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엉터리’ 표준품셈에 수십조 좌지우지 입력 2006.09.12. 18:33
"전부 엉터리, 가라(가짜)지. 대한민국에서 (표준)품셈대로 공사하는 데가 어디 있나. 벌써 수십 년 된 이야기야. 출근해서 맨날 하는 일이라곤 컴퓨터 앞에 앉아서 엑셀로 (품셈 기준에) 숫자 맞추는 게 전부야."
8년 동안 설계업체에서 일하고 있는 조모씨의 이야기다. 공공 건설사업의 예정가격을 책정하는 유일한 적산기준인 현행 품셈이 엉터리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연간 50조원 이상의 재원이 투입되는 공공 건설사업의 공사비가 현실과 동떨어진 기준에 따라 책정된다는 사실을 아는 국민은 적다. 하지만 건설업계에서는 이미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상식'에 불과하다.품셈 관리를 책임지고 있는 건교부 역시 품셈에 기반한 현행 원가산정방식이 합리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문제는 건교부가 이런 사실을 알고도 10년 넘게 근본적인 문제해결에 나서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현실과 동떨어진 품셈으로 인해 생기는 폐해는 심각하다. 부풀려진 품셈에 따라 공공 건설사업의 원가산정을 하다 보니 공공건설 사업 과정에서 국민의 혈세가 엄청나게 낭비되고 있다. 후진적인 입찰제도와 복잡한 건설업역 구분, 다단계 하도급 문제 등과 복잡하게 얽혀져 있지만, 부풀려진 품셈이 예산낭비의 출발점인 것만은 분명하다.
정부공사 예정가격의 산정기준, 표준품셈
표준품셈이란 단위 공정별로 대표적인 공종ㆍ공법을 기준으로 삼아 여기에 소요되는 재료량, 노무량 및 기계경비 등을 수치로 제시한 것을 말한다. 정부가 발주하는 모든 공사의 예정가격은 표준품셈을 기초로 한 원가계산 방식에 따라 결정된다.이렇게 결정된 정부의 예정가격은 대형 건설업체가 공공공사에 입찰할 때 기준금액이 된다. 설계변경이나 물가변동으로 인해 계약금액을 조정할 때도 이 예정가격이 기준이 된다.따라서 표준품셈이 시장단가와 동떨어져 부풀려지면 정부공사의 예정가격도 부풀려질 수밖에 없다. 부풀려진 예정가격에 따라 계약금액이 조정되다 보니 건설업체에서 가격을 더 높게 받기 위해 불필요한 설계변경을 하는 경우도 발생한다.
표준품셈, 무엇이 문제인가
현행 표준품셈을 이용한 원가계산방식의 가장 큰 문제점은 급변하는 시장 상황을 즉각 반영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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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셈에 근거한 정부 공사의 원가산정방식과 실제공사비 사이의 괴리를 잘 보여주는 사례가 바로 덤프 운송단가다. [사진=연합뉴스] | |
한국건설기술연구원 이유섭 수석연구원은 "표준품셈은 신기술ㆍ신공법 등 시공기술의 신속한 반영이 곤란하다"며 "이로 인해 건설업체의 기술개발 의지가 약화되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지적한다.
복잡한 산정 방식도 문제다. 표준품셈 제도가 제 기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많은 조사인력을 투입해 공사장에 투입될 재료비와 인력 등의 단가를 일일이 조사해 복잡한 계산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하지만 정부는 건교부 산하 한국건설기술연구원에 3명의 인력이 이 모든 일을 담당하도록 하고 있다. 품셈 유지관리를 위한 예산지원도 미흡한 형편이다. 정부가 품셈 유지관리에 책정한 예산은 2004년과 2005년 각각 4억원씩에 불과했다. 별도의 적산연구기관에 수백명 이상의 인력을 두고 있는 미국 등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규모인 셈이다. 년간 수십조 원의 재원 투입을 좌우하는 품셈 관리가 사실상 방치되고 있는 것이다.
김헌동 경실련 국책사업단장은 "적산센터를 설립해 100여명의 전문가가 제대로 실적단가만 조사해도 수십조원의 국가예산을 아낄 수 있다"며 "수만명의 건설기술자가 맞지도 않는 품셈에 매달려 허송세월하게 만드는 현행 제도를 왜 고치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비판했다.
건교부가 스스로 밝힌 자료에서도 표준품셈은 시장가격을 적절하게 반영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94년부터 97년까지 표준품셈 개정 현황을 보면 전체 1700여개(현재 2000여개) 품셈 항목 중 년간 개정되는 숫자는 50~100개(2~5%) 정도에 그쳤다.
얼마나 부풀려졌나
이런 식으로 시장가격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표준품셈은 정부 예정가격에 거품을 형성한다. 품셈에 근거한 정부 공사의 원가산정방식이 실제공사비와 얼마나 큰 괴리가 있는지에 대해서 미디어다음은 이미 덤프트럭의 운송단가 사례를 들어 살펴본 바 있다.
