 된다. 양극화가 심해질 것이다. 리카도의 자유무역론 같은 것을 논리적 근거로 내세우는 것은 너무 순진한 발상이다.

〈정리|전병역기자〉

◇이정우는 누구?

대구 출신의 경북대 경제통상학부 이정우 교수(56)는 8·31부동산대책 등 참여정부 경제정책의 밑그림을 그린 주인공으로 꼽힌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위원을 비롯, 청와대 정책실장을 거쳐 지난해 8월 정책기획위원장에서 물러나 강단으로 돌아왔다. 이교수는 지난 7월 한·미FTA 졸속협상 중단을 위한 경제학자 171명 서명에 합류,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항상 의(義)를 중시한다”는 이교수는 기본적으로 참여정부의 옹호자를 자임했다. 청와대 노사개혁TF팀장이었던 박태주 한국노동교육원 교수는 “당시 청와대 수석비서관 중 개혁세력은 그나마 이전정책위원장이 거의 유일했다”며 “견제세력들이 그의 활동공간을 끊임없이 제약해 들어왔다”고 전했다. 박교수는 “나와 정태인 전 국민경제비서관이 이전위원장만은 지키자고 했지만, 이미 내부에서 공격받고 있었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진보개혁의 위기] 로드맵·법개정에 조급증 노동계와 ‘싸움세월’

입력: 2006년 09월 24일 18:01:28

 
박태주 전 청와대 노사개혁 TF팀장

대통령 후보시절이나 인수위시절은 내돈 쓰고 일해도 억울함이 없었다. 보람이 있었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진보개혁 진영의 요구를 거의 다 수용했다. 나는 그것을 정략적 활용이라고 보지 않는다. 노사관계도 진보적으로 바꿔놓겠다는 의지를 수시로 확인했다. 대통령이 노사정위를 직접 주재하는 등 핵심적 수단을 ‘사회적 대화’에 뒀다고 생각한다. 한 예로 대선공약에 없던 외국인 노동자의 의지에 따라 사업장을 변경 가능하도록 하는 ‘노동허가제’를 내가 “민주노총의 프락치”라는 비난 속에 제안했는데 노후보가 주위 반대를 무릅쓰고 받아주더라. 적어도 2002년까지는 개혁적이었다.

그러나 2003년 6월 청와대에서 잘린 뒤 노사개혁TF가 사실상 해체되면서 노동이 개혁과제에서 빠져버렸다. 노동비서관이 일상적 노사관계를 다루면서 장기전망은 만들지 않게 됐다. 한 30명 되던 자문위원도 사실상 해촉됐다. 그나마 있던 진보개혁 세력과 연결고리마저 끊긴 것이다. 보수언론은 “좌파”니 뭐니 떠들었지만 개혁은 사람이 하는 일인데 개혁세력이 없었다. 한줌도 안되는 세력 가지고 무슨 세상을 바꾸나. 몇놈만 눈에 가시였겠지.

2004년부터 노사관계는 조종사파업 등을 빼면 비교적 안정적이었다. 반면 비정규직법안 등을 놓고 노정관계가 역대 어느 정권보다 악화됐다. 정부가 노사관계에서 조정자 역할은 커녕 갈등의 주체가 돼 싸움질만 한 꼴이다.

그해 1월 사회적 대화를 공약으로 내세운 이수호 위원장의 민노총 집행부가 들어섰다. 참모들은 그때 “노대통령은 참 복도 많다”고 그랬다. 집권하고 노조까지 먼저 대화하자고 하니까. 하지만 참여정부는 (대화에)실패했다. 외형적으로는 대의원대회가 3차례 폭력사태로 무산된 민노총 책임이다. 하지만 정부가 설계자로서 역할을 방기했다. 당시 정부는 사실 사회적 대화를 포기하고 있었다고 본다. 그해 10월 비정규보호법안을 정부입법으로 국회에 상정했다. 누구도 개혁이라고 안 보는데 정부 혼자 ‘개혁’이라고 자기만족적이었다. 정부 의도든 아니든 비정규직법안을 상정하면서 사실상 사회적 대화를 포기했다. 민노총은 ‘이미 떠난 막차’를 기다리며 3번이나 대의원대회를 열어 뒷북을 친 것이다.

타협의 문화가 부족한 나라에서 대화는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정부는 초기부터 조급증에 빠져 인내할 줄 모른 채 로드맵으로 한방에 바꿔놓겠다고 했다.

2004년 2월 일자리 창출을 위한 사회적 협약을 체결했다. 일자리 만들자는데 민노총이 반대할 이유가 없지 않나. 그런데 민노총 참여가 생략됐다. 이수호 체제를 포함시켜서 가자고 보고했는데도 바쁘게 추진됐다. 그해 4월 총선용으로 활용하려니 민노총을 기다릴 시간이 없었던 것 같다.

노대통령에게 노동개혁을 표방한 정부가 들어서면 야당과 보수언론은 물론 여당까지도 비판해올 수 있다고 보고했다. 이 과정을 견디지 않으면 다음으로 넘어갈 수 없다고 했다. 2004년 7월 현대차 파업이 끝나면 노사관계 잠잠해질 것이라고 보고했다. 그 과정에서 개입 안하면 노사자율주의가 정착되고, 노사가 책임지라는 것이다. 그러면 8월부터 개혁 프로그램 가동 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6월에 짤리고 월악산에 갔다와서 신문을 오랜만에 보니까 철도노조파업에 공권력 투입됐다더라. 불과 참여정부 3개월만에 첫 공권력 투입이었다. 그 뉴스 보고 노동정책은 큰일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뒤 ‘법과 원칙’을 전면에 세우면서 ‘경찰이 지켜주는 노사관계’가 전면에 부각됐다. 바로 ‘노사관계법·제도 선진화방안(로드맵)’이 대표적이다. 로드맵이 나오기 전 당시 권기홍 노동부 장관을 만났다. 권장관에게 로드맵은 내용도 내용이거니와 형식이 안된다고 했다. 권장관이 “나도 동의한다. 하지만 9월1일 대통령께 보고하기로 돼있지 않느냐”고 했다. 그러면서도 “내 손을 이제 떠났다”고 하더라. 이런 조급증은 참모들의 무능에서 나왔다. 비록 짧게 (청와대에)있었지만 나까지 포함한 참모들이 문제다. 진보개혁 진영의 실력이 없었다. 글은 몇줄 그럴듯하게 진보적으로 쓰지만 집행과정에서 무식하고 정책적으로 무능하다.

노사관계는 정치·경제·사회·문화가 전체적으로 바뀌어야 변한다. 정부 혼자서 망상에 빠져 법·제도를 고친다고 했다. 노사관계 갈등을 정부가 나서서 부추겼다. 사회적 대화가 정상화되지 못한 핵심적인 요인은 노동계가 아니라 정부측에 있다. 정부가 인내심을 가지고 대화를 추진하지 못했다. 적어도 현정권 임기 내에서는 노사정위 복원이 불가능하다.

 

 

[진보개혁의 위기] ‘임시직 차별’ 인정 사회통합 그르쳐

입력: 2006년 09월 24일 18:01:36

 

김유선 前 청와대 정책기획 자문위원

참여정부 노동정책은 사회통합적 노사관계 구축이 가장 큰 주제였다. 그러나 출발부터 제대로 안됐다. 노사관계는 노동자의 어려운 삶과 떼려야 뗄 수 없다. 대통령 후보 시절 “비정규직의 눈물을 씻어주겠다”던 공약은 정권 출범과 동시에 여지없이 깨졌다. 비정규직 문제는 다른 말로 하면 ‘고용차별 해소’ 문제다. 그러나 ‘임시직이기 때문에 차별받을 수밖에 없고 남용만 막아야 한다’는 정도로 기조가 후퇴했다. 금융경제연구원의 한 연구원의 논문 하나 때문에 방향이 확 달라진 것이다. ‘비정규직 차별 해소도 좋은데 수십조원은 들어간다’는 요지였다. 이 논문을 계기로 청와대와 정치권이 술렁이더니 결국 ‘동일노동·동일임금 원칙’이 싹 빠져버렸다. 동일노동·동일임금 없이는 차별해소 실효성이 없다. 청와대측 사고가 너무 경솔했다.

노사관계를 뒷받침하는 노동시장 정책이 없었다는 게 정책 실패의 핵심이다. 양극화의 핵심은 비정규직 중에도 중소 영세업체에 속한 비정규직이다. 밑바닥 삶을 살면서 노사관계란 것은 성립조차 어렵다. 사회통합적 노사관계는 기업별 노조에서는 절대 안된다. 그러나 정부는 노사관계의 중층화가 핵심이라고 말만 하고 산업별 노사관계 구축 노력은 전혀 없었다. 노사정위도 계속 겉돌았다. 정부는 노조를 설득하기 위한 의제·계획·명확한 상이 없이 “일단 들어와서 얘기하자”는 말만 할 뿐 의지와 노력이 거의 없었다. 그러니 ‘식물 노사정위’가 될 수밖에 없다. 정부는 ‘립서비스’ 차원에서 막연하게 “우린 너희 편이다. 왜 안오냐. 오면 잘 해줄 텐데”라고만 했고, 결국 안 들어오자 섭섭함을 표출하는 것 같다. 노동과 정부 간에 갈등이 증폭되면서 4년간 시간만 까먹었다.

어차피 노대통령은 직업 정치인일 뿐이다. 1987년 즈음 1년 정도 노동변호사 한 것은 그냥 ‘이미지’일 뿐이다. 원래부터 그저 그랬던 사람이다. 어떻게 20년 전에 조금 있어본 것 가지고 마치 다 아는 것처럼 얘기하는지….

현 정부에는 기대하기 어렵다. 노동이 나서서 해결해야 한다. 산별노조 전환처럼 노사관계 시스템 바꾸는 것이 중요하다.


〈정리|박영환·전병역기자〉

 

 

[진보개혁의 위기] 노조·시민사회도 공동의 책임있다

입력: 2006년 09월 24일 18:01:40

 

박주현 前 청와대 참여혁신 수석비서관

박주현 변호사는 “진보개혁하기가 무지 어려웠다. 항상 죽을 힘을 다해도 쉽지 않았다”며 진보개혁 세력의 일원으로 참여해 느끼고 겪은 한계를 털어놨다. “참여정부에 들어가니까 사방에서 공격이 들어왔어요. 기존 경제사회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문제에 대해 보수 진영에서는 공격하고, 시민사회도 왜 그것밖에 못하냐고 비판하죠. 관료들은 변하기 싫어했고요”.

그는 “IMF 이후 양극화가 진행되고 투자의 보수화가 이뤄져 개발 시대 경제 정책만으로는 성장 잠재력을 높일 수도 일자리를 늘릴 수도 없다는 것이 판명났다”며 “그런데도 관료들은 예전 개발 시대의 예산과 정책을 계속 유지하려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경제부처와 사회부처간의 ‘힘의 불균형’ 문제도 지적했다. 그는 “사회부처가 힘을 가져야 하고, 책임도 져야 한다. 사회부총리 신설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며 “정부 내 경쟁 구조를 만들어야 하고 그런 가운데 경제사회 정책 개혁을 이루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진보개혁 진영 가운데 전문가 그룹의 역량도 부족했다고 한다. 그는 “기존의 금융, 건설 중심의 거시 경제로는 어렵고 사람의 요소 생산성을 높여 경쟁 약자를 경쟁 강자로 만드는 경제사회 정책이 절실하다”며 “그러나 이쪽 정책이 잘 마련 안되었는데 이는 전문가들의 실패라고 본다”고 말했다.

그는 개혁의 실패에 대해 “시민사회도 준비가 안됐고 정부도, 정당도, 노조도 대비 못했다”며 “공동의 책임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최근 보수 진영에서 제기한 ‘잃어버린 10년’과 관련, “이전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에서 진보개혁 세력이 과연 헤게모니를 쥐었는가”라고 반문했다. 또 “그 동안 과연 끊임없이 진보란 표상을 갖고 달려왔는가, 또 긴장했는가. 그것도 아니다”며 “몇 사람 출세한 것 같고, 세상 바뀐 것처럼 보이지만 그게 아니었다”고 말했다. 그는 “몇번의 기회가 있었는데 몇번은 살리고 몇번은 놓쳤다”며 “참여정부 2년차에 사회개혁을 마무리했어야 했는데 1년 늦어졌고, 경제사회 개혁에 대해서는 참여정부 초기 때부터 긴장감을 갖고 적극적으로 준비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는 “보수세력은 아주 집요하게 저항하고 공격했다. 진보개혁세력도 더 집요해져야 한다”며 “새로운 경제사회 환경에 맞는 패러다임 구축을 목표로 삼는다면 마지막까지 견디고 버텨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는 “나도 이를 악물고 죽을 각오로 대들었어야 했는데 ‘내가 뭐 이 자리 탐나서 그런 건가’하고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며 “집요하지 못한 것에 대해 반성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정체성을 헷갈리게 하는 사람이 발전의 가장 큰 적이다. 선진 사회는 분명한 정체성을 가지고 돌파하는 것”이라며 “집바둑만으로는 안되며 세바둑을 두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정리/김종목·박영환·전병역기자〉

 

 

[진보개혁의 위기] 1-5. 좌담 : 진보개혁의 미래는 있는가

입력: 2006년 09월 26일 18:44:27

 
경향신문 창간 60돌 특별기획 ‘진보개혁의 위기-길 잃은 한국’ 1부를 마치며 진보개혁 세력이 스스로를 진단하는 죄담을 마련했다. 좌담에는 청와대 정책실장을 지낸 이정우 경북대 교수, 민주노동당 노회찬 의원, 참여연대 김기식 사무처장이 참석했다. 경향신문 이대근 정치·국제에디터의 사회로 진행된 좌담은 22일 경향신문사 회의실에서 열렸다.

◇ 참석자=이정우 경북대 교수(前 청와대 정책실장), 노회찬 민주노동당 의원, 김기식 참여연대 사무처장
◇ 사회=이대근 경향신문 정치·국제에디터

사회=5·31 지방선거 때 열린우리당이 대패하면서 민주노동당이 동반 하락한 것이 진보개혁 위기론을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진보개혁이 정말 위기인가, 위기라면 어디서 온 것인가.

