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의원이 유진오 당수와 원내전략을 협의하고 있다. (7대 의원 시절) 나비넥타이를맨 모습이 퍽 인상적이다.
신한당은 군정종식을 위한 정권교체를 당면 최대목표로 설정하고 전국 각지에서 공화당 정권의 비리를 폭로ㆍ규탄하는 대중집회를 개최하는 등 대여 강경투쟁을 전개하여 민중당과의 차별성을 보였다.
1963년 10ㆍ15 대권경쟁에서 불과 15만여 표 차이로 정권교체에 실패한 야당은 1967년의 대회전을 앞두고도 민중당과 신한당으로 분열되어 노골적인 대립상태를 보이고 있었다. 이러한 야당의 분열상태에 대해 국민의 비판이 거세게 일자 뜻을 같이하는 재야인사들이 모여 통합작업을 벌이게 되었다.
1966년 말, 김도연ㆍ백낙준ㆍ허정ㆍ백남훈ㆍ이범석ㆍ이인ㆍ정택상 등 야권의 원로들은 민중ㆍ신한 양당의 통합을 추진하도록 촉구하고, 해가 바뀐 이듬해 1월 23일 신한당의 윤보선이 4자회담을 제의했다. 4자회담은 민중ㆍ신한 양당에서 대통령후보로 지명된 유진오ㆍ윤보선을 비롯해 한때 민주당 대통령후보의 물망에 올라 있던 백낙준ㆍ이범석이 포함되었다. 4자회담은 형식상으로는 윤보선에 의해 제의되었지만, 장준하와 함석헌 등 재야인사들이 더 이상의 야권분열로 박정희 정권을 지속시켜서는 안 된다는, 막후조정의 역할로써 가능하게 되었다.
4자 회담의 결과 윤보선 대통령후보, 유진오 당수로 합의를 보아 양당의 통합작업이 극적으로 전개되었다. 후보와 당수가 분리되고 실무 9인위원회가 결성되자 통합작업은 정보기관의 공작이나 불순세력이 개입할 여지를 주지 않고 전격적으로 추진되어 단일 야당의 출현을 보게 되었다.
1967년 2월 7일 서울시민회관에서 열린 신민당의 통합선언 및 창당대회는 만장일치로 대통령후보에 윤보선, 당수에 유진오를 선출하여 단결된 야당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날 대회는 박순천ㆍ이범석ㆍ백낙준을 당고문으로 추대했으나, 이ㆍ백 두 사람은 고문직을 사양했다.
통합야당으로 새롭게 출범한 신민당은 1963년의 10.15 선거 때와 같은 군정비판이나 사상논쟁과 같은 막연한 대여공세를 지양하고 참신한 7대 공약과 선거강령을 내걸어 정책정당을 지향했다. 대선공약과 강령의 작성은 김대중이 중심이 되어 마련
양대선거에 대비하여 신민당이 내놓은 7대 공약과 10가지 다짐은 다음과 같다.
7대 공약
① 세금과 물가를 내리는 신민당
② 농어민의 수입을 올리는 신민당
③ 중소기업을 소생시키는 신민당
④ 근로자의 생계를 지키는 신민당
⑤ 정직한 국민을 성공케 하는 신민당
⑥ 독재ㆍ부패를 몰아내는 신민당
⑦ 민족의 자립성을 지키는 신민당
10가지 다짐
① 개헌을 통한 대통령 중심제 폐지
② 국회의 국무위원 불신임권 부활
③ 국무회의의 의결기관화 실현
④ 반공법의 원칙적 폐기 및 중앙정보부의 폐지
⑤ 경찰의 중립화를 위한 공안위원회 설치
⑥ 정당법의 폐지 및 입후보 합동관리를 위한 선거법 개정
⑦ 지방자치제의 조속한 실시
⑧ 통일논의의 자유보장 및 남북간의 인도적 서신교류
⑨ 국토분단국가 회의체 구성
⑩ 국군 월남증파의 반대 및 주월국군의 처우 개선
경제강령
① 특혜재벌에 대한 집중투자의 지양
② 차관도입의 합작투자 실현
③ 2중곡가제 실현 및 비료값 인하
④ 농어민에 대한 조세감면 및 근로소득세의 면세점 인상
⑤ 관영요금 사정위원회 신설
⑥ 시중은행의 주식불하
⑦ 대일예속경제의 타파
야권이 신민당으로 통합하여 대회전을 준비하고 있을 때 공화당도 때를 같이하여 임전태세를 가다듬었다.
공화당은 1967년 2월 2일 장충체육관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대통령후보로 재지명했다. 전국 대의원 2,698명과 7천여 명의 내빈이 참석하여 우리나라 정당사상 최대규모의 전당대회에서 박정희는 영광의 승리를 위해 분발하자면서 후보직을 수락했다.
3월 24일 대통령 선거일이 공고되고 4월 3일 입후보등록이 마감되어 5ㆍ3대통령 선거전의 막이 올랐다. 박정희ㆍ윤보선을 비롯, 오재영(통한당), 김준연(민중당), 전진한(한독당), 이세진(정의당) 등 6명의 후보가 등록을 마쳤다.
공화당은 “틀림없다 공화당! 황소힘이 제일이다”, “박대통령 다시 뽑아 경제건설 계속하자”, “중단하면 후회하고 전진하면 자립한다”는 선거구호를 내걸었고, 신민당은 “빈익빈이 근대화냐 썩은 정치 갈아치자”, “지난농사 망친황소 올봄에는 갈아치자”, “박정해서 못살겠다 윤택하게 살길찾자”는 구호 아래 선거전에 나섰다.
