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물건 보고 돈낸다
| 기사입력 2003-01-29 17:09 | 최종수정 2003-01-29 17:09
아파트란 ‘계약금과 중도금을 미리 내고
3년 동안 기다렸다가 입주하는 것이다’라고 하면 고개를 갸우뚱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당연한 것을 새삼스럽게 왜 물어보느냐는 뜻이다. 아파트를
짓기 전에 분양받아 계약금·중도금부터 먼저 내는 선분양제도는 국민의 의식에 이미 정착돼 있다. 선분양이란 이름만 잘 몰랐을 뿐이다.
조감도만 보고 청약하거나 번듯하게 꾸민 모델하우스 앞에 길게 선 줄은 한국만의 독특한 풍경이다. 집을 만져보기 전에 미리 돈부터
내는 선분양은 다른 나라에서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 그런 선분양제도가 25년 만에 논란에 휩싸이며 존폐의 기로에 섰다.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쪽이 주택공급제도를 후분양제로 바꾸겠다는 방침을 밝히면서부터다. 77년 분양가 규제하며 선분양 허용
후분양은 말 그대로 아파트를 다 지은 뒤에 분양하는 것이다. 그런데 현행 주택건설촉진법과 주택공급규칙에 따르면 주택건설업체는
주택을 사용검사 이전에 공급할 수 있고, 입주자로부터 분양가격의 80%까지 입주금(계약금·중도금)을 순차적으로 선급받을 수 있다. 사실상
선분양을 허용 또는 묵인하고 있는 것이다. 선분양의 폐해는 1995년부터 간간이 제기돼왔다. 먼저, 투기과열을 부추긴 한 원인으로
지목된다. 선분양은 현행 청약통장제도와 맞물려 있다. 집을 돈벌이 수단으로 여긴 부류들은 청약제도를 통해 아파트를 입도선매해왔다. 당연히
분양권에는 거액의 웃돈이 붙어 거래됐고, 입주 때까지 몇 차례나 주인이 바뀌었다. 애초 분양자와 최종 입주자가 같은 집은 눈 씻고 찾아봐야 할
정도다. 선분양에서 비롯되는 이런 투기를 차단해 집값 안정을 도모하겠다는 게 노 당선자쪽 생각이다. 특히 집값 상승기에 신규분양이 집중되면서
이것이 기존주택값 상승까지 부추기는 악순환을 낳고 있다. 한국건설산업연구원 김현아 연구원은 “분양권 전매에서 투기수요가 들어오는 만큼 분양제도
개선으로 투기를 잡는 효과가 있을 것이다. 업체는 지은 물건을 분양해서 털어내는 게 목표이므로 후분양으로 바뀌면 원가절감 노력으로 분양가를 내릴
것이고, 자연히 소비자 편익이 증가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 선분양이 공급자(주택건설업체) 위주라서 소비자들의 피해가 끊이지
않았다. 도중에 부도를 맞아 돈을 떼이기도 하고, 입주 뒤에는 물이 줄줄 새는 하자 때문에 골치를 썩기 일쑤고, 공사지연으로 입주시기가 늦어져도
보상받을 길이 없었다. 주택건설업체가 일방적으로 쏟아내는 홍보물에 의존해 계약한 뒤 건설업체의 양심적 처분만 기다리며 순응하는 구조였다.
선분양으로 이미 돈을 다 받고 팔아치운 주택건설업체로서는 더 많은 돈을 들여 애써 집을 잘 지으려기보다는 웬만하면 비용을 절감하려고 했다.
선진국과 달리 우리나라의 주택 평균수명이 20년밖에 안 되는 건 그 결과다.
그렇다면 그동안 한국에서 선분양이라는 기형적 주택공급형태가
정착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일까. 정부는 1977년 분양가를 규제하면서 그에 따른 주택업체의 채산성 악화에 대한 보상으로 업체에 선분양을
허용했다. 제도권 금융을 거치지 않고 이자 한푼 안 내고 소비자로부터 직접 건설자금을 조달할 수 있도록 특혜를 준 것이다. 여기에는 주택업계
로비도 작용했지만, 국민도 국가도 기업도 돈이 없는 시절이란 특수성이 고려됐다. 성장과정에서 정책자금을 제조업에 우선지원해야 했던 정부가,
자체적으로 건설비용을 감당할 수 없는 주택건설회사에 국민의 돈으로 자금을 조달하는 길을 터준 것이다.
업체쪽 “역효과에
주목하라”
흥미로운 점은 소비자들의 이해도 맞아떨어졌다는 것이다. 소비자의 경우 입주할 때 많은 목돈을 한꺼번에 마련하기
어려운 점도 있었지만 시세차익이라는 ‘당근’이 주어졌다. 분양가 규제에 따른 분양가격과 시장가격의 차이가 그것이다. 분양값 통제가 선분양의
매력을 유지하면서 소비자들을 끌어들인 셈이다. 이런 프리미엄 기대 속에서 소비자들이 품질보다는 건설업체의 브랜드만 보고 분양받은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라면 한 봉지도 물건을 직접 보고 사는데 전 재산이 걸린 아파트를 사면서 모델하우스만 봐야 하고, 이자 한푼 안 받고 건설업체에 돈을
미리 내야 하는 불합리에 대해 소비자들이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은 건 이런 맥락에서다.