노회찬=진보개혁 위기를 논하기 전에 진보개혁이란 게 하나의 실체와 흐름으로 존재하는지 의문이 든다. 국민은 진보와 개혁을 한 몸통으로 보지만, 둘 사이에 굉장히 큰 강이 흐르고 있지 않나 생각한다. 87년 체제는 6월항쟁의 산물이지 7·8월 노동자 투쟁의 산물이 아니다. 승리는 노동자의 것이 아니었다. 6월항쟁의 정치적 주역인 YS(김영삼 전 대통령), DJ(김대중 전 대통령)가 성과를 가져갔다. 그분들이 노동자 투쟁을 어떻게 바라봤느냐. 적극적 지지는 아니었다. 6월과 7월의 충돌이 위기의 근원이라고 볼 수 있다.

김기식=‘이념적 진보’와 ‘정치적 수준의 진보’가 구분되지 않는다. 정치적으로는 진보이지만 실질로는 진보가 아닌 개혁도 있다. 자유주의 개혁도 있고, 보수주의나 사민주의 개혁도 있다. 사회를 너무 보수·진보 내지 수구와 개혁의 단순 구도로 설명하기에는 다양한 스펙트럼이 형성돼 있다. 단순화하고 범주화하는 단정적 평가는 무리다.

지금 가장 위기론이 팽배된 건 YS 문민정부와 DJ 국민의정부,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로 이어지는, 독재 후 문민화된 역대 정권들의 부패한 무능으로 국민적 실망을 주었기 때문이다. 제도 정치권 내 중도보수 내지 중도, 자유주의 세력의 헤게모니 위기가 사회적으로 확대된 결과라는 측면도 있다.

그러나 제도정치 측면의 위기와 시민사회운동의 위기는 좀 다른 것 같다. 민중운동 위기와 시민운동 위기의 요소는 성격상 제도정치 위기와 다르다. 막연한 위기론과 자학적 자기성찰 같은 것은 경계할 필요가 있다. 다만, 보통의 국민들 인식에서 보면 하나로 뭉뚱그려 위기로 인식되는 한계는 있다.

이정우=워낙 위기란 말이 많이 쓰여 과연 ‘위기’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지금 굉장히 어렵고 국민들로부터 상당히 외면당하고 있다. 왜 이렇게 됐느냐. 1997년 IMF 사태로 낡은 모델이 무너진 이후 새로운 경제발전 모델을 우리가 못 찾고 방황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장 어려운 민생과 불경기, 내수불황에 대한 불만과 위기의식이 굉장히 강하다. 그러나 경제발전은 해야 하고 성장률은 높여야 한다. 다만 이를 위해서 민주화 개혁이 더 필요하다. 최근 2~3년 전부터 ‘개혁이냐 성장이냐’의 양자택일 구도가 논의되는데 사실 그렇지 않다. 성장을 위해서 개혁과 민주화가 필요한 단계다. 그걸 제대로 못해서 IMF 후 10년 가까이 아직 암중모색 중이다. 모델을 빨리 제시해서 국민을 설득해낼 수 있어야 한다.

김기식=일반 용어로 진보개혁 위기의 핵심은 담론의 위기다. 80년대는 ‘민주화’, 90년대는 ‘개혁’ 담론이 지배했다. 2000년대 담론 상실하에 박정희시대 개발성장 담론이 지배적이 되고 있다. 개발성장의 상징인 이명박 전 서울시장,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에 대한 지지가 높다. 이들 인물 개인에 대한 지지가 아니라고 본다. 보수진영의 담론은 사실 한국의 새로운 미래가 아니고, 30년전 레코드판을 새로 틀고 있을 뿐이다. ‘부패하나 유능한 보수, 깨끗하나 무능한 진보’란 말은 잘못됐다. 보수는 새 비전을 낸 게 아니라, 진보가 못내는 사이 30년전 레코드를 유행시켰다.

노회찬=얼마전 김근태 열린우리당 의장이 “잃어버린 10년” “먹고사는 문제에 무능했다”는 말은 참 잘못된 인식이다. ‘능력’의 문제가 아니다. 비정규직 8백40만명이 무능해서 늘었나. 비정규직을 감수해야 한다는 노선과 방향으로 간 결과가 오늘 나타난 것이다. 능력이 있었더라도 해결될 게 아니었다. 지금 검토해야 할 문제는 그런 노선이 옳았느냐를 따지는 일이다.

사회=실상은 진보의 위기가 아닌데 일반인이 한 묶음으로 인식한 결과로 동반하락하는 걸로 나타났다는 지적이 있다. 참여정부와 진보세력이 다른 몸인데 국민이 잘못 인식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구체적 정책과 현안에서 한 묶음으로 볼 수 있는 여지가 있었는가.

노회찬=본질적 차이는 있으나, 진보세력 성장과 발전 수준이 미약해 잘 안보이거나 차이가 부각되지 않는 미분화된 상태가 아닌가 생각한다. 내용은 크게 다르지만 국민은 비슷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김기식=본질적으로 ‘일반 민주적 과제’가 일정 수준에서 완결되지 못해 중첩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국가보안법 폐지안은 사실 87년 6월항쟁 과정에서 해결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 자유주의와 진보가 함께 가게 됐다. 우리 사회에 두 세력이 분화 안됐다는 데 동의한다.

이정우=경제가 어려우니 60·70년대에 대한 향수가 많다. 이전시장, 박전대표에 대한 기대로 나타났다는 지적에 동의한다. 그러나 지금 그 시대로 돌아가는 건 불가능하고, 돌아가봤자 고성장은 오지 않는다. 낡은모델이다. 국민동원으로 양적 성장이 가능한 시대는 지났고, 그 한계가 97년 위기로 나타났다. 떠난 버스를 기다리는 국민이 안타까울 뿐이다.

새로운 질적 성장모델로 전환하지 못한 게 현재 위기의 바탕이다. 전환의 핵심이 개혁과 민주화다. 구시대적인 이미지의 인물들이 이 일을 해낼 수 있느냐. 그건 아니다. 김근태 의장의 “진보세력이 무능했다”는 반성은 겸손하기는 하되 옳은 말은 아니라고 본다. 위기를 타개해서 국민을 먹여살릴 것은 진짜 진보개혁 세력밖에 없다. 보수가 우리를 먹여살릴 것 같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일시적으로는 몰라도 보수는 새로운 경제모델을 찾을 능력이 없다고 본다.

노회찬=스웨덴 총선 결과를 보수세력이 호도하고 있다. 스웨덴 우파연합의 정책과 공약을 한국에 들여오면 극좌파가 되는 게 한국사회이다. 스웨덴 우파의 정책은 민노당도 감히 꺼내지 못하고 있는 내용들이다. 스웨덴이 “복지를 포기하고 성장을 택했다”는 식의 얘기는 틀렸다. 보수는 왜 사실과 다른 스웨덴을 끌어들여 국내 복지 확대를 타깃으로 나섰을까. 결국 기득권 지키기다.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주장은 기득권 유지의 다른 표현이지 전국민의 먹고사는 문제가 아니다. 이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사실과 다를 뿐 아니라 굉장히 위험하다.

이정우=전적으로 동감한다. 과거 두차례 스웨덴 사민당이 정권을 잃었다. 76년부터 6년 동안과 91년부터 3년간이다. 특징은 보수당이 집권한 짧은 시기에 노사분규가 심했다. 강력한 스웨덴 노조가 사민당 집권 때는 자제하고 협조했다. 임금인상도 낮고 경쟁력이 높아져 고경쟁력·고수출·고성장을 했다. 그러나 보수당 집권기에 이런 약속이 깨지고 경쟁력이 떨어지고 임금인상이 높아지는 악순환을 반복했다. 이번에도 또하나의 과정이 아닌가 한다. 스웨덴 선거 결과를 “성장주의의 승리다. 복지를 깎아야 한다”는 것은 참여정부를 흠집내려는 연목구어(緣木求魚) 억지춘향에 불과하다.

김기식=“보수는 부패하지만 유능하다”는 주장에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10여년 동안 새로운 비전과 정책은 진보개혁 진영서 나왔지 보수가 한번도 제시한 적 없다. 보수에게는 미래가 없다. 진보는 ‘한계’는 있지만 끊임없이 미래를 고민하고 비전을 제시하려 노력한다. 일부 진보진영의 자기성찰이 ‘무능’까지 가는 건 옳지 않다. 최근 자성이 자학적 형태로 가고 있고, 내년 대선을 앞두고 정치적 위기와 연관돼 증폭된 측면이 있다.

사회=진보개혁 진영이 정말 무능한가라는 문제제기가 있었다. 87년 민주화 이후 기대수준과 김영삼·김대중·노무현 정부가 실제 이뤄낸 격차 때문에 무능이라는 말이 나온 것 같다. 그런 기대와 성과의 차이에 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노회찬=‘무능’ 문제가 아니다. 개발독재 세력은 유능하지 않았다. 당시 유례없는 7~8%대 고도성장을 수십년 한 배경은 정권의 유능함 덕이 아니라, 세계최고 수준의 산업재해, 노동시간, 기본권 탄압이 있어 가능했다. 현재의 위기의 근본은 비정규직을 양산시키는 관계법 추진 등 제도의 탓이다. 이런 근본 노선 문제를 놔두고 단기적 처방에서 유·무능을 따질 문제는 아니지 않나.

이정우=살기 어려운 건 사실이고 특히 자영업자, 비정규직이 어렵다. 자영업자 및 가족종사자를 합쳐 37%로 세계에서 제일 높다. 누가 보더라도 공급과잉이고 경쟁과잉이다. 어제 오늘이 아니고 수십년 누적된 문제다. 역대정부가 공통으로 소홀히 했고, 전체 경제구조 고용구조를 고민하지 않고 정부 책임을 방기한 것이다. 개인적으로 알아서 살라고 하니, 길이 없어 자영업으로 몰린 것이다. 스웨덴은 보육 보건 복지 노동 교육 등 공공서비스가 전체 노동력의 약 30%다. 한국은 약 5%에 그친다. 보수에서 교과서로 삼는 미국도 15%선이다. 우리는 미국보다 훨씬 부족하고 전부 시장에 맡기고 있다. 참여정부는 큰 물결을 되돌리는 출발을 했다. 발목잡는 보수야말로 세계사적 흐름을 너무 모르고, 경제를 살릴 수 없다는 단적인 예다. 보수와 시장에 맡겨선 망하는 길이다. 그래서 진보세력이 필요하다.

지금 경제가 어려운 게 몽땅 참여정부 탓이라고 하는데 옳지 않다. 유례 없는 부동산, 카드, 벤처 3대 거품이 동시에 꺼지는 데 5~10년은 걸릴 것이다. 이 과정에서 나타난 고통이란 점을 인식하고 좀 어렵지만 참을성 있게 가야지 또 거품을 만드는 식으로 가선 안된다. 지금은 거대한 U턴을 하는 시점이라 생각한다.

-보수 회귀 대안 못돼…진보 ‘새판짜기’나서야 -

사회=노무현정부는 초기에 “비정규직의 눈물을 씻어주겠다”는 등 5대차별 해소를 내세웠다. 그러나 지금 양극화가 심화되고 FTA 추진까지 왔다. 초기 개혁적 논의와 지금 중·후반기 실상간에 왜 차이가 발생했는지, 어디가 문제인지, 개혁의 한계는 무엇인지 논의해보자.

노회찬=각종 지표는 2003년 2월보다 오히려 지금 양극화가 더 심해진 걸로 나타난다. 양극화를 둔화시키는 적극적 정책이 굉장히 부진했다. 초기 2년 동안 뭐했느냐는 점에서 비판하지 않을 수 없다. 2004년 경우 보안법 등 정치개혁을 추진하다 포기했고 재벌개혁도 국민의 정부보다 참여정부에서 후퇴했다. 노동운동으로 창끝을 돌려 실질적으로 민생회복, 양극화 줄이는 정책 안 나온 게 아닌가. 부동산 정책 등 양극화 심화시키는 속에 사회적 반감이 사회기층에서부터 나왔다. 이 모든 걸 한나라당 탓으로 돌릴 순 없다.

김기식=노후보가 더 잘할 거 같아서 뽑아준 것이다. 적극적으로 노후보의 비전을 보고 뽑은 게 아니라고 본다. 그런데 집권세력이 시대적으로 요구된 개혁에 대해 철학과 비전이 부재하고 불철저했다. 더구나 정책으로 구체화하고 집행해낼 만한 능력이 없었다. 그런 점에서 집권세력 철학과 능력 문제, 노선문제까지 포함해 지난 3년간 한계가 확실히 드러난 거 아니냐.

이정우=참여정부를 옹호하지 않을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철학, 능력, 노선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참여정부에 대한 비판이 옳은 것도 꽤 있는데 상당히 과장돼 있다. 진실은 중간쯤에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노선, 철학면에서 참여정부는 과거정부에 비해 조금이라도 방향을 돌린 최초 정부가 아닌가 한다. 방향을 조금 U턴하는 시작단계다. 방향을 틀기 시작하니 사람들 이해가 안되고 무능해보이기조차 할 것이다. 굉장히 어렵다. 그러나 첫술에 배부르랴는 말처럼 조금은 기다려야 한다.

비판받으면서도 힘들게 방향을 틀기 시작했는데 진보진영에서는 참을성이 부족하다. 전부 아니면 전무라는 비판이 많다. 요구수준이 너무 높다. 80% 정도 했으면 인정할 만도 한데 20% 모자란다고 하나마나한 정책, 무용지물이라고 한다. 너무 높은 기대수준을 자주 느꼈다. 참여정부는 결코 무능하지 않다. 정책 추진능력에서는 역대정부보다 오히려 유능했다.
노회찬 의원, 이정우 교수, 김기식 처장(좌로부터)이 22일 좌담을 마친뒤 경향신문사 인근 공원에서 환담을 하고 있다. /박민규기자

그러나 이런 내용이 안보이고 기대에 못미치고 아직 열매를 맺지 않아 욕을 덤터기로 먹고 있다. 보육예산이 참여정부 들어 제일 많이 늘었다. 2천5백억원에서 출발해 1조원 넘게 증가했다. 부동산정책도 실패라 단정할 수 없다. 비방과 무능, 철학부재라는 비난은 억울하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이 감수해야 한다. 5~10년 뒤에는 알아주기 시작할 거다.

노회찬=잘한 일이 하나도 없기야 하겠나. 참여정부가 성과에 집착하면 위험할 수 있다. 뭔가 남겨야 한다면 양극화 ‘해소’는 아니더라도 ‘완화’는 해야 한다. 전략 갖고 있는가 의문이다. 2004년 ‘뉴딜’이라고 공공지출 확대로 일자리 만든다고 나왔다가 연기금 논란으로 사라졌다. 최근 김의장의 ‘뉴딜’은 전혀 다른 개념이다. 재계와 거래하겠다는 거다. 국민이 설득되도록 어떤 건 참으라든가 하는 전략이 있는가. 노동자에게도 “이런 건 해줄테니 참으라”고 할 수 있는 진정성을 갖고 있는가.