박 후보는 조국근대화를 위해 농공병진정책과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추진을 역설했고, 윤 후보는 정권교체를 제도적으로 보장하기 위해 현재의 대통령 중임제를 폐지할 것을 주장하면서 정부의 경제시책을 수탈정책이라고 비판했다. 유독 이념정당을 표방하고 나선 대중당의 서민호 후보는 농지개혁의 재조정, 독점재벌의 배격 등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김대중은 신민당 정책의장으로서 당의 집권 비전과 정책개발을 주도하는 한편 전국을 돌며 지원연설을 하였다.
김대중은 개인연설회와 합동강연의 유세를 통해 대세를 바꾸기로 결심했다.
그의 강연장에는 시민들이 몰려왔고, 젊은이들의 사인공세가 벌어졌다. 말 잘한다는 입소문이 시민들 사이에 나돌았다. 연설의 몇 대목을 살펴보자.
이번 선거는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이다. 박 대통령은 이 선거 후에 3분의 2 의석을 얻어 헌법을 바꾸고, 3선 대통령이 되려고 구상하고 있다. 그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3선 후에는 이승만 대통령처럼 틀림없이 영구 독재정권이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제 우리나라에는 민주주의 희망이 사라진다. 박 대통령을 비롯한 여당이 김대중을 낙선시키려고 하는 것은 그런 그들의 생각을 실행에 옮기는 데 나의 존재가 커다란 장애가 될 것이라는 예측에서 나온 것이다.
만약 앞으로 부정선거ㆍ부정투표가 행해진다면 나는 목숨을 걸고 그 부정을 저지할 것이며, 이 나라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기꺼이 내 목숨을 걸겠다. 나는 싸우다 죽을지 모르지만, 그 때는 여러분들이 애도의 꽃다발을 바치기 전에 나를 발판으로 민주주의를 이루어 달라. 그것이 나에 대한 진정한 선물이 될 것이다.
나에게는 하나의 소원이 있다. 나는 신라가 국토 통일 이래 1천 5백년 동안 처음으로 이렇게 국토가 갈라져 있는 그대로 둘 수가 없다. 해방 후 국토가 20여 년이나 분단된 이 사실, 나는 통일이 없으면 우리에게 절대로 영원한 자유가 없고, 절대로 영원한 평화가 없고, 절대로 영원한 건설이 없다고 확신하고 있다.
여러분! 나는 내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 내가 목숨을 걸겠다. 내가 싸우다가 죽으면, 내가 싸우다가 내 목숨을 바치면 여러분은 내 시체에 꽃을 던지기 전에 먼저 제2의 최인규를 타도해 주기 바란다. 이 나라에서 부정선거의 뿌리를 뽑는 억센 투쟁을 전개해 주시기 바란다.
그렇지 않고는 나는 결코 눈을 감고 죽을 수가 없다. 나는 이러한 불의, 더러운 이러한 하늘이 무섭지 않은, 이러한 부정선거를 감행한 공화당 정권에 대하여 나는 단언한다. 이 더러운 독재정권은 제2의 4ㆍ19를 만나 이승만 정권의 뒤를 밟고야 말 것이다.
유달산이여! 너에게 넋이 있으면, 심학도여! 너에게 정신이 있으면, 영산강이여! 너에게 혼이 있으면, 목포에서 커가지고, 그리고 이 나라를 위해서 무엇인가 해보겠다는 이 김대중이를 지금 한 나라 정부가 목포의 사람도 아닌 외지의 사람을 보내 가지고 나를 죽이고 나를 잡으려고 하니 유달산과 영산강과 심학도가 넋이 있고 뜻이 있으면 나를 보호해달라는 것을 목포시킨 여러분과 같이 호소하고 싶다. (주석 7)
목포의 선거전은 그야말로 전쟁이었다. 유진오 신민당 총재는 선거지원을 위해 목포를 방문하여 부정 관권선거의 양상을 지켜보고, “목포선거는 선거가 아니고 전쟁”이라고 규탄했다.
그 비장한 연설에 몇몇 청중들이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실제로 목포 선거는 유진오 당수가 말한 것처럼 선거가 아닌 전쟁이었다. 그 격전 속에서 내가 이길 수 있었던 이유는 오로지 내가 목숨을 던져 싸워 목포 시민을 움직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선거 중반전에 목포는 완전히 혁명전야를 방불케 했다. (주석 8)
김대중 진영에서는 유령유권자 3천 7백여 명이 선거인 명부에 불법 기재된 것을 찾아내고 목포시장에게 시정을 요구했다. 그러나 군인 출신으로 노골적으로 여당 편을 든 시장은 이를 시정하려 하지 않았다. 자칫하면 목포에서 3ㆍ15 부정선거 당시 마산에서와 같은 시민봉기가 일어날 조짐이 보였다.
서울에서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이 내려왔다. 그리고 목포 상황을 보고 “만약 이대로 부정을 계속하면 제2의 마산사태가 될 것”이라고 박 대통령에게 보고했다고 한다. 그 보고를 들은 뒤 박 대통령은 “할 수 없다. 철회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래서 겨우 시장의 지시에 의해 유령 유권자가 명부에서 제외될 수 있었다. (주석 9) 유령유권자가 그대로 유지되었다면 김대중은 어김없이 낙선되었을 것이다.
주석
7) 김대중, <분노의 메아리>, 465~476쪽.
8) <김대중자서전(1)>, 208쪽.
9) 앞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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