선분양이 주택공급 확대에 기여한 것은
맞다. 주택건설업체의 자금동원력이 떨어지고 제도권 금융기관의 주택금융도 취약하기 때문이다. 그만큼 소비자들로부터 조달한 건설자금은 주택공급을
늘리는 원동력이 됐다. 그러나 건설업체는 그동안 선분양제 아래서 가만히 앉아 땅 짚고 헤엄치는 장사를 해왔다. 경실련 도시개혁센터 남은경 간사는
“건설업체가 소비자들로부터 돈을 받아 손쉽게 집지어 장사하면서도 분양원가조차 공개하지 않았는데, 몇배의 폭리를 취하는지도 알 수 없는
형편”이라고 말했다.
업체쪽은 오히려 후분양의 역효과에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대량 공급방식의 선분양에서 후분양으로 가면
사업성이 높은, 이른바 ‘팔릴 물건’만 짓게 되고 시행 초기 2∼3년간 주택공급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해 수급불안을 낳을 수 있다는 것이다.
자금력과 브랜드 파워에서 뒤지는 중소주택업체들이 자금난에 빠지는 건 말할 것도 없고, 계약금·중도금을 못 받아 대형업체들도 자금압박에 시달릴
가능성이 높다. 공사대금 조달을 위한 금융비용이 소비자한테 전가돼 분양가가 되레 올라간다는 지적도 있다.
대한주택건설사업협회
김홍배 전무는 “3년 뒤 입주할 집을 예약해놓고 없는 돈이지만 희망 하나로 아끼고 봉급 타서, 또 모자라면 융자 받아 중도금 내는 식으로 집을
장만해온 게 서민들이다. 재력가가 아니고서 2억원 넘는 목돈을 어떻게 단박에 마련하나 후분양제에서 서민은 영원히 집을 못 산다”고 말했다.
후분양제가 되레 서민들의 내 집 마련 꿈을 빼앗는다는 논리다. 그러나 계약금·중도금 내는 것과 집 장만할 돈을 꼬박꼬박 저축하는 것이 무슨
차이가 있을까. 또한 주택담보대출이 크게 활성화되었는데다, 집값의 20% 정도만 내고 나머지는 장기로 빌릴 수 있는
모기지(mortgage·장기주택금융)가 도입되면 목돈 마련은 어렵지 않다. 계약금·중도금을 금융기관에 저축하므로 이자수익도 생기고, 중간에
대출받을 필요가 없어 이자부담 또한 줄어든다.
“후분양에 정부가 인센티브 줘야”
분명한 것은 분양가
자율화로 분양가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오르면서 선분양제를 떠받쳐온 당근도 바닥나고 있다는 점이다. 뒤틀린 선분양제를 이끌어온 시세차익이란
투기적 수요가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선분양이 분양가 규제 때문에 도입됐는데 1998년부터 분양가 자율화가 이뤄진 것도 선분양제 존립근거를
흔들고 있다. 또 주택보급률이 100%에 이르러 초과수요가 줄어드는 것도 선분양의 퇴조를 낳고 있다. 사실 지금은 후분양으로 가는 과도기다.
미분양 사태에 대비해 중도금을 준공 이후에 납부하는 방식 등 변형된 형태의 선분양제도는 이미 중소업체를 중심으로 몇몇 군데서 선뵈고 있다.
자금력이 떨어지는 중소업체마저 후분양을 실시하는 마당에 대형업체들이 선분양을 고집하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그러나 건설교통부
주택정책과는 “지금도 선분양을 강제하는 게 아니고 공급자와 수요자가 둘 중에 선택하는 것이다. 그동안 소비자들이 선분양에 대해 집단적으로 불만을
제기한 적이 없다. 수도권 중소업체들은 후분양하는데 소비자들이 굳이 서울의 대기업체 모델하우스로 우르르 몰려가고 있지 않느냐”고 했다. 선분양이
꼭 소비자한테 불리하다고만 할 수 없다는 얘기다. 이에 대해 삼성경제연구소 박재룡 연구원은 “후분양은 대세다. 건설업체의 주택금융이 어려우면
공정률에 따라 단계적으로 후분양을 넓힐 수 있다. 정부가 소비자의 선택을 들먹이면서 뒷짐지고 있을 게 아니라 후분양에 적극 개입해야 한다”고
말했다. 건설업체들의 후분양 참여를 높이기 위해 세제·금리 등의 인센티브를 부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건설업체와 금융기관 사이의 프로젝트
파이낸싱(해당업체의 신용보다는 특정한 사업의 수익성을 평가해 금융기관이 자금을 지원하는 것)이 취약한 현실에서 후분양 강행은 쉽지 않다. 그러나
후분양제를 적극 추진하지 않는 한 주택금융도 발전할 수 없다.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