이정우=참여정부는 이미 정치개혁, 부패척결, 권위주의 청산, 언론관계 정상화 등 이미 치적이라고 할 만한 것이 있다. 왜 무능하다고 손가락질만 하나.

김기식=정부의 정책능력을 말할 때 관료를 넘어 정치적 집행능력을 가졌는지를 말한다. 그러나 기존 정책 패러다임을 전환시키는 정권차원의 힘에서 참여정부가 역부족이다. 사회경제 부분에서 보육은 획기적 진전이 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참여연대만 해도 정부와 여러 협의하다 보면 뭔가 패러다임 전환 수준이 제기되면 정책담당자들이 어렵다고 한다. 그걸 소화할 능력을 가진 사람 자체가 굉장히 부족하다. 이교수님 포함한 몇분이 청와대에서 나온 뒤 집권세력 안에 사회경제정책을 이해하고 패러다임을 구체화할 인력 자체가 없다. 얘기해봐야 소화할 능력 없다고 공공연하게 얘기하는 수준이더라.

노회찬=현정부는 투기적 발상을 하고 있다. 대연정 추진이나 FTA 추진, 전시작전통제권 환수도 성과주의에 과도하게 집착한 것이다. 주요정책에서 뭔가 한두건으로 정세 역전시키거나 세력관계 바꾸거나 지지율 바꾸는 데 집착한 게 아닌가.

이정우=대연정과 FTA 문제는 동감이다. 다른 건 옹호하지만 두가지에 대해서는 좀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런 것이 전체로 비화돼서 전체 능력 부재, 무능, 아마추어리즘 운운까지 가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정책능력은 크게 향상됐다.

-‘진보좌표’제시할 새 세력·지도자 나와야-

사회=우리당, 민노당, 시민단체 등 세력들의 역할을 평가해달라.

김기식=열린우리당은 ‘잡탕 정당’의 한계가 총선 후 그대로 드러난 거 아닌가. 2004년 말 하반기 소위 ‘4대 입법’을 스스로 자멸해 아무것도 관철 못하고 마감함으로써 그 순간 정치적 사망에 가까운 상황이 됐다. 당 주도 세력이 시대과제나 자기비전을 낼 철학과 내용이 없다. 민노당은 원내진출 뒤 포지티브한 긍정적 대안으로서 비전을 국민속에 제시하고 공감대 만드는 데 한계가 있다. 운동집단이 아니고 책임있는 원내정치세력으로서 모습을 정책, 입법에서 보였느냐는 의문이다.

이정우=열린우리당은 많은 의석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개혁 추진에 대단히 미흡했다. 심지어 어렵게 통과한 사학법마저 재개정한다는 건 정말 말이 안된다. 87년 민주화 이후 필요한 게 있다면 바로 사학법 같은 것이다. 민노당은 소중한 싹을 거목으로 키워 이념 정책으로 좌·우정당이 대결하는 선진국형으로 가야 한다. 그러나 국민들 우려는 아직 너무 과격하지 않느냐는 것 같다. 억지 부리는 거 왕왕 발생했다.

노회찬=민노당의 가장 큰 문제는 대표하고자 하는 세력으로부터 지지 확대가 거의 정체 상태라는 것이다. 월 1백50만원 이하 봉급자가 한나라당을 더 많이 지지하는 현실을 타파 못하는 건 순전히 민노당 책임이다. 얼어붙은 이들의 마음을 열고 신뢰받을 제대로 된 정책활동이 없었다. 그점에서 여전히 서툴고 무능하기까지 했다. 가까운 세력에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 백번 동의한다.

사회=진보세력의 활동은 위축되고 담론을 이끄는 데서 영향력이 약화된 것 같다. 반면 보수는 선진화 전략을 제시하며 부상하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진보개혁 세력의 과제는 무엇인가.

이정우=뉴레프트, 뉴라이트, 수구진보란 말도 있고 굉장히 혼란스럽다. 해방후 60년 동안 우리는 일방적 우익독재 사회였고 온건 합리적인 서양의 보통 우파정권과는 달리 이견, 반대를 용납 않는 지독한 극우파가 오랫동안 지배했다. 정말 앞으로 할 일이 남아 있는 곳이라면 진보개혁 진영 쪽이다. 보수우익, 뉴라이트는 할 일이 별로 없다. 60년간 계속 지배해왔고 곳곳에서 문제 일으킨 사람들이다. 이들이 일으킨 많은 숙제를 풀 사람이 진보다. 미약한 진보를 키워야 한다. 시민단체, 진보정당이 가끔 욕먹고 지나친 면 있다. 그러나 큰 눈으로 봐서 진보개혁의 방향이 옳고 그쪽으로 가야 한다. 수구나 뉴라이트는 그만하면 됐고 더 이상 할 일이 없다.

노회찬=진보세력이 과가 없지 않지만 공이 절대적으로 크다. 시민운동은 참 많은 역할 해왔다. 다만 민주주의가 뿌리 내리는 사회를 위해서는 지금 같은 운동으로는 충분치 않다. 40만명 넘는 독일 납세자동맹처럼 뿌리 완전히 내린 시민참여형 운동이 절실하다. 시민대표 운동을 넘어 참여운동이 사회 곳곳에서 뿌리내리고 진 치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그간의 성과 능력을 바탕으로 한 걸음 나아가는 역할을 집중해야 할 때다.

정세변화로 87년 체제의 숙명이 다했다. 역사 전환기에 새 과제가 제기되고 새 판짜기가 필요하다. 역사가 거꾸로 간다는 데 동의하지 않는다. 우려에도 불구하고 역사는 전진하고 있다고 전제해야 한다.

김기식=시민운동 위기론은 90년대 과잉대표, 과잉영향력이 정상화되는 측면이다. 어떤 면에서 모두로부터 지지받는 시민운동 자체가 허상이다. 다만 시민운동의 위기 요소는 분명 있다. 90년대와는 다른 2000년대 아젠다가 시민운동에 없다. 비전을 구체화할 정체성 자체가 없다. 시민운동이 나아갈 방향에 대해 깊은 성찰이 내부에 존재해야 한다. 뉴라이트는 ‘뉴라이트’가 아닌 올드라이트가 포장만 한 것이다. 10년간 뺏긴 정권 탈환의지 속에서 민주화 개혁세력에 대한 국민의 정서적 반감을 타고 대선을 앞두고 활개치는 것이다. 표방한 자유주의 이념에 충실하기만 해도 좋은데 그 조차도 아니다. 희망이 될 진보 좌표를 제시하고 이끌 세력과 지도자가 나타나야 한다. 미국식 시장만능 사회냐, 유럽형 사회통합적 사회냐 과감하게 주제를 제시하고, 사회민주주의도 공론화할 단계다. 사민주의가 대안은 아닐지라도 그게 담은 의미를 내놓고 논의해서 우리가 어디로 갈지 충분히 논의해야 한다.

〈정리|전병역·장관순기자 사진|박민규기자〉

 

 

[진보개혁의 위기] 진보진영이 본 ‘386 이게 문제’

입력: 2006년 10월 01일 18:09:36

 

-김기식 참여연대 사무처장-

386들이 왜 민주세력대연합 레퍼토리를 다시 읊나. 그것은 정치권에 들어갈 때 그들에게 기대했던, 그리고 그들이 할 얘기가 아니다. 중산층과 서민들의 고민이나 생각과 겉도는 가상의 얘기일 뿐이다. 밑바닥 생활과 동떨어진 자기들끼리, 위로부터의 정치공학 얘기를 왜 386들이 하느냐.

-성공회대 조희연교수-

대부분 학생운동 세력인 386은 관념적인 급진운동을 했고, 현실에 들어가 많이 변했다. 운동과 고민의 뿌리가 풀뿌리와 닿아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스스로 철학이 좌충우돌이면 절차적 민주주의라도 강화해야 한다. 그것이 정보공개나 국민적 공감대가 약한 상황에서 정부가 협상을 주도하고 있는 한미FTA이다.

-홍성태 상지대교수-

2004년 총선이후 열린우리당은 거대 여당이 됐음에도 여전히 우리는 약하다, 지역기반도 약하다며 어떻게 보수표를 얻어올 까 고심했을 뿐이다. 386이나 개혁파들이 올바르게 정치개혁을 했는지 비판적이다. 한자리씩 차고앉아 자기 중심으로 세계를 보고 정말 세상 편하게 산다. ‘잃어버린 10년’을 말하는 것은 정말 무책임한 얘기다. 보수세력의 준동을 막고 시민의 힘으로 이룬 위대한 10년이다. 민주적 정치세력이 위임해준 권한에도 불구, 국민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것이 현주소다.

-오창익 인권실천시민연대 사무국장-

386들이 옛날 공장에 자기발로 가듯 국회에 갔다면 침투고 우회전술이다. 진보·개혁적 의제를 들고서 말이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보면 침투한 게 아니고 포섭된 거였다. 386이 국회에 들어가서 기존 정치인들과 다를 게 없다. 제도정치권, 기득권 관료들이 하는대로 그들 속에 녹아버리고 있다. 2004년 의회 진출후 보여줬던 생기발랄함은 다 어디갔냐. 예수나 석가처럼 ‘누가 내 어머니고 가족이냐. 세상에 오로지 나뿐이다’ 정도의 싸가지는 있어야지. 청와대 386봐라. 운동안하는 사람이 무슨 운동권이고 개혁이냐. 자기 서 있는 상황에서 계속 움직이고, 신념과 의제를 정해 운동해야지.

-이남주 성공회대교수-

정치권 386이 무능하고 기득권이 됐다고 보기는 어렵다. 다만 기대치에 못미치는 점은 분명히 존재한다. 비판 세대가 아니라 문제를 해결해야 할 국면에서 여러가지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과거 진보이념이 만들어진 시기와 지금의 현실은 상당히 변화됐다. 세계화나 비정규직 등 새로운 사회문제에 얼마나 적극적으로 반응하고 대안을 제시했는가. 자기 세대 경험을 집단적으로 재평가하고 비전을 만들려는 노력을 압축성장 과정에서 제대로 하지 못했다. 여러 분화들이 정파적이거나 조직이기주의가 아니고 비전을 만드는 경쟁으로 가야한다.

-김세균 서울대교수-

DJ는 미국과 IMF의 요구에 제재를 가하려다 강력한 대응을 겪자 자발적으로 이들의 요구를 수용했다. 이 기조는 계속되고 있고,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은 신자유주의 개편의 완결판이다. 현정부에 들어간 진보·개혁 인사들에게 신자유주의 문제를 어떻게 인식하는지 물어보고 싶다. 다들 ‘불가피한 문제 아니냐. 어짜피 수용해야할 환경이라면 잘 적응하는 게 최선이다’ 이렇게 말한 것이다. 하지만 신자유주의를 당연시하는 그 순간, 서민의 삶은 외면하는 것이 된다.

-우석훈 전 초록정치연대 정책실장-

참여정부와 열린우리당의 실패는 염치가 없어 실패한 것이다. 골프장, 카지노, 성인오락실, 이라크 파병 등 염치가 없지 않았나. 관료들 때문에 못했다고 하는 것은 핑계에 불과하다. 정책 하나를 바꾸는 것은 껍데기가 아니라 혼을 바꾸는 것이다. 노무현 정부 들어서도 절차 논의만 했지 한국 사회가 어디로 갈지 진짜 논쟁을 한번도 못했다. 386들도 가상 논쟁만 했다.

-주대환 민노당 전 정책위원장-

질투의 감정이 있을지 몰라도 긴급조치 시대에 학생운동 한 사람이 볼 때 80년대 캠퍼스는 유행이었고, 쉽게 혁명가·대전략가가 되는 것도 봤다. 때를 잘 만나 학생회장 경력을 갖고 보수정당에 영입되고 수혈돼 벼락출세도 했다. 솔직히 세상이 손바닥 안에 있는 듯했던 그들이 ‘30년의 번영이 낳은 응석받이’로 보일 때도 있다. 과거사청산을 하겠다고 할 때 노무현 정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봤다. 과거사를 청산하려면 친일파 한민당을 파헤쳐야하는데 그 뿌리는 열린우리당도 닿는다. 386은 그런 역사를 잘 모른다.

〈이기수·김종목기자〉

 

 

 

[진보개혁의 위기] 386국회의원 ‘내 생각은…’

입력: 2006년 10월 01일 18:09:50

 
◇ 고진화 “문제제기 했지만 결실 아직 일러”

▲한나라당·성균관대 총학생회장=한국정치 전반을 변화시켜 보겠다고 나섰다. 한나라당에서 냉전적 사고로 반사이익을 얻는 정치 풍토와 당원들이 변해야 한다는 걸 제기했다. 하다보니 이런 문제제기가 결실을 맺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386 정치인을 비판하는 핵심은 많은 사람이 노력한 결과인데, 왜 들어가서 주도를 못하는지에 대한 평가다. 여당의 386들은 집권해서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한 목표가 미진했다. 리더십도 제대로 확보 못하고 청와대에 너무 끌려다녔다. 여당에 있으면 프로그램을 내놓아야 한다.

◇ 이기우 “이해 뛰어넘는 새 리더십 과제”

▲열린우리당·성균관대 총학생회장=운동권 동료들은 지금 삶의 공간에서 예전에 가졌던 관념을 실현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 기준을 갖고 비판한다. 그래도 잘 해야 한다는 책임의식은 갖게 된다. 지역이나 이해관계를 넘는 새 리더십을 만드는 게 386의 숙제다. 정치의 질을 높일 책임도 우리에게 업보처럼 주어져 있다. 그게 아니면 우리 생명은 끝난다고 본다. 다만 386이기 때문에 뭘 해야 한다는 강박의식은 없었으면 좋겠다.

◇ 이인영 “자기 정체성·전투의지 잃어”

▲열린우리당·전대협 초대 의장=정치를 하기로 맘먹은 것은 운동의 많은 부분을 정치가 대체하고 있다고 생각한 때다.

386이 도매금으로 욕먹는 것은 자기정체성을 지키면서 능력있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해서 아닌가.

옛날의 주장과 이념에서 현실정치에 흡수됐다고 평가받는 것도 그 때문이다. 도덕성의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본회의에서 찬성이나 반대 버튼을 누르면서 과거처럼 맹렬한 전투의지가 있는지 자문할 때가 많다. 진도개처럼 물어뜯고 있느냐의 문제다.