서울지방국토관리청이 발주한 성남-장호원 구간 2공구 토(흙)공사에서 정부가 정한 품셈에 따라 산정한 운송단가는 실제 시장에서 형성된 가격보다 3배 이상 부풀려져 있었다.현행 품셈이 부풀려졌다는 데에 건설업계 관계자들은 거의 대부분 동의한다. 경실련 등 시민단체는 현행 품셈에 40% 가까이 거품이 끼어 있다고 지적한다.국책사업 현장마다 조금씩 다르겠지만 30일 경실련이 밝힌 국도 건설사업 분석 내용을 보면, 품셈에 따라 책정된 정부 예정가격의 부풀려진 규모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경실련에 따르면 최근 6년간 건교부 산하 지방국토관리청이 수행한 8개 국도 건설현장에서 품셈에 근거한 정부 예정가격은 시장가격보다 2배 가량 부풀려져 있었다. 특히 토공사에서는 2.6배 가량 부풀려진 것으로 확인됐다.지난 20일 조달청이 발표한 자료도 부풀려진 품셈의 규모를 짐작하는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조달청은 "실적공사비와 품셈가격을 비교했을 경우, 조달청 실적공사비는 품셈가격 대비 약 78% 수준"이라고 밝혔다. 표준품셈이 적용된 정부공사 공사비 책정에 적어도 22%의 거품이 있다는 사실을 정부가 인정한 것이다.
실적공사비 적산제도 도입 계속 미루는 건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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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종 건설관련 비리 사건이 터질때마다 건설교통부는 건설업계와 공동으로 '건설분야 투명사회 협약식'을 맺곤 한다. 사진은 지난 4월 29일 협약식 장면 [사진=연합뉴스] | |
품셈 관리를 책임지고 있는 건교부는 경실련 발표 직후 해명자료를 냈다. 건교부는 현행 품셈에 의한 원가계산방식의 문제점을 시인하고 "단계적으로 시장단가를 도입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런 품셈에 의한 원가계산방식을 없애겠다는 건교부의 약속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품셈에 의한 원가계산방식이 본격적으로 제기된 90년대 초반부터 건교부는 시장단가에 의한 실적공사비 적산제도를 도입하겠다고 거듭 약속해 왔다.
87년 독립기념관 화재사고와 92년 행주대교 붕괴사고 등이 잇따르자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표준품셈에 대한 비난 여론이 들끓었다. 이에 건교부는 미국, 영국 등 선진국에서 실시하고 있는 실적공사비 제도를 도입하기로 큰 방향을 정했다.
당시 정부는 62년부터 도입된 일본 방식의 적산기준인 품셈을 없애고, 적산사 제도와 민간 전문적산기관(적산센터) 설립을 추진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품셈에 의한 원가산정방식의 문제점을 인정하고도 정부는 10년 넘게 이 제도를 없애지 않고 있다. 오히려 95년부터는 건설업자들의 이익단체인 대한건설협회에 품셈 관리를 위탁하기까지 했다.
96년에는 국가계약법 시행령을 개정해 실적공사비 단가를 적용할 수 있는 근거를 도입했다. 하지만 97년 IMF 사태가 터지자 정부는 건설업체의 반발과 경기 위축을 이유로 추진을 중단했다.
노무현 정부가 들어선 후에도 실적공사비제도를 도입하겠다는 건교부의 약속은 계속 이행되지 않았다. 2003년 4월 최종찬 당시 건교부 장관은 2004년부터 표준품셈을 폐지하고 실적공사비 적산제도를 도입하겠다고 밝혔지만 아직까지 제대로 이행되지 않고 있다.
31일 건교부는 2009년까지 대부분의 공종을 실적공사비로 전환하겠다며 제도의 전면 시행을 4년 뒤로 미뤘다. 2007년까지는 현재 총 공종의 18%만 적용되고 있는 실적공사비 제도를 50% 수준으로 확대하겠다는 계획도 함께 발표했다. 참여정부 임기 동안에는 전면 시행할 계획이 없음을 재차 밝힌 것이다.
건설선진국 중 품셈에 의한 원가산정방식 유지하는 나라 없어
지난 3월 강동석 당시 건교부 장관은 노무현 대통령에게 업무보고를 하는 자리에서 "현재 우리나라의 건설기술 수준은 선진국의 60~70% 수준에 불과하다"며 "자신도 충격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보고했다.하지만 강 전장관은 표준품셈에 의한 원가계산방식을 채택하고 있는 선진국은 거의 없으며, 표준품셈의 비현실성으로 인해 건설기술 개발에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사실은 보고하지 않았다.이와 같은 내용은 난 99년 건교부에서 작성한 '공공 건설사업 효율화 종합대책'의 보고서에 모두 언급된 사항이다. 당시 건교부는 공공 건설사업의 다양한 문제점을 지적하고 이를 개선할 경우 2002년까지 건설 재원의 약 20%(당시 기준 약 8조원)을 절감하겠다고 목표를 밝혔다.미국 영국 등 거의 모든 건설선진국은 시설공사에 시장단가, 즉 실적공사 적산방식을 사용하고 있다. 이미 실시한 공사의 입찰가격을 기준으로 분기별 또는 연간 실적 데이터를 분석해 이를 기초로 발주 예정가격을 준비하는 방식이다.이 방식대로라면 정부의 발주 예정가격이 실제 시장가격보다 부풀려진 염려도 없고 복잡하게 단가를 일일이 조사하여 복잡한 계산과정을 거칠 필요도 없어진다. 공사실적이 없거나 신공법이 활용될 경우에도 다른 나라의 실적 등을 최대한 활용한다.불가피하게 품셈에 의한 원가계산방식을 적용할 때에도 제한적으로 해당 공종에 대해서만 보완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를 위해 선진국에서는 독립기구로서 적산센터를 설립해 수백명의 인원이 적산자료를 전문적으로 관리하고 있다.김태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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