◇ 임종석 “한·미 FTA 찬성도 소신껏 하자”

▲열린우리당·전대협 의장=균형감각이 결여되고 절제되지 않은 개혁 구호도 있었다. 지금 최종 통과된 사학법을 갖고 처음 협상했으면 종교단체는 반발하지 않았을 것이다. 무능하다 하면 억울하지만 사실 먹고사는 일에 대해 희망을 제시못했다.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시민·사회단체의 건강한 문제의식은 의미있지만 386 정치인이 그런 시각만 갖고 있다면 차라리 야당을 하는 게 좋다고 본다. 세계화시대에 경제를 어떻게 이끌고 갈지 답을 제시해야 한다. 한·미 FTA를 찬성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 우상호 “보수세력이 ‘아마추어·무능’ 덧칠”

▲열린우리당·연세대 총학생회장=1987년 학생운동을 나오며 역사의 부채를 졌다고 생각하고 있다. 보수세력이 ‘추상적 386’을 만들고 무능하다고 비난한다. 국회의원의 유·무능을 가리는 것은 상임위 활동이다. 386이 베스트그룹에 많이 들어 있다. 17대에 들어온 386은 과거의 김민석 같은 ‘개인 스타’가 아니라 ‘그들’이라 불리는 ‘집단’이다. 정치권 386은 소프트랜딩을 했다고 본다. 우리도 분화의 가능성이 있다. 공통의 비전으로 무장돼 있는지 답답함을 느낀다. 포스트 노무현의 과제를 찾는 게 과제다.

〈이기수·김종목기자〉

 

 

[진보개혁의 위기] 어느 386정치인의 ‘자기비판’

입력: 2006년 10월 01일 18:12:32

 
386은 고등학교까지 반공 교육과 국민윤리 교육을 받은 교련세대이다. 대학에 들어와 80년 광주를 기점으로 정치적으로 깨어나고, 민주화를 갈망하며, 스크럼을 짠 세대다. 어찌보면 누구보다 공동체험이 많았고, 승리를 함께 맛본 사람들이기도 하다. 잠시 경찰에 쫓길 때 통장을 서슴없이 줬던 친구, 수배중에 찾아가도 술 한잔 사주고 숨겨주던 사시 공부생도 있었다. “대학시절 음악을 하느라 학생운동에 참여하지 못한 미안함과 부채의식 때문에 지난 대선때 노무현후보 선거운동에 뛰어들었다”는 가수 신해철의 고백이 그것이다.

-이제 정치인일 뿐이다-

386이 지금 도매금으로 욕먹고 있다. 나는 그 말에 반대한다. 사회 각계에서 중추적으로 뛰는 사람들은 여전히 건강하다. 그러나 정치권에서 386 동료들을 보는 눈은 다르다. 나에겐 이 문제가 고민이고 핵심이다. 과거 DJ 노선, 노무현 노선을 따르다 지금은 신자유주의에 대안없이 투항한 사람들이 한두 사람인가.

의원 개개인이 계보·세력의 대세 흐름에 순응적이다. 정치개혁이든 경제개혁이든 386세대의 자기 목소리를 낸 게 없다. 스스로의 가치 트렌드가 없기 때문이다. 대연정 때도 386 정치인 중 의미있는 목소리를 낸 사람은 거의 없다. 왜 정치를 시작했는지 말하고, 대연정의 시기와 방법이 틀렸다고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일어서서 목마름을 말하지 않는 것이다.

5·31 선거때 양아치라고 놀렸지만 오세훈도 그랬고, 정범구·설훈도 던질 때는 배지를 던졌잖아.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과단성있게 행동하지 못한다. 스스로 오버하지 않는 집단속에서 행동하려 한다. 과거 전대협 그룹내에서 ‘한 사람의 열 걸음보다 열 사람의 한 걸음’을 외쳤던 것처럼.

386에게 6·10 항쟁의 얘기는 이제 없고, 과거 족쇄로부터 스스로 해방됐다. 이념과 개혁의 시대적·선도적 역할에서 스스로 자유로워졌다는 것이다. 한·미 FTA도 대안 때문에 끙끙 앓고, 피터지게 언쟁하기보다는 순응하려는 사람들이 점점 늘고 있다. 여당의 울타리 안에 쉽게 숨는 것이다.

그러면서 민주세력 대연합을 얘기한다. 정치 선배들도 아니고 왜 80년대 ‘가치’를 좇던 386 입에서 그런 얘기가 나오는가. 386 정치인들에게 본질적으로 물어봐야 한다. 왜 정치를 했느냐, 지금 정치가 당신에게 어떤 의미가 있느냐고 속을 물어야 한다. 386 정치인의 원죄는 따로 있다. 제도화된 민주적 경선 절차보다 과거의 훈장을 갖고 동교동·상도동에 수혈된 게 1세대 그룹이다. 정권의 전위대로 나선 것도 수혈 주체들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게 원인이 된 것 아닌가.

나는 이제 386 동료들에게 과거의 훈장을 보며 무엇을 요구하지 말라고 하고 싶다. 요구해서도 안되고 특별히 요구할 필요성도 못 느낀다. 그들은 이미 ‘원 오브 뎀(One of Them)’이다. 젊은 정치인의 한명일 뿐이다. 민주화된 이후에 민주주의에 대한 시대적 고민은 386으로부터 멀어졌다. 세상 속으로, 기득권 속으로 무장해제돼 들어간 것이다.

-386은 정체돼 있다-

386 정치인들은 이슈와 이벤트에 강하고 일상성에 약하다. 지금은 상임위나 전공에서 깊이 파고드는 의원들이 늘고 있다. 그렇다고 선배 의원들보다는 열심히 한다고 자족할 때가 아니다. 학생운동을 떠나 정치에 발을 들여놓은 부채 의식은 여전히 크다. 그게 386의 뿌리이고 강점일 수 있다.

그러나 평균적으로는 먹고사는 세상 공부에 게을렀다. 대학때 정치경제학을 달달 외웠지만 사회가 어떤 메커니즘으로 흘러가는지, 주식이나 시장은 어떻게 작동하는지, 인간사의 보편적 리듬은 잘 읽지 못한다. 그런 기회의 과정도 대체로 부족했다. 준사회적인 학생운동 집단에서 선도적 역할만 고민하다보니 그런 것이다. 군사독재 타도에서 정치개혁까지는 흐름을 주도했는데 그 다음 먹고사는 경제 문제는 밥통이고, 의원들간에도 정도차가 심하다.

지금 기업은 나노 단위에서 경쟁하고 혁신하고 있다. 거기 비하면 정치는 지금 초저속이다. 정치권 밖의 386들을 만나면 ‘한심한 놈’ 소리 곧잘 듣는다. 386들이 양심적이고 부패나 이런 데서 도덕적 우월성은 그래도 강하지만, 총체적으로 무능 딱지가 붙는 이유다. 386이 굵직한 정책을 내놓은 기억이나 그런 이미지가 있나. 다 섣부르게 알고 섣부르게 풀어왔기 때문이다.

청와대 386은 훨씬 더 도그마에 빠져있다. 내가 옳고 따라오라는 식이 더 강하다. 참여정부라 했다. 참여가 뭔가. 민주화 이후의 사회에서 제일 먼저 강하게 분출하는 것이 요구다. 그것이 참여를 수반하지만, 참여는 요구가 있기에 갈등도 몰고온다. 철저하게 충돌하며 선택을 하려 했던 참여정부의 방향은 맞다. 그러나 방법이 틀렸다. 참여정부가 초창기에 참여의 갈등을 겪고, 후반부에 대타협과 대연정을 하려 했다고 본다. 그런데 대타협의 전제는 지지와 신뢰다. 권력도 놓고 지역도 놓고 처음에 지지했던 사람들도 등돌리고 지지기반이 너무 협소해졌다. 프로페셔널한 촘촘한 계획을 갖고 가지 못한 것이다.

당도 이 혼란과 무능에 일조했다. 386 의원들이 누구보다 책임을 통감해야 한다. 지지층 누구도 성장을 못했다고 욕하지는 않는다. ‘해낼 수 있는 개혁도 못해낸 무능집단’이라고 등 돌릴 때 가장 가슴 아팠다.

나는 아직도 시간이 있고, 희망도 다시 키워갈 수 있다고 본다. 386부터 열 배는 더 뛰어야 한다. 노무현 정부가 이렇게 끝나는 것은 개혁의 후퇴다. 개혁과제 100중 50은 해냈어야 했다. 지지율 보면 10~20도 못했다는 것 아닌가. 국민들이 볼 때 대선·총선에서 그만큼 밀어줬는데 반에서 25등 정도는 해야 되는데 40등 하고 있으니 무능하다고 하는 것이다. 당정분리 하자고 해놓고 대통령은 계속 청와대에서 정치하고, 당은 자생력이 하나도 없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80년 진혼굿은 끝났다-

386 정치인 다수가 하루 빨리 중도우파로 가야 할지도 모른다. 그래야 진보의 가치와 의제는 더 선명해진다. 개혁과 진보를 말하면서 앞에서 눈만 어지럽게 쓸고 가면 더 안되는 것이다. 독재 타도를 외쳤던 80년대의 사회 틀과 세계화·양극화에 맞닥뜨린 지금의 사회 틀은 똑같이 ‘진보’라는 말도 내용이 다르다고 본다.

-성공한 방법 답습마라-

정치권의 386이 이 경종을 안다면 이런 말을 하고 싶다. 우리가 어제 생각하고 살았던 모습으로 오늘 정치를 하지 말자고, 과거처럼 그렇게 모이고 세상과 떨어져서 가지 말자고….

‘힐러리처럼 일하고 콘디처럼 승리하라’라는 책을 보면 ‘성공했을 때 그 방법을 성공한 이후에 똑같이 반복·답습하지 마라’라는 표현이 있다. 나를 포함해 오늘의 386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고, 책을 읽으며 마음속의 울림이 컸다. 시대를 향해 새롭게 눈을 떠야 한다. 지금처럼 논쟁하다 안되면 갈라치고 매도하고, 선악의 개념으로만 사안을 보지 말아야 한다. 대안도 내놓지 못하면서 과거식 이분법만 고집하면 답이 없다.

정치권 밖도 386이 기로에 서 있는 곳이 많다. 흔히 386이 사회에서 연착륙하고, 주도적 위치에 선 대표적인 게 정치권, 시민사회, 학원가, IT라고 한다. 운동권이 학교 졸업후 대거 정치 아니면 학원으로 빠졌다. 과거에는 돈을 벌어도 명분이 있었다. 사회적 아젠다와 가치를 풀어가기 위해 누군가는 돈을 벌어 보태겠다고 한 시절도 있었다. IT는 경제 사회적 부가가치를 높인 주역이기도 하다. 그런데 적잖은 시간이 흘렀고, 사교육 시장과 사행성 게임업계에서도 386이 대변자가 되고 있는 것은 새로운 딜레마다. 나이를 먹으며 기득권도 생기고 커진 것으로 봐야 한다.

-잃어버린 목소리 찾아라-

지금 40대, 386은 민주화와 정보화의 경계선에 섰다. 범사회적 386이 정치권의 386을 매섭게 보고 있다고 본다. 신뢰의 끈을 다 잃었다고 보지는 않지만, 언젠가 대학 친구로부터 너희가 386 전체를 평가절하시켰다는 소리를 듣고 섬뜩함을 느꼈다. 모두 386의 책임이냐. 반성할 점은 많지만, 억울하다고 느낄 때도 많다. 우리는 여전히 건강한 게 많고 시대 고민도 많이 한다.

나는 386 정치인들이 80년대의 흥분에서 깨어났다고 본다. 그 진혼굿은 끝났고, 매일매일 부딪히는 현실은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를 부르던 그 때와는 너무 달라져 있다. 현실 정치인이 됐음을 자위하다가도 문득 ‘나는 성대(聲帶)를 잃어버렸다’고 자책해볼 때가 있다. 침묵이 괴롭지만 어느 때는 용서하고 즐기는 나도 보게 된다. 언젠가 대학 후배가 87년 6월 어느 술집에서 내가 했던 얘기라며 돌려준 말인데, 그렇게 비수처럼 꽂힌 적이 없었다. “일어서서 목마름을 말하지 않는 자에게 더 이상 샘물을 주려는 사람이 있을까.”

〈정리|이기수기자〉

〈특별취재팀/이기수·오창민·김광호·김종목·박영환·전병역·최민영·손제민·장관순기자〉

 

 

[진보개혁의 위기] 2-1. 개혁정치인의 현주소

입력: 2006년 10월 01일 18:35:36

 
“너네들(386세대) 정말 X 같다.” “선배(1970년대 긴급조치 세대)들도 X 같다.” 2004년 12월 여의도 한 술집에서 열린우리당 초·재선 5명이 소주잔을 부딪쳤다. ‘국보법 폐지 200시간 농성’을 하던 때다. 당내 소모임 ‘아침이슬’ 세대인 한 의원은 후배들의 나약함을 지목했고, 386 의원들은 “어떻게 끝을 볼 거냐”며 선도투쟁의 문제점을 따졌다. 그들에게 대안은 불투명했고, 당내 스펙트럼은 좌우가 훨씬 더 넓던 시절이다. 국보법 안건은 그렇게 좌충우돌하며 몇차례의 본회의 유회 끝에 유야무야됐다.

2년이 흐른 지금 이인영 의원은 “그때 얼어죽을 각오로 무릎을 꿇고 버텼으면…”이라고 돌이킨다. 당시 김원기 의장의 사회권 행사를 촉구하며 의장 공관에 몰려갔다가 2시간 만에 무력감 속에 철수한 것을 지칭한 것이다. 그는 “할 만큼 했다고 주저앉은 ‘상업적 진보’의 전형 아니었을까”라고 자문했다. 그러나 그것은 좌절이라기보다 그들에겐 짧지만 가장 빛나는 개혁의 시기였다. 이전에도 이후에도, 소수당이었든 다수당이었든 그들은 개혁적인 것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했다.

2000년 16대 총선때부터 본격 진출한 80년대 학생운동권은 세대교체의 축이 되며 정치개혁의 희망봉으로 각광받았다.

그러나 지금 평가는 어둡다. 민노당 진보정치연구소가 지난 8월 한길리서치에 의뢰, 국회 공무원·출입기자 100명에게 물은 여론조사에서 386 의원들이 ‘17대 국회에서 가장 실망스러운 집단 1위’(78.8%)로 꼽혔다. 2003년 참여·정책(개혁)·전국·전자 정당의 네 깃발을 올리며 창당한 열린우리당의 추락한 위상은 ‘실망스러운 386’과 동일한 궤적일 수 있다.

왜 386이 ‘술자리의 안주’가 될까. 현실에 빨리 순응하고, 권력을 다투는 구태를 쉽게 따라 배우고, 실력이 없다는 말이 빠지지 않는다. 2003년 이라크 파병때 반대파는 68명에 달했고, 70~80년대 운동권 의원들이 주축이었다. 그러나 그후 반대 표결은 50명(2004년 2월 추가파병안)→63명(2004년 12월 파병연장안)→31명(2005년 12월 파병연장안)으로 줄었다. 16~17대에서 표결마다 일관되게 반대표를 던진 사람은 26명뿐이다.

박석운 민중연대 집행위원장은 “그들은 이라크 파병, 한·미FTA와 평택 미군기지 무비판 등 ‘준배반적’ 처신을 했다”면서 “수구꼴통보다 훨씬 낫고 정치발전의 일익을 담당했지만 개발독재 이후 새 패러다임을 못 만들고, 신자유주의에 순응해 오늘의 문제를 낳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들은 ‘현실정치의 동화(同化)’에 대해 비판받을 때 늘 ‘여당 의원으로서’라는 말을 앞세운다. 우상호 의원은 “가장 괴로운 게 이라크 파병”이라며 “소신이냐, 노대통령의 고뇌를 받아줘야 하느냐가 문제”라고 말한다. 현실 순응은 지난해 노대통령의 대연정 파문때도 반복됐다. 의원총회 한번 없이 혼선과 무기력에 빠져든 당에서 386은 파편화됐을 뿐이다. 고려대 최장집 교수는 최근 한 인터뷰에서 “‘저런 이들이 운동을 했었나’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기존 것을 그대로 따라가고 있다. 더 빨리 기성 질서에 적응하고 엘리트가 돼 버렸다”며 ‘권력화된 386’을 지적했다.

386 의원들이 꼽는 강점은 “수평적 네트워크가 강하고 대중 속에서 문제를 풀어가는 자세”(이기우 의원)이다. 그러나 정치권 386의 ‘맏형’격인 신계륜 전의원은 “5~6년 전만 해도 ‘새 피’로 불리고 그 이미지를 가지려한 386이 지금은 서로 거리를 두려는 말이 됐다”고 말한다. 그는 “386세대 전체가 도매금이 될 수 없다”고 선을 긋지만, “윗세대의 동의를 구하고 아랫세대를 이끄는 허리로서 정치권 386은 실패한 게 많다”는 ‘중간평가’를 내놓는다.

2004년 4월 총선 직후 전대협 출신 초선의원 12명이 회동했다. 결론은 ‘당내 정치하지 말자’ ‘실력을 키우자’였다. 탈(脫)계보를 맹세했던 초심은 그러나 공염불이 됐다. 적잖은 386이 당내 양대 계보인 정동영·김근태계에 포진해 있다. 전당대회 때도 늘 정치현장의 선봉에 서 맞부딪쳤다. 정동영·김근태·김혁규·김두관 최고위원이 당선되고, 김영춘·김부겸·임종석 의원이 고배를 든 지난 2·18 전대가 대표적이다.

유시민 의원과 386 대표로 출마한 송영길 의원, 염동연 의원이 충돌한 지난해 4·2 전대도 그랬다. ‘친노적자’ 싸움과 인신공격이 난무했던 전대는 80년대 ‘가치’를 말하던 386이 권력화된 것을 엿보게 한다.

청와대 386도 예외가 아니다. 집권 첫해 이광재 국정상황실장이 당으로부터 ‘이너서클’과 ‘전횡’ 공격을 받고 물러난 게 대표적이다.

소장 개혁파는 분화되고 있다. 386내에서 ‘고·스톱’ 논쟁이 더 치열한 한·미FTA가 대표적이다. 내부 소모임도 ‘개점휴업’이 많다. “‘포스트 노무현’의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고, 애써 충돌을 피하기 때문”(386 당직자)이다.

외부의 시선은 더 원색적이다. 열린우리당 창당때 신당연대 실행위원장을 맡은 강영추씨는 “YS·DJ·노무현을 만난 학생회장 중에 실무를 건너뛴 점프층이 많다”고 일갈했다. ‘권력의 전위대’로 나서고, 무능 논쟁의 출발선을 386의 ‘수혈론’으로 짚은 것이다. 박주현 전 청와대 시민사회수석은 “386의 자기 희생과 성실성은 인정하지만, 경제·사회 개혁에선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며 “실력도 없이 폼잡는다는 부정적인 면이 부각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386 의원들은 “386만의 책임은 아니다”라고 해명한다. 그러나 한나라당 고진화 의원은 “희망적 주체로 서 있는지가 핵심”이라고 자기 비판을 했다. 386이 40대를 꽉 채우는 2008년 총선에서 정치권 386은 시험대에 설 상황이다. 평가는 남은 1년6개월이 길 수도 짧을 수도 있는 그들의, 각자의 몫이다.

〈이기수·김종목기자〉

 

 

 

[진보개혁의 위기] 당내 정치에 함몰 ‘약자의 희망’ 잊어

입력: 2006년 10월 17일 17:21:23

 

1997년 대선에서 될 사람을 밀자는 생각으로 권영길 후보를 찍지 않았다. 그러다가 희망이 배신으로 바뀌는 한계를 보고 민노당이 희망이 될 것 같다는 생각에 입당했다. 그러나 지금 예전에 벌어둔 돈을 까먹고 있다.

당원들은 다들 이 당이 망하면 안된다는 절박감을 느끼고 있다. 그런데 면밀한 검토나 치열한 토론도 없이 몇년에 집권하고 등의 계획을 설렁설렁 이야기하고 결정한다. 게다가 특히 NL계열 중심으로 일반인들이 보기에 전혀 진보적이지 못한 면들을 자꾸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도 덩치를 더 키워야 한다는 생각에 논쟁을 회피하고 있다.

정파에 소속된 사람들이 당을 과잉대표하는 면은 분명히 있다. 정파 소속 당원들이 당 전체를 좌지우지한다. 최고위원 회의를 하면 절차적 문제건 정치적 문제건 표수는 거의 정해져 있다. 최고위원들이 그런 뻔한 것을 논의하면서 몇 주를 보내는 것을 보면 참 가슴이 아프다.

최고위원들은 너무 당내 정치에만 올인할 게 아니라 소명의식을 가져야 한다. 일반 국민들은 민노당 최고위원이 누구인지를 모른다. 하지만 당의 입장이 국민에게 어떻게 전달되고, 어떤 평가를 받느냐에 따라 본인들의 성과도 평가받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국민들이 열린우리당과 민노당의 차별성이 없다고 본다면 당은 어느 것이 한국에서 진보적 대안인지를 고민해야 한다. 이대로라면 2008년 총선에서 지금보다 의석이 더 많아질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여전히 대선에서 바람만 잘 타면 가능하다는 생각이 있다.

당에 들어올 때부터 지역정치와 여성문제 등 사회적 약자 문제를 이곳에서는 해결할 수 있을 것이란 근원적 희망이 있었다. 하지만 그 희망만으로는 오래 못 버틴다. 중앙당을 보면 황당하고 창피해서 밖으로는 이야기 못할 일도 많다. 지금 지도부로 대선과 총선을 치른다면 우리의 역량 이상을 바라기는 어려울 것이다. 민노당은 기존 보수 정당에 비해 정말 다른 꿈을 꾸는구나 하고 느껴지는 게 없다. 진보적 가치를 추구한다는 당이 균질하지 않은 어떤 것에 대해 참지를 못한다. 사람들이 아주 보수적이다. 당직자들에게 외적인 보상을 못해준다면 긍지라도 느낄 수 있게 해줘야 한다. 그것조차 없다면 괜찮은 사람은 다 나가버릴지도 모른다.

〈이봉화/ 서울시당 여성위원장〉

◇ 이봉화

민노당 관악구위원회 위원장 겸 서울시당 여성위원장. 35세. 2002년 대선 전에 입당. 2003년 현대자동차 직장생활을 접고 관악구위원회에서 전업활동 시작. 지난 5·31 지방선거에서 구의원 출마

 

 

[진보개혁의 위기] 2-2. 민주노동당-제도권 진입 3년

입력: 2006년 10월 17일 17:55:44

 
2004년 4월 16일. 민주노동당의 여의도 당사에는 전날의 4·15 총선에서 원내 10석을 달성하며 제3당이 된 것을 축하하는 선물이 답지했다. 당시 김종철 대변인은 많은 선물을 사양해야 했다. 그는 “더 이상 선물을 둘 곳이 없어 홈페이지와 e메일로 축하 메시지만 받았다”고 회고했다. 새로 가입하는 당원은 하루 150~180명씩 됐다.

2000년 1월 민주노동당 창당대회에서 권영길대표 등 지도부들이 손을 들어 환호에 답하고 있다.
총선 직후인 5월 13일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의 조사결과 민노당 지지율은 21.9%까지 올라갔다. 탄핵 역풍을 맞은 한나라당을 0.4%포인트 차까지 쫓아갔다. 울산에서는 정당득표율이 35.4%로 치솟았다. 권영길 당대표는 “50년간 정치적으로 소외받았던 이들을 위한 진보정치가 태어나는 위대한 순간”이라고 감격어린 선언을 했다. 세상의 관심이 온통 민노당으로 쏠린 듯 했다. 민노당은 당사 4층에 20여명 수용 규모의 기자실을 마련했지만 자리가 없다는 기자들의 아우성을 들어야 했다.

그로부터 2년 6개월이 흐른 2006년 10월. 민노당 당사에서 기자실이 사라졌다. 당원들은 더 이상 늘지 않는다. 지지도는 계속 떨어져 5~7% 수준에 고착되어 있다. 최근 민노당이 당 지지자 상대로 조사한 결과, 내년 대선에서 민노당 대선후보로 지지할 사람이 없다는 대답이 58.5%나 나왔다. 지난 5·31 지방선거에서 처음 투표를 했다는 대학생 윤모씨(20·서울 노원구)는 “민노당 후보를 지지하고 싶어도 일단 당세에서 밀리고 공약도 힘이 없어보여 지지하려는 마음이 안생긴다”고 말했다. 최근 당원을 포기했다는 김모씨(43)는 “전망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의 탈당 이유는 이렇다. “민족해방(NL) 계열은 아직도 30년대 농경사회에 머물고 있고, 민중민주(PD) 진영도 산업사회 버전이긴 하지만 정보화 사회를 따라 가지는 못하고 있어요. 말은 진보인데 시스템은 낙후됐고 진화가 덜 됐습니다”

사실상 첫 의회진출 진보정당의 위상이 이렇게 추락하고 있지만, 그들의 반성은 느릴 뿐 아니라 철저하지도 않다. 5·31 지방선거가 과연 패배인지를 놓고 아직도 평가를 내리지 못하고 있다. 이런 지경인데도 대선 때 후보를 잘 뽑으면 다시 지지도가 오를 것이라는 근거없는 낙관론에 빠져 있다.

‘부유세 파동’은 정책적 무능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2005년 1월 14일 민노당 부유세의 설계자인 윤종훈 정책연구원이 사표를 냈다. 간이과세 폐지에 대해 당 간부 한명이 인터넷에 비판글을 올리고, 당이 택시노조의 압력으로 LPG 특소세 폐지를 수용하는 쪽으로 굳어진 게 직접적인 계기였다. 그는 간부 개인의 이해와 특정 노조의 압력을 받아 당의 원칙이 무너졌다고 생각했다. 그는 “모든 의제를 민노당의 가치인지를 기준으로 평가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다. 우선 개인이나 조직, 정파에 유리한지 불리한지 부터 따진다”고 당 지도부를 비판했다. 그는 “아마추어리즘으로는 재경부 엘리트들과 싸울 수 없다. 희망이 안보인다”고 했다.

부유세 문제는 그해 4월에서 10월 사이 경기도 기초의회에서 민노당 소속 의원 8명이 재산세 감면 조례에 찬성하면서 다시 한번 논란이 됐다. 중앙당은 “진보정당 소속 기초의원이 재산세 인하에 찬성해선 안 된다는 것은 상식”이라며 소명을 요구했다. 그러나 기초의원들은 “당에서 언제 부유세에 대해 설명 한번 해준 적이라도 있나. 징계할테면 하라”며 저항했다.

이런 정책상의 무능은 정작 민노당의 지지그룹이 되어야 할 서민과 노동자들이 민노당을 지지하지 않는 결과로 나타나고 있다. 진보정치연구소와 한길리서치가 지난 9월 15일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민노당의 평균 지지자는 ‘30대, 서울·수도권 거주, 대졸이상, 화이트칼라, 연평균가계소득 2천만~3천만원’으로 나타났다.

단병호 의원은 “의회에 들어오는 데까지 역점을 뒀지 정작 들어와서 할 일은 충분히 준비하지 못했다”면서 “국민의 관심이 큰 경제, 삶의 현실에 대한 정책대안을 제시하는 데 근본적 한계가 있었다”고 고백했다. 그동안 민노당은 사회·경제 개혁 보다 민족문제에 더 관심을 기울이는 당이란 인상을 주었다. 민노당이 2000년 1월 30일 민주노총과 전국연합을 주축으로 출범할 때의 일이다. 당명을 두고 싸웠다. NL은 ‘통일민주진보당’, PD는 ‘민주노동당’을 주장했다. 결국 창당 발기인들은 민주노동당을 선택했다.

그리고 민주노총은 민노당의 역사적 임무를 “신자유주의 공세를 돌파하기 위한 강력한 정치적 전위”라고 규정했다. 하지만 2002년 지방선거 이후 NL이 당내 다수파를 점하면서 진보정당의 정체성을 의심케 하는 사건이 잇달았다. 지난해 3월 16일 일본 시마네현 의회가 ‘독도의 날’ 조례안을 제정하자 민노당 지도부는 “독도에 군대를 주둔시켜야 한다”는 기자회견을 했다. “평화주의 원칙에 위배된다”는 비판이 이어졌고 대변인은 결국 “진보정당의 정체성에 맞지 않는다는 비판을 전적으로 수용한다”고 공개사과해야 했다.

지난 9일 북한의 핵실험 강행에 대한 당의 성명은 ‘유감’이라는 두리뭉수리한 표현으로 넘어갔다. 조선중앙통신의 발표 내용 중 “핵실험은 조선반도와 주변지역의 평화와 안정을 수호하는 데 이바지하게 될 것”이란 주장에 대해 “민노당은 동의하지 않는다”라는 입장을 천명해야 하는가를 둘러싸고 대변인과 사무총장이 격론을 벌였고, 결국 발표문에서 빠졌다. 지난 3일 북한 외무성이 “핵실험을 하겠다”고 선언했을 때도 이용대 정책위의장은 “대치국면에서 핵이 자위적 측면을 갖고 있는 것을 인정한다”고 밝혔다. 한재각 정책연구원은 “제발 민노당의 반전평화, 반핵정당으로서의 정체성을 되찾아 달라”고 호소했다. 당 게시판에는 “제대로 된 정신을 가진 진보정당이라면 핵무기를 통한 갈등해결은 단연코 반대해야 한다”며 지도부의 어정쩡한 태도를 비판하는 글이 쏟아졌다.

사회는 이제 민족문제를 진보의 기준으로 삼지 않을 만큼 변했는데도 민노당이 이 변화를 선도하기는 커녕 따라가지도 못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달초 경향신문과 KSOI가 ‘진보개혁의 위기’ 특집을 위해 386 출신 각계 전문가 1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한국사회의 진보와 보수의 기준은 ‘성장과 분배에 대한 인식’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65%로 압도적이었다. 남북관계를 꼽은 사람은 13%로 소수자 권리에 대한 인식이 기준이라는 사람(14%)보다 적었다. 주대환 전 정책위의장은 “당이 민족문제에 묶여 사회경제적 의제를 제대로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민노당에는 북한 이외에 민주노총이라는 성역이 또 있다. 민주노총이 민노당 위에 군림하면서 조직되지 않은 다수의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당의 거리를 멀어지게 만든 것이다. 10·26 울산 재선거 패배 직후인 지난해 11월 28일 민노당 비대위는 비정규직에 정치적 대표성을 부여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부문할당 비율조정안을 마련했다. 민주노총의 대의원 배분율을 28%에서 25%로 3%포인트 축소하고 30%는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의무할당한다는 내용이었다. 비정규직 문제를 등한시했다는 내부 자성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다음달 10일 열린 중앙위원회의에서 이 혁신안은 통과되지 못했다. 민노총의 노골적 반발 때문이었다. 그 결과는 선거로 나타났다. 5·31 지방선거에서 울산 지역 비정규직 노동자는 민노당에 등을 돌렸고, 참패를 했다. 박용진 대변인은 “지금 민노총은 민노당의 총독부같은 역할을 하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 당원들이 당대표 선거 과정의 부정의혹을 검찰에 고발하면서 고질적 정파갈등과 당내 민주주의의 결핍이라는 병폐가 외부로 터져나왔다. 지난달 1일 ‘부정선거 관련자 검찰고발을 요구하는 당원모임’은 지난 2월 있었던 당대표 선거에서 부정행위에 이용된 5개 전화번호의 개설자와 사용자를 대검찰청에 고발했다. 정파갈등이 부성선거 시비로 표출된 것이다.

지역 위원장이나 공직 후보를 뽑는 선거에서 정파 선호 투표와 부정선거는 기성 정당과 크게 다를 바 없다. 김창현 전 사무총장은 이렇게 전했다. “선거가 지명도와 상관없이 이뤄집니다. 위원장과 대의원만 많으면 이깁니다. 골때리는 선거죠. 전부 부정선거입니다. 대의원이 함을 갖고 다니면서 당원들이 ‘누구 찍을까’하고 물으면 ‘여기 여기’하고 고개짓만 하면 대의원이 누구인지(어느 정파인지)에 따라서 표가 80%는 바뀝니다.” 이런 지적에 주 전정책위의장도 동의했다.

“민노당에서 (정파간) 싸움은 내용을 다루는 게 아닙니다다. 내용과 토론은 없어요. 형식적 문제나 절차상의 하자를 꼬투리 잡아서 공격하죠. 그리고 기다렸다가 세대결을 통해 표로 눌러버립니다. 그러다 보니 표단속만해요. 간부들 외의 일반 당원들은 뭐가 문제인지도 모르죠. 신생 벤처 진보정당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행태들입니다.”

지도부는 리더십 부족으로 시달리고, 당 운영은 난맥상을 보인다. 민노당은 지난 2월 4일 제주에서 의원단워크숍을 갖고 원내대표단을 뽑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가장 강력한 후보로 거론되던 권영길 의원이 대선후보가 될 경우 의원단대표를 그만둬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갑론을박이 시작됐다. 그로부터 5개월간 논란을 더 한 끝에야 원내대표단을 뽑을 수 있었다. 지난 8월 6일 김선동 사무총장은 당사를 영등포구 양평동으로 옮기겠다는 기자간담회를 가졌다.

하지만 언론을 통해 이 사실을 알게된 최고위원들이 반대했다. 양평동은 결국 이전 장소에서 제외됐다. 조사결과 양평동 건물은 40억원의 근저당이 잡혀있었고, 냉난방시설의 문제는 물론 장애인 접근도 어려운 것으로 나타났다. 당사이전이 주먹구구식이었던 것이다. 지난 8월에는 국민의 세금인 국고보조금을 인건비로 지출하는 경우는 시·도당의 유급직원에 한한다는 정당법을 무시하고 지역위원회 인건비로 사용하다 선관위에 적발되기도 했다.

이런 아마추어 수준의 정당운영은 일반인의 민노당 인식에 고스란히 각인되고 있다. KSOI의 지난해 10월 여론조사에서 62.9%가 민노당은 시민운동의 성격이 강하다고 답했다. 민노당에 당이란 단어가 포함되어 있지만 많은 사람들은 민노당을 당이라기 보다 당이전의 운동단체로 보고 있는 것이다.

진보정치연구소의 장 소장은 “당3역이 과연 제 역할을 수행할 안목이 충분한지 의문이 있다. 정파구도에 의해 선출됐지만 정치적 경험이 부족하다. 자리에 대한 욕심이 과하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있다”고 평가했다.

지난 5월 지방선거때 유권자 매수행위가 적발되는 등 각종 비리와 부정의혹이 연이어 터지면서 보수정당에 대한 도덕적 우위도 사라졌다.

울산은 민노당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준다. 민노당은 진보운동 50년 만에 원내진출이란 쾌거를 이루기 이전에 이미 울산에서 구청장 두 석을 확보할 정도로 아성을 구축하고 있었다. 민노당은 그러나 지난해 10·26 국회의원 재선거에 이어 지난 5·31 지방선거에서도 울산을 지키는 데 실패했다. 지방선거 때는 단의원이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손을 잡고 “한번만 더 믿어달라”고 호소했지만 1998년부터 지켜온 기초자치단체장 두 석까지 날아갔다.

민노당 관계자들은 쓰레기 처리장 건설문제로 주민들과 충돌한 것을 주요 패인으로 꼽는다. 대기업노조 중심주의에 빠지면서 다수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실망시킨 것도 한 원인으로 지적된다. 울산의 집권당 민노당은 이렇게 지방자치의 새로운 모델을 만들지도 못한채 무너졌다. ‘민노당이 하면 다르다’는 것을 전국민에게 보여줄 절호의 기회를 잡았음에도 불구하고 ‘민노당이 해도 마찬가지’라는 실망만을 남겨 두고 철수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민노당은 이제 의석수 3%에 불과한 초라한 정당으로 전락했다.

이런 진보 실험의 실패는 이 지역의 보수회귀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2002년 동·북구에서 당선된 지방의원 중 5명은 지난 선거에서 한나라당이나 무소속의 정문준 의원 편으로 돌아섰다. 동구청장에 출마한 한나라당 후보와 무소속으로 나온 동구청장 후보는 과거 민노당 당원이었다. 울산 북구의 주부 박모씨(53)가 말했다. “이제는 민노당 사람들이라고 다른 게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어요. 다들 노동자의 이익을 이야기 하지만 결국 한 자리 해보려는 사람들 아니예요?.”

〈박영환기자 yhpark@kyunghyang.com

 

 

[진보개혁의 위기] 현실 안주땐 부패 변화 두려워 말라

입력: 2006년 10월 17일 17:55:50

 

어떤 조직이든 변화가 필요할 때 변해야 발전하는 데 민노당은 그것을 못했다. 2004년 총선 후 당직·공직을 분리시키면서 발전이 뒤처졌다. 운동권 단체를 운영했던 사고와 당을 운영하는 마인드는 달라야 한다. 그런데 지금 당 지도부 중에는 그런 마인드는 물론 실무능력을 가진 사람도 찾기 어렵다. 어느 정파든 아직 구태의연하다. 그나마 당운영을 알던 사람들도 당직·공직 분리로 당에서 배제됐다. 때문에 당이 구심점이 없다.

지도부들, 특히 최고위원들이 책임감도 없고 정치적 감각도 별로 없다. 열심히 하던 지역위원장들은 몇 번의 선거를 치르면서 출세주의 경향이 강해졌다. 개인들이 당을 보고 희망을 찾기가 어려우니까 조급증이 생기는 것이다.

진보정당에 대한 마인드와 상상력이 부족하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문제만해도 그렇다. 운동권 단체라면 반대하고 외치면 되지만 당은 그게 성사되면 농민이나 영세상인 등에게 어떤 피해를 주는지 정확히 찍어서 담론을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아직도 집회 중심주의다. 그러니 백전백패할 수밖에 없다. 전당적으로 민생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에 대한 프로그램이 없는데 민생특위를 만들면 뭐하나.

당이 정말 갑갑하다. 열심히 하는 것 같은데 뜬구름 잡는 이야기만 한다. 내용도 꽤 많은 것 같은데 한 문제를 일관되게 추진하지도 못한다. 성적을 매긴다면 40점 수준이다. 그냥 존재하는 것으로 실험의 의미만 있을 정도다.

당 밖에서 민노당을 지지하자고 할 만한 분위기도 안된다. 당이 활력을 잃어가고 있다. 당원들은 밖에 있어도 당이 움직이는 모습을 보는 데 참 답답하다. 민노당이 이만큼 성장하기 전에는 술 먹으면서 친구들을 설득할 수도 있었지만 지금은 “너희 당 하는 거 보니까 그저 그렇더라”라고 하면 이쪽에서 할 말이 없다.

젊은 지역위원장들의 사고가 경직적인 것도 문제다. 대부분 386들로 그나마 끝까지 버티고 보수정당으로 안간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들이 현실에 안주하고 있다. 당의 근본적인 문제에 입을 닫거나 정파 구도를 이용해서 중앙당의 자리 나눠먹기에 참여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지도부든 당 활동가든 변화를 너무 두려워한다. 변화를 두려워하면서 어떻게 진보를 말할 수 있겠나.

〈김재기/ 전 재정위원장〉

◇ 김재기

전 민노당 재정위원장. 39세. 97년 대선 국면에서 민노당 참여. 98년 구리·남양주 지역위원회 사무국장으로 당활동 시작. 지난해 초부터 올 3월까지 중앙당 재정위원장. 현재 용산전자상가에서 컴퓨터 부품 도매업.

 

 

[진보개혁의 위기] 민주노동당 “당내 정치에 발목” “정책없이 폼만”

입력: 2006년 10월 17일 17:58:56

 

민노당 사람들은 너도 나도 위기를 말한다. 자기 비판에도 익숙하다. 언제라도 욕먹을 각오를 한 사람들 같다. 그러나 정파에 따라 때로는 미묘한 차이, 때로는 본질적 차이를 드러낸다. PD의 홍승하 최고위원은 NL이 민족문제에 집착하느라 진보정당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은 점, 지도력 부재를 지적했다. 그러나 NL의 김창현 전 사무총장은 대중성 강화를 강조했다. 대선 국면에서 국민적 관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정치적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두 사람의 고백을 들어본다.

-‘국민 지지’ 먹고사는 게 정치(김창현/ 민주노동당 전 사무총장)-

민노당은 2002년 대선에서 1백만표라는 역사를 만들었다. 총선에서도 그런 역사를 이어갔다. 그런데 문제는 열린우리당이 죽을 쑤면 민노당이 대안세력으로 뜨는 게 아니라 동반추락을 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당과의 차별화보다 한나라당 공격을 앞세우면 1997년에 있었던 비판적 지지라는 망령을 이야기한다. 민족해방(NL) 계열도 이제는 범민련 일부를 빼면 비판적 지지를 주장할 사람이 없다. 당내에서 최소한 과거의 모습을 가지고 현재의 진정성을 의심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지방선거를 마치면서 당이 이대로 가면 망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2008년 총선에서는 3~5석의 유럽 좌파정당처럼 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라. 지역기반이 없는 우리당은 한번 무너지면 다시 세우기 정말 힘들다.

진보정당은 어느 정당보다 밝고 재기발랄해야 하는 데 민노당은 너무 칙칙하다. 운동권 특유의 근엄함만으로는 절대 국민적 지지를 받기 어렵다. 재미가 없고 너무 근엄하다. 한마디로 전부 양복쟁이들이다. 국민들이 민노당을 편한 티셔츠로 느낄 수 있어야 한다. 희망을 못주면서 죽자 살자 밀겠다는 몇%의 국민만으로 좌파정당으로 갈 것인가.

민노당이라고 이번 대선 국면에서 오픈프라이머리(완전 국민경선제)를 못하라는 법이 어디 있나. 대선 후보의 기준은 하나다. 가장 많은 표를 얻는 사람이다. 권영길이든 노회찬이든 심상정이든 단병호든 누구든 국민적 기대를 당으로 끌고올 사람이면 된다. 국민적 관심도 멀어졌고 신선감도 떨어진 민노당에 표를 몰아줄 사람이면 NL이든 PD든 중요하지 않다. 진보정당이라고 왜 이벤트를 못하나. 진보정당이 가장 창의적이고 재미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기성의 권위와 질서를 깨는 것이다. 다른 당에서도 깼는데 우리는 그것을 더 못한다. 너무 무겁다.

다만 정파의 이해에 따라 누구를 밀고 그런 행동을 하면 우리 당은 망한다. 국민적 상식에 어긋나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2004년 총선에서 10석을 얻었는데도 우리는 당직·공직 분리 원칙을 내세워 권의원을 대표자리에서 끌어내리는 잘못을 저질렀다. 국민적 상식과 엇나간 것이다. 정당답게 움직이지 못하면 우리는 운동권 집단으로 몰락하게 된다.

당 내부를 보면 의원들은 내부 이야기를 너무 많이 한다. 밖을 봐야 하는데 자꾸 내부적으로 발목이 잡힌다. 내부 정치에 너무 시간이 많이 걸린다. 중앙위원회 여는 데 밤새우고 거기서 결정 못하면 당이 아무것도 못한다. 지난 5·31에서도 민노당은 당헌·당규에 따라 서울 당원들만으로 서울시장 후보를 뽑았다. 평당원 민주주의의 한계 때문에 전략공천 같은 것은 엄두도 낼 수가 없다.

세상을 바꾸려면 환골탈태해야 한다. 이상은 높게 가지더라도 실천은 바로 앞의 것부터 해야 한다. 꿈이 빨갈수록 겉은 초록색인 수박이 되어야 하는데 민노당은 오래되고 잘못된 관행과 관습에 발목이 잡혀서 정말 수박이 못되고 있다. 민노당이 진정 국민적 관심을 모으려면 더 통속적이어야 한다.

민노당이 역사의 필연에 맞게 가려면 국민적 상식을 따라야 한다. 우리당 보고 정책적 입장이 왔다 갔다 한다고 비판하지만 민노당도 미친X 널뛰듯 하기는 마찬가지다.

우리당보다 더 심각한 내부 갈등이 있고, 사회주의 이야기하면서 주의주장은 사회주의와는 전혀 상관없는 것들을 하고 있다. 부유세가 어디 사회주의 정책인가. 한 때 민노당이 왜 사회주의를 지향해야 하느냐고 말했다가 좌파들로부터 개량주의라는 욕을 무척 먹었다. 그런데 유럽 등 어디를 봐도 현실에서 사회주의는 없다. 다들 사회민주주의 수준 아닌가. 운동권을 했던 사람들로서 그 지향을 이야기 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엄청난 거부감이 있는 것이다. 자기 만족적인 것이다. 민노당은 노동자, 농민, 빈민, 중소상공인의 정당이다. 사회주의가 아니다. 우리당 좌파 정도라도 제대로 관철하는 게 우리의 현실적 과제라고 본다.

사무총장 시절 중소기업 사장 한 명을 만났을 때 일이다. 내가 명함을 주고 민노당 사무총장이라고 했더니 그 사람이 벌떡 일어나더니 가겠다고 하더라. “민노당이오? 우리 죽이려는 당 아닙니까. 직원들 파업이나 지원하고”라고. 중소기업의 어려움은 모르고 기업 망하게 하는 일만 한다는 이미지가 민노당에 고정화되어 있었던 것이다. 중소기업 사장을 착취의 주역으로만 봐서는 안된다. 대기업 하청계열화로 언제 망할지 모른다는 공포감에 떠는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중소기업 사장들이 왜 비정규직에게 월급을 그것밖에 안주느냐고 따질 것이 아니라 둘다 살리는 길을 찾아야 한다. 중소기업의 지지없이 당이 어떻게 성장하겠나.

-정파싸움에 지지층 등돌려 (홍승하/ 민주노동당 최고위원)-

당의 활기가 없어지는 문제점을 느끼기 시작한 것은 2004년 총선 때 지지율 거품이 빠지면서부터다. 지난해 10·26 재선거에서 ‘조승수 지키기’에 실패한 후 위기감이 본격화됐다. 위기감에 대한 공감이 생긴 결과가 1기 지도부 사퇴다. 혁신 특위도 만들었다. 하지만 바뀐 게 거의 없다. 위기감은 있는데 해법은 못 찾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지난 5·31 지방선거도 평가 내용은 사실 다 나왔지만 그것을 지도부의 정치적 견해로 정리하지 못하고 있다. 초기에는 참패냐 아니냐를 두고 논쟁을 했다. 그러다 보니 평가에서 문제의 본질은 다 빠져나가 버렸다. 지금 지도부는 말이 좋아 집단지도체제이지 하나의 정치적 방침을 정해서 나가지도 못하고 있다.

문성현 대표는 민족해방(NL) 계열의 지지로 대표가 됐다. 그래서 NL이 아닌 진영에서는 비판받고 있고, 정작 NL에게는 견제만 당하고 있다. 권영길 의원단대표는 언론에 우리당의 상징처럼 비쳐지고 있다. 하지만 의정활동을 하면서 ‘민노당=권영길’이라는 프리미엄만 이용했다. 통일외교통상위에서 개별의원으로서 활동해서 내놓은 성과가 뭐가 있나.

당의 정체성도 흔들리고 있다. 대선과 총선 이후 국민의 70%가 지지하던 부유세 문제도 정책으로 구체화하지 못했다. 정책정당이라는 평가를 바탕으로 한 대중적 지지를 얻는 데 실패한 것이다. 현안마다 능동적으로 대응해야 하는데 독도 군대주둔 발언 같은 문제가 튀어나왔다. 용산미군기지와 관련해서도 아무런 대안을 못내놨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대응도 당의 사활을 걸겠다고 했으면 그에 걸맞은 대응을 해야 한다.

민노당의 재정규모는 1년 예산이 1백50억원 정도가 된다. 그런데 이 돈을 너무 주먹구구식으로 사용한다. 희생과 헌신을 바탕으로 성장해온 구도가 당에 그대로 남아있다. 최근에 중앙당 조직진단을 외부에 맡겨서 인사와 재정 전반에 대한 컨설팅을 받기로 한 것도 그 때문이다.

상황이 이런데도 최고위원이건 의원단이건 관심은 온통 다음번 비례대표를 할 수 있을지에만 가있다. 당장 위기에 대한 해법이 대선후보를 어떻게 잘 뽑아서 해보겠다는 수준밖에 안된다. 지금 상황에서 대선후보를 일찍 뽑기만 한다고 누가 민노당을 주목해 주겠나. 당이 정치적으로 진보진영을 대변하지 못하는 문제부터 해결해야 한다.

비정규직 문제나 노동계 비리 사건, 민주노총의 노사정위원회 배제 등 현안이 많았다. 단병호 의원 등 민노총 출신 의원들이 적극적인 조정 역할을 해서 민노당이 민노총만의 당이 아니라 전체 노동자를 대변하고 있음을 보여줘야 하는데 누구도 감히 노동계의 문제에 뼈아픈 이야기를 하지 못했다.

당에서 민노총 부분을 할당하는 문제도 그렇다. 민노총 할당 분 중에서 비정규직을 30% 의무적으로 넣자는 혁신안이 작년 중앙위원회의에서 부결됐다. 민노총은 몰라도 당은 다르게 접근했어야 한다.

각 정파들의 발전도 지체되고 있다. 일부 NL 계열은 진보적 가치관을 놓고 매번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스스로도 소수자문제나 환경문제 같은 사회의 다양한 문제에 약하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다. 민족문제 우선이라는 사상적 한계도 분명하다. 북핵문제를 지금처럼 북한 배려만으로 푸는 게 남북관계에 도움이 되겠나. 민중민주(PD) 계열도 마찬가지다. 자기 프로그램을 개발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다. 민생 우선이라고 하지만 민생 문제를 자기 정파의 세계관에 맞춰서 실천한 게 없다. 발전이 지체되면서 지금은 정파도 아니다. 구(舊)운동권 세계의 집단과 그 주변 사람들에 대한 온정주의밖에 없다. 그래서 잘못한 것도 쉽게 용서하고 표를 찍어 달라면 다 찍어주고 있다.

투표제도의 문제도 많다. 노트북을 들고 다니면서 인터넷 선거를 할 수도 있는 상황이다. 투표함을 누가 지키느냐에 따라서 결과가 달라진다. 당원들에게는 정보가 없으니 진성당원제가 제대로 기능할 수도 없다. 누구나 가입할 수 있도록 해뒀으면 그들이 당에 관심을 가질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런데 지역에 가면 당원들도 TV에 나오는 의원들이나 대변인 이름 정도밖에 모른다. 누군지도 모르고 투표하고 부정선거까지 하게 되는 것이다. 투표 시스템과 당원 민주주의에 대한 재검토가 이뤄져야 한다.

민노당은 내부 정치가 너무 많다고들 비판하는데 지금은 오히려 내부 정치가 없는 당이라는 평가가 더 맞다. 뭐하나 조정되는 게 없고, 개인의 가치관과 정파의 가치관만 있다. 그 가치관들이 정치적으로 실현되려면 우선 당의 파이가 커져야 하는데 그게 안되고 있다.

<박영환기자>

 

 

 

[진보개혁의 위기] 민주노총 지도부의 자기비판

입력: 2006년 10월 22일 18:08:45

 

◇ 조준호 민주노총위원장

비정규직 조직화 느리다는 지적에는 공감한다. 그러나 조직화·쟁점화가 전혀 안된다는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다. 공공부문 비정규직의 조작화도 우리가 요구해 정부가 들어준 것이다. 민주노총은 위기가 아니다. 국민이 보수화되고 자본의 반격이 거세고 언론의 태도 때문에 그렇게 된 것뿐이다.

◇ 김태현 민주노총 정책실장

정파의 이해관계에 따라 생각의 편차가 크다보니 5년에서 10년을 내다보는 장기적인 비전을 만들기 어려운 상황이다. 제도권 밖의 관성 때문인지 변화가 쉽지 않다. 현재 각 조직의 이슈화되는 문제는 해당연맹 등에 맡겨진 경우가 많은데, 이 과정에서 포항사태처럼 전술적인 실수가 발생해 안타깝다.

◇ 기형노 민주노총 비정규센터 소장

민주노총 내 정규직 노동자들은 비정규직에 대한 노동자 연대의식이 부족하다. 조직된 노동자 중심의 사고가 민주노총 내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조합원들이 비정규노동자의 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생각하려는 절박함이 부족하다. 사업체계도 조직된 노동자 위주로 돼 있어서 바꾸려면 시간이 걸린다.

◇ 양경규 공공연맹 위원장

민주노총 조합원은 ‘먹고 살 만한’ 선택받은 계급이 됐다. 비정규직과 영세사업자들이 겪는 모순에 대해 투쟁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분노가 없다. 기업별 노조라는 한계에 갇혀 있다면 노동운동에 미래는 없을 것이다. 초창기 운동처럼 사회적 조건을 바꾸어야 한다는 공감대와 연대투쟁이 필요하다.

◇ 배강욱 화섬연맹 위원장

민주노총의 가장 큰 문제인 정파간 갈등 때문에 현장의 힘이 자꾸 분열된다. 조합원들 목소리가 정책에 반영돼야하는데, 각 정파는 자기주장만 내세우고 서로 인정하지 않는다. 도덕적 비리문제도 꼽힌다. 부패로부터 자유롭고자 만든 민주노총 아닌가. 그러나 조직이 확대되는 과정에서 기초를 다지고 품성을 강화하는 학습이 부족했다. 반성이 필요하다.

◇ 중앙집행부 고위임원

중앙과 현장간의 거리가 상당하다. 조직이 산업별노조로 전환하고 있지만, 기업별 노조 의식이 여전해서 비정규직 포용 등에 문제가 있다. 정파간 갈등은 사업 전반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기는 하지만, 향후 투쟁에 대해서도 단순한 투쟁 이외의 대안에 대해 충분한 논의가 이뤄지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 정용건 사무금융연맹 위원장

현재 민노총은 단체행동력도 떨어지고 교섭도 제대로 안된다. 크게 봐서 ‘신뢰의 위기’다. 지도부가 리더십을 보이고 산하조직이 이를 따르는 데 장애가 발생하고 있다. 실천은 별로 없으면서 주장만 많다. 이미 진단과 해법은 나올만치 나오지 않았나. 또한 민노총은 비정규직을 포괄하지 못하고 대표성도 부족하다.



◇ 김형근 서비스연맹 위원장

단결하지 못하는 점이 가장 아쉽다. 예를 들어 노사관계로드맵 관련, 대정부교섭을 하느냐 마느냐는 방식의 차이므로 내부적으로 신속한 합의가 필요했으나 그러지 못했다. 현 노동상황은 87년과 다르다. 투쟁과 활동을 달라진 현실에 맞게 조금씩 바꿔나가야하지만, 과거의 관성에 매여있다. 민주노총은 현실을 직시하고 대안을 생산해내야 한다.

 

 

 

[진보개혁의 위기] 2-3. 벼랑에 선 민주노총

입력: 2006년 10월 22일 18:19:04

 
조준호 민주노총위원장은 “요즘 민주노총 때리기가 지식인의 스포츠가 되었다”면서 “민주노총을 비판하면 진보인가”라고 항변했다. 민노총은 보수세력은 물론 진보세력으로부터도 문제아 취급을 받고 있다. 아니 외부의 시선을 빌 것도 없다. 이미 내부로부터 중병이라는 진단을 받은 지 오래다. 2년전인 2004년 9월 민주노총이 노조간부 600명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했을 때 63.6%의 절대 다수가 민주노총이 위기라고 답변했다. 민주노총은 ‘오래된 위기’라는 병을 앓고 있는 것이다.

2005년 11월 민주노총이 광화문에서 연 전국노동자대회. /경향신문 자료사진
민노총은 어디서 방향타를 잃었나. 김유선 전 민노총 정책실장은 ‘외환위기’였다고 말한다. 1990년대 초반 구소련이 붕괴하고 통독이 되면서 일부 좌표가 흔들린 학생운동 출신들이 대거 노동운동을 떠났다. 그러나 그것이 위기는 아니었다.

-구조조정에 뿌리부터 흔들려-

“당시도 민주노총에 정파가 존재했지만 갈등할 여지가 없었지요. 기업별노조의 한계 역시 큰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95년 민노총이 출범하며 큰 과제가 해결되고, 곧이어 97년 외환위기가 닥치면서 개별집단의 이해관계가 불거졌습니다. 구조조정 바람이 불자 하급단체의 아우성이 중앙집행부로 빗발쳤죠. 하지만 민주노총은 상황유지에만 급급했지 이해관계 조율을 못했어요.”

김전실장은 “외부의 위기보다 안에서의 붕괴가 더 무서웠다”고 말한다. 정파는 서로를 ‘상식 이하의 깡패집단’ ‘상종할 수 없는 비리주범’으로 매도하고 깊은 골을 파며, 서로 멀어지고 갈라졌다. 현장 노동자는 정파의 동원부대이자 표밭으로 전락했다.

이런 내부 갈등은 실망으로, 이는 다시 무관심으로 이어지며 위기의 바이러스를 퍼뜨렸다. 지난 8월 민노총 최고의결기구인 대의원대회는 ‘위원장 조합원 직선제’라는 중요 개혁안을 올렸지만, 대의원 1,045명 중 절반도 안되는 388명만이 나왔다. 대회는 무산됐다. 회의가 열려도 고성과 욕설, 폭력사태가 일어난다. 지난해 초에는 일부 강경파가 단상에 시너를 뿌리며 노사정대표자회의 복귀를 반대했다. 민주노총은 ‘민주주의도 할 줄 모른다’는 빈정거림을 들어야 했다. 현대차노조의 한 정책 관계자는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고 담론이 부족한 문화 때문에 사안마다 부딪치고 권력쟁탈, 독점, 권력탈환의 악순환이 발생한다”고 고백했다. 그뿐 아니라 부패집단이라는 새로운 딱지도 얻었다. 기아차 노조를 시작으로 채용비리, 수뢰 사건이 잇달아 터졌다.

민주노총의 연대를 가능케한 노동자 의식이 사라진 노동 현장에는 조합원들의 실리주의가 팽배해졌다. 평생고용시대가 끝나고 자본의 ‘정리해고’ 공세 속에 언제 잘릴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이다. 노동자는 누구라도 ‘정규직-비정규직-실업자’의 계단 아래로 굴러떨어질 수 있다. 이런 현실 때문에 정규직은 비정규직을 고용안정의 발판으로 삼는다. 현대차의 경우가 좋은 예이다. 98년 구조조정 충격 이후 현대차 노조는 2000년 사측과 함께 사내하청 투입을 16.9%까지 합법적으로 보장해주는 내용의 ‘완전고용보장합의서’를 체결했다. 노조가 불법파견을 묵인한 것이다. 이후 5년 만에 사내 하청노동자는 3배 늘어나 2006년 1월 현재 생산직 2만7천여명 가운데 하청노동자가 1만3천명이나 되었다. 노조는 ‘잘못된 합의’였다며 공개반성했다. 그러나 때는 늦었다.

경차를 생산하는 GM대우 창원공장에서 지난 봄 비정규직 해고자들은 굴뚝에 올라가 한달간 해고 항의시위를 벌였다. 그리고 정규직과의 연대투쟁을 제안했다. 그러나 정규직들은 거부했다. 세번에 걸쳐 총회를 거듭하며 논의했지만 결론은 역시 ‘투쟁단절’. 비정규직을 정규직화하면 정규직 일자리와 임금이 줄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나의 일자리, 나의 임금이 우선이었다. ‘연대’는 하기 좋은 말에 불과했다. 민주노총은 비정규직 포용을 사업 제1목표로 삼고 있다고 말한다. 실제 올해 1월 비정규직의 조직화와 노동권 보장을 위한 ‘비정규기금 50억원 조성’을 결의하고 전 조합원이 1인당 1만원을 납부하자고 촉구했다. 그러나 9월 현재까지 모인 금액은 15억원 남짓에 불과하다. 대기업 노조의 납부율이 현저히 떨어진다.

‘노동자의 처지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경제·사회구조의 개혁’을 외쳤던 민노총 초기의 열정은 ‘눈앞의 밥줄’ 앞에 이렇게 무색해지고 있다. 현장 노동운동가 조직인 ‘전진’의 한석호 조직위원장은 한 기고에서 “자본가계급이 투쟁하는 노동자들에게만 임금인상과 기업복지를 안기고, 열정으로 끓던 20~30대 활동가 대부분이 가족을 꾸리고 나이를 먹으면서부터 위기가 왔다”고 진단했다. 양경규 공공연맹위원장은 이렇게 분석했다. “87년 민주노동 운동의 중심이 되었던 노동자들, 저임에 시달리고, 근로기준법 적용을 못받는 노동자들이 20년이 흐르면서 한국사회 1천5백만 노동자 중 ‘먹고 살 만한’ 선택받은 계급이 됐습니다. 귀족이라는 말에 동의할 수 없지만, 먹고 살 만한 노동자가 민주노총의 중심이 된 것은 사실이죠.”

노동자와 사회의 보수화가 저변에 깔려 있는 조건에서 노동자의 힘인 총파업도 힘을 잃어가고 있다. “무분별한 총파업으로 대중과 멀어지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민노총 사업의 80%가 밖으로 나가는 투쟁입니다. 40여일간 하루 최대 30만명, 연인원 4백만명이 참여했던 96년 ‘노동법 개악저지 총파업 투쟁’은 국민의견 수렴해 이뤄졌다지만, 이후의 파업도 과연 그랬는지 돌이켜봐야 합니다.” 민주노총 정책실 간부 ㄹ씨의 말이다. 지난달 4일 발전노조 파업이 대표적인 사례다. 내부 파업 찬반투표에서 지지율 60%에도 불구하고 노조 지도부는 파업을 강행했고, 싸늘한 여론에 밀려 하루도 못버틴 15시간 만에 철회했다.

그래도 총파업은 계속되고 있다. 올해들어 민주노총은 총 5건의 총파업을 결의했다. 지난 7월 총파업의 경우 민주노총 집행부는 “최대 40만명이 참여할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다. 그러나 기존 파업사업장을 제외하고 노동부가 집계한 실제 참여인원은 1만2천여명(민노총 17만명 주장)이었다. 내달 총파업은 50만명이 참여할 것이라고 하지만 장담하기 어렵다. 현장투쟁을 중시하는 김태연 전 민노총 정책국장조차 “이제 여론도 의레 하는 파업으로나 생각하지 관심이 없다. 어떤 집행부가 들어서도 40만~50만 총파업은 관철시키기 힘들다. 전면적인 문제제기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경고했다. 배규식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은 ‘민주노총의 종이호랑이화, 총파업의 희화화’라는 말로 현 상황을 요약한다. “지난 4월 비정규직 총파업 때 현장에서 반발이 심했습니다. 정치파업에 대한 반감 때문이지요. 윗선에서 노선을 갖고 떠들지만 아래 의견수렴은 없어요. 금속연맹 동원이 쉬우니까 만날 우리만 나가라고 합니다.” 현대자동차 노조 관계자의 하소연이다.

노조내부의 지지도 없고, 여론 호응도 없는 ‘힘없는 총파업’을 왜 되풀이하는가. 민주노총 교육선전실 관계자의 대답은 간단했다. “우리나라 여론형성은 매스미디어를 통한 것이 전부 아닙니까. 파업을 하지 않으면 언론에도 나오지 않잖아요.” 민주노총 산하 연맹의 간부 ㄱ씨는 “사실 지도부에서 파업선언 만큼 편한게 없다”고 말한다. “투쟁 당위성만 놓고 파업 결의를 반복합니다. 지도부에게 파업은 제정파의 화살을 피할 수 있는 길이고, 자기 책임을 다했다는 증거가 되는 것이죠. 내부 정파간 갈등을 잠재우고, 결속을 다지기 위한 수단이기도 합니다. 투쟁하자는데 잔소리가 있을 수 있나요. 때문에 결과가 뻔하게 예측되는 상황에서도 투쟁하러 밖으로 나갑니다. 역량을 스스로 갉아먹고 있어요.”
‘비정규직 권리보장 입법 쟁취 결의대회’를 열고 있는 민주노총 조합원.

-현장 떠나는 초기활동가-

민주노총의 2004년 9월 자체설문조사에서도 응답자의 33.7%가 ‘민주노총이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다’라고 답변, ‘아니다’라고 응답한 28.7%보다 높게 나타났다. 현장에서는 파업 피로증이 누적돼 가고 있다. 박유기 현대차 노조위원장은 관성화된 총파업을 남발하는 가벼운 의사결정 구조를 탓했다. “정부를 상대로 교섭과 타협이 필요할 때도 있고, 교섭도 조직력을 바탕으로 할 때 울산공장처럼 2시간 만에 라인을 세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조준호 위원장 등 좌파는 성공 가능성이 낮은 총파업만 부르짖고 교섭반대만 내놓고 있어요.

한국노동연구원의 은수미 박사는 “물리력만 힘이 아니다. 대중의 동의를 얻어내는 것도 힘이다”라고 조언한다. “시민사회는 노조를 파업만 일삼는 집단이라고 보고, 사용자측은 협상하는 것보다 파업에 대한 비난여론을 조성하는 게 비용이 덜 든다고 얘기 합니다. 이는 곧 노동운동이 담론싸움에 있어서 사(社)와 정(政)에 밀린다는 뜻입니다.” 그는 “노동운동이 시민사회의 동의를 바탕으로 활동해야 하는데, 87년을 계기로 이 것이 분리됐다”고 지적했다. 복지개혁, 소득불균형 개선 등 국민에게 이익이 될 수 있는 큰 의제의 제시와 실천없이 개별사업장의 소소한 문제에 매달리다 보니, 파업에 대한 국민의 지지를 끌어낼 수가 없게 되어 있다. ‘경제를 망친다’는 반격에 쉽게 노출되는 것이다. 포항건설노조의 경우 하도급·비정규직 문제를 공론화했다. 그러나 곧 ‘1일 2천억원 손실’이라는 사측의 여론몰이가 시작됐고, 곧 기세가 꺾였다.

-조합원도 ‘국민지지 못받아’-

민주노총 산파역할을 했던 김금수 전 노사정위원장은 정책중심의 활동을 제안했다. “주택, 교육, 복지, 연금 등 정책이 바뀌지 않으면 해마다 임금이 오른들 무엇하겠습니까. 총파업을 해도 힘이 없고, 백날 정부와 직접교섭을 요구해도 먹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민주노총은 정책을 다룰 능력이 없다. 지난해 민주노총 정책실에 배정된 예산은 전체 예산액의 1%가 채 안된다. 상근직은 간부를 포함해 8명. 올해 민주노총 사업이 노사관계로드맵, 산업별노조 전환, 한·미 FTA 반대 등 굵직한 것만 10개에 가깝다는 점을 감안하면 숨이 턱에 찬다.

민주노총 정책실의 한 간부는 “비정규직 문제 및 산업공동화는 산업 및 노동시장 구조 등과 연결해서 장기적으로 대안을 마련해야할 주제지만, 최저임금 정책이나 장기투쟁사업장 문제 등 당장 대응해야할 현안과 겹치다 보면 현안대응을 먼저 택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결국 5~10년 단위로 장기적 투자가 필요한 정책은 놓치게 된다는 것이다.

한국노동연구원 은수미 박사의 말이다.

“약한 정책기능을 보완하려면 최소 석·박사급 정책입안자를 영입해서 충분하게 지원·보상해줘야되는데, 월 1백만원 최저임금을 주고 좋은 아이디어를 구하는 것 자체가 무리입니다. 열정갖고 뛰어들어도 2~3년을 못버텨요. 10년차가 넘은 한 상근간부는 ‘내가 무슨 비전있냐’며 ‘연설문 쓰는 심부름꾼’이라고 자조하더군요.”

-“이젠 큰 기대 안합니다”-

또 다른 관계자는 “정책기능이 집행구조 내에 예속돼 있어 집행부가 바뀔 때면 인사가 난다. 정책을 생산하는 능력을 키울 만한 시간이 보장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박유기 현대차 노조위원장은 “노동운동의 큰 그림, 노동자계급 지향 방향, 지배계급의 탄압을 어떻게 뚫고 나갈지 전략제시가 전무하다. 이제 민주노총 지도부에 큰 기대 안한다”면서 “90년 전노협 창립 당시 상급단체에 가졌던 신뢰와 존경이 사라지고 있다”고 밝혔다. 노사정위원회의 한 전문위원은 “민주노총 정책실은 노동과 긴밀히 연계된 경제정책 내용을 설명하면 이해를 못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면서 “바탕도 안되어 있는데 어떻게 정책을 내놓겠냐”고 반문했다. 민주노총 산하 연맹간부 ㄱ씨도 이를 인정했다. “정책없는 지도부에게 대정부 협상력이 있을 수가 없지요. 골프장캐디, 레미콘기사, 학습지교사 등 1백 60만 특수고용노동자의 ‘노동자 지위인정’과 관련해 민주노총은 6년간 정부와 씨름을 벌여왔지만, 최근 나온 정부안은 이들의 ‘노동3권’ 보장을 기약없이 미뤘습니다. 장기투쟁 사업장에서 어렵게 싸우는 해고자와 비정규직의 문제해결에 민주노총이 미칠 영향력도 없어요.”

‘정책없는 집행부’가 조합원들의 신뢰를 얻을 리가 없다. 현대차 조합원 ㅁ씨는 “민주노총 집행부에 장기적인 전망이나 담론이 없다. 이래저래 자꾸 투쟁이니 파업지침은 내려오는데 현장사정은 알고나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대학생 시절이던 90년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민노총의 전신) 출범식부터 민노총에 관여해온 진기영 전국건설엔지니어링 노조 부위원장은 요즘 민노총을 보면 울화가 터진다.

“내가 ‘우리 정규직만 잘 살 수 없다’면서 조합원들을 다독여 2004년부터 비정규직 법안 반대집회에 다섯번 참가했습니다. ‘정치집회’에 나간다는 주변의 따가운 시선과 임금 삭감을 감수했죠. 그런데 지도부 노선에 일관성이 없었어요. 처음엔 정부법안을 저지하겠다더니 대체입법으로 방향을 바꿨고, 국회가 안 열린다면서 집회날짜를 미루더군요. 그래서 결국 남은게 뭡니까. 민주노총 집행부에 대해 조합원들은 배신감을 느낀다고 말합니다.”

-노동자 11%만 노조원-

이렇게 방향을 잃고, 정책기능이 마비되고, 여론의 지지가 약한 상황에서 강력한 조직력은 기대하기 어렵다. 올해 현재 전체 1천5백만 노동자 중 노조가입인구는 양대노총을 합쳐 11% 못미친다. 1989년 18.6%를 정점으로 지속적인 하락세이다. 노동계 대표성의 위기마저 거론된다. 민주노총 집행부의 간부 ㄱ씨는 “요즘 ‘왜 노동운동을 하는가’란 질문에 대답하지 못할 정도로 전망을 상실한 간부들이 많다”고 토로했다.

최근 레디앙이라는 인터넷 언론은 금속연맹과 금속노조 상근자들의 건강종합검진 결과를 보도했다. 30%가 경미, 심각 등 증상은 다르지만 우울증 판정을 받았다는 것이다. 전년보다 심한 것으로 나타났다. 왜 그럴까. 금속노조의 한 관계자는 “노동운동이 재미가 없다”고 말했다. 그는 “신이 나서 운동을 하는게 아니라, 관성적으로 한다”면서 “열심히 싸워도 승리를 이끌어내지 못하고, 노조도 사회적으로 고립되고 있는 현실에 무력감을 느낀다”고 밝혔다.

〈최민영기자 min@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